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순수주의의 위험성에 대하여

이른바 ‘<지상의 빛> 후원금 집단반환 소송’의 정치적 성격에 대해

2019년 6월 6일자 대한민국의 신문들은 윤지오가 창립한 비영리단체 <지상의 빛> 후원금에 대한 집단반환 소송 준비 뉴스로 요란한다. <중앙일보>의 기자(?) 백희연은 아예, ’윤지오에 등돌린 후원자들, 결정타는 거짓증언.작품표절 의혹’이라는 제목으로 윤지오의 후원자들이 모두 윤지오에게 등을 돌린 것처럼, 또 윤지오의 증언이 거짓인 것처럼 제목을 뽑아놓았다. 

미디어 이데올로기

알뛰세르는 이데올로기를 인간과 그 자신의 존재조건에 대한 체험된 관계들의 표상이라고 했는데, 인간과 존재조건 사이에 미디어들이 깊숙히 개입하여 우리들의 체험을 매개한다. 체험이 미디어에 의해 매개되면서 우리가 존재조건을 직접 맛보고 체험할 여지를 뺏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미디어가 질러대는 거대한 소리에 눌려 우리 마음의 고유한 진동을 느끼고 들을 수 있는 여유와 시간을 갖지 못한다. 잡음이 고요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나는 조용히 물어 본다. 사람들이 왜 지금 자신이 낸 후원금을 돌려달라고 말하기에 이르렀을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

후원의 목적 자체가 거짓이라는 폭력

후원자들의 법률대리인인 변호사 최나리는 윤지오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는 이유가 ‘윤지오가 말한 후원의 목적 자체가 거짓’이며 ‘후원자들을 기망해서 후원금을 모은 것’이라고 말한다. 주관적 단정만 있을 뿐 소송 사유를 보도한 동아일보에도 윤지오가 설정한 목적이 어떤 근거에서 거짓이라고 단정하는지 그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다. 

최누리 변호사는 이제 증언자 보호를 위한 비영리단체 설립이라는 목적이 왜 거짓인지를 입증해야 하는 매우 어려운 과제에 직면한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처럼 증언자 보호장치가 미흡한 나라에서는, 어려움 속에서 증언을 한 증언자가 자신의 체험에 기초하여 증언자 보호를 위한 비영리단체를 설립하는 것은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또 소중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목적이 거짓임을 과연 입증할 수 있을까? 적어도 2개월여 이 사건을 지켜보고 연구해온 나로서는 변호사 최나리의 주장이 인간 윤지오에 대한 가차없는 폭력으로 느껴진다.

후원자는 채권자가 아니다

만약 후원받는 목적이 거짓으로 입증되지 않는 한, 다른 이유로 이미 낸 후원금을 돌려받을 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후원금은 후원을 받는 쪽이 일정한 채무를 부담하는 부담부 증여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윤지오는 지금까지 후원받은 돈을 1원도 쓰지 않았고 <지상의 빛>이 정상화되면 그 목적에 맞게 그 후원금을 사용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지 않은가? 후원자는 채권자가 아니다.

윤지오의 진실성에 대한 모호한 의심은 ‘윤지오 죽이기’의 집단적 생산물

그런데 이처럼 승소가능성이 커 보이지 않는 소송에 왜 370명이 넘는 후원자들이 참가하게 되었을까? 참가의 조건을 살펴보면 변호사 최나리가 무료 소송을 진행해 준다는 김수민 측의 홍보가 작용한 때문이겠지만 참가의 원인은 윤지오의 진실성에 대한 의심인 것으로 보인다. 

후원자 김모씨는 채널A와 인터뷰에서 “모금 진행 중 윤씨의 말이 조금씩 번복되는 모습을 봤고 진실성에 의심을 갖게 됐다”라며 “모금된 후원금이 얼마인지, 어디에 썼는지 알려주지 않고 있다”라고 주장했다(세계일보, 2019.6.6; 강조는 인용자)

윤지오의 말이 어디에서 어디로 번복되었다는 것일까? <지상의 빛> 설립목적이 변경되었다는 것인가? 윤지오의 말에 따르면, 후원금은 아직 1원도 쓰지 않았다고 하므로 어디에 썼는지는 이미 밝힌 것이며 모금된 후원금은 투명하게 밝히겠다고 했으므로 그 단체가 자리를 잡고 활동을 시작할 때까지 기다린 후 필요할 때 문제를 제기해도 늦지 않은 것 아닐까? 후원자들의 후원금이 목적에 맞게 사용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은 윤지오의 진실하지 못함이라기보다 윤지오를 뒤흔들어 신빙성을 떨어뜨리고 목적을 실행할 사업을 할 수 없도록 밤낮으로 공격하는 무리들 때문이지 않은가?

우리들은 때로는 친구, 애인, 자녀, 부인, 남편 등의 진실성조차 의심하는 경우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의심이 이 관계를 깨뜨리는 것으로 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것은 대개 진실 대 허위의 양자 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의 관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시킴으로써 풀어야 할 실천적 문제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윤지오의 진실성에 의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너무 추상적인 말이다. 그것은 윤지오에 대한 막연한 의심이다. 그 의심이 막연한 것은 그것이 사실근거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마녀사냥 선동에 의해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적생산물이기 때문이다.  

후원금 반환소송의 정치재판적 성격

만약 위와 같은 의미의 추상적이고 막연한 진실성이 후원금 반환소송을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면 후원금을 받는 모든 단체는 항상 소송에 휘말릴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것이고 이런 상시적 불신의 조건에서라면 후원행위는 사회적으로 가능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장자연 사건에 대한 윤지오의 증언/진술의 진실성이 문제라면 나는 적어도 윤지오의 증언이 신빙성 없도록 만든 주도자였던 김대오의 진술보다는 윤지오의 진술이 훨씬 더 신빙성이 있다고 증거를 갖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후원금 집단반환소송이 어떤 실효적(즉 돈을 돌려받기 위한) 사법행위라기보다는 수 개월간 지속된 ‘윤지오 죽이기’의 일환으로서 윤지오의 이미지를 회복불가능할 만큼 훼손시키기 위한 정치재판으로 준비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장자연에 대한 가해자들의 경우 윤지오의 향후 있을 수 있는 증언투쟁을예방하기 위해 이런 소송이 필요할 것이며 윤지오에 대한 가해자들에게는 윤지오에 의한 사법투쟁을미연에저지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소송이 이런 소송일 것이다. 이 소송이 후원자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준비된 것이 아니라 비후원자인 김수민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지속적으로 촉구되고 홍보된 일종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소송이라는 점도 이런 판단을 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순수주의의 환상과 그 위험성

이 소송 준비를 지켜보면서 나는 다시 한 번 순수주의의 위험성을 강조하고 싶다. 

증언자는 어떤 보호장치도 없이 희생을 무릅쓰고 목숨을 내 걸면서 할 때에만 그 증언이 진실한 것인가? 

증언자가 개인으로건 단체로서건 후원을 받는 행동을 하면 그의 증언은 진실성을 잃는 것인가? 

증언자가 놀고자 하는 욕망, 성적 욕망, 사치와 쾌락에 대한 추구를 갖지 않을 때에만, 즉 성자(聖子)이고 성녀(聖女)일 때에만 그의 증언이 진실한 것인가? 

증언자는 증언 이외의 것에서도 오직 진실만을 말하고 일체 거짓을 말하지 않을 때에만 그의 증언은 진실된 것인가? 

증언자의 삶은 모든 부면에서 일관되고 통일되어 있어야 하며 어떤 부분에 카메라를 갖다 대도 모두가 아름답게 보일 때에만 그의 증언은 진실한 것인가? 

요컨대 증언자는 순교자일 때에만, 혹은 인간이 아닌 일 때에만 그의 증언이 진실한 것인가?

우리가 증언자에게 강한 순수성을 요구하면 할수록 증언자는 보호받을 수 없고 상처입기 쉽고 위험해지게 되는 것이지 않은가? 우리가 증언자에게 기대하는 순수주의의환상이 우리의 삶을 개혁하는 데 꼭 필요한 증언행동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결국 범죄자들을 보호하도록 만들지 않는가? 늘 순수주의는 다중을 무력하게 만드는 지배자들의 무기였다.  “윤지오의 말이 100% 진실일까요?”라는 김수민의 최초 폭로글의 제목이 바로 순수주의의  위험성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구호가 아니었을까? 우리가 정말 “김수민의 말이 100% 진실일까요?”라는 방식으로 물어도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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