증여 공통장에 대한 범죄화 시도

-윤지오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의 정치적 의미에 대해

그런데 이 증여 공통장(이에 대해서는 http://amelano.net/?p=1318 참조)은 아직은 유령적이다. 그것은 정동적 구호를 동반하면서 화폐로 표현된 공통장(commons)이지만 공통체(commonwealth) 혹은 공동체(community)라고 부르기에는 충분하지 하다. 그것은 상호인정이나 수평적 소통의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 자기재생산의 체계도 갖추지 못했다. 윤지오의 증언에 대해 각 증여자들이 감사, 격려, 연대결의 등을 표명함으로써 공통의 추구를 표현하지만 상호관계의 분명한 형태를 갖추지는 않은 공통장이다. 국가의 기능장애의 시간에 국가 바깥에 일시적으로 형성된 이 공통장은 증언자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그리고 일시적으로 형성된 증여의 공통장으로서 이후에 그 공통장이 어떻게 기능할 것인가는 수증자의 결단과 화폐의 힘에 맡겨지게 된다.

그런데 윤지오는 후원금 증여가 지속되고 있던 다음날인 19일 신한은행 통장을 자신의 의지로 닫는다. 왜 그랬을까? 국가 바깥에 구축된 이 증여 세계, 증여 공통장이 국가(국법)와 맺는 관계가 불명확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국가에서 독립되어 국가의 관여 범위를 벗어나는 자율적 장(場)인가? 아니면 시민사회의 한 장이면서 국가에 의해 통제되는 영역인가? 앞서 살펴 보았듯이 신한은행 통장을 통해 나타난 증여 공통장은 국가가 국민의 공통감각(common sense, 상식)에 맞게 기능하지 못하는 때에 발생한 것으로 공론장도 시장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제3의 장이다. 하지만, 사회를 통합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치를 입증해 나가는 경향이 있는 국가는 이 증여공통장이 자신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사회 속에 형성되었다 하더라도 일단 발생하게 되면 이 장을 자신의 통제 안으로 끌고 오고자 하는 경향을 갖는다. 

이 지점에 주목하도록 윤지오에게 조언을 해준 것은 민변 소속의 한 변호사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원금 수증이 ‘기부금품의 모집과 사용에 관한 법률’과 상충할 수 있으니 관계기관에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조언이었다. 후원금이 증여와 수증의 관계, 즉 증여교환의 관계로서 시민사회의 자율(自律, autonomy)에 속한다면 기부금품법은 이 증여교환 관계에 대해 국가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 가하는 통제장치, 즉 법률(法律, law)에 속한다. 

자율과 법률의 관계가 문제로 되는 이 상황에서 윤지오가 찾아가 만난 그 ‘관계기관’은 서울시 민간협력과였다. 자율과 법률의 중간 지대에서 민간과 공공 양자 간의 협력을 다루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이 때의 면담내용에 대해서는 윤지오와 담당자의 기억이 서로 엇갈린다. 담당자가 기부금품법에 관한 일반적 설명을 윤지오에게 한 점에 대해서는  기억이 일치하지만 개인 후원금이 기부금품법의 적용대상이 되는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서로 기억이 다르다. 담당자는 경호비가 기부금품법의 적용대상이라고 말했다고 기억함에 반해 윤지오는 그 반대로 들었다고 기억한다. 그런데 기억의 이 차이는 단순한 기억의 차이라기보다 기부금품법의 모호함이 반영된 지각과 인식의 차이로 볼 수 있다. 민간협력과 상담 담당자가 3월 19일에 신한은행 통장 후원금이 기부금품법 적용대상이라고 만약 단정적으로 유권해석을 내렸다면 그것은 내가 보기에는 월권이다. 대한민국의 기부금품법은 30여분간의 시간 동에서 후원금의 성격을 파악하고 그것에 대한 법률적 판단이나 유권해석을 즉석에서 내릴 수 있을 만큼 명료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다. 기부금품법 적용대상인가 아닌가를 판단하고 후원자와 피후원자의 행복을 고려한 상담을 해주려면 후원금의 성격, 기부금품법 적용배제대상에 속하는가 않는가에 대한 법리해석, 등록 의무에 대한 판단, 즉각 반환의 기술적 방법 등등에 대한 고려가 있었어야 할 것인데 그러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유보들이 포함된 추상적 상담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모호성은 기부금품법의 전개과정이 자율영역과 법률영역 사이의 투쟁을 반영하면서 그때그때의 상황과 역관계, 정치적 필요 등에 따라 변화해 나왔고 이로 인해 법조항들이 상당한 내적 모순을 품고 있으며 이 때문에 지금도 시민들로부터 상당한 항의를 받고 있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대한민국의 기부금품법은 권위주의적 ‘금지법’에서 시작되었다. 국가가 보증하는 시장의 계약관계 외의 사인 간의 금품수수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려 한 것이다. 이것은 권위주의 시대에 국가가 자신의 통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시민사회의 자율영역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금지 중심의 기부금품법은 국민의 행복추구권를 침해하는 것이었다. 국가가 시민생활에서의 행복을 충분히 보장해 주지 못하는 현실에서 시민들이 자신들의 행복을 스스로 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억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기부금품법의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불만과 항의가 고조되고 이것을 법제에 수용하는 과정에서 금지법은 점차 ‘규제법’으로 발전했다. 이후 국가가 자신의 복지책임을 시민사회에 전가하여 시민사회의 자율적 에너지를 축적에 활용하는 방향, 즉 신자유주의적 축적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현재는 (2017년 7월 26일 개정된) ‘조성법’, 즉 기부문화의 조성을 위한 “기부금품의 모집 및 사용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고 있다. 

이 법률 역시 아직 여러 가지 모호함을 갖고 있어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기부문화의 “금지”나 “규제”보다 “조성”에 초점을 맞춘 점에서 진일보한 법률이다. 현행법에서 기부금품은 “반대급부 없이 취득하는 금전이나 물품”으로 광범위하게 정의된다. 이러한 의미의 기부금품은 “반대급부”가 없는 것으로 가정하기 때문에 증여의 일반적 개념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증여는 시차가 있다하더라도 일반적으로 답례를 반대급부로서 수반하기 때문이다. 증여관계에서 답례는 일반적으로 의무에 속한다. 이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의 기부금품법이 규정하는 기부금품의 정의는 일반적 증여라기보다 증여의 특수한 형태로서 답례를 전제하지 않는 “순수증여”의 개념에 더 가깝다.

기부금품법의 핵심적 취지는 기부금품 일반을 법률로써 관리하려는 것에 있지 않다. “기부금품의 모집과 사용에 관한 법률”이라는 그 이름이 보여주듯 “모집과 사용”을 관리하는 것에 그 핵심적 취지가 있다. 모집되지 않은 “후원금”이나 “기부금품”은 이 법의 적용대상이 아니다. 그 외에도 회비나 헌급 납부처럼 “모집”이라고 보기 어려운 많은 경우들이 이 법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들로서 규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모집”이란 무엇인가? 기부금품의 모집과 사용에 관한 법률 제2조 2항은 “서신, 광고, 그 밖의 방법으로 기부금품의 출연(出捐)을 타인에게 의뢰ㆍ권유 또는 요구하는 행위를 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3항은 “모집자”라는 이름으로 모집 주체를 규정하는데 그것은 “제4조에 따라 기부금품의 모집을 등록한 자”를 지시한다. 그 주체는 다시 모집종사자를 두어 모집행위를 할 수 있는데 다음의 4항이 그것을 규정한다. “‘모집종사자’란 모집자로부터 지시ㆍ의뢰를 받아 기부금품의 모집에 종사하는 자를 말한다.”가 그것이다. 이렇게 모집, 모집자, 모집종사자에 대한 세밀한 법률 규정을 제시한 후 제4조 1항에서 “1천만원 이상의 금액으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금액 이상의 기부금품을 모집하려는 자는 다음의 사항을 적은 모집ㆍ사용계획서를 작성하여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행정안전부장관 또는 특별시장ㆍ광역시장ㆍ도지사ㆍ특별자치도지사에게 등록하여야 한다.”하여 등록할 의무가 있는 모집금액을 따로 규정한다. 1천만원 미만이면 등록하고 모집할 필요가 없지만 1천만원 이상이면 등록 후 모집해야 한다는 것이다. 12조, 13조, 14조는 모집된 기부금품의 사용에 관한 규정으로서 모집목적에 맞는 사용 및 공개 의무 그리고 모집비용에 충당할 수 있는 비율을 규정하고 있다. 16조는 기부금품의 모집과 사용에 대한 규정을 위반한 때에 주어지는 벌칙을 규정하고 있는데 “제4조 제1항에 따른 등록을 하지 아니하였거나, 속임수나 그 밖의 부정한 방법으로 등록을 하고 기부금품을 모집한 자”에게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것이 주요내용이다. 

 이처럼 현행의 기부금품법은 시민사회가 자율적으로 창출하는 순수증여의 문화를 장려하고 국가기관에 등록하여 모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과 아울러 등록된 모집행위에 대해 일정한 혜택을 주고 모집된 기부금품의 공정한 사용을 감독하려는 의지를 표현한다. 그러면 우리가 증여 공통장의 출현이라고 부른 윤지오의 신한은행 통장은 기부금품법과 어떤 상관이 있는 것일까? SBS와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방송사들은 윤지오의 신한은행 통장에 입금된 후원금을 기부금품법의 적용대상으로 보면서 그 후원금 모집이 기부금품법 4조(1천만 원 이상 모집하고자 하는 자의 등록 의무)를 위반했다고 비난했다. 후원금의 증여와 수증이라는 시민사회의 자율적 관계행위를 범죄화하는 보도다. SNS 계정주들의 일부도 이에 동조하면서 신한은행 후원금을 범죄화하는 피드/댓글 행동을 지속했다. 국가에 의한 범죄화 이전에 언론과 SNS에 의해 선제적으로 범죄화 시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증여 공통장을 범죄화하여 국가에 종속시킴으로써 국가로부터 자율적인 영역을 축소하려는 움직임이 시민사회 내에서 시작되는데 이것을 우리는 시민사회의 국가화의 징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들 사이의 자발적 후원이 범죄라면 시민사회에서 자율적 공통장을 구성하고 그것을 공통체나 공동체로 발전시키는 것은 크나큰 위기에 직면할 것이다. 특히 온라인에서 이루어지는 상당히 많은 활동들이 자발적 후원과 기부에 의해 유지되고 재생산된다는 점, 집회와 시위처럼 헌법에 보장된 공통의 정치실천들 역시 그러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자발적 후원, 자발적 증여를 범죄화하는 것은 사회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며 국가의 건강한 존립조차 위협하는 사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행의 ‘기부금품의 모집과 사용에 관한 법률’도 “모집”을 통하지 않은 자발적 기부금품은 법률의 대상에서 제외한다. 즉 “서신, 광고, 그 밖의 방법으로 기부금품의 출연(出捐)을 타인에게 의뢰ㆍ권유 또는 요구하는 행위”를 통해 모집된 기부금품만을 법률의 적용대상으로 삼으며 등록의 의무도 그러한 모집행위를 수반하는 기부에 대해서만 강제되는 것이다.

그런데 윤지오의 신한은행 통장에 대한 후원에 모집행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는가? 앞서 서술한 것처럼 네티즌들이 윤지오의 증언에 공감하고 신변위협을 염려하여 자발적으로 후원통장 개설을 요청했고 이 요청을 망설임 끝에 받아들여 이루어진 것이 신한은행 통장의 후원금이다.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이자 기부금품법 연구자인 이상신 교수에 따르면 모집행위에 의하지 않은 자발적 기부는 기부금품법의 적용대상이 아니다. 이상호 기자가 윤지오의 개인통장을 온라인에 공개한 것을 모집행위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부금품법 2조 2항의 모집행위는 “서신, 광고 등” 각각의 “개인에게 도달 가능한 수단을 활용하는 능동적 행위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온라인을 통한 기부참여는 모집행위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없”다.(이상신, 기부활성화를 위한 법제개선안,https://research.beautifulfund.org/wp-content/uploads/1/cfile5.uf.183639344FC5E71C1F7C08.pdf) 이런 한에서 언론방송과 SNS 계정들이 신한은행을 통해 증언자 윤지오를 후원한 다중의 자율적 증여행동을 국가의 기부금품 법률에 의해 규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기부문화를 조성하고 장려하려는 ‘기부금품의 모집과 사용에 관한 법률’의 입법취지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법률의 오용(誤用)을 선동하여 탈법의 위험을 초래한다.

이제는 주지의 사실이지만, 방송이나 기사 혹은 피드를 통해 법의 오용을 선동하는 것을 넘어서 후원금 수증 그 자체를 사기로 고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박훈 변호사나 최나리 변호사 같은 사람들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후원금 증여자들을 “피기망자”로 규정한다. 다시 말해 후원금 증여자들은 “교묘하고 지능적인 수법”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기망한 윤지오에게 속아 “자신의 행위가 낳을 결과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착오에 빠”진 어리석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박훈은 윤지오의 신한통장에 후원금을 증여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그가 가장 먼저 후원금 증여자들을 ‘피기망자’로 규정하고 나선 것은 놀랍다. 이 때에는 후원금 증여자들 중의 누구도 자신이 속았다고 주장하지 않을 때였다. 누가 그에게 후원금 증여자들을 피기망자, 어리석은 사람, 착오에 빠진 사람으로 비난하고 모욕할 권리를 준 것일까? 누가 혹은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러한 대리주의적 행동에 나서도록 재촉한 것일까? 

누가 봐도 어색하고 불합리한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박훈에게는 후원금 증여자들이 스스로를 피기망자로 자처하고 나서는 것이 필요했다. 박훈에게 자신의 명예훼손 소송 변호를 맡긴 김수민이 그 일을 맡고 나섰다. 그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서 후원금 증여자들로 하여금 후원금 반환청구 소송을 제기하도록 촉구하고 최나리 변호사가 무료변론을 해주므로 변호사비 걱정 말고 반환청구 소송에 함께 해 달라고 후원금 증여자들에게 간절하게 요청했다. 438명의 소송동참자들이 모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던가! 최나리 변호사가 반환소송청구자들을 대리하여 후원금반환소송을 제기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실제로는 반환소송청구자로 변한 후원금 증여자들이 최나리의 소송에 동의서명했다고 하는 것이 더 사실적일 것이다. 438명의 후원금 반환소송 참여자들이 나서 자신들이 피기망자, 착오에 빠진 사람, 어리석은 사람임을 자인한 후에야 박훈의 일방적이고 대리주의적인 고발도 그 수만큼의 사회적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가 남는다. 윤지오에게 후원금을 낸 사람들은 신한은행만 5,745명이다. 국민은행 지상의 빛 계좌의 후원자를 합친다면 훨씬 더 많은 숫자일 것이다. 그 중 438여명이 스스로를 피기망자로 인정했다고 해도 압도적인 숫자의 사람들, 적어도 5천 3백명이 넘는 후원 증여자들이 스스로를 피기망자, 착오에 빠진 사람, 속임을 당한 사람, 사기 피해자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후원금반환소송에 참여한 438명의 사람들에 비할 때 압도적 다수의 사람들이다.  한국의 언론사회는 이 압도적 다수의 생각과 의견을 무시하면서 극소수의 의견에 따라 후원 증여자들 전체를 피기망자, 사기 피해자로 단정하는 폭력적 어조의 방송들, 기사들, 피드들을 여과 없이 내보내고 있다. 이러한 보도폭력이 가져오는 사회적 결과는 증여관계가 불법화되고 증여 공통장이 범죄공간으로 인식되어 증여자가 어리석은 자로 비난받고, 수증자가 범죄자로 지탄되는 것이다. 2019년 10월 30일 윤지오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는 국가의 기능장애의 순간에 진실을 지키기 위해 출현한 다중의 자율적 증여 공통장을 범죄화하려는 시도의 첨점이다. 그것은 증여 공통장이 지키고자 한 진실을 무너뜨리기 위해 언론을 비롯한 준국가기관과 그에 영향 받은 시민사회 일각이 시작한 범죄화 움직임을 경찰, 검찰, 법원 등의 국가기관이 사법적으로 배서(背書)으로써 힘을 실어주고 있는 영화적 장면의 하나이다.

최나리는 소장에서 “피고[윤지오]는 후원을 받음으로써 원고들을 비롯한 여타의 후원자들에게 견딜 수 없는 분노, 수치심 등 정신적 고통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라고 태연하게 쓴다. 그런데 실제로 후원금 반환청구 소송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압도적 다수의 후원금 증여자들을 터무니없이 피기망자, 사기 피해자, 심각한 착오에 빠진 사람으로 규정하여 증여자로서의 이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분노, 수치심 등의 정신적 고통”을 불러일으키며 증여문화를 조성하기보다 상처 입혀 퇴행시키고 있는 것이 바로 최나리 자신임을 누가 모를 수 있겠는가? ‘정의’의 이름을 내걸고 수행되는 이런 반증여문화적이고 반공동체적인 고소고발 행렬의 소음 때문에, 후원금 수증자인 윤지오가 수증자이기 전에 증언을 통해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권력체제를 고발하는 진실 증여자였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혀져 간다. 진실이 혼탁해지면서 가해와 피해의 관계가 모호해지고 심지어 거꾸로 뒤집어져 가는 이 정치적 과정을 지켜보면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아마도 지금 윤지오에 대한 마녀사냥을 뒤에서 부채질하면서 투항하거나 죽거나를 선택하도록 밀어붙일 생각을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이미 지난날 장자연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가부장주의적 가해권력자들일 것이다. 이들은 진실을 가리고 가해자와 피해자를 뒤집음으로써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역전의 과정을 통해 국가권력을 자신의 수중에 사유화할 수 있는 곳으로 한층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정된 총선과 대선이 이들의 이 음울한 목표를 현실화시켜 주권자를 철저하게 자신들의 이익의 희생물로 만들 대의주의의 정치 의식(儀式)으로 되고 말 것인가?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