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을 자처하는 가해권력의 자객이 휘두른 칼로 대한민국이 빠져든 피의 홍수 속에서 진실의 좌표를 다시 찾는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 나는 장자연의 죽음이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 혹은 자본주의 가부장제로 인해 비롯되었다고 본다. 나는 이 체제의 폭력성과 모순을 가시화하고 관심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이 체제의  극복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데 관심이 있다. 이 체제는 사회적 노동에 대한 착취와 수탈을 본질로 삼는 것만큼이나 본질적으로 성차별주의적이고 성폭력적이다. 이 때문에 이 체제가 지속되는 한 김용균들의 고통과 죽음은 계속될 것이고 장자연들의 고통과 죽음도 마찬가지로 계속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삶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불구화하는 체제이므로 이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연합과 공통되기를 통해 이 체제를 혁파하고 반(反)성폭력적이고 반(反)노동착취적인  공통체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 2016년 촛불혁명은 이 체제의 극악한 상태를 바로 잡는 데는 부분적으로 성공했지만 이 체제의 성차별주의와 인종주의는 촛불혁명 속에서도 문제로 제기조차 되지 못했다. 2018년의 미투는 촛불 이후 체제의 이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게릴라전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투의 실명 폭로는 백래쉬에 직면하여 체제의 반동을 충분히 밀어낼 만큼 강하지는 못했다. 또 미투는 SNS를 통한 여론전의 성격을 띠었기 때문에 여론전이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한 하층 노동여성의 성폭력 문제는 건드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바로 이러한 한계는 백래쉬에 대응할 만한 전 사회적 역량을 이끌어내는 데 제약으로 작용했다. 
  • 하지만 촛불혁명과 미투의 힘은 10년전 여성연예노동자 장자연의 죽음의 역사적 의미와 현실성에 주목하도록 만들 만큼은 힘이 있었다. 이 힘은 거대 다중이 참가한 국민청원을 매개로 장자연 사건을 과거사조사위원회의 조사대상에 포함시키도록 압박하는 섭정의 에너지였다. 촛불에게 있어서 윤지오는 바로 장자연의 죽음의 역사적 의미를, 그리고 그것을 넘어 그 죽음의 현재성과 현실성을 밝힐 초점이었다. 왜냐하면 윤지오는 장자연과 동일한 여성연예노동자였고 장자연과 고난을 함께 한 노동동행자였으며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장자연이었기 때문이다. 촛불-미투 공통인들(commoners)은, 윤지오의 목소리를 통해, 현실에 부활한 장자연을, 그리고 가해권력의 이름들을 피로 눌러쓴 그 장자연의 절규와 고발의 목소리를 듣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장자연-윤지오는 사시나무처럼 두려움에 떨며 이 시대를 살아야 하는 여성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과거사조사위원회의 목적은 이와는 달랐다. 과거사조사위원회는 국가기관이었고 특히 적폐검찰들에 의해 주도되는 기관이었다. 과거사조사위원회는 장자연 사건을 역사화시키는 선에서 촛불-미투 주체들의 요구를 봉쇄, 봉합하려고 했다. 윤지오는 과거사진상조사단의 조사에서, 그리고 많은 언론 인터뷰에서 ‘증언해 봐야 아무 것도 바뀔 것이 없네요’라며 한숨을 내쉬고 좌절의 표정을 짓곤 했다. 나는 이 좌절의 한숨이, ‘재수사를 통해 가해권력을 처벌하라!’는 촛불-미투 주체들의 현실화[현재화] 요구가, 사실을 역사에 기록하는 것이 처벌이라고 보는 과거사조사위원회의 역사화[과거화] 장벽 앞에서 느끼는 답답함의 표현이었다고 본다. 과거사조사위원회는 국민에게는 차단되어 있고 그들 끼리만 돌려 볼 문헌적 기록을 통해 관련자들에게 문헌적[역사적] 징계를 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갈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 방식의 기록은 지배계급 내부의 권력경쟁의 수단이지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다. 왜 우리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윤지오에게 지출한 900만원에 대해서는 아깝다, 불공정하다고 탓하면서 돌려막기로 국민을 기만한 과거사조사위원회에 지출했을 저 천문학적 비용에 대해서는 이토록 관대한가?
  • 과거사조사위원회의 심의발표는 이러한 ‘역사화’ 목적의식의 압권이었다. 가해 권력자들의 리스트 문제는 더 이상 논란해 봐야 소용 없는 것으로 정리발표되었다. 비록 가해자들에게 역사적 무죄를 선고한 것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공소시효 경과, 증거 불충분 등으로 모든 것을 과거화했다. 성폭행(특수강간)에서 새로운 증거가 나타난다면 재수사한다는 여지를 남겨 두었지만 그들 검찰이 새로운 증거를 나서서 확보할 것이라고 누가 손톱만큼의 기대라도 할 수 있겠는가?
  • 윤지오의 증언에 대한 백래쉬는 4월부터 본격화되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촛불-미투 운동이 검찰주도의(즉 대검 산하의) 과거사조사위원회라는 형태로 자리잡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검찰에서 독립된 시민주도의 과거사조사위원회였다면 사정이 달랐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이 자칭 ‘촛불정부’인 문재인 정부의 이중성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문재인 정부는 시간이 흐를수록 아래로부터의 진보적 목소리를 수렴하되 그것을 보수적 틀 속에서 해소시키는 봉합정책, 수동혁명 테크놀로지를 사용해 왔다. 물론 이것은 촛불-미투의 주체적 한계의 표현이기도 하다. 2016년 촛불과 2018년 미투는 여성=비정규직=하층 노동자들의 자기조직화가 아직 취약하여 정규직=남성=중산층 노동자들의 이해관심의 벽을 뚫을 만큼 혹은 그 층을 견인하기 어려운 상태에 있음을 보여준다.
  • 윤지오는 이 불안정 속에서 대한민국 국민과 과거사조사위원회의 부름을 받아 증언을 시작했다. 2019년 3월 증언의 불길이 가해권력이 앉아 있는 방석으로 옮겨붙으려고 하는 순간에 문재인 정부에 비판적이고 박근혜에 우호적인 성향의 박준영 변호사가 윤지오에 대한 검증론을 펴면서 군불을 때고 뉴시스의 비방보도를 신호탄으로 박훈 변호사가 나서 친구 김대오의 거짓말, 김수민의 음해담을 섞어서 결국 윤지오에게 ‘마녀=사기꾼’이라는 사법 올가미를 씌운 것이 2019년 4월이었다. 광기의 군중들이 이들의 뒤를 따랐고 제도 언론들의 돈벌이 이벤트는 손님들로 가득했다. 윤지오는 졸지에 ‘여자 왕진진’으로 조작되어 진실 증언대에서 끌려 내려와 캐나다로 강제추방 당했다.
  • 윤지오 마녀사냥에서 언론계의 군주로 군림하는 조선일보는 헤럴드경제, 매일경제 등의 경제지들과 연예지들, YTN 등이  물어뜯어 놓은 먹잇감을 조용히 가로채는 하이에나 같은 모습으로 움직였다. 이것은 좌파독재 타도를 내건 우파 유튜버들이 중도적이거나 중도좌파적인 박훈, 김대오, 김수민이 물어뜯어 놓은 먹익삼을 가로채는 것과 유사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 사이에는 좌도 중도도 우도 없는 정치적 연합전선이 펼쳐졌다. 윤지오를 죽일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거리낌 없이 하는 반증언의 연합전선이 형성되었다. 성차별주의적 성향의 우파 가로세로연구소-슛티비 유튜브와 자칭 ‘페미니스트’ 김수민 인스타그램은 반윤지오=반증언 전선에서 서로 열애하는 관계로 발전했다. ‘사회주의자’ 박훈은 조선일보를 싸고 도는 이 연합전선이 자신에게 나쁜 이미지를 남긴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윤지오=사기꾼’이라는 조작된 관점을 이들과 공유하면서도 이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절제된 행보를 취했다. 김대오는 정확히 이 둘 사이에서 좌충우돌의 모터싸이클 놀이를 했다.

‘윤지오 사기꾼 만들기’ 공작의 구성요소들

이미 사회적 수준으로 확산되고 발전된 ‘반윤지오 혐오전선’과 ‘윤지오 사기꾼 만들기 공작’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성분과 주목할 만한 경향을 갖는다.

  • 정치적 우파가 반문재인 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반윤지오 혐오감정을 정치적 무기로 활용하고 있다. 즉 증언자 윤지오를 무너뜨리는 것이 윤지오를 증언대에 세운 문재인 정권의 밑둥을 헐어내는 일이기 때문에 다가오는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윤지오를 집중 공략하고 있다. 윤지오 매도는 장기적으로는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에 대한 재수사를 영구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 가해권력의 전략적 공세지만 단기적으로는 총선에서 승리하여 재집권의 기회를 노리는 자유한국당파가 적폐검찰의 조력 하에, 조선일보 등의 우파언론, SNS내 반문재인파를 앞세워 수행하는 총선전술이다. 현재는 이 흐름이 윤지오에 대한 사법고발고소 등의 여론조작을 수행하는 여론 주도층으로 확실하게 기능하고 있다. 
  • 그런데 또 하나 중요한 지점은 중도보수 문재인 정권과 여당인 민주당이 수구보수파의 이러한 공세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고 수수방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시사인의 보도에서 확인되었듯이 문재인 정권은 20대 남성 세대가 지지층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페미니즘/여성 이슈의 부상이 가져온 반발작용으로 독해하면서 득표를 위해 페미니즘/여성 이슈에서 발을 빼는 방향으로 정책 기조를 잡아 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남성 20대가 페미니즘/여성 이슈의 부상에서 불안감을 느낀다면 신자유주의화가 생산한 여-남 공동의 삶의 불안정을 여성에게 전가하는 성차별적 대응 이상이 아니다. 만약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이 이러한 대응에 영합하여 여성, 페미니즘 이슈에서 발을 빼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이것이 윤지오에 대한 대응을 회피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면 이것은 크나큰 실책이며 자신의 발등을 찍은 것 이상의 어리석은 대응 이상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우파 세력들과 조선일보 SBS와 같은 반민주적 정치언론들 이 ‘윤지오 사기꾼 만들기’를 통해 반페미니즘 성차별 공세를 하고 있는 것에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이 합류하는 것이고 이것은 자신들의 발밑을 파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 자본주의의 유지와 지속에서 이익을 얻는 사회적 우파가 친자본주의 입장을 반윤지오와 결합시키고 있다. 윤지오는 장자연과 더불어 노동자, 그것도 계약직 노동자이다. 언론, 교회, 대학 등의 이데올리기적 국가기구가 조성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거의 무의식화된 계급차별과 노동천시 관념(그것은 국민은 개, 돼지라는 말로 집약된다)은 윤지오에 대한 언론의 악선동에 쉽게 넘어가는 정신적 기질로 나타난다. 이것은 표면에 활성화되어 나타나는 흐름은 아니다. 하지만 이 사회적 우파주의 경향은 자본주의가 여성의 무임노동에 대한 수탈 없이는 존립할 수 없다는 점에서 사회의 심층에 무의식화된 흐름이며 남성만이 아니라 남성체제에 동화된 여성도 공유하는 흐름이다.
  • 그런데 박훈이 보여주듯이 전통적 좌파의 일부도 반윤지오 전선의 일부로 편입되어 있다. 전통적 좌파는 산업공장을 모델로 태어났기 때문에 연예인을 룸펜적이고 기생적인 프롤레타리아층(“딴따라”, 즉 부지런히 노동하는 ‘개미’가 아니라 노래부르는 ‘매미’)으로 보는 관점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구축된 노조운동이 남성본위적이고 남성우월적인 관점, 즉 성차별적 관점을 공유하고 있었다. 산업자본주의에서 인지자본주의로의 전환이 이러한 관점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만들지만 관념상의 시대착오가 계속되는 것은 부자연스런 일이 아니다. 의식은 현실보다 더디게 바뀌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 미투를 촉발했던 페미니스트 세력 일부의 상대적 방관도 주목되는 일이다. 물론 아직까지 윤지오의 증언자 입장을 가장 강력하게 떠받치고 있는 것은 여전히 미투여성들이다. 하지만 장자연-윤지오가 미투 흐름 속에서 출현한 운동적 초점임을 고려하면 현재의 연대력은 이상하리만치 약하다. 윤지오는 진정 페미니즘의 힘과 연대를 요구하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지금 미투여성 운동이 증언자 윤지오와 윤지오의 진실을 지키지 못하면 누가 지킬 것인가?
  • 혹시 내[우리]가 증언자 윤지오와는 연대할 수 있지만 ‘사기꾼’, ‘탕녀’로 의심되는 윤지오와 연대하고 싶지는 않고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 이런 경우라면, 윤지오 다음으로 마녀사냥의 표적이 바로 내[우리]가 될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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