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에 대한 혐오(veritaphobia)

봉준호의 <기생충>은 ‘냄새나는 사람’에 대한 혐오를 다룬다. 혐오를 주는 그 냄새는 어떤 냄새일까? 지하의 냄새, 하층민의 냄새, 시궁창 냄새, 벌레의 냄새다. 한때 교육부 정책기획관이었던 나향욱의 언어로 표현하면 ‘개-돼지’의 냄새일 것이다. 그것은 민중의 냄새, 다중, 주권자 국민의 냄새다. 이들이 서로는 맡지 못하는 어떤 공통된 것이 어떤 문턱 너머의 사람들에게는 쓰러질 것 같은 현기증을 야기시키는 냄새로 다가간다. CEO 동익은 운전사 기택의 행동이 선을 넘지 않는 것에 만족하면서도 선을 넘어오는 그 냄새 때문에 불편해 한다. 그 불편함은 동익의 아내나 아들이 공유하는 계급적 불편함이다. 이 불편함이 바깥으로 표현될 때 혐오로 나타난다. 

냄새나는 사람에 대한 혐오. 이것을 우리는 인종주의라 부를 수 있다. 냄새 나는 사람에 대한 혐오를 통해 인류가 인종으로 구분되고 배제해야 할 인종이 규정되기 때문이다. 이 배제해야 할 사람들을 표현하는 흔한 표현은 ‘이상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홍준표는 ‘윤지오의 거짓말’이라는 유튜브 동영상에서 정작 왜 윤지오의 증언이 거짓말인가는 논증하지 못한다. 수 십 년 동안 술집에 안 갔다는 홍준표의 일방적 주장이 윤지오가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의 이름을 닮은 정치인의 이름을 리스트에서 보았다는 증언을 거짓말로 만들 수 있는 근거는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이상한 여자가 국회의원을 등에 업고 설쳤다” “이상한 여자가 이상한 단체하고 합작해서 리스트에서 홍준표라는 이름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 이상한 여자를 고발했다” “이런 이상한 여자가 정권과 손을 잡고 설치면 안 된다” 등으로 윤지오를 여러 차례 “이상한 여자”라고 묘사하면서 그의 인격을 훼손하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스스로 창피하다고 하면서, 다시 말해 창피함을 무릅쓰고 말이다. 홍준표는 “이상한”과 “여자”를 결합시킴으로써 이상한 ‘냄새’가 나는 그 사람이 “여자”임을 강조한다.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는 여기서 아무런 경계도 없이 화학결합된다. 그리고 그 결합은 그 이상한 여자는 “본 정신이 아닌” 즉 “미친” 여자이므로 “동부지검”이 이 여자를 “집어 넣어 달라”는 주문으로까지 이어진다. 홍준표가 만들어낸 ‘여자다=이상하다=미쳤다’의 등식은 문화평론가 손희정이 ‘젊은 여성을 위험한 인간’으로 보는 편견, 즉 가부장적 성차별주의의 하나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냄새나는 사람”, “이상(異常)한 여자”는 “수상(殊常)한 사람”이라는 표현과도 쉽게 결합된다. “의심나면 다시보고 수상하면 신고하자”. 멸공 포스터의 구호였다. 극우논객인 지만원은 전두환 군사독재와 계엄군에 맞서 항쟁에 나섰던 광주 시민들을 “수상한 사람들”로 불렀다. 

지만원이 제1광수로 지목했던 ‘김군’: 그의 눈은 무엇을 응시하고 있을까? (사진은 <중앙일보> 이창성 기자가 80년 5월 22~23일 찍었다고 한다.)


그는 이들을 남파된 북한군 특수부대원인 “광수”(광주의 수상한 사람들)라고 부르면서 한 사람 한 사람 번호를 붙였다. 강상우 감독의 다큐멘타리 영화 <김군>은 지만원이 “제1 광수”라고 부르면서 북한군 특수부대원으로 지목했던 그 사람이 실제로는 누구인지 찾아가는 영화다. 확인을 위한 긴 여정 끝에 그 “제1광수”는 광주의 어느 다리 밑에 살면서 넝마주이를 하던 사람, 부를 이름조차 갖지 않았던 ‘김군’으로 밝혀진다. 그는, 1980년 5월21일 광주에서 계엄군이 금남로에 결집한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해 수 십 명이 죽은 뒤 총을 들고 무장항쟁에 나섰던 시민군 가운데 한 사람이며 5월 23일에 시작된 수습위원회에 의한 총기반납 조치 때 총기를 반납한 후 시신으로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는 사람이다. 시신이 있었던들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었을까? 영화 김군은 인간의 존엄, 시민의 정의, 국민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섰던 사람들이 바로 이들 “지하 생활자들”, “다리밑 생활자들”, “수상한 사람들”, “이상한 사람들”, “냄새나는 사람들”이었음을 잔잔한 어조로 보여준다.

“이상한 여자”라는 인종차별적 감각양식이 페미니스트를 자임하는 일부의 사람들 속에서도 발견되는 것은 아이러니다. 다음은 어떤 자칭 ‘페미니스트’ 네티즌의 말이다. 

“그녀[윤지오]는 페미니즘을 악용한 것만 같아여. (…) 페미니즘이 진짜 필요한 이들에게 페미니즘이 닿지 않아 가끔은 그들을 욕하기도 한다는 걸요. 그래서 처음엔 저도 속이 상했지만 그녀를 응원했네요.(..) 저는 근 삼개월간 눈팅으로 윤지오씨 사건을 봤고 최근 한달간은 일명 윤지오씨 까판이라는 곳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저는 상식이 없는 사람이 아니고 의심병이정말많은사람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녀에대한이질감을 느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응원은 했지만 계속 달라지는 발언을 들으면서 뭐가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그 의문점이 해결되더라구요. ”

여기서 “의심병이 정말 많은 사람”이 윤지오에 대해 처음부터 느꼈던 “이질감”과 “이상함” “의문점”은 어떤 방향으로 발전하고 또 정착되는가? 윤지오가 “한 번도 진실을 말한 적이 없는 사람”이며 “증인이 아니다”라는 방향이다. 요컨대 윤지오는 사기꾼이며 표절자이고 범죄자라는 방향이다. 이 혐오의 감각양식 속에서 냄새나는 존재가 개, 돼지나 벌레이지 ’인간’이 아니듯이, 이상한 여자는 ‘증인’일 수 없다. 수상한 사람은 폭도이거나 간첩이지 ‘시민’일 수 없다. 항쟁하는 사람, 증언하는 사람,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혐오의 감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선을 넘는 사람들’이며 ‘선을 넘어오는 견딜 수 없는 냄새’이기 때문이다. 

‘선을 넘어오는’ 이 진실의 냄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지만원은 항쟁에 나선 광주의 시민을 “수상한 사람”으로 몰아 남파된 북한특수부대원으로 조작하고(윤지오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쓴 나의 글에도 이런 악플들이 달린다: “소위 간첩같습니다. 북한어를 하시는지 일반적소통도 안되고. 당신 뭐하는 사람입니까???” 혹은 “간첩신고 111 조정환 아저씨 진짜 수상해요—“), 홍준표는 선을 넘어오는 증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이 여자 이대로 둬서는 안 되겠다”) 윤지오를 “이상한 여자” “본 정신아 아닌 여자”로 몰아붙여 감옥으로 보내고 싶어 한다. ‘젊은 여자’인 자칭 “페미니스트”도 같은 여성인 윤지오를 범죄자로 몰아붙여 격리하고 싶어 하는데 이것은 증언자 윤지오가 ‘선을 넘었다’고, ‘냄새가 난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윤지오가 어떤 선을 넘었다는 것일까? 일상의 선이다. 수상(殊常)이나 이상(異常)은 모두 상(常)을 기준으로 그 ‘상’과 다른(異, 殊) 것에 대한 혐오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일상은 오래 반복되고 오래 지속되는 것이다. 그것은 공고하게 구축된 질서, 체제를 의미한다. 그것은 넘지 말아야 할 선, 2008년 촛불을 막기 위해 광화문에 설치되었던 ’명박산성’의 질서이다. 그런데 일상의 진정한 비밀, 일상의 진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권력자들이 시민들에 대한 학살, 노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착취,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학살, 착취, 성폭력의 일상이다. 항쟁하는 사람들, 증언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이 학살, 착취, 성폭력의 체제를 고발하기 위해 체제의 선, 질서의 선을 넘는 사람들이다. 체제는 이들의 이 움직임을 견딜 수 없는 냄새로 경험하고 혐오로 대응한다. 

이 혐오의 대응에서 가장 먼저 나서는 사람들이 누구일까? 시민사회가 약할 때 가장 먼저 혐오의 대응에 나선 것은 경찰과 군대였다. 국가기구가 혐오 대응의 선봉대였다. 하지만 시민사회가 두터워진 후 혐오 대응의 선봉대는 국가기구가 아니다. 시민사회 속에서 일상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최초의 대응이 이루어진다. 성폭력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최초 대응에는 “아내들”이 앞장선다. 아내는 ‘안 것’을 의미하는 “안해”에서 나온 말이다. 경상도 말 “니 해라”가 ‘너의 것으로 하라’를 의미하듯이, ‘해’는 ‘물건’, ‘소유물’을 의미한다. 그것은 남성 가부장의 시선에서 파악된 여성, 남성의 소유물로서의 여성이다. 여성이 이 ‘아내’ 관념을 내면화할 때, 이 여성은 가부장주의의 파수꾼으로 기능하게 된다. 아내로서의 페미니즘은 다른 모든 여성을 위험한 여자, 이상한 여자로 보는 보편적 의심증의 주체가 된다. 아내-페미니즘은 여성의 권익을 지키고자 하지만 그 노력은 꽃뱀으로 의심되는 모든 여자들로부터 자신의 아내 지위를 지키고자하는 방어적 투쟁으로 된다. 그 결과 남성 권력자들이 자행하는 성폭력은 위험한 여자들의 꼬임(사기)으로 인해 자신의 남편이 겪는 피해로 인식된다. 아내-페미니스트들이 여성사회를 내전의 무대로 만들면서 이 세계의 여성 전체인 ’이상한 여자들’을 상대로 벌이는 시민사회적 투쟁을 지켜보면서 성폭력 체제와 가부장주의는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서술하고 실비아 페데리치가 <캘리번과 마녀>에서 서술한 마녀나샹은 결코 과거사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여기에서 국가기구와 남성 권력자만이 아니라 아내주의-여성, 아내-페미니스트들을 선봉대로 생생하게 되풀이 되고 있는 잔혹사이다. 

퍼시 애들론 감독의 영화 <바그다드 카페>는 이와는 전혀 다른 길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남편과 헤어지고 실의에 젖어 있던 브렌다도 처음에는 독일서 건너온 여성 야스민을 ‘이상한 여자’로 바라보고 ‘위험’을 느끼며 심지어 그에게 총까지 겨눌 태세지만, 집과 마을을 청소하고 어린아이를 돌보며 마술-예술로 동네 사람들의 마음을 일깨우는 야스민과   더 없는 우정의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그 이상함, 수상함, 위험스러움이야말로 야스민의 힘이었고 공동체를 재건하는 마력이었다. 야스민은 ‘이상한 사람’에서 ‘그리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으로 새롭게 이미지화된다. ‘이상한 여자’를 배척하기보다 환대하는 태도는 이 영화에서 야스민을 처음 만났을 때 루디 콕스(잭 팰랜스 분)에 의해 스쳐 지나가며 표출되었다. “Hello, stranger!”(반갑습니다. ‘이상한 사람’ 님!) 

증언자 윤지오는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그 이야기 속에는 일상의 사람들이 믿기 어려울 정도의 이야기들이 많다. 국정원이 봉은사에서 장자연 문건을 관리하고 유장호의 병원에서 그를 감시했다든가, 구준표와 이름이 유사한 정치가가 리스트에 있었다든가, 성이 같은 언론인들의 이름이 리스트에 있었다든가, 장자연이 마약을 모르는 새 주입 당하고 성폭행을 당했을 가능성에 대해 조사해 달라든가….등의 이야기들이 믿기 어려운 것은 우리가 우리가 일상으로 겪고 있고 나날이 되풀이 하고 있는 우리의 체제, 우리의 질서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두텁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우리가 우리의 국가, 우리의 언론, 우리의 남편이 그런 식의 악행과 추행에 연루되었으리라 추호도 믿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윤지오에 대한 혐오와 마녀사냥은 나의 국가, 나의 언론, 나의 남편에 대한 믿음을 증언자에게 정반대의 방향으로, 즉 의심과 불신으로 투사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만약 윤지오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어쩔 것인가? 우리의 국가, 우리의 언론, 우리의 남편이 정확히 윤지오가 증언한 그대로 행동해 왔다면 어쩔 것인가? 그래도 당신은 진실에 대한 그 혐오를 계속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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