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던 사칭술에 대해

나의 글”슛맨, 가해권력, 그리고포스트모던사칭술”에 ID 김상범 님이  “사칭술이면 그냥 사칭술이지, 왜 ‘포스트모던’이 붙는지 모르겠네요.”라는 댓글을 달아 주었다. 내가 위 글에서 그 용어의 의미를 문면 속에 묻어두었지 별도로 꺼집어 내 설명하지 않았으므로 그 점을 보충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사전적 의미에서 ‘사칭’은 “이름, 직업, 나이, 주소 따위를 거짓으로 속여 이르다.”를 뜻한다. ‘사칭범’이라는 항목에는 “이름, 직업, 나이, 주소 따위를 거짓으로 속여 남에게 경제적인 손해를 입힘으로써 성립하는 죄. 또는 그런 죄를 지은 사람.”이라는 정의가 붙어 있다. 그러므로 사칭이란 고의로 실제 지시 대상과 유리된 기표(singifiant)를 사용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의상 사칭의 주체는 사칭하는 사람 자신이다. 사칭하는 그 자신이 지속적으로 ‘나는 의사다, 나는 교수다, 나는 IT 전문가다, 나는 부동산투자자문위원이다, 나는 정의로운 사람이다’ 식으로 말하고 다니고 그것이 소문으로 떠돌면서 그 사람에 대한 그러한 평판이 주변에 조성되었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아닐 때 보통 우리는 그가 XX를 사칭했다고 표현한다. 이것을 근대적 유형의 사칭이라 부르자.

그런데 그 사칭을 누가 대신해 준다면 어떻게 될까? 이미 근대적 유형의 사칭 속에서 ‘소문’이 그 대신해주기를 함의한다. 지시대상과 유리되도록 만들어진 기표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그 지시대상과 상당히 강력하게 유착된 가짜 기의(signifié)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보통 평판은 이런 식으로 소문을 통해 이루어져 왔고 사칭임이 드러나는 순간은 그러한 평판에 금이가는 순간일 것이다. 

그런데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아날로그적 방식은 좁은 공동체 내에서만 통용되는 가짜 기의, 즉 사칭을 가능하게 한다. 그 공동체를 벗어나면 그 사칭은 의미를 잃게 되고 사칭자는 원점에서 다시 사칭을 시작해야 하는 난관에 봉착한다. 게다가 공동체 속에서는 사칭 자체가 쉽지 않다. 해당 공동체의 성원들이 사칭하려는 의도를 가진 사람들의 실제를 상대적으로 쉽게 알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이 거리상의 가까움이 갖는 감시기능 때문에 기표를 실제대상에서 유리시키는 것이 처음부터 곤란한 것이다. 이처럼 근대에 사칭은 공동체 내에서의 장애와 공동체 밖에서의 장애라는 이중의 장애에 부딪히기 때문에 예외적 행위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메트로폴리스화, 미디어화, 디지털 테크놀로지 및 인터넷의 확산 등 탈근대적 현상들의 대두는 사정을 다르게 만든다. 공동체가 와해되거나 느슨해져 각자가 개체화된 점들로 바뀌고 그 점들을 미디어와 디지털 네트워크가 연결하게 된다. 이것은 사칭의 두 장애가 모두 철거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전통적 공동체의 자생적 감시기능이 사라지고 아날로그의 공간적 한계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나타나는 것이 대의로서의 사칭, 혹은 사칭 대의이다. 서0혁 사건은 이러한 사칭 대의가 직업적으로, 하나의 영업으로서 영위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디어가, 사칭자를 대신해서 사칭해주는 일을 상품으로 판매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월드와이드웹(WWW)은 구매된 그 사칭상품을 전 세계적으로 유통시키는 사칭 네트워킹 장치로 기능한다. 우리는 실제대상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가짜 기의를 품고 흘러다니는 기표만을 만나고 그것과 관계 맺는다. 하나의 기표가 가짜 기의, 즉 사칭의 담지자였음이 드러난 후에도 사칭자는 새로운 기표를 미디어에서 구매하여 그것을 WWW에 유통시킴으로써 새로운 사칭을 해나가는 것이 가능해진다. 실제로는 동대문 의류도매상과 대리운전기사라는 직업을 가졌다고 하는 서0혁이 그때그때 의사, 교수, 투자자문위원, IT전문가라는 사칭(가짜 기의)을 연쇄적으로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지금은 다시 멀리 캐나다까지 가서 ‘정의로운 고발자’ ‘공익제보자’를 사칭할 수 있는 것은 특정한 역사적 조건 하에서다. 그것은 서0혁의 그 사칭을 기사나 방송으로 판매하여 유통시키는 인터넷신문, 유튜브방송 등의 미디어와 인터넷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1인시위 쇼를 벌이는 서0혁을 인터넷 방송으로 송출하면서 윤지오가 아니라 서0혁이야말로 ‘공익제보자’라고 속삭이며 공공연하게 사칭해 주는 포스트모던 미디어가 없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칭 놀이를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장 보드리야르) 것으로 느끼면서 얼마나 즐거워하는가!

이런 의미에서 나는 서0혁의 사칭을 포스트모던 사칭이라 불렀다. 그런데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스스로를 ‘공익제보자’로 사칭하는 방식은 좀 새롭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공익제보자로 사칭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자신에게 부여했던 사칭의 방식을 타자(윤지오)에게 강제로 적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은 모든 사람의 이름들, 직업들, 죄목들이 사칭으로 될 수 있다는 탈실재적 가정에 근거한다. 사칭자가 미디어를 이용해서(즉 구매해서) 누군가에게 갖다 붙이는 이름이 그 사람의 이름이 되고 직업이 되고 범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칭은 예외가 아니라 정상이 되고 특수가 아니라 보편이 된다. 서0혁은 윤지오에게 “사기”, “음란” 등의 죄목을 갖다 붙임으로써 윤지오라는 실제 대상과는 아무 상관 없는 ‘사칭’들을 유통시키고 가상실재화(virtualize)하는 미디어쇼를 벌인다. 캐나다의 가택 앞으로 찾아가 윤지오에게 이같은 사칭을 부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그것을 인터넷 유튜브 방송(미디어)으로 송출하도록 만들어 가상실재화하는 것이다. 자신이 사용했던 사칭의 방법을 타자에게 외부로부터 같은 방식으로 부과하는 것인데, 이것은 사칭의 일반화와 일상화의 질서를 도입하려는 시도이다.

얼핏보면 이러한 방식은 자신의 전문특기인 사칭이 지배하는 세계를 만들어 자신의 사칭이 결코 범죄가 아니라 삶의 일반적 논리, 윤리, 관행, 문화, 아니 심지어 법칙이 되기를 갈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이름들을 ‘사칭’으로 만들어 평등한 사칭의 세계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평등해 보이는 사칭의 세계에 크나큰 불평등과 적대성이 도사리고 있다. 사칭의 일반화를 추구하는 이 방법이 자신과 같은 사칭 전문가 유형의 인간이 확실하게 비교우위를 확보할 수 있을 전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자신의 사칭은 언론세탁으로 끊임없이 합법화하면서 타자에게 자신이 고의적으로 부여한 사칭은 범죄화하여 처벌을 요구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유죄인 자신을 무죄사칭하고 무죄인 사람을 유죄사칭하는 이 괴이한 행동의 반복을 통해 세상을 거꾸로 물구나무 세우고 그 거꾸로 된 세상에서 지배권력을 움켜잡고자 하는 기술이 바로 포스트모던 유형의 사칭술이다.  

슛맨, 가해권력, 그리고 포스트모던 사칭술

슛맨의 정치적 무의식: 장자연 사건의 “가해권력”이란 좌파 정권이 윤지오를 이용해 만들어낸 가공물이라고 주장하여 가해권력을 은폐하고 비호하기

최근 동영상에서 슛맨이 한 말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요약된다.

  1. 장자연을 죽인 가해권력은 없다. 그것은 모두 윤지오가 돈을 벌기 위해 캐나다에서 짜 가지고 한국으로 가져온 “완벽한 시나리오”의 일부이다.
  2. 윤지오로 하여금 이러한 시나리오를 짜서 한국으로 가져오도록 한 배후가 있다. 그것은 김영희를 비롯한 한국의 “좌파”이다.
  3. 이들 “좌파”는 윤지오를 이용한 후 버렸다. 이런 의미에서 윤지오는 가련한 희생자다.
  4. 그럼에도 윤지오는 자신이 버림받은 줄 모르고 자신의 시나리오를 진실이라고 주장하며 반성과 사과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뻔뻔하게 그 시나리오가 진실이라고 “거짓말”을 계속하고 있다.
  5. 이렇게 하게 되는 이유는 윤지오가 학력을 위조하고 음란행위를 하는 불량한 인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하는 말이 “거짓말”임을 알지 못하고 계속 “거짓말”을 한다.
  6. 많은 고소고발을 당한 윤지오를 한국의 수사기관이 강제소환해서 구속수사해야 한다.
  7. 그런데 “좌파”정권의 통제를 받는 한국 수사기관이 과연 그렇게 할지 의문이고 그래서 캐나다까지 와서 1인시위를 하고 방송을 한다.

장자연을 죽인 가해권력이 없다는 주장은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을 주장이다. 가해권력의 공작으로 그 실체가 아직 구체적으로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가해권력이 실재한다는 것은 이미 지난 10년간의 수사, 기소, 재판, 증언, 논란 과정에서 명확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슛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파”가 가해권력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즉 가해권력이 위조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윤지오가 그 위조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슛맨은 윤지오를 조사하면 윤지오가 그 위조의 몸통을 실토할 것이고 그러면 가해권력을 위조한 진짜 책임주체인 좌파의 음모가 드러날 것이라고 공상하고 있는 셈이다. 

참으로 기이하고 비현실적인 상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럴까? 무엇보다도 기록과 증거로 남아있는 엄청난 물증들을 외면하는 것이 놀라운 것이다. 둘째로는 좌파가 윤지오에게 이용당했다는 조선일보(TV)의 주장과 정반대 방향에서 음모론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조선일보가 윤지오의 음모로 본 반면 슛맨은 좌파의 음모로 본다. 이 점에서는 슛맨이 조선일보보다는 조금 더 현실적인 것으로 보인다. 일개 시민 윤지오가 “좌파” 권력자들과 권력기관을 들었다 놨다 했다는 조선일보의 주장은 리얼리티가 전혀 없어 신빙성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음모론 모두 윤지오가 증언을 통해 진실을 말했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타조식 사고법을 공통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셋째로는,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슛맨과 그 TV 자신이, 조선일보와 함께, 증언자를 2차 가해하는 가해자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거나 애써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해행위에서 느끼는 쾌감과 희열에 도취된 탓일까?

포스트모던 사칭전문가와 결탁하고 그를 앞세워서 윤지오를 공격하는 가해권력 중에서 살짝 윤곽이 드러나는 부분:  “뉴시스 무리”

서0혁은, 한겨레21의 보도에 따르면, 게이오대 병원 수련의, 연세대 협력교수, IT전문가 부동산투자자문위원을 사칭한 바 있다. 그 사칭을 감추어 주는 것이 언론인데 여기에 사용되는 것이 ‘기사 출고 거래’, 즉 기사를 유료로 의뢰자에게 파는 숨겨진 관행이다. 이 포스트모던한 거래는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는데, 이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위의 한겨레21 보도기사이다.(변지민 조윤영 기자, 가짜뉴스 사서 스펙 만든 현대판 ‘김선달’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46326.html) 최근 서0혁은 윤지오를 사칭해서 윤지오 경호회사를 탈세로 고발했다고 자백한 바 있다. 서0혁은 유엔 직원이라고도 주장하고 있지만 아직 그가 유엔 직원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확인해 주지 못하고 있다.

슛맨은 전직 뉴시스 소속이었다고 한다. 슛맨과 함께 캐나다로 가서 윤지오 가택 주변을 취재한 노기자는 뉴스핌의 기자라고 한다. 뉴스핌은 뉴시스 출신의 민0복이 대표로 있고 노기자도 뉴시스 출신이라고 한다. 우리는 뉴시스가 2019년 4월 8일  윤지오에 대한 최초의 ‘비난 프레임’을 만든 통신사임을 기억하고 있다. 뉴시스는 최지윤이 쓴 이 기사를 윤지오의 항의를 받고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주지하다시피 뉴시스는 홍0근이 대표로 있는 머니투데이 계열사이다.

홍0근은 누구인가? 홍0근은 장자연 사후 초기 수사 당시에 윤지오가 장자연을 강제추행한 사람으로 잘못 지목했던 사람이다. 이 때 윤지오는 조0천을 언론사 사장으로 알고 있었고 자신이 술자리에서 받아 소지한 명함 중에서 유일한 언론사 사장이 홍0근이었기 때문에 그를 잘못 지목하게 되었다. 물론 경찰이 조0천의 사진을 제시하지 않은 것도 그 착오가 오게 된 한 요소이다. 이렇게 우리는 최근 윤지오에 대한 2차 가해 흐름에 뉴시스가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뉴시스와 그 기자에서 시작하여 뉴시스 출신기자, 뉴시스 출신 언론사와 그 언론사의 기자 등을 통칭하여 “뉴시스 무리”라고 부르겠다.

한겨레21의 기자 변지만, 조윤영은 위의 보도기사에서 언론사들이 인터넷 기사 한 편을 올려 주는데 10만원(최저가 브릿지경제)~28만원(최고가 조선일보, 중앙일보)을 받는 현실을 폭로했다. 이 기사에서 두 기자는 “서준혁”이라는 인물이 한 해에만 50건 이상의 기사를 실어 자신을 투자자문위원 등으로 신분위조를 하는 현실을 개탄하며 돈을 받고 기사를 파는 이런 현실이 언론의 공멸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윤지오에 대한 서0혁의 고소고발이 언론에 자신의 이름을 내서 자신을 “정의로운 인물”로 신분위조하기 위한 아주 저렴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서0혁은 이제 윤지오를 강제송환하도록 만들겠다는 이름으로 뉴시스 무리의 하나인 슛맨 티비의 방송에 단골로 출연할 기회를 얻고 있다. “사기꾼”을 고발한다는 적반하장 식 이유를 대고서 말이다. 그런 기회를 얻기 위해서라면 자신을 고발하는 것이 훨씬 빠르고 저렴하고 효과적이지 않을까?

지금까지의 이력으로 보면 서0혁은 자신에 관한 보도기사를 돈을 주고 사서 위조신분을 연속적으로 세탁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포스트모던 사칭방법을 윤지오 음해쇼에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보면, 슛맨이 그를 1인시위자로 방송에 계속 장시간 출연시키는 것에 그가 어떤 댓가를 지불하고 있으리라고 추론할 수 있다. 슈퍼챗으로는 크게 재미를 못보고 거둔 것보다 더 비쌌을 수도 있는 비난을 들은 슛맨 티비에 출연료로 서0혁이 얼마를 내고 있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지난 번 전화 인터뷰 방송에서 서0혁이 캐나다로 슛맨을 모시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항공권과 숙박비, 그리고 나이애가라 폭포 관광비 등을 제공하겠다는 뜻이었을까? 아니면 방송 중에  슛맨이 지속적으로 시청자들에게 응원해 주셔야 한다면서 ‘좋아요 눌러주세요, 구독해 주세요, 알림종 눌러주세요’라고 말했는데 그것이 가져올 결과가 그에 대한 보상적 댓가일까? 아니면 또 다른 댓가가 있는 것일까? 시민들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이 위험한 가해연합에 대해 “진실을 추구하는” 언론들이 취재하고 조사하는 것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증언자 윤지오만이 아니라 언론 일반의 공익성이 위협받고 있고 언론에 대한 신뢰가 극단적인 위험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보론: 김학의 사건에서 검찰이 “성상납 강요”(성폭행)를 “성상납”(뇌물)으로 바꿔치기한 방법에 대해

“성상납 강요”는 ‘성폭행’을 의미한다(3/끝)

2019년 6월 검찰은 전 법무부차관 김학의를 뇌물 혐의로 기소했다. 오랫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김학의의 성범죄 혐의는 소리소문도 없이 사라지고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되었다. 어떤 마술로 검찰이 그 들끓던 여론을 잠재운 것일까? 김학의에 대한 특수강간 혐의를 “무죄” 처분하기 위해 검찰이 사용한 핵심 기술이 바로  “성폭력”(성접대 강요, 성상납 강요)에서 ‘강요’를 제거하여 ‘성접대’, ‘성상납’으로 바꿔치기함으로써 그것을 “뇌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분명히 김학의에 대한 구속영장 범죄일람표에는 피해를 주장한 A 여성의 진술을 토대로, 16개월간 주 2~3회씩 관계를 가졌고 신원불상의 다른 여성들과의 성접촉 내역도 포함됐었다. 하지만 이제 검찰은 여기에서 김학의에 대한 성범죄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더 기묘한 것은 2007년 서울 역삼동 오피스텔에서 윤중천이 이씨를 성폭행한 것은 성폭행으로 인정한 반면 그와 동시에 이루어진 김학의와 이씨의 성관계는 성폭행이 아닌 ‘성접대’로 판단한 것이다. 사람들의 공분을 산 장면, 즉 강원도 원주 별장에서 이뤄진 성관계도 ‘성접대’로 판단해 성범죄 혐의가 아니라뇌물 수수 혐의에 포함시켰다. 폭행과 협박, 즉 ‘강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성상납 강요’에서 ‘강요’만 지울 수 있다면 얼마든지 ‘성폭행’도 ‘뇌물’로 둔갑될 수 있고 성범죄가 증발될 수 있다는 것이 검찰의 김학의 기소방식이 남기는 교훈이다.

그런데 정말 김학의 사건에 강요가 없었을까? 검찰 수사단의 논리는 다음 세 가지이고 그 결론의 특징이 강요가 없었다는 판단이다. 

(1)A씨에 따르면, 김학의가 직접 폭행·협박한 사실이 없다 

(2) A씨는 김학의에게 자신이 윤중천의 폭행·협박으로 (김 전 차관과의) 성관계에 응해야 하는 처지를 알리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3)윤씨도 자신의 폭행·협박 사실을 부인하면서 구속 이후 수사에 협조하지 않고 있어 김 전 차관의 성범죄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발견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식의 논리, 이런 식의 판단이 나왔을까? 단적으로 말해 수사단이 피해여성의 진술을 배제한 결과이다. 피해여성 지원 조력인단의 이찬진 변호사에 따르면 “피해자 A씨는 ‘김학의는 윤중천이 A에게 고함‧욕설‧위협하고 힘으로 제압하는 과정을 지켜보다 간음했다’고 진술했다. 이 진술은 2013년 A씨가 처음 경찰에 진술한 뒤 지금까지 일관적이다. 김학의는 윤중천이 A에게 성관계를 강요한 인사 가운데 가장 많이 A를 간음했다”고 한다.(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0486

피해자의 말에 의하면, 김학의가 지켜보는 가운데 윤중천이  피해자를 위협하고 강요하여 제압했고 그 과정을 지켜본 후에 김학의가 피해자를 ‘간음’했다는 것이다. 즉 공범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임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김학의가 직접 폭행, 협박한 사실이 없다는 것에 기초하여 성범죄에 대한 무혐의를 도출한다. 고함 욕설 협박 후 성관계한 윤중천은 ‘성폭행’(강간치상)으로 기소했음에 반해 그 고함, 욕설, 협박을 지켜본 후에 성관계한 김학의는 ‘성상납’을 받은 것으로 간주했다.

이런 방식을 통해 성폭행이 뇌물로 둔갑된다. 기가 막힌 연금술이다. 피해자는 윤중천의 고함 욕설 협박으로 주눅이 들고 공포에 휩싸였다고 하더라도 김학의가 그것을 지켜본 후 간음하려 할 때 용기를 내어 ‘지금 당신이 행하는 것은 강간인데 내가 윤중천의 위협과 욕설 때문에 두려워서 이것이 강간이라고 당신에게 차마 말을 못합니다’라고 알려주고 또 그것을 어떤 유형의 증거로 남겼어야만 했다! 그럴 때에만 그것은 성폭행에 해당된다! 만약 당신이 그 상황에서 그런 용기를 낼 수 없고 지략을 발휘할 수 없다면 당신이 경험한 것은 성폭행이 아니라 성상납(뇌물)이다!

이것이 검찰의 법논리학이다. 이런 방식으로 권력자들에게 성폭행을 할 자유를 폭넓게 열어주는 검찰 앞에 2009년의 3월 7일 이전의 장자연이 “성상납을 강요 받았습니다”라는 문구를 적은 리스트를 내밀고 관련 진술을 직접 했었다고 가정해 본들, 그것이 뇌물(성상납)이 아닌 성폭행으로 기소될 수 있었을까? 

이런 낙담스런 현실 때문인지, 검찰개혁에 시동을 걸었던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로 첫 출근하면서 했다는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서해맹산(誓海盟山)의 정신으로 공정한 법질서 확립, 검찰개혁, 법무부 혁신 등의 소명을 완수하겠습니다.” 검찰개혁을 어떤 방식으로 완수할 것인가, 그것이 완수된다면 개혁된 검찰이 어떤 모습, 어떤 태도로 성폭행 피해자들 앞에 나타날 것인가? 우리가 앞으로 관심을 갖고 지켜 봐야 할 지점으로 보인다.

장자연이 받았던 ‘성상납 강요’에 대한 용기 있는 증언들과 과거사조사위원회 심의에서의 증언 무력화

“성상납 강요”는 ‘성폭행’을 의미한다(2)

윤지오는, 편지형식의 글에 “성상납을 강요받았습니다”라는 문구가 있고 그 다음에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었다고 진술했다. 반면 유장호는 그 편지형식의 글에 “김종승과 만날 때 조심해야 할 사람들”이 씌어 있었다고 진술했다. 전자는 뚜렷하지만 후자는 모호하다. 전자는 편지형식의 글 끝에 씌어 있었다는 글귀 ‘가족들과 지인들께 피해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당부와 호응되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다. 그래도 두 사람의 진술이 상반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김종승이 (윤중천처럼) “성상납 강요”의 공모행위자였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장호가 자신의 진술의 그 모호함을 걷어버린 한 순간이 있었다. 과거사진상조사단과의 예비면담 때였다. 우리는 지금까지 “성상납을 강요받았습니다”가 “성폭행을 당했습니다”의 은어(隱語)임을 밝혀왔다. 김학의 사건에 대한 검찰 조사방식에 여성들이 항의하면서 “성상납이 아니라 성폭행이다”라는 피켓을 들었던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장자연 사건에서 “성상납을 강요받았습니다”라는 문구를 리스트에서 봤다고 말한 사람은 지금까지 윤지오 증언자 한 사람 뿐이었다. 리스트가 있었다고 증언한 유장호나 유가족(오빠)도 리스트의 내용과 관련하여 이에 상응할 만큼 명료한 증언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과거사진상조사단과의 예비면담에서 유장호는 장자연과 자신이 문건을 작성할 때 “성폭행을 당했다”고 장자연이 써서 자기가 지우라고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은 윤지오가 본 “성상납을 강요 받았습니다”라는 말보다도 더 선명한 말이다. 어찌된 일일까? 

자료에 의하면 4장의 문건은 2009년 2월 28일에 유장호와 함께 작성했고 3장의 편지글은 3월 1일 유장호가 장자연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우리는 유장호가 지우라고 한 그 표현(“성폭행을 당했다”)이 다시 장자연의 손을 거쳐 똑 같은 의미의, 그러나 은어(隱語)화된 “성상납을 강요받았다”로 고쳐진 후 되돌아 왔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표현이 다르더라도 사실은 하나고 의미도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윤지오의 증언 “성상납을 강요받았습니다”는 유장호의 증언 “성폭행을 당했습니다”에 의해 확실하게 교차검증되는 증언이다.

과거사조사위원회의 심의발표는 “성폭행”과 관련된 증언들에 대해 어떻게 다루었는가? 먼저 장자연의 성폭행 피해 의혹에 대한 진상조사단의 조사결과에 대한 과거사조사위원회의 요약(이것이 정확한 요약인지 아닌지는 진상조사단의 보고서가 비공개라서 확인할 수 없다!)이다.

❍ 조사단의 조사과정에서 장자연이 일시, 장소를 알 수 없는 술접대 자리에서 누군가가 몰래 약을 탄 맥주를 반 컵가량 마신 후 마치 마약에 취하거나 술에 만취한 사람처럼 인사불성이 된 상태에서 누군가에 의해 성폭행을 당했을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음 

– 장자연이 성폭행을 당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근거 자료는, 

① 장자연이 술자리에서 맥주 한 잔을 채 마시지 않았는데도 마치 약에 취한 사람처럼 인사불성이 된 상태가 된 것을 목격했다는 윤○○의 조사단 진술 

②‘장자연이 처음에 작성한 문서에 심한 성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을 적었는데 내가 지우라고 했다’는 유○○의 조사단 면담 전 진술. 그러나 유○○는 그 후 조사단과의 면담에서는 이러한 말을 한 사실이 없고 장자연이 하소연하듯이 처음에 그런 비슷한 말을 하기는 하였는데, 장자연에게 되묻지도 않았고, 장자연이‘당했다’고 말한 것도 아니었다”고 진술하였음 

③ 드라마 감독 정○○가 작성한 2011. 8. 1.자 사실확인서(김종승의 배우 이△△을 상대로 제기한 민사소송에서 김종승 측 증거로 제출된 것)에 배우 이△△이 전화로 “장자연이 쓴 A4 용지에 ‘술에 약을 탔다는 얘기가 있다’고 말했다”고 기재된 부분 및 이△△으로부터“물에 약을 탔다고 들었다”는 정○○의 조사단 진술이 있음 

우선 여기서 과거사조사위원회는 장자연 리스트에 기재되어 있다고 윤지오가 진술한 “성상납을 강요 받았습니다”를 몰각하고 있으며 그것의 의미가 “성폭행을 당했습니다”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윤지오가  “성상납을 강요 받았습니다”라는 문구가 있었다고 했다가 없었다고 했다고 진술번복한 것으로 조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몰각과 몰이해는 과거사조사위원회만이 아니라 변호사 박훈을 비롯하여 윤지오를 사기 프레임 속에 몰아넣은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었는데 이들은 “장자연이 술자리에서 맥주 한 잔을 채 마시지 않았는데도 마치 약에 취한 사람처럼 인사불성이 된 상태가 된 것을 목격했다”는 윤지오의 조사단 진술이 과거 10년 전 진술과 무관한 어떤 새로운 장면을 기억에서 지어내고 있는 것처럼 오해했다. 그런데 윤지오는 이 진술을 통해 2009년 3월 12일 자신이 봉은사에서 본 리스트에 기재된 문구 “성상납을 강요받았습니다”, 즉 “성폭행을 당했습니다”의 맥락을, 당시에는 주목하지 못했던 기억의 상기를 통해 보충하고 있을 뿐이다. 성폭행을 당하기 전에 몰래 마약을 주입당했을 수 있지 않았겠는가, 라고. (그러므로 뒤에서 보게될 심의결과에서 과거사조사위원회가 “성폭행을 당했다”는 내용까지 윤지오의 추정으로 돌려 이중 추정 진술이라고 말하는 것은 윤지오의 진술이 장자연 리스트에 기재된 “성상납을 강요받았습니다”를 “성폭행을 당했습니다”로 되살려 내고 있는 것임을 몰각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은폐하는 것이다.)

윤지오가 이렇게 말하는 데에는 몇 가지 기억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애기야, 너는 발톱의 때만큼도 몰라”라는 장자연 ‘언니’의 반복된 말이다. 또 하나는 김종승이 택시비를 쥐어주며 자신을 술자리에서 먼저 보냈던 기억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위에 서술된 것, 즉 “약에 취한 사람처럼 인사불성이 된 상태”에 대한 기억과 그에 대한 의문이다. ‘40여 차례 이상 술접대에 동행했으면서 내가 전혀 몰랐던 그것은 무엇일까? 왜 김종승은 다른 손님들이 있는 상태에서 장자연 언니만을 남겨두고 자기를 먼저 가라고 했을까? 왜 장자연 언니는 술을 반 컵 정도 밖에 마시지 않았는데 인사불성의 상태에 빠졌던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한 답들이 문건의 첫줄 “김종승 사장님은 저희 언니에게 문자로 니 동생이랑 그 약 같이 했다며 협박 문자를 보내고”에 객관적 문서 증거물로 나타난다. 또 캐나다에서 마약에 취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 인사불성의 상태가 재인(re-cognition)된다. 그리고 그것이 리스트에 씌어 있었던 문구 “성상납을 강요 받았습니다”와 연결된다. 이렇게 다양한 기억들과 체험들이 증언이라는 행동의 필요 속에서 서로 연결됨으로써 윤지오의 위와 같은 진술로 엮여나왔다. 

그런데 그것은 결코 혼잣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드라마 감독 정00가 작성한 2011년 사실확인서 및 2019년 조사단 진술과도 일치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장호의 조사단 면담 전 진술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성폭행을 당했다”는 유장호의 진술과 관련해 후에 유장호가 그 진술을 번복했다는 것이 언론의 주된 보도방식이었다. 그런데 과거사조사위원회가 진술번복의 뉘앙스를 담아 인용하고 있는 위의 구절을 놓고 보더라도 유장호가 자신의 진술을 번복했다고 볼 수는 없다. 

우선 유장호가 면담조사에서도 ‘그 비슷한 말을 했다’고 내용상 이전의 진술(“성폭행을 당했다고 썼다”)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 유장호가 장자연에게 되묻지 않았다 하더라도, 3월 1일 전달한 편지글에서 장자연은 “성상납을 강요 받았습니다”라는 문구로 바꿔 ‘성폭행을 당했음’을 기재했다. 그리고 “장자연이 ‘당했다’고 말한 것도 아니었다”에서 부정되는 것은 동사이지 명사 ‘성폭행’은 아니다. 그런데 성폭행을 목적어로 유지하면서 ‘당했다’ 말고 어떤 동사를 쓸 수 있는 것일까? “했다”일 수 없는 한에서 ’겪었다’ ‘경험했다’ 외의 동사가 있을 수 있을까? 이 중 어떤 동사를 사용했건 “성폭행을 당했다”는 의미는 결코 바뀌지 않는다. 즉 유장호는 면담 전 진술에서나 면담조사에서나 윤지오의 진술과 거의 동일한 진술을 했다. 번복은 없었다.

그렇다면 과거사조사위원회는 어떤 방식으로 복수 증언들의 이 놀라운 일치를 외면해 버리는가?

 – 그러나 배우 이△△은 정○○에게 위와 같은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진술하였고, 매니저 등은 장자연의 성폭행 피해 여부에 대해 모른다고 진술하였으며, 유족은 문건에 성폭행 피해에 관하여 적힌 것이 없었다고 진술하였음 

❍ 유○○의 최초 진술 및 정○○, 윤○○의 진술을 종합하면, 장자연이 성폭행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될 수 있으나, 이들의 진술만으로는 구체적인 가해자, 범행 일시, 장소, 방법 등을 알 수 없으므로 수사를 개시할 수 있는 객관적 혐의가 확인되었다고 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음 

여기서 과거사조사위원회는 피해자의 입장과 가해자의 입장을 무질서하게 뒤섞은 후 결론적으로는 피해자의 입장을 버리고 가해자의 입장으로 갈아탄다.

이△△이 누구인가? 경찰과 검찰의 조사에서 장자연으로 하여금 문건을 쓰게 하고 그 문건을 장자연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아니 문건을 유통시키지 말고 돌려달라는 장지연의 간절한 요청을 뿌리치며 자신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알리고 자신의 소송에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 드러났던 사람이다. 만약 경찰과 검찰이 피해자 입장에 충실했다면, 문건과 리스트를 장자연의 의사에 반해 유통시킨 2차 가해자로 기소했을 사람이다. 

그에 이어지는 “매니저 등은 장자연의 성폭행 피해 여부에 대해 모른다고 진술하였으며”는 무의미한 말이다. 누구의 매니저인지도 알 수 없으려니와 “매니저 등”이란 표현은 의미도 없는 복수의 사람들을 가져와 피해자 입장의 진술을 뭉개고 쓸어버리는 빗자루로 사용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검찰 과거사조사위원회는 가해자 입장의 말이나 표현으로 피해자의 진술과 증거를 덮고 삭제하려 한다. 

물론 유족은 가해자가 아니다. 하지만 유족은 ‘문건에 성폭행 피해에 관하여 적힌 것이 없었다’고 말함으로써 가족의 명예를 지킬 수 있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이 점에서는 가해권력과 본의 아니게 공조할 수 있는 처지에 있다. 그런데 유족의 말은, 물질적으로는 사라지고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성상납 강요를 받았습니다”라는 구절에 의해, 설령 그것을 제외한다하더라도 피해사실을 적은 4장의 문건에 물질적으로 아로새겨져 남아있는 장자연의 문구들에 의해 부정된다. 아래에 그 문구가 있다.

김종승 대표의 접대강요 및 반복되는 욕설과 또 구타를 견뎌야 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언니까지 폭언과 욕설과 협박을 당했습니다. 저는 술집 접대부와 같은 일을 하고 수없이 술 접대와 잠자리를 강요받아야 했습니다. …2008년 9월 경 조선일보 B[1] 사장이라는 사람과 룸싸롱 접대에 저를 불러서 B[2] 사장님이 잠자리를 요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후 몇 개월 후 B[2] 사장님 아들인 스포츠조선  사장님과 술자리를 만들어 저에게 룸싸롱에서 술접대를 시켰습니다…저는 나약하고 힘 없는 신인배우입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13번째 증언>, 126쪽. 강조와 숫자는 인용자 삽입, B가 ‘방’이라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므로 원문 그대로 둔다.)

폭언, 욕설, 협박을 당하고 잠자리를 강요받은 것이 “성상납을 강요받았습니다”, “성폭행을 당했습니다”와 다른 의미일 가능성이 있을까? 게다가 장자연의 이 문구에는 (과거사조사위원회가 없다고 말한) 2008년 9월경(범행일시), 룸싸롱(장소), 조선일보 B[1] 사장님과 B[2] 사장님의 아들(구체적 가해자), 방법(술접대 강요 및 잠자리 강요[성상납 강요]) 등이 모두 객관적으로 적시되어 있다. 그런데 검찰이 주축이 되었던 대한민국 법무부의 과거사조사위원회는 이 명백한 증거를 외면하면서 “유○○의 최초 진술 및 정○○, 윤○○의 진술을 종합하면, 장자연이 성폭행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될 수 있으나, 이들의 진술만으로는 구체적인 가해자, 범행일시, 장소, 방법등을 알 수 없으므로 수사를 개시할 수 있는 객관적 혐의가 확인되었다고 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음”이라고 시치미를 뗀다.

과거사조사위원회 종료후 페미시국 집회에서 가장 큰 호응을 받은 피켓이 “검찰이 공범이다”였음이 과연 우연일까? 검찰은 자신들이 가해자들의 공범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강조는 인용자) 

여기까지가 “조사결과”에 대한 분석이다. “장자연의 성폭행 피해 의혹에 대한 심의결과”부분은 한 술 더 떠 가해자들의 입장과 시선을 고 장자연 사건을 바라보는 지배적인 눈으로 만든다. ‘조사결과’에는 검찰(2명)외에 교수(2명), 변호사(2명) 등이 포함되었던 진상조사단의 리얼리즘(realism)적 관점이 어느 정도는 남아 있었다. 그런데 심의결과는 그렇지 않다. 리얼리즘의 흔적이 지워지고 가해자의 입장을 대변하려는 실리주의(utilitarianism)적 조급함이 엿보인다.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누구나 그 의도를 간취할 수 있을 만큼 노골적이므로 간단히만 논평하고자 한다. 

❍ 윤○○의 진술은 이중적인 추정에 근거한 진술(술에 약을 탔을 것이라는 1차 추정, 자신이 떠난 후 성폭행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2차 추정)이라는 점에서 성폭행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로 삼기 어려움. 또 배우 이△△과의 대화 내용에 관한 정○○ 감독의 진술은 원진술자인 이△△이 진술 사실을 부인하고 있고, 술 또는 물에 약을 탔다는 내용만으로는 성폭행과의 직접적인 관련성을 판단할 수 없음. 유○○가 조사단 면담 전에 한 진술이 성폭행 의혹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으나 유○○는 정식 면담에서는 해당 진술을 번복하였음

앞에서 잠깐 말했듯 유장호는 면담조사에서 면담 전 조사에서의 진술을 번복하지 않았다. 이것은 나의 관점에서는 진술번복 조작이다. 피해자의 피해사실을 알리는 정○○ 감독의 진술을 부인하는 것은 2차 가해자 이△△의 진술이다. 여기서 검찰은 피해자주의가 아니라 가해자주의를 선택한다. “술 또는 물에 약을 탔다는 내용”은  “니 동생이랑 그 약 같이 했다며 협박문자를 보내고”와 연결된다. 그리고 이것은 “폭언과 욕설 협박을 당했습니다”, “잠자리를 강요 받아야 했습니다”, “잠자리를 요구하게 만들었습니다”라는 장자연의 피해사실 문건의 문구, 그리고 윤지오가 리스트에서 본 “성상납 강요를 받았습니다”라는 장자연의 편지글 문구와 결합되어 “저는 나약하고 힘 없는 신인배우입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라는 문구에서 비극적으로 종합되면서  “성폭행과의 직접적 관련성”을 절규하듯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과거사조사위원회 심의결과는 이것들 사이의 뚜렷한 상관성을 외면하면서 종합적 사건을 미시적 사실들로 분해해 형해화(形骸化)한다. 그리하여 결국 가해자에게 이익이 될 “판단할 수 없음”이라는 회피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과거사위원회의 사실조작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다음 구절을 살펴 보자.     

❍ 성폭행 의혹 부분은 장자연 사망 직후 이루어진 수사과정에서 전혀 제기되지 않았던 사항이고 성폭행이 사실인 경우 그 혐의가 매우 중대하나, 윤○○, 정○○ 등의 진술만으로는 성폭행이 실제 있었는지, 그 가해자, 범행 일시, 장소, 방법을 알 수 없음

과연 그런가? 2009년 3월 15일 윤지오는 피해사실 문건 외에 이름이 나열된 별도의 편지형식의 글이 있었고 거기에 ‘가족과 지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문구가 있었다고 말했으며 2010년 6월 25일 그 별도의 편지형식의 글에 “성상납을 강요 받았습니다”라는 문구가 있었다고 분명하게 진술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성상납을 강요 받았습니다”는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이외의 다른 것을 의미할 수가 없다. 유장호가 편지형식의 글에 ‘김종승을 만날 때 주의해야 할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고 한 것도 실제로는 이 내용을 에둘러 표현한 것임을 이제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폭행 의혹 부분은 장자연 사망 직후 이루어진 수사과정에서 전혀 제기되지 않았던 사항이고”라는 구절은 명백한 거짓말이다. 윤지오가 분명하게 “제기”했으나 경찰, 검찰 수사과정에서 수사관들이 엉뚱한 질문들로 회피하고 덮어버림으로써 그 실체를 감춘 “사항”인 것이다. 

과거사조사위원회는 또 이렇게 심의결과를 발표한다. 자신이 알아내야 할 내용을 더 알아내기는커녕 이미 알려져 있는 내용조차 감추는 구절이다. 

❍ 추가 조사를 통해 구체적인 사실과 증거가 밝혀질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단순 강간, 강제추행 혐의에 대하여는 공소시효가 완성되었으므로 현시점에서 수사가 개시되기 위해서는 특수강간 또는 강간치상의 혐의가 인정되어야 하나, 현재까지의 조사결과로는 2인 이상이 공모, 합동하였는지, 어떤 약물을 사용하였는지, 장자연이 상해를 입었는지 등 특수강간 또는 강간치상 혐의를 인정하고 수사에 즉각 착수할 정도로 충분한 사실과 증거가 확인되지 않았음

이 말이 과연 상황에 맞는 말인가? 문건에서 장자연은 구타가 반복되었다고 쓰면서 술집접대부 같은 일을 하고 잠자리를 강요당했다고 쓴다. 구타에 상해가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이 구타가 성폭행과 이어졌을 가능성은 김학의 사건의 A씨 경우를 보면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성접대 및 성상납 강요에는 장자연 문건만으로도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의 공모협동 관계가 의심된다(형법 297조 및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4조특수강간). 김종승과 B[1] 사장 혹은 B[2] 사장의 아들의 공모말이다.

김종승과 두 B사장의 관계는 윤중천과 김학의의 관계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공모의 의심조차 들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과거사조사위원회는 대한민국 국민들을 넘어 세계시민들이 이미 읽어 알고 있는 이 장자연의 문건조차 읽지 않은 것인가? 또 마약의 경우 마약의 종류까지 밝혀져야 재수사에 대한 착수가 가능한 것인가? 차라리, 마약의 성분이라거나 제조처라거나 유통경로라거나 유효기간까지 확인되어야 수사에 착수할 수 있다고 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내가 보기에는 심의결과 발표의 한 구절 한 구절이, 드러난 사실들을 분절시켜 ‘사실들의 가루’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종합적인 사건으로서의 성폭행을 시야에서 사라지도록 만들 용도로 조직되어 있는 것으로 읽힌다. 그래서 저 행간들 너머로 가해권력들의 흐뭇한 미소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저 체셔 고양이(Cheshire cat)의 저 기이한 미소처럼 감돌다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을 환각처럼 보게 된다. 

어쨌든 2019년 6월, 과거사조사위원회는 이런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성폭행 피해 증거의 사후적 발견에 대비한 기록의 보존 권고

❍ 성폭행 피해 의혹에 관해 현재까지의 조사결과로는 2인 이상이 공모, 합동하였는지, 어떤 약물을 사용하였는지, 장자연이 상해를 입었는지 등 특수강간 또는 강간치상 혐의를 인정할만한 자료가 발견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움. 다만 조사단의 권한상 의혹을 철저히 규명하는 데 한계가 있었고 제기된 의혹상 범죄혐의가 중대하며, 공소시효 완성 전에 특수강간, 강간치상 범행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 등 증거가 확보될 경우가 있을 수도 있으므로, 이를 대비하여 성폭행 의혹과 관련하여 최대한 상정 가능한 공소시효 완성일인 2024. 6. 29.까지 이 사건기록 및 조사단조사기록을 보존할 수 있도록 보존사무관련법령에 따라 조치할 것을 권고함 (강조는 인용자)

아마도 이것이 과거사조사위원회의 마지막 남은 양심일 것이다. 나는 이 구절을 가해자의 입장을 옹호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조건에 대한 변명으로서 다음처럼 고쳐 읽고 싶다: “제기된 범죄혐의는 성폭행, 특수강간, 강간치상이므로 중대하다. 그런데 과거사조사위원회가 이미 드러나 있는 증거들을 있는 그대로 증거로서 직시하고 인정하기에는 말 못할 어려움이 있다. 지금 드러난 증거들을 증거로서 직시할 수 있는 더 강력한 기관이 출현하거나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 공소시효 완성 전에 이 사건이 재수사될 수 있도록 사건기록 및 조사기록을 보존하는 것이 과거사조사위원회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이렇게 해서 고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의 진상규명 문제는 다시 다중과 국민의 수중으로 되돌아 왔다.(계속)

“성상납 강요”는 ‘성폭행’을 의미한다(1)

글 머리에: 현대 자본주의에서 매매, 접대, 상납

‘성접대’나 ‘성상납’이라는 말은 좀 아리송한 용어들이다.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 의미가 애매한데도 관행처럼 언론에서 널리 사용되고 심지어 법률전문가들도 이런 용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한다. ‘접대’는 손님을 맞아 뭔가 시중을 드는 행위이며  ‘상납’은  윗사람에게 뭔가를 바치는 행위이다. 둘 다 시중을 든다거나 바친다거나 하는 어떤 ‘모심’의 의미를 함축한다. 하지만 ’손님’이 반드시 ‘윗사람’은 아니다. 손님은 외지에서 온 사람을 지칭하므로 수평적 관계의 사람이거나 아랫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납은 반드시 수직적 의미의 윗사람을 전제한다. 윗사람의 으뜸은 역사적으로 늘 사회 위에 옹립된 가상의 공동체인 국가, 그리고 국가의 관료들이었다. 즉 권력자들이 윗사람으로 행세했다. 그래서 권력자들이 가는 곳에 늘 상납이 따라다녔다. 

‘접대’나 ‘상납’이라는 말 앞에 ‘성’이라는 말이 붙으면 어떻게 될까? 가부장 체제에서 남성이 접대나 상납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있다 하더라도 아주 드물 것이다. 대개는 여성이 접대나 상납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니 성접대나 성상납이란 여성접대, 여성상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앞서 나는 접대나 상납의 목적어로 ‘뭔가’라는 말을 사용했다. 역사에서 그 뭔가의 ‘무엇’은 대체로 돈이나 재물이나 노동력이었다. 여성은 이 중 어디에 속한 것일까? 인류학자들은 여성이 돈(교환수단)이고 재물이며 노동력이었다고 말한다. 여성이 이처럼 본디 다면적이어서 가부장체제가 여성을 접대나 상납의 대상으로 삼았는지, 가부장체제가 여성을 그 체제의 수단으로 다면적으로 활용했는지 나는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가부장체제가 여성을 인간이기보다 돈, 소유물, 노동력으로 파악하는 인종차별주의적 관점과 관행을 유지해왔고 또 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접대 당하고 상납 당하면서 여성은 학대(虐待)를 경험해 왔다. 

이미 ‘당하다’라는 수동 표현을 쓸 수밖에 없었듯이 성접대나 성상납의 주체가 여성 자신인 경우는 드물었다. 누가 접대나 상납의 제물로 되기를 원하겠는가? 인신공희(人身供犧) 설화를 소설화한 <심청전>의 주인공 여성 심청이 인당수(의 용왕)에 자신의 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공양미 삼백석이 필요해서였다. 눈이 먼 아버지의 욕망으로 인해 ‘몸을 팔 수밖에 없는 운명’이 심청에게 강요되었다. 몸을 팔 수밖에 없는 이 운명을 자발적 ‘효’의 이데올로기로 정당화하고 심미화한 것이 <심청전>이라고 좀 쓴 소리를 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충’이 ‘효’의 국가 버전인 것처럼 ‘효’는 ‘충’의 가족 버전에 다름 아니었다. 이런 의미에서 충효는 가부장적 상납체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심청의 몸이 인당수의 용왕에게 ‘상납’되기 전에 심청은 뱃사람들에게 공양미 삼백석을 받고 자신의 몸을 이미 팔았다. 즉 공희(供犧)=상납 전에 이미 인신이 매매된 것이다. 심청은 몸과 바꾼 삼백석의 쌀을 모두 절(부처님)에 ‘상납’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그것이 심청에게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몸을 바치는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용왕에게 심청의 몸을 ‘상납’한 것은 심청이 아니라 항해의 안전을 바랐던 뱃사람들이었다. 여기서 아버지, 부처님, 용왕은 모두 상납을 받는 존재들로 나타난다. 

여기서 심청의 몸을 둘러싼 일련 행위연관들이 상납 과정에 대한 우화적 표현이라고 말한다면 과도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런 독해가 우리가 심청전에 대해 갖고 있는 심미감을 깨뜨릴 수 있으며 심지어는 혐오감까지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단언하고 싶지는 않다. 어떻든 심청전에 인신매매와 인신상납의 테마가 깊이 자리 잡고 있고 그것이 심미화, 도덕화, 정당화 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조선 시대에 읽힌 심청전이 21세기 현대에도 중요한 것은 인신매매와 인신상납이 예외가 아니라 오히려 정상이 되고 특수가 아니라 보편이 되었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 몸을 팖’이 ‘매춘(賣春)’여성만이 겪는 예외적이고 특수한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근시안적이고 맹목적인 것은 없다. 자본주의에서는 결혼한 여성도, 남성도 누군가에게 몸을 팔지 않고는(즉 ‘매춘’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다. 풀 艸와 날/해 日이 결합되어 ‘봄’을 의미하는 春은 생장력, 에너지, 잠재력, 노동력을 의미하고 그것을 노동으로 현실화하여 그 잉여가치를 이윤형태로 착취하는 것이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팔아야 하는 그 ‘누군가’가 인격형태을 취하는가 비인격적 알고리즘의 형태를 취하는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때로는 그 누군가가 자기자신일 수도 있다(자영의 경우). 소수의 자본가조차도 자본을 관리하는 자본의 하인으로서 살아간다. ‘나는 매춘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보편적 매춘사회인 글로벌 자본주의 사회에서 몸을 팔아 노동하며 살아가는 우리를 내부에서 차별하고 이간시키는 관념이다. 우리 오늘날 누구나 매춘한다고 말함으로써 성별과 인종을 넘는 우리의 공동의 출발점을 확인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낡은 인신매매를 종식시킨 사회가 아니라 과거에 강제적이었던 인신매매를 경제적 계약형식으로 혁신하여 보편화한 사회이다. 우리가 임금, 급료, 연봉 등의 말로 부르면서 서로 키재기를 하는 이 말들이 실제로는 우리의 인신대금, 몸값임을 누가 모르는가? 다만 우리가 너무 비참해질까봐 애써 감추거나 서로 감춰주고 있는 것일 뿐이다. 혹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자신의 낡은 정체를 가급적 드러내지 않기 위해 숨기려 해서든가. 렌트, 지대, 수수료, 로열티, 뇌물, 세금 등은 어떨까? 적어도 현대사회에서 그것은 독점이나 권력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합법화되었는가 불법에 머무르고 있는가의 차이가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상납의 범주들에 가깝다. 

구조적 강요의 지평

요컨대 우리는 모두 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인신매매나 인신상납의 구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을 구조적으로 강요당하기 때문이다. 우리들 각자가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서로 유리되어 있고 그 개개인들이 삶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공동의 수단들에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  이 구조적 강요의 조건이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해, 토지, 화폐, 자본, 기계, 기술, 통신망, 통치기구, 법체계, 학교, 미디어 등등이 우리의 삶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수단인데 그 대부분이 국가권력을 장악한 소수나 국제자본가들에게 장악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 대의체계는 생명개체들의 자기조직화와 직접민주주의를 무력화하고 생명의 실존을 타자에게 위임하는 태도, 관습, 문화, 사고법, 정당화체계를 대규모로 재생산한다. 그것이 낳는 결과는 뿔뿔이 흩어진 신자유주의적 개인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행동하게 하는 이 구조적 강요를 강요로서 느끼지 못하며 우리 스스로가 계약에 따라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행동한다고 믿게 된다. 

그렇다면 장자연이 문건과는 별개의 편지형식의 글 머리에서 “성상납을 강요당했습니다”라고 쓸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성별과 직업을 떠나 누구나가 겪고 있는 이 구조적 강요에 대한 고발일까? 만약 그런 의미였다면 그 고발은 누구나가 겪고 있는 학대 체험들의 연합을 제안하고 구조적 강요의 문제를 철폐하는 행동(사람들은 이것을 사회혁명이라고 부른다)을 촉구하는 격문(檄文)이었을 것이다. 장자연의 고발에 이런 측면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수 많은 사람들이, 특히 촛불혁명을 이끌어낸 다중들이 고 장자연의 죽음을 애통해 하고 그 억울함을 풀어내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은 그 문구의 이 격문적 측면 때문이다. 우리가 고 장자연 사건을 가해권력자 대(vs.) 다중의 적대 구도 속에서 발생하게 되는 필연적 사건 중의 하나로 이해하는 것도 “성상납을 강요당했습니다”가 갖는 저 적대성의 깊이와 보편성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성상납을 했습니다’와 ‘성상납을 강요 받았습니다’의 차이는 누가 왜 지우나?

그런데 구조적 강요의 지평은 “성상납을 했습니다”와 “성상납을 강요당했습니다”가 잘 구분되지 않는 근원적 지평이다. 왜냐하면 성상납을 강요당한 것이 구조적 강요를 배경에 깔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상납을 했습니다.”도 구조적 강요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윤지오가 누차 강조해서 말하듯이 “성상납을 했습니다.”는 “성상납을 강요당했습니다”와 같은 뜻이 아니다. 전자는 상납의 댓가에 대한 기대가 포함되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전자는 쌍방성을 함축하지만 후자는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교환성을 함축하지만 후자는 폭력성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윤지오가 증언에서 어떻게 말했는지를 살펴보자. 내가 읽고 들은 범위 속에서 윤지오는 이 둘의 차이에 대해 적어도 두 번 이상 언급한다. 

한 번은 2010년 6월 25일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 증인신문조서에서 판사의 질문에 답하면서이다.

문: 문서에 사람별로 피해사실이 적혀 있었다는 것인가요

답: 피해사실이 적혀 있는 것도 있고 성함과 성상납강요를 받았다고 기재되어 있는 것이 있었고, 어떠한 장에는 성함만 기재되어 있으면서 어떠한 언론사에 누구, 어디 무슨 사의 누구라는 식으로 기재되어 있는 것도 있었습니다.

(…)

문: 성상납과 관련하여서 구체적인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나요.

답: 성상납을했다는 내용이 아니라 성상납강요를받았다는 것입니다.

문: 성상납 강요를 받았다는 것은 장자연의 피해사실에만 적혀 있었나요 아니면 송00나 이00의 피해사실에도 적혀 있었나요.

답: 송00이나 이00은 앞부분에 명시되어 있었고 뒷부분에 이름만 쭉 나열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문: 송00나 이00에 대해서 적혀 있었던 것은 어떠한 내용이었나요

답: 피해를 보았다는 내용들이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문: 송00나 이00의 이름이 적혀 있는 페이지에는 성상납 관련 이야기는 없었나요.

답: 예 다른 페이지에 성상납 강요를 받았다고만 적혀 있었습니다.

진행되는 문답에서 윤지오는 두 가지를 분명히 밝힌다. 하나는 피해사실과는 별도로 ‘성상납 강요를 받았다’고 기재되고 성함(이름)이 나열된 글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성상납을 했다’고 기재되어 있지 않았고 ‘성상납 강요를 받았다’고 기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윤지오는 증인신문 시의 판사가 애매하게 흐리고 있는 ‘성상납 관련’이라는 말을 바로 잡으면서까지 ‘성상납을 했다’가 아니라 ‘성상납 강요를 받았다’가 자신이 본 정확한 문구였음을 분명하게 강조한다.

또 다른 한 번이 있다. 그것은 “성상납을 강요받았다”는 것은 “성폭행을 당했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고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 이름으로 잘못 붙여진) 고 장자연 사건은 ‘성상납 사건’이 아니라 ‘성폭력 사건’으로 다뤄져야 한다고 자신의 적극적 해석을 덧붙인   2019년 3월 19일 ‘오늘밤 김제동: 목격자 윤지오 검찰에 묻는다’ (https://www.youtube.com/watch?v=–56SyXa50I) 프로그램에서다. 이 프로그램에서 윤지오가 김제동과 질문과 답을 주고받으면서 내놓은 메시지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지금까지 피해자 입장에서 수사가 진행되지 않았다. 
  • 가해자에 대한 수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피해자들에 대한 조사만 가혹하게 이루어졌다.
  • [경찰과 검찰은] 가해자를 규명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 장자연 씨가 쓴 문구는 “성상납을 강요받았습니다”이지 “성상납을 했습니다”가 아니다.
  • 나는 경찰에서 일관되게 이렇게 말해 왔다.
  • 장자연 씨는 성상납을 할 분이 아니다.
  • 장자연 씨가 자의로 성상납을 한 것이 아니라 가해자에 의해 타의로 성폭행을 당한 것이다.
  • 언론보도에서 ‘성상납’ 사건이라고 쓰고 또 그렇게 알려지게 된 것은 언론이 장자연 씨에 대해 2차 가해를 한 것이다.
  • 장자연 씨가 겪은 것은 강요에 의한 성폭행이었다.
  • 그것은 물질적 거래나 동의 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 문건에는 “협박 당했다”, “강요 당했다”는 핵심적 두 줄이 있는데 왜 이 “협박”과 “강요”에 대한 수사는 이루어지지 않는가?

이 프로그램에서 김제동은 윤지오 씨 이야기의 핵심을 이렇게 정리한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이 사건을 이해하면 그것은 “성상납” 사건이 아니라 “성폭력 사건”이다. 여기에 꼭 한 마디를 덧붙여야 하는데, 그것은 ‘성상납 강요’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단순한 성폭력 사건이 아니라 “권력형 성폭력”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장자연 리스트는 ‘권력형 성폭행’ 리스트가 되며 ‘성범죄 혐의자들’의 리스트가 된다. 가해자들이 장자연 리스트를 없애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하자 무엇보다도 “성상납 강요를 받았습니다”라는 문구를 지우려고 하는 동기는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구절이 없다면 윤지오가 말하듯, 그 리스트가 ‘같이 밥을 먹은 사람들의 리스트인지 폭행을 당한 사람들의 리스트인지’ 그 성격을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계속) 

“성상납을 강요받았습니다”라는 문구는 어떻게 지워졌나?

장자연 리스트를 없애는 것이 실패한 후 나타난 가해권력의 시도: 리스트의 문구나 이름을 없애기(끝)

홍준표의 경우는 과거사진상조사단에 참가했던 조사위원 개인의 언론 인터뷰에 의해 리스트에 있던 이름이 지워지고 윤지오의 증언이 왜곡되는 경우다. 이런 경우 증언 신빙성의 훼손은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과거사조사위원회 자체가 직접 윤지오의 증언을 왜곡하고 증언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경우다. 리스트에서 “성상납을 강요받았습니다”라는 문구를 지우는 과정이 그러하다. 이제 이 문제에 대해 살펴보자.

앞서 인용한 바 있는 JTBC 뉴스룸 전화인터뷰에서 윤지오는 장자연 리스트에 “성상납을 강요받았습니다”라는 문구가 있었다고 말했고 9년 전인 2010년 6월 25일 진술에서도 거의 똑같은 내용을 말했다. 그런데 과거사조사위원회 심의발표문은 놀랍게도 해당 증언에 대해 이렇게 쓴다. 

“조사단과의 1차 면담에서는 장자연 문건 중 ‘성상납을 강요받았습니다’라는 제목 아래 사람 이름과 직함이 나열된 문건이 2장에 걸쳐 있었다고 진술하였음. 그러나 이후 사람 이름과 직함이 나열된 문건에는‘성상납을 강요받았습니다’라는 내용이 없었다고 종전 진술을 번복하였음

이 발표문을 읽고 나면 누구나가 ‘‘성상납을 강요받았습니다’라는 말이 장자연 리스트에 없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고 윤지오의 증언이 왔다갔다하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이 발표문을 읽는 사람에게 이런 생각과 느낌이 강하게 드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과거사조사위원회 심의발표가 윤지오의 증언을 편집하고 조작하는 방식 때문이다. 

과거사조사위원회 심의발표문은 윤지오가 1차 면담 때 한 번 ‘성상납을 강요받았습니다’라는 문구가 있었다고 말한 바 있지만, ‘이후’에 그러한 내용은 없었다며 종전 진술을 번복했다고 간단히 쓴다. 두 번 중에서 한 번은 ‘있었다’이고 또 한 번은 ‘없었다’이므로 1 대 1의 비중인데 뒤의 한 번이 앞의 한 번을 부정하므로 현재에서는 그 문구가 없었다가 실효적으로 남게 된다. 

게다가 ‘있었다’에서 ‘없었다’로의 번복이 이루어지는 시간이 매우 짧다. 심의발표문이 말하는 ‘1차 면담’이 정확하게 어느 시점의 조사를 지칭하는지도 알 수 없게 쓰여 있지만, ‘1차 면담’이 윤지오가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와서 과거사진상조사단에서 처음으로 증언한 2018년 12월 초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면 그 ‘이후’란 아무리 길어도 불과 수개월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과거사조사위원회 심의발표문이 사실이라면 윤지오가 “성상납을 강요 받았습니다”라는 문구가 있었다고 했다가 불과 몇 개월 만에 그 문구가 없었다고 말했다는 것으로 된다. 

정말 과거사조사위원회의 이 심의발표가 사실일까? 나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추론한다. 오히려 그것은 사실에 대한 왜곡이며 그 결정적 문구를 지우려는 과거사조사위원회의 조작으로 추론한다. 왜 그렇게 추론하는가?

먼저 그 문구가 사라지도록 만드는 실효를 얻기 위해서 과거사조사위원회가 어떤 조작 방법을 쓰는지 살펴보자. 

첫째로 과거사조사위원회는 윤지오가 무려 9년전의 참고인 진술에서 ‘성상납을 강요받았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장이 있었다고 진술했다는 사실을 빠뜨린다. 기억을 상기시키자면 이렇다. 2010년(2018년이나 2019년이 아니다!) 6월 25일 수원성남지원 증인신문조서에서 질문하는 판사에게 윤지오가 한 답이다.

문: 증인은 문서의 내용에 대해 기억이 나는지요?

답: 다는 아니지만 기억은 납니다.

문: 문서에 사람별로 피해사실이 적혀 있었다는 것인가요?

답:피해사실이 적혀 있는 것도 있고, 성함과 성상납을 강요받았다고 기재되어 있는 것이 있었고 어떤 장에는 성함만 기재되어 있으면서 어떤 언론사에 누구 어디 어느사의 누구라는 식으로 기재되어 있는 것도 있었습니다.

성상납 강요에 관련된 문답은 위에 인용한 것보다 더 길게, 356쪽에서 357쪽까지 이어진다. 윤지오의 진술은 모호하지 않고 뚜렷하다. 과거사조사위원회가 9년전인 2010년의 이 증인신문조서를 읽지 않았을 리가 없다. 만약 이 중대한 사건을 재조사하는 과정에서 과거사조사위원회가 그 조서를 읽지 않고 발표에까지 이르렀다면 그것은 국민으로부터 조사위임을 받은 국가기관으로서 명백한 직무유기일 것이고 국민이 책임을 물어야 할 사항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누락이 실수일 가능성보다 고의적인 누락일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고 판단한다. 

‘성상납을 강요받았습니다’라는 문구가 리스트에 있었다고 10년 전에 처음 진술했는가 몇 개월 전에 처음 했는가는 결정적인 차이를 갖는다. 10년 전에 했다면 정황상 사익취득이라는 사기목적과 연관될 하등의 동기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말한 것처럼 윤지오는 10년 전에 이미 동일한 내용의 진술을 증인신문에서 했다. 과거사조사위원회는 이 사실을 고의로 누락시킴으로서 윤지오의 진술이 최근에 지어낸 말일 수 있음을 은근히 암시하고 사익 동기와도 연관시킬 수 있는 시간 여지를 남겨 놓았다. 성상납을 강요받았습니다, 라는 문구를 최근에 한 것처럼 만듦으로써 말이다. 매우 심각한 왜곡이다. 

둘째로 과거사조사위원회 심의발표는 조사단과의 ‘1차 면담’ “이후” 언제, 어디에서 윤지오가 “‘성상납을 강요받았습니다’라는 내용이 없었다고 종전 진술을 번복”했는지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이후 사람 이름과 직함이 나열된 문건에는‘성상납을 강요받았습니다’라는 내용이 없었다고 종전 진술을 번복하였음”이라는 심의발표 문구에는 누구에게 했다거나 어디에서 했다거나 어떤 방식으로(대면진술인지 전화진술인지 혹은 간접 전언인지 등등) 했다거나 하는 6하 원칙 상의 핵심 특정이 빠져있다. 시간에 대한 규정만이 있는데 거기에는 “이후”라는 막연한 말이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그 “이후”가 언제인지 아무 것도 특정하지 않음으로써 심의발표는 사실을 숨기고 왜곡하면서도 그 은폐와 왜곡을 정확하게 밝히내기 어렵게 만들어 놓는 교묘한 술책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래봐야 소용 없는 일이다. 윤지오가 ’성상납을 강요받았습니다.’라는 문구가 장자연 리스트에 있었다고 말한 것은 과거사조사위원회의 심의발표와는 달리 (1차 면담 때) 단 한 번 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네 번에 걸쳐서 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가 앞서 인용한 바 있는 2010년 6월 25일 증인신문에서다. 

두 번째는 과거사조사위원회가 쓰고 있는 대로 ‘1차 면담’ 조사 때였다(자료가 미공개상태지만 2018년 12월 아니면 2019년 3월일 것이다). 

세 번째는 역시 앞에서 인용했듯이 JTBC 뉴스룸 앵커 손석희와의 전화인터뷰(2018년 12월 12일)에서다. 

그리고 네 번째가 2019년 3월 19일 ‘오늘밤 김제동’에서의 인터뷰 때다. 

이 밖에도 내가 알지 못하는 동일한 진술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윤지오의 진술은 10년간에 걸쳐 일관되며 이 점에서는 번복은 물론이고 변동조차 없다. 적어도 네 번 이상되는 10년간의 이 일관된 증언을 뒤집고 윤지오가 이 진술을 2019년 3월 19일 이후에 번복했다고 말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말이다. 

비록 참고인 진술이라 할지라도 증인신문에서의 증언은 리스트에 이름이 있는 사람들을 중죄로 처벌받게 만들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증인신문 전에 이러한 사실은 통상 증인에게 통보된다. 10년 전의 윤지오가 있지도 않은 문구를 있다고 할 동기가 있는가? 없다. 게다가 권력자들의 이름을 거짓으로 증언했다가 받을 보복은 또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목숨을 걸고 거짓말을 한다는 말인가? 윤지오가 “성상납 강요를 받았습니다”라는 문구가 가해권력자들의 이름 앞에 적혀 있었다고 거짓을 말할 이유를 찾아내는 것은 숲의 나무 위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찾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그 10년 후에 윤지오가 지금에 와서 또 무슨 동기로 그러한 문구가 없었다고 10년 전에 한 진술을 번복했겠는가? 가해권력자들로부터 뇌물이라도 받았단 말인가? 그랬다면 지금처럼 윤지오가 전국가적이고 총력전적인 마녀사냥을 당했겠는가? 또 뇌물을 받고 진술을 번복할 바에야 리스트에 쓰인 문구에 대한 진술을 번복하기보다 리스트 자체가 없었다고 말해 버리면 훨씬 더 간편한 방법으로 더 큰 대가를 얻을 수 있지 않았겠는가? 아니면 권력자들로부터 협박을 받아 굴복했던 것일까? 역시 이 경우에도 리스트를 부정해 버리는 것이 “성상납 강요” 문구가 없었다고 번복하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고 확실하게 굴복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가정하건 저렇게 가정하건 과거사조사위원회의 심의발표에서 주장하는 “성상납 강요 문구에 대해 윤지오가 진술을 번복했다”라는 말은 결코 납득할 수 없는 말이다.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왜 윤지오가 이런 “번복”을 했는지 과거사조사위원회가 증거를 내놓지 않는 한 이 말은 과거사조사위원회가 국민에게 한 역사적 거짓말로 남아 있을 것이고 과거사조사위원회의 고 장자연 사건 심의결과와 사건종결이 허구임을 증명하는 것으로 기록될 것이며 고 장자연 사건에 대한 재수사가 불가피함을 가리키는 이정표로 남아 있을 것이다.

장자연 리스트를 없애는 것이 실패한 후 나타난 가해권력의 시도: 리스트의 문구나 이름을 없애기(3)

홍준표라는 이름이 공개된 경위

윤지오는 어떤 언론에서도 홍준표라는 이름을 실명 전체로 거명하지 않았다. 4월 말경 윤지오의 변호조력을 제공하고 있는 정의연대와의 대화에서 이름의 그 특이함을 조금 더 구체화해서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와 특이하게도 이름이 같아서” 그 이름을 기억한다고만 밝혔을 뿐이다. 역시 실명은 ‘형법상 사실적시 명예훼손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증언한다’는 원칙에 따라 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진술에 기초하여 정의연대가 4월 23일 구준표와 이름이 같은 정치인이라면 ‘홍준표’일 것이라는 데 착오가 없을 것으로 보아 홍준표 국회의원을 경찰청에 수사의뢰함으로써 홍준표가 장자연 리스트에 있는 정치인일 것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하지만 윤지오는 장자연 리스트에 “홍준표”라는 이름이 있었다고 그때까지 말한 적이 없으며 지금도 그렇게 말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오히려 이것을 기정사실로 인정한 것은 홍준표 자신이다. 홍준표가 윤지오를 비난하는 유튜브 영상(‘윤지오의 거.짓.말’, 2019. 6. 26)에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어떤 여자가” “장자연 리스트에 홍대표님 이름이 있으니까 잠시 나와 줄 수 없느냐”는 동부지검의 전화를 받았다, “본 정신이 아닌 여자가 한 마디 하는 것 가지고 그걸 나를 나오라 마라 하느냐” 그 검사에게 야단을 쳤다, “그 뒤에 보니까 또 어느 이상한 단체하고 합작해서 그 리스트에 홍준표 이름이 있었다. 말하자면 뭐 특이한 이름의 국회의원이 있었는데 그게 홍준표였다, 그 여자가 그 말을 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윤지오는 ‘홍준표’라는 이름을 조사기관 외에서는 말한 적이 없다. 그것이 오랜 숙고 끝에 ‘영리하게’ 증언하기 위해 고안한 그 나름의 방법이고 기술이기 때문이다. 조사기관에서의 실명 언급은  ‘공연성’ 요건이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형법상 명예훼손에 저촉되지 않는다. 그런데 언론에서의 실명 언급은 ‘공연성’ 요건을 충족시켜 형법상 명예훼손에 저촉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여자”가 그렇게 말했다고 하고 그 영상에 “윤지오의 거.짓.말”이라는 이름을 붙여 “윤지오가 리스트에 홍준표라는 이름이 있었다”고 말했다고 자백하듯 공표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홍준표 자신이다. 윤지오가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피하면서 “영리하게” 진술한 것과는 대조되는 태도이다. 홍준표는 오히려 법을 위반하면서 ‘윤지오가 홍준표라는 이름이 리스트에 있었다고 말했다’고 있지도 않은 사실, 즉 “허위사실을 적시하여” 윤지오의 명예를 훼손하고 나아가 “본 정신이 아닌 여자” 식으로 인터넷에서 그 인격을 모욕하고 있기 때문이다(공연성이 충족되는 형법상 모욕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반하장식으로 홍준표는 자유한국당 강연재 변호사를 대리로 정의연대만이 아니라 윤지오까지 명예훼손으로 검찰에 고발했다(2019년 4월 29일). 고발 이유는 윤지오가 홍준표 대표의 실명을 거론했다는 것인데, 앞서 말한 것처럼 윤지오는 홍준표의 실명을 거론한 적이 조사기관 외에서는 없다. 만약 고발자가 조사기관에서의 실명 언급을 명예훼손의 내용으로 삼는 것이라면 그 고발자가 국가기관의 공익적 조사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대한민국 법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홍준표라는 이름이 지워지는 경위

이런 경위를 통해 ‘장자연 리스트에 홍준표라는 이름이 있었다’는 이미지는 굳어졌다. 그런데 2019년 5월 20일 전북대 조기영 교수는 이동형과의 인터뷰에서 다른 문제에 관한 윤지오의 진술신빙성은 인정하면서도 “특이한 이름”의 국회의원과 관련해서는 윤지오가 착오를 일으켰고 본인도 그 진술 착오를 인정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아래에 그 인터뷰의 해당 구절이 있다.

이동형> 그렇군요. 배우 윤지오 씨 증언과 관련해서는 신빙성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윤지오 씨의 증언은 대부분이 탄핵된 겁니까? 아니면 받아들여진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습니까?

◆ 조기영> 윤지오 씨 진술 신빙성이 많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요. 그 이유가 최근 진술한 내용이 일부 번복되었다는 건데, 전반적으로 수사 당시에 윤지오 씨가 열세 번 증언을 했는데요. 거기에 나와 있는 수사기록들을 보면, 신빙성이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판단으로. 다만, 최근 진술 번복, 장자연 리스트나 성폭행 사건 관련해서 신빙성 의심이 되고 있는데, 성폭행 의혹은 윤지오 씨만 제기한 게 아니라 실제 중요 참고인도 처음에는 문건에 심각한 성폭행 부분이 기재가 되어 있었다고 진술을 하기도 했습니다.

◇ 이동형> 윤지오 씨가 방송에서 특이한 이름의 국회의원이 장자연 리스트에 있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도 진상조사단에 조사받을 때 이야기를 했다고 이야기했거든요?

◆ 조기영> 네.

◇ 이동형> 이것은 크로스체크가 됐습니까?

◆ 조기영> 윤지오 씨가 특이한 이름이라고 한 분이 맞는지 조사를 해봤는데요. 그것은 윤지오 씨가 착오를 일으킨 것으로 판단됐습니다.

◇ 이동형> 본인도 인정했습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 조기영> 네,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대화 기사는 아마도  맨 앞에 언급한 네티즌의 기억 속에 “누나가 홍의원은 잘못 지목한거 맞다고 하지 않았어요?”로 남아 있는 그 내용일 것이다. 조사위원 조기영은 “윤지오 씨가 특이한 이름이라고 한 분이 맞는지 조사를 해봤는데요. 그것은 윤지오 씨가 착오를 일으킨 것으로 판단됐습니다”라는 말을 함으로써 사람들의 뇌리에서 6월 26일 홍준표가 자신이라고 밝힌 그 ‘특이한’ 이름을 장자연 리스트에서 지우는 역할을 떠맡는다. 이것이 본의였는지 아니었는지는 알 수 없고 또 그다지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하지만 이 인터뷰 대화는 그 ‘특이한’ 이름의 국회의원 이름이 장자연 리스트에 없었다는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윤지오의 주장과 진술은 조기영의 생각과는 다르며 착오하고 있는 것은 윤지오가 아니라 조기영임을 보여준다. 애초에 윤지오는 장자연 리스트에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와 이름이 같은’ 그 정치인의 이름이 있었고, 그 외에 장자연과 함께 술자리에서 한 사람의 국회의원을 만났는데 그 두 사람이 동일인일 수 있다는 가정하에서 과거사진상조사단 재조사 진술을 시작했다. 그런데 재조사 과정에서 당시 국회의원 사진들과 자신의 기억을 대조해 본 결과 이 두 인물이 동일인이 아닐 수 있다는 정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술자리에서 본 국회의원의 인상착의와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와 이름이 같은’ 그 국회의원의 2009년 당시 사진의 이미지의 인상착의가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조사과정에서 제기된 문제는 장자연 리스트에서 본 이름의 국회의원과 술자리에서 본  국회의원이 일치하는가 않는가이지 장자연 리스트에 ‘이름이 특이한’ 그 국회의원이 있었느냐 없었느냐가 아니다. 다시 말해 (1)자신이 리스트에서 본 이름은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와 이름이 같은’ 그 정치인이라는 것이 맞고, (2)술자리에서 만났던 국회의원과 ‘리스트에 이름이 있었고 구준표와 이름이 같았던’ 그 정치인이 일치하는가 일치하지 않는가만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조기영 조사위원이 오히려 착오하여 (2)에서의 불확실을 (1)의 부정으로까지 연장하여 윤지오가 (1)까지 부인한 것처럼 잘못 독해하고 또 그대로 발언한 것이다. 이것 역시 앞서 말한 이미지독해가 가져오는 폐해이다. 그런데 이 잘못된 독해와 발언에 따르게 되면 장자연 사건과 관련된 국회의원은 모두 사라져 0명으로 된다. 하지만 윤지오의 실제 증언에 따르게 되면 장자연 사건과 관련되었을 국회의원은 ‘이름이 특이한’ 사람 한 사람 외에 리스트에 이름이 있는지 없는지 기억에 없지만 술자리에서 만났던 다른 국회의원, 합하여 2명이 될 수 있는 것이다.(계속)

장자연 리스트를 없애는 것이 실패한 후 나타난 가해권력의 시도: 리스트의 문구나 이름을 없애기(2)

“성상납을 강요 받았습니다”라는 문구와 리스트의 이름들

하지만 “진상조사단에서 이렇게 진술했다”는 형식이 아닌 앵커와의 문답 형식으로 윤지오는 증언의 핵심 내용을 말한다.  당시 윤지오와 인터뷰한 앵커 손석희는 장자연이 피해사실을 문건으로 남겼는데 그것은 4장으로 되어 있고 그것을 세간에서 ‘장자연 리스트’라고 부른다고 알고 있었다. 장자연이 남긴 글이 유서가 아님은 인식하고 있었지만 문건이 그 4장 외에 고유한 의미의 ‘장자연 리스트’라고 할 수 있는 편지글 형식의 3장이 더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윤지오의 인터뷰는 앵커의 (그리고 시청자의) 그러한 앎을 자신의 인터뷰 증언을 통해 바로잡는 과정이다. 자신이 피해사실을 적은 문건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앵커가 모르고 있는 것, 즉 “성상납을 강요받았습니다”라는 문구 아래에 이름들이 나열된 ‘리스트’가 따로 있었음을 밝힘으로써다. 중요한 대목이므로 있는 그대로 인용해 보자. 

[앵커] 알겠습니다. 지금 저하고 인터뷰하시는 분께서 이 사건의 핵심 증인으로 불리우는 것은 성추행 현장을 목격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장 씨와 같이 신인 배우로서 여러 가지 강요를 받고 피해를 보셨기 때문이기도 한데 실제로 장자연 씨의 경우에 피해 사실을 문건으로도 남겼습니다. 그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윤모 씨/장자연 ‘동료 배우’ : 자연 언니가 떠난 지 며칠 안 돼서 자연 언니가 문건을 가지고 있던 매니저분에게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서울 봉은사에서 유족분들과 함께 자연 언니가 남긴 문건을 소각하기로 했다고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 문서를 직접 처음보게 되었습니다.][앵커]피해 사실이 적혀 있다는 4장의 문건이 이른바 장자연 리스트라고 불리우는 그 문건입니다. 그런데 언론에서 보도됐던 문건과 같은 내용이었습니까? 

[윤모 씨/장자연 ‘동료 배우’ : 피해사실을 적은 내용인 건 맞는데 그와 별도로 리스트처럼 사람 이름만 적힌 종이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앵커] 그런가요? 저희가 파악하기로는 지금까지 알려졌던 장자연 문건에는 사람 이름만 적힌 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기존에 알려진 문건과 또 다른 문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십니까?

[윤모 씨/장자연 ‘동료 배우’ : 저는 무엇이 세상에 알려지고 알려지지 않았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기억하는 것은 그 리스트 맨 위에 성상납을 강요받았습니다라는 문구가 있었고 그 아래에 이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앵커] 그러니까 문서 위에 성상납을 강요받았습니다라는 문구가 있었고 그 아래 이름들이 있었다. 혹시 저하고 말씀 나누신 분이 아는 사람들의 이름도 있던가요?

[윤모 씨/장자연 ‘동료 배우’ : 이름이 적힌 부분은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는 아직 어려움이 있습니다.][앵커] 그런가요? 그렇다면 그중에서 장자연 씨와 함께 만났던 인물들도 검찰조사단에 이 얘기는 했습니까?

[윤모 씨/장자연 ‘동료 배우’ : 이번에 검찰 과거사위와 조사를 받을 때 사진으로 조사를 했습니다. 제가 만난 적이 있는 사람들을 여기 근거해서 지목했고 그중에 검찰과 언론에 계신 분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 자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윤지오는 피해사실을 기록한 문건 외에 고 장자연이 “성상납을 강요받았습니다”라고 쓰고 그 아래 이름들을 나열한 리스트의 존재를 밝혔다. 그런데 이 점은 실제로는 “밝힌”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8년전인 2010년 6월 25에 윤지오는 거의 어구 하나 틀리지 않는 방식으로 똑 같은 내용을 수사기관에 진술한 바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토록 중요한 8년 전의 진술이 어떻게 국민대중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심지어 대한민국 ‘최고의’ 앵커로 알려져 있는 손석희조차 이 사실을 모를 정도로, 그리고 그 진술을 새삼스럽고 놀라운 것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그 진술이 깊이 감추어질 수 있었는가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누가 왜 사회적 인지 프레임을 그렇게 왜곡시켰는가?”라는 질문을 남긴다.

책 출판보다 중요한 미래행보: 증언과 진실 말하기의 기술 

“아는 사람의 이름”을 묻는 앵커의 질문에 윤지오는 “이름이 적힌 부분은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는 아직 어려움이 있습니다.”라고 하여 아직 언급의 방법과 기술을 결정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변호사 박훈이 추후에 어이없게도,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아는 것처럼 꾸며 국민들을 기망한’ 사기술로 단정해 버리는 이 “언급하기의 어려움”은 가해권력측의 “남자들”이 입을 맞춰 자신의 말을 거짓말로 모는 난감한 상황 속에서 장자연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미래 행보”를 어떻게 “영리하게” 밟아나갈 것인가라는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에 관한 것이다. 이 사실은 캐나다로 돌아가기 전에 “하고 싶으신 말씀” 있으면 짧게 해달라는 앵커의 질문에 윤지오가 내놓은 답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저는 조금 있으면 다시 캐나다로 돌아갈 것이고 조만간 책을 출간할 예정입니다. 책을 쓰는 이유는 자연 언니와 저를 위해서 진실을 밝혀야만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뿐이고요. 개인적으로는 이 일로 연예인의 꿈을 접어야 했던 저의 20대를 뒤돌아보고 9년의 세월 동안 저를 따라다니는 장자연 사건의 목격자라는 주홍글씨를 제 스스로 털어버리고 싶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찌 됐든 저는 어려운 결정을 내리고 법정에 선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6개월 동안 재판이 두 번밖에 열리지 않았고 다음 재판도 3개월 뒤에나 열리게 됐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내년 인사 때 재판부가 바뀔 가능성도 있다고 하는데 만일 새로운 재판부에서 제 증언이 필요하다면 다시 한 번 증언석에 서겠습니다.”

여기에서 윤지오는 자신의 “미래행보”의 윤곽을 뚜렷하게 그려서 보여주고 있다. 1)장자연의 죽음과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건의 진실을 알리는 책을 출간할 예정이다. 2)새로운 재판부가 증언을 요구하면 다시 증언대에 서겠다. 3) 개인적인 차원에서 지난 9년을 따라다니며 연예인의 꿈을 접게 만들었던 “장자연 사건의 목격자라는 주홍글씨”를 “스스로” 털어버리고 싶다.

실제로 윤지오는 2019년 3월 7일 장자연 10주기에 맞춰 <13번째 증언>을 출판했으며 재판부의 추가 증언 요구는 없었지만 과거사조사위원회 활동기간 연장으로 인한 과거사진상조사단의 추가조사 요구에 응해 추가 증언했다. 이 시기에 2018년 말과 비교해서 중요한 변화가 발견된다. JTBC 전화인터뷰에서 말한 저 “언급하기의 어려움”에 대한 윤지오의 나름 대로의 타개 방법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 방법은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1)지금까지의 소극적 인터뷰 기피에서 적극적 인터뷰 응락으로의 전환, 2)가명/가면 인터뷰에서 실명/실면 인터뷰로의 전환, 그리고 3)장자연 리스트 공개에서 진상조사단에서는 실명을 밝히되 언론 인터뷰에서는 실명을 밝히지 않고 대한민국 형법(“사실적시 명예훼손”)을 위반하지 않는 선 속에서만 진술한다. 이러한 방법에 따라 그는 진상조사단에서의 실명증언과는 달리 언론에서는 리스트의 내용을 “언론사 관련 성이 같은 세 명”, “이름이 특이한 정치인”이라는 식으로만 말한 것이다. 

‘장자연 리스트’를 없애는 것이 실패한 후 나타난 가해권력의 새로운 시도: 리스트의 문구나 이름을 없애기(1)

요점

장자연 리스트를 없애려는 시도가 김수민, 김대오, 박훈 등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 시도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논의했다. 장자연 리스트를 없애는 것은 10년 전 진술증거들의 명확한 실재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과거사진상조사단이 그것의 실재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리스트의 실재를 부정하기 어렵게 되자 그 속의 핵심 문구나 이름을 지우려는 시도들이 나타났다. 이 중 주목할 만한 것 중 하나는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와 특이하게 이름이 같은 정치인”의 이름을 지우려는 시도이고 또 하나는 “성상납 강요를 받았습니다”라는 문구를 지우려는 시도이다.

홍준표라는 이름

정의연대 김상민 사무총장이 박훈 변호사를 무고죄로 고발하는 자리에서 국회의원 홍준표를 민형사소송할 것이라고 말한 기자회견을 인용한 윤지오의 인스타그램 피드에  한 네티즌이 “누나 홍준표 의원은 왜요? 누나가 홍의원은 잘못 지목한거 맞다고 하지 않았어요? 제가 누나 기사들은 거의 다 읽어서 어렴풋이 그런 내용 본 것도 같은데.. 제가 잘못 본 걸수도 있으니까 누나가 설명 해줬으면 좋겠어요.”(hwook91)라는 댓글을 달았다. 그 댓글에 내 생각을 밝히고 싶었으나 나는 지난 4개월간 어떤 인스타그램에도 댓글을 달아본 적이 없고 불가피한 필요가 생기기 전에는 이 원칙을 지켜나갈 생각이기 때문에 이 블로그에 그 물음에 대한 나의 생각을 써보고자 한다.

정독해와 이미지독해

어떤 말이나 글을 듣고 읽을 때 여러가지 독해 방식이 있겠지만 지금 우리가 다루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정독해와 이미지독해가 구분될 필요가 있다. 정독해가 문장/말의 전후맥락, 지시관계, 의미연관 등을 정밀하게 따져 읽는 것이라면 이미지독해는 문장/말이 연상시키는 것을 중심으로 읽는 것이다. 전자는 능동적 독해력을 요구함에 반해 후자는 수동적 독해력을 더 많이 요구한다. 전자는 이성적 능력을 요구함에 반해 후자는 상상적 능력을 요구한다. 영상문화가 지배적으로 되면서 사람들은 이미지독해의 능력을 얻는 대신 정독해 능력을 잃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윤지오의 증언에 대해서도 정독해보다는 이미지독해가 널리 유행하면서 오해/상상에 또 다른 오해/상상이 누적되어 진실이 가려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가해권력이 바라마지 않는 것이고 또 적극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그 부풀려진 상상, 환영체계 뒤로 숨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홍준표라는 이름의 문제는 그 중 하나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크게 오해된 말 : “그 이슈를 이용해서 영리하게”

홍준표 문제를 다루려면 이 세상에서 가장 크게 오해된 말이라고 해야 할 “그 이슈를 이용해서 영리하게”라는 윤지오의 한 마디로 돌아가야 한다. 김수민이 이 구절을 ‘사기 프레임’ 속에 집어 넣어 이미지독해한 이후로 변호사, 기자, 그리고 군중의 두뇌 속에 확고하게 부정적인 이미지로 굳어져 있는 말이 이것이다. 영리함은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되어 ‘영리한 사기’로 해석되었다. 그리고 이 말이 ‘사기 프레임’ 속에서 기능하기 위해서 김수민은 앞뒤 맥락을 모두 절단했다. 책의 출판과 관련하여 계약금, 인세, 홍보비용, 매대노출, 미디어노출, 매체인터뷰, 유튜브 강연 공연 방송출연 등 <13번째 증언> 출판과 관련된 여러 문제들에 관해 대화하던 중인 2018년 12월 7일에 윤지오는 이렇게 말한다.

“난 책도 책이지만/ 그후 내 행보가 더 중요하고 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고 판단되서/ 지금 만나고다니는 다른사람들도 그렇고/책은 그냥 출판자체에 의미를 두는거라/많이 안팔려도 나는 별로 감흥이 없을거같아/많이팔려도 그렇고/하지만 분명한건 이슈는되니까/그 이슈를 이용해서 영리하게/그동안 못했던 것들을 해보려고/그래서 출판하는거고”

나는 이 인용에서 윤지오의 말 전체를 통일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중간에 끼어들어 윤지오의 말을 분절시키는 김수민의 세 마디 “응/응/응 책 판매가 그렇게중요한게아니라면 큰 신경안써도될거야”는 뺐다. 화제는 책인데 위의 인용은 책을 출판하는 것의 위치에 대한 윤지오의 인식을 명확하게 밝힌다. 책에 대해서 윤지오는 1)책이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책도 책이지만”) 그것이 핵심은 아니다(“책은 그냥 출판자체에 의미를 두는거라/많이 안팔려도 나는 별로 감흥이 없을거같아/많이팔려도 그렇고”). 2)그런데 책의 출판이 [고 장자연 사건과 관련하여] 이슈가 될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분명한건 이슈는되니까”) 3)출판을 매개로 한 이 이슈화를 이용해서 영리하게 그 동안 못했던 것들을 해보려고 한다.(“그 이슈를 이용해서 영리하게/그동안 못했던 것들을 해보려고/그래서 출판하는거고”) 4)그것은나의 이후의 행보에 관한 것인데 지금 만나고 다니는 다른 사람들도 나의 이후의 행보를 규정하는 일부다. 

“영리하게”의 목적: 장자연 사건 진상규명과 가해자 처벌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 후 내 행보”와 “지금 만나고다니는 다른사람들”이다. 윤지오가 영리하게 사기를 치고자 했다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이미지독해법(이것은 변호사 박훈의 동일한 이미지독해법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상승작용한다)에 따르면 이것은 사기와 관련된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2018년 12월 초 당시 윤지오가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던가? 그리고 “그 후 내 행보”의 윤곽이 무엇이었던가? 위의 말을 듣고 김수민이 “그래 너가 알아서잘할거라믿어”라고 말하자 윤지오는 이렇게 덧붙인다.

“아녀 ᅮ/ 그냥 하는거지 뭐/어차피 인생이 계획한바대로 되는것도아니고/뭐든다해봐야지/ᄏᄏᄏ기대치가 애초에없엉”

“그 동안 못했던 것을 해보려고”, “계획한바”, “뭐든다해봐야지”, “기대치”는 모두 행보와 연관된 말, 즉 미래의 행동과 관련된 말들이다. 윤지오는 김수민에게 책출판과 관련해서는 꼼꼼하게 물어보고 또 자신의 생각과 계획도 밝히지만 미래 행보와 연관해서는 말을 아끼고 구체적인 것을 밝히지 않으며 묻지도 않는다. 즉 김수민이 이 문제에 대해서는 상의할 대상이 아니라는 인식을 드러낸다. 만약 상의할 대상이라고 생각했으면 이런 계획, 이런 행동은 언제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지 물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윤지오의 “영리하게”가 표현되는 한 양상이다. 

그렇다면 그 행보에 대해 우리는 더 이상 추론할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가 비교적 구체적으로 밝힌 말인 “지금 만나고다니는 다른 사람들”이 그 미래행보의 단서, 실마리가 될 수 있기 대문이다. 이 실마리를 더듬어 나가기 위해 2018년 12월 7일 전후 윤지오가 어떤 사람들을 만났는지 살펴보자. 

 12월 7일은 윤지오가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방문해서 체류하고 있던 시점이다. 그는 두 가지 목적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첫째는 장자연에 대한 조희천의 강제추행 사건의 법정 증인신문을 위해서였다. 또 하나는 과거사조사위원회에서 진행하는 고 장자연 사건 재조사에 증인으로 출석하기 위해서다. 이 두 가지 목적은 모두 모두 증언과 관련된다. 그러면 12월 14일 태국으로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만나거나 소통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11월 28일 오후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숙소로 이동할 시의 신변보호를 해준 수사관 3명, 11월 29일 검찰과거사조사단의 김00변호사와 손00 검사, 조희천 강제추행 사건 증인신문조사를 도와줄 민변 변호사들, 법정출석 시 자신을 보호해줄 보호자 2명, <13번째 증언> 출판을 맡은 가연출판사의 대표와 측근들 및 출판조언을 해준 김수민(12월 10일) 그리고 12월 12일 JTBC 뉴스룸 전화인터뷰를 담당한 기자와 앵커 등이다.

여기에 증언과 관련되지 않은 어떤 사람도 없다. 윤지오는 지난 9년간의 증언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김종승 유장호 외의 모든 가해권력자들이 무혐의 처분된 과정을 숙고하면서 어떻게 증언이 실효를 거둘 수 있을 것인가에 집중한다. JTBC 손석희 앵커와의 인터뷰에서 “9년 전에 수사에서도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셨을 텐데 지난번에 인터뷰에서 말씀하셨듯이 그 당시 검찰은 그 진술을 믿을 수없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지 않았습니까?”라는 앵커의 질문에 윤지오는, 

“9년 전 검사들은 이 사건을 그저 연예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접대 사건의 하나로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너도 성상납을 해 놓고 왜 숨기냐라며 성상납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저까지 몰아붙이는 질문들이 너무나 화가 났고 억울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남자들 모두가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입을 맞춰서 두려웠지만 이게 제 일이었다면 자연 언니도 똑같이 증언을 해주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에 저도 진실을 말했습니다.”

라고 말한다. 윤지오는 남자들이 “입을 맞춰” 자신의 말을 거짓말로 몰아붙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한다. 이 두려움은 지금의 상황에서 권력자들, 언론들, 변호사들, 기자들, 작가들이 입을 맞춰 자신을 사기꾼으로 몰아붙이는 식으로 과거와 유사한 방식으로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윤지오는 “자연 언니”와 자신이 입장이 바뀌었다면 “자연 언니”도 자신을 위해 진실을 증언해 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기 때문에 진실을 말했다고 말한다. 

다른 요인도 있다. 그것은 이명박 정부하의 검찰과 문재인 신정부 하의 검찰이 보여주는 차이이다. “재판에 증인으로 나서신 것 외에도 검찰 조사에도 적극적으로 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라는 앵커의 질문에 윤지오는 “이 사건을 재수사하는 대검찰청 진상조사단 검사님들을 지난 8개월 동안 접해왔습니다. 9년 전과 달리 검사님들께서 편견 없이 그리고 열성적으로 수사한다는 인상을 받아서 더욱 용기를 낼 수 있었고요. 무엇보다 이 사건을 성폭력 사건으로 인정하고 바라본다는 점에서 달랐던 것 같습니다.”라고 동문서답한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는 “동문서답”이 아니라 “영리하게”의 일부이다. 진상조사단에서의 조사내용은 “진상조사단에서 이렇게 진술했다”는 형식으로는 외부에 말할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질문에 충실한 형태로는 답할 수 없는 이 간극을 윤지오는, 9년전 검찰과 현재 검찰 사이에서 본인이 느끼는 정동적 차이를 설명하고 이 사건을 검찰이 연예계 관행이 아니라 성폭력 사건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점을 높이 평가하며 이런 것들이 자신으로 하여금 증언의 용기를 낼 수 있었던 조건이었음을 설명하는 것으로 채운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영상클립 속의 어떤 ‘호모 사케르’와 법 위의 가해권력들에 대한 단상(끝)

요점: ‘호모 사케르’가 문제가 아니라 ‘호모 사케르’를 창출하고 또 퇴출시키는 ‘지탄 공동체’의 범죄행동이 문제이며 이 문제의 극복은 포함과 배제의 이중구속 상태에 있는 ‘호모 사케르’들의 투쟁을 통해 달성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타락”과 “성스러움” 사이 

당신이 지탄의 무리에 아무 생각 없이 동참하기 전에 한 번 꼭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다. ’타락’(墮落)이란 무엇인가? 누가 어떤 목적에 타락이란 말을 이용하는가,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타락’이란 말은 ’제사상에 올릴 고기가 풀잎처럼 땅바닥에 떨어지다’는 뜻에서 기원한다.  

이것은 지극히 종교적인 용어로서 어떤 것이 신께 바칠 제물로 사용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영상 클립 속 여성이 ‘타락했다’는 것은 그 여성이 더럽혀졌기 때문에 제사상에 올리기에 바람직한 여성이 아니라는 것, 즉 가부장적 성권력에게 바칠 제물(이른바 ‘먹잇감’)로는 부적절하다는 의미이다. 김종승, 김학의, 승리 등으로 인해 유명해진 (그러나 참으로 잔인한) 현세적 용어를 사용해 보자면 그 여성이 ’접대’에 사용될 수 없는 여성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권력형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들이 (‘타락’하지 않았다고 평가되는) 일반 시민으로 되는 것은 권력자들이, 자신들이 ’타락했다’고 보는 여성들을 제물로 ‘접대’받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타락한’ 여성이란 현세에서 이들 성폭력-권력자들의 접대상에 올릴 제물로 사용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존재이다. 그런데 이렇게 ‘접대’될 자격조차 박탈당한 그 ‘타락한’ 여성을, 가부장제 성폭력 체제는 그 누가 짓밟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아무런 범죄로 되지 않을 존재로 간주하곤 한다.

조르죠 아감벤은 로마법에서 이런 존재의 원형을 찾아낸다. 호모 사케르(Homo Sacer), “성스러운 인간”이 그것이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페스투스(Sextus Pompeius Festus)의 『단어의 의미에 관하여』는 호모 사케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어떤 범죄를 저질러서 인민에 의해 고발당한 자를 성스럽다(sacer)고 한다. 그를 희생의 제물로 삼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그를 죽인다면, 그 사람은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최초의 호민관 법에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민투표를 통해 성스럽게 된 사람을 죽이더라도 살인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악하고 불결한 사람을 가리켜 ‘성스럽다’고 말하는 관습이 있다.”

이 인용을 보면, 로마법은 특이하게도 우리가 앞서 ‘타락했다’고 표현한 존재를 ‘성스럽다’고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표현방식이야 어떻든 이 인용은 로마 사회가 ‘인간 접대’의 문화를 갖고 있었음도 보여준다. “성스러운 인간”(호모 사케르)은 ‘접대’ 제물로 사용될 수 없는 존재였으며 ‘접대’ 당할 수 있는 인간이라 함은 그 ‘접대’ 당함을 통해 신의 세계, 신의 질서로 넘어갈 수 있는 인간으로 이해되었다. 조선시대 일반 백성의 딸이 왕에게 ‘상납’됨으로써 왕의 질서(“궁녀”)로 넘어가는 것에 비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접대’용으로 사용될 수 없는 “범죄자”들은, 그 “성스러움” 때문에 신의 세계로 넘어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인간의 세계 내부에 자리를 얻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누구든지 죽여도 무방한 존재, 항상적 배제상태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호모 사케르는 경계의 존재이다. 그는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 모두에서 배제됨으로써 비로소 거기에 포함되는 모순의 존재이다. 아감벤은 로마법 속의 이 개념을 ‘벌거벗은 생명’이라고 부르면서 우리 시대로 가져와 현대의  국가권력이 본질적으로 로마법에서 말한 이 “호모 사케르 =벌거벗은 생명”을 창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분석한다. 현대의 국가주권은 법을 만들 수 있는 권력이라기보다 법을 멈추고 예외상태를 선포하며 모든 권한을 박탈당한 저 호모 사케르, 벌거벗은 생명을 창출하는 권력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의 현대적 국가주권에 의해 법질서 외부로 추방당하는 방식으로 법질서에 겨우 포함되는 생명형태들은 수를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다. 나치 하의 ‘유대인’, 일제 하의 ‘조센징’, 전후 대한민국에서의 ‘빨갱이’, 1990년대 말 이후의 ‘종북’, ‘좌빨’, 9/11 이후의 ‘테러리스트’, 트럼프 하의 ‘미등록자’ ’이주민’, ‘난민’ 등등등. 여성을 ‘호모 사케르’로 만들면서 특별히 붙이는 이름으로는 ‘마녀’, ‘풍기문란녀’, ‘꽃뱀’, ‘매춘부’, ‘창녀’ 등등이 있다. 그런데 아감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게 특수한 생명형태들만이 아니라 현대인 모두가 언제 어디서든 국가주권이라 불리는 폭력에 의해 바로 이런 식의 예외존재로 낙인 찍히고 법질서 바깥으로 추방당해 임의의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계정들이 영상 클립 속의 그 등장인물을 도덕적으로 타락한 여성으로 형상화하고 댓글러들로 하여금 그 여성을 마음 대로 짓밟을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호객을 하는 것은 로마 사회나 현대의 국가주권이 호모 사케르를 창출하는 방식을 흉내낸다. 그런데 영상 속 인물이 로마법에서 말하는 범죄자인가? 그들이 마구 짓밟는 그 영상 속 인물이 타인을 살해하는가? 그 인물이 타인을 성적으로 착취하고 수탈한 후 어쩔 수 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모는가? 영상 속의 그 인물이 누구를 폭행하는가? 그 인물이 누구에게 ‘성접대’를 강요하는가? 그 인물이 누구를 특수강간하는가? 그 인물이 누구를 성추행하는가? 그 인물이 누구를 성희롱하는가? 그 인물이 누구를 협박하는가? 그 인물이 증거를 인멸하고 수사외압을 행사하는가? 가해자를 감추기 위한 부실수사를 하는가? 그 인물이 불법으로 획득한 영상물을 고객들에게 송출하는가? 그 어느 것도 하지 않는다. 범죄가 될 만한 그 어느 것도 하지 않는다. 나는 윤지오가 터무니 없는 무고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것과 똑같이 영상 클립 속 그 인간도 그가 누구이든 터무니 없는 지탄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도 타자의 인권을 침해할 자유를 부여받지는 않았다.  

‘지탄 공동체’의 범죄성에 대해

오히려 범죄적 행동을 하는 것은 영상 속 인물을 손가락질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들이다. 그 영상 클립들을 바라보고 조롱하고 댓글을 달고 그 계정을 응원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누구인지 모를 동영상 속의 실제 인물로부터 어떤 동의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그 인물의 사생활 장면들을 공중 앞에 드러내 공연(公然)히 전시하고 성희롱적 댓글들을 역시 공연(公然)히 전시한다. 이 지탄의 제의(祭儀) 속에서 이들은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되고 공동체를 이룬다.

그런데 동의 없는 저작물의 사용은 명백히 저작권법을 위반하는 것이고 사실이건 허위사실이건 타인의 명예를 공연히 훼손하는 것은 형법상의 명예훼손죄에 해당되는 범죄행동임에도 불구하고 계정 운영자들과 “악플러”들은 이런 범죄적 행동을 매일매일 반복한다. 이들은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의 부품이 되어 죄의식도, 도덕감정도, 양심의 가책도, 주저도 보여주지 않는다. 아마도 대한민국의 경찰과 검찰이 이 불법들을 버젓이 보고 있으면서도 그냥 ‘좌시(坐視)’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이들 사실상의 범죄혐의자들이, 실제로는 어떤 범죄 행동도 하지 않는 영상 속 인물의 도덕성을 규탄하고 있는 것은 적반하장식 아이러니다. 이들 중 A씨는 윤지오를 규탄하는 1인시위 쇼를 하더니 며칠 전에는 영상클립 속 인물이 윤지오라고 주장하며 ‘통신매체이용음란죄’로 고발(김수민에 따르면 이 사람은 고발장에 자신의 이름을 “서준혁”으로 밝혔다고 한다)을 하면서 윤지오를 잡기 위해 캐나다까지 가겠다고 나서기까지 했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대한민국 ‘언론’은 그의 1인시위와 고발을 대서특필했다.

그런데 <한겨레21>(https://news.v.daum.net/v/20190108113802124)에 따르면 “서준혁”은 2016년 게이오대병원 정신과 의사를 사칭하다 걸렸고, 부동산 전문가를 사칭해 피해자를 만들었으며, 서울시 도시재생 연구위원을 사칭한 인물이라고 한다. 그가 제출한 고발장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그가 슛맨과 짜고 윤지오 마녀사냥 놀이를 통해 슈퍼챗을 챙기려 한 것이라는 소식까지 들린다. 슛맨은 그 슈퍼챗이 실수로 들어온 것이며 모두 돌려줄 것이라는 황급한 해명을 해야 했다. 기자였던 적이 없는데 전직이 기자였다고 사칭했지 않느냐는 의혹은 빼고 말이다.

정권을 창출하기도 하고 퇴출시키기도 하는 것으로 소문난 조선일보가 이렇게 정권을 쥐고 흔드는 방법이 이런 사기전문가의 뒤를 따라다니며 그의 말과 행동을 홍보해주고 더러운 이미지를 세탁해주는 것이었다고 생각하니 참 안쓰럽다. 그래도 이제 조선일보가 대답해야 할 차례인 것 같다. 언론이 ‘증언자 윤지오’에게 ‘놀아나는’ 것은 나쁜 것이고 ‘사기전문가’에게 ‘놀아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인가?  

이들 범죄혐의자들에게는 안 된 이야기지만, 로마의 노예제 권력이 ‘호모 사케르’라고 부른 특수한 인간존재를 창출하고 로마법이 누구나 그를 죽여도 좋은 것으로 인정했다고 해서, 21세기 대한민국의 법률까지 그런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법에 누구나 짓밟아도 그것이 죄가 되지 않는 특수한 인간존재는 없다. 로마에서 ‘호모 사케르’로 되는 사람들은 로마법을 위반한  범죄자들이었는데 이 법을 따른다면 누구나 짓밟아도 되는 사람은 영상 속 인물이라기보다 영상 클립의 자의적 이용으로 타자의 명예를 훼손하고 저작권법을 침해하는 계정주와 댓글러들일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법은 고대 로마법과 다르며 누구든지 짓밟고 죽여도 될 ‘벌거벗은 생명’을 적어도 법 속에서는 규정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누구든지 타인의 인권을 짓밟고 명예를 훼손하는 자들을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확실히 이들은 사법적 단죄가 필요한 대상으로 나타난다. 그런데도 이들에게 왜 이토록 죄의식이 없을까? 법적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없을까? 어떻게 이토록 국법을 우습게 볼까? 이것에 대한 설명을 위해 우리는 다시 아감벤을 참조해야 한다. 아감벤은 현대의 국가주권이 부시가 그러했듯이 법을 중지시키는 권력으로, 법 위의 권력, 법 밖의 권력으로 행세하며 벌거벗은 생명을 창출한다고 했다. 윤지오도 장자연 사건의 가해권력들을 여러 차례 ‘법 위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유튜브, 인스타그램의 계정주들도 자신을 예외권력으로 사고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이것은 이들 계정주들이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가해권력의 일부, 마디, 톱니바퀴, 끄나풀, 심부름꾼, 알바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 범죄혐의자, 가해권력의 톱니바퀴들은 영상 속 인물 즉 타인의 인권, 명예, 성적 자기결정권, 저작권을 짓밟으면서 그것에 ‘정의’의 이름을 붙이기까지 한다. 1980년대 초 “살인마” 전두환이 광주시민에 대한 자신의 학살행위를 “폭도”를 처단하는 ‘정의’의 행동이라고 불렀던 것과  똑같이 말이다. 당시 전두환(과 노태우)을 정점으로 하는 독재정당은 “민주정의당”(1981~1990)이라는 이름으로 폭력통치를 수행했다. 그 통치행위가 범죄행위로 입증되기까지(아직도 충분치 않다!) 무려 4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러가고 있다. 

유튜브, 인스타그램에 산재한 가해권력의 작은 기계입들이 나날이 자행하는 인권침해, 명예훼손, 성희롱, 저작권침해 등이 범죄로 입증되는 데에도 그런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까?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전두환은 계엄군으로 광주를 포위할 수 있었고 계엄령으로 전 국민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지만 지금 윤지오를 2차, 3차… n차 가해하고 있는 장자연 사건의 그 가해권력자들은 돈을 통해 전문가를 매수하고 언론을 통해 가짜진실=환상을 창출하고 고소고발의 사법소동을 벌이는 것 이상의 수단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진실을 가리는 것 이상의 수단 외에는 마땅히 사용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탈근대적 디지털 세계는 진실을 가리는 것도 쉽게 만들지만, 가려졌던 진실이 지하에서 더 큰 폭발력을 모아 되돌아오는 것도 더 쉽고 빠르게 만든다. 문제는 누가 언제 어떻게 저 진실을 가리는 환상의 장막을 찢어내어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의 적나라한 범죄적 얼굴을 드러내고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사회관계, 인간관계의 형상을 새로이 그려낼 것인가에 달려 있다. 세계를 뒤흔든 1968년의 혁명이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순간에 뜻밖에 찾아 왔듯이 대한민국을 뒤흔든 2008년, 2016년의 촛불봉기와 촛불혁명도 그렇게 몰래 그리고 갑자기 찾아 왔었다. 진실은 어느새 우리 곁으로 찾아올 것이다.

맺음말: 우회로도 샛길도 없다

하지만 혁명을 신비화하지는 말자. 2016년의 촛불혁명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이후 유가족을 주축으로 하는 시민사회의 끈질긴 연대투쟁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었던 사건이다. 촛불혁명의 스모킹건은 태블릿 피시 이전에 세월호 가대위의 진상규명 투쟁이었다. 박근혜에 대한 탄핵도, ‘세월호 7시간’을 설명하지 못하는, 정부책임자의 그 무책임성 때문이었다. 장자연의 죽음의 진상은 윤지오에 대한 음해공작으로 인해 10년이 지난 지금도 규명되지 못했다. 이제 고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려면 그것을 켜켜이 뒤덮고 있으며 지금도 진행중인 윤지오 음해공작의 쌓이는 잔해들을 먼저 걷어치우지 않으면 안 된다. 우회로도 샛길도 없다. 장자연을 죽음에 이르게 한 그 가해권력이 지금 윤지오를 음해하는 바로 그 권력인 한에서 지금 작동하고 있는 현재의 그 가해권력에 대한 투쟁과 음해폭력에 대한 진상규명 없이 어떻게 과거의 그 가해권력의 폭력에 대한 진상규명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