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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의 생산적/비생산적, 물질적/비물질적 노동 개념에 대한 단상

작성자
amelanojoe
작성일
2018-02-21 10:36
조회
187
맑스는 [잉여가치학설사] 435쪽에서 맨더빌(『꿀벌의 우화』원문은 다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원문; 최윤재의 번역문은 다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번역문)을 "모든 직업-직종의 생산성에 관한 변호론적 견해"의 하나로, 그러나 속물적 변호론자들보다 훨씬 대담하고 정직했던 변호론으로 인용한다.

"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악이라고 부르는 것은 도덕적인 것이나 자연적인 것이나 다 같이 우리를 사회적 존재로 되게 하는 위대한 원리이며 예외 없이 온갖 직종과 직업의 확고한 기초이며 생명령의 지주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온갖 예술과 과학의 진정한 원천을 찾아 내야 한다. 그리고 악이 없어지게 되는 바로 그 때에는 사회가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조락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footnote]『꿀벌의 우화』원문은 다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원문 최윤재의 번역문은 다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번역문[/footnote]

맑스는 맨더빌의 이 말을 악행이나 범죄노동이 자극하는 생산적 효과라는 문맥에서 인용한다. 물론 맑스는 범죄노동이 스미스적 의미에서(즉 가치생산적인 것만이 생산적이다는 의미에서)의 비생산적 노동임을 염두에 두면서 범죄노동의 생산성을 주장하는 변호론자들을 조롱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용역산업의 적지 않은 부분은 범죄노동이다. 기업주들은 깡패들을 고용하여 파업을 깨거나 개발에 항의하는 사람들을 구타하고 추방하고 심지어 죽인다. 이러한 노동은 생산과정에서 분리되는 생산물을 낳지는 않지만 고용되어 수행된다. 이들은 임금을 받고 산업평화를 생산한다. 이들의 임금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이들은 잉여가치 중의 일부를 소득으로서 가져가는 것일까? 아니면 교환가치를 생산하고 그 중의 일부를 자신의 재생산에 필요한 것으로 가져가는 것일까?

[잉여가치학설사]의 맑스는 [경철수고]의 맑스와는 달리 사회적 삶을 생산하는 노동 일반을 규명하려하기보다(이럴 때는 모든 직업 직종이 생산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방직노동자뿐만 아니라 철학자 시인 목사 교수가, 그리고 범죄자뿐만 아니라 착취자가 생산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자본주의 사회를 생산하는 노동이라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힘을 규명하는 데 집중한다. 왜 사회적 삶을 자본이 지배하게 되는가, 다시 말해 자본관계를 생산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맑스의 탐구목적이다. 자본관계, 가치관계를 생산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지배적인 생산개념이며 자본주의적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만이 생산적이라고 규정할 때에만 자본관계를 극복할 잠재력에 대한 정의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을 구분하려는 맑스의 노력의 진의가 드러난다.

이 분화에 대한 윤리적 독해는 전자를 생산적인 것, 후자를 기생적인 것으로 보면서 전자에 혁명적 역할을 특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경향은 맑스가 생산적인 노동과 비생산적인 것을 가르는 과정에서도 때로 나타나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좋은 노동자와 나쁜 노동자를 구분하려는 시도가 아니었다. 아니 생산적 노동자도 잉여가치생산을 통해 자본관계를 생산하므로 비자본을 추구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생산적 노동자도 나쁜 노동자다. 심지어 비생산적 노동자들이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자본에게는 낭비와 비용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비자본주의적이고 탈자본주의적이라고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을 가르려는 맑스의 시도가 노동 일반으로부터 역사적 노동으로의 개념 전위를 통해 역사에 개입하는 이론적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이행을 노동일반에서 역사적 노동으로의 이행으로 단순화시킬 수 없다. 노동 일반은 사회적 삶의 생산활동으로 남는다. 이 속에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분화가 나타난다. 그것은 자본관계, 즉 잉여가치 착취관계에 직접적으로 포섭된 노동과 그렇지 않은 노동 사이의 구분이다. 직접적으로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만이 생산적 노동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노동은 비생산적 노동으로 분류된다.

이 분류와 '물질적 노동/ 비물질적 노동'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 맑스는 비물질적 노동인 지식과 봉사가 자본관계 외부에 놓여 있는 역사적 조건에서 이 문제를 파악했다. 즉 비물질노동이 비생산적 노동과 거의 동의어인 상황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그래서 그는 비물질생산을 생산적인 것으로 간주하려는 노력 일반과 대립하면서 그것을 부르주아지의 착취에 봉사하는 변호론적 관점으로 밀어내는 경향이 있다. 지금 우리는 이 양자의 동일성이 붕괴하고 비물질노동이 잉여가치 생산적 노동으로 되고 있는 상황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음으로 비물질노동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맑스의 설명은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앞서 예를 들었던 부르주아를 위한 용역노동에 대해서는 이윤으로부터 보상이 주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역노동 일반을 생산적인가 비생산적인가라는 기준에서 볼 수 없고 잉여가치 생산적인가 아닌가라는 관점에서 용역노동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려움은 비물질생산과 비물질노동은 물질생산과 물질노동이 가치를 생산하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가치를 생산한다는 것에 있다. 그래서 비물질노동과 비물질생산에서 잉여가치를 확정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다. 비물질적인 생산적 노동은 노동이라는 점에서 가치화의 대상이지만 가치척도의 확정과 적용이 쉽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착취하는 자본의 입장에서도 커다란 위기에 직면한다.

비물질생산이 우세한 생산지형으로 등장하면 할수록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경계가 흐려지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자본을 위한 지식제공이나 용역이 자본가의 소득으로부터의 파생적 지불에 의해서가 아니라 임금관계, 고용관계 속에서 전개될 때, 그리고 반대로 명백하게 생산적인 노동이 고용관계 외부에서 전개될 때 생산적과 비생산적 사이의 경계확정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 모호성이야말로 맑스 탐구에 온갖 난해성과 애매함을 남기고 있는 그 조건이었던 것은 아닐까?

노동을 역사적 형태에서 고찰하면서 맑스는 (혼란을 겪긴 하지만) 처음부터 생산적 노동을 비생산적인 것보다 우월하거나 정당한 노동으로 사고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양자가 상호전제의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잉여가치학설사, 318] 우리가 맑스로부터 일정하게 추론해 보면 자본주의라는 역사적 착취형태가 자신의 고유한 토대로 삼는 것은 물질적인 생산적 노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질적인 생산적 노동이야말로 명확하게 가시적이고 측정가능한 방식으로 임금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노동형태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발전의 전성기에 비물질적인 노동은 생산적 노동으로서는 미약하고 주변적이었고 그래서 맑스는 그것을 자신의 핵심적 분석영역으로 끌고 들어오지 않았다.[footnote][직접적 생산과정의 제 결과] 참조[/footnote]

고유하게 자본주의적인 착취지형을 물질적인 생산적 노동으로 본다면 비물질적인 생산적 노동의 우세는 자본주의의 위기 국면을 함의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척도가 가치 생산과 축적의 기반이었다면 이제는 명령이 그것을 대신한다. 자본주의는 '경제적 사회구성체'이기보다 '정치적 사회구성체'로 변환된다. 모든 것은 정치의 지형에서 움직인다. 자본권력은 삶권력으로 전환된다. 과거에 비생산적이었던 것의 많은 부분이 이제는 생산적인 것으로 되었다. 가치생산의 지형은 확장되어 전지구적 협력체 전체로 넓어진다.

물질적인 생산적 노동을 고유하게 자본주의적인 생산기반으로 설정한다면 지금은 자본주의의 위기 국면일 것이다. 비물질적 생산적 노동의 헤게모니화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관계들에 커다란 변형을 강제한다. 사회적 삶 전체가 잉여가치 생산적으로 되면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이 아니라 생산적 노동의 이중성이 더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다.

가치척도법칙의 하위법칙으로의 추락 이후 (잉여가치법칙의 확정에 온 힘을 쏟았던)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이 과정에 어떤 빛을 던져줄 수 있는가? 가치척도법칙의 종말 이후에 가치화는 어떤 방식을 통해 달성되고 있는가?

맑스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남는다. 대체 자본관계는 어떻게 생산되고 재생산되며 확장되는가? 그것의 기저에 남아 있는 잉여가치의 정체는 무엇인가? 잉여가치의 역사적 성격은 무엇인가? 운동과 혁명이 잉여에 대해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인가? 잉여생산활동으로서의 인간노동의 비전은 무엇인가? 노동을 그 역사적 형태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맑스의 방법론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그럴 때 물질적 생산적 노동보다 비물질적 생산적 노동이 더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비물질적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을 구분하는 것이 또한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는 점이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2009.12.2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