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심변호사 박준영의 절차주의적 ‘정의’관은 누구를 이롭게 하는가?(3)

우리는 4월 16일 김수민이 윤지오를 폭로하는 긴 글을 공개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약 일주일 뒤인 4월 23일에 박준영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모두 냉정하게 윤지오 씨의 말과 행동을 검증합시다. 검증으로 밝혀지는 사실이 있으면, 있는 그대로 공개합시다. 사건이 정리되면, 우리가 이런 상황까지 온 과정과 이유를 분석해 봅시다. 이 사건이 우리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앞서 그는 윤지오의 “증언”에 대해 검증할 필요가 있다는 말로 그에 대한 의혹제기를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이 말 자체가 자신이 조사를 맡지 않은 건에 대해서는 주제 넘는 말이다. 왜냐하면 진상조사단이 바보들이 아닌 한에서 모든 증언들을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사실과 혼동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검증이 조사의 필수적 구성요소인 한에서, 오히려 박준영 자신이 윤지오를 검증해야 한다는 자기목적성을 과잉으로 드러내고 있으며 그 자기목적성은 윤지오에 대한 그의 원초적 불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4월 23일에 와서 바뀌고 있는 것은 박준영이 윤지오의 “증언”이 아니라 그의 “말과 행동”을 검증하자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것은 증언 검증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고 인격 검증을 하자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 그가 장자연 사건에 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가 아니라 그가 그 증언 밖에서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는지를 검증하자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가 요청한 증언 밖에서 윤지오가 무슨 말과 행동을 하는가는 헌법에 규정된 그의 기본권에 속하는 문제다. 그리고 법의 테두리 속에서 누구든지 말과 행동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박준영은 법 전문가의 말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검증선동에 나선다. “우리 모두 냉정하게 윤지오 씨의 말과 행동을 검증합시다.”라는 말이 그것이다. 그는 검증의 주체로 진상조사단도 검경도 아닌 “우리 모두”를 끌어들인다. “우리 모두”가 경찰이나 검찰과 법원 같은 국민 대의기구들을 통하지 말고 직접 검증하고, 그 “검증으로 밝혀지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공개합시다”라고 그의 제안한다. 이것이 여러 차례 반복해서 그가 강조해온 “책임”이라는 말에 값하는 방식인가?

왜 박준영은 아니고, 또 김수민, 박훈, 김대오는 아니고 윤지오만 검증대에 올라야 하는가? 또 윤지오를 검증할 검증력이 어디서 나올 것인가? 무슨 수단으로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 그가 검증을 거부할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 검증의 결과가 허구가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을 누가 무엇으로 보장할 것인가? 객관적이고 공정한 사실로 확인되지 않은 검증 결과의 공개가 미칠 악영향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모든 의문을 제쳐둔 채 박준영은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라고 목적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그의 제안에 따라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윤지오 검증행동은 거의 한 가지도 사실로 확인되지 않은 채 5월 말 현재 “윤지오는는 성매매업소에 다닌 매춘부였다”는 식으로 확인되지 않은 정보의 “있는 그대로의 공개”, 즉 성폭력적 테러행동으로 치닫고 있다. 검증몰이가 도달한 이 집단광기적 상황과 그 효과에 대해 나는 박준영이 책임을 나눠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4월 23일의 페이스북 메시지가 실제로는 역사에서 가부장주의 성폭력 체제가 반복적으로 행해온 바의 “마녀사냥” 선동과 거의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박준영은 자신의 선동이 미칠 결과를 이미 어느 정도 의식한 듯 다음과 같은 주의사항에 대해 미리 말한다.

“분명히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윤지오 씨의 진술로 전 조선일보 기자가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 진술의 가치가 지금 벌어지는 일들로 인한 영향을 조금이라도 덜 받았으면 합니다. 그 당시는 이런 다양한 이해관계가 없었다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법원이 냉철하게 판단해주리라 믿습니다.”

요컨대 자신의 검증 선동이 전 조선일보 기자 조희천 재판에 미칠 영향을 축소하자는 것이다. 왜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그 당시는 이런 다양한 이해관계가 없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모호한 답이다. 이 표현을 해석해 보면 조희천이 기소된 2018년 6월에는 윤지오의 진술이 다양한 이해관계들에 의해 오염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오염되었다고 본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단계구분은 현실을 충실히 반영하는 말이 아니다. 최근 발표된 과거사진상조사단의 조사는, 장자연 사건이 박준영이 말하는 “다양한 이해관계들”에 의해 오염되지 않았던 순간이 단 한 순간도 없었음을 보여준다. 소속사들은 소속사대로, 조선일보는 조선일보대로, 경찰과 검찰은 또 자신의 필요와 외부 압력의 정도에 따라, 다른 언론사는 또 언론사의 필요에 따라, (그리고 아마도 국정원은 국정원 대로) 자기 나름의 자기목적성, 전략, 음모, 기획에 따라 이용하고 관리했다. 그리고 그 이해관계들의 상충과 어우러짐이 그때그때의 결과들(크게 보면 힘없고 돈 없는 사람들은 유죄,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은 무혐의)을 낳아 왔다. 진실규명을 원하는 사람들의 세력이 너무나 약했기 때문에 장자연 사건은 진실을 덮고자 하는 사람들의 수중에서 편의대로 처분되고 관리되어 왔다. 2016년 촛불혁명과 더불어 세력관계가 바뀌어 촛불과 미투의 힘이 강화된 것이 현재와 지난 10년과의 차이일 뿐이다. 그리고 행정 국회 법조 내 각 정파와 재계, 언론계 제 세력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상황을 이끌고 가려는 본질적 경향은 변함이 없고 촛불세력과의 관계에서 그 세력판도가 달라져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박준영의 선동(“검증합시다”!)의 파급효과는 그가 멈추고자 하는 선을 훨씬 멀리까지 넘쳐 흘러갈 것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박준영이 이 선동을 통해 경계하고 제어하고 약화시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여론”, “세간의 의혹”, “국민적 의혹”이다. 이것들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지만 그 중 박준영이 가장 위험한 것으로 경계하는 것은 촛불과 미투운동이 불러일으킨 “여론”이다(물론 그는 이것을 아래로부터의 촛불의 영향으로 보지 않고 특정한 ‘이해관계’를 가진 세력의 영향으로 일면적으로만 이해한다). 촛불과 미투 이전에 장자연 사건은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로 자리매김되어 있었고 이러한 정리를 뒤흔들 수 있는 요소들은 증거 없는 “의혹”으로 치부되었다. 촛불과 미투는 이 “의혹”들을 “여론”으로 만들고 장자연을 죽게 만든 가해자, 가해집단, 가해체제의 해체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왔다. 의혹이 커지고 재조사와 재수사의 여론이 드높아진 것은 “객관적 사실” 자체가 권력자들의 외압에 의해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거나 규명된 사실조차 은폐, 편집, 삭제되었다는 사실이 하나하나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준영이 “세간의 의혹”과 “기록된 사실”을 대립시키고 사실에 충실할 것을 주장하는 것은 장자연 사건의 경우는 부당하다. 왜냐하면 그 “기록된 사실” 자체가 이처럼 축소, 은폐, 편집, 삭제의 조작을 거친 후 남아 있는 엉터리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세간의 의혹”이 “기록된 사실”만큼이나 중요한 사실가치를 갖는 것으로 고려될 필요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여기서도 박준영은 철저히 절차주의적 정의를 앞세운다. 그리고 세간의 의혹을 냉각시킬 방법으로 ‘증거법적 판단’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윤지오 씨가 이전 수사과정, 법정 그리고 조사단에서 여러 차례 진술했고, 언론을 통해 한 말들이 있습니다. 믿을 수 있는 것, 의심이 드는 것, 믿을 수 없는 것 등을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구분을 함에 있어서는 철저한 증거법적 판단이 필요합니다. 근거가 없거나 부족함에도 여론 때문에 섣부른 판단을 해서는 안 됩니다. 수사기관에 수사의뢰는, 혐의가 드러나 있거나 수사를 통해 드러날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냥 공을 떠넘기는 식의 수사의뢰는 무책임한 것입니다.”

섣부른 판단을 경계하자면서 그는 수사의뢰를 “무책임”한 것으로 단정하는데 이것은 ‘장자연 사건에서 재수사를 통해 드러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어떤 판단을 전제할 때에만 타당한 것이다. 이러한 판단이 장자연 사건을 바라보는 기존의 프레임을 고착화시키고 성폭력 체제의 실재를 감추게 될 것은 당연하다.

이처럼 박준영은 시종일관 장자연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문제제기를 봉쇄하고 억제하는 역할을 “냉정”, “신중”, “책임”의 이름으로 떠맡는다. 촛불과 미투의 힘에 의해 형성된 진실규명 요구를 잠재우려는 이 보수주의적 태도가 윤지오의 증언을 억제하고(‘사회적 파장이 큰 증언이므로 증언에 신중해야 한다’) 이에서 더 나아가 그의 ‘말과 행동’을 검증하자는 주장으로, 다시 말해 그가 그토록 강조한 “냉정”을 잃은 마녀사냥 식 선동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선동행위에 사례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방법이 윤지오가 주장하는 위협에 아무런 실체가 없었다는 경찰의 조사발표를 무비판적으로 4월 24일의 페이스북에 올리는 것이었다. “경찰이 윤지오 씨가 주장하는 위험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했던 ‘노력’”이 상당했으므로 그 발표에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는 식의 논평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증언자가 느끼는 위협은 결코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팀이 복도 시시티브이(CCTV) 분석을 통해 객실 출입자를 확인하고, 소음 측정, 경찰청의 지문 감식,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오일 감정, 호텔 시설담당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앞서 말했다시피 오직 직관을 통해서만 공감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험이 그 실체를 과학적 분석 대상으로 나타내는 때는 대개는 그것이 이미 살상과 같은 현실로 전화하여 위험이 해소된 상태에서다. 경찰이 찾았던 것은 위험의 실체가 아니라 그 자취인데, 위험의 자취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해서 위험의 실체가 부정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준영은 이 양자를 혼동하면서 윤지오에 대한 경호지원이 특혜이며 자원배분에서의 불합리라고 단정한다. 이런 섣부른 단정은 그의 절차주의적 정의관과 맞짝을 이루고 있었던 염치론, 즉 이해관계들의 양적 조정론(합리적 배분론)에 근거하여 나타나는 안일한 현실인식이다. 그의 시야는 성폭력과 같은 우리 삶의 실질적 갈등의 심부로 파고들기보다 삶의 표면을 거닐면서 편안한 조정/배분의 길을 찾는데 집중되고 있다. 이 경쟁적 이해관계론의 관점에서 ‘힘센 사람들’의 폭력 앞에서 내지르는 장자연의 절규가 공감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연의 죽음이 박준영에게 단지 “안타까운” 것으로서만 받아들여지고 윤지오의 증언이 객관성과 공정성을 잃은 과장된 진술로 비춰지는 것이 필연적인 것으로까지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연 사건과 관련하여 지금 필요한 것은 합리의 이름으로 껍데기(형해)의 세상을 만드는 절차주의를 넘어서 ‘실질’과 ‘실질에 고유한 절차/방법’를 주장하는 여성-다중의 실질적 과잉(excess)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약을 탄 술을 마신 것 같다. 왜냐하면 눈이 풀려 있었고.”라는 윤지오의 추측진술은 ‘과장된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여 돈을 벌기 위한 것’이라는 프레임 속에서가 아니라 ‘진실에 다가가기 위한 여성-다중의 이 실질적 과잉’이라는 맥락에서 더 실체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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