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부와 국정원의 추억(1)

-30세에 나는 어떻게 ‘범죄자’가 되었나?

연행과 구속

장자연은 배우가 되려다가 30세가 채 되기도 전에 비통한 죽음을 맞이했다. 윤지오는 배우의 꿈을 안고 살았지만 30대 초에 그 장자연의 증언자로 나섰다가 거짓말쟁이, 사기꾼으로 내몰리고 있다.  동료배우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죽었고 한 사람은 범죄자가 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도 정확히 30세에 처음으로 범죄자가 되었다. 국가보안법 위반자, 반공 주류사회의 언어로 ‘빨갱이’가 되었다.

박사과정 수료를 앞두고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KAPF)과 임화를 주제로 한 학위논문 준비에 한참이던 1986년 12월 31일 오후 나는 봉천동 집으로 찾아온 건장한 체구의 세 사람에게 연행되었다. 안기부[전 중앙정보부, 현 국정원]에서 나왔는데 참고인 조사라면서 잠깐만 시간을 내 협조해 주면 좋겠다고 말해 그들의 승용차에 올라 탔는데 어디에서부터인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라고 소리를 지르더니 손으로 뒷머리를 눌러 창밖을 보지 못하게 했다. 도착한 곳이 남산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약간 어두운 지하방이었다.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두려움으로 바짝 긴장한 상태의 나에게 옷을 갈아 입으라고 했다. 군복 상하의였는데 바지에 허리띠가 없었다. 바지가 계속 흘러 내리기 때문에 일어서서 움직일 때는 허리춤을 둔 손으로 움켜쥐어야 했다. 허리띠가 무기나 자해수단으로 될 수 있다는 이유였을지 모르나 실제로는 성적 수치심을 불러일으키고 무력감을 심화시키는 수단이었다고 생각된다.

약간의 심문이 진행된 후 구타가 시작되었다. 내가 들어오면서 들었던 그 비명을 내가 내지르게 되었다. 몽둥이질이 끝나고 나서 수사관들은 따뜻한 표정으로 달래듯이 말을 걸어왔다. 야식도 주었다. 냉탕과 온탕을 왔다갔다 하면서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방식이었다. 가장 괴로운 것은 밤샘조사였다. 나는 한 사람인데 수사관들은 돌려가면서 수사했다. 졸면 ‘여기 자러 왔냐?!’면서 몽둥이질을 했다.  이러기를 20일. 나는 해를 넘겨 기억컨대 1987년 1월 19일에 서울구치소로 이송되었다. 구속기소였다. 내가 왜 구속기소되었을까? 

대한민국에서는 공부가 유죄가 되듯 증언도 유죄가 된다

대학 초년 시절에 나는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문학에 대해 토론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학교는 어차피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고 분위기가 살벌했기 때문에 가고 싶지 않았다. 두 번의 학사징계를 받고 퇴학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손’, ‘이등변삼각형의 꼭지점은 밑변을 시기한다’ 등 초현실주의와 실존주의 경향의 작품을 쓰던 내가 사회문제를 주제로 습작을 한 첫 작품이 ‘율도국에서 생긴 일’이다. 대학4학년 그러니까 1978년이었는데 홍길동의 이상도시의 모습을 그려보려 했던 것 같다. 이 무렵 나왔던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공’에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조세희가 메타포 방식으로 그린 노동도시 ‘은강’과는 다른 도시의 모습은 무엇일까를 상상을 통해 그려본 것이었다. 학사학위 논문으로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요절한 두 작가 이상과 김유정의 작품을 비교한 연구를 제출했다.

교사생활을 하면서 대학원에 다니던 첫 해인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 정권이 부마항쟁과 김재규가 쏜 총에 붕괴했다. 서울의 봄에 이어졌던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전후에 나는 국문학, 영문학, 독문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들의 언더모임에 합류했다. 헤겔, 루카치, 맑스의 독일어 원전을 강독하는 것이 주요한 학습내용이었다. 독문학을 공부하면서 독일어교육과 조교를 하고 있던 조만영이 독해를 이끌었고 모임 장소도 수업이 없는 주말 독일어교육과 조교실을 주로 사용했다. 독문학을 하는 사람으로 조만영 외에 정재경, 영문학을 하는 사람으로 정남영(전 경원대)과 김명환(현 서울대), 미학을 하는 사람으로 이영욱(현 전주대), 국문학을 하는 하는 사람으로는 김종철(현 서울대)과 임규찬(현 성공회대), 그리고 내가 포함되어 있었다.   

독일어 원전강독을 통해 확보한 관점(지금 회상해 보면 ‘헤겔리언 맑스주의’ 관점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을 기초로 이 모임이 정치경제학, 제3세계론, 한국근대사, 민중론, 민족문학론 등을 두루 공부하는 데 6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 기간 동안 나는 공군사관학교에서 생도들에게 한국어문학을 가르치면서 대방동과 신림동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나름 대로 열정적인 연구시간을 보냈다. 1985년경에 우리는 신림동에 독립연구실을 마련하고 우리를 민중미학연구회(민미연)로 부르기 시작했다. 28세의 나이에 대학 전임강사가 된 정남영 외에는 대부분이 대학에서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독일어, 영어로 된 맑스주의 저작 번역을 사회실천이자 부업으로 삼고 있었다. 나는 이 무렵부터는 호서대 강사로 나가면서 게오르크 루카치의 책 <변혁기 러시아의 리얼리즘 문학>을 독일어에서 한국어로 번역했다. 조만영은 <역사와 계급의식>을 공역했고, 이영욱은 <역사소설론>을 번역했으며 정남영과 김명환도 프레데릭 제므슨을 비롯한 영미권 주요 맑스주의 문헌들을 번역했다. 나름 내로 한국 사회 문예미학 담론에서 우리 나름의 독자적 경향성을 확보했다고 믿은 우리는 1986년에 민중미학연구회를 공개모임으로 전환하여 회원을 공개 모집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민중미학연구회는 신두원, 진중권 등 젊고 진취적인 신진연구자들이 모여서 미학의 민중적 재구성의 방향을 연구하는 활기찬 공간으로 발전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제도 대학원 밖에서 행한 것은 한국 사회의 민중적 재구성에서 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주제로 한 연구였다. 윤지오가 장자연의 죽음 전후에 어떤 일을 경험했는가에 대해 증언한 것이 전부였듯이, 나(우리)의 경우는 어떻게 사회와 삶을 좋게 만들 수 있을까를 알기 위해 맑스주의 문헌을 공부한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나는 바로 이것이 이유가 되어 범죄자가 되었고 구속되었고 반년간의 수감 생활을 해야 했다. 이 경험 덕분에 나는 증언이 유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30여년 전인 1980년대에 나의 공부가 반공적=자본주의적 주류사회에서 유죄로 낙인 찍혔다. 이제 2010년대의 성폭력적=가부장적 주류사회(내가 성폭력체제라고 부르는 것)에서 윤지오의 증언이 유죄로 낙인 찍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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