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오가 ‘숨어 살기’를 거부하고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기로 결심한 진짜 이유_프롤로그

저는 묻고 싶습니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성폭력 피해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던 것일까요, 아니면 성범죄를 방치하고 가해자들을 두둔하고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해온 공동체로 인해 입을 열지도 못한 채 고통을 받으면서 죽어갔던 것일까요? 피해자들의 입을 열 수 없게 만든 것이 그들의 두려움과 나약함 때문일까요, 아니면 피해사실, 진실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그들을 꽃뱀, 창녀로 부르고 의심하고 손가락질해온 공동체 때문이었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이제까지 성폭력은 개인 문제가 아니라 집단적 문제였고, 약자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홀로코스트였습니다.” -서지현

대한민국에 윤지오가 숨어 살아온 이유를, 또 그것을 강제한 억압적 조건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감각이 마비되고 지성이 혼탁해진 그런 사람들은, 윤지오가 더 이상 숨어살지 않기로 결심하고 실명과 얼굴을 공개한 이유도 당연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들의 지각적 착시 속에서, 숨어 살 수밖에 없었던 실명의 윤지오가 숨어살지 않았던 가명들의 윤지오와 혼동된다는 것에 대해 이미 설명했다. 즉 이런 사람들에게 윤지오는 숨어살지 않은 것으로 보이므로, 이제 와서 숨어 살지 않겠다고 선언할 이유도 권리도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2019년 3월 4일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의 저 실명 공개와 얼굴 공개는 무엇이란 말인가? 윤지오가 숨어 살지 않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2019년 3월 4일에 있었던 실명공개와 얼굴 공개의 사건을 마치 수 십 년부터 자신이 윤씨, 김지연씨, 이순자씨, A씨, Y씨가 윤지오이고 윤지오가 윤애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계속 착각한다. 착각은 착각을 부르고 기만은 기만 속에 녹아들며 환상은 환상을 연출한다. 

바로 이 환상의 극장을 파고든 것이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의 가해자들이다. 이들은 윤지오가 숨어살지 않았다는 환상을 근거로 숨어 살았다는 윤지오의 말을 거짓말로 뒤틀며 오래 전부터 실명의 윤지오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느끼는 지각적 환상을 근거로 윤지오의 실명공개와 얼굴공개를 사기를 위한 포석으로 조작한다. 자신의 검은 실체가 증언을 통해 폭로될 것을 두려워한 이들은, 윤지오가 2019년 3월 4일에 처음으로 그간 숨어 살았던 자신의 실명과 얼굴을 공개했다는 사실을 고의적으로 건너뛰면서 ‘윤지오가 과거에 숨어살지 않았다’를 사실처럼 만들어 내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그래야만 3월 4일의 실명공개와 얼굴공개를 미래의 사기를 위한 공개-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주체적 결단의 사건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거짓말’과 미래를 위한 ‘사기’를 ‘영리하게’ 편집하는 범죄행위로 조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교활한 작태인가? 이 얼마나 간악한 집단범죄인가? 이 얼마나 끈질긴 n차 가해인가? 윤지오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들은 바로 장자연을 죽음에 이르게 한 바로 그 가부장제 권력자 집단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숨어 살도록 강제하는 것은 권력이다. 힘의 비대칭이 눈을 부라리고 쫓아 다니는 사람과 숨 죽이며 숨어 사는 사람 사이의 기우뚱한 관계를 만든다. 숨어 산다는 것은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을 권력에 의해 부당하게 유린당하며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신 권력의 일부인 사람들은 이 비대칭과 유린의 상황에 둔감하다. 그것이 그냥 늘 그러한 자연 그 자체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낀다. 혹은 그 자신이 권력의 일부는 아니면서도 권력에 혼을 빼앗겨 권력의 지배와 권력 질서 없이는 자신이 사는 세상이 혼돈과 무질서 때문에 붕괴할 것이라고 여기고 그 붕괴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자기자신이 유린당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망각해 버린다. 즉 숨어서라도 살아가면서 언젠가 권력 질서를 해체하면서 밝은 대낮에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지, 회복의 기회를 기다리며 절치부심(切齒腐心)할 수 있는 자아능력을 잃어버린다.

이런 둔감함이나 아둔함 속에서 윤지오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망막에 윤지오는 숨어 살지도 않으면서 숨어 살았다고 거짓말하는 형상으로 나타나며, 공개할 삶도 실명도 얼굴도 없으면서 공개-쇼를 하는 사기꾼의 형상으로 비춰진다. 동일한 물체도 거울이 일그러져 있으면 일그러져 보인다. 그로 인해 생기는 환영은 필연적이다. 이 필연적 환영을 수정할 길이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물질적으로(materially) 그 거울을 반듯하게 펴는 것뿐이다. 즉 일그러진 권력관계를 해체하고 힘의 비대칭관계를 실제로 없애는 것뿐이다. 망막이 일그러져 있는 한, 말로 아무리 상세하게 설명한다 해도 그 필연적 환영이 사라지게 만들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거울을 평평하게 펼 필요에 대한 감각을 좀더 절실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왜 윤지오가 숨어 살기를 거부하고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기로 결단했는지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 문제에 대한 검토를 통해 나는 2019년 3월 4일의 공개행동이 (숨어 살지 않았던 사람이 행한 사기행위라는 음해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10년간 숨어 살다가 그 나름의 인식론적 변용을 거쳐 행한 인간적 결단, 특히 강요된 ‘피해자다움’, 강요된 ‘숨어 살기’에 대한 거부의 행위임을 밝히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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