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심 변호사 박준영의 절차주의적 ‘정의’관은 누구를 이롭게 하는가?(1)

영화 <재심>으로 인해 박준영 변호사는 재심 전문변호사라는 명성과 정의로운 변호사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박훈, 김대오, 김수민으로 이어지는 ‘윤지오 검증몰이’가 힘을 얻게 된 것이 박준영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그 검증몰이의 과정에 법률적 도덕적 정당성을 불어넣어 준 한 축으로 작용한 것만 분명하다.  이 사실은 그의 페이스북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다. 

과거사진상조사단의 조사단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던 박준영이 조사단 활동을 끝마친 것은 2019년 3월 8일인데 그가 자신의 조사건이 아닌 장자연 사건에 대해 처음 페이스북에 포스팅을 한 것은 공교롭게도 변호사 박훈이 이상호-윤지오를 적대시하는 포스팅을 올린 바로 다음날인 3월 29일이다. 그 포스팅에는 이후 그가 장자연 사건 재조사를 바라보는 기본 시각이 모두 나타나 있다.

“때론 세간의의혹과기록으로확인되는사실의괴리도 확인했다. 이걸 알거나알수있는위치에있으면서의혹을키우고활용하는 ‘염치없는자기목적성’도 보게 된다. 그 끝이 어디일지 가늠할 수 없어 답답하지만, 사필귀정임을 믿는다. 여성의몸과성이여러형태로이용되고착취당하는현실. 한국사회에서뿌리뽑아야할적폐다. 이런 문제를사건을통해공론화하고해결하는것은큰의미가있다고생각한다. 대통령의 철저한 수사지시도 이런 생각을 담은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대통령이 ‘사건에담긴여러이해관계와문제점’을충분히알고계셨다면그지시를함에있어신중하지않았을까생각도해본다. 대통령이 김의겸 대변인의 이런 투자를 알았다면, 대변인 선임과정에서 좀 더 신중한 판단을 했을 것이다. 윤중천과김학의의잘못, 장자연사건의가해자들을두둔할생각은전혀없다. 반드시 정의롭게 해결되었으면 한다. 단, 사건 속 여러 이해관계를 냉철히 살펴보고 정의로운해결의 ‘절차와방식’을 고민했으면 한다. 어렵지만 목소리를 내는 것이 길게 보면 신뢰를 얻는 길임을 믿는다. 믿고 의지할 곳 없다는 서민들의절망을 가장 우선시했으면 한다.”(3월 29일 페북)

그는 성폭력 체제가 한국 사회의 적폐로 실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것이 공론화되고 해결되는 것이 의미있음에 대해 인정한다. 자신은 가해자를 두둔할 생각이 없다고도 말한다. 이렇게 말로 성폭력 체제의 실재와 그 해결의 의미를 인정하는 립서비스를 한 후 그는 곧장 이 문제의 해결에서 내용적(실질적) 정의보다 그 문제 해결의 절차와 방식의 정의, 즉 형식적(절차적) 정의 쪽으로 관심을 돌린다. 이 논리 전개는 정의는 절차에 있지 실질에 있는 것이 아님을 주장하는 것이거나 적어도 절차적 형식적 정의가 충족되지 않을 때는 내용적 실질적 정의는 달성될 수 없다고 하는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절차적 정의가 재조사에서 충족되고 있는가 없는가를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나는 이것이 실질로부터 절차를 분리시킨 후 절차를 우위에 놓는 형식주의적-절차주의적 사고법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생각을 조금 더 들어보자. 그가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조사단 경험과 연관되어 있다. 그 경험은, 세간의 의혹과 기록으로 확인되는 사실 사이의 괴리를 알거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의혹을 키우고 활동하는 염치없는 자기목적성을 자기가 보았다는 말로 압축될 수 있다. 누군가가 고의로 사실과 괴리되도록 의혹을 부풀리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아래 인용은 이 경험에 대한 좀더 상세한 설명을 제공한다.

“과거사 사건을 조사하면서 그리고 조사를 지켜보면서 사건 속 다양한 이해관계를 봤다. 이익이 되는 사실을 부각하려 애를 쓰고 반면에 모순을 애써 외면하거나 침묵하는 모습도 봤다. 이런 모습은 사건 관계자, 언론, 공권력, 사건 속 연대 세력, 정치권 모두에게 공통되는 문제였다. 부끄럽지만, 관여하고 있는 재심사건 3건이 조사대상인 나도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은 자기목적적 존재라 하지 않았던가. 그 목적성이 치열하게 대립하는 건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하지만, 염치가 없을 때는 문제가 심각해진다.”(3월 29일 페북)

재조사 사건에서 사건 관계자, 언론, 공권력, 사건 속 연대 세력, 정치권, 그리고 자기자신도 그 사건을 두고 이해관계 투쟁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염치가 없을 때는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얼핏 보면 진솔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질적 정의를 형식적 정의로 환원한 것과 연결되는 중요한 문제점을 갖고 있다. 하나의 사건 속에 여러 세력들의 전략(이것이 ‘자기목적성’의 의미이다. 이 전략들은 ‘음모’라고 표현되어어 무방할 것이다.)이 교차하고 그것들 사이에 투쟁이 벌어진다는 생각은 옳다. 하지만 그 투쟁을 다양한 ‘이해관계’들의 투쟁으로 이해할 때 그 투쟁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에 중대한 왜곡이 발생한다. 이것은 투쟁 당사자들 사이의 절대적 대칭과 등질성을 부당 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자연의 죽음을 성폭력 체제에 대항하는 절규로서 이해할 때, 가해자와 피해자, 가해의 진실을 밝히려는 자와 그것을 은폐하려는 자 사이의 투쟁은 결코 대칭적이거나 등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해관계 투쟁으로 결코 환원할 수 없는 고유한 정치적 질과 방향을 갖는다. 박준영은 이 정치적 질을 무시함으로써 다양한 관계 당사자들 사이의 투쟁을 이해관계 투쟁으로 환원하며 이 틀 속에서 ‘문제는 염치다’라고 주장한다. 염치는 지나치지 않도록 행동하기 위해 필요한 체면 감정이며 그것은 경쟁의관계에있는 권력자들 사이 혹은 자본가들 사이, 혹은 노동자들 사이의 이해관계들을 적당하게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이다. 하지만 성차별 인종차별 계급차별 등 적대의 관계는 이해관계의 양적 차이가 아니며 그 관계 자체의 해체 없이는 해결 불가능한 비조정의 관계이다. 박준영이 이 ‘지나치지 않음’을 자신의 조사윤리로 삼는 것은 앞에서 실질보다 절차를 우위에 놓는 정의관과 마찬가지로 적대관계까지 경쟁관계로 환원하고 경쟁관계를 우위에 놓는 관점과 상통한다. 이런 식으로 그는 모든 사건 속에서 다양한 그러나 등질적인 이해관계들이 경합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즉 그 투쟁의 질, 목적의 이질성을 이해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 이해관계들 사이의 양적 분배적 적당함(염치있음)을 추구하고 그 분배적 적당함은 절차적 정의에 의해 보장될 수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조사윤리와 정의관에 따라 그는 3월 18일 대통령 문재인이 “공소시효가 끝난 일은 그대로 사실 여부를 가리고, 공소시효가 남은 범죄 행위가 있다면 반드시 엄정한 사법처리를 해 주기 바란다”고 한 것에 관해 사건에담긴여러이해관계와문제점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부적절하게 내린 지시로 규정한다. 그런데 위의 지시는 과거사조사위원회의 설치 목적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 것에 불과한 것이지 않은가? 그런데 박준영은 이 지시가 절차적 정의를 어기고 조사를 염치없도록(이해관계 세력들 사이의 관계를 불평등하게) 만드는 어떤 계기를 제공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그것이 특정 세력에게 부당하게 힘을 실어주어 의혹이 사실과 더 괴리되도록 만드는 계기로 된다는 비판이다.

그로부터 약 열흘 뒤인 4월 9일 박준영은 4월 8일 노컷뉴스 기사, “윤지오 “뉴시스 기자님 오셨나요?”…법적대응 예고”(김형준.김광일 기자)를 올리면서 <이건 아닌 것 같아요>라는 제목 하에 한줄로 “윤지오 씨를 비판하면 ‘악’인건가요? 우리 좀 더 냉정합시다.”라면서, 의문문과 청유문 속에 꽤 단호한 비판과 명령을 표현한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반응은 무엇에 대한 것일까? 이 기사는 뉴시스 최지윤의 취재수첩에 법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윤지오의 대응 외에 민주당 안민석, 바른미래당 김수민, 민주평화당 최경환, 정의당 추혜선 등이 ‘윤지오와 함께 하는 의원모임’을 만들어 윤지오를 지원하기로 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서 박준영이 뉴시스 4월 7일자 기사를 (읽어보았는지 않았는지 알 수 없지만) 윤지오에 대한 ‘비판’으로 본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그 기사의 내용을 “뉴시스와 김수민”(http://amelano.net/?p=399)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한 바 있다.  

1)윤지오는 장자연과 친하지 않았다 2)윤지오는 고비용의 과도한 경찰보호를 받으며 생활중이다 3)윤지오는 옛날부터 유명해지는 것이 꿈이었는데 이제 장자연을 이용하여 팔로워 76만명이 넘는 SNS 스타가 됐다 4)윤지오는 장자연을 이용하여 후원계좌를 열어 돈을 벌고 있다 5)윤지오는 거짓 증언을 했으며 그의 진술은 신빙성이 없다. 

이것이 과연 윤지오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은 사실근거에 의해 확인되지 않은 정보들을 윤지오 마녀화의 프레임 속에서 버무린 것으로 언론을 빙자한 인신공격에 다름 아닌 것으로 읽힌다. 나는 이 보도가 이후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사용될 윤지오 마녀사냥의 기본 프레임을 제공한 것으로 본다. 윤지오는 뉴시스 기자를 악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기사이므로 정정보도를 하라고 요청한 것이다. 이 기사는 결국 뉴시스가 자체판단에 따라 삭제했다. 이것은 스스로 이 기사가 윤지오에 대한 온당한 비판이 아니라 기사가치를 갖지 않는 불법적인 것임에 대한 승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전개는 타인들(아마도 그 자리에 참석한 국회의원들이 주요 대상일 것이다)에게 냉정을 요구하는 박준영 자신이 실제로는 냉정을 잃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고 생각한다. 그의 용어로 표현하면 그것은 그의 자기목적성이 과도하여 염치를 잃고 자기 이해관계를 내세운 경우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용어로 보면 그것은 뉴시스가 행한 성차별적인 인격권 침해와 인격 모독이라는 뉴시스 보도행위의 고유한 질(質)[성폭력 체제의 재생산]을 그가 인지할 능력(혹은 의사)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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