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미래인가현재(과거)인가?

-박노자, <소련 몰락 이후 소련과 동구권의 사회-경제적 형태에 관한 포스트-소비에트마르크스주의자들의 논의들>에 대한 토론문

(조정환/다중지성의정원)

박노자 선생의 발표문은 1920년대 이후 소련과 동구에서 전개된 소련/동구권 사회-경제 형태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을 유형화하여 소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여러 논자들이 어떤 입장에서 그러한 분석견해들을 제시하고 있는가는 이 논문의 선구적 안내를 따라가면서 전문 연구자들이 한국 사회운동에 대한 시사점을 중심으로 세심히 검토할 필요가 있는 중요한 주제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기에서 박노자 선생이 ‘일부 부분들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할 수 있어도, 기본적 취지에서 동의하는’ 관점임을 밝힌 타라소프의 견해와 이 논문 결론부분에 제시된 박노자 선생의 정리를 중심으로 토론해 보고 싶다. 이런 방식의 토론을 위해 이 논문 외에 박노자 선생의 소련관이 잘 표현되어 있는 레디앙 연재글 <박노자의 소련-미래를 향한 추억>과 역시 레디앙에 번역, 게재했던 타라소프의 <초국가주의와 사회주의: 문제제기>를 참조했음을 밝혀둔다. 

1.자유주의 입장에서 주로 제시되는 ‘봉건왕조국가론’과 스탈린주의 입장에서 제시되는 ‘사회주의론’을 제외하면, 소련/동국 사회경제형태에 대한 기존의 비판적 논의는 소련/동구 사회가 과도적 사회 형태(변질된 노동자국가론: 트로츠키)라는 관점과 자본주의 형태라는 관점(국가자본주의론: 라야 두나예프스카야)을 축으로, 즉 두 유형의 관점을 축으로 발전되어 왔다.

2.박노자(타라소프) 선생은 이 두 축과는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그 관점은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제시된다.

“도대체 소련이란 무엇이었던가? 이 질문에 대해 러시아의 주요 마르크스주의적 사상가인 알렉산드르 타라소프는, 매우 명쾌하고 도전적인 해답을 내놓는다. 나는 이 해답의 일부 부분들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할 수 있어도, 기본적 취지에서 타라소프의 의견에 동의한다. 소련은 비자본주의적, 비(非)이윤추구적 산업사회를 건설하려는 과감한 시도이었고, 이 시도는 비록 우리가 꿈꿀 수 있는 사회주의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해도, 지금 파산돼 가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하나의 “대안”임에 틀림없다. 단, 타라소프도 지적하듯이, 매우 선별적으로, 비판적으로 대해야 할 대안이다. “국가화된 경제, 사회”에서는 관료집단의 힘이 절대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 힘을 밑으로부터의 민주주의, 즉 노동자 민주주의를 통해서 어떻게 제한시키고 상쇄시킬는지 “대안”을 꿈꾸는 혁명가들이 앞으로 고심해야 할 부분이다.”(http://www.redian.org/archive/56059)

3.소련/동구 사회가 사회주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본주의도 아니라는 관점이다. 타라소프에 따르면 이러한 관점은 하나의 생산양식(산업적 생산양식)에 자본주의와 초국가주의라는 두 개의 체제가 대응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의해 정당화된다. 부르주아 혁명의 두 형태가 있고 서구에서는 부르주아가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를 구축했다면, 동구에서는 프롤레타리아와 소농이 혁명을 통해 초국가주의 체제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후에 과학자와 예술가들이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지식적 생산양식/사회주의 체제를 구축하리라는 전망과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4.나는 기본적으로 현실 사회주의가 국가자본주의라는 위 (1)의 두 번째 입장에 동의한다. 그렇다고 국가자본주의가 아닌 어떤 “진정한” 형태의 사회주의가 미래의 사회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실 사회주의가 국가자본주의일 뿐만 아니라 국가권력을 사회혁명의 중심에 놓고 당형태에 의한 운동의 대의/대표를 통해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표상하는 사회주의의일반적이미지가 국가자본주의와 불가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의 당으로서의 공산당 국가자본주의와 관료계급화된 공산당 국가자본주의를 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가상적인 것이며 실제의 질적인 구분은 공통장들과 그것의 자기조직화로서의 코뮌형태를 섭정 주체로 확보했는가 그렇지 못했는가 사이에서만 주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5.그런데 이런 생각에 대한 박노자/타라소프의 비판이 이미 주어져 있다.

“소련이 단순한 “국가 자본주의” 즉, 자본주의의 하나의 형태라면 거기에서 노동력의상품화가 있었느냐 라는 질문부터 받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라면 노동자들이 잉여가치를 착취하려는 자본가들에게 자신들의 노동력을 팔아 이윤을 남겨야 했을 텐데, 소련 같은 경우에는 반대로 완전고용을 보장하겠다는 의미에서 차라리 잉여노동력이 있는 곳에서 굳이 불요불급이고 없어도 될 돌공장 등을 지어주는 등 “이윤을 위한 착취”를 했다기보다는 어떤 정책적 목표 (완전고용, 국방력 제고, 인민생활수준 제고 등)를 경제적 “합리성” 위에 두곤 했다. 구소련의 절대 다수 노동자들이 소련에 대해 향수를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또, “국가자본주의”라면 자본시장이 어디에 있는 것이고,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운동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한 마디로 “사회주의”가 아니었다 해도, 이 사회는 분명히 그 어떤형태의 “자본주의”도아니었던것이다.”(http://www.redian.org/archive/56059; 강조는 인용자)

6.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재반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자본주의의 본질은 상품화(시장)에 있다기보다 노동강제에 있다. 노동력의 상품화는 노동강제(살기 위해서는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노동해야 한다)의 한 형태이다. 
  • 비상품적비시장적관계를 통해서도 노동강제는 가능하다.(예, 여성) 시장이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국가자본주의도 세계자본주의의 한 마디로서 자본시장 속에 놓여 있다는 반론이 가능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본시장”의 존재여부가 자본주의인가 아닌가를 궁극적으로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품시장은 자본주의의 지배적(서구적) 형태이지 본질적이고 유일한 형태는 아니다. 
  • 국가자본주의에서 생산자는 비시장적 형태로, 즉 폭력적 방식(국유화)으로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된다. 이 분리는 지속적이다. 그 분리의 재생산이 시장자본주의에서는 주로 교환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국가자본주의에서는 국가권력(폭력)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자유주의자들이 현실 사회주의를 봉건왕조국가로 인식하는 이유가 아마 이런 점 때문일 것이다.) 
  • 교환과폭력은 형태적으로는 구분되지만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시장자본주의에서 교환질서가 폭력을 통해 유지되고 보장되기 때문이다. 은폐된 폭력인가 공개된 폭력인가가 문제일 뿐이다. 
  • “시초축적” 후에 단계적으로 “제발로 선 자본주의”가 오는 것이 아니라 “제발로 선 자본주의”는 “시초축적”에 늘 기초하고 그것에 의존하며 양자는 상호보조적으로 병진한다.
  • 이윤은 경제적 범주로 나타나지만 본질적으로는 지배력, 즉 노동강제력이다. 맑스가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에서 정식화한 것처럼 이윤의 축적은 노동에 대한 더 큰 지배력의 축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본운동은 노동강제력의 확대재생산 운동으로 정치적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 소련/동구 사회주의들에서 노동은 일반적으로 강제되었다(노동의 일반화). 이것이 그 사회가 자본주의인 이유라고 생각한다.

7.소련/동구 사회주의는 국가자본주의라는 것이 지금까지의 이야기지만, 나는 국가자본주의가 자본주의의 이상 변종이거나 타락 변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주의에 대한 역사적 상상들은 대개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상상이었다. 레닌이 사회주의를 (공산당으로 이해된) 노동계급 통제 하의 국가자본주의로 이해한 것은 오해가 아니라 역사적 사회주의자들에게 보편적이었던 사회주의 이해방식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자본주의 다음에 사회주의가 오는 것이 아니라 국가자본주의가 사회주의이다. 사회주의는 국가자본주의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국가자본주의에서 국가에 대한 통제를 관료화되기 전의 공산당이 수행하느냐 관료화된 공산당이 수행하느냐는 중요한 차이이지만 사회주의인가 아닌가를 가르는 차이는 아니다. 문제는공통장과코뮌(소비에트)이기때문이다. 코뮌(소비에트)가 공통장(commons)을 기초로 자주적인 섭정력을 갖고 움직일 수 있을 때 국가자본주의는 노동에서 해방된 대안 사회(노동의 삶으로의 전화)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지 못할 때 국가자본주의는 그 자체가 노동강제 체제일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시장자본주의로 게걸음을 칠 수도 있는 사회로 남는다. 

8.이런 의미에서 나는 관료집단의 힘이 절대화되는 경향을 밑으로부터의 민주주의, 즉 노동자 민주주의를 통해서 어떻게 제한시키고 상쇄시킬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박노자 선생의 취지에 공감한다. 그런데 이 고민은, 관료집단의 힘에 대한 제한과 상쇄라는 부정적 지평을 넘어 그 힘을 어떻게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의 방향으로 견인, 이용할 것인가라는 긍정적섭정의 과학으로까지 발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 시기에는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 민주주의만으로는 부족하고, 다중의 절대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난민 이민 여성 소수자 비정규직 등 시민사회 경계밖으로 내몰리는 존재들을 포함하는 프롤레타리아 다중의 절대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중의 절대민주주의는 다중의 생산적 및 재생산적 공통장을 근거로 하면서 그것을 전 사회적인 것으로 확장시키는 방향에서 추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표상은 사회주의라는 개념에 의해서는 더 이상 포착될 수 없고 그것과는 단절되는 것, 즉 맑스가 코뮤니즘(communism)이라는 말로 표현하고자 했던 어떤 새로운 개념(commonism)을 요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주의는 이미 과거이거나 현재이지 프롤레타리아트 다중의 미래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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