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 살던’ 시기 윤지오의 공개활동에 대한 대중과 언론의 지각적 착시에 대해

“나는 숨어 살았다”의 경험분석

윤지오에게서 “나는 숨어 살았다”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었다. 하나는 이름과 관련된 것으로 자신의 진짜 이름인 실명을 숨기고 살아야 했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기자 등에 쫓겨 살면서 대인기피증으로 숨어 살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두 가지 의미를 한 글자 한 글자 그대로, 뼈속까지 이해하고 공감한다. 이것을 거짓말이라고 곡해하고 또 그 곡해자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천진난만함에 아연(啞然)할 뿐이다. 어린아이들이 아니라 나이먹은 어른들이 기자에 앵커, 편집장에 발행인까지 다 맡고 있는 일부 언론방송들까지 이런 철없는 천진난만함을 보이는 것은 그들이 순진해서라기보다 이런 것과 유사하거나 동질적인 피억압의 경험을 해보지 못하고 이땅의 다중들과는 딴판의 세상, 억압자의 세상에서, 혹은 그 세상과 연루되어 살아온 탓이리라. 그래서 그러한 경험에 공감할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경험을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조차 잃어버렸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그러한 피해에 대한 호소가 괜히 엄살과 거짓말로 보이고 적대적으로 보여서 짓밟고 싶기 때문이리라. 그들이 ‘나는 숨어 살았다’는 고백이나 폭로조차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영원히 ‘숨어 살도록’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여기서 나는 <왜곡>이 선택한 텍스트 분석 방법과는 달리, 나 자신이 겪어온 “숨어 살았다”를 가지고 윤지오의 “숨어 살았다”를 유비적으로 설명하는 추체험적 방법을 사용해서 윤지오의 “숨어 살다”의 의미를 설명해 보려고 한다.

나는 1988년 이전까지는 실명[본명] 하나만을 갖고 살았다. 가정에서는 물론이고 친구들을 사귀거나 글을 쓰거나 번역을 하거나 모두 이 실명을 사용해서 살았다. 내가 가명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88년 가을, 그러니까 월간 <노동해방문학> 창간을 준비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나는 두 가지 정체성으로 분할되었다. 기고를 하거나 친분관계를 맺을 때는 실명을 사용했지만 활동은 가명(’정상우’)으로 했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이라는 악법 때문에 실명이 사회적 실천의 영역에서는 사용될 수 없는 것으로 억압되었다. 1990년 10월 30일 공개수배 후에 나는 이미 오염된 기존 가명을 버리고 신분증에 씌어진 새로운 가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후 집필의 필요가 발생하면서 ’이원영’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가명과 글자 하나만 다른 것이었다. 추적을 피하기 위해 실천에서는 물론이고 기고나 생활에서도 실명을 사용할 수 없게 되면서 나의 정체는 실명, 가명, 필명으로 삼분할되었다. 월세방 계약, 은행통장 개설, 검문을 당할 때 등에는 신분증명인 가명을 사용하고 글을 기고할 때에는 필명을 사용했다. 실명은 억압되었으며 실명을 아는 사람과의 만남은 최소한으로 제한했다. 통제 가능한 범위, 즉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숫자 이내로. 이런 식으로 ‘실명의 나’는 10년간을 조용히 숨죽이며 “숨어 살았다.” 

실명에 대한 이러한 억압은 ‘대인기피증’으로 나타났다. 월세방을 구할 때에는 주인의 출입구와 입구를 완전히 달리하는 곳을 구해야 했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사람으로 위장한 나는 하루 종일 골방에서 공부를 하다가 밤이 되기를 기다려 시장이나 거리로 나가곤 했다. 낮에 거리를 걷는 경우는 ‘실명의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혹시나 있지 않을까 초조한 발걸음이 되었다. 멀리 제복을 입은 경찰이 보이면 심장이 두근댔다. 그래서 미리 아무 골목으로나 꺽어들어가 다른 길로 돌아갔다. 미행이 있지 않을까 골목을 꺾어돌 때마다 뒤를 살폈고 지하철을 탈 때에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탄 후 차가 출발하기 직전에 재빨리 올라탔다. 거처로 돌아오는 길에 낌새가 이상하면 버스를 내려 갈아탔다. 해충이나 동물보다 사람이, 그 중에서도 경찰이 내게는 가장 큰 두려움을 주는 존재였다. 윤지오에게는 기자가 가장 두려운 존재였지만 나에게는 경찰이 그랬다. 경찰은 나로 하여금 실명으로 살 수 없게 만드는 직접적인 위협세력이었다. 10년 간 딱 한 번 노상검문을 받았다. 경찰에게 ‘가명의 나’(신분증)을 당당한 체 내밀었지만, 그 순간에 가명의 나 속에 숨어사는 ‘실명의 나’는 두근거리며 떨고 있었다. 사람들은 실명의 내가 ‘인도로 갔다’거나 ‘죽었다’고들 말하고 있었지만 ‘실명의 나’는 ‘가명의 나’ 속에 깊이 ‘숨어 살았다’. 

1999년 말 수배가 풀리고 문학평론가 김명인이 한겨레신문에 ‘조정환이 돌아왔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쓴 전후로 여러 신문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기자들의 많은 질문이 “어떻게 숨어 살아왔냐?”는 것에 집중되었다. 가족, 친지 등 연고자와의 연락을 끊고 “나는 10년 동안 손 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사람만을 만났다.”고 답했다. 이 말은 사실일까? 아니면 거짓말일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의 정체성이 실명, 가명, 필명으로 분할된 복수 정체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다른 답을 얻게 된다. 주어 ‘나’가 실명을 가리키는가, 가명을 가리키는가, 필명을 가리키는가에 따라 답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10년 동안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사람만을 만났던 것은 필명의 나도, 가명의 나도 아닌 실명의 나이다. 실명의 나는 실제로 10년 동안 열손가락 이내의 사람들만을 만났다. 실명의 나를 아는 경제적 후원자나 실천적 동료들은 결코 열명을 넘지 않았다. 고맙게도 10년 동안 그들은 나를 만난다는 사실을 그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실명의 내가 죽었다, 인도로 갔다는 소문은 아무도 나에 관한 소식을 듣지 못했고 한국에 살아 있다는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나는 10년 동안 손 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사람만을 만났다.”고 말할 때 그 말은 글자 그대로의 사실이다.

하지만 ‘가명의 나’는 어떤가? 가명의 나는 10년 동안 꽤 많은 집주인들, 집주인의 가족들, 부동산중개업자들, 비디오 테잎 대여점 주인 등을 스쳐지나가며 만났다. 신분증을 필요로 하는 다양한 생활 영역에서 나는 가명으로 관계를 맺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경찰과도 그랬다. 이 관계는 내가 원해서 맺는 것이 아니라 부득이하게 맺는 관계들이었다. 이 관계들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보다 많다는 것은 분명하다. 만약 이 ‘가명의 나’를 주어로 놓고 술부를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사람만을 만났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또 ‘필명의 나’는 어떤가? 당시에 나는 필명으로 출판사의 창립과 운영에 관여했으며 필명으로 번역서를 내고 다양한 매체에 기고도 했다. 기자들과 메일 교환을 하고 해외 필자들과도 메일 교환을 했다. 해외 필자들이 방한했을 때 면담을 하기도 했다. 참가자를 사전에 파악할 수 있는 소규모 모임에도 참석했다. 얼굴을 대하지 못하지만 필명의 나는 신문, 잡지, 단행본을 통해 수만명,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사람들과 이미 만나고 있었다. ‘필명의 나’는 숨어살지 않았다. ‘필명의 나’는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나’였다. 수배가 풀린 후 나는 ‘이원영’이라는 나의 필명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필명의 나’를 주어로 놓고 그 술부를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사람만을 만났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주 큰 거짓말이다.

그런데 나와 인터뷰한 기자들이 ‘나’에게 인터뷰를 요청해 왔을 때, 그 ‘나’는 ‘가명의 나’나 ‘필명의 나’가 아닌 ‘실명의 나’였기 때문에 내가 “나는 숨어 살았고” 그 기간에 “손 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사람만을 만났다”고 했을 때 그 말은 결코 거짓말일 수 없고 사실인 것이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이원영=조정환”이라는 사실을 나 자신이 밝히고 또 사람들이 이것을 알게 된 후, 소급해서 나의 인터뷰를 읽는 사람들은 혼동에 빠질 수 있다. 특히 공개적으로 활동한 이원영의 글이나 책을 읽고 또 직접 만난 사람들이 이 인터뷰를 읽을 때 그 사람들은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착각에 빠질 수 있다. 왜냐하면 이원영은 숨어 살지도 않았고(즉 상당히 공개적으로 활동했고)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를 훨씬 넘는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착각은 분할되었던 정체성들이 뒤섞이고 시차(時差)가 간과됨으로써 나타나는 지각적 착시에 지나지 않는다.

윤지오의 공개활동에 대한 대중들과 언론들의 지각적 착시

다행스러운 일일까? 아직까지 나의 당시 인터뷰를 두고 내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냐고 묻거나 따지는 사람을 나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윤지오는 나와 매우 흡사한 경우임에도 불구하고 “숨어 살았다”는 말 자체가 거짓말이라는 군중 및 언론의 지탄을 받고 있다. 나는 이 현상에, 다른 요소들 외에 성차별, 특히 젊은 여성에 대한 가부장제적 불신문화가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잠시 접어두고 어떤 의미에서 윤지오의 경우가 나의 경우와 흡사한지를 살펴 보는 데 집중하겠다.

윤지오의 이름, 그의 정체성은 몇 개로 분할되어 있는가? 장자연의 동료배우의 이름이 윤지오이고 그것이 예명이며 그의 실명(본명)이 윤애영이라는 사실이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2019년 3월 4일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통해서였다. 이후 대중들은 시차(時差)를 잊어버리고 윤지오가 각각의 시간들 속에서 달리 사용했던 이름들을 뭉뚱그려서 지각하는 착시에 빠진다. 이제 지배적 이름으로 된 ‘윤지오’는 장자연의 문건/리스트에 관한 증언자로 나선 그 윤지오이다. 이제 그 윤지오를 중심으로 모든 이름들이 환원(reduction)되어 지각된다. 가족이나 친지들 사이의 이름인 실명 윤애영도 윤지오로 지각되고, 연예계에서 사용했던 이름인 예명 ‘윤지오’도 윤지오로 지각되며, 경찰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던 ‘이순자’도 윤지오로 지각되고 장자연의 동료배우 ‘윤모씨’도 윤지오로 지각되며, 2018년 MBC PD수첩에서 ‘얼굴을 부옇게’ 가리고 인터뷰 증언을 하는 ‘김지연’(<13번째 증언>, 226쪽)도 윤지오로 지각되고, 각종의 언론에서 등장한 기호화된 이름인 A씨, Y씨 등도 윤지오로 지각되며, 아프리카 방송에서 라이브방송을 하고 있는 그 얼굴도 윤지오로 지각되는 것이다. 

이러한 지각이 놓치는 것은 이순자, 김지연, 윤모씨, A씨, Y씨라는 가명들 속에 ‘실명의 윤지오’(윤애영)가 “숨어 살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지각이 포착할 수 없는 것은 ‘실명의 윤지오’가 이 “숨어 삶” 속에서 겪었던 아픔이다. 이러한 지각이 간직할 수 없는 것은 장자연의 죽음 이후 단지 장자연의 동료였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기자에게 쫓기고 다양한 기회에서 배제되면서 ‘실명의 윤지오’가 느꼈던 좌절의 기억이다. 이러한 지각이 숨기는 것은 ‘가해자가 당당하고 피해자가 숨어 살아야 하는’ 거꾸로 물구나무 선 사회현실 앞에서 ‘실명의 윤지오’가 내쉬었던 억울함의 한숨이다.

2019년 3월 4일 실명공개와 그것에 대한 일차원적 대응에서 비롯된 이 지각적 착시로 인해 사람들은, “지난 10년 동안의 영상자료 등을 보면 윤지오 씨가 대외활동을 공개적으로 한 사례들이 많은데, 왜 숨어 살았다고 말했는지, 그것이 거짓말이 아닌지?” 따져 묻거나 비난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나의 경우에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사람만을 만나며 숨어 살았던 것이 ‘가명의 나’나 ‘필명의 나’가 아닌 ‘실명의 나’였듯이, 윤지오에게서도 숨어 살았던 것은 ‘실명의 윤지오’이지 ‘가명의 윤지오’, ‘예명의 윤지오’, ‘이름 없이 기호화된 윤지오’가 아니었다. 가명이나 예명, 기호의 윤지오는 ‘실명의 윤지오’가 장자연의 죽음에 대한 증언자가 된 이후 다양한 위험들과 위협들 때문에 숨죽이며 ‘숨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이 다양한 이름의 윤지오들의 존재야말로 윤지오가 ‘숨어 살았음’을 뚜렷이 증명하는 지표가 아닌가? 

그래서 나는 이제 거꾸로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이 지난 10년간 대외활동을 공개적으로 했다고 주장하는 그 사람이 과연 ‘실명의 윤지오’가 맞는가? 아니면 당신의 지각적 착시 속에서 ‘실명의 윤지오’와 혼동되며, 실명의 윤지오가 그 속에 ‘숨어 살았던’ ‘가명의 윤지오’, ‘예명의 윤지오’, ‘기호의 윤지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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