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연 리스트” 논란과 그 성격에 대해(1)

현재 “장자연 리스트”가 경찰이나 검찰의 수중에 없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장자연 문건 사본을 보도한 kbs도 리스트를 입수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장자연 문건의 실재를 처음 알렸고 그 “원본”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김대오 기자가 “목숨을 걸고 리스트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김대오 기자가 리스트를 보지 못했다고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하지만 리스트를 본 두 사람이 있다. 그것은 윤지오 배우와 전 호야엔터테인먼트 대표 유장호다. 윤지오배우가 리스트를 보았음을 입증하는 자료들은 다음 네가지다.

1)십 수 차례에 걸친 수사기관 및 진상조사단 증언들과 무엇보다도 대중 앞에 공개적으로 내놓은 증언인 <13번째 증언>의 11장: 여기서 윤지오 배우는 봉은사에서 유장호 대표로부터 문건의 사본을 넘겨받아 보았고 봉은사 땅밑에서 꺼내온 원본을 장자연 씨의 친언니가 읽는 것을 함께 보았고 소각하는 것도 보았다고 말한다.    

2)유장호의 수사기관 초기 진술: 여기에서 유장호는 문건을 윤지오에게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3)고 장자연 배우의 오빠의 진술: 이 진술에서 장자연의 오빠는 문건의 원본과 사본을 보고 태운 현장에 윤지오가 있었다고 말한다 

4)유장호와 윤지오 사이의 통화 녹취록: 이 통화기록에서 유장호는 경찰에 자료를 넘길 때 장자연이 술접대한 사람 ‘목록’은 넘기지 않을 셈이라고 윤지오에게 말한다.

등이다. 

1년 넘게 장자연 사건을 취재해 왔다는 kbs 이지윤 기자는 ‘‘장자연 리스트’는 실재했나? 기록으로 살펴본 ‘장자연 리스트’의 모든 것”(2019년 4월 24일)에서 이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이런 모든 정황을 종합해보면 윤(지오) 씨가 최소한 장자연 문건을 봤다고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일 겁니다.”(https://news.kbs.co.kr/news/view.do?ncd=4187063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수민-김대오-박훈 그룹은 우파 유튜브 채널인 가로세로연구소의 강용석-김용호-김세의와 보조를 맞추면서 “장자연 리스트는 없었다.”고 주장해 왔고 이것은 제도 언론들을 통해 무차별적으로 보도됨으로써 강력한 여론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리스트는 없었다는 이들의 주장은 “윤지오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거짓말하고 있다”는 인신공격 주장으로 발전되었고 다시 그것은 “윤지오는 돈벌이를 목적으로 증언자로 나섰다”는 음해와 모욕 주장으로까지 발전되었다. 그 주장이 주장을 넘어 행동으로까지 발전한 것이 박훈 변호사의 윤지오에 대한 고소와 고발이다. 이것의 정치적 효과가 윤지오 증언자의 증언 자격을 박탈하는 것이고 그 증언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며 재수사의 사유를 제거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가해 권력자들을 보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이들이 장자연 리스트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핵심적 근거는 무엇인가?

1)술자리에서 김수민이 윤지오로부터 들었다는 말: ’윤지오가 리스트를 봉은사가 아니라 수사기관에서 봤다고 했다’.

2)김대오 기자의 증언: 유장호를 만나 입수한 문건에는 리스트가 없었다. 

2)부터 살펴보자. 김대오 기자가 장자연 리스트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유장호의 위 통화기록을 통해 간단히 해석할 수 있다. 유장호가 보여준 문건에서 김대오 기자가 “보지 못했으니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보지 못한 것”은 “없는 것”과 다르다. 우리가 공기 중의 세균을 보지 못한다고 해서 공기 중에 세균이 없는 것은 아니다. 통화기록을 보면, 유장호는 경찰에게 ‘목록’(리스트)은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 기자인 김대오에게 유장호가 ‘목록’(리스트)을 보여주지 않은 것은 한국 사회에서 경찰과 기자의 사회적 위치와 역할을 고려하면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해된다. 그러므로 김대오 기자가 “(이름이) 일목요연하게 (나열된) 리스트는 원본 속에서 없었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놓는데 이것은 목숨을 너무 값싸게 내놓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이라도 자신의 착오와 지나침에 대해 시민들께 사과하고 “내가 본 문건에서 나는 리스트를 본 적이 없다.”고 있는 그대로 발언을 정정하는 것이 신상에 좋으리라 본다.(계속)

보론: <윤지오의 증언을 바라보는 ‘가족주의’와 ‘순수주의’ 시각에 대하여>의 쟁점들

::다중지성의 정원 페이스북에 공유된 나의 글 <윤지오의 증언을 바라보는 ‘가족주의’와 ‘순수주의’ 시각에 대하여> 에 대한 댓글과 그에 대한 나의 답변이다. 누가 말했는가는 중요하지 않으므로 여기에서는 댓글자의 아이디 대신 Response의 R로 대체하고 부분적으로 문장을 수정했다. 댓글을 달아준 분께 감사드린다.(Amelano Joe)

R1: 2009년 당시 윤지오 증언 때문에 장자연 사건의 가해자들이 처벌 받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윤지오씨가 제대로 된 증언자라면 사과는 하고 시작했어야 했지요. 무슨 사과를 했나요? 장자연씨 죽음의 진실을 알리고 싶다기 보다 본인 이름을 알리고 싶었던 사람이었다고 봅니다. 고 장자연사건의 목격자이자 증언자라는 분이, 하루에 한시간씩만 자고 목숨에 위협을 느낀다는 분이..!인스타라이브로 협찬 화장품 파는거보고 경악.

R1에 답합니다.

1. 장자연 사건 재조사는 권력형 성폭력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누가 범죄자인가, 어떻게 해야 이러한 범죄를 방지할 수 있는가를 살피기 위한 조사이지 증언자 윤지오가 정직한 사람인가 부정직한 사람인가, 선한 사람인가 악한 사람인가 등 그의 인격에 대한 조사가 아닙니다.

2. 윤지오 배우가 개인 방송(인스타라이브)에서 협찬화장품 파는 것(‘티글’)에 ‘경악’하신다면 JTBC가 자동차를 파는 것(‘대들보’)을 보실 때는 어떤 느낌이신지요? 

3. 윤지오 배우의 증언 때문에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이 미미했고 유가족이 보잘 것 없는 피해보상만 받았다는 박훈 변호사의 논변은 사법판결이 증언 하나에 좌우된다고 보는 소박한 생각이라고 봅니다. 특히 장자연 사건처럼 권력자들이 판결의 향방을 뒤흔드는 정치적 사건에서, 만약 윤지오가 다르게 증언했으면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엄중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판결의 책임을 이제 갓 스물두살의 단역배우인 증인 여성에게 뒤집어 씌우고 성폭력체제와 그 권력의 전략전술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자학적 사고방법이라고 봅니다. 윤지오 배우가 강요를 인정했다면 어떤 방법으로도 가해자를 면책시킬 구실을 만들어 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지난 10년간 이 사건을 둘러싼 사법사를 고려할 때 정황상 더 합리적인 추론일 것이라고 봅니다.

4. 그런데 윤지오 배우는 <13번째 증언>에서도 자신의 경우에 강요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윤지오 배우가 당시 (아니 어쩌면 지금도) 강요를 직접적 강요나 폭력으로만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장자연 배우와 자신을 옥죄이고 있는 구조적/계약적 폭력과 강요를 ‘강요’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현재 한국의 사법체제도 이 구조적 강요를 ‘강요의 범죄’(강요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바로 이 구조적 강요의 포로입니다. 2009년 재판과 관련하여 한 가지 고려사항을 더 추가한다면 윤지오 씨는 장자연 씨의 죽음 이후에도 살아야 했고 또 배우로서 살고자 했으며 연예계는 바로 그 가해자들이 쥐고 흔드는 권력무대였다는 점입니다. 만약 R1 님이 윤지오 씨와 동일한 경우의 증인으로 법정에 선다면 어떻게 증언하시겠는지요? 이 두가지 사항을 고려하고서도 윤지오 씨가 사과를 해야 할까요?

5. “장자연씨 죽음의 진실을 알리고 싶다기 보다 본인 이름을 알리고 싶었던 사람이었다고 봅니다.”는 R1 님의 주장은 첫째 항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번 사태의 본질과 무관한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으로 화살을 윤지오 배우에게 돌릴 때 성폭력의 당사자들과 성폭력 체제는 쾌재를 부를 것입니다. 윤지오 배우를 증언자로 한국으로 부른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들, 즉 촛불국민입니다. 증언자가 선인, 영웅, 투사여야 할 이유가 있는지요? 증인은 사실에 대한 증언을 하는 사람이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대한 증언을 해줄 사람이라면 평소에 거짓말쟁이거나 사기꾼이거나 도둑이거나 강도거나 심지어 살인자라 할지라도 우리들에게는 소중하므로 그가 ‘사실’에 대한 증언만을 해주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왜 그 증언자가 그 ‘증언’ 때문에 여론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요? 게다가 촛불국민의 여망을 받들어 자신이 다칠 위험을 무릅쓰고 국민이 필요로 하는 사실을 증언해 준다면 (그가 증언 외의 삶에서 무엇을 하건) 그 증언만으로 국민들이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요?   

R2: 진정성을 갖고 재수사를 준비하는 거였다면, 그때의 판결문으로 공격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알수 있었을테지요. 사과를 하고 출발하는 것이 옳았을 것 같고. 순간순간의 거짓말이라든지 태도논란, 돈이 먼저인듯한 행동들은 결국 고인이 된 장자연씨를 이용한 자기 정치일 뿐. 재수사와는 거리가 멀어보여요. 책을 내기 전에 고인 가족들에 최소한의 협의는 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절차는 생각보다 중요한 것이니까요.. 재수사에 방아쇠를 당긴 사람들이 윤지오에게 놀아난 꼴처럼 되어버린 상황이 황망하고 당황스러워서.. 더욱 화가 나네요.

R2에 답합니다.

1. 윤지오 씨는 “진정성을 갖고 재수사를 준비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왔습니다. 물론 한국 정부의 그 요청은 촛불국민의 재수사 요구에 수동적으로 응한 것이구요. 윤지오씨는 한국 정부의 증언 요청에 ‘증언이 자신을 더 위험하게 하므로 오고 싶지 않다’는 거절 의사를 표했으나 거듭된 요청에 부득이 오게 된 것입니다. 증언자 윤지오 씨에게 진정성의 자격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며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만약 윤지오 씨에게 진정성이 없다고 느껴 환멸을 느끼신다면, 그것은 윤지오 씨의 책임이 아니라 환멸을 경험하는 R2 님 자신의 문제일 것입니다.

2.윤지오 씨의 말 중에 거짓말로 ‘확인’된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많은 사람들이 윤지오 씨의 증언을 이미 거짓으로 단정하고 있는데, 그 증언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조사와 수사를 통해 확인해야 할 문제입니다. ‘윤지오의 증언은 거짓’이라는 말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선동이지 진실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윤지오 씨의 증언이 유효하다는 것은 윤지오 씨 논란이 터진 이후에도 과거사진상조사단과 과거사조사위원회에서도 확인해준 사실입니다.

3.윤지오 씨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윤지오 씨의 그 사나와 보이는 표정과 기자들 앞에서의 오만한 태도가 역겹다고 말합니다. 나는 윤지오 씨가 남성 기자들 앞에서 취한 그 ‘오만’해 보이고 ‘사나와’ 보이는 표정과 태도야 말로 권력에 굴종하는 팬시 여성상과는 다른 새로운 여성상을 보여준 백미라고 생각합니다.

4.돈이 먼저인 듯한 행동들이 있었던가요? 인세 12%? <13번째 증언> 같은 이슈파이팅하면서 많은 판매부수가 예상되는 도서에 대해서는 결코 높은 인세가 아닙니다.(참고로 나는 출판인입니다.) 후원계좌, 해외펀딩? 무엇이 돈이 먼저인 듯한 행동인지요? 답해 주신다면 그에 대해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5.윤지오씨가 가족들과 협의했는지 않았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김수민 작가가 <증언> 출판에 대한 가족들의 반대가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정보의 출처가 윤지오 씨라면 협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봐야 하겠지요. 협의는 반드시 동의를 포함하지는 않습니다.) 즉 유가족들의 정확한 뜻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김수민 작가가 가족의 뜻의 ‘대의자’로 자임하고 있을 뿐입니다. 혹시 가족의 입장 표명이 있다면 알려주십시요. 경청하겠습니다.

6.재수사에 방아쇠를 당긴 사람들은 촛불국민과 미투운동입니다. 윤지오 씨는 이들을 뒤흔들 수 있을 만큼 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촛불국민과 미투운동의 재수사 요구를 뒤흔들고 있는 것은 윤지오 씨가 아니라 윤지오 씨의 인격에 대한 공격을 통해 그의 증언을 무력화시키고 재수사를 방해하고 있는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와 그 파수꾼들입니다. 

7.‘황망’과 ‘당황’이야말로 그들이 우리들 속에 불러일으키려는 바로 그 심리적 효과입니다. ‘화’를 윤지오 씨가 아니라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와 그 작전세력에게 돌려야 할 때입니다.

권력형 성폭력 사건(장자연의 경우)의 현상태와 문제에 대한 메모

1.

‘장자연 사건’이라고 불리는 사건은 언론계 재벌 정치권 사법부 전반에 걸쳐 있는 권력의 여성 착취가 본질이다.

착취의 방식은 특정한 기획사/연예기업(의 불법 탈법 사법적 실리)을 봐주는 조건으로 성상납을 받는 것.

김학의 사건, 승리-정준영 사건 등에서 확인되듯이 이것은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지만 다른 곳보다도 연예산업에 특히 집중되어 있고 연예노동자가 주요 타겟이 된다.

연예산업의 기획사들은 성상납을 위해 자신에게 소속된 연예인들을 성노예로 만든다.

위약금이 그 족쇄다.

윤지오는 위약금을 내고 그 족쇄에서 풀려난 연예노동자.

장자연은 풀려나지 못했던 연예노동자.

2.

지난 10년간 권력은 검찰과 경찰의 수사가 혐의없음으로 나오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즉 법률적으로 권력의 여성착취가 부재하는 것으로 나타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증언과 증거들, 그리고 상식은 권력의 여성착취가 실재했고 또 실재함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모든 증언, 증거들의 진실규명력은 권력 앞에서 무력했다.

3.

윤지오는 장자연이 성추행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실명, 실면으로 진술했다.

장자연 문건에 쓰인 이름들을 보았다고 했다.

<13번째 증언>으로 그 진술을 공론화했다.

이것이 성폭력을 다시 쟁점화한 “실명 실면 증언의 힘”이다.

수사와 처벌을 재론할 수 있는 사회적 힘이다.

이 힘으로 고발뉴스 뉴스룸 뉴스공장 엠비시 CBS 등을 움직여 성폭력의 실재를 사회쟁점화했다.

과거사조사위원회를 움직였고 국회의원을 움직였다.

청와대가 움직일 수 있을까가 관건이었다.

4.

이런 상황에서 김수민 작가는 윤지오 증언의 진실성에 대한 의심을 제기했다.

증언이 순수하지 않고 개인 영달(돈벌이, 출세)이 목적이라는 것이다.

유가족을 비난했다는 것이다.

장자연 문건 원본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장자연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증언을 할만큼 장자연과 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폭력 문제를 재점화한 “실명 실면 증언의 힘”을 뺌으로써 권력형 성폭력의 실재를 의심하고 궁극적으로 사라지게 만드는 휘발장치다.

장자연은 다시 단순한 우울증의 희생자로 규정될 위기에 처해있다.

실제로 윤지오의 420 특별수사단 청와대 청원은 무력화되고 있다.

이것은 다시 성착취 권력이 힘을 회복하고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다.

5.

지금까지 확인한 자료를 기초로 김수민 작가의 문제 제기에 대해 판단하건대 거기에 다시 거꾸로 질문할 수밖에 없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고 느낀다.

-증언은 영리하면 안 되고 순수해야 하는가? 권력과 맞서는 증언일 수록 영리해야 하지 않는가?

-장자연의 부모가 장자연 사망 전에 이미 사망한 상태에서 장자연의 유가족은 누구인가? 오빠를 비롯한 유가족이 오직 장자연만을 위하는 “순수한” 상태에 있다고 전제할 수 있는가? 때로는 “유가족주의”가 진실규명에 장애물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책을 판매해서 인세를 받고 증언자 보호단체를 만들어 모금을 하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인가? 이것은 증언의 힘을 높이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일 수도 있지 않은가? 증언에는 보상받을 수 없는 많은 비용이 들지 않는가? 그것이 한국 사회에서 증언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윤지오의 증언내용이 실재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있는가? 그것을 거짓으로 단정할 증거가 있는가?

-왜 증언의 객관적 내용을 문제삼지 않고 증언의 의도 등 주관적 정황을 문제삼는가?

-윤지오의 증언 동기를 김수민 작가는 의심한다. 같은 의심은 김수민 작가의 반론동기에도 주어질 수 있다. 김수민 작가는 지금 왜 윤지오의 진술에 대한 의심을 제기하는가?

-윤지오 진술에 대한 의심과 신빙성 문제를 쟁점화함으로써 장자연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객관적 사태에 대한 수사와 진상규명은 회복불가능한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 분명한데 이에 대한 김수민 작가의 생각과 입장은 무엇인가?

이른바 ‘엘리트’ 조병구 판사의 실체

이른바 ‘엘리트’ 조병구 판사의 실체

“법리에 밝고,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기획 감각을 두루 인정받아 사법정책과 재판에 대한 공식적인 해설 등을 도맡는 자리인 법원행정처 공보관을 역임한 ‘엘리트’ 판사”(한겨레, 임재우 기자)

이번 재판에 비추어 이 기사를 유물론적으로 재해석해 보면 이런 뜻으로 읽힌다: “한국 법의 성차별 논리를 철저히 체득하여 가부장주의 권력자들과 유능하게 커뮤니케이션하면서 이들을 위해 미투 운동과 같은 아래로부터의 여성 저항 운동을 척결하는 사법실천을 단행하는 자. 즉 기성의 자본권력에 의해 전쟁도구로 선발된(el) 자(ite).”

이른바 ‘시정잡배’

시정잡배는 엘리트를 자임하는 사람들이 “사람이 많이 모이는 시장이나 우물터에서 우글거리는 온갖 무리”, 즉 다중을 비하하기 위해 만들어낸 말이다. 임태훈의 생각과는 달리 시정잡배는 김성태와 같은 종류의 편견으로 똘똘 뭉쳐 있지 않다. 시장이나 우물터는 다양한 정보가 소통되는 공간이지 특정한 편견을 유통시키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계의 보편적 도입이 노동과 착취체제에 가져오는 효과에 대해

기계의 보편적 도입이 노동과 착취체제에 가져오는 효과에 대해

1)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 기계의 보편적 도입은 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게 만든다. 노동은 잉여로 되며 노동가치는 더 이상 의미를 갖지 않는다.
2)고전 맑스주의의 관점 : 기계의 보편적 도입은 노동의 지역만을 이동시킬 뿐(제3세계로!) 노동에 대한 필요를 감소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노동은 확장되고 자본의 착취는 여전히 노동에 대한 착취로 남고 기계는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
3)자율주의 맑스주의의 관점: 기계의 보편적 도입은 직접적 고용의 필요를 감소시키면서 삶 전체를 노동시간으로 편입시킨다. 자본의 착취는 기계에 의해 매개되는 삶-공통장 전체에 대한 수탈로 바뀐다.

조지 카펜치스의 모색은 2)와 3)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그는 노동의 일반화, 확장, 다양화라는 테제를 받아들이면서도 기계의 보편적 도입에 대해 말할 때는 기계와 변화된 노동세계의 관계를 고찰하기보다 고전적 맑스주의처럼 제1세계에서 공장노동의 감소에 비례하는 제3세계에서의 땀공장의 증가, 즉 고용노동의 유지 혹은 확장에 대해 말한다.

댓글전쟁

거리투쟁은 소강하지만 댓글투쟁이 격화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댓글정치는 논리정치가라기보다 정동정치다.
댓글전쟁은 계급전쟁을 직간접적으로 투영한다.
이 정동전쟁의 첨병이 점차 비정동적 로봇으로 되고 있다는 점, 공감과 비공감이 비공감적 로봇에 대한 것으로 되고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