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하게”의 교활성과 “영리하게”의 진실성

-증언자 윤지오와 영리함에 대하여(2)

박훈은 2019년 4월 20일 페이스북에서 윤지오에게 “님이 열어 놓은 모든 계좌를 닫고 다음 주 내로 출국하고, 다시는 장자연 언니 사건을 언급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불문에 붙이겠습니다.”라고 썼다. 후원계좌를 무기로 한 출국협박이다. 여기에는 장자연 사건에 대한 증언권을 박탈하겠다는 의지가 분명히 표명되어 있다. “장자연 언니 사건을 언급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는 요구가 그것이다.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증언자인 그 증언자로부터 증언의 권리를 박탈한다면 누가 장자연 사건을 증언할 것인가? 장자연 문건을 본 적도 없고 장자연 사건을 이제 막 연구하기 시작하며 사건의 본질을 “윤지오 사건”이라고 명명하는 박훈인가? 장자연 문건을 본 적도 없다고 하고 10년이 지나 자기가 본 문건에는 리스트는 없었다고 말하는 거짓말쟁이 김대오인가? 윤지오를 통해 장자연 사건을 알게 된 깜깜이 김수민인가? 배후 세력의 요구에 따라 장자연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데 한몫을 한 꼭두각시 유장호인가? 장자연을 폭행하고 착취하면서 권력자들의 먹잇감으로 장자연을 내놓았던 사장 김종승인가? ‘나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의 이미숙인가? 봉은사에서 문건과 리스트를 불태우고 사라진 그 국정원 직원인가? 병원에서 유장호를 감시하던 그 국정원 직원인가? 증거는 빼돌려져 구멍이 난 상태에서 대체 누가 증언하여 장자연 죽음의 진실을 밝힐 것인가? 박훈은 자신이 ‘진실을 밝히겠다’는 허황된 공언과는 달리 명백하게 장자연 사건의 진실을 가리고 은폐하는 결과를 가져올 행동을 했다.

윤지오가 이 요구에 대해 “헛소리하는 변호사”라는 말로 일언지하에 거절하자 박훈은 으르렁거리며 실제로 4월 23일 김수민을 대리하여 윤지오를 고소하고 이어 Gofundme로 본인이 직접 윤지오를 사기혐의로 고발한다. 그는 진실증언의시간사법의시간으로 뒤덮어 문질러 버렸다. 증언자를 범죄자로 만들기, 그리하여 유일한 증언자를 증언자격 없는 자로 만들어 역사무대로부터 끌어내리고 영원히 퇴장시키기, 이것이 사법기술자 박훈의 역사적 역할이었다.      

이 역할을 위해 그가 사용한 방법이 무엇이었는가? 4월 23일에 그는 윤지오에 대한 출국금지 요청을 하고 윤지오가 캐나다로 떠난 4월 24일에는 다음과 같은 글을 올린다.

[윤지오 출국에 대한 입장]

(…) 제가 이런 점을 우려하여 출국금지 요청을 하였던 것인데 사건이성숙되지못하다보니 고소한 것만으로는 출국 금지할 수 없다는 경찰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윤지오에 대한 법적대응은 계속적으로 할 것이며 윤지오에게 후원금을 입금했던 여러분들이 윤지오에 대한 사기 고소에 동참하겠다고 하여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 윤지오씨는 캐나다로 출국하였지만 경찰 소환 통보에는 당당하게 응하기 바랍니다.(강조는 인용자)

이제 나는 말할 수 있다. “사건의 성숙”, 그것은 부단한 고소고발을 통한 증언자 흠집내기와 기자회견을 통한 여론조작, 그리고 SNS 등을 통한 집요한 마녀사냥이다. 이것은 우리들의 사회적 뇌(惱)와 눈을 마비시키고 혼을 교란시켜 사물들을 거꾸로 보이게 만드는 환등상(phantasmagoria) 놀이다. 법적 대응, 그것은 법 올가미에 마녀를 포획하고 화형터로 끌고 가는 가학성 놀이다. 그런데 바다멀리 캐나다로 몸을 옮긴 그 “마녀”가 순순히 올가미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방법을 찾지 못한 박훈은 마지막 문장에서 여론도 법도 아닌 도적적호소에 의지한다. “당당하게” 경찰소환 통보에 응하기 바란다는 호소가 그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총을 겨눈 사냥꾼이 표적인 사슴에게 숲으로 숨지 말고 “당당하게” 나오라고 소리칠 때의 그 “당당하게!”다. 사법의 부족한 힘을 도덕적 기만술로 보충하여 기필코 윤지오를 포획하고야 말겠다는 적의가 표현되는 교활한 방법이다. 

박훈의 이 도덕적 호소는 박훈의 앵무새 김작가의 인스타그램에서 “당당하게 한국으로 돌아와 구속되라!”는 도덕(당당함)+사법(구속)의 짬뽕 스타일로 변형되더니 각종 벌레 무리들의 디지털 합창으로 변용되어 전 세계에 대한민국의 성폭력-한류를 널리 퍼뜨리는 참으로 부가가치 높은, 그러나 수치스러움을 금할 수 없는 성폭력-산업의 일환으로 편입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가슴 까고 춤출 시간은 있고…”(윤지오 이모부)의 저 “가슴 까고”의 포르노그래피 시선, 여성을 관음산업의 생산수단으로 보는 시선을 낳는 공장이다. 이것은 justicewithus가 맨 앞에 하얀글씨로 써서 보이지 않는 글귀, sexually violent의 시선이다. 이들의 “정의”는 SVJ(Sexually Violent Justice), 성폭력적 정의이다. (이에 대해서는 달리 다룰 시간이 있을 것이다.) 

이런 시선 앞에서 “당당하게”의 도덕심이란 사나운 포획자들에게 잡혀 날로 뜯어 먹히는 순진한 희생(犧牲)양의 도덕심 이상이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마키아벨리가 군주에게 요청했던 두 가지 덕이 필요하다. 사자의 심장과 여우의 두뇌, 용맹함과 영리함이 그것이다. 나는 노태우 정권의 추적을 피해 도피한 후 3당합당으로 등장한 보수 김영삼 정부 내내 숨어살고 1997년 전후 최초의 노동자 총파업의 위력 덕분에 등장한 김대중 정부 2년째에 수배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나는 당당하게 나타나 조사받으라는 도덕적 당당함의 호소, 그 기만술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진실을 자유롭게 하는 것, 우리를 실제로 당당하게 만드는 것은 아래로부터 다중의 봉기와 항쟁, 그리고 혁명뿐이다.

도덕을 포획의 기술로 사용하는 교활한 사법적 사냥꾼들과 성폭력 체제의 파수꾼들에게 화 있을진저! 

““당당하게”의 교활성과 “영리하게”의 진실성”에 대한 한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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