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체제의 고수의 길인가 공통장 촛불혁명의 길인가?

-국정원의 추억(2): <민중미학연구회>와 <지상의 빛> 

<민중미학연구회>의 경우

서울구치소에 구속된 후에야 나는 내가 어떤 정치적 그물에 먹잇감으로 걸렸는지 알 수 있었다. 안기부가 강철 김영환의 <민족해방노동자당>을 반국가단체로, <민중미학연구회>를 대학강사들로 조직된 그 배후지도세력으로 그린 기소의견을 검찰에 제출했던 것이다. 

언론은 <민족해방노동자당>은 “김일성의 혁명이론을 토대로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 이론 (NLPDR) 을 정립하여 「강철시리즈」 등 지하유인물을 학원가와 노동계에 확산시켜 전방입소거부·부산미문화원점거·건대 점거농성 등을 배후 조정해 온 ‘친북괴 반미공산혁명 음모조직’”이라고 보도했다. 민중미학연구회는 졸지에 이 무시무시한(?) 성격의 조직을 배후지도한 이적단체로 만들어졌고 나는 그 이적단체를 구성한 주범(대표)으로 몰렸다.

<민중미학연구회>의 목적은 미학의 민중적 재구성이었지 북한이나 <민족해방노동자당>을 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나는 <민족해방노동자당>이 존재하는지 않는지 당시에 전혀 알지 못했으며 지금도 그것이 실제 존재했던 조직인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 그 존재를 알지도 못하는 조직을 우리가 어떻게 배후에서 지도하는가? 또 조금만 운동에 대한 상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맑스주의를 공부하는 사람들(PD경향)이  김일성주의 조직(NL경향)을 지도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지는 못할 것이다. 양자는 경쟁적인 노선이었기 때문이다. 상식에 벗어나는 어거지 기소의견이었다. 

게다가 안기부 기소의견에는 <민중미학연구회>가 <민족해방노동자당>에 105만원(현재 화폐로는 2000만원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을 지원했다는 혐의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표’인 내가 모르게 어떻게 이런 거액이 지원되었다는 것인가? 그날 벌어 그날 먹고사는 대학원생과 강사들의 연구모임에 회비를 모아 이런 거액을 마련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게다가 안기부 수사과정에서 내게는 이러한 내용에 대해 일언반구 묻지조차 않았다. 안기부는 우리들의 조직에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목적을 기입하고 우리들의 행동을 날조했다. 무엇을 위해서였을까? 이제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1986년 말 전두환 군사정권이 간선제 헌법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1987년 4월 13일 ‘호헌선언’을 앞두고 이에 저항할 것으로 예상되는 운동권 세력의 뿌리를 뽑아 간선제 호헌과 장기집권을 위한 사전정지 작업을 해 두려는 것이었다.

<지상의 빛>의 경우

지금 윤지오를 기소하라고 의견을 내놓는 사람들이 비영리단체 <지상의 빛>의 ‘증언자 보호’라는 목적을 지우고  ‘돈벌이를 위해서’라는 목적을 기입하고, “국민들을 기망하여 최소 1억5천만원 이상을 갈취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윤지오의 행동으로 여론조작하는 것은 내가 겪은 것과 동일한 과정이다. 나는 이러한 목적 조작과 행동 조작의 동기가 증언, 즉 진실말하기의 억압을 통해 진실을 은폐하고 성폭력체제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하는 것에 있다고 보고 있다. 성폭력체제는 가족제도와 국가제도를 기초로 수 십 세기 지속되어왔고 오늘날 기업, 교회, 군대, 정당, 학교 등에 널리 뿌리박고 있는 일종의 물질적 헌법(material constitution)이다. 이런 의미에서 윤지오 마녀사냥의 목적도 일종의 ‘호헌’이라고 볼 수 있다.

두 경우의 차이와 그 사회정치적 의미

그런데 두 가지 점이 다르다. 

하나는 사건을 조작하는 방법과 방향의 차이다. 

학술조직인 <민중미학연구회>는 이적(利敵) 정치조직으로 조작되었음에 반해 비영리단체인 <지상의 빛>은 사기를 위한 유령조직으로 조작된다. 앞의 경우는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정치사상범을 만드는 테크놀로지고 후자는 ‘사기꾼’이라는 이름으로 경제적 파렴치범을 만드는 테크놀로지다.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의 신자유주의화 과정은 범죄조작의 경제화를 하나의 뚜렷한 경향으로 드러냈는데, 한국의 경우 노동운동 탄압의 주요 무기가 집시법을 이용한 정치적 탄압에서 1990년대 중반 이후 손해배상 청구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적 탄압으로 바뀐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또 하나는 사건을 조작하는 주체의 차이다. 이 점은 조금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민중미학연구회>의 이적단체 조작은 명백히 일방적으로 안기부가 전면에 나서 수행하는 정보공작이었다. 주체는 중앙집중화되어 있었고 권력집중적이었으며 단독적이었다. 그것이 중앙 국가권력의 소행이라는 것은 누구나의 눈에 확연히 보이는 것이었다. 전두환의 장기집권 구상의 실패는 이러한 중앙집권적 방식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1987년 항쟁 이후 한국 사회에서도 시민사회의 뚜렷한 성장이 있었다. 1990년대에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기초한 가상공간과 디지털 시민사회도 크게 성장했다. 이 변화의 흐름 속에서 1999년 1월 21일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도 국가정보원(국정원)으로 개조되었다. 국정원은 점점 단독으로 정보공작을 할 수 없게 되고 시민사회와의 협력을 필요로 했다. 정보공작의 민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과정이 전개되었다. 이것은 사회운동의 탈집중화, 탈정당화, 시민화, 다중화 과정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 결과 사회적 갈등은 점점 국가 대 시민의 투쟁이 아니라 시민 대 시민의 투쟁, 즉 내전(civil war)의 성격을 갖기 시작했다. 여전히 중앙집권주의는 살아 있었지만 중앙집중적 국가기관이 전면에 나서 공작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 사이의 투쟁의 배후에서 그 투쟁에 특정한 방향으로 은밀하게 영향을 미치고 그 투쟁의 결과를 정치적으로 수렴하고 종합하는 기관으로서의 성격을 띄어갔다. 2008년 촛불봉기 당시 사람들은 아고라에서 정보기관을 위해 일하는 거대규모의 ‘알바’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는데 그것은 이명박-원세훈 국정원의 댓글조작을 통해 확인되었다. 2019년 현재에는 ‘알바’보다는 ‘벌레’가 더 문제인데 이들은 내가 보기에는 기존의 시민사회 구조(현재의 장자연-윤지오 쟁점에서는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서고 있는 정보의용병들이다. 즉 정보전쟁(infowar)에서 수구 세력은 정규군(기관, 정당, 언론, 교회), 비정규군(알바), 의용병(벌레)의 세 구성부분을 갖고 있고 세 번째 의용병의 자발적 움직임이 더 위협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 부분들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가시적 비가지적으로 협동하는 구조를 놓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경험한 <민중미학연구회>에 대한 이적단체 조작이 하향적(위에서 아래로) 구도를 갖고 있었음에 반해 윤지오와 <지상의 빛>의 사기꾼-사기단체 조작은 명백히 벌레에서 시작하여 알바, 정규군으로 향하는 상향적(아래로부터 위로) 구도를 갖고 있다. <민중민학연구회>가 장지집권을 획책하는 군사정권의 먹잇감이 되었다면 윤지오를 사기꾼으로 만들어 권력의 먹잇감으로 던져주려 하는 것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켜려는 시민사회 구성원들 자신이다.  그들은 국가기관 이전에 비제도 다중지성(multitude intelligence)의 등장이 자신의 지성지위를 위협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는 변호사 기자 작가 교수 등의 전문가들, 신자유주의 경제위기에 불안감을 느끼면서 가족에서 최후의 피난처를 찾는 소시민들, 그리고 비정규직 실업 등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삶의 재난 속에서 미투 등 아래로부터 여성권력의 대두에 불안을 느끼면서, 여성과의 연대를 통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공통장 촛불혁명의 길이 아니라 인종차별과 여성차별을 통해 성폭력적 기득권을 내려 놓지 않으려는 남성들 등 복잡한 구성을 갖는다.

성찰과 선택의 시간 

이제 장자연 사건을 넘어 거대한 사회적 쟁점이 된 윤지오 논쟁 속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어떤 세계, 어떤 삶을 그려 나갈 것인가? 윤지오를 사기꾼으로 만들고 장자연의 절규를 묻어버리면서 차별과 폭력을 통해 성폭력적 기득권을 유지하는 삶을 만들어 나갈 것인가? 아니면 장자연의 절규와 윤지오의 증언을 소중히 받아 안으면서 성폭력 가해자들을 단죄하고 남성과 여성,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와 소시민, 전문가와 다중이 서로 협력하여 공통장을 다듬어 내는 민주공화적인 삶을 만들어 나갈 것인가? 우리가 성찰하고 선택해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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