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재수사는 왜 포기되었는가?


기생충 학자 서민의 종합거짓말세트(2): 재수사 포기 책임을 윤지오에게 돌리는 ‘적반하장’

‘실체’가 있었던 장자연 리스트를 미확인의 소문으로 만들면서 서민이 자신의 글 ‘기자와 기레기’에서 주장하고 싶어한 것은 ‘윤지오 때문에 재수사 길이 막혔다’는 것이다. 이런 수법으로 그는 일차적으로 자신이 마치 재수사를 바라고 있었던 것 같은 이미지를 만든다. 이것은 ‘윤지오 죽이기'(여기에는 4월 30일 서민의 글 ‘충격 예언, 제2의 윤지오가 나온다‘도 한 몫을 한다.)가 윤지오 진술 신빙성을 떨어뜨려 가해자를 보호하는 전술이라는 비판을 뭉개면서 가해자를 보호한 것은 오히려 윤지오라는 책임 넘기기 수법이다. 윤지오에 대한 인신공격이 2차 가해였다면 서민의 이 주장은 정확히 3차 가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서민의 이런 주장을 떠받치고 있는 받침돌들은 지금까지 박훈, 김대오, 김수민, 그리고 이른바 ‘기레기’들에 의해 유포되어 여론화되고 있는 무수한 거짓말들이고 서민이 이것들을 한 꾸러미의 거짓말종합세트로 엮어짜고 있기 때문에 논리적 방식으로 다루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재수사 길이 왜 막히게 되었는가에 관한 나의 생각을 먼저 제시하고 그 뒤에 서민의 글로 다시 돌아오기로 하겠다.

2009년 발생한 장자연 사건과 관련하여 공소시효가 사라진 사건은 수사할 수 없으므로 재수사의 가능성은 두 가지 점에서 주어지고 있었다. 하나는 공소시효가 15년인 성폭행(특수강간, 강간치상)이고 또 하나는 공소시효가 25년인 살인이다. 

먼저 성폭행 문제를 다루어 보자. 이 문제와 관련해 윤지오는 과거사진상조사단, 고발뉴스, 다스뵈이다 등에서 수행한 증언에서 장자연이 성폭행 당했을 가능성에 대해 진술했다. 그리고 이것은 진상조사단의 비공개심문에서, 유장호가, 장자연이 성폭행당했다는 구절을 문건에 썼지만 자신이 지우게 했다고 말한 것(이후 번복)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드라마 감독 정세호도 2011년 8월 1일자 사실확인서에서 이미숙이 전화로 “장자연이 쓴 A4 용지에 ‘술에 약을 탔다는 얘기가 있다’고 말했다”고 진술했고 2019년 진상조사단에서도 동일한 내용을 진술했다. 윤지오 외에 유장호, 장세호 등 적어도 세 사람이 성폭행에 대한 기록, 전언, 경험적 추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에 과거사조사위원회의 발표문 중 해당 구절을 인용해 보자.

장자연의 성폭행 피해 의혹 

❍ 조사단의 조사과정에서 장자연이 일시, 장소를 알 수 없는 술접대 자리에서 누군가가 몰래 약을 탄 맥주를 반 컵가량 마신 후 마치 마약에 취하거나 술에 만취한 사람처럼 인사불성이 된 상태에서 누군가에 의해 성폭행을 당했을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음 

– 장자연이 성폭행을 당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근거 자료는, 

① 장자연이 술자리에서 맥주 한 잔을 채 마시지 않았는데도 마치 약에 취한 사람처럼 인사불성이 된 상태가 된 것을 목격했다는 윤○○의 조사단 진술 

②‘장자연이 처음에 작성한 문서에 심한 성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을 적었는데 내가 지우라고 했다’는 유○○의 조사단 면담 전 진술. 그러나 유○○는 그 후 조사단과의 면담에서는 이러한 말을 한 사실이 없고 장자연이 하소연하듯이 처음에 그런 비슷한 말을 하기는 하였는데, 장자연에게 되묻지도 않았고, 장자연이‘당했다’고 말한 것도 아니었다”고 진술하였음 

③ 드라마 감독 정○○가 작성한 2011. 8. 1.자 사실확인서(김종승의 배우 이△△을 상대로 제기한 민사소송에서 김종승 측 증거로 제출된 것)에 배우 이△△이 전화로 “장자연이 쓴 A4 용지에 ‘술에 약을 탔다는 얘기가 있다’고 말했다”고 기재된 부분 및 이△△으로부터“물에 약을 탔다고 들었다”는 정○○의 조사단 진술이 있음

여기까지가 진상조사단의 보고서 중에서 성폭행 혐의를 인정할 수 있는 내용을 간추린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그것을 부정하는 내용에 대한 서술이다. 역시 그대로 인용해 보자.

-그러나 배우 이△△은 정○○에게 위와 같은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진술하였고, 매니저 등은 장자연의 성폭행 피해 여부에 대해 모른다고 진술하였으며, 유족은 문건에 성폭행 피해에 관하여 적힌 것이 없었다고 진술하였음 

❍ 유○○의 최초 진술 및 정○○, 윤○○의 진술을 종합하면, 장자연이 성폭행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될 수 있으나, 이들의 진술만으로는 구체적인 가해자, 범행 일시, 장소, 방법 등을 알 수 없으므로 수사를 개시할 수 있는 객관적 혐의가 확인되었다고 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음

과거사조사위원회는 “구체적인 가해자, 범행 일시, 장소, 방법 등을 알 수 없으므로” 수사를 개시할 수 없다고 말한다. 수사라는 것이 바로 “ 구체적인 가해자, 범행일시, 장소, 방법 등을” 밝혀내고 그것을 국민과 법원에게 알려주는 행위이지 않은가? 수사를 개시하지 않고 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면 수사를 할 필요가 대체 어디에 있는가? 바로 체포하여 재판하고 처벌하면 되는 것 아닌가? 이처럼 완전히 본말이 전도된 논리로 수사 개시를 회피하는 것 외에, 그 회피를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사조사위원회는 성폭행 혐의의 실체를 모호하게 만드는 방법도 사용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디스패치>(https://www.dispatch.co.kr/2012097)에 의하면 정세호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장자연의 문건 내용을 이야기하며 김종승을 만나 ‘야단쳐 달라’고 말한 사람은 이미숙이다. 그는 장자연 ‘자살원조’ 혹은 ‘자살방조’ 혐의가 있는 것으로 분당경찰서에 의해 수사보고 되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분당경찰서는 2009년에 “연예인 장자연의 … 자살원인에 연예인 이미숙, 송선미, 서세원이 관련되었다는 정황이 있어 다음과 같이 수사보고 합니다”라고 쓴 바 있다(<디스패치> 같은 호). 그리고 유장호는 당시 경제력(“신용불량”)이나 경험(“연예기획계통에 경험이 일천한 자”)에 비추어 호야의 실제 사장이 아니라 이미숙의 대리인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해석이다. 그리고 장자연은 이들의 요구에 의해 사례 증언조서(문건)와 리스트 증언조서(리스트)를 작성하게 되었음이 거의 분명하다. 

그런데 과거사조사위원회는 정황상 그 진술가치가 훨씬 더 높은 정세호, 윤지오의 진술이나 유장호의 비공개면담 진술이 아니라 일선 수사기관에 의해 자살원조 또는 방조의 혐의를 받았던, 즉 그 진술가치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이미숙의 부인(否認) 혹은 그의 대리인 유장호의 번복을 근거로 수사 개시를 포기한다. 과거사조사위원회의 심의결과에서는 정세호의 진술내용이 윤지오의 경험적 추정을 뒷받침해주고 있다는 사실은 무시된다. 게다가 장자연의 소속사 더콘텐츠의 대표이자 마약과 성추행으로 수배되었던 김종승이 장자연의 지인언니에게 “내가 니 동생(장자연)하고 약했다”(장자연의 지인 이00의 진술조서)고 말한 대목은 근거로 인용조차 되지 않는다. 수사 개시를 포기하는 이유를 과거사조사위원회는 이미숙이 정세호에게 한 말을 부인하고 유장호가 자신이 한 말을 번복했다는 데에서 찾는다. 이들이야말로 재수사가 이루어진다면 가장 큰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사람들, 그러므로 재수사를 포기시키는데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인데도 말이다. 재수사 개시로 수사를 해야 할 사람들의 말을 근거로 수사 개시를 회피한 것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과거사조사위원회(검찰)가 이미숙(과 그 배후)을 두려워했거나 아니면 검찰 자신이 재수사를 두려워했다는 것 말고 다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가?

이처럼 공소시효 15년의 성폭행 관련 재수사가 포기된 이유는 윤지오에게 있었던 것이 결코 아니다. 윤지오, 정세호, 유장호(비공개면담진술)가 재수사의 근거를 명확하게 제시했지만, 이미숙이 정세호에게 한 말을 부인하고 유장호가 자신이 한 말을 번복함으로써, 그리고 과거사조사위원회가 진상조사단의 다수의견을 무시하고 검찰측 소수의견을 심의근거로 인용함으로써 재수사 권고는 폭력적으로 포기되었다.

그런데 서민은 이런 사실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검사들은 성폭행 의혹 부분을 수사에 못 넘기게 하려고 정말 총력전을 했다. … 조직적 차원에서 반대가 있지 않았나 느꼈다.”는 총괄단장 김영희의 말을 인용한 후 “어이가 없다”고 비난한다. 대통령이 명운을 걸고 진상을 규명하라고 한 마당에 무슨 외압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말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검찰이 대통령 말을 듣는 조직이라면 지금 정권에서 청와대가 ‘공수처가 필요하니 설치해 달라’고 왜 국회에 신신당부를 하고 있겠는가? 어처구니 없는 현실감각이다. 게다가 재심 변호사 박준영이 김영희의 윤지오 옹호 여론몰이 때문에 “항의하며 조사단”을 탈퇴했다는 거짓말도 거침없이 한다. 박준영은 형제복지원과 김학의 사건의 진상조사단 위원이었지 장자연 사건의 위원이 아니었다. 서민은 윤지오에 대한 3차가해(책임전가)를 위해 현실을 외면하면서 거짓말에 거짓말을 자꾸 이어 붙인다. 엄청난 공부, 팩트, 통찰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박훈의 그 변론 추임새가 자꾸 낯뜨거워진다. 

‘과거사 조사’를 둘러싼 두 가지 시간성의 투쟁에 대해

과거사(過去事)는 어떤 사건이 이미 “지나간 것”임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것은 그 사건이 지금여기의 사건은 아니라는 뜻을 함축한다. 그러므로 과거사란 말은 어떤 사건을 현실로부터 분리해 내어서 과거로 돌리는 역할을 맡는다. 과거화(過去化), 이것이 과거사라는 말의 사회적 반복이 가져오는 실제적 효과이다. 

그렇다면 과거사에 대한 ‘조사’는 무엇일까? 여기에서는 두 가지 뜻이 상충한다. 하나는 과거로 내몰린 사건을 현재로 가져온다는 뜻이다. 즉 현재화, 현실화의 뜻이 있다. 또 하나는 과거사를 두루 살펴 정리한다는 뜻이 있다. 이것은 불편한 점이 있는 과거사를 영구히 안전하게 과거화한다는 뜻이다. 

조금 깊이 들여다 보면 이것들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혹은 삶을 체험하는 두 가지 형식이기도 하다. 장자연 사건에 대한 재조사에서 우리는 이 두 시간성, 두 가지 시간 이해, 시간을 경험하는 두 가지 형식 사이의 갈등을 본다.

하나는 장자연 사건을 현재의 시간 속으로 가져와 ‘지금-여기’에서 우리가 당면한 것들과 연결시킴으로써 현실화하려는 흐름이다. 이것은 죽은 장자연에게 사회적 생명을 불어넣어 힘 없는 신인배우, 약한 처지의 인지노동자로서 그가 느꼈던 고통과 그것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비원(悲願)을 우리 모두의 현재적 고통, 비원으로 전화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표현된다. 이것은, 모든 왜곡을 걷고 단언하자면, 청와대 국민청원을 통해 장자연 사건을 현재 속으로 불러온 촛불미투 운동과 그 사건을 증언해온 윤지오에 의해 대표된다고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장자연 사건을 더 이상 사회적으로 논란되지 않을 수 있는 안전하고 고요한 과거사로 깊이 매장하려는 흐름이다. 이것은 산 사람들로 하여금 ’장자연이 왜, 어떻게, 누구에 의해 죽임을 당했는가?’ 사무치는 물음을 되묻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면서 구천(九泉)을 떠돌고 있는 장자연을, 재조사를 계기로, 증언자 윤지오에 대한 타격을 통해 확실히 죽게 만들고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곳에 안치(安置)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표현된다. 이것은, 비록 재조사의 개시를 막을 수는 없었지만 그 재조사가 재수사로는 결코 발전하지 않게 하고 싶고 또 그 재조사를 이 사건에 대한 더 이상의 의문이나 문제제기를 못하도록 막는 방패로 활용하고 싶은 사람들에 의해 대표된다.

장례식이 죽은 자를 생물학적으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확실히 죽게 만들어 죽은 자가 차지했던 자리와 재산에 대한 산 자들 사이의 재분배를 시작할 수 있는 터를 만드는 의식(儀式)이듯이, 장자연 사건에 대한 재조사가 그러한 내용을 갖는 정치적 사법적 장례식처럼 되고 말 것인가? 그래서 기왕의 가해자들과 가해의지를 가진 자들이 두 다리를 뻗고 잠들어 원기를 회복한 후 다시 가해를 시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요식절차로 되고 말 것인가? 요컨대 ‘영구 과거화’를 위한 과거사 조사로 귀착되고 말 것인가?

2019년 5월 20일 과거사조사위원회는 “새로운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 재수사는 없다”는 요지의 발표를 국민들 앞에 내놓았다.(http://www.newbc.kr/news/articleView.html?idxno=5379) ‘활동시한을 연장하며 무려 13개월에 걸쳐 84명을 조사한 후에 이루어진’ 재조사인 만큼 그 포괄성과 엄정함에 의심의 여지가 없어야 할 것이다!! 이 발표에 장단을 맞추는 사람이 없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남아있는 증거와 오염되지 않은 증언 속에서 가장 합당한 조사결과라 생각합니다.”(5월 20일 오후 4:22 페북)라고 말하는 반윤지오 트리오의 일원인 김대오가 그이다. 

하지만 과거사조사위원회의 발표는, “장자연 사건이 그 실제가 무엇이든 국민 여러분이 이제 진정한 의미의 ‘과거사’로 받아들이도록 만들고 싶다”는 과거사조사위원회의 곤혹스런 정치적 욕망과 속내를 그 누구라도 눈치챌 수 있을 만큼, 난삽하게 꼬여있고 인위적인 것이었다. 그 발표는 주요 메시지만이 아니라 세부에서도 다중 집단지성의 ‘조사’와 동떨어져 있었으며, 진상조사단의 ‘조사’와도 괴리되어 있었고, 심지어 하나의 발표문의 본론인 <의혹사항에 대한 조사결과>와 그 결론인 <심의결과> 사이에도 심한 어긋남이 있었다.    

이런 치명적인 결함들 때문에 조사를 통한 영구 과거화는 이번에도 실패할 것이다. 이미 총괄단장 김영희가 과거사조사위원회의 발표가 진상조사단의 조사를 충실히 반영하지 않고 검찰측 조사원의 소수의견을 중심으로 심의결과를 내놓았다는 이견을 제시했다. 여당인 민주당에서도 국정조사와 특검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어떤 네티즌(lamer297)은 이렇게 말한다.

“검찰 과거사위 결론은 일주일에 걸쳐 진상보고단의 결론을 축소, 삭제 시킨 결론이죠. 오래전부터 검찰은 진상조사단의 활동를 방해하고 있었으니, 검찰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의 장자연 사건에 관한 범법 행위를 감추려 [할 것이] 확실합니다. 김영희 변호사께서 진상조사단의 보고서는 250장이라고 하셨는 데, 이 250장의 보고서 내용이 과거사위 결론보다 훨씬 신빙성이 더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면, 진상조사단 보고서는 13개월 동안 실제로 조사를 한 조사단원들이 만들었기 때문이죠. 어디서 진상조사단의 250장의보고서를 볼수있을까요? (…) 한국 검찰이 조선일보의 외압을 인정했는데 왜 조선일보는 폐간시키지 않나요? 언론은 공정성이 생명인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검찰에 외압을 가하는 범법행위를 저지른 언론기관의 보도를 어떻게 믿습니까?! 한국에도 언론 기관의 기본자격 규정에 관한 법이 있을것이고, 조선일보의 검찰 외압과 사실 왜곡은 언론기관 자격 규정을 위반한 것일 것입니다. 공정성을 갖추지 못한 언론 기관은 당장 폐간되어야 합니다! 한국 정부와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들은 지금 뭐하고 있읍니까? 정부와 국회가 할일을 안한다면 우리 국민들이 나서서 잘못을 바로 잡아야합니다! 한 예로, 만약 뉴욕 타임즈가 뉴욕 주 검찰이나 연방정부 검찰을 위협했다고 검찰이 인정했다고 하면 무슨일이 일어 날까요? 뉴욕타임즈는 그 사실이 밝혀진 순간 박살이 났을것입니다. 물론 관련자들이 줄줄이 체포되어 재판에 당장 넘겨졌을 것이구요. 또한 이런 사실은 대서특필로 전 세계에 번개같은 속도로 보도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일보에 관해서는 왜 한국 사람들 모두가 장님이고 벙어리가 되어있읍니까????”

과거사조사위원회는 검찰이 국민의 뜻을 대의할 의사가 없다는 것, 검찰은 국민을 주인으로 대접하고 싶지 않고 국민들로부터 식사접대, 술접대, 성접대, 돈접대 등 (장자연에게 가해자들이 강요했던) 각종 접대를 받고 싶다는 것, 요컨대 검찰은 국민 대의기관이 아니라 국민에 대한 지배기관이라는 것을 발표문을 통해 발표했다. 이처럼 정부와 국회와 같은 대의권력이 주권권력인 국민으로부터 이반(離反)될 때, “국민들이 나서서 잘못을 바로 잡”는 길 말고 다른 길이 있는가? 대한민국이 아직 “국민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과거사조사위원회가 국민을 대상으로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상황에서 그 길이, 세월호 유가족들이 진실을 건져내기 위해 나섰던 길을 따라 2016년 국민들이 거리와 광장으로 나섬으로써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던 촛불혁명의 길이라는 것은 이제 먼 이상이 아니라 경험적 상식이다. 여기서 현재는 영원으로서의 과거가 미래의 형태로 도래하는 첨점이 된다. 

김대오는 “도대체 누가 죽은 자의 원혼을 푸는 권능을 우리에게 주었단 말인가?”(5월 26일 오후 11:11)라며 죽은 자를 죽은 그대로 매장해 두라고 강변한다. 장자연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고 장자연의 비원(悲願)을 지금 자신의 비원으로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장자연의 생명을 자신의 삶 속에 되살리려는 윤지오적 집합행동을 그는 죽은 자를 또 죽이는 부관참시라고 잘못 부른다. 

이를 위해 그는 “장자연의 원혼”, “장자연의 비원”을 “장자연의 죄”(5월 26일 오후 11:03)로 바꿔치기하는 얕은 술수를 부리는데, 지금까지 김대오 외에는 그 어느 누구도 “장자연의 죄”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사람들이 묻고 있는 것이 장자연의 억울한 죽음을 가져온 “가해자의 죄”라는 것조차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장자연의 죽음을 장자연의 죄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장자연 사건에 대한 재조사를 부관참시의 순간으로, 즉 원혼과 명예조차 빼앗아 영구매장, 영구과거화하려는 것은 정확히 기존의 가해자들과 잠재적 가해자들, 그리고 수많은 김대오들이다. 그런데도 과거사조사위원회가 이들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가해자와 성폭력 체제에 대한 수사를 미진(未盡)하게 남겨두고 있는 것은, 주체의 측면에서 보면, 혁명이 너무나 미진한 탓 외에 다른 것일 수가 없지 않은가?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야 한다.

마녀사냥의 암구호들 1: “고인을 이용하지 말라”


산사람을 이용한 자들이 죽은 사람도 이용한다

장자연은 배우가 되고 싶었고 배우를 하고 싶었다. 신인배우가 되기 위해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권력자들에게 성서비스 노동을 강요당해야 하는 억울함을 견뎌야 했다. 소속사 사장 김종승(갑)과 맺은 노예계약 때문이었다. 윤지오의 계약서와 동일한 그 계약서에서 장자연(을)은 “연예활동 전반에 걸쳐 ‘갑’의 결정 및 지시에 충실히 따라야”(3조 바) 했고 “방송활동, 프로모션, 이벤트, 각종 인터뷰 등 ‘갑’이 제시하는 활동에 전적으로 수락하여야” 했으며 “행사불참 또는 방송사고를 일으켰을 경우 ‘을’은 ‘갑’이 제시하는 민, 형사상의 모든 책임을 져야 했다”(4조 다). ‘갑’인 김종승의 결정에 따라 지시된 성적 서비스노동은 ‘갑’에 의해 “[방송기회를 얻기 위한] 프로모션, 이벤트, 인터뷰”의 기회로 해석 및 주장되었고 계약에 따르는 의무적 활동으로 강제되었다. 이러한 노동이 부당하게 느껴져 중도해약하고 싶을 때에는 “위약벌금 1억 원과 ‘갑’이 ‘을’을 관리하기 위해 발생한 비용 중 증빙자료가 있는 모든 경비에 대하여 ‘을’은 이의제기 없이 계약 해지일로부터 일주일 이내에 현금으로 ‘갑’에게 배상하고 잔여기간 동안 발생하는 모든 모든 수익활동의 20%를 ‘갑’에게 손해배상금으로 지불”해야 했다(7조). 그러한 악조건의 중도해약마저 ‘갑’의 합의가 없으면 불가능하게 되어 있었다(6조 가). 또 ‘을’이 연예활동을 중단한다 해도, “그 기간만큼 계약기간은 자동연장”(3조 바)되도록 되어 있었다. 장자연이 체결한 계약서는 ‘갑’이 계약기간 중 철저하게 노예소유주로서 노예노동자인 ‘을’을 이용할수있는 조밀한 장치들을 빈틈 없이 갖추고 있다. 소속사는 배우가 되고자 하는 장자연의 희망을 이용하여 그의 생명력을 쥐어짜는 맷돌이었고 그 생명 에너지의 이용자=소비자는 재계, 정치계, 법조계, 언론계, 연예계의 권력자들이었다. 이것이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와 성폭력 권력이 가동되는 메커니즘이었다.   

장자연은 이러한 상황을 견딜 수 없었고 이 상황에서, 기회가 있다면, 빠져나오고자 했다. 그런데 그가 이 강제수용소에서 어떻게 빠져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 노예노동수용소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장자연의 필사적 저항과 탈출의 시도가 무엇이었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경험한 연예계를 구성하고 재생산하는 마약, 폭력, 협박, 강요, 수탈, 착취, 부당이용의 사례들을 낱낱이 적시하여 보여주고 자신을 이용한 권력자들, ‘조심해야 할’ 권력자들의 리스트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는 오늘날의 인지자본주의가 어떻게 여성들의 예술적(연예적) 능력과 성적 에너지를, 요컨대 생명력을 착취하는지를 구체적으로 폭로했고 그 착취를 수행하는 인격적 행위자들을 만천하에 드러내고자 했다. 하지만 이러한 폭로행위에는 큰 위험이 따른다. 그것은 작게는 연예계에서 고립되어 더 이상 배우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실현할 수 없게 될 위험으로부터 크게는 초법적 권력자들의 손에 가족들이 큰 피해를 입거나 자신이 목숨을 잃을 가능성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폭로의 필요와 그것이 가져올 위험 사이에서 장자연의 고뇌는 깊었다. 김종승 기획사와의 싸움에서 장자연의 폭로 문건을 자신의 기획사에 유리하게 이용하고자했던 유장호가 삭제를 요구해야 할 만큼 권력자들의 성범죄 행위에 대한 장자연의 폭로 의지는 강렬했다. 하지만 그 폭로문건이 기획사들의 소송전의 도구로 전락할 위험을 발견한 후에 그는 그러한 위험을 막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유장호에게, 그 문건을 자신의 의지 밖에서 불법적으로 유통시키지 말고 그 문건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유장호는 그 요구를 묵살한 채 자신의 유통행보를 계속했다. 이 시간, 그러니까 2009년 2월 28일 장자연이 문건과 리스트를 작성한 후 약 일주일 뒤인 3월 7일 주검으로 발견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자세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나는 힘도 없고 빽도 없고 미련도 없다”며 자신을 옥죄어 오는 ‘힘센 자들’에 대한 절규를 표현한 절박한 통화기록이 그의 심경을 가감없이 전달하는 생생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기업가들과 권력자들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를 철저하게 이용했다. 계약상의 ‘갑’인 김종승이 그를 노예노동자로 이용했고, 권력자들은 김종승을 매개로 그를 성노예로 이용했음은 분명하다. 김종승은 수사기관에서 유장호의 기획사가 자신과의 싸움에 장자연을 이용했다고 진술한다. 이상호는 이명박의 국정원이 장자연의 죽음을 당시의 법란(판사파동)이 가져올 수 있는 사회적 파장을 최소화하는 데 이용하기 위해 장자연 문건 및 리스트의 공개와 은폐의 과정에 유장호를 매개로 개입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것은 장자연이 죽기 전에 남긴 문건과 리스트조차도 정치적 이용의 도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윤지오가 증언을 시작하자마자, 아니 증언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윤지오는 ‘고인을 이용하지 말라’는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누가 장자연을 죽였는가,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를 밝히기 위한 진상조사에서 증언하는 것이 물론 고인을 생물학적으로 되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증언은 고인이 현대 자본주의의 가부장적이고 노예제적인 성폭력 체제에 저항하다 권력자들에 의해 희생된 인격임을 밝히고 가해자와 책임자를 처벌함으로써 고인의 존엄을 되살릴 수 있고 존엄의 체제를 구성하는 데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윤지오의 증언은 고인 장자연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증언자 자신이 고인 장자연을 빙의하여 말하는 것으로 증언자 윤지오의 생명을 고인 장자연과 산 장자연들을 위해 이용하는 우애와 선물의 행위이다.

그렇다면 장자연 문건과 리스트에 이름을 남긴 권력자들 및 그 권력자들이 만들어 가고 있는 체제는 증언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질 것인가? 그들이 그 이름들과 체제를 보호하려고 하는 것은 생리상 당연한 것이다. 그 이름들과 체제들이 성착취자, 성범죄자, 살생자로 역사에 기록되고 또 법률적 수사와 재수사를 받지 않게 하기위해서는 윤지오의 증언을 막아야 했다. 증언을 막는 것은 다양한 수준의 목표지점들을 갖는다. 첫째로는 증언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둘째로는 증언을 막지 못한다면 증언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셋째로는 증언을 축소시키지 못했다면 증언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넷째로 증언을 왜곡시키지 못했으면 증언자를 쓰러뜨려 증언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윤지오의 생존방송과 경호요구, 증언자보호법 청원, 비영리단체 구성 등의 노력은 증언을 끝까지 수행하면서 증언의 원천봉쇄, 축소, 왜곡의 시도들을 돌파할 수 있는 힘이었다. 권력자들이 증언자를 쓰러뜨리는 방법에 총력을 다한 것은 증언이 끈질기게 진행된 후 선택한 최후의 방법(윤지오는 이것을 ‘최후의 발악’이라고 표현한다)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권력자들이 이 최후 대공세에 ‘고인을 이용하지 말라!’는 구호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권력자들과 그 파수꾼들이야말로 살아있는 장자연을 ‘어머니 기일’에까지 이용한 자들이며 죽은 후에도 이용한 자들이다. 이들은 타인노동의 착취(이용=exploitation)를 자기재생산의 본질로 삼는 자본주의의 권력자들이고 체제의 대행자들이다. 이제 이들은 ‘고인’이라는 이름으로 장자연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고 영구화하면서 증언자 윤지오의 목소리로 귀환하고 있는 장자연의 절규를 다시 땅속 깊이 파묻으려 한다. 세월호의 생명을 수장한 바로 그 반생명적 죽음의 권력이 댓글, 고소, 고발, 보도, 유튜브 채널, 페이스북 등 온갖 수단들을 동원하여 윤지호의 증언을 아귀(餓鬼)들의 소음 속에 파묻는다. 이것은 윤지오의 목소리로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한 장자연의 절규, 그 문건과 리스트를 영원한 침묵과 어둠 속에 파묻는 여론장(與論葬)의 행렬이다. 박훈, 김대오, 김수민 트리오와 강용석, 김용호의 가로세로연구소 등이 보조를 맞추면서 “고인을 욕되게 하지 말라!”, “고인을 이용하지 말라!”고 부르짖으면서 윤지오의 은행계좌를 뒤져 불순한 기록들을 찾으려 하고 가족관계에 있는/있었던 사람들을 이간시켜 증언자를 비난하도록, 혹은 그 비난이 널리 유통되도록 도울 때 이들이, 고인이 된 장자연이 영원히 죽어 있도록, 장자연의 절규가 영원히 잊혀지도록, 고인의 주검을 결코 부활할 수 없는 죽은 시신 그대로 이용하려는 주검정치(necropolitics)의 집행위원들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이들의 이러한 행보가 본인들이 의식하건 못하건 간에 거대자본의 분식회계, 차명계좌, 자금도피, 투기놀음 등의 경제범죄와 각종 유형의 성범죄를 은폐하는 가림막이며 생명을 위한 촛불행진을 가로막았던 2008년 광화문 ‘명박산성’의 현재태라고 생각한다.

“윤지오의 증언이 장자연 유가족들의 손해배상 청구 사건에서 결정적 패소 원인이었다”는 박훈 변호사의 주장이 어떻게 윤지오의 진실을 가려버렸나?

박훈은 2019년 4월 *일의 페이스북에서 “윤지오의 증언이 장자연 유가족들의 손해배상 청구 사건에서 결정적 패소 원인이었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인용한다. 여기에 그 구절과 박훈의 주장, 그리고 그 주장이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보여주는 댓글 일부를 캡쳐한 이미지가 있다.

이 포스팅은 (내가 캡쳐할 당시) 무려 37회 공유되었고 231명이 좋아요를 달았으며 4개의 댓글이 달려 있다. 이후 윤지오는 유가족 편이 아니라 가해자의 편을 들었던 인물이라는 이미지가 마치 사실인 것처럼 유통되었다. 정말 그럴까?

박훈이 인용한 위 캡쳐대목의 핵심내용은, 윤지오가 “피고[김종승]가 부른 모임에 연예 관계자들이 많이 있는 편이었고 참석할 때 신인 배우로서 얼굴을 알리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노래와 춤을 출 때도 있었지만 강압적으로 한 것은 아니고 피고가 술을 따르게 하거나 술을 마시게 하는 등 술 접대를 요구한 적이 없고 성 접대를 하라고 강요한 사실이 없다”라고 증언한 점을 들어, ‘김종승이 장자연을 폭행 협박하여 식사나 술자리에 참석하도록 강요하였다거나 술 접대를 강요하였음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며 성매매를 알선하였음을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라는 이유로 전부 혐의 없음 불기소 처분을 했다는 것이다. 정확히 위의 인용문건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밝혀져 있지 않지만 문투로 보아 아마도 사건 판결문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이 구절에 기초해서 박훈은 “2010년 장자연 유가족들이 김종승을 상대로 한 술접대, 성접대 강요에 따른 불법행위 책임을 묻는 항목에서 윤지오 증언은 결정적인 패소 원인으로 나온다. 이런 논리는 대법원까지가 확정된다. 유가족들은 김종승이 장자연을 때린 것과 잦은 술자리에 대한 위자료로 거의 무의미한 수준의 금액만을 판결 받았을 뿐이다.”라고 결론 내린다.

판사[위 캡쳐 이미지가 판결문이라고 가정하여 판사라고 부른다]가 윤지오의 진술을 인용근거로 원고[유가족] 패소(사실은 부분승소였지만 여기서는 무시한다) 판결을 내렸다고 해서 윤지오가 피고[김종승]의 편을 들었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판단인가? 판사가 윤지오의 참고인 진술들로부터 몇몇 단편만을 들어 편의적으로 인용하거나 혹은 오판을 할 가능성도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는가? 여기서 나는 박훈에게 윤지오의 참고인 진술들로부터 판사가 요약인용하고 있는 것이 윤지오의 진술들에 대한 정확한 요약인지 잘못된 요약인지 직접 윤지오의 진술들을 읽고 다시 평가해 줄 것을 요청한다.  박훈이 윤지오의 진술문으로부터 직접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판사가 인용한 것을 재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박훈이 판사[?]의 판결문 만으로 윤지오를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심각한 엘리뜨주의를 느낀다. 참고인의 진술을 읽지 않고도 그 진술에 대한 판사의 인용만으로 그 참고인을 판단할 수 있다는 태도가 그렇다. 이것은 참고인을 무시하는 태도이며 지금 이 경우에는 사태를 오판하는 위험한 조건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나는 윤지오의 진술조서 속에서 정말 윤지오가 저 인용에 나와 있는 것처럼 김종승(가해자)를 편들었는지를 판결문이 아니라 윤지오의 진술문을 가지고 검토해 보려 한다. 

먼저 윤지오는 김종승 회사에서의 노동이 매우 좋지 않았고 김종승이 욕과 폭행을 하는 것을 봤다고 진술했다. 예컨대 “김종승은 평소에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직원들에게 욕을 하고 폭행을 하는 것을 봤고 언니들로부터 그날그날 분위기에 따라 행동을 조심해야 된다는 말을 들었고 계약기간 동안에 방송활동 기회는 한 번도 얻지 못하고 김종승이 요구하는 식사자리 술자리에 무조건 나가는 상황에서 이러다가 연기활동은 전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우려스러웠기 때문에 이런 악조건에 동의하고 해약을 했다.”는 진술이 그것이다.

계약을 해지하는 조건도 매우 나빠 부당한 조건들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계약을 해지했다고도 했다. 예컨대 “계약해지를 할 때 600만원의 합의금을 김종승에게 지불하는 것 외에 연예활동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해야 했다. 이 약속을 하지 않으면 김종승이 위약금을 많이 요구하거나 민사소송을 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713)는 진술이 그것이다.

그 외에도 윤지오는 김종승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은 진술을 했다. 아래에서는 각 진술주제 하에 윤지오의 진술문을 그대로 옮겨둔다.

1. 김종승의 폭행

2. 김종승의 부당한 노동강요

3. 부당계약을 배경으로 한 접대 강요

4. 또 다른 노동강요

5. 직접 폭력은 없었지만 술접대를 계약에 의해 강요당했다

6. 장자연도 노동을 강요당해서 싫어하는 표정이었다.

7.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때는 보복이 두려웠다

8. 접대 자리에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억지로 나갔다

9. 전속계약서가 아니었으면 나는 또래 친구들과 놀지 접대 자리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술자리에서 노래부르고 춤추게 한 것은 김종승 대표가 잘못한 것이다.

10. 조희천이 강제로 장자연의 손목을 끌어당겨 가슴과 허벅지를 만졌다(앞부분 일부 생략)

11. 김종승은 약속한 생활비도 제대로 입금해 주지 않았다

이상은 윤지오가 김종승의 노동강요에 관해 집중적으로 질문받았던 2009년 7월 8일 진술로부터의 부분 발췌이다. 2010년 6월 25일에 윤지오는 다시 한 번 김종승에 관해 진술한다. 이때의 질문은 주로 문건에 집중되었고 김종승에 관한 진술은 오히려 부차적이었다. 이 진술에 법관이 김종승에게 유리하도록 인용할 수 있는 진술이 부분적으로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참고인 윤지오가 가해자의 편을 드는 진술을 한 것이라고 보는 것은 부당하다고 본다. 윤지오는 앞의 2009년 진술에서는 김종승이 자신과 체결한 계약의 구조적 부당성과 폭력성에 대해 진술했고 뒤의 2010년 진술에서는 그럼에도 술자리에 나가 접대하는 개개의 행동에서 직접적 압박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판결문은 후자의 발언에서 인용을 해서 작성되는데 이것은 윤지오 진술을 전체적으로 고려한 위에서 나온 인용으로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판결문에 기초하여 윤지오의 도덕성과 입장을 문제삼고 있는 박훈의 판단은 일면적이라고 생각한다.

영리한 다중: 윤지오의 경우

<<참여군중>>(황금가지, 2003)이라는 한국어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온 하워드 라인골드의 유명한 책의 원제목은 Smart Mobs다. 직역하면 “영리한 군중”. <<다중>>(갈무리, 2004)의 저자 빠올로 비르노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새로이 출현한 주체성을 “다중”(Multitudes)이라 불렀고 안또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는 다중의 특징으로 swarm intelligence를 꼽았다. 이 용어를 나는 <<다중>>(세종서적, 2009)에서 ‘떼 지성’으로 번역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뒤집으면 ‘지성 떼’인데 이는 ‘영리한 군중’이라는 말과 상통한다. 나는 <<절대민주주의>>(갈무리, 2017)에서 다중이 직접민주주의적 자기조직력을 바탕으로 대의민주주의 기제들을 영리하게 섭정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절대화할 섭정주체라고 주장했다. 떼 지성, 절대민주주의 다중, 영리한 군중 등의 용어들은 21세기 세계사회에서 움직이는 주체성의 주요한 변화와 특질을 인식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런 의미의 변화를 집약하는 것으로 우리 사회에 널리 알려진 용어는 아마도  피에르 레비의 책(문학과 지성사, 2002) 제목에서 비롯된 ‘집단지성’일 것이다.

하워드 라인골드는 영리한 군중이 네 가지 특징을 갖는다고 말한다. 1)오프라인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2)정치 사회 경제 등 각 분야의 주요 이슈에 관한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3)신기술을 통제하거나 독점하려는 시도에 반대하면서 신기술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4)확고한 윤리관과 예의를 바탕으로 네트워킹한다. 영리한 다중은 똘똘뭉쳐 있는 공동집단(전통적 공동체)과는 달리 느슨하고 또 이질적으로 살아가면서도 특정한 계기에 떼를 이루며 그 이질적 삶들 사이의 공통장을 구성할 수 있는 지성적이고 정동적인 능력을 발휘한다. 우리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간헐적으로 반복된 촛불봉기들과 그것의 역량에서 떼지성, 섭정다중, 영리한 군중의 실례를 목도하고 또 체험했다.

‘영리함’이라는 단어와의 관련 속에서 인터넷을 통해 한국사회(와 아마도 세계사회)에 널리퍼진 몇 장의 카톡 캡쳐 이미지가 있다. 이 이미지들 속의 글귀에서 나는 윤지오와 김수민이 주고받은 다음과 같은 말들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것이 더 나은 삶을 향한 개혁의 충동과 그것에 대한 반동 사이의 갈등을 매우 일상적인 구어들 속에서 예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난 책도 책이지만 그후 내 행보가 더 중요하고 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고 판단되서’, ’하지만 분명히 이슈는 되니까/ 그 이슈를 이용해서 영리하게/ 그 동안 못했던 것들을 해보려고/그래서 출판하는 거고’(윤지오).

‘니가 니욕심이 없다고 장자연만을/ 위해서라고 니 모든 걸 걸고 말할 수 있어??/사람이 가식이 느껴지는 건 어쩔수가 없더라’(김수민).

‘언니? 말 앞뒤 자르고 그렇게 인식하는 것 아니예요. 저는[언니는-인용자] 누굴 위해 단 한 번이라도 증언하신적 있나요?’(윤지오), 

‘가식이나 그만 떨어라/못봐주겠다’(김수민) 

‘위에 말한 것은 그 이슈를 이용해서 영리하게 그간 못했던 말을 한다고 했고 그러고 있어요’(윤지오) ‘글 캡쳐해서 올리면 누가 옳고 그런지 평가받을 수 있겠네요’(윤지오) 

‘어린 것이 영악하네’(김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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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 대화의 앞부분이 김수민에 의해 메신저에 대한 공격의 형태로 먼저 공개되면서, 그리고 그것이 가로세로연구소(김용호)+김대오+박훈과 연합하면서 윤지오의 증언 행보 전체를 의심하도록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미 왕진진 사태를 겪은 바 있었던 탓에 “또 사기!”라는 이들의 고발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발심리는 더욱 컸다. 지금까지 촛불+미투+윤지오 연합의 공통지성과 공통정동의 힘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윤지오 비판적 지지나 중립으로 이끌려 왔던 제도언론의 상당부분이 빠르게 반윤지오 진영으로 돌아섰고 네트다중의 일부도 심각하게 동요하면서 반윤지오로 돌아서기도 했다. 윤지오에 의해 구축된 다중의 자율적 공통장의 큰 부분이 와해되고 그 밀도가 낮아진 것이다. 그 자리를 대중의 상호불신에 기초한 권력장이 점령했다. 이 무렵 장자연 리스트의 실재 가능성, 유장호의 성폭력 진술 등에 대한 JTBC 보도,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협박당하는 장자연의 육성 공개, 진상조사단의 윤지오 진술가치 인정 등에 의해 일정하게 다중의 진실규명 공통장이 만회되었지만 제도언론에서 역량의 비대칭은 심각한 것이었다.

이미 말했지만 권력장과 공통장은 질적으로 다르다. 공통장이 이질적 다중들의 네트워킹, 연합, 연대, 공통되기에 기초한다면 권력장은 다중을 사적이고 공적인 방식을 통해 상호 불신하게 하는 것에 기초한다. 제도언론이 윤지오에 대한 불신을 퍼뜨리는 속도가 빠르고 강도가 높을수록 다중 내부의 상호불신은 커지고 그 불신의 깊이만큼 다중의 자율성은 약화되어 복종적 국민으로, 민족주의적 군중으로 전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권력과 제도언론이 효과적인 무기로 훔쳐 사용한 것이 바로 윤지오의 저 ‘영리하게’라는 말의 왜곡이었다. 제도언론에 앞서 김수민이 그것을 계산적 ‘영악함’으로 굴절시켰고 윤지오의 증언 실천을 ‘가식’의 프레임 속에 집어 넣었다. 그 프레임은 ‘네가 네 욕심 없이 오직 장자연만을 위해서 증언한다고 모든 걸 걸고 말할 수 있어?’라는 식으로나타났다. 순수주의, 순결주의를 척도로 내세우고 ‘당신은 순수하지 못하다, 순결하지 못하다’고 선동하는 프레임이었다. 증언자는 순결해야 한다, 증언자의 실천은 희생과 헌신이어야 한다, 순수한 자만이 증언할 수 있다는 프레임. 

이 순수주의=순결주의는 남성이 여성을 착취하기 위해 여성에게, 자본이 노동을 착취하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씌워온 굴레이면서 동시에 그 착취를 비판하고 그것에 대항해온 운동들이 내면화해 온 거울이미지다. 국민이 영웅을 기대하고 민중이 지도자를 기대할 때 그 국민과 민중은 그 영웅과 지도자에게서 순수를 기대하는 만큼 오히려 자기자신이 ‘순수’하고 가진 것 없는 가난한 백성이 되어 버린다. 이것이 근대의 과정이다. 탈근대화의 과정에서 국민/민중과는 다른 다중이 출현하지만 그것은 민중의 자기전화이며 그 마음 깊은 곳에 근대적 백성의 습성은 유전자처럼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이 순수/순결주의의 정동은 영리함을 견디지 못한다. 이것은 다중이 자율공통장을 구축하고 그것을 기초로 새로운 질의 군주, 섭정군주로 되는 것을 가로막는 낡은 유습이다. 이 순결주의 유산과 순수성의 정동을 자극하면서 김수민은 윤지오의 영리함이 돈벌이의 영악함이라고 단정한다. 출판도, 경호도, 비영리단체 구성도, 그리고 증언도 오직 돈을 영리하게 버는 방법이라는 초상화가 그것이다. 윤지오도 별 수 없는 돈벌이 인간(호모 에코노미쿠스)이라는 고발이 사회 전체에 퍼져갔다. 이로써 ‘영리하게 전에 못했던 일을 해보려 한’ 윤지오의 계획에 금이가기 시작했다.

물론 윤지오는 “인생이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리하게 계획을 세우는 일을 중지해야 할까? 우리의 사업계획을 포기해야 할까? 그리하여 자신은 호모에코노미쿠스이면서 타자에게 순수한 신(神)인간 즉 호모데우스일 것을 요구하는 근대인의 자기모순, 자기분열을 반복하며 살아야 할까? 한 인격 내부에서 호모데우스와 호모에코노미쿠스의 분열은 바로 권력장의 구조(통치-피치, 전위-대중, 왕-신민, 신-인간 등등)를 반영한다.

권력장의 구조, 그 구조적 폭력 기제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이 질문 속에서 다시 한 번 윤지오의 계획을 참조해 보자. 이 참조 속에서 호모에코노미쿠스도 호모데우스도 그 양자 사이에서의 어떤 내적 분열도 아닌 어떤 영리함을 찾아보자. 김수민과 박훈은 “윤지오의 영리(smartness)는 영악이고 가식이며 사기다.”라면서 윤지오의 영리함을 호모에쿠노미쿠스의 영악함으로 환원한다. 나는 윤지오의 영리함에 대한 이러한 경제주의적 환원이 두 사람에게서는 책략이라기보다 체질에, 기술이라기보다 세계관에 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것은 새로운 인간으로 나아가려는 충동에 대한 자기분열적 반동이며 우리 내부의 낡은 것의 강력한 복귀(백래쉬)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생산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불신, 우리의 무력함에 대한 고백, 권력에의 종속의 불가피성에 대한 무의식적 승인, 권력은 ‘무혐의하다'(‘혐의 없다’)는 사법적 인정의 인격적 반복이지 않은가?

이 상황에서 우리가 윤지오의 영리함에 대한 김수민-박훈 식의 왜곡을 피하면서 그것에 다르게 접근해 보는 것이 가능할까? 그것은 우선 윤지오의 그 ‘영리한’ 계획, ‘지금까지 못해왔지만 <13번째 증언>을 계기로 해 보고자 하는 일/사업’이 무엇이었는지를 ‘돈벌이’라는 경제주의적 시야 속에서 단순화하지 않고 오늘날의 포스트모던 주체 상황 속에서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인다.

김수민: 살아움직이는 모순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윤지오에게 청탁한 증언은 오직 한 가지다. 그가 장자연의 죽음과 관련한 일련의 상황과 사태에 관해 아는 바를 말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 청탁과 관련해 중요한 것은 그가 증언을 하는가 않는가, 그리고 증언을 한다면 어떤 증언을 하는가이지 다른 어떤 것일 수 없다. 그가 평소에 착한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돈을 밝히는가 그렇지 않은가, 이기적인 사람인가 이타적인 사람인가 등은 이 문제와 아무런 본질적 연관도 갖지 않는다. 그가 증언을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며 그것의 증언으로서의 진실성과 가치 여부는 지금까지 10여년간 이루어진 진술들 및 기타 다른 증거자료들과의 관계 속에서 과거사 진상조사단이 다중들과 더불어 판단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김수민의 ‘고발문건’의 의미는 일차적으로는 그것이 진상조사(구체적으로는 진상조사단의 판단)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관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김수민은 저 ‘고발문건’에서 증언과 관련해 세 가지를 주장한다. 

1)윤지오는 장자연에 관해 증언할 만큼 친하지 않았다

윤지오가, 자기는 장자연이랑 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어울리지도 개인적 연락도 없었다고 말했다. 장자연이 겪은 경험을 자기는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2)윤지오는 장자연 문건을 본 적이 없다

윤지오가 경찰 조사를 받는 중에 책상에 놓여 있는 문서를 우연히 봤다고 말했다.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도 거기서 봤다고 말했다.

3)윤지오는 아무 것도 모른다

윤지오는 목숨 걸고 증언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변호사에게는 자신이 증언할 필요도 한국에 갈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진상조사단 대화내용 캡쳐 보내준 것에서 윤지오는 김종승이 장자연씨 추행한 것이나 방00 얼굴 본 날짜 장소 상황에 대해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세 가지 주장은 윤지오가 증언한다 할지라도 그 ‘증언은 거짓이다’라는 주장을 함축한다. 이것은 진상조사단과 사람들의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주장임이 분명하다. 이 주장들은 모두 윤지오가 했던 말에 근거하며 실제로는 전언(傳言)의 형식을 빈 고발이다. 그 전언 자체가 고발이 되는 것은 주로 윤지오에 대해 알려져 있는 사회적 앎과 그 전언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김수민이 전하는 말이 그 사회적 앎을 바꾸어야 할 만한 진실성을 갖는지가 검토되어야 하다.

첫째는 장자연과 윤지오의 친밀성 문제다. 친밀성 문제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증언은 그 자체가 힘든 노역이거니와 특별히 장자연 사건에서처럼 영향력 있는 권력자들이 고인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이미 드러난 사건에서 그 권력자들의 언행에 대해 증언한다는 것은 특별히 어려운 일이다. 윤지오는 이 사건의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니기 때문에 그가 증언을 무릅쓰는 데에는 진실규명이라는 시민일반적 동기 외에 고인과의 친밀성 동기가 중요한 특수동기로 인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관해 윤지오는 이미 여러 차례의 진술에서 소속사인 더콘텐츠엔터테인먼트에서 나오기 전과 후로 나눠 그 친밀성의 강도에 변화가 있었음을 밝힌 바 있다. 소속사에서 나오기 전에는 친자매보다 더 친했지만 그 후에는 소원해졌었다고. 장자연의 죽음은 소속사에서 나온 후에 일어난 사건이다. 하지만 죽음은 소속사 전/후의 시간을 횡단할 만큼 충분히 강렬한 사건이다. 윤지오는 뮤직비디오 촬영을 마친 후 장자연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자마자 자정 시간에 빈소로 달려가 조문하고 사흘을 장례식장에서 유가족과 함께 보냈다. 이것은 친밀성 동기를 빼놓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누구도 친하지 않은 동료의 죽음에 대해 이런 예를 갖추지 않는다. 또 열 여섯 차례에 이르는 증언(적어도 열 두 차례는 경제적 동기를 의심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을 감당하는 것도 친밀성 동기를 빼고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윤지오는 처음부터 ‘참고인’이었고 증언과 조사에 응하지 않더라도 강제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불이익도 받지 않는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그 친밀성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없고 그것을 측정할 수 있는 기준도 없다. 하지만 윤지오의 행동들이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윤지오가 장자연의 장례에 동행하고 그의 죽음에 대해 어려움을 무릅쓰고 증언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친밀성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두 사람의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동영상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둘째는 윤지오가 문건을 본 적이 없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내가 이미 여러 차례 논박해 왔거니와 지난 10년간 쌓여온 진술증거들에 의해 반박된다. 진술증거들은 유장호, 장자연의 오빠와 언니(그리고 숙모), 이른바 ‘유장호의 경호원(?)’ 그리고 윤지오 등이 문건을 본 사람들임을 확인해 준다. 이들은 모두 문건의 목격자들이다. 김대오 기자와 KBS 기자그리고 장자연의 스타일리스트 이00는 문건 일부의 목격자들이다. 이미숙과 송선미는 문건을 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다. 이처럼 문건의 목격자, 부분 목격자, 추정 목격자는 많다. 다만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문건의 내용 중 ‘리스트’ 부분의 내용에 대해 증언하려 하지 않음에 반해 윤지오만이 유일하게 그것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윤지오가 ‘유일한’ 증언자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이 때문이다. 윤지오의 증언이 있는 한에서 그것의 진실성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다른 목격자들 및 추정목격자들, 그리고 관련자들에 대한 엄정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윤지오가 증언을 위해 한국에 올 필요가 없다고 했다는 셋째의 주장은 김수민 자신이 주장하려는 것의 정반대 것을 증명하는 증거로도 사용될 수 있다. 김수민은 윤지오가 장자연 사건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에 한국으로 오지 않으려 했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 사건에 대해 윤지오가 알기 때문에 증언을 주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는 것을 말할 때 그것이 권력자들과 부딪혀야 하는 것이라면 생명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주저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막상 증언에 나섰을 때는 바로 그 알고 있는 것 때문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윤지오가 이 사건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사례로 김수민이 드는 것들은 내가 아는 한에서는 윤지오가 모를 수밖에 없는 사례들이다. 왜냐하면 윤지오는 ‘김종승이 장자연씨를 추행한 것’을 본 적이 없으며 ‘방00 얼굴 본 날짜 장소 상황에 대해’ 말해줄 아무런 경험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거나 겪지 않은 것을 기억할 수는 없지 않는가? 윤지오는 자기가 보거나 겪지 않은 것을 기억할 수 없었지만, 본 것과 겪은 것은 상당히 정확하게 기억했고 또 그에 따라 10년에 걸쳐 진술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윤지오의 증언은 거짓’이라는 주장을 내오기 위해 김수민이 제시한 세 가지 핵심적인 주장들 모두가 ‘거짓’에 준할 만큼 정확성을 결여하고 있다. 물론 전언이므로 근거가 있을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결국 증언의 허구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과잉되게 서술한 나머지 전언들 모두가 하나하나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독단적 말들(즉 비난)으로 남는다. 그것들이 무엇이었던가? ‘나는 윤지오를 처음에는 사기꾼일 수 있다고 의심했지만 그에게 결국 속았다.’ ‘윤지오는 이기적이고 일방적이며 의존적이었다’ ‘윤지오의 태도가 불만스러웠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관계를 유지했다.’ ‘윤지오는 변덕스럽고 믿을 수 없는 사람, 표리부동하고 배은망덕한 두 얼굴을 가진 사람, 위선적인 사람, 거짓말쟁이 한 마디로 나쁜 사람이다’ ‘윤지오의 귀국 목적은 증언이 아니라 돈과 명성이었다’ ‘윤지오는 자기홍보에 장자연을 이용했다.’’윤지오는 출판과 사업을 통해 돈을 모으려 했다’ ‘윤지오는 돈을 모으기 위해 위험을 과장했다’ ‘윤지오는 유가족의 뜻을 무시했고 유가족을 비난했으며 그들과 나눠야할 할 돈을 독차지했다.’ 등등.

윤지오를 향한 이 비난들은 결국 ‘검증되어야 할 것은 권력자들의 성폭력이 아니라 윤지오의 거짓말이다’라는 하나의 명제를 향해 결집된다. 그리고 김수민의 주장은 “타파되어야 할 것은 재벌, 정치권, 언론계, 법조계, 연예계의 성폭력 권력이 아니라 윤지오라는 새로운 권력이다”로 집약된다. 장자연은, 힘센 김종승마저 ‘아, 예!’라고 굽신거려야 할 정도의 거대 권력의 압력 앞에서 ‘나는 지금 힘도 없고 빽도 없다’며 절규한 후 죽어갔다. 김수민은, 과거에는 장자연 사건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지만 이제는 가장 잘 알게 되었다고 쓴다. 과연 무엇을 알게 된 것일까? 그는, 고인이 된 장자연을 중심에 놓아야 한다면서 장자연의 절규에는 침묵한다. ‘장자연 사건이 희석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하면서 자신의 모든 힘을 윤지오 죽이기에 쏟는다. 그런데 지금 지구상에 장자연 사건을 희석시키지 않을 인물은 아직까지는 윤지오뿐이다. 안타깝게도 그만이 ‘유일한’ 증언자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장자연 사건이 희석되지 않기를 바란다면서 윤지오 죽이기에 전력을 다하는 김수민의 모습은 우리 시대에 살아 움직이는 모순 그 자체이다.  

김용호의 거짓말: 홍가혜에서 윤지오로

김수민의 내부고발문건이 나오기 하루 전날인 4월 15일 좌파언론에 맞서 싸우는 투사를 자처하는 유튜버 김용호 연예부장이 ‘윤지오의 거짓말’(https://www.youtube.com/watch?v=D-l2INvYdoI)이라는 방송을 했다는 사실이 주목되어야 한다. 이날의 방송에서 김용호는 김수민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지만(하지만 다른 방송에서 김수민이 자신에게 연락을 취해 왔다는 사실을 밝힌다) 박훈 변호사의 페이스북, 김대오 기자의 말을 이용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그것의 요지와 그것의 진실성 여부를 하나하나 살펴보자.

1)누가 그녀를 위협한다는 것인지 윤지오는 밝히고 있지 않다. 윤지오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은 없다.

윤지오가 권력자들의 이름이 나열된 ‘장자연 리스트’가 있다고 증언했고 네 사람의 이름을 진상조사단에서 진술한 이상, 윤지오가 안전하다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 이런 말은 권력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한 몸이 되어 움직이는 사람의 감각양식에 기초해서만 나올 수 있는 말이다.  

2)꽃배달은 홍선근 회장이 한 것이 아니라 머니투데이의 기자 김건우가 한 것이다. 윤지오는 피해망상이다.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윤지오가 갖고 있었던 명함과 증언으로 인해 머니투데이 홍선근 회장이 경찰의 수사대상으로 오른 직후에 (아무런 메모도 없이) 배달되어온 꽃다발에서 윤지오가 두려움을 느끼고 그것이 홍선근 회장이 보낸 것으로 인식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것을 피해망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상적인 사람을 정신병자로 모는 것이다. 부하가 상사가 맞아야 할 매를 대신 맞는 경우는 한국사회에서 허다하기 때문에 ‘회장이 아니라 기자인 내가 꽃다발을 보냈다’는 해당 신문 기자의 해명은 윤지오의 말을 거짓말이라고 단정할 어떠한 근거도 되지 못한다. 

3)윤지오는 문건을 본 적이 없다. KBS가 보도하여 언론에 이미 공개된 타다만 문건을 보았을 뿐이며 윤지오가 리스트라고 부르는 것은 왕진진의 리스트를 짜맞춘 것에 불과하다. 문건을 본 것은 김대오 기자다.

윤지오가 문건을 봤다는 것은 유장호와 유가족들 모두가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김대오는 장자연 문건의 마지막 한 구절 외에는 본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스스로 수사기관에서 진술한 바 있다. 윤지오는 <13번째 증언>의 17장에서 왕진진의 편지를 자작극으로 단정하고 있으며 왕진진이 장자연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며 내놓은 편지도 장자연의 필체가 아니라고 기각한 바 있다. 윤지오를 (이미 사기와 조작의 달인으로 판명된) 왕진진=전준주와 연결시키는 것은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워 윤지오의 증언 신뢰성을 낮추려는 술수 이상이 아니다.

4)”증인(윤지오)가 피고(김종승)으로부터 술을 따르라거나 성접대를 하라고 강요받은 적 있나요?”라는 검사의 질문에 “그런 것은 없고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게 된 것도 강압적으로 한 것은 아니다”라고 답한 윤지오는 장자연이 겪은 성접대, 성추행, 성폭력에 대해 증언할 자격이 없다.

검사의 질문은 (장자연이 아니라) ‘윤지오’가 피고로부터 술접대나 성접대를 강요받은 적이 있는가에 관한 질문이다. 윤지오는 그간 여러 차례의 진술에서만이 아니라 <13번째 증언>에서도 ‘계약’사항을 넘어선 술접대나 성접대 요구가 ‘자신에게’는 없었다고 말했고 또 그렇게 썼다. (박훈은 이 답변을 들어, 윤지오가 가해자 편을 든 인물로 오판한다.) 하지만 윤지오는 장자연이 자신과는 다른 혹은 자신이 모르는 경험을 하고 있었음을 진술했고(“너는 발톱에 때만큼도 몰라”) 또 장자연에 대한 술자리 강제추행에 대해서도 있는 그대로 진술했다. 김용호(와 박훈)는 장자연의 경험과 윤지오의 경험을 ‘혼동’한다. 이 혼동을 통해 이들은 윤지오를, 가해자를 편든 사람으로 묘사하고 이를 근거로 윤지오로부터 증언자격을 박탈하려고 한다.

5)유족이 문건의 공개나 이 사건의 재이슈화를 원치 않는 상황에서 윤지오가 이 문제를 들춰내는 것은 ‘죽음에 대한 독점’, ‘죽음의 돈벌이’(박훈)이며 후원금을 받고 기념품을 파는 것도 이 돈벌이의 연장이다. 

최근의 진상조사단 재조사에 대한 유가족의 생각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유가족이 장자연 문건의 공개를 원치 않았고 소각을 실행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한 인간이 권력자들로부터 성폭행을 당해 죽음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은 사건에서 유가족의 뜻이 사건의 진상규명 여부를 결정하는 결정적 권한을 갖는다고 보는 것은 가족주의 이데올로기의 표현이다. 그것은 이 경우에는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를 은폐함으로써 가해권력자들을 보호하고 새로운 피해재발을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장자연 사건이 가족 문제를 넘어 모든 사람의 명운이 걸린 국민모두의 문제이자 세계시민의 문제로 된 것은 오래 되었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 우리는 김용호가 권력편향적 감각방식, 터무니 없는 추정, 사실에 대한 그릇된 인식, 부주의한 상황파악, 가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이용 등을 통해 “윤지오의 거짓말”이라는 근거 없는 거짓말을 지어 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용호는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건 당시에도 홍가혜를 “거짓말쟁이”, “허언증 환자”라고 말했던 바로 그 ‘기자’이다. 그는 트위터에 “저는 홍가혜를 수사했던 형사에게 직접 그녀의 정체를 파악했다. 인터넷에 알려진 것 이상이다. 허언증 정도가 아니다. 소름 돋을 정도로 무서운 여자”라고 말했다. 또 그는 기자칼럼을 통해 “밑바닥 인생을 살던 홍가혜는 성공을 위해 계속해서 거짓말을 했고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았다”고 선동했다.(김효진 기자, “‘당신이 믿었던 페이크’ 김용호 기자” http://www.newspic.kr/view.html?nid=2019041601170139108&pn=136)

이 말 때문에 ‘해경이 구조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는 홍가혜의 긴급한 인터뷰 메시지는 거짓말로 치부되었고 메신저 홍가혜는 구속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댓가를 치러야 했다.(이 당시인 2014년 4월 21일 나는 언론과 권력의 이러한 폭력적 조작에 맞서 ‘홍가혜를 위한 변명: 세월호 사건에서 정치권력의 억압테크놀로지와 언론의 매도테크놀로지에 대해’를 페이스북에 포스팅한 바 있다. https://www.facebook.com/amelano.joe/posts/1441826822725464) 5년여에 걸친 재판 결과 대법원은 홍가혜의 무죄를 판결했다. 반면 김용호는 홍가혜에 대해 거짓말과 명예훼손을 한 것이 밝혀져 서울중앙지법은 그에게 1천만원의 손해배상 판결을 내렸다.

그런 그가 홍가혜에 대한 거짓말로 메신저를 나락으로 빠뜨렸던 때로부터 정확히 5년만에, 그리고 손해배상 판결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다시 타겟을 바꿔 ‘윤지오가 성공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선동을 시작한 것이다. “밑바닥 인생”(힘 없는 사람들)과 여성에 대한 자신의 혐오증을 끝내 참을 수 없었던 탓일까? 아니면 거짓말을 통해서라도 주목을 끄는 것이 그의 생존수법인 것일까? 그는 방송을 통해 윤지오가 또 한 사람의 왕진진일 수 있음을 암시했고 이 이미지는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부단히 재생산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분석은 윤지오가 아니라 다름 아닌 김용호가 제2의 ‘왕진진’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뒷받침해 준다. 이 가능성이 사법적 판결로 나타나기까지 다시 긴 시간의 싸움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뉴시스와 김수민

-4월 7일 뉴시스의 ‘가짜뉴스’와 4월 16일 김수민의 ‘내부고발’의 관계에 대해

김수민은 세월호가 침몰된지 정확하게 5년이 되는 날에 윤지오에 대한 장문의 고발문을 제출했다. 그것은 권력형 성폭력 체제에 대한 윤지오의 증언항해가 부딪혔던 암초였다. 윤지오호는 심각한 상처를 입고 침몰하기 시작했다. 김수민 고발장의 첫 부분은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의 이런 글을 써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가슴이 아픕니다. 누구보다도 장자연씨의 죽음을 아파했고 그 진실이 규명 되기를 바라는 일반 국민 이었으니까요”.

그의 글은 진실규명에 반대하는 외부(권력자들)로부터의 비난이 아니라 “진실규명을 바라는 일반국민” 내부로부터의 고발형식을 취한다. 그리고 그는 이 고발을 윤지오의 선제적 명예훼손에 대한 방어적 대응으로 위치짓는다. 진실규명을 바라는 일반국민의 한 사람이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행동으로서 “윤지오씨의 말은 100% 진실일까요?”라고 물을 때, 그것은 결코 스쳐 지나갈 수 없는 무게를 갖는다. 왜냐하면 윤지오의 증언은 오직 ‘진실규명’에 가치있다는 것 하나 때문에 온 국민과 세계시민의 이목을 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수민의 고발은, 2009년 윤지오가 식사자리에서 함께 한 사람으로 지목했던 사람이며 사건 수사 당시 강제추행 등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은 바 있는 홍선근 회장의 머니투데이 계열사 뉴시스가 윤지오에 대한 비난 기사를 실었던 것(2019년 4월 7일, 최지윤 기자수첩 ‘증인 윤지오와 장자연 사건’)과는 불과 열흘 정도 사이지만 사람들에게 성질이 다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윤지오의 정정보도 요구와 법적 대응 통고를 받고 해당 비난 기사를 내려야 했던 뉴시스의 경우와는 달리, 김수민의 고발은 김대오 기자, 박훈 변호사의 지지와 변호를 받으면서 탄력을 받은 후 헤랄드경제, 매일경제, 세계일보, 아주경제, YTN 등을 타고 비상했고 조선, 중앙, 동아에 의해 지배적 여론으로 자리잡았다. 이 언론 릴레이의 귀결이 “윤지오씨의 말은 100% 진실일까요?”에서 시작하여 ‘윤지오는 거짓말쟁이’라는 이미지를 주조하는 것이었음은 이제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치고 빠진’ (혹은 실패한) 뉴시스의 가짜 보도의 내용과 김수민의 고발 내용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뉴시스의 위 기사의 핵심은 아래 다섯 가지다. 1)윤지오는 장자연과 친하지 않았다 2)윤지오는 고비용의 과도한 경찰보호를 받으며 생활중이다 3)윤지오는 옛날부터 유명해지는 것이 꿈이었는데 이제 장자연을 이용하여 팔로워 76만명이 넘는 SNS 스타가 됐다 4)윤지오는 장자연을 이용하여 후원계좌를 열어 돈을 벌고 있다 5)윤지오는 거짓 증언을 했으며 그의 진술은 신빙성이 없다. (참고할 기사: 민주언론시민연합은 이 기사에 대해 모니터하고 팩트체크하는 비판 기사를 바로 다음날 ‘윤지오를 의심하는 뉴시스에 보내는 조언’, http://www.ccdm.or.kr/xe/watch/279169이라는 제목으로 실었다.)

작가 김수민은 뉴시스의 기자 최지윤과는 달리 윤지오에 대한 비난을 “나는 속았다”의 형식 속에 담는다. 

“윤지오의 순수성을 믿었고 옳은 일을 하는구나 하는 대다수의 국민들이 생각하시듯 저도 그렇게 믿었습니다만…시간이 지날수록 지오가 하는 행위는 장자연이 안보이고 윤지오가 부각되는 행동들 이었습니다.국민청원을 하고 경호비 써야 한다며 후원계좌를 열고 그 이후 비영리 재단을 만든다며 후원을 요청 하며 인터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윤지오의 행보를 보면서 제 자신도 속았구나를 느끼게 되었고 고인을 욕보이는 행위는 하지 말아라 고 조언을 한 후 그때 말다툼 이후 인연을 끊었습니다.”

“나는 속았다”는 “당신은 속지 말라”는 메시지를 함축한다. 윤지오를 “국민영웅, 국민여전사”처럼 “언론이 떠받드는” 현실이 윤지오의 사기의 효과임을 암시하면서 김수민은 윤지오가 장자연을 이용하여 돈을 벌고 명망도를 높이고 있다는 뉴시스의 기사내용을 다른 형식으로, 즉 자기각성의 형식을 통해 반복하고 국민들에게 “냉정”을 촉구한다. 

이것이 장자연에 대한 권력형 성폭력에 대한 진실규명을 덮고 윤지오의 “거짓”과 “사기”에 대한 진실규명에 집중하자는 제안이었음이 명백함에도 그것에 실사구시적 주의가 기울여지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김수민의 고발장이, 윤지오의 증언 신빙성을 낮추려한 뉴시스의 외부로부터의 직접적이고 선동적인 형식의 시도가 실패한 후 그것이 다른 형식으로, 즉 이른바 “윤지오 협력자”(김수민)의 내부로부터의 고발이라는 간접적이고 정동적인 형식으로 재개된 것임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김수민은 뉴시스와는 달리 직접적인 이해당사자가 아니었으며 윤지오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속은 자의 분노’라는 정동을 무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장자연 사건을 보는 두 종류의 눈, 두 종류의 전략

장자연 사건을 바라보는 두 종류의 눈, 두 종류의 전략이 있다. 하나는 권력자, 착취자, 남성의 눈으로, 짧게는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눈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장자연 사건을 희화화하고 즐기면서 진실을 미궁 속으로 빠뜨리는 마약에 취한 눈, 초점 잃은 눈이다. 초점이 불분명할수록 자본주의적 가부장제, 그 성폭력 체제가 흐릿해지고 이 체제의 수혜자들은 별장과 클럽에서의 성폭력을 지속하면서 축적과 치부 그리고 명령의 오르가즘을 반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다중, 저항자, 탈주자, 여성의 눈으로, 짧게는 생명의 눈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장자연의 죽음에 대한 진실규명과 재발방지 개혁을 열망하는 눈이며 무엇이 문제인가를 실사구시적으로 응시하는 부릅뜬 눈, 두려움에 떨면서도 봐야 할 것을 놓치지 않는 다초점의 눈이다. 초점이 분명해져야만 어디서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공격의 화살이 날아오고 어디에 자신을 빠뜨릴 함정이 있으며 어디로 생존의 출구가 열려 있는지를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윤지오 증언 논란은 이 두 눈의 시선이 교차하고 부딪히는 사회적 전장이다.  

첫번째의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눈과 전략은 자신에게로 다중의 시선의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을 어떤 형태로든 회피하려 한다. 그것은 권력자와 착취자가 장자연의 죽음의 원인일 수 있음을 가리키는 모든 증거들(증언들, 물증들)을 없애는 데 집중한다. 이들의 전략은 두 차원을 갖는다. 하나는 직접적으로 협박, 강요, 매수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개개인들이 공포 때문이건 두려움 때문이건 돈이나 이익을 얻기 위한 욕망 때문이건 자신들의 의사를 따르게 만듦으로써 그들을 매개로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시킨다. 여기서 조직폭력, 언어(말), 이권, 돈은 전혀 구분되지 않고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다. 그것들은 권력의 의지를 타자들에게 관철시키는 직접 폭력의 다양한 변(형)태들이다. 둘째로 권력이 직접 움직이지 않고도 자신의 의지가 관철될 있는 구조와 메커니즘을 구축하는 것이다. 그것은 법, 제도, 관행,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행동 및 반응 양식이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도록 구조화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합법성, 정당성, 불가피성, 도덕성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다양한 변호론 위에서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고 권력은 그 안에 기생한다. 장자연 사건에서 나타난 그것들의 몇몇 유형들을 살펴보자.

1)문장삭제: 유장호는 장자연이 성폭행을 당한 사실을 문건 초안에 적었지만 자신이 삭제하도록 만들었다고 진술했다. (유장호는 “장자연 씨가 처음 작성한 문건에는 심하게 성폭행을 당한 내용도 썼는데, 그 부분은 내가 지우라고 했다”며 “장씨가 이후 그 내용을 빼고 썼다”고 밝혔다: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808703) 내용삭제는 이처럼 권력의 노골적인 압력이 없는 순간에도 준자발적으로, 메커니즘적으로 이루어진다.

2)문건소각: 가족은 봉은사 땅 밑에서 파온 문건 원본을 읽은 후 ‘좋지 않은 일’이니 사본과 함께 소각하자는 결정을 내리고 유장호, 윤지오가 보는 자리에서 소각한다. 여기서 ‘좋지 않은 일’이라는 말은 ‘두려운 일’이라는 뜻도 함축한다. 싸워서 이길 수 없는 대상들이니 없는 것으로 하자고 결정하는 면도 있다는 것이다. 이 역시 메커니즘적이다.

3)문건누락: 유장호는 문건의 ‘목록’을 경찰에 제출하지 않을 의사를 밝혔고(윤지오와의 통화녹취) 실제로 ‘목록’(리스트)의 제출은 없었다. ‘이권’을 고려한 자발적 의사결정이고 그에 따른 행동이다.

4)수사기관에 대한 협박: 조선일보는 장자연 사건 TF팀을 꾸리고 조현오 당시 경기지방경찰청장을 협박했다. 조현오 청장은 조선일보가 자신들은 권력을 창출할 수도 있고 퇴출시킬 수도 있다며 협박을 해와 당시에 수사를 엄정하게 진행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https://www.youtube.com/watch?v=F8WqvajeGyA&list=PLU0ewOZC-Zt73VjIdkYUJ6Gn7LYcDkWbn&index=2 MBC 피디수첩과의 인터뷰). 피디수첩 방영을 앞두고 조선일보는 MBC에 방용훈의 실명을 거론하지 말라고 압박했다.(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1642959)

5)은폐를 위한 수사: 검경은 증인이 권력자와 기업가들의 범죄혐의를 지목할 때 그 증언을 교란시켜 증거력을 떨어뜨리는 다양한 수사기법을 사용한다. 실제로 윤지오가 조선일보 조희천을 성추행 당사자로 지목해 내는 과정은 경찰의 이러한 교란전술(경찰은 윤지오에게 조희천을 뺀 수십명의 사람들의 사진을 제시하고 그 중에서 가해자를 지목하라고 요구했고 사건진상 규명과 관계 없는 디테일들에 대한 반복된 질문으로 증인의 기억력을 증인 스스로 의심하도록 만들었다)로 인해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고 판사가 윤지오의 진술이 일관성과 신빙성이 없다는 판결을 내리도록 만들었다. 

6)언론을 통한 교란: 최근 디스패치는 경찰과 검찰의 교란은폐 전술이라는 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그 교란은폐 전술의 효과인 윤지오의 ‘진술 번복(진술 정정이라 해야 할 것이다!)’을 진실성과 신빙성의 결여로 평가한다. 이것은 ‘뉴스는 팩트다’를 기치로 내 걸고 있는 디스패치가 전적으로 권력자와 착취자의 시선에서 본 ‘팩트’의 전달을 자신의 역할로 삼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윤지오는 디프패치 기사가 나간 4월 29일 이에 대해 한 영화 속 인물의 말로써 응수하면서 디스패치의 정체를 폭로한다: “우린 부시가 군인의 의무를 다 했느냐고 물었을 뿐이다. 하지만 거기엔 아무도 관심이 없고, 다들 폰트와 위조 음모 이론만 떠들어 댄다. 왜냐하면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나올 때 요즘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 손가락질하며 비난하고 정치 성향과 의도 인성까지 물고 늘어지면서 진실 따위 사라져버리길 바란다. 그리고 모든 게 끝나면 하도 시끄럽게 발을 구르고 고함을 쳐대 뭐가 핵심이었는지 다 잊어버린다”). 언론은 결코 진실이나 팩트를 알리는 기관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적 삶을 감싸고 있는 것, 즉 우리 정신의 피부를 구성한다. 우리의 정신활동은 언론과 더불어 전개될수밖에 없지만 진실활동은 언론에서 독립적인 영혼의 자기활동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7)내부고발자를 통한 전선교란: 권력은 다중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다중의 집합적 에너지가 자신에게 집중될 때 그 전선 내부를 교란시키기 위해 내부고발자를 찾는다. 윤지오의 협력자였음을 자처하는 김수민의 내부고발문건과 카톡공개는, 그것이 자발적인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 전부터 계속되어 오던 윤지오 증언에 대한 비난 세력들의 선동에 합류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내부로부터의 이 윤지오에 대한 초점 잃은 고발은 권력층의 몸을 향하던 진실조사의 칼끝을 윤지오의 몸으로 향하도록 물꼬를 돌린 모멘트이다. 이로써 증언은 사라지고 짓밟혀 상처 입은 증인만이 남게 되었다.

8)박수선동부대 동원: 초점을 흐리는 센세이셔널한 말들이 만들어지면 박수부대를 동원하여 권력의 판을 키운다. 스스로 생각할 능력이 부족하거나 권력과 이권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 혹은 권력으로부터 일당을 받는 사람들이 초점이 있는 말들을 비난하고 초점을 흐리는 말들에 박수를 쳐대면서 사유공간을 점령한다. 경향신문 4월 30일자에 실린 단국대 교수 서진의 글 같은 것이 그 예다.

(::첫 번째 시선, 첫 번째 전략의 문제는 다른 방법의 다른 글로 다루겠다.)

기계의 보편적 도입이 노동과 착취체제에 가져오는 효과에 대해

기계의 보편적 도입이 노동과 착취체제에 가져오는 효과에 대해

1)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 기계의 보편적 도입은 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게 만든다. 노동은 잉여로 되며 노동가치는 더 이상 의미를 갖지 않는다.
2)고전 맑스주의의 관점 : 기계의 보편적 도입은 노동의 지역만을 이동시킬 뿐(제3세계로!) 노동에 대한 필요를 감소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노동은 확장되고 자본의 착취는 여전히 노동에 대한 착취로 남고 기계는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
3)자율주의 맑스주의의 관점: 기계의 보편적 도입은 직접적 고용의 필요를 감소시키면서 삶 전체를 노동시간으로 편입시킨다. 자본의 착취는 기계에 의해 매개되는 삶-공통장 전체에 대한 수탈로 바뀐다.

조지 카펜치스의 모색은 2)와 3)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그는 노동의 일반화, 확장, 다양화라는 테제를 받아들이면서도 기계의 보편적 도입에 대해 말할 때는 기계와 변화된 노동세계의 관계를 고찰하기보다 고전적 맑스주의처럼 제1세계에서 공장노동의 감소에 비례하는 제3세계에서의 땀공장의 증가, 즉 고용노동의 유지 혹은 확장에 대해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