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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국가가 필요한가

작성자
amelanojoe
작성일
2018-02-21 10:38
조회
255
국가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제기되지만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되는 근거 중의 하나는 부르주아지의 반혁명을 진압하려면 조직된 폭력이 필요하고 국가가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이 이유는 파리코뮌으로부터 맑스, 엥겔스, 그리고 레닌이 끌어내고 있는 교훈들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도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을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반혁명의 개념과 그 역사적 변천에서 찾아야 한다. 고전적 반혁명 개념은 혁명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반동계급의 대응방식이다. 하지만 이미 그람시가 옥중수고에서 서술하고 있듯이 반혁명은 수동혁명으로 변신했다. 1917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후 혁명에 대한 대응을 둘러싼 부르주아지 내부의 논쟁에서 케인즈주의의 승리가 그람시 명제의 설득력을 제공한다. 케인즈는 반혁명 방식의 변환, 즉 노동계급의 힘의 정치경제적 수용과 자본주의 발전동력으로의 활용이라는 수동혁명 이념의 원형을 제시했다. 우리는 이후 부르주아 지배전략의 역사는 수동혁명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케인즈주의, 신자유주의는 전자는 1917년 혁명에 대한, 후자는 1968년 혁명에 대한 수동혁명적 반혁명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반혁명이 수동혁명으로 나타날 때, 반혁명은 특정한 순간에 폭발하는 공포의 대응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일상속에서 추진되는 혁명의 관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반혁명을 특정한 혁명의 순간에 나타나는 일시적 사태로 파악하는 것은 이제 부적절해진다. 지금 필요한 것은 반혁명을 진압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이 반혁명을 관리하는 것, 그것의 힘을 역전시키고 재전유하는 것이다. 이 과제에서 국가는 관리와 조절과 해체의 대상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물론 우리는 국가가 수동혁명적 태도를 버리고 순수폭력적 기구로 전환되는 어떤 순간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아마도 혁명이 반혁명을 규율하는 과정에서의 어떤 구멍에서 이러한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고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조차 국가를 반혁명을 진압하기 위한 도구로 장악하여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일시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혁명을 위해 그렇게 하는 주체 자신이 바로 반혁명의 세력으로 (본의와는 전혀 무관하게) 전환하고 말 것이라는 의미에서이다. (2009.11.22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