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환대의 새로운 조건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페미니스트 문화평론가 손희정 선생의 ‘증언자 윤지오’에 대한 생각: 야스민과 윤지오의 차이와 유사성

오늘 이화여대 모모영화관에서는 제1회 모모 에피파니 영화제 마지막 날(2019년 6월 27일) 마지막 순서로 퍼시 애들론 감독의 <바그다드 카페> 상영과 이 영화에 대한 손희정 문화평론가의 강의 <공명의 조건: 마주침과 환대의 상상력>이 연속으로 열렸다. <바그다드 카페>는 독일 여성 야스민이 미국의 사막지대에 있는 바그다드 카페에서 그 카페의 여주인인 브렌다와 이질적 느낌으로 마주쳤지만 그곳에 투숙하면서 청소, 아이돌보기, 마술 등으로 그곳에 활기를 불어 넣으면서 브렌다와 우정의 관계를 맺고 새로운 공동체를 구축하면서 두루 환대받는 존재로 되어 간다는 이야기다.

강의 후 질의응답 시간의 끝에 나는 마지막 질문자를 자청했다. 나의 질문의 요지를 정리하면 이러하다.

“영화에서 야스민은 경찰에 신고된다거나 꾸지람을 당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배제되다가 환대 받아가는 경로를 밟는데 이와는 정반대의 경로를 밟고 있는 비극적 인물이 한국 현실에 존재한다. 윤지오 씨가 그렇다. 야스민과 달리 윤지오 씨는 2019년 초 사람들의 환대를 받으며 캐나다에서 한국에 입국했다. 처음에 의심을 받고 경찰에 신고되고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받던 야스민은 청소를 하고 아이를 돌보고 마술을 함으로써 환대받는 존재가 되어 갔다. 이와 달리 윤지오 씨는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과 관련해 권력자를 고발하는 증언을 한 후 2019년 4월 말 변호사, 작가, 기자의 고소로 범죄자로 몰려 한국에서 추방당했다. 나는 윤지오 씨에게 씌워진 사기 혐의는, 제주도에 도착한 예멘 난민들에게 씌워졌던 ‘위험한 인간들’이라는 혐의처럼 가짜뉴스이고 가짜혐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가짜뉴스, 가짜 혐의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인다. 대한민국의 국민들 속의 어떤 심리적 요소, 어떤 이데올로기적 조건, 어떤 욕망이 이러한 가짜 뉴스와 가짜 혐의에 쉽게 동조하도록 만들게 되는지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다. 페미니스트 분들 중의 일부도 윤지오 씨의 라이브 방송이나 기타 인성들을 이유로 윤지오 씨를 비판하는 입장에 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페미니스트 분들이 여성 증언자 윤지오 씨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길[환대의 길]은 없겠는가?”

아래는 손희정 선생의 답변을 정리한 것이다. 

첫째 페미니스트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윤지오 씨에 비판적이라고 하는 것이 페미니스트 일반이 그렇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윤지오 씨의 입국과 증언 당시에 윤지오 씨와 연대했던 페미니스트들이 있고 윤지오 씨의 어떤 퍼포먼스를 비판했던 다른 페미니스트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둘째 윤지오 씨의 말 중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의 진실을 한국 사회가 떠 안을 수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고발들은 분명히 들을 만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윤지오 씨의 고발 내용만을 우리가 판단할 문제지 윤지오 씨의 개인 인성은 한국 사회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셋째 지금 윤지오 씨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문제를 개인[인성]의 문제로 환원해서 개인의 인성을 가지고 물어뜯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라고 생각해 보면 [예맨 난민을 위험한 인간집단으로 보았던 시각과 유사하게] 젊은 여성들은 믿을 수 없고 꽃뱀이 될 수 있다거나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식의 공포가 작동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넷째 왜 윤지오 씨가 [수 년 전] 캐나다로 떠났는가 생각해 보면 한국 사회의 한계 때문에 떠났다. 그 이유 때문에 떠났는데 돌아왔을 때는 다시 그 이유로 인해 발붙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한국 사회 시스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시스템 뿐만 아니라 다양한 구조적 문제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섯째 야스민처럼 그 사회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마술을 한 것이 아니라 [권력자에 대한] 고발자였기 때문에 자리를 찾기가 힘들었겠지만 야스민이 한 것이 공간의 먼지를 떨어내고 다른 공간으로 바꿔내는 일이었던 것처럼 윤지오 씨의 고발도 그와 유사하게 [한국사회를] 청소하는 작업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질문을 들으면서 들었다. 그것들이 서로 동일한 청소인데 왜 [윤지오 씨의] 청소는 불가능하지 하는 고민도 하게 된다. 

여섯째 가짜 뉴스가 많은 시절이라 뭐가 가짜고 뭐가 아닌지를 내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의 확답을 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내부고발이나 다양한 고발을 들을 수 있는 길을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가 또 하나의 환대의 조건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고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과 SBS

“SBS 임원(총괄상무), SBS USA대표이사를 지냈던 고대화는 장자연 사건 당시 올리브나인의 대표이사였으며, 이 올리브나인은 더 컨텐츠의 주식 54%를 소유했던 실질적 소유주였습니다. 버닝썬 사건 최초보도로 장자연 사건 덮기, 장자연 전남친 기사 최초보도, 궁금한 이야기 Y의 왜곡보도 등 SBS에서 윤지오씨를 공격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네티즌 흰동가리

“박준영 변호사의 글 <공범>을 검증한다”(http://amelano.net/?p=876)를 쓰면서 나는 <궁금한 이야기 Y>(2019. 6.21)에서 박준영이 한 인터뷰 내용에 대해서도 검증해 보고 싶었으나 그 프로그램을 재시청할 수 있는 조건에 있지 않아 그의 글만을 다루었다. 오늘 그의 인터뷰 내용 중 특히 “네 동생 (장자연)이랑 함께 마약했다”는 김종승의 문자메시지에 관해 박준영이 한 인터뷰 말과 <궁금한 이야기 Y>(이하 <Y>)의 해설자가 덧붙인 말에 대해 lamer297님이 해당 프로그램을 놓고 검증한 것으로 보이는 글이 있어 해당 대목 전체를 인용하고 나의 생각을 조금 덧붙여 보고 싶다.


박준영은 윤지오씨가 2009년에 무엇에 대해 ‘모른다’라고 했는지 확실히 밝혀야 합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증언 기록은 어디에 있습니까? 윤지오씨가 그 문자에세지를 장자연씨가 받은것에 대해 모른다고 했는지, 장자연씨가 마약을 한것에 대해 모른다고 했는지 밝혀야 합니다. 박준영은 다만 윤지오씨가 거짓말을 하고있다라는 인상만을 주고 있습니다. 윤지오씨의 증언에 대해 왜 장자연 사건을 담당하지도 않은 박준영씨가 평가를 합니까? 실제로 장자연 사건을 담당했던 여섯분의 진상조사위원중 단 한분도 인터뷰를 하지않았습니다. 박준영은 (1)윤지오는 거짓말장이이며, (2)진상조사위원이 윤지오씨께 최근에 마약에 관해 주입시켰다. (3) ‘니동생이랑 함께 마약했다’는 문자메세지는, 실제로 장자연이, 누가 몰래 마약을 장자연씨께 주입시켰든 어쨌든, 오직 협박이었다는 것을 시청자에게 ‘주입’시키고 있는겁니다. ‘장자연씨가 마약에 의해 강간 당했을 가능성’ 만이 공소시효가 남아 있고, 이 가능성이 증언에 의해 증거로 받아들여지는 단하나의 경우에만 가해자들을 처벌할수 있기 때문에 이 가능성만 제거하면 가해자들은 영원히 발 뻗고 편히 잠 잘수 있게 되겠죠? 박준영은 장자연씨가 마약에 의해 강간 당했을 가능성을 전면부인 하도록 가해자들의 총알받이로 전면에 나선것 처럼보입니다.

박준영은 방송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 동생 (장자연)이랑 함께 마약했다’ 그것은 장자연씨가 마약했다는 것이 아니라 공격하기위한 ‘협박의도’로 보낸문자였고 했는데 그 문자를 근거로 (2009년에) 경찰이 질문했을때 (윤지오씨가) 모른다고 했는데, 지금에 와서는 ‘언니가 마약을 했다는 근거다’ 라고 조사단원애서 오히려 주입하려 했단 말이에요. 이거 모순아니에요?” 그러나, (1) 장자연사건 진술조서 전문에는 2009년에 경찰이 윤지오씨께 이 문자메세지에 관해 질문한 기록도 없고, (2)윤지오씨가 2009년에 이 문자메세지에 대해 대답한 기록도 없습니다. (3)박준영은 저 문자메세지가 사실이 아니고 다만 ‘협박의도’ 라고 어떻게 확신하죠? 그 확신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4)박준영이 주장하는 진상조사단원이 윤지오씨에게 ‘언니가 마약을 했다는 근거다’ 라고 주입하려 했단 증거가 무엇입니까? 이주장은 진상조사단원에 대한 아주 심각한, 법적으로도 큰 문제가 될수 있는, 비난이라고 보여집니다.

궁금한이야기 방송중, 윤지오씨는 “그 두줄에 대해 단한번도 그동안 질문조차 없었다”라고 하자, 궁금한 이야기 해설자는 “그동안 아무도 묻지 않아 말을 할수없었다는 윤씨, 그런데 과거수사기록과 재판기록에는 이내용이 여러차례 등장합니다”라고 말합니다. 해설자의 말은 마치 윤지오씨가 거짓말을 했다라고 말하는 것 같이 들리죠? 그러나 이 말의 모순은 (1)윤지오씨에게 아무도 마약에 관해 질문을 안한것 하고, 마약에 관해 (2) ‘다른 증인들’이 증언 한것하고 무슨 상관이죠? 한국일보가 제공한 장자연사건 진술조서 전문에는 윤지오씨에게 마약에 관해 질문한 것을 찾아 볼수 없습니다. 그러나 장자연씨와 마약에 관해 다른 증인들이 언급한 것은 있습니다.”

lamer297 님의 이 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요점은 무엇인가? 박준영이 <Y> 인터뷰에서, 김종승이 “네 동생 (장자연)이랑 함께 마약했다”고 언니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낸 동기를 단순한 ‘협박문자’였다고 말(인터뷰)했는데, 김종승의 말에 대한 이러한 자의적 해석의 첫 번째 효과는 가해자들이 장자연에게 마약을 먹여 성폭행했을 가능성을 지워 없애버리는 것이라는 것. 즉 특수강간 혐의의 제기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의 재수사 가능성을 영구히 말소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필요한 장치가 윤지오의 증언을 거짓말로 만드는 것이었다. SBS는 이 목적을 박준영과 <Y> 해설자 두 사람의 확인되지 않은 말들(나는 그것들이 거짓말일 것으로 추정한다)을 함께 엮어짜는 방송편집기술을 통해 달성한다. 박준영은 [1]2009년에 그 문자메시지에 관해 경찰이 질문을 했을 때 윤지오가 모른다고 해놓고 [2]2019년에 진상조사단에서 그 문자 메시지가 ‘언니가 마약을 했다는 근거다’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것은 윤지오의 증언에 일관성이 없다(즉 모순된다)고 주장함으로써 그 증언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려는 술책이다.  [여기서 나는 “조사단원애서(sic!) 오히려 주입하려 했단 말이에요.”라는 박준영의 불명확한(아니 비문이라 할 수 있는) 말을 lamer297 님과는 다르게 해석했다. 이 비문에서 “주입하다”의 주어는 윤지오일 수도 있고 조사단원일 수도 있다. lamer 297 님은 그것을 ‘조사단원’으로 읽어 (4), 즉 진상조사단에 대한 모독의 문제점을 추론했다. 나는 박준영이 “조사단에서”를 “조사단원애서”로 잘못 말한 것으로 보아 그 주어를 ‘윤지오’로 읽었다].

lamer297 님은 박준영에게 “윤지오씨가 2009년에 무엇에 대해 ‘모른다’라고 했는지 확실히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자료를 확인해 보니 수사관은 윤지오에게 “마약은 어디에서 어떻게 하였으며 장자연에게 피해를 준 사실에 대해 알고 있는가요?”라고 묻는다. 윤지오는 “어디에서 마약을 했는지 모르고 장자연 언니에게 피해가 있는지 모릅니다.”라고 답한다.

이 문장을 박준영은 “언니”에게 마약을 주입하여 성폭행했을 가능성에 대한 최근의 진술과 모순되는 것으로 본다. 이것은 최근의 진술이 사적 목적을 갖고 지어냈을 가능성에 대한 근거로 이용된다. 

분명히 마약의 피해에 대해 모른다고 한 사람이 10년이 지나 마약에 의한 피해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은 일관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두 진술이 서로 모순되는 것이며 둘 중 하나만 옳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인간의 인지는 정보의 축적이라기보다 정보들의 네트워킹이다. 새로운 사실, 새로운 경험과의 접속은 과거에 대한 새로운 지각/인지를 준다.

장자연이 입었을 마약의 피해에 대해 모른다고 한 당시의 윤지오는 22살로 마약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고 마약이 무엇인지, 마약이 주입된 사람이 어떤 증상을 나타내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다시 말해 자신의 바로 옆에 마약을 먹는 사람이 있다해도 그가 드러내는 상태를 통해서는 그가 마약에 취했기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인지 상태에 있었다. 윤지오는 당시 장자연이 맥주 반 컵도 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온 몸에 힘이 풀리고 동공에 초점이 없는 상태를 본 경험이 있었지만 그것을 ‘언니가 술이 약한가보다’ 이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인지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런데 그 이후 특히 캐나다에서의 사회적 간접경험을 통해 얻은 인지력의 변화로 ‘맥주 반 컵도 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온 몸에 힘이 풀이고 동공에 초점이 없’었던 언니의 상태를 술이 약한 사람들의 신체 상태가 아니라 마약에 주입된 사람들이 보이는 신체 상태로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근거로 윤지오는 진상조사단 진술에서 장자연이 마약에 강제 주입되어 성폭행 당했을 가능성을 진술하고 그에 대한 수사를 요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마약 문제와 관련해 윤지오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박준영이 인간의 인지변화 가능성의 측면을 간과함으로써 현재의 윤지오의 말을 사적 목적을 가지고 지어낸 거짓말로 오인하고 증인 윤지오에 대한 검증이라는 과도한 대응을 하도록 만든 것으로 보인다. 

박준영 외에, <Y>에서 해설자가 개입하여 “그동안 아무도 묻지 않아 말을 할 수 없었다는 윤씨, 그런데 과거수사기록과 재판기록에는 이 내용이 여러차례 등장합니다”라고 했다는 lamer297 님의 지적은 참으로 흥미롭다. 해설자야말로 SBS가 <Y>를 통해 시청자들의 뇌 속에 어떤 생각을 주입하려 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다양한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에 마약 관련 내용이 그토록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수사기관은 왜 장자연의 사회적 타살을 이와 연관지어 수사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과거사조사위원회는, 윤지오가 제기한 마약 주입과 성폭행 가능성에 대한 추정을 정세호 감독의 교차증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경시하는가? SBS가 진정한 언론이었다면 “과거수사기록과 재판기록에는 이 내용[마약 관련 내용]이 여러차례 등장합니다”로부터 국민들의 이러한 공적 관심사에 대한 질문을 끌어내고 그 방향의 탐사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SBS는 이로부터 “그동안 아무도 묻지 않아 말을 할 수 없었다”는 윤지오의 진술과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에 이 내용이 여러차례 등장한다”는 사실 사이에서 윤지오 진술이 거짓이었다는 섣부른 결론을 도출하는 데 여념이 없다. 공적 방송이 아니라 사적 방송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아무도 묻지 않아 말을 할 수 없었다”는 윤지오의 최근 진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것이 10년 전 수사기관에서의 질의와 답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온 말일까? 그것보다는 오히려 장자연이 보인 특정한 신체상태를 10년 전과는 달리 인지하고 해석할 수 있게 된 것, 즉 ‘마약 주입 후 성폭행했을 가능성’에 관해서 아무도 묻지 않았다는 말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lamer297 님이 지적하듯이 [1] 그동안 아무도 묻지 않아 말을 할 수 없었다는 윤지오의 진술과 [2]과거의 다양한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에 마약 관련 내용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는 것 사이에는 어떤 모순도 없다.

그런데 왜 해설자는 [1]과 [2]를 상반(相反) 관계를 표현하는 접속부사인 “그런데”로 연결하는가? 이것은 명백히 고의적이고 또 악의적인 해설이다. 윤지오 진술의 진실성과 신빙성을 의도적으로 상처내는 것이다. 나는 해당 프로그램의 결론 부분에서 “대의를 위해 작은 거짓말은 해도 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는 취지의 해설자 발언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기에서 해설자는 중립성을 내팽개치고 윤지오를 “거짓말”하는 사람으로 단정하는 폭력주체로 발벗고 나선다. 이것은 SBS가 공익성을 저버린 유사언론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진실의 감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누구에게라도 눈에 들어오는 이토록 뻔한 조작과 폭력을 SBS가 수백만의 국민들을 대상으로 행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들이 국민들을 ‘기망’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그 동기를 앞에 쓴 다른  글(http://amelano.net/?p=868)에서 “권력의 비위를 맞추면서 돈을 버는 일”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lamer297 님이 인용하고 있듯이, 흰동가리 님이 2019년 6월 22일 나의 블로그에 댓글로, 나의 글이 밝히고 있지 못한 중요한 점을 지적해 주었다. 그것은 그 “권력”의 실체들 중의 하나에 대한 지적이다.

“SBS 임원(총괄상무), SBS USA대표이사를 지냈던 고대화는 장자연 사건 당시 올리브나인의 대표이사였으며, 이 올리브나인은 더 컨텐츠의 주식 54%를 소유했던 실질적 소유주였습니다. 버닝썬 사건 최초보도로 장자연 사건 덮기, 장자연 전남친 기사 최초보도, 궁금한 이야기 Y의 왜곡보도 등 SBS에서 윤지오씨를 공격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 지적은, 마약 투약과 성추행 혐의로 수배되고 일본으로 도주했던 김종승이 대표로 있었던 더 콘텐츠가 실질적으로는 SBS와 모종의 연관을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렇다면 이것은 우리가 장자연 문건에서 마약, 술접대와 성접대 강요, 협박, 폭행 등의 주역으로 여러 차례 등장하는 김사장(’김종승’)을 실제로는 ‘SBS’로 바꿔 읽는 것도 필요함을 의미하지 않는가? 진상조사가 한창 진행중인 2019년 4월 27일 SBS가 <그것이 알고 싶다: ’故 장자연 문건 미스터리- 누가 그녀를 이용했나?’>를 통해 장자연의 육성 절규를 공개하면서 조선일보 방용훈, 방정오에게 집중적으로 포커스를 맞춘 것은 SBS가 자신에게로 향할지도 모를 화살을 피하기 위해 사용한 연막전술이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은가? 이런 관점에 설 때 비로소 우리가, lamer297 님이 박준영의 <Y> 인터뷰와 해설자의 말을 검증함으로써 드러난 SBS의 “마약-성폭행 지우기 공작” 및 “증언자 윤지오 사기꾼 만들기 공작”의 실상과 그 정치적 사법적 의미를 분명히 직시할 수 있지 않을까?

박준영 변호사의 글 <공범>을 검증한다

아침에 일어나 박준영 변호사가 쓴 다음 글 <공범>을 보고 마음을 진정시키기가 어렵다.

<재심>을 통해 쌓은 정의의 이미지가 이렇게 연약한 인간을 내려치는 망치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경악과 분노 때문에 떨리는 손가락을 진정시켜가며 그 글에 댓글을 달았다.

*

국민 개개인에 대해 인간주의적 이해보다 국가의 비용 배분의 향방과 양을 우선시하는 관점이 관료주의다.

관료들은 “내(국가)가 너희(인간)에게 은혜(복지)를 베푼다. 너희의 선함을 나에게 입증하라”고 주장한다.

관료들은 이렇게 국민 앞에 자신이 시혜집단임을 내 세움으로써 자신을 국민 위에 옹립할 뿐만 아니라 국가가 그 관료집단에게 세금으로 천문학적인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춘다.

관료집단에게 지출되는 국가비용이면 가난한 국민들의 대다수가 선함을 입증하지 않고도 행복한 삶을 꾸리는 데 충분할 것이다. 왜 국민이 자신들의 노복들(servants)에게 선함을 입증해야 하는가? 

박준영 변호사는 윤지오 배우에게 정말 “헤어샵으로 와 달라고 통보”한 적이 있는지 물어 사실확인을 했는가?

만약 그런 사실이 있다고 했다면 “왜 그렇게 했는지”, “경호원과 함께 택시 타고 오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물어보았는가?

국민이 국가기관을 시켜 대한민국으로 불러온 증인에게 국가가 보호목적으로 지출하는 비용에 대해 박준영 변호사가 자신의 경험(저는…본 적이 없다)을 잣대로 비난의 글을 올리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박준영 변호사가 술접대 자리에서 권력자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억지로 노래하고 춤춰 본 적이 있는가?

박준영 변호사가 실세 권력자들의 불의와 부정을 증언하는 자리에 서 본 적이 있는가?

증언 후에 누가 뒤따라 오지 않나 뒤돌아보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는가?

걸려오는 전화마다 녹음해 두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느끼는 불안의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는가?

인기척에 소스라쳐 떨어본 적이 있는가?

이 사회가 적대로 가득차 있고 맹수처럼 이빨을 드러낸 사람들이 약자들을 향해 어르릉대고 있음을 느껴 본적이 있는가? 

나는 알고 있다.

박준영 변호사의 페이스북 이미지에 왜 아이들이 앞모습을 보이지 않고 뒷모습을 하고 있는지.

왜 자신의 두려움은 당연하고 필연적인 두려움이고 윤지오 배우가 느끼는 두려움과 그에 대한 표현은 “가해의 실체에 대한 의혹을 부풀리는 의도”의 표현으로서 부당하고 의심스런 두려움인가?

“긴 시간 윤지오와 함께 했던 사람들이 이런 윤지오의 문제점을 몰랐을까요.” 

어떤 문제점 말인가?

“나는 건강하다. 나는 절대 자살하지 않는다”며 정신감정 결과를 제출한 것 말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대한민국에 살면서 죽임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사는지 아는가?

장자연의 주검이 부검도 없이 유족의 뜻에 따라 경찰에 의해 처리된 후 대한민국은 10년이 넘는 사회적 갈등 속에 휩싸여 있다.

그 죽음이 자살이라는 명확한 증거조차 확보하지 않은 채 시신을 처리함으로써, 그 무엇보다 결정적인 증거인 시신을 불투명하게 처리함으로써 왜 국가기관은 이토록 국민들을 혼란 속에서 방황하게 만드는가?

대한민국에서, 국가기관이 명확한 죽음의 이유를 밝히지 못하는 의문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자살하지 않을 것이므로 내가 죽게 되거든 유가족이 뭐라하든 부검해 달라는 윤지오 배우의 이 유언 아닌 유언이 왜 문제점인가?

지금 윤지오가 악한 인간이라고 고발하는 일에 그의 가족인 이모부가 앞장 서 있다.

만약 윤지오에게 그가 두려워하는 일이 실제로 발생한다면 그 일이 그의 “유가족”의 뜻에 따라 처리되어도 되는가? 

나도 이 자리에서 밝히고 싶다. 나는 건강하다. 나는 절대 자살하지 않는다. 나의 꿈은, 유태우 박사의 가르침대로, 9988234, 아흔아홉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삼일을 끙끙 앓고 죽는 것이다. 나는 시신이 악의에 따라 임의처분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나의 시신을 기증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유서가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는 한, 반드시 부검해 달라.

박준영 변호사는 윤지오의 정신감정 결과 제출에 대해 문제점을 느꼈다고 자신 외에 진상조사단의 그 누구로부터 또 이야기를 들었는가? 확인했는가?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왜 “이를 알거나 알 수 있었으면서 침묵 했던 모두가 공범입니다”라며 애매한 가정법 기술을 써서 윤지오 배우를 범죄자로 모는가? “뒤늦게 이야기한 저도 공범이구요”??? 박준영 변호사가 어떤 유형의 범죄자일지는 모르나, 윤지오 배우는 범죄자가 아니며 따라서 박준영 변호사의 공범이 아니다. 왜 변호사의 신분을 갖고서 헌법 제27조 제4항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해 한 인간을 유죄로 단죄하는가? 

박준영 변호사는 조선일보 기자의 추행건에 대한 윤지오의 증언에 대해 폄하할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만약 윤지오 증언자가 박준영 변호사의 무고로 인해 증인으로서의 신빙성을 잃어버리게 되면 결국 그 조선일보 기자도 무혐의 처분에 준하는 약한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그 증언을 폄하하는 실제적 방식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것이 조선일보의 전직 기자를 구하고, 조선일보를 구하는 실행방법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 조선일보 구하기의 행동인가?

윤지오 증언자의 증언에 대한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왜 과거사진상조사단원들은 바보들로 만들고, 그들을 모독하는가? 박준영 변호사가 그럴 자격이나 권리를 갖고 있는가? 그들은 나름대로 다양한 증언들을 교차 비교하고 물적 증거와 대조하여 사실인 것을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는 나름 대로의 검증작업을 하지 않았겠는가? 적어도 과거사진상조사단에서 윤지오 증언의 신빙성은 유지되었다. 

우리가 더 이상의 검증을 요구한다면 과거사조사위원회의 최종 심의발표가 진상조사단의 조사와 일치하는지, 또 진상조사단의 조사가 충분히 증인들의 증언들과 증거들을 실사구시적으로 비교검토했는지, 증인은 충분히 확보했는지, 강제수사력이 없음으로써 생긱 구멍이 무엇이었는지 등에 관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공적 검증과정 바깥에서 박준영 변호사가 윤지오 (증언이 아니라) 증인에 대한 검증을 요구함으로써 어떤 결과가 나타났는가? 인간 윤지오의 사생활을 발가벗기고 증언자를 심문대에 세워 마녀사냥을 한 것 아닌가? 박준영 변호사가 원한 것이 그것이었는가? 노출이 어느 정도인지, 학력은 속이지 않았는지, 왜 그리 학력이 보잘 것 없는지, 작품이 표절은 아니었는지, 정치색이 뭔지, 평소에 거짓말을 얼마나 하는지, 왜 말할 때 눈을 굴리는지, 계좌에 후원금은 얼마나 모였는지, 왜 자신의 계좌를 공개하지 않는지, 혹시 계좌에서 사적 목적으로 쓴 돈은 없는지, 왜 기자들에게 오만하게 구는지, 목소리가 왜 그렇게 짜증나는지, 유가족을 혹시 비난 한 적은 없는지, 왜 왕진진의 글이 가짜라는 것을 식별하지 못하는지…. 이 악무한적 의혹들과 비난들의 광기가 ‘증인도 검증되어야 한다’고 박준영 변호사가 제안하면서 의도했던 그것이었는가?

2019년 늦봄과 초여름에 대한민국은, 윤지오 증언자를 사기꾼으로 만드는 전 시민사회적이고 전 국가적인 사업을 통해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권력자를 고발하는 증언을 하려는 자는 반드시 사생활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받아야 한다고 세계만방에 천명했다. 국민의 기본권을 철저히 짓밟는 이 반헌법적 광기의 선봉에 박준영 변호사가 서 있다는 사실을 똑 바로 직시해야 할 것이다.  

이미 공인인 박준영 변호사의 말과 삶은 이제, 그가 윤지오 배우에게 요구했던 바로 그 방식으로, 한 구절 한 구절 일거수일투족 검증되어야 한다. 혹시 그가 출마의 기회를 얻거나 관직을 얻거나 돈을 벌거나 하는 등의 사적 목적으로 윤지오 배우의 의혹을 부풀리고 있지나 않았는지/않은지 검증되고 또 검증되어야 한다. 나는 이후 박준영 변호사가 국회의원 후보로 공천을 받거나 공직에 진출하거나 치부를 하거나 언론의 칼럼 자리를 얻거나 하는 식의 이득 취득의 현실이 드러나게 된다면 그것이 윤지오 배우의 의혹을 사적 목적을 위해 부풀려 얻은 사익이라는 생각을 지우지 않을 것이다.

토론을 공정하게 끌고 가기 위해 아래 내 스스로 박준영 변호사에게 페친 신청을 했고 아래 댓글도 달았다.

<궁금한 이야기 Y>의 취재와 편집 노하우 뒷이야기: 어떻게 SBS는 하이테크 거짓말과 사기술로 윤지오를 ‘거짓말쟁이’, ‘사기꾼’으로 만들 수 있었나?

SBS <궁금한 이야기 Y>를 보면서 대개의 사람들에게는 거짓말이나 사기로 지각되지 않을 수준 높은 거짓말과 고도의 사기술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지난 4월 이후 대한민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마녀사냥 놀이처럼, 이 프로그램이 윤지오를  ’거짓말쟁이’, ‘사기꾼’으로 만드는 공작(工作)형 프로그램이었기에 더 밀도 높은 ‘수업’이 되지 않았나 싶다. SBS <궁금한 이야기 Y>가 자신들의 하이테크(high-tech) 거짓말과 사기를 통해 출연자 윤지오를 ‘거짓말쟁이’, ‘사기꾼’으로 만들어 내는 비법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이 기법을 이해하기 위해 2013년 레이디경향에 실렸던 ‘궁금한 이야기 Y’ 이덕건 PD의 방송 뒷이야기를 참조했다. 특히 이 부분:

https://lady.khan.co.kr/khlady.html?mode=view&code=5&artid=201311221655331

이번 프로그램을 만든 PD가 누구인지 궁금해진다.

하이테크 거짓말과 사기술의 비법들:

  • 출연자들(취재원)에게 출연자들의 입장에서 당신들의 이야기를 담겠다고 약속한 후 출연자들의 진심과는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 취재원의 사소한 부분까지 귀담아 듣지만 가해권력의 비위에 맞고 대중의 광기에 불을 질러 돈 될 이야기만 골라내기
  • 한 방울 마음 속에 찌꺼기로 남아 있을지 모를 양심 때문에 취재자가 취재원의 진심에 이심전심되지 않도록 주의하기
  • 작은 실수로 피디의 처음 목적과 다르게 편집되지 않도록 취재원의 어떤 감동적인 이야기나 사실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하기
  • 갈등을 전제로 하는 사연들은 최대한 중립의 입장에 서서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면서 가해권력의 비위를 맞추고 대중의 광기에 호응하여 돈벌이에 이용할 사연들만을 기술적으로 부각시키기
  • 방송 후 왜 이야기가 다르냐고 털어놓는 출연자의 불만에 무관심하기
  • 욕 정도는 일상으로 알고 가해권력의 비위를 맞추면서 대중의 광기를 이용하여 돈을 벌기
  • 이 목적을 위해서 절대 소심해지지 말고 오지랖을 넓히기
  • 명예훼손 고소로 인한 피해 정도는 ‘김밥값’(박문덕) 정도로 여기기
  • 출연자들이 방송으로 인해 죽든 말든 뒤돌아보지 말고 다음 프로그램 준비에 매진하기
  • 출연자들이 프로그램에 갈아 넣어질 원료라는 사실을 스스로 눈치채지 못하게 교묘하게 유혹하고 이용하기
  • 시청자 대중이 거짓말과 사기에 속는 멍청이들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눈치채지 못하도록 취할 수 있는 화려한 스펙터클을 제공하기

그런데 여기 그러한 방송 사기술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SBS가 방송국이길 포기했다는 시각까지:

이런 분위기를 보면 그래도 SBS는 ‘살인병기’라고까지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마도 상당히 절제하고 있는 태도일 것으로 짐작된다.

‘방송’을 자처하는 가해권력의 자객이 휘두른 칼로 대한민국이 빠져든 피의 홍수 속에서 진실의 좌표를 다시 찾는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 나는 장자연의 죽음이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 혹은 자본주의 가부장제로 인해 비롯되었다고 본다. 나는 이 체제의 폭력성과 모순을 가시화하고 관심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이 체제의  극복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데 관심이 있다. 이 체제는 사회적 노동에 대한 착취와 수탈을 본질로 삼는 것만큼이나 본질적으로 성차별주의적이고 성폭력적이다. 이 때문에 이 체제가 지속되는 한 김용균들의 고통과 죽음은 계속될 것이고 장자연들의 고통과 죽음도 마찬가지로 계속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삶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불구화하는 체제이므로 이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연합과 공통되기를 통해 이 체제를 혁파하고 반(反)성폭력적이고 반(反)노동착취적인  공통체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 2016년 촛불혁명은 이 체제의 극악한 상태를 바로 잡는 데는 부분적으로 성공했지만 이 체제의 성차별주의와 인종주의는 촛불혁명 속에서도 문제로 제기조차 되지 못했다. 2018년의 미투는 촛불 이후 체제의 이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게릴라전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투의 실명 폭로는 백래쉬에 직면하여 체제의 반동을 충분히 밀어낼 만큼 강하지는 못했다. 또 미투는 SNS를 통한 여론전의 성격을 띠었기 때문에 여론전이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한 하층 노동여성의 성폭력 문제는 건드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바로 이러한 한계는 백래쉬에 대응할 만한 전 사회적 역량을 이끌어내는 데 제약으로 작용했다. 
  • 하지만 촛불혁명과 미투의 힘은 10년전 여성연예노동자 장자연의 죽음의 역사적 의미와 현실성에 주목하도록 만들 만큼은 힘이 있었다. 이 힘은 거대 다중이 참가한 국민청원을 매개로 장자연 사건을 과거사조사위원회의 조사대상에 포함시키도록 압박하는 섭정의 에너지였다. 촛불에게 있어서 윤지오는 바로 장자연의 죽음의 역사적 의미를, 그리고 그것을 넘어 그 죽음의 현재성과 현실성을 밝힐 초점이었다. 왜냐하면 윤지오는 장자연과 동일한 여성연예노동자였고 장자연과 고난을 함께 한 노동동행자였으며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장자연이었기 때문이다. 촛불-미투 공통인들(commoners)은, 윤지오의 목소리를 통해, 현실에 부활한 장자연을, 그리고 가해권력의 이름들을 피로 눌러쓴 그 장자연의 절규와 고발의 목소리를 듣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장자연-윤지오는 사시나무처럼 두려움에 떨며 이 시대를 살아야 하는 여성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과거사조사위원회의 목적은 이와는 달랐다. 과거사조사위원회는 국가기관이었고 특히 적폐검찰들에 의해 주도되는 기관이었다. 과거사조사위원회는 장자연 사건을 역사화시키는 선에서 촛불-미투 주체들의 요구를 봉쇄, 봉합하려고 했다. 윤지오는 과거사진상조사단의 조사에서, 그리고 많은 언론 인터뷰에서 ‘증언해 봐야 아무 것도 바뀔 것이 없네요’라며 한숨을 내쉬고 좌절의 표정을 짓곤 했다. 나는 이 좌절의 한숨이, ‘재수사를 통해 가해권력을 처벌하라!’는 촛불-미투 주체들의 현실화[현재화] 요구가, 사실을 역사에 기록하는 것이 처벌이라고 보는 과거사조사위원회의 역사화[과거화] 장벽 앞에서 느끼는 답답함의 표현이었다고 본다. 과거사조사위원회는 국민에게는 차단되어 있고 그들 끼리만 돌려 볼 문헌적 기록을 통해 관련자들에게 문헌적[역사적] 징계를 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갈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 방식의 기록은 지배계급 내부의 권력경쟁의 수단이지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다. 왜 우리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윤지오에게 지출한 900만원에 대해서는 아깝다, 불공정하다고 탓하면서 돌려막기로 국민을 기만한 과거사조사위원회에 지출했을 저 천문학적 비용에 대해서는 이토록 관대한가?
  • 과거사조사위원회의 심의발표는 이러한 ‘역사화’ 목적의식의 압권이었다. 가해 권력자들의 리스트 문제는 더 이상 논란해 봐야 소용 없는 것으로 정리발표되었다. 비록 가해자들에게 역사적 무죄를 선고한 것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공소시효 경과, 증거 불충분 등으로 모든 것을 과거화했다. 성폭행(특수강간)에서 새로운 증거가 나타난다면 재수사한다는 여지를 남겨 두었지만 그들 검찰이 새로운 증거를 나서서 확보할 것이라고 누가 손톱만큼의 기대라도 할 수 있겠는가?
  • 윤지오의 증언에 대한 백래쉬는 4월부터 본격화되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촛불-미투 운동이 검찰주도의(즉 대검 산하의) 과거사조사위원회라는 형태로 자리잡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검찰에서 독립된 시민주도의 과거사조사위원회였다면 사정이 달랐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이 자칭 ‘촛불정부’인 문재인 정부의 이중성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문재인 정부는 시간이 흐를수록 아래로부터의 진보적 목소리를 수렴하되 그것을 보수적 틀 속에서 해소시키는 봉합정책, 수동혁명 테크놀로지를 사용해 왔다. 물론 이것은 촛불-미투의 주체적 한계의 표현이기도 하다. 2016년 촛불과 2018년 미투는 여성=비정규직=하층 노동자들의 자기조직화가 아직 취약하여 정규직=남성=중산층 노동자들의 이해관심의 벽을 뚫을 만큼 혹은 그 층을 견인하기 어려운 상태에 있음을 보여준다.
  • 윤지오는 이 불안정 속에서 대한민국 국민과 과거사조사위원회의 부름을 받아 증언을 시작했다. 2019년 3월 증언의 불길이 가해권력이 앉아 있는 방석으로 옮겨붙으려고 하는 순간에 문재인 정부에 비판적이고 박근혜에 우호적인 성향의 박준영 변호사가 윤지오에 대한 검증론을 펴면서 군불을 때고 뉴시스의 비방보도를 신호탄으로 박훈 변호사가 나서 친구 김대오의 거짓말, 김수민의 음해담을 섞어서 결국 윤지오에게 ‘마녀=사기꾼’이라는 사법 올가미를 씌운 것이 2019년 4월이었다. 광기의 군중들이 이들의 뒤를 따랐고 제도 언론들의 돈벌이 이벤트는 손님들로 가득했다. 윤지오는 졸지에 ‘여자 왕진진’으로 조작되어 진실 증언대에서 끌려 내려와 캐나다로 강제추방 당했다.
  • 윤지오 마녀사냥에서 언론계의 군주로 군림하는 조선일보는 헤럴드경제, 매일경제 등의 경제지들과 연예지들, YTN 등이  물어뜯어 놓은 먹잇감을 조용히 가로채는 하이에나 같은 모습으로 움직였다. 이것은 좌파독재 타도를 내건 우파 유튜버들이 중도적이거나 중도좌파적인 박훈, 김대오, 김수민이 물어뜯어 놓은 먹익삼을 가로채는 것과 유사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 사이에는 좌도 중도도 우도 없는 정치적 연합전선이 펼쳐졌다. 윤지오를 죽일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거리낌 없이 하는 반증언의 연합전선이 형성되었다. 성차별주의적 성향의 우파 가로세로연구소-슛티비 유튜브와 자칭 ‘페미니스트’ 김수민 인스타그램은 반윤지오=반증언 전선에서 서로 열애하는 관계로 발전했다. ‘사회주의자’ 박훈은 조선일보를 싸고 도는 이 연합전선이 자신에게 나쁜 이미지를 남긴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윤지오=사기꾼’이라는 조작된 관점을 이들과 공유하면서도 이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절제된 행보를 취했다. 김대오는 정확히 이 둘 사이에서 좌충우돌의 모터싸이클 놀이를 했다.

‘윤지오 사기꾼 만들기’ 공작의 구성요소들

이미 사회적 수준으로 확산되고 발전된 ‘반윤지오 혐오전선’과 ‘윤지오 사기꾼 만들기 공작’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성분과 주목할 만한 경향을 갖는다.

  • 정치적 우파가 반문재인 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반윤지오 혐오감정을 정치적 무기로 활용하고 있다. 즉 증언자 윤지오를 무너뜨리는 것이 윤지오를 증언대에 세운 문재인 정권의 밑둥을 헐어내는 일이기 때문에 다가오는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윤지오를 집중 공략하고 있다. 윤지오 매도는 장기적으로는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에 대한 재수사를 영구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 가해권력의 전략적 공세지만 단기적으로는 총선에서 승리하여 재집권의 기회를 노리는 자유한국당파가 적폐검찰의 조력 하에, 조선일보 등의 우파언론, SNS내 반문재인파를 앞세워 수행하는 총선전술이다. 현재는 이 흐름이 윤지오에 대한 사법고발고소 등의 여론조작을 수행하는 여론 주도층으로 확실하게 기능하고 있다. 
  • 그런데 또 하나 중요한 지점은 중도보수 문재인 정권과 여당인 민주당이 수구보수파의 이러한 공세에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고 수수방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시사인의 보도에서 확인되었듯이 문재인 정권은 20대 남성 세대가 지지층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페미니즘/여성 이슈의 부상이 가져온 반발작용으로 독해하면서 득표를 위해 페미니즘/여성 이슈에서 발을 빼는 방향으로 정책 기조를 잡아 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남성 20대가 페미니즘/여성 이슈의 부상에서 불안감을 느낀다면 신자유주의화가 생산한 여-남 공동의 삶의 불안정을 여성에게 전가하는 성차별적 대응 이상이 아니다. 만약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이 이러한 대응에 영합하여 여성, 페미니즘 이슈에서 발을 빼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이것이 윤지오에 대한 대응을 회피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면 이것은 크나큰 실책이며 자신의 발등을 찍은 것 이상의 어리석은 대응 이상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우파 세력들과 조선일보 SBS와 같은 반민주적 정치언론들 이 ‘윤지오 사기꾼 만들기’를 통해 반페미니즘 성차별 공세를 하고 있는 것에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이 합류하는 것이고 이것은 자신들의 발밑을 파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 자본주의의 유지와 지속에서 이익을 얻는 사회적 우파가 친자본주의 입장을 반윤지오와 결합시키고 있다. 윤지오는 장자연과 더불어 노동자, 그것도 계약직 노동자이다. 언론, 교회, 대학 등의 이데올리기적 국가기구가 조성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거의 무의식화된 계급차별과 노동천시 관념(그것은 국민은 개, 돼지라는 말로 집약된다)은 윤지오에 대한 언론의 악선동에 쉽게 넘어가는 정신적 기질로 나타난다. 이것은 표면에 활성화되어 나타나는 흐름은 아니다. 하지만 이 사회적 우파주의 경향은 자본주의가 여성의 무임노동에 대한 수탈 없이는 존립할 수 없다는 점에서 사회의 심층에 무의식화된 흐름이며 남성만이 아니라 남성체제에 동화된 여성도 공유하는 흐름이다.
  • 그런데 박훈이 보여주듯이 전통적 좌파의 일부도 반윤지오 전선의 일부로 편입되어 있다. 전통적 좌파는 산업공장을 모델로 태어났기 때문에 연예인을 룸펜적이고 기생적인 프롤레타리아층(“딴따라”, 즉 부지런히 노동하는 ‘개미’가 아니라 노래부르는 ‘매미’)으로 보는 관점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구축된 노조운동이 남성본위적이고 남성우월적인 관점, 즉 성차별적 관점을 공유하고 있었다. 산업자본주의에서 인지자본주의로의 전환이 이러한 관점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만들지만 관념상의 시대착오가 계속되는 것은 부자연스런 일이 아니다. 의식은 현실보다 더디게 바뀌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 미투를 촉발했던 페미니스트 세력 일부의 상대적 방관도 주목되는 일이다. 물론 아직까지 윤지오의 증언자 입장을 가장 강력하게 떠받치고 있는 것은 여전히 미투여성들이다. 하지만 장자연-윤지오가 미투 흐름 속에서 출현한 운동적 초점임을 고려하면 현재의 연대력은 이상하리만치 약하다. 윤지오는 진정 페미니즘의 힘과 연대를 요구하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지금 미투여성 운동이 증언자 윤지오와 윤지오의 진실을 지키지 못하면 누가 지킬 것인가?
  • 혹시 내[우리]가 증언자 윤지오와는 연대할 수 있지만 ‘사기꾼’, ‘탕녀’로 의심되는 윤지오와 연대하고 싶지는 않고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 이런 경우라면, 윤지오 다음으로 마녀사냥의 표적이 바로 내[우리]가 될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언론과 방송이 장자연 가해권력의 비수가 된 2019년 6월 21일 재앙의 날에 121년 전 에밀 졸라의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고발을 다시 읽는다.

“대부분의 여론은 매일 아침 언론이 퍼뜨리는 이 거짓말, 이 기괴하고 어리석은 뜬소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책임을 물을 시간이 반드시 올 것이며 그때 세계만방에 우리의 명예를 실추시킨 비열한 언론은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몇몇 신문이 사악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이 신문들은 오직 흙탕물만을 실어 날랐다. 그런데 이 신문들 가운데 예컨대 <레코 드 파리 L’Echo de Paris>를 목격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이며,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토론 빈번히 사상의 전위에 섰던 그 문학적 신문이 드레퓌스 사건에서 그토록 개탄할 역할을 수행하다니 말이다. 폭력적 단평, 추악한 편견에는 서명조차 없다. 그러나 이 단평과 편견의 뒤에 드레퓌스의 처벌이라는 가공할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도사리고 있음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발랄땡 시몽 씨는 이 단평과 편견이 자신의 신문을 오욕으로 뒤덮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그 태도가 진정 정직한 사람들의 양심을 아프케 하는 신문이 있는데, 그 이름은 <르 프티 주르날 Le Petit Journal>이다. 수천 부를 찍은 군소 신문들이 판매부수를 늘릴 목적으로 고함을 지르고 거짓을 입에 담는 것은 그래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며 제한적인 악일 뿐이다. 그러나 백만부를 상회하는 판매부수를 자랑하는 <르 프티 주르날>, 방방곡곡의 갑남을녀들에게 읽히는 <르 프티 주르날>이 오류를 퍼뜨리고 여론을 오도하는 것은 실로 심각한 재앙이 아닐 수 없다. 수 많은 영혼을 계도해야 하고  만백성을 이끌어야 하는 목자의 경우 양심지성성실성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을 때 그는 자칫하면 공민적 범죄자로 전락하고 만다.

프랑스여, 그대를 휩쓰는 광풍 속에서 제일 먼저 내 눈에 띄는 것, 그것은 언론이 매일 아침 그대에게 전하는 얼치기 콩트, 저열한 욕설, 도덕적 타락으로 얼룩진 거짓의 방벽이다. 그들이 그대의 온갖 전설적 미덕, 투명한 지성, 견고한 이성을 이 지경으로 박살낸 지금, 어떻게 그대가 진실정의를 구현할 수 있겠는가?”

-1898년 1월 6일, 에밀 졸라 : <나는 고발한다>, 유기환 옮김, 책세상, 76-77쪽

SBS <궁금한 이야기Y>에 대해 제도언론들이 숨기고 있는 네티즌 반응들

  • 2019년 6월 21일 밤 8:55~10:00, SBS는 <궁금한 이야기Y>라는 프로그램에서 “장자연 사건의 증언자 윤지오”라는 제목으로 공익제보자 윤지오를 둘러싼 여러 논란을 다루었다. 그 프로그램의 제작진은 캐나다로 가서 11시간 윤지오를 인터뷰했다는 사실에 무색하게도, 윤지오 1인의 증언을, 김대오, 박준영, 김수민, 장자연 전 남친, 후원금 반환 소송에 참여하고 있는 윤지오 보호 국민청원 작성자, 후원금 반환 소송에 참여하고 있는 또 다른 전 후원자 1인, 장자연/윤지오 전 매니저 등 윤지오를 공격하고 있는 다수 인물의 증언을 대비시킴으로써 (그리고 중간중간 윤지오 님이 웃거나 춤추고 있는 장면을 악의적으로 편집합으로써 – 대체 11시간의 인터뷰는 어디로 간 건지? 캐나다는 왜 간 건지?) 윤지오를 거짓말쟁이에 장자연 사건 진상규명을 방해하는 관종으로 만들며 모욕하였다. 이 프로그램이 1그램의 객관성이라도 확보하려 했다면 윤지오의 증언진실을 지지하는 이들의 발언을 공격자들의 발언과 같은 분량으로 방송했어야 한다. SBS의 이러한 폭력과 증언자 능멸에 분노한다.
  • 정준영은 범죄 증거를 지우고 조작해서 지켜주고, 약물강간 및 마약밀매 승리와 유착한 뒤 언론에 보도돼도 묻어버리고, 교통사고 피해자는 강간하는 경찰이 고 장자연씨 사건의 증인인 윤지오씨의 계좌를 압수수색한다니 역겨운 일관성이 보인다. 
  • 궁금한 이야기 Y는 이런 반응을 바랐나봄. 윤지오씨에게 손끝하나 건드리지 않고 그의 후원자들과 여성혐오자들의 ‘내돈내놔’와 ‘미친년’이라는 돌멩이에 맞아죽어도 마땅한 사회적 타살을 바라고 방송을 악의적으로 편집해서 보냈나보다.
  • 궁금한 이야기 Y 윤지오편은 너무 방송 방향이 “나대지마라” 인데
  • 결국 궁금한 이야기에서 윤지오를 거짓말쟁이로 모는구나…
  • 윤지오씨 인스타만 팔로윙해서 꾸준히 들여다보면 진실이 다보이는데… 
  • 말꼬리잡아서 마녀사냥하는 인간들 다들 본질은 어디갔냐??? 장자연사건에 애초에 관심이나 있었나 싶다…
  • 에스비에스 와이이야기에서 다루는 거 보니까 윤지오씨 이상한 사람이네요. 근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이상한 사람이 증언한 건 받아들일 수 없다?

증언의 진실성과 증인의 인성/도덕성/불법성 쟁점을 구분하지 못하는 맹목성과 그 발생원천에 대해

윤지오를 둘러싼 논란을 ‘윤지오 사기증언 사건’이라고 명명하는 김대오의 생각에 대해 내가 “장자연-윤지오 사건을 바라보는 김대오의 가부장적 성차별주의 시각의 세 가지 구성요소”(http://amelano.net/?p=823)라는 글을 올린 후 거기에 다음과 같은 댓글이 달렸다.

“이 단순한 사기 사건을 아직도 믿으려하시니, 참 어렵게도 보시네요. 선생님의 글처럼 저도 선생님의 심층의식과 표면의식을 종합하면, ‘(김대오 기자를 필두로 한)대중은 쉽게 속아 넘어가고, 가해권력을 보호하며 성폭력적인 시선을 보내지만, 이 똑똑하고 선한 나만은 진실을 알고있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선민의식은 아닌가 싶은데요. 그러니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는 귀를 닫고, 원래의 생각에서 1mm도 움직이지 못한채 여전히 옹호만 하는거 아니신가요. 이렇게 판단력이 흐려진 이유가 궁금합니다.  저는 참여연대에 공익제보자를 위한 후원을 지속하고 있을만큼 공익제보자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비약은 있겠으나 희귀병에 걸려 10여억을 모금한 이영학을 예로 들면, 희귀병에 걸린건 사실이죠. 하지만 모금을 돈벌이 삼아 방송과 다른 이중적 모습에 대해 누군가 문제를 제기했었다면 2차 가해인가요?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고 폭력적 시선인가요? 윤지오씨가 증인인건 사실이죠. 그런데 목숨이 위험할 정도의 신변위협이 사실이 아니면요? 캐나다 차사고는 그냥 단순 접촉사고면요? 아프리카bj로 누구보다 자유롭게 살았다면요? 윤지오씨는 신한은행으로 받은-억대로 추정되는-후원금 내역을 왜 공개하지 않는지, 그게 합법적인거라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2019년 6월 18일, ID 수현; 강조는 인용자)

또 그 아래에는 윤지오를, “눈알 굴리면서” 자영업자 오빠를 의대다녔다고 말하는 “거짓말쟁이 양치기 말투”의 “허언증 환자”, “거짓말을 너무 많이해와서 스스로도 거짓말하는걸 모르고 있는 정신병 환자”로 지적하면서 “제발 벗어나오세요 ㅠㅠ”라고 말하는 자상한 댓글, 메일과 ID는 여럿 이지만 IP는 하나인 분이 주신 댓글들도 여럿 달려 있다.  

윤지오증언의 진실성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먼저 수현 님이 이영학의 사례를 윤지오 사례에 견준 것은, 그 자신도 어느 정도 이미 느끼고 있듯이(“비약은 있겠으나”) 윤지오를 둘러싼 논란의 본질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선택된 사례라고 생각한다. 이영학은 공익제보자가 아니며 증언 진실성이 쟁점으로 되는 사례가 아니다. 윤지오를 둘러싼 논란의 본질은 그의 증언의 진실성을 증인에 대한 도덕 및 인성 논란으로 덮고 그 증언을 부인해 버리는 것에 있다. 이것은 정확하게 증언으로 인해 손해를 볼 수 있는 가해권력의 필요와 의도에 부합하는 것이다. 수현 님의 댓글은 바로 그 필요와 의도를 댓글의 형식으로 네티즌의 입장에서 실천하고 대행하고 있는 것 이상이 결코 아니다.

나의 입장은 무엇인가? 도덕과 인성의 차원에서 윤지오를 옹호하는 것인가? 아니다. 증언 진실성의 문제와 도덕/인성의 문제를 명확히 구분하자는 것이며 전자를 후자로 덮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대중(mass) —이것은 정체성의 집합이라는 점에서 특이성의 공통체인 다중(multitude)과는 다르다— 이 후자로 전자를 덮기를 욕망한다면 나는 ‘선민’주의라는 비난을 받는 것을 무릅쓰고라도 반(反)-대중의 입장에 설 것이다. 모호하게 뒤섞어 놓은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다.

가를 ‘판’, 자를 ‘단’을 합친 우리말 ‘판단(判斷)’이나 ‘애초의 발생 부분으로 나누다’는 뜻을 가진 독일어 ‘das Urteil’이나 모호하게 뒤섞인 것을 잘라 가르는 것을 의미한다. 판단력은 가르는 능력이지 뒤섞고 몽롱하게 만드는 능력이 아니다. 도덕/인성의 문제로 증언 진실성을 뒤덮는 것이야 말로 우리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가해권력들의 전술이며 그것에 현혹되는 것이 (다중이 아닌) 대중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현 님의 말, “(1)윤지오씨가 증인인건 사실이죠. (2)그런데 목숨이 위험할 정도의 신변위협이 사실이 아니면요? 캐나다 차사고는 그냥 단순 접촉사고면요? 아프리카bj로 누구보다 자유롭게 살았다면요? 윤지오씨는 신한은행으로 받은-억대로 추정되는-후원금 내역을 왜 공개하지 않는지, 그게 합법적인거라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에서 나는 (1)과 (2)를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2)에서 (1)을 잘라내지 않는 사람들을 나는 “판단력(判-斷-力, Ur-teils-kraft)이 흐려진” 사람들로 규정한다. 왜냐하면 (1)과 (2)는 완전히 별개의 두 가지이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가 맺는 상호관계는 개개의 사태 속에서 냉철하게 사고되어야지 (2)에서 거짓말, 사기꾼일 것으로 추정되므로 (1)에서 그의 증언도 사기일 것이다, 라고 추론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참으로 멍청한 사람들이 자주 저지르는 판단착오다. 우리의 ‘베테랑 기자’ 김대오까지 이런 흐름에 합류하고 심지어 그 흐름을 선도하는 것에 나는 통탄을 금할 수 없다.

백 번도 더 말하는 것 같지만 ‘장자연 리스트’와 관련된 윤지오 증언의 진실성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즉 수현 님이 제기한 (1), 즉 윤지오가 증인이며 그의 증언은 진실하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9년~2010년의 진술이기 때문이다. 그 증언은, 거짓말쟁이며, 접촉사고며, 라방 별풍선이며, 신한은행-국민은행이며, 표절이며, 학벌조작이며…하는 2019년의 모든 쟁점들이 아무런 영향을 발휘하지 못하는 쥬라기 시대의 진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리스트와 관련된 진술은 유장호의 당시 진술, 장자연 오빠의 당시 진술에 의해서도 이미 교차검증된 바 있다. 그리고 그것이 문건이 유서가 아님이 밝혀진 이후 경찰과 언론의 상식이었다. 물론 가해권력을 비호하는 방식으로 가동된 사법과정에서 이 상식이 송두리채 내팽겨쳐졌지만 말이다. 이 점은 다른 글에서 이미 숱하게 반복했으므로 이쯤에서 멈추려 한다.

우리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대한민국 헌법을 준수하자:무죄추정의 원칙에 대해

나는 현행의 대한민국 헌법이 개정되어야 할 많은 독소조항들을 갖고 있다고 보지만 헌법 제27조 제4항까지 개정되어야 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 조항은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 선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소가 제기된 피고인이 비록 1심이나 2심에서 유죄판결을 선고받았더라도 그 유죄판결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원칙적으로 죄가 없는 자에 준하여 취급해야 함은 물론, 유죄임을 전제로 하여 해당 피고인에 대하여 유형ㆍ무형의 일체의 불이익을 가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수현 님이 제기하는 (2)를 다시 인용해 보자. “목숨이 위험할 정도의 신변위협이 사실이 아니면요? 캐나다 차사고는 그냥 단순 접촉사고면요? 아프리카bj로 누구보다 자유롭게 살았다면요? 윤지오씨는 신한은행으로 받은-억대로 추정되는-후원금 내역을 왜 공개하지 않는지, 그게 합법적인거라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에 대한 나의 입장은 분명하다. 신변위협은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차사고는 단순 접촉사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자유롭게 살았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후원금이 합법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후원금 내역의 공개 문제는 당사자가 후원자, 지지자, 장자연, 비판자 등 여러 관련 당사자들의 입장을 고려하고 자신의 유불리를 종합하여 자신과 관련 당사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결정할 문제이지 타인이 공개하라고 압박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물론 나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윤지오가 후원금의 모금 경위와 그 절차 및 그 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 윤지오와 관련 당사자 모두에게 더 유리하지 않을까 하는 견해를 갖고 있다. 하지만 당사자보다 내가 종합적 상황을 더 옳게 판단할 수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런데 혐의를 제기하는 수준을 넘어서 개인의 은행계좌 공개를 집단적으로 압박하고 무죄추정의 원칙을 벗어나 윤지오를 최종 판결이 나기도 전에 범죄자로 단정하고 그에게 다양한 형태의 불이익을 가하는 사이버불링과 오프라인 여론몰이가 이미 광범위하게 자행되고 있는 것에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지금 당하고 있는 이 집단 괴롭힘을 언젠가 당신도 당할 수도 있지 않은가?

나는 위의 인용에서 “목숨이 위험할 정도”, “그냥”, “누구보다” 등의 수현 님의 표현은 편견이 이미 들어가 있는 것이라고 보지만 여기서는 핵심 쟁점에 집중하기 위해 무시한다. 한 가지 빼놓고 싶지 않은 것은 윤지오에 대한 이러한 도덕적 법률적 쟁점이 문제로서 성립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가해권력에게 도움이 되는 쟁점이라는 사실이고, 실제로 맥락상 가해권력에 의해 본격적으로 제기된 쟁점이라는 사실(나는 4월 초 홍선근의 뉴시스에 의해 제기되었던 윤지오 비난 기사를 염두에 두고 있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최종심에서의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는 윤지오에게 가해지는 여러 범죄 혐의에도 불구하고 그의 무죄를 추정할 것이고 그를 유죄로 단정하는 반(反)헌법적 폭력에 맞서 싸울 것이다. 그리고 윤지오의 (확증되지 않은) 유죄 혐의를 근거로 그의 증언 진실성을 부인하는 모든 억견들(doxa) 및 “흐려진” 판단들 그리고 여론재판에 맞서 싸울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최종심에서 윤지오의 유죄가 판결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남는다. 이것은 내가 구분한 (1)과 (2)의 상호관계의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한 응답은 정치철학적 고찰을 포함하는 엄밀한 답을 요구하므로 별도의 글로 올리겠다.

장자연 죽음의 최종 책임이 김종승에게 있다고 보는 것은 누구의 시각인가?

-장자연-윤지오사건을 바라보는 김대오의 가부장적 성차별주의 시각의 세가지 구성요소(2)

나는 윤지오를 모른다. 그러나 ‘장자연 사건’이 ‘윤지오 사건’으로 옮겨갈 때의 위험성은 안다. 규명되지 않은 사건의 핵심 증인에 대한 도덕적 손상은 결국 사건의 진실을 가리는 데 악용된다. 증언에 대한 진위는 다른 증언이나 정황증거 등을 통해 수사기관이 판단할 몫이지 여론재판의 대상이 아니다.(김민문정 | 한국여성민우회 대표)

2011년 김대오는 <장자연 편지 위작 사건>을 계기로 장자연 사건의 본질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1)2009년에 이어 2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러한 혼란이 반복되는 것은 장자연사건의 본질에 대한 의혹이 말끔히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장자연 씨가 남긴 문건의 모호성을 감안하더라도 경찰과 검찰이 의지만 있었다면 장자연을 농락한 연예계의 권력집단을 충분히 파악해낼 수 있었다. (3)수사당국은 혐의점이 있는 권력층인사들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 (4)위작 편지같은 혼란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 아니 무엇보다 연예계 권력집단의 탐욕에 짓밟힌 장자연과 같은 연예인이 다시 나오지 않기 위해서 지금부터라도 철저한 재수사가 필요하다.(위키/김대오 항에서 인용; 괄호번호는 인용자)

(2) 문장과 (3) 문장에서 김대오는 “연예계의 권력집단”과 “혐의점이 있는 권력층 인사들”을 본질적 가해세력으로 규정한다. 즉 가해세력이 복층적 구조로 되어 있다고 규정한다. 그런데 네 번째 문장에서 그는 다시 가해세력을 (2)만으로, 즉 “연예계 권력집단”으로 환원한다. 그의 의식 속에서 가해세력에 대한 정체규정이 열렸다가(확장되었다가) 다시 닫히곤(축소되곤)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그의 의식 속에서 가해세력에 대한 사유가 축소된다 할지라도  2011년 당시에 그는 더콘텐츠 대표인 김종승을 장자연 사건의 본질로 보지는 않았다. 설령 김종승이 포함되어 있다 할지라도 연예계 권력집단이라고 하여, 집단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관점의 이러한 동요와 굴절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의 김대오는 지금부터라도 “철저한 재수사”가 필요하다는 진취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2019년, 정작 재수사가 일정에 오를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던 때의 김대오는 어떠한가? 그는 장자연 사건의 본질을 권력층도 아니고 연예계 권력집단도 아닌 일개 기획사 대표 김종승에게서 찾는다. “나는 아직도 故 장자연 사건에 대해 최종적으로 벌을 받아야할 사람은 김성훈(김종승)이라고 생각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장자연과 김종승의 계약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장자연 사건을 최소한의 것으로 축소 해석하는 것이다. 이것은, 장자연 사건이 김종승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이미숙과 유장호의 사적(기업적) 공작에서 시작되어 신형철 대법관의 ‘촛불재판 판결독촉 이메일 사건’을 덮기 위한 국정원과 이명박 정부의 정치공작에 이용된 권력형 사건이라고 확대 해석하는 고발뉴스 이상호의 시각과 정반대의 경향을 보인다. 후자를 정치주의적 해석이라고 본다면 전자를 경제주의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후자를 국가주의적 해석으로 본다면 전자는 기업주의적 해석이라 볼 수 있다. 물론 경제주의적, 기업주의적 해석 관점 내부에서도 전자는 더콘텐츠의 김종승을, 후자는 호야의 이미숙/유장호를 장자연 죽음의 최종 책임자로 보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김종승은 정황상 장자연이 죽게 되는 원인 제공자 중의 한 사람이다. 장자연은 배우의 꿈을 갖고 김종승과 계약했다. 그런데 그 계약은 노예계약과 거의 다름 없는 계약으로서 노동시간 한도를 특정할 수 없는 계약, 다시 말해 계약기간 동안 삶자체를 송두리째 사장 김종승에게 넘겨줘야 하는 계약이었다. 이 계약은 한편에서는 전(前)근대적 계약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탈(脫)근대적 계약이다. 바로 우리 모두가 오늘날에는 매일매일 노동시간을 특정할 수 없는 무임노동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은 우리의 생산시간만이 아니라, 소비시간, 심지어 휴식시간으로부터도 잉여가치를 수탈해 가는 전방위적 수탈기계로 전화했다. 장자연은 계약된 소속사에서 연기노동을 해야 했다. 그러나 연기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꽃보다 남자>에 출연했을 때는, 연기에 필요한 진행비, 매니저 월급, 스타일리스트 비, 미용실 비 등 모든 걸 부담해야 했다. 또 출연을 미끼로 술자리에 불려나가 노래를 하고 춤을 추어야 했다. 골프장에 불려나가 골프접대를 해야 했다. 이것은 성접대 강요로까지 이어졌다. 여기에 협박과 폭행이 뒤따랐다.

이 모든 것은 “‘을’[장자연]은 방송활동, 프로모션, 이벤트, 각종 인터뷰 등 ‘갑’[김종승]이 제시하는 활동에 전적으로 수락하여야 하며, 행사불참 또는 방송사고를 발생시켰을 경우 ‘을’은 ‘갑’이 제시하는 민형사상의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계약서 4조 다 항)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이것을 참을 수 없어 해약을 하고자 할 경우에, 그 출구는, “중도해약은 ‘갑’과 ‘을’간의 쌍방 합의시에만 가능하다”(6조 가 항), 그리고 “‘을’이 의무사항을 위반할 시에는 위약벌금 1억원과 ‘갑’이 ‘을’을 관리하기 위해 발생한 비용 중 증빙자료가 있는 모든 경비에 대하여 ‘을’은 이의제기 없이 계약해지일로부터 일주일 이내에 현금으로 ‘갑’에게 배상하고 잔여기간 동안 발생하는 모든 수익활동의 20%를 ‘갑’에게 손해배상금으로 지불한다”(7조)에 의해 막혀 있었다. 장자연은 계약의 사슬에 묶여 김종승이 강요하는 노예의 삶을 강제로 받아들여야 했다. 장자연은 문건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저는 김종승 사장님 회사에 계약되어 일하고부터 (…) 끊임없는 사장님의 지인과의 술접대 강요를 받았으며 저는 그로 인해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김대오가 만약 “김종승은 벌을 받아야할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면 그 말은 설득력이 있고 또 현실에 부합하는 주장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강요, 협박, 폭행 등의 직접적 수행에 있어서 김종승에게 큰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대오의 생각은 이와는 다르다. 앞에 인용했듯이 “나는 아직도 故 장자연 사건에 대해 최종적으로 벌을 받아야할 사람은 김성훈(김종승)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하여 최종 책임을 김종승에게 부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장자연과 김종승과의 계약관계에만 우리의 시선을 제한하고 김종승이 자신의 ‘지인’과 맺고 있는 관계, 그리고 다시 그 관계가 장자연과 맺는 관계라는 측면을 시야에서 사라지도록 만든다. 그런데 그 지인들은 지난 10년간의 증언, 조사, 그리고 취재를 통해 드러난 바 있듯이 큰 기업체의 임원, 법조계의 고위직, 언론사의 사장, 연예계의 권력자, 정치권의 실력자 등 한국 사회의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을 통제하는 권력자들이었다. 장자연이 문건에서 “김종승과 관련하여 조심해야 할 사람들”(유장호 변론요지서)이라고 표현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바로 저 “사장 님의 지인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장자연이 술접대를 해야 했던 “사장 님의 지인”들과 김종승의 관계는 무엇이었을까? 회사에 돈을 투자하거나 후원해 줄 사람(투자자, 기업가), 소속 배우에게 출연기회(캐스팅)를 줄 사람(감독, 제작자), 소속 배우를 홍보해 줄 사람(언론), 입법이나 행정을 통해 소속사에 유리한 법적 조건을 조성해 줄 사람(정치가), 탈법에 대해 보호해 줄 사람(법조인) 등등이다. 김종승과 장자연의 계약과 노동은 결코 외딴 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 즉 자본주의적 권력망 속에서 이루어진다. 2009년 7월 김종승의 피의자신문조서를 분석해 보면 판사는, 계약서와 윤지오의 증언을 기초로, 김종승이 장자연에게 술접대를 강요했는데 이것은 술접대를 받는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이고 일반적으로 술집접대부가 임금을 받고 하는 일인데 술집접대부가 아닌 연예인들이 무임으로 이런 노동을 하는 것의 부당성을 집요하게 캐묻는다. 이 점은 잘 주목되지 않은 내용이므로 해당 진술내용을 인용해 주의를 환기해 보자.(여기서 ‘피의자’는 김종승이다)

문: 당시 고00 등이 장자연, 윤[지오] 등에게 술집 접대부 역할 등에 따른 댓가를 지불해 주지 않았으므로 고00 등이 그만큼의 이익을 얻은 것이므로, 결국 피의자가 장자연, 윤00으로 하여금 술좌석에 참석하도록 요구함으로써, 고00 등이 그런 이익을 얻게 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는 않나요?

답: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문: 당시 피의자는 광고대행사 설립을 계획하고 있어 변00가 대표이사로 근무하는 투자회사인 “보00000”에 투자를 요청하였고, 추후 오00이 전무이사로 근무중인 “우00000” 투자제안서 등을 제출하여 투자를 받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었던 때라 판단되므로, 일종의 접대성 술좌석은 아니었나요?

답: 아니었습니다.

문: 그 모임은 장자연을 위한 모임이 아니라 피의자가 계획하고 있던 광고기획사에 투자금을 받기 위해 보00000 대표이사 변00, 우0000의 전무이사인 오00을 접대하는 자리이므로, 그 영업에 도움이 될 목적으로 장자연을 동석케 하여 술시중 등을 들게 한 것이 아닌가요?

답: 그날의 모임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문: 변00,오00의 입장에서는 자신보다 나이 어리고 얼굴도 이쁜 탈랜트와 같이 술을 마시는 것은 흔치 않은 경험이 되는 것으로, 누구라도 그런 술좌석에서 탈랜트와 같이 술을 마시고 싶어하는 것이 아닌가요?

답: 그 부분에 대해서는 모르겠습니다.

문: 일반적으로 술집접대부 등이 돈을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술을 따라주면서 노래와 춤을 주는 등 유흥을 돋고는 역할을 하는 것인데 당시 장자연, 윤[지오] 등은 술집접대부는 아니지 않나요?

답: 그날 일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문: 당시 장자연, 윤[지오] 등이 술집접대부도 아닌데 자발적으로 술집접대부 역할을 하였다는 말인가요?

답: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문: 당시 장자연, 윤[지오] 등에게 그런 역할을 자청한 이유가 있나요?

답: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문: 피의자[김종승]이 장자연, 윤[지오]에게 그런 역할을 하도록 요구한 것은 아닌가요?

답: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

문: 당시 장자연과 같이 술좌석에 참석하였던 윤[지오]의 진술에 따르면 피의자의 요구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그 술좌석에 참석하였다고 하는데 사실이 아닌가요?

답: 그것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문: 윤[지오]이 거짓말을 함으로써 어떤 이익이 생긴다고 생각하나요?

답: 그부분은 모르겠습니다.

문: 당시 윤[지오]는 피의자와 맺은 전속 계약 때문에 만약 피의자의 말을 듣지 않게 되면 계약위반으로 1억원이 넘는 위약벌금을 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술좌석에 참석한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이 아닌가요?

답: 그것도 거짓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문: 그 술좌석 참석은 피의자의 요구에 의해 참석하는 것이며, 연예활동으로 인정되므로 전속계약서에 따라 미용비 비용 등을 회사에서 지불해 주며 그 근거로 장자연 윤[지오] 등은 머리손질 사진을 매니저 등에게 전송해 주는 것이며 술좌석이 끝나면 끝났다고 피의자의 회사 매니저인 조00 등에게 보고하는 것이므로 당연히 이 술좌석 참석을 거부하게 되면 계약서에 따라 “1억원의 위약벌금, 해당 연기자에 대한 지출액을 1주일 이내에 현금배상, 잔여계약기간 동안 수익금의 20퍼센트” 등을 피의자에게 지불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답: 연예활동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고 1억원을 제가 운운한 적은 없습니다.   

인용된 문답에서 우리가 상식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은 김종승이 장자연, 윤지오 등 소속 연예인들의 감정노동과 성적 서비스 노동을 착취하고 수탈하여 투자자를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권력자들과 나눠갖는다는 것이다. 즉 김종승만이 착취와 수탈의 행위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김종성의 지인들도 그것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정치경제학적 용어로 김종승이 기업이윤을 챙긴다면   골프접대, 술접대, 성접대 등을 받은 사람들은 초과이윤, 즉 지대(rent) 수탈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감정노동이나 서비스노동과 같은 인지노동의 특성상 그 지대는 기업가에게 수취된 후 지대수탈자들에게 재배분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현장에서 직접  지대수탈자들에게 수탈되는 성격을 갖는다. 분명히 지대수탈자들은 김종승의 상위에서 초과이윤을 분배 받는 것이지만, 그 분배의 방식이 장자연 등의 감정 서비스 노동을 직접 착취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다. 이제 정치경제학적 문맥을 떠나 사법적 술어로 장자연을 ‘피해자’로 부른다면 김종승 및 그와 관련해서 ‘조심해야 할’ 그의 지인들 모두가 가해자, 가해권력이다. 이 연합권력장 내부에서 김종승은 장자연에 대해서는 가해권력이면서 그 상위의 가해권력자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수탈당하는 피해자이다. (이것은 착취계급인 산업자본가들이 지주들을 자신들에 대한 수탈계급으로 파악하면서 지주계급의 안락사를 요구해 온 맥락과 비교하여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김종승을 최종적으로 벌을 받아야 할 사람으로 규정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김대오는 김종승과 관련해서 조심해야할 그의 “지인들”, 지대 수탈자들, 상위 가해권력의 책임을 은폐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김대오의 생각과는 달리, 최종적으로 벌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아직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숨어 있으며 진상규명을 곳곳에서 방해하고 있는 이들 지대수탈적 가해권력자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장자연 죽음의 최종 책임이 김종승에게 있다고 보는 것은 바로 이 상위 가해권력의 자기보호적 시각이고 비가해 대중이 이렇게 말할 때 그것은 그 시각의 수용과 내면화라고 말할 수 있다.

2019년 4월 이후 윤지오 증언을 ‘거짓증언’(‘윤지오 증언’ 침묵한 조선, ‘거짓증언’ 의혹엔 앞장, 이미나 기자, Pd Journal, 2019.4.29, http://bitly.kr/pdN8Nn)으로 만든 것을 이 지대수탈적 가해권력자들의 자기보호 공작을 빼놓고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런데 윤지오 증언을 거짓말로 만들기는 이미 김종승이 피해자 신문조서에서 보였던 그 태도의 지속이고 확장이다.

문: 당시 장자연과 같이 술자석에 참석하였던 윤[지오]의 진술에 따르면 당시 피의자의 요구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그 술좌석에 참석하였다고 하는데 사실이 아닌가요?

답: 저는 윤[지오]이 하는 모든 말믿기 어렵습니다.(강조는 인용자)

윤지오가 하는 “모든 말”을 믿기 어렵게 만드는 것, 이것이 “증언”을 무력화하고자 하는 가해권력의 욕망이며 술책인데 지금 그것은 김종승이라는 한 인간의 행위로 나타나는 것을 넘어 대한민국의 언론, SNS, 유튜브 등을 통해 전 국가적인 거대 사업으로 전개되고 있다. 증언자 보호를 위해 사용된 900 여만원의 호텔비 지출, 그리고 이른바 ‘추정’ 1억 5천만원의 후원금의 불법성을 확인하고 반환받기 위해, 그리고 힘 없는 신인배우였고 이제 장자연의 증언자인 윤지오가 국민을 ‘기망한’ ‘사기꾼’임을 입증하기 위해  계산할 수 없을 정도의 천문학적 인력, 비용, 시간, 지면, 화면, 노동이 전국가적 수준에서 ‘정의(justice)’의 이름으로 아낌 없이 매일매일 지불되고 있다. 대한민국이 이토록 ‘정의로왔던’ 적이 단군 이래 단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도대체 이 정의는 누구를 위한 정의일까? 혹시 이 정의가 언젠가 정의가 아니라 불의였던 것으로 판명난다면 대한민국은 어디에서 그 막대한 비용에 대한 반환을 청구할 수 있을까? 또 불의를 정의로 꾸몄던 그 거대한 사기죄에 대해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 단죄할 수 있을까?

장자연-윤지오 사건을 바라보는 김대오의 가부장적 성차별주의 시각의 세 가지 구성요소

대체 김대오가 누구인가? 그는 2009. 12. 9. 성남지원에서 장자연 문건의 끝 두줄 외에는 아무것도보지못했다고 진술한 사람이다. 또 그는 2009. 3. 12. 봉은사에서 문건을 태울 때에는 현장에 있지도 않았다. 반면 윤지오는 누구인가? 봉은사 차 속에서 총 7장의 문건을 읽었고 원본과 사본을 태우는 자리에 유장호 및 유가족과 함께 있었다고 2009년 3월 18일에 경찰에서 진술한 사람이다. 또 윤지오는 2010. 6. 25일에 그 문건에 리스트가 있었다고 성남지원에서 증언했던 사람이다. 이 진술은 당시 유장호의 진술과도 일치한다. 그런데 2019년 4월에 갑자기 김대오가 윤지오를 향해 “자신이 문건을 보았을 때 거기에 리스트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윤지오가 리스트가 있었다고 거짓말한다”고 우기기 시작했다. 문건을 보지도 않은 사람이 문건을 본 사람을 꾸짖는 셈인데, 우리 속담에서는 이런 경우를 (장님 비하가 담겨 있어 피하고 싶지만 미리 양해를 구하고 빌어오자면) “장님이 매질하는 격”이라고 표현한다.

김대오가 왜 비판되어야 하는가? 그의 이 거짓말을 기초로 한 윤지오에 대한 고소고발 책동이 국민의 재수사 열망을 담은 과거사조사위원회 진상조사단 조사와 윤지오의 증언에 찬물을 끼얹어 결국 장자연 사건 재수사의 불발을 가져온 원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장자연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김대오의 이 거짓말을 사람들 앞에 명백히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김대오의 거짓말”(http://amelano.net/?p=373) “네 가지 법정과 김대오는 어디로?”(http://amelano.net/?p=489)에 이어 “김대오의 입은 거짓말 제조공장인가 자동거짓말기계인가?”(http://amelano.net/?p=806)를  쓴 것은 이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쓴 후 김대오는 또 그입으로 자신의 페이스북에 한 바가지 뭔가를 토해 놓았다. 그 악취가 심하여 접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그 악취나는 페이스북을 면밀히 살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일날 그가 나에게 페이스북 친구 신청을 하여 내가 그의 그 글-토사물을 살펴 줄 것을 (어떤 동기에서든) 바라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 요청을 내가 어떻게 뿌리칠 수 있겠는가?!  이제 이른바 ‘페북-친구’가 되어 그것을 살펴보니 동서남북도, 전후좌후도, 자초지종도, 기승전결도 없이 그냥 사방으로 막 뿌려놓은 것이었다.

김대오의 위키 이력을 보니 1967년 생으로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학사, 석사”라고 나온다. 내가 1988년에 중대 문창과 4학년 문학비평 강의를 했는데 정상 코스를 밟은 경우라면 그때 학부 3학년 정도 되었을 것 같다. 안성에서 비켜간 인연이 장자연-윤지오와 관련하여 이렇게 꼬일 줄이야… 그런데 중대 문창과라면 대한민국의 걸출한 문필가들이 배출되는 곳 아닌가? 그런데 우리의 전직 ‘베테랑 기자’ 김대오가 2019년 4월에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그래도 “진흙 속에서 진실을 캔다”(김대오)는 마음으로 김대오의 말들을 수거하여 몇 차례나 반복해서 살피면서 버릴 건 버리고 뭔가 알갱이가 있는 것들을 채취해 내 나름대로 정성을 기울여 분류하고 정리해 보았다. 아래는 그의 무의식까지 고려하여, 즉 표면의식(surface consciousness)과 심층의식(deep consciousness)을 종합하여 그의 생각의 뒤죽박죽인 조각들을 모으고 떨어진 고리들을 사유-보철물로 연결해서 정리한 것이다.([ ]속은 문맥 속에서 추정하여 내가 삽입한 것이다)

1.김종승이 장자연의 불쌍한 죽음의 책임자다.

  • 장자연은 [폭행당하고 착취당하다가] 불쌍하게 죽었다.
  • 그의 죽음의 원인은 [그를 폭행하고 착취한] 김종승이 제공했다.
  • 그러므로 김종승이 제대로 처벌받아야 한다.

2.윤지오가 김종승 처벌을 방해했다.

  • 그런데 윤지오가 김종승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여 김종승이 제대로 처벌받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 사자명예훼손으로 단단히 처벌했어야 했는데 윤지오 때문에 못하게 됐다.
  • 김종승을 처벌하겠다는 판사의 사법의지 부족이 아니라 윤지오가 김종승에게 유리하게 한 진술이 수사, 기소, 판결 모두에 인용되었기 때문에 처벌이 안 이루어졌다.

3.윤지오는 사기증언을 통해 출세하려 했다.

  • [윤지오는] “그저 그런 딴따라년”(당신들의 표현이야:원문그대로)이다. 
  • [윤지오는] 연기력도 부족했고 평소 술을 잘 마시지 않지만 가끔은 많이 마셨고 연애관계도 활발했다.
  • [윤지오가] 아프리카에서 ’벗방’했는지, 뭔지 그게 뭐가 문제냐. 나[김대오]는 ‘벗방’ 같은 것 너무 많이 봐서 관심 없다.
  • 문제는 아무것도 모르고 성공을 향해 질주해야 하는 그저 그런 “딴따라년”이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할 수 있었던 게 뭐냐는 거고 이번 사건에 대한 연구는 거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 굴레를 벗어나는 길은 사기증언을 통해서 [주목을 받고 돈을 버는 것이다].
  • 장자연 리스트, 조선일보, 국정원 등은 모두 [윤지오가] 만들어 낸  사기증언이다.
  • 그런 사기에 속아 넘어가는 김어준, 손석희, [그리고 조정환] 등이 ‘병신’이다. 
  • 그래서 내[김대오]가 이 사건을 故 장자연 사건과 윤지오 사기 증언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4.리스트는 윤지오의 사기증언의 산물이고 진상조사단/김영희도 그렇게 결론내렸다.

  • “리스트, 증거 있어? 무슨 리스트임…. 도대체 무슨 리스트임? 있으면 구체적으로 검찰이나 수사기관 혹은 일반인이 납득할만한 증거를 내놓던가… 유족이 못 봤다는 게 과거사진상조사단의 결론, 이 결론에는 김영희 변호사도 동의했음”.

5.조선일보는 장자연과 상관 없다.

  • “조선일보를 찢어죽이든, 방씨 일가에게 돌을 던지든 죽은 장자연은 내버려 두고 해.” 
  • “망자에 대한 모욕에 가까운 가짜 진술 몇 줄짜리로 조선일보를 비롯한 기득권층과 싸워보겠다는 자들이 그래서 병신같은 거야.”

6.윤지오가 국정원 직원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국정원 직원이 아니며 유장호가 문건을 봉은사에 파묻은 것은 유족 동의 없이는 문건 내용을 세상에 알리지 말라는 나(김대오)의 말에 따른 것이다.

  • 유장호의 경호원을 자처하며 봉은사의 차량 속에 유장호와 동승했던 사람은 장자연이 평소 언니라고 불렀던 L씨의 연예인 남편의 소속사 대표였다.
  • 봉은사에는 경찰이나 국정원 직원 아무도 없었고, 유장호가 개인적으로 부른 젊은 사설 경호원이었다. 유장호의 경호원 역할을 했던 동생이, 유장호가 자리를 지적하고 그것을 파오라고 했다.
  • 내가 “문건 존재는 알릴지 언정, 내용은 유족이 결정할 문제”라며 “어떤 유혹이 있더라도 유족 동의없이 문건 내용을 세상에 알리는 것은 죄악이다. 내가 문건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해도 이야기하지마라”라고 했기 때문에 유장호가 원본을 특정 장소, 봉은사에 묻어둔 것일 뿐이다.

이 여섯 까지가 김대오가 쏟아 놓은 글들에서 내가 추려낸 골자이다. 이렇게 추려놓고 보니 하나의 시각, 분명한 프레임이 드러난다. 장자연 사건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 속에 들어 있는 여러 가지 요소들 중 여기서 나는 다음 세 가지 핵심적 요소들이 가져오는 효과와 문제점에 대해 하나하나 분석해 보고자 한다: (1)김종승을 장자연 죽음의 핵심 책임자로 지목하여 장자연 사건을 사기업 수준으로 축소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 사기업 위에서 작용하는 가해권력을 가리는, 가해권력에 대한 소극적 방어의 시각  (2)여성 연예인 윤지오에 대해 비하하고 모독하면서 음해하는 성차별주의적이고 성폭력적인 시각 (3)리스트, 조선일보, 국정원을 윤지오 사기증언의 산물로 그림으로써 가해권력을 적극적으로 방어하는 시각. 이 세 가지는 성폭력적 성격의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를 떠받치는 기둥들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