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심변호사 박준영의 절차주의적 ‘정의’관은 누구를 이롭게 하는가?(2)

4월 16일 박준영은 <검증>이라는 제하에 “객관적이고 공정한 사실에 근거”할 것을 주문한다. 하지만 일견 타당해 보이는 그의 이 주장은 이미 빛을 잃고 있다. 윤지오 진술의 신빙성에 대한 검증 요구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그가 뉴시스 보도의 진실성에 대한 검증도 동시에 요구했어야 한다. 그는 윤지오 진술에 대한 검증이 더 “엄격하게”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를 그것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크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과연 뉴시스 보도의 진실성에 대한 검증을 그가 외면한 것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있는가? 4월 초의 시점은 윤지오의 진술을 둘러싸고 격렬한 사회적 투쟁이 전개되는 시기로 그의 진술의 신빙성을 주장하는 세력과 그것을 부인하는 세력 사이에 화해불가능할 정도의 논쟁이 전개된 시점이다. 뉴시스 기사는 후자를 대표하고 선도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은 박준영이 (자신이 의식했던 못했건 간에) 뉴시스를 옹호하면서 그것을 검증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윤지오를 검증대에 올리려는 자기목적성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사실에 근거”한 주장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의 정체를 알기 위해 그의 이야기를 조금 더 따라가보자. 그는 윤지오 진술에 대한 검증이 필요한데, 그 검증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한탄한다. 그는 “이 검증은 도대체 누가 하고 있나요. 이런 분위기에서는 할 수 있는 검증 그리고 검증의 결과 발표도 한계가 있는 겁니다.”라고 쓴다. 당연히 주권자 국민들은 과거사조사위원회와 진상조사단에 진술들에 대한 조사와 검증의 임무를 맡겼다. 그러므로 그 단위에서 증거와 증언에 대한 검증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 최종 결과가 국민에게 보고되어야 한다. 그 보고가 국민을 만족시킬 수 없을 때에 국민은 다시 조사를 명할 권리가 있다. 그런데 박준영은 조사팀을 나온 후 조사위원회와 진상조사단 내부에서 진술들에 대한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일종의 내부고발을 페이스북을 통해 쏟아내고 있다.

“형제복지원 사건, 피디수첩 사건, kbs 정연주 사장 사건 조사를 마친 후 재배당된 김학의 사건 조사를 맡아 사건기록을 봤습니다. 조사팀을 나올 때까지 기록을 꼼꼼히 보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제 게으름을 탓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건의 실체에 대중이나 언론보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장자연 사건 등 다른 사건을 조사하는 단원들과도 고민과 고충을 나누면서 주워들은 얘기가 있습니다. 이걸 풍문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내부고발의 정보 출처는, 장자연 사건에 있어서는, “사건을 조사하는 단원들과도 고민과 고충을 나누면서 주워들은 얘기”정도이다. 박준영은 자신의 개인적 조사체험에 대해 과도한 가치부여를 하면서 “사건의 실체에 대중이나 언론보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는 식의 권위주의적이고 오만한 태도를 주저없이 내세운다. 주권자인 국민 “대중”은 그에게 조사를 잘 하라고 명령한 것이지 그 조사 경험을 근거로 “사건 실체에 국민 대중보다 더 가까이 다가갔다”는 식의 오만을 부리는데 사용하도록 허락한 바가 없다.

실제로 조사원들이 세부 정보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국민들보더 더 많이 알게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사건의 실체에 그 조사원이 국민대중보다 더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조사원의 경우는 가령 수백년동안 조사해서 정보를 산 더미처럼 뇌에 집어 넣는다고 하더라도 사건의 실체에 단 한 발도 더 다가갈 수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특히 장자연 사건처럼 남성 가해자들에 의한 성폭력이 쟁점인 사건에서 남성 조사원이 “자기를 버리는 혁명”(여성되기 혁명) 없이 그 사건의 국민대중보다 실체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고 믿는 것 자체가 오만이요 환상이다. 게다가 박준영이 입수한 정보는 다른 조사원들로부터 “주워들은” 이야기인데 그것으로 내부고발을 해도 무방할 정도로 과거사진상조사단이 형편 없는 조직인가? 박준영이 자신이 “주워들은 이야기”가 “풍문”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이 조사원의 신분이나 지위와 같은 권위에 의해 뒷받침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반드시 “객관적이고 공정한 사실”과 “실체적 진실”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과연 박준영은 자신이 “주워들은 이야기”가 “객관적이고 공정한 사실”과 “실체적 진실”에 의해 뒷받침되는지 “검증”을 거쳤을까? 자신의 생각에 대한 “검증”은 뒤로 한 채, 박준영은 이렇게 계속 말한다.

“윤지오 씨가, 장자연 씨가 술이 아닌 다른 약물에 취한 채 강요를 당했을 가능성을 제기한 것으로 아는데, 이 진술이 언제 비로소 나왔는지 그리고 어떤 경위로 나왔는지, 이 진술을 뒷받침할 정황이 존재하는지를 따지지 않고 특수강간죄를 논하고 공소시효 연장 등 특례조항 신설을 이야기하는 건 나가도 너무 나간 주장입니다.”

이 진술을 뒷받침할 정황은 진상조사단 활동 전인 10년전 사건 조서에서 이미 명백히 나타난다. 장자연 소속사였던 더콘텐츠의 대표 김종승은 장자연 사망 당시 마약복용 혐의로 일본 도주 중이었다. (나는 이것이 김종승이 마약혐의로 해외도피한 첫 번째 사례가 아닌 것으로 어디선가 읽은 바 있는데 확인은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당시 장자연의 지인 언니인 이모씨의 진술 중에는 김종승이 “약 니동생이랑 같이 했다”는 내용의 문자를 보내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장자연이 ‘떳떳함’을 주장하므로 이 진술을 ‘객관적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버닝썬 사건에서 드러나듯이 여성 피해자들의 상당 수가 자신이 마신 음료에 (남성 가해자들이 몰래 탄) 마약이 들어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을 감안하면 이 진술이 객관적 사실일 ‘정황’은 실재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게다가 장자연이 약물에 취해 성폭행 당했을 가능성은 윤지오 외의 다른 진술자들의 교차증언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다음은 KBS 김경래의 최강시사에서 진상조사단 총괄단장 김영희의 발언이다.

“▷ 김경래 : 그런데 그런 평가들도 있어요. 과거사진상위원회에서 낸 자료에서도 나오는데 윤지오 씨의 진술이지 않습니까, 구체적으로는? 특수강간 의혹과 관련해서는. 그 부분의 진술의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김영희 : 윤지오 씨 진술뿐만 아니라 윤지오 씨는 정확하게는 약을 탄 술을 마신 것 같다는 얘기를 한 거고요. 그리고 아마 자기가 없을 때 성폭행을 당하지 않았겠나하는 추측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윤지오 씨 진술은 오히려 추측성이라고 한다면 본인이 본 것은 사실관계에 관한 것은 “약을 탄 술을 마신 것 같다. 왜냐하면 눈이 풀려 있었고.” 이런 진술인데 오히려 윤지오 씨가 아니라 당시 매니저였던 윤모 씨가 저희 조사단에게 처음 했던 진술은 장자연 씨가 쓴 문건에 성폭행을 심하게 당했다는 내용도 썼었다는 겁니다. 

▷ 김경래 : 지금까지 남아 있지 않은 문건에요. 

▶ 김영희 : 그렇죠. 처음에 썼던 문건에 그런 내용이 있었다고 진술을 했고. 물론 이것을 나중에 윤모 씨가 진술을 번복했으나 처음에 했던 진술은 어쨌든 성폭행을 심하게 당했다는 내용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장자연 씨가 문건에 남겼다는 진술이 있었고요. 그리고 또 하나는 또 다른 A씨가 뭐라고 얘기했느냐면 당시 장자연 씨 문건에 술에 약을 탔다는 내용도 있었다고 문건을 봤던 이모 씨가 그런 내용을 불러줬다는 진술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윤지오 씨 진술은 자기는 약을 탄 술을 마신 것 같다는 것을 봤다는 진술인 반면에 윤모 씨 진술은 성폭행을 당했다고 장자연 씨가 문건에 썼었다는 거고 굉장히 중요한 진술이죠. 그리고 또 하나는 또 장자연 씨 문건에 술에 약을 탔었다는 내용이 있었다는 또 다른 2명의 진술이 있었기 때문에 이 진술을 저희 조사단으로서는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중요한 진술이고 저희 조사단은 굉장히 한계가 많기 때문에 이 부분과 관련해서 추가적으로 수사를 해야 되지 않느냐? 수사기관이 판단해서 이 부분은 강제수사권이 있는 수사기관에 기록을 넘겨서 봐달라는 그런 취지였습니다.” 

그러므로 특수강간 의혹은 냉정을 잃은 사람들의 몰염치한 소행에 의해 부채질된 것이 아니라 비록 진술들이지만 ‘객관적이고 공정한 사실’ 진술들에 의해 뒷받침되는 의혹인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박준영이 이제 막 진술증거들을 확보중인 상태에서 “진술이 언제 비로소 나왔는지 그리고 어떤 경위로 나왔는지”를 살피자면서 초점 흐리기와 논점 전환을 시도하는 강한 “자기 목적성”을 몰”염치”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태도는 어떤 문건의 객관적 내용이 자신들에게 가져올 위험성을 문건 유출 경로의 불법성을 가지고 덮어버리곤 했던(예컨대 정윤회 문건 사건) 공작정치의 테크놀로지를 방불케 한다.

나는 이것이 여성이 겪었을 수 있는 성폭력에 대한 실감을 결여한 상태에서, 특수강간 혐의로 그것의 가능성을 수사하게 해야겠다는 진상조사단 일부와 윤지오의 실질적인 ‘자기목적성’의 절실함을 그 진술의 발생 시점, 발생 경로 등을 밝혀야 한다는 절차적 정당성에 관한 박준영 고유의 ‘자기목적성’으로 덮어버리는 남성중심적 보수주의의 발로라고 생각한다.  박준영의 이러한 사고경향은 이제 뉴시스 보도에 대한 다음과 같은 동조로 나타난다.

“무조건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가, 숙소를 마련해주고 경호팀을 붙여주는 등의 국가 예산 지출로 이어졌습니다. 도대체 윤지오 씨가 주장하는 ‘가해의 실체’는 있는 것인지 의문입니다.”

가해의 실체가 의문시되는 상황에서 숙소를 마련해 주고 경호팀을 붙여주는 국가예산지출은 냉정을 잃은 불공정한 처사라는 비판이다. 증언자로서의 윤지오가 느끼는 가해위협은 자신의 증언행위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법 위의 사람들’(권력자들)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장자연에 대한 가해혐의자로 지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누구나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분석적 검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박준영은 윤지오에 대한 보호를 요구하는 ‘가해의 실체’가 과연 있는지 물음으로써 윤지오가 장자연의 죽음을 이용해 거짓말로 사적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는 뉴시스발 의혹들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것이 정의로움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변호사의 동조이고 정당화였기 때문에 그것의 힘은 강력한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가해의 실체’에 대한 박준영의 의심이 심각한 자기모순임을 보여주는 한 대목을 발견한다. 그것은 4월 21일에 올린 <새끼들>이라는 글이다.

“자식들 사진입니다. 약촌오거리 사건 재심을 준비할 때 다음 스토리 펀딩으로 진범을 공개하면서 sns에 있는 아이들 사진을 내렸습니다. 이번에 프로필 사진을 바꾸면서 아이들 앞모습 사진을 올리지 못하는 이유는, 재심 사건을 진행하면서 맺게 되는 악연에 대한 부담 때문입니다. 약촌오거리 사건의 진범의 개명과 개명한 이름은 한동안 제게 현실적인 두려움이었습니다. 외모와 달리 겁이 많은 박상규 기자는 몽둥이를 옆에 두고 잠을 잤습니다.”(4월 21일 페이스북, 강조는 인용자)

그는 “재심 사건을 진행하면서 맺게 되는 악연에 대한 부담” 때문에 프로필 사진에 아이들 앞모습 사진을 못올리고 뒷모습을 올리거나 혹은 아이들 사진을 내리기도 한다. 그 악연의 부담은 그가 말하듯이 “현실적인 두려움”이다. 이 부담과 두려움을 이해하는 데 분석과 증거가 필요한가? 그것은 생명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생명체험에 비추어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부담이며 두려움이고 사진을 내리거나 뒷모습만을 올리는 것은 누가 봐도 합리적으로 이해되는 조치이다. 그런데 왜 그는 그 자신과 마찬가지로 윤지오도 증언에서 맺게 될 악연에 대한 그부담을 가질 수 있고  그것을 “현실적 두려움”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윤지오가 느끼는 위협의 “실체”라는 것을 감각하지 못하는 것일까? 왜 그는 여성, 타자, 약자(‘힘 없는 신인배우’)에 대해 이토록 둔감한 것인가? 윤지오가 증언을 통해 악연을 맺게 될 그 법 위의 사람들을 재심을 통해 악연을 맺게 될 약촌오거리 사건의 그 진범보다 왜 덜 위협적인 것으로, 위협의 실체가 없는 사람들로 생각하는 것일까? 이것은 윤지오가 실제적 두려움으로 경험하는 그 ‘법 위의 남자들’에 대해 박준영 자신은 친화감과 믿음(그러니까 ‘한 패 의식’)을 갖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빼놓고는 이 둔감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이 불가능하다.

박준영은 자신이 “법의 불평등” 때문에 서러움을 느끼는 사람들, 이른바 “서민”의 대변인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자의식을 갖고 있다. 그런데 장자연 사건과 김학의 사건에 대한 자신의 주장들이 ”사건의 본질을 흐릴 수 있고, 가해자들의 책임을 면하거나 경감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바로 그 서러운 사람들(특히 여성들이다)의 실제적 “우려”(그는 자신의 글에 대한 ‘댓글들’에서 이 ‘우려’를 읽는다)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는 댓글자들에게 앞으로 자신이 쓸 글들을 보면 이 갈등이 해소될 것이라고 계속 말한다. 어떻게 해소된다는 것일까? 그의 행보는 ‘서러운 사람들의 실제적 우려’를 외면하고 ’나는 서민들을 위한다’는 자의식에 기대, 가해자에 대한 조사와 수사는 법 절차에 맞아야 한다는 절차주의적 정의를 밀고 나가는 쪽을 향한다. 그는 “저는 서럽다는 분들을 대변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지 이유 없이 강자 쪽에 서고 싶지 않습니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습니다.”라고 주장하지만 소용 없는 일이다. 실질로부터 절차를 분리시키고 절차적 정의를 앞세울 때, 그것이 절차에 대한 온갖 통제권력(수사외압, 통화기록 삭제와 임의편집, 녹취록 빼돌리기, 조사않기, 등등)을 가진 그 “강자”를 바로 “지금” 이롭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그는 외면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쌓아온 정의의 이미지 모두를 한 순간에 상실하는 순간이라는 점도 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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