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사냥의 암구호들 2: “(유)가족을 욕되게 하지 말라”

가족이라는 집단은 흔히 누구도 모욕하거나 경시해서는 안 될 ‘신성한 조직’으로 간주되곤 한다. 부모, 자녀, 혈족은 불가침의 영역이며 그 어떤 가치도 그것 위에 있지 않은 것처럼 묘사되곤 한다. 국가, 교회, 학교, 법원, 매스미디어 등이 이러한 가치관을 확대시키는 주요 기관들이다. 그래서 장자연 사건과 윤지오 논쟁에서도 유가족을 욕되게 하지 말라, 가족을 욕되게 하지말라 등의 가족주의 구호가 사람의 행동을 평가하는 절대적 가치기준인양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윤지오를 비난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만약 가족이 지배적 국가기관들이 말하는 것처럼 신성하고 불가침한 조직이라면 왜 가족의 의미는 사람들마다 다 다르게 느끼는 것일까? 가족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또 사람마다 왜 다 다른 것일까?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이 좋은 삶의 전형임에 반해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이 나쁜 삶의 표상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이 보금자리임에 반해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이 지옥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으로 인해 생명을 보장받음에 반해 어떤 사람은 가족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이 따뜻한 관계를 상징함에 반해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이 참혹한 관계를 대표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이 서로 돕고 공생하는 공동체 조직으로 나타남에 반해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이 어떤 민주적 가치도 지켜지지 않는 최악의 폭력 조직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가족에 대한 한 사회의 지배적 통념과 가족의 현실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합당한 것 같다. 가족에 대한 체험은 성별에 따라, 계급에 따라, 인종에 따라, 연령과 세대에 따라, 장애인인가 아닌가에 따라, 성적 취향, 정치적 지향에 따라 제 각각이며 다양하고 또 이질적이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신성한 공동체 조직으로서의 가족이라는 통념이 우리 사회의 일부 구성원에게 타당하고 또 바람직할런지 몰라도 그것이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타당한 생각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기관들이 가족을 신성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데에는 그만한 체제적이고 물질적인 이유가 있고 또 목적이 있다. 하나는 가족을 통해 여성의 노동을 무임금으로 착취하기 위한 것이다. 여성의 몸은 산업공장이나 사회공장과는 구분되는 신체공장으로서 그 신체가 노동력의 재생산을 주로 담당하도록 분업화되어 있다. 임신, 출산, 양육, 돌봄, 부양의 노동이 그것이다. 이것은 막대한 시간과 정성과 에너지를 요구하는 인류 재생산의 필수적 요소이다. 자본주의는 여성을 노동력 재생산 노동에 특화시키는 성별분업 체계를 구축한 후 이 재생산노동을 마치 자연을 수탈하듯 무상으로 수탈한다. 이 수탈체제를 은폐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이 재생산노동을 신성화, 신비화하는 것이다. 다양한 유형의 국가기관들에 의해 이 재생산노동은 생물학적인 것, 자연적인 것, 신성한 것 등으로, 즉 이성적 사유 너머에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신성하기 때문에 그것에 가격이 붙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노동은 노동이 아니라 헌신과 사랑이라고 묘사된다. 이런 방식으로 국가와 자본은 재생산노동을 비임금노동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가족의 신성화를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첫번째 목표는 거대한 여성노동의 비임금노동화와 그에 대한 수탈이다.

가족의 신성화가 노리는 두 번째 목표는 계급질서의 재생산이다. 그것은 가족을 독점적 상속기관으로 만드는 것에 의해 가능해진다. 자본주의 사회에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라는 두 개의 계급이 있듯이 상속과 관련하여 가족은 두 종류의 가족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상속할 양(+)의 재산을 가진 가족과 그렇지 못한 가족이 있다. 상속할 양(+)의 재산을 가진 가족은 일반적으로 부르주아 가족이다. 프롤레타리아 가족의 경우 그렇게 상속할 만한 의미 있는 재산을 갖지 못하거나 오히려 음(-)의 재산, 즉 채무를 남긴다. 그러므로 상속제가 유의미한 것은 주로 부르주아 가족의 경우다. 부르주아지는 가족 경로를 통해 유산을 상속함으로써 계급체제를 대물림하는 데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재산의 상속이 불가능하다면 부르주아지는 계급질서를 세대마다 재생산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가족을 신성화해야 할 두 번째 이유이다. 가족을 불가침의 신성영역으로 만듦으로써 자본가계급은 자본주의 질서의 재생산에 대한 노동계급과 다중의 도전을 효과적으로 봉쇄할 수 있다.

두 번째 기제는 첫 번째 기제의 성공에 의해 뒷받침된다. 여성을 노동력 재생산에 할당하는 성별분업의 유지와 막대한 무상노동의 수탈이 착취적 계급질서 재생산을 뒷받침해 준다. 전자, 즉 성별분업의 유지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가부장적 지배를 필요로 한다. 성차별주의는 이런 조건 속에서 번성한다. 가부장제 자본주의에서 여성은 그러므로 계급과는 별개의 어떤 범주라기보다 특수한 의미의 계급 개념에 속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차별과 성폭력은 계급적대가 나타나는 특수한 양상들이다. 

장자연의 죽음은 이중적 의미에서 계급적 죽음이다. 장자연이 계약직 노동자였다는 점에서 그것은 비정규직 프롤레타리아트의 죽음이다. 또 장자연이 성서비스 노동과 성폭력의 환경 속에서 죽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여성 프롤레타리아트의 죽음이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힘 없음으로 인한 고통과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음을 기록한 문건과 리스트를 남겼음에도 그것들에 대한 관리와 처분의 권한은 아주 당연한 듯이 ‘(유)가족’에게 귀속된다. 그 문건과 리스트는 한 인간을 둘러싼 사회적 적대의 조건, 그 구조와 메커니즘 및 양상에 관한 기록이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관리와 처분의 독점적 권한이 가족에게 귀속되는 것이 정당한가? 그것이 사회적 정의인가?

지금까지 알려진 정황과 사실들에 따르면 장자연 문건 및 리스트가 관리되고 처분된 과정은 이러하다. 1)2009년 2월 28일 문건 4장이 장자연(과 유장호)에 의해 작성되고 유장호에게 맡겨진 후 다음날(3월 1일) 장자연이 리스트가 포함된 3장의 편지글을 유장호에게 전달한다. 2)장자연이 유장호에게 문건과 리스트의 반환을 요구하던 중 사망한다. 3)유장호가 문건을 공개해야 할 실리적 필요성과 문건/리스트가 가족에 의해 관리되고 처분되어야 한다는 통념 사이에서 고민한다. 4)유장호가 가족과의 협의 없이 문건의 존재와 문건의 일부 내용을 언론에 공개한다. 5)유장호가 윤지오에게 문건/리스트 사본을 보여준 후, 그것을 봉은사 땅 밑에 묻어두었던 원본과 함께 유가족의 결정에 따라 소각한다. 6) 이후 유가족은, 가족 동의 없이 문건을 공개한 것에 대해 유장호와 3명의 기자를 상대로 사자명예훼손혐의로 고소한다. 7)경찰은 사자명예훼손은 술접대의 사실 여부가 가려진 후에만 적용가능하다고 보고 이 혐의는 적용하지 않았지만 유족에 대한 명예훼손혐의는 적용가능하다고 결론내린다. 등등.

이러한 과정은 한국사회에서 가족중심주의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첫째 문건과 리스트의 공개가 무엇보다 유가족의 명예를 훼손하게 된다는 법리적 판단은 한국 사회의 개인들의 행위 공과(功過)가 무엇보다도 가족에 미치는 영향을 중심으로 평가되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둘째 문건/리스트의 공개여부의 권리가 전적으로 가족의 의사에 맡겨져 있음으로써 그것을 공개한 자와 심지어 그것을 보도한 기자까지 고소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것은 가족의 이해관계 판단이 언론자유보다 상위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셋째 유가족의 결정으로 장자연 문건/리스트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소각되는데 이것은 사회적 의미를 갖는 사건의 증거물 인멸의 합법적 권리까지 가족이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실은 장자연의 죽음의 사회적 진실을 알고 국가로 하여금 그러한 사태의 재발을 방지할 제도개혁을 실행하도록 명령할 수 있는 국민-다중들의 기본적 권리와 상충한다. 국민의 이 기본적 권리와 가족의 명예인격권 사이의 상충에서 가족의 명예인격권이 우선함으로써, 장자연의 죽음의 비밀을 풀 수 있는 핵심 단서였던 문건/리스트가 소각되어 사라져 버린 것이 지금까지 이 문제가 사회적 논란으로 남게 된 조건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유가족의 권리에 대한 주장은 여기에서 더 나아간다. 김수민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윤지오가 유가족의 동의 없이 <13번째 증언>을 출판한 것이 부당하다는 논리를 폈다. 이것은 윤지오의 기본권인 사상, 표현, 출판의 자유를 유가족의 동의에 종속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유가족의 권리를 국민의 기본적 권리를 상당히 침해할 정도로까지 확장하는 논리를 선택하는 것이 만약 옳다면 국민들이 장자연 사건의 재조사와 재수사를 국민청원으로 촉구하는 것도 유가족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는 부당한 것이 될 것이며 이 사건을 재조사하는 과거사조사위원회 그 자체도 유가족의 동의 없이는 부당하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실제로 유가족들이 문건/리스트의 소각에서부터 그 문건/리스트 일부의 언론공개를 명예훼손으로 제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 일관되게 장자연 사건의 사회적 공개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해온 것을 고려하면 유가족의 동의를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에서 유가족의 동의가 증언, 조사 등 이 사건에 관련된 모든 활동의 전제라는 주장은 국민들의 기본권리에 대한 침해로 귀착될 것이다.

이런 문제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중심)주의는 윤지오의 출판증언를 비롯한 증언활동을 억압하고 비난하는 강력한 정동적 무기로 사용되었다. 특히 김수민과 그 주변 사람들이 특히 그랬다. 그들은, 윤지오의 증언활동에 반대하면서 힘으로 딸의 의지를 꺾으려한 아버지의 요구를 윤지오가 거스르는 것, 또 증언활동과 <지상의 빛>을 위해 이에 반대하는 아버지와의 관계까지 단절할 것을 고려하는 것을 ‘패륜’이라고 부른다. 패륜이란 윤리에 어그러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윤리’가 여성의 재생산노동을 무상으로 수탈하는 것의 관습적 정당화 기제를 지칭하고 사회적으로 성차별적 자본권력에 의한 성적 서비스 노동의 착취와 성폭력을 일상화하는 관념적 장치라면 어떨까? 그것이 성폭력 질서에 대한 증언을 억압함으로써 가부장질서를 안정되게 재생산하기 위한 윤리라면 어떨까? “가족을 욕되게 하지 말라”면서 윤지오를 ’패륜아’라고 비난할 때, 그 비난은 가부장적 착취체제를 정당화하고 그것에 복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것에 도전하는 사람에게 덧씌우는 억압의 굴레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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