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서울구치소의 봄에 대한 추억

-윤지오와 “영리하게”에 대하여(1)

안기부에서 서울구치소로 넘어오니 지옥에서 천국으로 건너온 느낌이었다. 안기부에 비해 구치소는 혹독하게 추웠지만 고문과 취조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고통스러운 것은 좁은 독방의 천정에 밤새 켜져있는 형광등이었다. 간수들이 각방을 밤에도 감시하기 위해 켜놓은 그 형광등은 안기부에서의 밤샘조사처럼 잠을 방해했다. 구치소에서의 하루는 군사훈련을 받던 사관후보생 시절처럼 점호로 시작하여 점호로 끝났다. 큰 식당에서 집단배식을 받는 대신에 좁은 식구통으로 개인배식을 받는 것, 그리고 군사훈련 대신 강제로 정좌를 하고 앉아 있거나 폭이 채 1미터가 되지 않아 앉은 자세에서 무릎끝이 앞벽면에 닿고 등이 뒤벽면에 닿는 비좁디비좁은 밀폐공간에 감금된 채 몇 시간을 기다렸다가 검찰조사를 받고 돌아오는 것이 차이였다. 그 좁은 공간에서 기다리는 것의 지루함을 견딜 수 없어 벽면에 ‘군사독재 타도하자!’고 손톱으로 쓰고 ‘그날이 오면’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노래를 반복해 부르며 그 시간을 견뎠다. 

얼마 뒤부터 소내가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박종철이 고문치사로 죽었다는 소식이 면회온 사람을 통해 소내에 전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울구치소 10사하 각 방 재소자들의 소통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뒤에 알게 된 것이지만 박종철은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에서 물고문으로 죽었다. CA 조직원의 은신처를 불라는 요구를 거부하던 중이었다. 돌아보면 그 날에 나도 남산 안기부에서 고문수사를 받고 있던 중이었다.  

교도관들의 태도가 위압적인 것에서 관리적인 것으로 다소 부드러워진다고 느끼던 어느날, 젊은 대학생이었던 구학련의 은재형이 저 멀리 끝방에서 소리를 지르며 투쟁을 시작했다. 옷이 찢어졌으니 바느질을 할 수 있게 바늘과 실을 달라는 요구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교도관들이 몰려가 독방 문을 따고 소리를 지르는 은재형을 구타하며 진압한 것에 대한 항의가 1987년 초 서울구치소 재소자 인권투쟁의 시작이었다. 항의가 거세지면서 여기저기서  세수 시간을 늘려라, 신문을 읽을 수 있게 하라 등의 재소자 인권 보장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각방에 강제로 정좌하고 앉아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한꺼번에 일어서서 감시구 창살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내 정면 방에 있던 김성식(현 바른미래당)의 얼굴을 감시구 창살 사이로 뚜렷이 볼 수 있었다. 다른 방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비스듬히만 볼 수 있거나 아예 볼 수 없었지만 정말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안기부에서 신체적으로 고통받고 심리적으로 짓눌린 후 구치소에 와서도 위축되어 한 동안 펼 수 없었던 기(氣)가 확 펴지는 느낌이었다. 1987년 봄, 31세의 나에게는 이 순간이 생의 전환점이었다. 스피노자의 용어로는 슬픔에서 기쁨으로의 전환이었다. 몸은 갇혀 있었지만 다시 자신감이 생기고 힘이 솟았다.

우리는 누구랄 것 없이 빗자루로 감시구의 창살을 두들기거나 긁어 소음을 일으켰다. 10사(舍)하(下) 전체가 드르륵드르륵대고 쾅쾅거리는 소리로 진동했다. 사방에서 구호가 들려왔다. 이 소요를 진압하러 중앙복도로 교도관들이 떼지어 몰려 들었지만 그들은 벌써 엄청난 소음투쟁에 위축되어 주춤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분 때문에 마지못해 중앙복도로 들어온 간부급 교도관들에게 우리들은 사식으로 받은 계란을 던졌다. 서울구치소의 하얀 회벽들에 계란 노란자위가 터져 여기저기 누렇게 흘러내렸다. 날계란 세례 앞에 두려움을 느낀 교도관들은 황급히 중앙복도 문을 잠그고 바깥으로 도망쳤다. 모두가 아직은 여전히 독방에 갇혀 있었지만 10사하 사동이 반은 점거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다음날부터 우리는 점호를 거부했고 식사를 마친 후에는 통방투쟁을 시작했다. 단절되어 있는 각 방 재소자들이 1방, 2방, 3방방 식의 번호존재에서 이름을 가진 인간으로, 투사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각자 저 멀리 끝방까지 들리게 큰 소리로 돌려가며 자기소개를 했다. 이름이 무엇인지, 어떤 사건으로 구속되었는지, 구속 전에는 무얼 했는지 등등에 대해 말했다. <민중미학연구회> 관련자로는 나와 정남영이 그 사동에 있었고 구학련(구국학생연맹) 핵심 활동가들, 그리고 CA(Constituent Assembly) 활동가들도 있었다. 김성식과 김찬도 CA 중앙위원들이었다. 그러니까 대략 반은 NL, 반은 PD인 셈이었다. 정치적 경향과 전망은 달라도 재소자인권투쟁에서는 하나였다.  

당시는 소내에서 신문도 티비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재소자는 사회로부터 신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보적으로도 완전히 격리되어 있었다. 반입되는 책들에는 검열딱지가 붙어있었고 편지들은 교도관들이 가위로 위를 잘라 내용물을 본 후 통과되는 것만 우리에게 전달했다. 신문구독 허락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우리는 면회시간을 정보투쟁으로 조직하기 시작했다.

면회를 할 때 면회온 사람에게 최대한 사회면 정치면 소식을 물어 그 내용을 서로 공유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면회오는 사람들도 이 질문에 답해야 하기 때문에 신문을 읽고 와야만 했다. ‘잘 지내냐?, 먹을 것이 뭐가 필요하냐?’ 식의 형식적 면회방식으로부터 ‘어떤 시위가 있었다, 어디에서 파업이 있었다, 어떤 사건이 벌어져 누가 구속되었다, 어떤 정당이 어떤 행동을 했다’ 식으로 정치적 면회시간으로 면회시간의 내용이 바뀌었다. 면회시간이 면회자들 서로의 학습시간이 된 것이다. 

연필도 종이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갇힌 우리는 매직보드(플라스틱 펜으로 쓰면 글자가 나타났다가 털면 사라지기 때문에 텍스트를 보관할 수는 없지만 반복해서 글자를 쓸 수 있다)에 꼼꼼히 메모를 해 와서 통방투쟁을 통해 큰 소리로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읽어주었다. 면회를 통해 입수한 사회적 사건에 대한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불충분하지만 바깥 사회의 투쟁과 호흡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이 정보투쟁 덕분에 우리는 4.3 호헌선언 이후 전두환 정부에 대한 투쟁이 고조되어 가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그에 맞춰 재소자 인권투쟁도 더 활기를 띠었다. 정보투쟁은 정치토론으로 발전했다. 아침 식사후 점심 식사까지, 점심 식사후 저녁 식사까지 우리들은 수시로 정치토론을 했다. 때로는 마주한 방들끼리 국지토론을 했고, 때로는 모든 방들이 참가하는 전체토론을 했다.

투쟁은 소내생활도 좀더 자유롭게 만들었다. 세수시간에는 한 사람 한 사람 차례로 세숫대로 가서 세수를 하고 돌아와야 했는데 이제 그 시간도 길어졌고 교대하며 마주치는 동지들에게 목례도 하고 말도 건넬 수 있었다. 운동시간도 더 길고 자유로워졌다. 담요를 터는 시간에는 두 사람이 잡고 털어야 하므로 다른 방 동지를 만날 수 있었는데 이 때도 교도관이 옆에 있던 말든 좀더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정서적 교감과 지적 교류를 통해 우리는 각방에 나눠 가둬진 분할된 존재로부터 함께 싸우는 지성적 집합존재로 변형되어 갔다. 점점 영리한 개인으로, 점점 공통적인 집합으로 발전해 간 것이다.  

내게 무엇보다 소중했던 것은 각 방에 가두어진 사람들의 공소장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누구나가 재판 준비를 위해 자신의 공소장을 갖고 있었지만 인권 투쟁 이전에는 방들 사이의 소통이 금지되어 있어 공소장 역시 유통될 수 없었다. 재소자인권투쟁은 이 금지의 벽을 허물었다. 공소장을 앞방, 옆방으로 전달하는 일은 소지(같은 수감자지만 소내에서 노동을 하는 사람들로 국보법 위반자가 아닌 소위 ‘일반사범’ 재소자들이 이 노동을 담당했다)가 도와주었다. 소지가 유단포(플라스틱 보온물주머니)에 뜨거운 물을 채워주러 올 때나 편지를 전달하러 올 때, 우리는 이것 XX방으로 전달해 줄래요?, 라고 부탁한 후 감사의 표시로 과자 같은 것을 선물로 줬다.

나의 공소장은 앞 부분에 의례히 들어가는 구절, ‘반국가단체인 북한 괴뢰를 이롭게 하고 어쩌구 …’하는 부분을 빼면 거의 대부분이 언제, 누구와 무슨 책을 읽었고 그 내용은 이러하다는 식으로 맞줄표 다음에 책 내용이 한 줄 한 줄 요약된 독서노트 같은 공소장이었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요약문 끝에는 아마도 ‘그래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어쩌구’ 하는 구절들이 적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읽은 CA 중앙위원들의 공소장은 달랐다. 거기에는 독서내용이 아니라 구체적 행동이 적혀 있었다. 몇날 몇시 어디에서 누구누구와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보경찰을 따돌리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했다. 모임이 발각되어 위험이 있을 때에는 창가에 컵을 내놓아 위험신호를 알리며 그것을 본 사람은 모임에 참석하지 않고 피신하기로 한다.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와 <일보전진 이보후퇴>를 독서내용으로 요약하는 것이 아니라 글귀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고 있었다. 

차이는 사회적 적대성에 대한 지각방식에 놓여 있었다. <민중미학연구회>의 나는 사회적 적대성을 이론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몸으로 그것을 느끼고 체화하지는 않았다. 학문사상의 자유가 기본권으로 보장된다는 미신에 사로잡힌 채, 나는 엉겁결에 안기부 요원에게 붙들려 구속되고 범죄혐의를 쓰게 된 것이다. 당시 CA 조직원들은 그 적대성을 몸으로 느끼고 몸으로 체현하고 있었다. 나는 순진했지만(순수주의), 그들은 (비록 불철저했다 하더라도) “영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맑스주의가 연구건 실천이건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불법의 조건에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하는 “영리함”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동자와 자본가는 서로 적대적 관계에 있다는 것을 머리로만 아니라 몸으로까지 인식하고 그 생각과 감각을 삶 속에 체현하고 있어야 한다는 깨우침. 학문과 사상의 자유에 따른 공부는 합헌적이므로 두려워하거나 회피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혹은 연구행위는 당당한 것이라는 생각은, 이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며 이윤체제에 저항하는 것이라면 생각이건 행동이건 용납하지 않는 자본주의에서는 순진무구한 생각일 뿐이라는 깨우침. 

우리는 우리 자신이 순수하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본가계급이 음모와 술수를 통해 착취와 수탈을 수행한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그에 적합하고 효과적인 대응행동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진실(당당함)을 영리함과 결합시켜야 한다. 승리하는 혁명을 위해서는 강령(진실성)만으로는 부족하고 전략과 전술(영리함)이 필요하다. 이것이 1987년 봄 서울구치소에서 공소장들에 대한 독서를 통해 얻은 교훈이었다. 이때 검찰이 작성한 각자의 공소장들은 나의 진정한 교과서였다.

이것은 내가 교회, 학교, 대학, 대학원에서 목사, 교사, 교수로부터 배울 수 없었던 가르침이었고 친구, 가족으로부터 얻을 수 없던 교훈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1987년의 서울구치소가 나에게는 진정한 학교였고 그곳의 동지들이 나의 진정한 교사였다고 생각한다. 내가, <노동해방문학>이 출간되면 수배될 것을 예상하고 예방적으로 집을 나와 은신했던 1989년 3월 7일부터 1999년 12월 말까지 10년 8개월의 장기 수배 기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이 때 얻었던 깨달음이 아니었으면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