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재수사는 왜 포기되었는가?


기생충 학자 서민의 종합거짓말세트(2): 재수사 포기 책임을 윤지오에게 돌리는 ‘적반하장’

‘실체’가 있었던 장자연 리스트를 미확인의 소문으로 만들면서 서민이 자신의 글 ‘기자와 기레기’에서 주장하고 싶어한 것은 ‘윤지오 때문에 재수사 길이 막혔다’는 것이다. 이런 수법으로 그는 일차적으로 자신이 마치 재수사를 바라고 있었던 것 같은 이미지를 만든다. 이것은 ‘윤지오 죽이기'(여기에는 4월 30일 서민의 글 ‘충격 예언, 제2의 윤지오가 나온다‘도 한 몫을 한다.)가 윤지오 진술 신빙성을 떨어뜨려 가해자를 보호하는 전술이라는 비판을 뭉개면서 가해자를 보호한 것은 오히려 윤지오라는 책임 넘기기 수법이다. 윤지오에 대한 인신공격이 2차 가해였다면 서민의 이 주장은 정확히 3차 가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서민의 이런 주장을 떠받치고 있는 받침돌들은 지금까지 박훈, 김대오, 김수민, 그리고 이른바 ‘기레기’들에 의해 유포되어 여론화되고 있는 무수한 거짓말들이고 서민이 이것들을 한 꾸러미의 거짓말종합세트로 엮어짜고 있기 때문에 논리적 방식으로 다루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재수사 길이 왜 막히게 되었는가에 관한 나의 생각을 먼저 제시하고 그 뒤에 서민의 글로 다시 돌아오기로 하겠다.

2009년 발생한 장자연 사건과 관련하여 공소시효가 사라진 사건은 수사할 수 없으므로 재수사의 가능성은 두 가지 점에서 주어지고 있었다. 하나는 공소시효가 15년인 성폭행(특수강간, 강간치상)이고 또 하나는 공소시효가 25년인 살인이다. 

먼저 성폭행 문제를 다루어 보자. 이 문제와 관련해 윤지오는 과거사진상조사단, 고발뉴스, 다스뵈이다 등에서 수행한 증언에서 장자연이 성폭행 당했을 가능성에 대해 진술했다. 그리고 이것은 진상조사단의 비공개심문에서, 유장호가, 장자연이 성폭행당했다는 구절을 문건에 썼지만 자신이 지우게 했다고 말한 것(이후 번복)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드라마 감독 정세호도 2011년 8월 1일자 사실확인서에서 이미숙이 전화로 “장자연이 쓴 A4 용지에 ‘술에 약을 탔다는 얘기가 있다’고 말했다”고 진술했고 2019년 진상조사단에서도 동일한 내용을 진술했다. 윤지오 외에 유장호, 장세호 등 적어도 세 사람이 성폭행에 대한 기록, 전언, 경험적 추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에 과거사조사위원회의 발표문 중 해당 구절을 인용해 보자.

장자연의 성폭행 피해 의혹 

❍ 조사단의 조사과정에서 장자연이 일시, 장소를 알 수 없는 술접대 자리에서 누군가가 몰래 약을 탄 맥주를 반 컵가량 마신 후 마치 마약에 취하거나 술에 만취한 사람처럼 인사불성이 된 상태에서 누군가에 의해 성폭행을 당했을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음 

– 장자연이 성폭행을 당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근거 자료는, 

① 장자연이 술자리에서 맥주 한 잔을 채 마시지 않았는데도 마치 약에 취한 사람처럼 인사불성이 된 상태가 된 것을 목격했다는 윤○○의 조사단 진술 

②‘장자연이 처음에 작성한 문서에 심한 성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을 적었는데 내가 지우라고 했다’는 유○○의 조사단 면담 전 진술. 그러나 유○○는 그 후 조사단과의 면담에서는 이러한 말을 한 사실이 없고 장자연이 하소연하듯이 처음에 그런 비슷한 말을 하기는 하였는데, 장자연에게 되묻지도 않았고, 장자연이‘당했다’고 말한 것도 아니었다”고 진술하였음 

③ 드라마 감독 정○○가 작성한 2011. 8. 1.자 사실확인서(김종승의 배우 이△△을 상대로 제기한 민사소송에서 김종승 측 증거로 제출된 것)에 배우 이△△이 전화로 “장자연이 쓴 A4 용지에 ‘술에 약을 탔다는 얘기가 있다’고 말했다”고 기재된 부분 및 이△△으로부터“물에 약을 탔다고 들었다”는 정○○의 조사단 진술이 있음

여기까지가 진상조사단의 보고서 중에서 성폭행 혐의를 인정할 수 있는 내용을 간추린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그것을 부정하는 내용에 대한 서술이다. 역시 그대로 인용해 보자.

-그러나 배우 이△△은 정○○에게 위와 같은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진술하였고, 매니저 등은 장자연의 성폭행 피해 여부에 대해 모른다고 진술하였으며, 유족은 문건에 성폭행 피해에 관하여 적힌 것이 없었다고 진술하였음 

❍ 유○○의 최초 진술 및 정○○, 윤○○의 진술을 종합하면, 장자연이 성폭행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될 수 있으나, 이들의 진술만으로는 구체적인 가해자, 범행 일시, 장소, 방법 등을 알 수 없으므로 수사를 개시할 수 있는 객관적 혐의가 확인되었다고 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음

과거사조사위원회는 “구체적인 가해자, 범행 일시, 장소, 방법 등을 알 수 없으므로” 수사를 개시할 수 없다고 말한다. 수사라는 것이 바로 “ 구체적인 가해자, 범행일시, 장소, 방법 등을” 밝혀내고 그것을 국민과 법원에게 알려주는 행위이지 않은가? 수사를 개시하지 않고 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면 수사를 할 필요가 대체 어디에 있는가? 바로 체포하여 재판하고 처벌하면 되는 것 아닌가? 이처럼 완전히 본말이 전도된 논리로 수사 개시를 회피하는 것 외에, 그 회피를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사조사위원회는 성폭행 혐의의 실체를 모호하게 만드는 방법도 사용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디스패치>(https://www.dispatch.co.kr/2012097)에 의하면 정세호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장자연의 문건 내용을 이야기하며 김종승을 만나 ‘야단쳐 달라’고 말한 사람은 이미숙이다. 그는 장자연 ‘자살원조’ 혹은 ‘자살방조’ 혐의가 있는 것으로 분당경찰서에 의해 수사보고 되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분당경찰서는 2009년에 “연예인 장자연의 … 자살원인에 연예인 이미숙, 송선미, 서세원이 관련되었다는 정황이 있어 다음과 같이 수사보고 합니다”라고 쓴 바 있다(<디스패치> 같은 호). 그리고 유장호는 당시 경제력(“신용불량”)이나 경험(“연예기획계통에 경험이 일천한 자”)에 비추어 호야의 실제 사장이 아니라 이미숙의 대리인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해석이다. 그리고 장자연은 이들의 요구에 의해 사례 증언조서(문건)와 리스트 증언조서(리스트)를 작성하게 되었음이 거의 분명하다. 

그런데 과거사조사위원회는 정황상 그 진술가치가 훨씬 더 높은 정세호, 윤지오의 진술이나 유장호의 비공개면담 진술이 아니라 일선 수사기관에 의해 자살원조 또는 방조의 혐의를 받았던, 즉 그 진술가치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이미숙의 부인(否認) 혹은 그의 대리인 유장호의 번복을 근거로 수사 개시를 포기한다. 과거사조사위원회의 심의결과에서는 정세호의 진술내용이 윤지오의 경험적 추정을 뒷받침해주고 있다는 사실은 무시된다. 게다가 장자연의 소속사 더콘텐츠의 대표이자 마약과 성추행으로 수배되었던 김종승이 장자연의 지인언니에게 “내가 니 동생(장자연)하고 약했다”(장자연의 지인 이00의 진술조서)고 말한 대목은 근거로 인용조차 되지 않는다. 수사 개시를 포기하는 이유를 과거사조사위원회는 이미숙이 정세호에게 한 말을 부인하고 유장호가 자신이 한 말을 번복했다는 데에서 찾는다. 이들이야말로 재수사가 이루어진다면 가장 큰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사람들, 그러므로 재수사를 포기시키는데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인데도 말이다. 재수사 개시로 수사를 해야 할 사람들의 말을 근거로 수사 개시를 회피한 것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과거사조사위원회(검찰)가 이미숙(과 그 배후)을 두려워했거나 아니면 검찰 자신이 재수사를 두려워했다는 것 말고 다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가?

이처럼 공소시효 15년의 성폭행 관련 재수사가 포기된 이유는 윤지오에게 있었던 것이 결코 아니다. 윤지오, 정세호, 유장호(비공개면담진술)가 재수사의 근거를 명확하게 제시했지만, 이미숙이 정세호에게 한 말을 부인하고 유장호가 자신이 한 말을 번복함으로써, 그리고 과거사조사위원회가 진상조사단의 다수의견을 무시하고 검찰측 소수의견을 심의근거로 인용함으로써 재수사 권고는 폭력적으로 포기되었다.

그런데 서민은 이런 사실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검사들은 성폭행 의혹 부분을 수사에 못 넘기게 하려고 정말 총력전을 했다. … 조직적 차원에서 반대가 있지 않았나 느꼈다.”는 총괄단장 김영희의 말을 인용한 후 “어이가 없다”고 비난한다. 대통령이 명운을 걸고 진상을 규명하라고 한 마당에 무슨 외압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말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검찰이 대통령 말을 듣는 조직이라면 지금 정권에서 청와대가 ‘공수처가 필요하니 설치해 달라’고 왜 국회에 신신당부를 하고 있겠는가? 어처구니 없는 현실감각이다. 게다가 재심 변호사 박준영이 김영희의 윤지오 옹호 여론몰이 때문에 “항의하며 조사단”을 탈퇴했다는 거짓말도 거침없이 한다. 박준영은 형제복지원과 김학의 사건의 진상조사단 위원이었지 장자연 사건의 위원이 아니었다. 서민은 윤지오에 대한 3차가해(책임전가)를 위해 현실을 외면하면서 거짓말에 거짓말을 자꾸 이어 붙인다. 엄청난 공부, 팩트, 통찰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박훈의 그 변론 추임새가 자꾸 낯뜨거워진다. 

기생충 학자 서민의 종합거짓말세트(1): ‘기자와 기레기’의 첫 문장에 대해


변호사 박훈이 페이스북 글에서 강력 추천하고 있어서 읽게 된 게 서민의 ‘기자와 기레기’라는 글이다. 먼저 박훈의 추천사부터 다시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서민은 나보다 후배이거나 최대한 같은 시대 동년배 학생 시절을 보냈다고 봤다. 그런데 난 이 친구가 쓰는 가벼운 글들을 아주 싫어했다. 패러독스의 글은 정확히 표적을 겨누워야 하는데 이 작자의 글은 가벼움이 패러독스라 생각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뭔가에 대해 굉장히 진지한 글을 썼다. 그 전에 한 번 쓸 때는 우연히 그런갑다했는데 이 번에 쓴 글을 보면서 이 사람이 엄청난 공부를 하면서 장자연과 윤지오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썼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대단히 정확한 팩트를 쓰고있다. 저런 것은 아무나 쓸 수가 없다. 조사단의 김영희 변호사 같은 아마추어들은 잘 새겨 듣기를 바란다. 난 저 서민과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데. “기생충”이 인간과 같았던 모양이다. 대단한 통찰력이다.”(http://bit.ly/311sder)

박훈에 따르면 이제 내가 살펴보게 될 서민의 글은 “엄청난 공부”를 하면서 쓴 “진지한 글”, “정확한 팩트”, “아무나 쓸 수 없는 글”, “대단한 통찰력”을 담은 글이다. 한 편의 칼럼에 붙여진 칭찬으로서는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주례사라도 이 정도 이상으로 추켜세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 추겨세우는 솜씨가 실로 대단하다.

그런데 대체 서민이 어떤 글을 썼길래 박훈이 이토록 추겨세우는 것일까? 찾아보니 ‘기자와 기레기'(http://bitly.kr/Vxag6F)라는 제목의 글이다.

그런데 그 첫 문장부터가 심상치 않다. “지난 20일, 검찰 과거사위원회는 소위 ‘장자연 리스트’의 실체를 확인하지 못했다며 재수사를 권고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정말 그날 과거사조사위원회의 발표가 그랬나?! 여기에 발표문 해당 구절 전체가 있다.

알려진문건외추가문건및이른바 ‘리스트’의존재여부 

❍ 현재 알려진 장자연 문건은 장자연이 작성한 문건 중 최종적인 문건이 아니라 최종 문건에 이르는 과정에서 작성된 문건임. 장자연이 작성한 문건의 행방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유○○인데, 유○○가 장자연이 작성한 문건을 모두 태워 그 문건이 없다고 하였고, 그외에문건을 추가로 확인할 방법이 없었음 

❍ 문건 외에 성접대 요구자의 명단이 기재되었다는 ‘리스트’가 존재하였다는 의혹을 조사하였으나 서술문형태의문건외에사람이름만나열된 ‘리스트’가별도로있었는지, 그 ‘리스트’가있었다면, ‘리스트’에기재된사람들이장자연과어떤관계에있는지에대해당시문건을실제로본사람들사이에서도진술이엇갈리고있음 

– 이 사건 경찰수사에서 유○○는 2009. 3. 12. 봉은사에서 장자연의 유족, 윤○○를만나 7장으로 된 문건 원본(최종적으로 완성된 문건 4장 + 장자연이 추가로 건네준 편지 형식의 3장)과 사본을 모두 유족에게 전달하여 그 자리에서 장□□이모두소각하였고, 편지 형식의 3장에는 김종승과싸우면서조심해야할사람들의 ‘명단’이 기재되어 있었다고 진술하였음. 조사단과의면담에서는 장자연으로부터 받은 추가 편지글은 “언론에서 말하는 리스트 이런 건 아니었고, 말그대로편지글같은거였다”라고 진술하였음 

– 장자연 사망 직후인 2009. 3. 12. 유○○와윤○○의통화내용을녹음한녹취록중유○○가 ‘목록’이있다는취지로발언한 바 있음 

– 윤○○는 2010. 6. 25. 법정에서“어떤장에는성함만기재되어있으면서어떠한언론사에누구, 어디무슨사의누구라는식으로기재되어있는것도있었다”고증언한바있고, 조사단과의 1차면담에서는 장자연 문건 중 ‘성상납을 강요받았습니다’라는 제목 아래 사람 이름과직함이나열된문건이 2장에걸쳐있었다고진술하였음. 그러나 이후 사람이름과직함이나열된문건에는‘성상납을 강요받았습니다’라는 내용이 없었다고 종전 진술을 번복하였음 

유족장□□경찰조사에서 마치 사람 이름이 나열된 문건이 있는 것처럼 진술한 바 있으나, 조사단과의전화통화에서는사람이름만나열된소위리스트는없었고모두서술식으로쓰여있었는데, 경찰 조사를 받을 때는 어떤 이름이 있었냐는 질문에 대답하였을 뿐 그게 이름만 있는 것인지 서술식이었는지 구별하여 질문을 받은 게 아니었다”고 진술하여 경찰 수사 당시 진술의 의미를 설명하였음 

당시문건을보았다는 기자김△△등은‘목록’형태의문건은없었다고일관되게진술하고있음 

❍ 이와 관련하여 조사단은 수사기록에 편철된 문건외에 피해사실과관련하여작성된것으로보이는‘명단’이기재된문건, 즉 ‘리스트’가있었을것이라는의견을제시하였음(http://bit.ly/2wsmNLy)

 서민이 “엄청난 공부”를 하고 쓴 글이라고 추천한 만큼 우리도 그에 상응하는 공부노력을 기울여 살펴 보자. 여기에 네 사람이 등장한다. 유장호, 윤지오, 김대오, 그리고 오빠 장00. 이 항목이 다루는 문제가 4장의 문건(나의 명명으로는 ‘사례 증언조서’) 외에 3장의 추가문건(나의 명명으로는 ‘리스트 증언조서’)이 있었는가 없었는가이다. 

위 네 사람 중에서 ‘리스트 증언조서’가 없었다고 말한 사람은 누구인가? 김대오뿐이다. 그런데 앞서 내가 ‘김대오의 거짓말’과 ‘네 가지 법정과 김대오는 어디로?’에서 논했듯이 그는 장자연 리스트에 관한 한 거짓말쟁이다. 그는, 10년 전 진술조서에서 장자연의 문건 중 저 유명한 ‘나는 힘없는 신인배우입니다.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습니다’가 포함된 문건(‘사례 증언조서’) 마지막 구절 외에는 ‘아무 것도 본 바가 없’고 그것의 내용에 대해서는 KBS에서 보도된 문건을 통해 대충 알았을 뿐이라고 진술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위 구절 외에는 아무 것도 본 적이 없는 그가 ‘목록’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대해 “진술”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며 게다가 그의 진술은 “일관되게”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혀 “일관”되지 않다. (이를 보면 과거사위원회가 김대오의 정체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거나 그의 정체를 감싸주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지만 여기서는 논하지 않는다.) 10년 전의 진술에 비추어 보면, 그가 지금 장자연 사건과 관련하여 하고 있는 말들은 어떤 신빙성도 없는 거짓말일 뿐이다. 

나머지 세 사람은 어떻게 말하는가? 참으로 일관되게 4장 외의 ‘추가 문건’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것이 편지글 형식으로 된 3장이었음에 대해서도 세 사람은 대개 일치한다. 오빠 장00은 서술글이라고 표현하는데 편지글도 서술글이므로 편지글 형식으로된 3장의 추가문건이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세 사람의 진술의 교차검증을 통해 확인된다. 그러므로 4장 이외에 지금은 사라진 3장의 추가문건이 있었다는 점은 결코 부인될 수 없다.

이제 그 추가문건에 리스트, 목록이 포함되어 있었는가 없었는가, 라는 문제가 남는다. 이 문제에서는 시간이 사람들의 진술 방향을 갈라놓았다. 우선 일관된 사람이 있다. 윤지오가 그이다. 2009년 이후 윤지오는 일관되게 명단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가 2009년 3월 12일 녹취하여 수사기관에 제출한 유장호와의 통화기록이 바로 이름들의 목록을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2010년 6월 25일 진술에서 성함만 기재된 장이 있었다고 진술하고 이후의 진술에서도 명단, 목록, 리스트가 있었다고 일관되게 진술한다. 

일관되지 못한 사람이 있다. 유장호와 오빠 장00이다. 이들은 최초 진술에서 명단이 있었다고 진술한 후 최근으로 오면서 말을 바꾸어 ‘리스트 이런 건 아니었고 말 그대로 편지글 같은 거’로 표현한다. 물론 이 말은 리스트가 없었다고 하는 의미는 아니다. 3장의 편지글 속에 이름들의 목록이 포함되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리스트가 아니라 편지글이다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리스트, 명단, 목록의 실재를 약화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오빠 장00도 유장호와 유사하게 경찰 진술에서는 이름이 나열된 문건이 있었다고 한 후 최근 조사에서는 그러한 리스트를 부인하고 모두 서술식으로 쓰여 있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간이 진술을 더 정확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런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장호와 오빠 장00의 경우는 그런 경우에 속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유장호는 윤지오에게 리스트 증언조서를 보여주기 전에 ‘목록’(리스트)는 경찰에 제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리스트 없는 4장의 문건을 언론에 공개한 장본인이며, 오빠 장00는 동생 장자연 사건 자체의 공개를 거부하고 그 공개 책임자인 유장호를 제소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은 리스트가 없는 쪽으로 이 사태가 정리되는 것에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경우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경우, 사태의 추이를 예상하기 어렵고 경찰력과 법 앞에 거의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던 초기의 진술이, 사태의 윤곽이 드러나고 이후의 향방에 대해 이해관계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된 지금의 진술보다 훨씬 더 진술 가치가 높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즉 3장의추가문건(리스트증언조서)편지글형식으로되어있었던것이확실하고속에리스트가포함되어있었을가능성은매우높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위의 네 사람의 진술가치를 신빙성의정도에따라차등화시켜보면 윤지오의 진술이 가장신빙성이높고 그 다음으로는 유장호와 오빠 장00의 초기 경찰 진술이 신빙성이 높다. 그 다음으로는 이 두 사람의 최근 진술이 놓이는데 상당한 왜곡이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김대오의 말은 거짓말로서 전혀신빙성이없는 진술이다.

이 문제에 대해 대검 과거사진상조사단이 “수사기록에 편철된 문건외에 피해사실과관련하여작성된것으로보이는명단기재된문건, 리스트있었을것이라는의견을제시하였”다고 과거사조사위원회도 마지못해 인정한다. 그런데 왜 그것을 사족(蛇足)처럼 짧게, 스쳐지나가듯이, 자신의 의견과 별개의 소수의견처럼 매달아 놨을까? 다음 말을 하기 위해서다. “장자연이 작성한 문건의 행방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유○○인데, 유○○가 장자연이 작성한 문건을 모두 태워 그 문건이 없다고 하였고, 외에문건추가로확인할방법이없었음.” 이것은 지금까지의 논의만으로도 거짓말이다. 문건이 없다는 유장호의 말 외에, 유장호의 초기진술, 오빠 장00의 초기진술 그리고 윤지오의 일관 진술 등이 모두 명단이 기재된 문건인 리스트가 있었음을 확인해 주었기 때문이다. 진상조사단이 과거사위원회에 올린 보고서는 바로 문건이 없다는 유장호의 말 외에 그 문건을 추가로 확인할 방법들이 있었고 그 방법을 사용해 검증한 결과에 대한 서술이었다. 과거사조사위원회의 발표는 수사적 조작을 통해 리스트가 있었음을 모호하게 하고 그 리스트를 감추려는 의도를 드러냈지만 결국 그 리스트가 실재했다는 것, 리스트의 실체를 진상조사단이 확인했음을 알려왔다는 것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그런데 기생충 학자 서민은 검찰 과거사조사위원회가 “장자연 리스트의 실체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말로 그 발표문을 요약한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과거사조사위원회가 장자연 리스트의 실체를 감추고 싶어 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바로 그 발표문 속에서 장자연 리스트의 실체, 실재는 뚜렷이 모습을 드러냈다. 편지글 형식의 3장의 추가문건이 분명히 있었고 명단은 그 속에 들어 있었을 것이라는 것. 이것이 과거사조사위원회의 발표가 그 비겁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던 팩트이다. 이로써 우리는, 박훈이 명문으로 추천한 서민의 그 글의 첫 문장부터가 매우 중요한 사회적 쟁점을 매우 악의적으로 조악하게 요약한 거짓말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사조사위원회의 심의결과 발표문이 과거사진장조사단의 조사보고서를 임의적으로 왜곡했지만 장자연 리스트의 실체를 숨길 수는 없었다면, 서민은 왜곡 속에서도 분명히 드러난 그 실체를 부인하면서 “과거사위원회가 장자연 리스트의 실체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증언자 장자연’을 생각하며 ‘증언자 윤지오’의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죽은 장자연을 위해서는 윤지오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 박훈, 김대오, 김수민 트리오의 리토르넬로, 즉 하염없이 반복되는 후렴구다. 이들은 ‘윤지오는 가고 장자연만 남으라’고 말한다. 이들의 말을 받아 익명의 악플러들은 윤지오를 향해 ‘죽어버려라, 죽이겠다’는 말을 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마치 죽은 자를 추모하고 애도하는 듯이 보이는 그 말이 실은 죽은 자를 영원히 죽어있도록 하기 위해 산 자를 죽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온갖 왜곡, 부인, 날조 들에도 불구하고 지난 10년간 누적된 조서들, 증언들, 증거들이 의문의 여지가 없을 만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2009년 2월 28일 장자연이 유장호의 감독하에 4장의 문건을 작성해 유장호에게 남기고 다음날 장자연이 김종승의 배후에 있는 조심해야  할 사람들의 이름을 담은 3장의 편지글을 유장호에게 따로 넘겼다는 것이다. 

장자연 문건과 리스트는 증언조서다.

이 문건과 리스트는 무엇이었을까? 유서가 아니었다는 것은 이제 분명해졌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증언자 윤지오가 지금 겪는 경험을 보면서 나는 이제 그것을 “증언조서(deposition)”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것을 ‘재판에 사용할 목적으로 작성한 내용증명 같은 것’이라고 어중간하게 불러왔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은 장자연이 ‘증인’, ‘증언자’이고 그가 남긴 것이 ‘증언’이라는 사실을 감춘다. 증언조서란 증인이 재판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법원 밖에서 진술을 기록한 문서를 지칭하는 바, 장자연이 남긴 문건과 리스트는 정확하게 이 증언조서에 해당한다.  

우리는 증인 장자연이 무엇을 증언했는가에 대해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문건의 경우 부당계약을 기초로 혹은 그 범위를 넘어서 소속사 대표 김종승이 행했던 폭행, 협박, 갈취와 언론 권력자들을 위한 성접대 및 잠자리 강요가 주로 서술되어 있다. 사례 형식으로 된 이 ‘사례 증언조서’는 연예계 문화자본과 그 대리인인 김종승 사장의 폭력적 착취구조에 대한 증언이다. 이와 달리 ‘리스트 증언조서’는 조선일보 방씨 일가를 비롯하여 이 폭력적 착취구조에 기생하면서 돈접대와 성접대를 받는 재계, 법조계, 정치권, 언론계, 연예계 등의 권력자들에 대한 증언이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2009년 이후 국정원, 경찰, 검찰, 법원 등을 거치면서 이 두 종류의 증언조서는 분리해서 관리된 것으로 판단된다. 약소 자본가 김종승을 주요 타겟으로 삼는 장자연의 ‘사례 증언조서’는 유가족의 공개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언론에 공개되었다. 하지만 강력한 권력자들을 주요 타겟으로 삼는 장자연의 ‘리스트 증언조서’는 그 내용이 공개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유가족, 유장호, 윤지오가 초기수사 과정에서 실재한다고 증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경검의 수사는 이 진술을 무시했고 수사하지 않았으며 결국 그 존재가 사라지도록 만들어 왔다.

장자연이 유장호의 감독과 통제 없이 작성했던 권력자들에 대한 ‘리스트 증언조서’가 이런 방식으로 인위적으로 실종됨으로써, 장자연이 육성녹음에서 ‘힘센 사람들’이라고 불렀고 윤지오가 ‘법 위의 사람들’이라고 불렀던 권력자들, 사실상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그들은 유령 같은 존재로만 남게 되었다. 

증언자 장자연은 증언조서로 인해 생명을 잃었다

장자연의 이 ‘리스트 증언조서’의 실종은 어쩌면 최초의 실종이 아닐지 모른다. 그 문서는 분명히 이명박 정권 취임 일주년이 막 지난 2009년 3월 12일까지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한 사찰인 봉은사에 온전한 형태로 있었던 반면 그 닷새 전인 3월 7일에 장자연의 생명이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증인의 죽음이 최초의 실종이었다. 증언은 증인이 수행하는 언어활동이기 때문에 증인이 죽는다는 것은 증언가능성이 소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일보가 장자연 사건 진술조서 전문을 공개하면서 “누가 그녀를 죽였나”라고 제목에서 묻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대한민국의 국민이고 주권자인 우리는 같은 국민이었던 장자연이 어떻게 해서 죽게 되었는지 아직 알지 못한다. 경찰이 그 죽음을 단순 변사로 처리하고 부검을 하지 않음으로서 죽음의 진실을 은폐했기 때문이다. 2009년 3월 13일 KBS가 (누가 봐도 유서라고 할 수 없는) 장자연의 ‘사례 증언조서’를 공개한 후에도 경찰은 그것이 ‘유서’라고 주장하고 언론은 경찰이 제시한 그 관점에서 장자연의 죽음에 접근한다. (예컨대 2009년 3월 13일  이른바 ‘국가기간뉴스통신사’ <연합뉴스> 보도 제목은 “분당경찰 ‘고 장자연 유서내용 조사’”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주권자인 국민으로 하여금 증언조서로 인한 막다른 궁지에서 장자연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거둔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그 생명을 훔쳐간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종의 실종상태(의문사)에 놓이도록 만든 직접적인 행정주체는 경찰과 검찰이다. 이 기관들의 공작정치적 수사 때문에 장자연의 죽음을 밝혀줄 증거들이 사라졌고 우리가 그 죽음의 진실에 접근하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자연이 증언조서에 기록한 내용 때문에 사회적으로 살해당했다는 것만은 분명한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장자연의 죽음의 진실을 가려버린 그 행정주체의 인근과 배후에 어떤 세력들이 이 사건에 대한 국민의 무지를 위해 움직이고 있었는지는 아직 온전히 가시화되지 않고 있다. 태스크 포스를 꾸리고 경찰에 수사외압을 행사하고 수사혼선을 획책했던 조선일보를 제외하면 말이다. 그렇지만 통화기록 조회를 규정을 어기며 짧게 제한하고 확보된 통화기록을 없애거나 편집하고 제출된 녹취록을 빼돌리는 등 장자연의 ‘리스트 증언조서’를 숨기기 위한 누군가의 공작행위들의 자취는 곳곳에서 확인되며 검찰의 과거사조사위원회조차 이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증언자 윤지오는 살아있는 장자연이다

장자연이 증언조서를 작성하지 않았다면, 즉 자본과 권력의 간악한 횡포, 폭력, 착취에 대해 증언하지 않았다면 생명을 잃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개인적으로 자본과 권력으로 인한 고통의 시간을 무한정 연장시켰을 것이며 그것에 저항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매리는 장자연과 윤지오 때문에 증언에 나설 용기를 얻게 되었다고 말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를 죽음으로 이르게 한 감당할 수 없는 집단폭력이 증언을 계기로 그를 향해 행사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생전 그의 절규는 이 거대한 폭력의 실재에 대한 명확한 증언이기도 하다.

장자연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왜 지금 윤지오가 ‘집단괴롭힘’을 당하게 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진실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지오가 장자연 ‘리스트 증언조서’의 ’유일한 증언자’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살해당한 증언자의 증언을 이어 받아 증언하는 것, 이것이 윤지오가 떠맡은 역할이다. 그는 과거사진상조사단, 방송, 신문, 인터넷방송 등의 증언무대에서 조희천의 성추행에 대해, 언론계와 정치권 인사를 포함한 장자연의 ’리스트 증언조서’의 내용에 대해, 장자연이 마약을 이용한 특수한 성폭행을 당했을 가능성에 대해, 유장호의 경호원 행세를 한 ‘국정원 직원’에 대해 증언했다. 또 그는 장자연을 누가 죽게 했는지에 대해 조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것은 언론, 정치, 행정, 사법, 재계가 진실을 알린다거나 국민의 뜻을 대의한다거나 정의를 실현한다거나 국민의 경제적 삶을 향상시킨다는 등의 표면구호 뒤에서 실제로는 거대한 범죄집단으로 기능하고 있고 그들의 범죄행위들 하나하나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살해행위에 연루되어 있음을 증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윤지오는 증언을 통해 지금의 성폭력적 가부장주의 자본체제에 맞섰다.

윤지오가 위험하다

지금 익명의 아이디로써 윤지오의 인스타그램에 욕설과 악플을 달고 DM을 발송하고 코엑스에 전시방해 전화를 걸고 유튜브와 SNS에서 갖은 거짓말과 선정적 콘텐츠로 조회수를 올리고 있는 것은 불임인 일개미들이다. 여왕개미 계급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개미들을 생산하고 또 재생산한다. 문제는 이들이 2017년 9월 대한민국 감만부두에서 처음 발견되었다고 하는 유독성의 붉은불개미를 닮았다는 것이다. 붉은불개미 종이 어떤 개미종일까?

“붉은불개미는 지역 개미들을 상대로 경쟁하여 승리한다. … 이들이 해충이라고 규정된 이유는 침입종이고, 우리에게 입히는 신체적 고통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둥지가 식물의 뿌리를 약하게 만들고 기계로 농사를 지을 때 이들의 둥지가 방해되기 때문이다. 이들의 둥지가 갑자기 나타나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큰 동물은 보통 죽이지 않지만 작은 동물, 예를 들어 새 등은 이들에 의해 쉽게 죽는다. 송아지 등도 충분히 민첩하지 못하면 죽게 된다. 이들의 침에는 솔레놉신이 포함되어 있으며, 인간에게 고통스럽고 쏘인 뒤 하루 정도 지나면 찔린 부위가 하얗게 뜬다. 붉은 불개미는 적응력이 뛰어나, 박멸하기가 쉽지 않다. 이들은 홍수나 가뭄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력을 지녔다. 개미들이 자신들의 둥지 둘레의 수위가 높아지는 것을 느끼거나 홍수를 감지하면, 곧 일개미들이 를 형성하여 물에 뜬다. 이때 구의 밖에는 일개미, 안에는 여왕개미가 자리잡는다. 그 구는 어떤 물체에 접촉하는 순간, 일개미들이 그리로 올라가고 홍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 가뭄 때에는 굴을 깊게 뚫어 지하수층까지 내려간다. 또한 이들은 겨울잠을 자지 않지만 섭씨 영하 9도의 기온에서도 살 수 있다. 현재, 붉은불개미의 개체수는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지만, 지역에서 완전히 멸종시키는 것은 어렵다.”(위키)

붉은불개미는 살인개미라고도 불린다. 자본은 경쟁하여 승리하는 해충이고 침입종이다. 이것은 우리의 삶의 뿌리를 약하게 만들고 사람들을 착취하여 죽게 만든다(노동력의 폐절화). 자본은 이윤이라는 독성을 갖고 있어 이것이 체내에 주입되면 사람들이 정신을 잃고 날뛰거나 쓰러진다.  자본은 웬만한 위기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력을 지녔다. 자본은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타인의 생명력을 먹고사는 포식자이다. 먹힐 것인가, 멸종시킬 것인가?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인간 생명력의 포식(살인)을 내버려 둬도 되는 것일까? 체제의 진실에 대한 증언자, 국민의 부름을 받아 증언에 나섰던 윤지오를 포식자 불개미들 앞에 내버려둬도 되는 것일까? 진실을 살해하는 권력 앞에서 침묵해도 되는 것일까?

‘과거사 조사’를 둘러싼 두 가지 시간성의 투쟁에 대해

과거사(過去事)는 어떤 사건이 이미 “지나간 것”임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것은 그 사건이 지금여기의 사건은 아니라는 뜻을 함축한다. 그러므로 과거사란 말은 어떤 사건을 현실로부터 분리해 내어서 과거로 돌리는 역할을 맡는다. 과거화(過去化), 이것이 과거사라는 말의 사회적 반복이 가져오는 실제적 효과이다. 

그렇다면 과거사에 대한 ‘조사’는 무엇일까? 여기에서는 두 가지 뜻이 상충한다. 하나는 과거로 내몰린 사건을 현재로 가져온다는 뜻이다. 즉 현재화, 현실화의 뜻이 있다. 또 하나는 과거사를 두루 살펴 정리한다는 뜻이 있다. 이것은 불편한 점이 있는 과거사를 영구히 안전하게 과거화한다는 뜻이다. 

조금 깊이 들여다 보면 이것들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혹은 삶을 체험하는 두 가지 형식이기도 하다. 장자연 사건에 대한 재조사에서 우리는 이 두 시간성, 두 가지 시간 이해, 시간을 경험하는 두 가지 형식 사이의 갈등을 본다.

하나는 장자연 사건을 현재의 시간 속으로 가져와 ‘지금-여기’에서 우리가 당면한 것들과 연결시킴으로써 현실화하려는 흐름이다. 이것은 죽은 장자연에게 사회적 생명을 불어넣어 힘 없는 신인배우, 약한 처지의 인지노동자로서 그가 느꼈던 고통과 그것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비원(悲願)을 우리 모두의 현재적 고통, 비원으로 전화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표현된다. 이것은, 모든 왜곡을 걷고 단언하자면, 청와대 국민청원을 통해 장자연 사건을 현재 속으로 불러온 촛불미투 운동과 그 사건을 증언해온 윤지오에 의해 대표된다고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장자연 사건을 더 이상 사회적으로 논란되지 않을 수 있는 안전하고 고요한 과거사로 깊이 매장하려는 흐름이다. 이것은 산 사람들로 하여금 ’장자연이 왜, 어떻게, 누구에 의해 죽임을 당했는가?’ 사무치는 물음을 되묻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면서 구천(九泉)을 떠돌고 있는 장자연을, 재조사를 계기로, 증언자 윤지오에 대한 타격을 통해 확실히 죽게 만들고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곳에 안치(安置)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표현된다. 이것은, 비록 재조사의 개시를 막을 수는 없었지만 그 재조사가 재수사로는 결코 발전하지 않게 하고 싶고 또 그 재조사를 이 사건에 대한 더 이상의 의문이나 문제제기를 못하도록 막는 방패로 활용하고 싶은 사람들에 의해 대표된다.

장례식이 죽은 자를 생물학적으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확실히 죽게 만들어 죽은 자가 차지했던 자리와 재산에 대한 산 자들 사이의 재분배를 시작할 수 있는 터를 만드는 의식(儀式)이듯이, 장자연 사건에 대한 재조사가 그러한 내용을 갖는 정치적 사법적 장례식처럼 되고 말 것인가? 그래서 기왕의 가해자들과 가해의지를 가진 자들이 두 다리를 뻗고 잠들어 원기를 회복한 후 다시 가해를 시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요식절차로 되고 말 것인가? 요컨대 ‘영구 과거화’를 위한 과거사 조사로 귀착되고 말 것인가?

2019년 5월 20일 과거사조사위원회는 “새로운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 재수사는 없다”는 요지의 발표를 국민들 앞에 내놓았다.(http://www.newbc.kr/news/articleView.html?idxno=5379) ‘활동시한을 연장하며 무려 13개월에 걸쳐 84명을 조사한 후에 이루어진’ 재조사인 만큼 그 포괄성과 엄정함에 의심의 여지가 없어야 할 것이다!! 이 발표에 장단을 맞추는 사람이 없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남아있는 증거와 오염되지 않은 증언 속에서 가장 합당한 조사결과라 생각합니다.”(5월 20일 오후 4:22 페북)라고 말하는 반윤지오 트리오의 일원인 김대오가 그이다. 

하지만 과거사조사위원회의 발표는, “장자연 사건이 그 실제가 무엇이든 국민 여러분이 이제 진정한 의미의 ‘과거사’로 받아들이도록 만들고 싶다”는 과거사조사위원회의 곤혹스런 정치적 욕망과 속내를 그 누구라도 눈치챌 수 있을 만큼, 난삽하게 꼬여있고 인위적인 것이었다. 그 발표는 주요 메시지만이 아니라 세부에서도 다중 집단지성의 ‘조사’와 동떨어져 있었으며, 진상조사단의 ‘조사’와도 괴리되어 있었고, 심지어 하나의 발표문의 본론인 <의혹사항에 대한 조사결과>와 그 결론인 <심의결과> 사이에도 심한 어긋남이 있었다.    

이런 치명적인 결함들 때문에 조사를 통한 영구 과거화는 이번에도 실패할 것이다. 이미 총괄단장 김영희가 과거사조사위원회의 발표가 진상조사단의 조사를 충실히 반영하지 않고 검찰측 조사원의 소수의견을 중심으로 심의결과를 내놓았다는 이견을 제시했다. 여당인 민주당에서도 국정조사와 특검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어떤 네티즌(lamer297)은 이렇게 말한다.

“검찰 과거사위 결론은 일주일에 걸쳐 진상보고단의 결론을 축소, 삭제 시킨 결론이죠. 오래전부터 검찰은 진상조사단의 활동를 방해하고 있었으니, 검찰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의 장자연 사건에 관한 범법 행위를 감추려 [할 것이] 확실합니다. 김영희 변호사께서 진상조사단의 보고서는 250장이라고 하셨는 데, 이 250장의 보고서 내용이 과거사위 결론보다 훨씬 신빙성이 더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면, 진상조사단 보고서는 13개월 동안 실제로 조사를 한 조사단원들이 만들었기 때문이죠. 어디서 진상조사단의 250장의보고서를 볼수있을까요? (…) 한국 검찰이 조선일보의 외압을 인정했는데 왜 조선일보는 폐간시키지 않나요? 언론은 공정성이 생명인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검찰에 외압을 가하는 범법행위를 저지른 언론기관의 보도를 어떻게 믿습니까?! 한국에도 언론 기관의 기본자격 규정에 관한 법이 있을것이고, 조선일보의 검찰 외압과 사실 왜곡은 언론기관 자격 규정을 위반한 것일 것입니다. 공정성을 갖추지 못한 언론 기관은 당장 폐간되어야 합니다! 한국 정부와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들은 지금 뭐하고 있읍니까? 정부와 국회가 할일을 안한다면 우리 국민들이 나서서 잘못을 바로 잡아야합니다! 한 예로, 만약 뉴욕 타임즈가 뉴욕 주 검찰이나 연방정부 검찰을 위협했다고 검찰이 인정했다고 하면 무슨일이 일어 날까요? 뉴욕타임즈는 그 사실이 밝혀진 순간 박살이 났을것입니다. 물론 관련자들이 줄줄이 체포되어 재판에 당장 넘겨졌을 것이구요. 또한 이런 사실은 대서특필로 전 세계에 번개같은 속도로 보도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일보에 관해서는 왜 한국 사람들 모두가 장님이고 벙어리가 되어있읍니까????”

과거사조사위원회는 검찰이 국민의 뜻을 대의할 의사가 없다는 것, 검찰은 국민을 주인으로 대접하고 싶지 않고 국민들로부터 식사접대, 술접대, 성접대, 돈접대 등 (장자연에게 가해자들이 강요했던) 각종 접대를 받고 싶다는 것, 요컨대 검찰은 국민 대의기관이 아니라 국민에 대한 지배기관이라는 것을 발표문을 통해 발표했다. 이처럼 정부와 국회와 같은 대의권력이 주권권력인 국민으로부터 이반(離反)될 때, “국민들이 나서서 잘못을 바로 잡”는 길 말고 다른 길이 있는가? 대한민국이 아직 “국민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과거사조사위원회가 국민을 대상으로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상황에서 그 길이, 세월호 유가족들이 진실을 건져내기 위해 나섰던 길을 따라 2016년 국민들이 거리와 광장으로 나섬으로써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던 촛불혁명의 길이라는 것은 이제 먼 이상이 아니라 경험적 상식이다. 여기서 현재는 영원으로서의 과거가 미래의 형태로 도래하는 첨점이 된다. 

김대오는 “도대체 누가 죽은 자의 원혼을 푸는 권능을 우리에게 주었단 말인가?”(5월 26일 오후 11:11)라며 죽은 자를 죽은 그대로 매장해 두라고 강변한다. 장자연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고 장자연의 비원(悲願)을 지금 자신의 비원으로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장자연의 생명을 자신의 삶 속에 되살리려는 윤지오적 집합행동을 그는 죽은 자를 또 죽이는 부관참시라고 잘못 부른다. 

이를 위해 그는 “장자연의 원혼”, “장자연의 비원”을 “장자연의 죄”(5월 26일 오후 11:03)로 바꿔치기하는 얕은 술수를 부리는데, 지금까지 김대오 외에는 그 어느 누구도 “장자연의 죄”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사람들이 묻고 있는 것이 장자연의 억울한 죽음을 가져온 “가해자의 죄”라는 것조차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장자연의 죽음을 장자연의 죄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장자연 사건에 대한 재조사를 부관참시의 순간으로, 즉 원혼과 명예조차 빼앗아 영구매장, 영구과거화하려는 것은 정확히 기존의 가해자들과 잠재적 가해자들, 그리고 수많은 김대오들이다. 그런데도 과거사조사위원회가 이들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가해자와 성폭력 체제에 대한 수사를 미진(未盡)하게 남겨두고 있는 것은, 주체의 측면에서 보면, 혁명이 너무나 미진한 탓 외에 다른 것일 수가 없지 않은가?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야 한다.

재심변호사 박준영의 절차주의적 ‘정의’관은 누구를 이롭게 하는가?(3)

우리는 4월 16일 김수민이 윤지오를 폭로하는 긴 글을 공개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약 일주일 뒤인 4월 23일에 박준영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모두 냉정하게 윤지오 씨의 말과 행동을 검증합시다. 검증으로 밝혀지는 사실이 있으면, 있는 그대로 공개합시다. 사건이 정리되면, 우리가 이런 상황까지 온 과정과 이유를 분석해 봅시다. 이 사건이 우리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앞서 그는 윤지오의 “증언”에 대해 검증할 필요가 있다는 말로 그에 대한 의혹제기를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이 말 자체가 자신이 조사를 맡지 않은 건에 대해서는 주제 넘는 말이다. 왜냐하면 진상조사단이 바보들이 아닌 한에서 모든 증언들을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사실과 혼동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검증이 조사의 필수적 구성요소인 한에서, 오히려 박준영 자신이 윤지오를 검증해야 한다는 자기목적성을 과잉으로 드러내고 있으며 그 자기목적성은 윤지오에 대한 그의 원초적 불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4월 23일에 와서 바뀌고 있는 것은 박준영이 윤지오의 “증언”이 아니라 그의 “말과 행동”을 검증하자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것은 증언 검증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고 인격 검증을 하자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 그가 장자연 사건에 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가 아니라 그가 그 증언 밖에서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는지를 검증하자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가 요청한 증언 밖에서 윤지오가 무슨 말과 행동을 하는가는 헌법에 규정된 그의 기본권에 속하는 문제다. 그리고 법의 테두리 속에서 누구든지 말과 행동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박준영은 법 전문가의 말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검증선동에 나선다. “우리 모두 냉정하게 윤지오 씨의 말과 행동을 검증합시다.”라는 말이 그것이다. 그는 검증의 주체로 진상조사단도 검경도 아닌 “우리 모두”를 끌어들인다. “우리 모두”가 경찰이나 검찰과 법원 같은 국민 대의기구들을 통하지 말고 직접 검증하고, 그 “검증으로 밝혀지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공개합시다”라고 그의 제안한다. 이것이 여러 차례 반복해서 그가 강조해온 “책임”이라는 말에 값하는 방식인가?

왜 박준영은 아니고, 또 김수민, 박훈, 김대오는 아니고 윤지오만 검증대에 올라야 하는가? 또 윤지오를 검증할 검증력이 어디서 나올 것인가? 무슨 수단으로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 그가 검증을 거부할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 검증의 결과가 허구가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을 누가 무엇으로 보장할 것인가? 객관적이고 공정한 사실로 확인되지 않은 검증 결과의 공개가 미칠 악영향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모든 의문을 제쳐둔 채 박준영은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라고 목적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그의 제안에 따라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윤지오 검증행동은 거의 한 가지도 사실로 확인되지 않은 채 5월 말 현재 “윤지오는는 성매매업소에 다닌 매춘부였다”는 식으로 확인되지 않은 정보의 “있는 그대로의 공개”, 즉 성폭력적 테러행동으로 치닫고 있다. 검증몰이가 도달한 이 집단광기적 상황과 그 효과에 대해 나는 박준영이 책임을 나눠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4월 23일의 페이스북 메시지가 실제로는 역사에서 가부장주의 성폭력 체제가 반복적으로 행해온 바의 “마녀사냥” 선동과 거의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박준영은 자신의 선동이 미칠 결과를 이미 어느 정도 의식한 듯 다음과 같은 주의사항에 대해 미리 말한다.

“분명히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윤지오 씨의 진술로 전 조선일보 기자가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 진술의 가치가 지금 벌어지는 일들로 인한 영향을 조금이라도 덜 받았으면 합니다. 그 당시는 이런 다양한 이해관계가 없었다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법원이 냉철하게 판단해주리라 믿습니다.”

요컨대 자신의 검증 선동이 전 조선일보 기자 조희천 재판에 미칠 영향을 축소하자는 것이다. 왜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그 당시는 이런 다양한 이해관계가 없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모호한 답이다. 이 표현을 해석해 보면 조희천이 기소된 2018년 6월에는 윤지오의 진술이 다양한 이해관계들에 의해 오염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오염되었다고 본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단계구분은 현실을 충실히 반영하는 말이 아니다. 최근 발표된 과거사진상조사단의 조사는, 장자연 사건이 박준영이 말하는 “다양한 이해관계들”에 의해 오염되지 않았던 순간이 단 한 순간도 없었음을 보여준다. 소속사들은 소속사대로, 조선일보는 조선일보대로, 경찰과 검찰은 또 자신의 필요와 외부 압력의 정도에 따라, 다른 언론사는 또 언론사의 필요에 따라, (그리고 아마도 국정원은 국정원 대로) 자기 나름의 자기목적성, 전략, 음모, 기획에 따라 이용하고 관리했다. 그리고 그 이해관계들의 상충과 어우러짐이 그때그때의 결과들(크게 보면 힘없고 돈 없는 사람들은 유죄,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은 무혐의)을 낳아 왔다. 진실규명을 원하는 사람들의 세력이 너무나 약했기 때문에 장자연 사건은 진실을 덮고자 하는 사람들의 수중에서 편의대로 처분되고 관리되어 왔다. 2016년 촛불혁명과 더불어 세력관계가 바뀌어 촛불과 미투의 힘이 강화된 것이 현재와 지난 10년과의 차이일 뿐이다. 그리고 행정 국회 법조 내 각 정파와 재계, 언론계 제 세력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상황을 이끌고 가려는 본질적 경향은 변함이 없고 촛불세력과의 관계에서 그 세력판도가 달라져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박준영의 선동(“검증합시다”!)의 파급효과는 그가 멈추고자 하는 선을 훨씬 멀리까지 넘쳐 흘러갈 것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박준영이 이 선동을 통해 경계하고 제어하고 약화시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여론”, “세간의 의혹”, “국민적 의혹”이다. 이것들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지만 그 중 박준영이 가장 위험한 것으로 경계하는 것은 촛불과 미투운동이 불러일으킨 “여론”이다(물론 그는 이것을 아래로부터의 촛불의 영향으로 보지 않고 특정한 ‘이해관계’를 가진 세력의 영향으로 일면적으로만 이해한다). 촛불과 미투 이전에 장자연 사건은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로 자리매김되어 있었고 이러한 정리를 뒤흔들 수 있는 요소들은 증거 없는 “의혹”으로 치부되었다. 촛불과 미투는 이 “의혹”들을 “여론”으로 만들고 장자연을 죽게 만든 가해자, 가해집단, 가해체제의 해체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왔다. 의혹이 커지고 재조사와 재수사의 여론이 드높아진 것은 “객관적 사실” 자체가 권력자들의 외압에 의해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거나 규명된 사실조차 은폐, 편집, 삭제되었다는 사실이 하나하나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준영이 “세간의 의혹”과 “기록된 사실”을 대립시키고 사실에 충실할 것을 주장하는 것은 장자연 사건의 경우는 부당하다. 왜냐하면 그 “기록된 사실” 자체가 이처럼 축소, 은폐, 편집, 삭제의 조작을 거친 후 남아 있는 엉터리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세간의 의혹”이 “기록된 사실”만큼이나 중요한 사실가치를 갖는 것으로 고려될 필요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여기서도 박준영은 철저히 절차주의적 정의를 앞세운다. 그리고 세간의 의혹을 냉각시킬 방법으로 ‘증거법적 판단’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윤지오 씨가 이전 수사과정, 법정 그리고 조사단에서 여러 차례 진술했고, 언론을 통해 한 말들이 있습니다. 믿을 수 있는 것, 의심이 드는 것, 믿을 수 없는 것 등을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구분을 함에 있어서는 철저한 증거법적 판단이 필요합니다. 근거가 없거나 부족함에도 여론 때문에 섣부른 판단을 해서는 안 됩니다. 수사기관에 수사의뢰는, 혐의가 드러나 있거나 수사를 통해 드러날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냥 공을 떠넘기는 식의 수사의뢰는 무책임한 것입니다.”

섣부른 판단을 경계하자면서 그는 수사의뢰를 “무책임”한 것으로 단정하는데 이것은 ‘장자연 사건에서 재수사를 통해 드러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어떤 판단을 전제할 때에만 타당한 것이다. 이러한 판단이 장자연 사건을 바라보는 기존의 프레임을 고착화시키고 성폭력 체제의 실재를 감추게 될 것은 당연하다.

이처럼 박준영은 시종일관 장자연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문제제기를 봉쇄하고 억제하는 역할을 “냉정”, “신중”, “책임”의 이름으로 떠맡는다. 촛불과 미투의 힘에 의해 형성된 진실규명 요구를 잠재우려는 이 보수주의적 태도가 윤지오의 증언을 억제하고(‘사회적 파장이 큰 증언이므로 증언에 신중해야 한다’) 이에서 더 나아가 그의 ‘말과 행동’을 검증하자는 주장으로, 다시 말해 그가 그토록 강조한 “냉정”을 잃은 마녀사냥 식 선동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선동행위에 사례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방법이 윤지오가 주장하는 위협에 아무런 실체가 없었다는 경찰의 조사발표를 무비판적으로 4월 24일의 페이스북에 올리는 것이었다. “경찰이 윤지오 씨가 주장하는 위험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했던 ‘노력’”이 상당했으므로 그 발표에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는 식의 논평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증언자가 느끼는 위협은 결코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팀이 복도 시시티브이(CCTV) 분석을 통해 객실 출입자를 확인하고, 소음 측정, 경찰청의 지문 감식,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오일 감정, 호텔 시설담당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앞서 말했다시피 오직 직관을 통해서만 공감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험이 그 실체를 과학적 분석 대상으로 나타내는 때는 대개는 그것이 이미 살상과 같은 현실로 전화하여 위험이 해소된 상태에서다. 경찰이 찾았던 것은 위험의 실체가 아니라 그 자취인데, 위험의 자취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해서 위험의 실체가 부정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준영은 이 양자를 혼동하면서 윤지오에 대한 경호지원이 특혜이며 자원배분에서의 불합리라고 단정한다. 이런 섣부른 단정은 그의 절차주의적 정의관과 맞짝을 이루고 있었던 염치론, 즉 이해관계들의 양적 조정론(합리적 배분론)에 근거하여 나타나는 안일한 현실인식이다. 그의 시야는 성폭력과 같은 우리 삶의 실질적 갈등의 심부로 파고들기보다 삶의 표면을 거닐면서 편안한 조정/배분의 길을 찾는데 집중되고 있다. 이 경쟁적 이해관계론의 관점에서 ‘힘센 사람들’의 폭력 앞에서 내지르는 장자연의 절규가 공감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연의 죽음이 박준영에게 단지 “안타까운” 것으로서만 받아들여지고 윤지오의 증언이 객관성과 공정성을 잃은 과장된 진술로 비춰지는 것이 필연적인 것으로까지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연 사건과 관련하여 지금 필요한 것은 합리의 이름으로 껍데기(형해)의 세상을 만드는 절차주의를 넘어서 ‘실질’과 ‘실질에 고유한 절차/방법’를 주장하는 여성-다중의 실질적 과잉(excess)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약을 탄 술을 마신 것 같다. 왜냐하면 눈이 풀려 있었고.”라는 윤지오의 추측진술은 ‘과장된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여 돈을 벌기 위한 것’이라는 프레임 속에서가 아니라 ‘진실에 다가가기 위한 여성-다중의 이 실질적 과잉’이라는 맥락에서 더 실체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심변호사 박준영의 절차주의적 ‘정의’관은 누구를 이롭게 하는가?(2)

4월 16일 박준영은 <검증>이라는 제하에 “객관적이고 공정한 사실에 근거”할 것을 주문한다. 하지만 일견 타당해 보이는 그의 이 주장은 이미 빛을 잃고 있다. 윤지오 진술의 신빙성에 대한 검증 요구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그가 뉴시스 보도의 진실성에 대한 검증도 동시에 요구했어야 한다. 그는 윤지오 진술에 대한 검증이 더 “엄격하게”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를 그것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크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과연 뉴시스 보도의 진실성에 대한 검증을 그가 외면한 것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있는가? 4월 초의 시점은 윤지오의 진술을 둘러싸고 격렬한 사회적 투쟁이 전개되는 시기로 그의 진술의 신빙성을 주장하는 세력과 그것을 부인하는 세력 사이에 화해불가능할 정도의 논쟁이 전개된 시점이다. 뉴시스 기사는 후자를 대표하고 선도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은 박준영이 (자신이 의식했던 못했건 간에) 뉴시스를 옹호하면서 그것을 검증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윤지오를 검증대에 올리려는 자기목적성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사실에 근거”한 주장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의 정체를 알기 위해 그의 이야기를 조금 더 따라가보자. 그는 윤지오 진술에 대한 검증이 필요한데, 그 검증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한탄한다. 그는 “이 검증은 도대체 누가 하고 있나요. 이런 분위기에서는 할 수 있는 검증 그리고 검증의 결과 발표도 한계가 있는 겁니다.”라고 쓴다. 당연히 주권자 국민들은 과거사조사위원회와 진상조사단에 진술들에 대한 조사와 검증의 임무를 맡겼다. 그러므로 그 단위에서 증거와 증언에 대한 검증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 최종 결과가 국민에게 보고되어야 한다. 그 보고가 국민을 만족시킬 수 없을 때에 국민은 다시 조사를 명할 권리가 있다. 그런데 박준영은 조사팀을 나온 후 조사위원회와 진상조사단 내부에서 진술들에 대한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일종의 내부고발을 페이스북을 통해 쏟아내고 있다.

“형제복지원 사건, 피디수첩 사건, kbs 정연주 사장 사건 조사를 마친 후 재배당된 김학의 사건 조사를 맡아 사건기록을 봤습니다. 조사팀을 나올 때까지 기록을 꼼꼼히 보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제 게으름을 탓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건의 실체에 대중이나 언론보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장자연 사건 등 다른 사건을 조사하는 단원들과도 고민과 고충을 나누면서 주워들은 얘기가 있습니다. 이걸 풍문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내부고발의 정보 출처는, 장자연 사건에 있어서는, “사건을 조사하는 단원들과도 고민과 고충을 나누면서 주워들은 얘기”정도이다. 박준영은 자신의 개인적 조사체험에 대해 과도한 가치부여를 하면서 “사건의 실체에 대중이나 언론보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는 식의 권위주의적이고 오만한 태도를 주저없이 내세운다. 주권자인 국민 “대중”은 그에게 조사를 잘 하라고 명령한 것이지 그 조사 경험을 근거로 “사건 실체에 국민 대중보다 더 가까이 다가갔다”는 식의 오만을 부리는데 사용하도록 허락한 바가 없다.

실제로 조사원들이 세부 정보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국민들보더 더 많이 알게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사건의 실체에 그 조사원이 국민대중보다 더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조사원의 경우는 가령 수백년동안 조사해서 정보를 산 더미처럼 뇌에 집어 넣는다고 하더라도 사건의 실체에 단 한 발도 더 다가갈 수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특히 장자연 사건처럼 남성 가해자들에 의한 성폭력이 쟁점인 사건에서 남성 조사원이 “자기를 버리는 혁명”(여성되기 혁명) 없이 그 사건의 국민대중보다 실체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고 믿는 것 자체가 오만이요 환상이다. 게다가 박준영이 입수한 정보는 다른 조사원들로부터 “주워들은” 이야기인데 그것으로 내부고발을 해도 무방할 정도로 과거사진상조사단이 형편 없는 조직인가? 박준영이 자신이 “주워들은 이야기”가 “풍문”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이 조사원의 신분이나 지위와 같은 권위에 의해 뒷받침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반드시 “객관적이고 공정한 사실”과 “실체적 진실”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과연 박준영은 자신이 “주워들은 이야기”가 “객관적이고 공정한 사실”과 “실체적 진실”에 의해 뒷받침되는지 “검증”을 거쳤을까? 자신의 생각에 대한 “검증”은 뒤로 한 채, 박준영은 이렇게 계속 말한다.

“윤지오 씨가, 장자연 씨가 술이 아닌 다른 약물에 취한 채 강요를 당했을 가능성을 제기한 것으로 아는데, 이 진술이 언제 비로소 나왔는지 그리고 어떤 경위로 나왔는지, 이 진술을 뒷받침할 정황이 존재하는지를 따지지 않고 특수강간죄를 논하고 공소시효 연장 등 특례조항 신설을 이야기하는 건 나가도 너무 나간 주장입니다.”

이 진술을 뒷받침할 정황은 진상조사단 활동 전인 10년전 사건 조서에서 이미 명백히 나타난다. 장자연 소속사였던 더콘텐츠의 대표 김종승은 장자연 사망 당시 마약복용 혐의로 일본 도주 중이었다. (나는 이것이 김종승이 마약혐의로 해외도피한 첫 번째 사례가 아닌 것으로 어디선가 읽은 바 있는데 확인은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당시 장자연의 지인 언니인 이모씨의 진술 중에는 김종승이 “약 니동생이랑 같이 했다”는 내용의 문자를 보내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장자연이 ‘떳떳함’을 주장하므로 이 진술을 ‘객관적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버닝썬 사건에서 드러나듯이 여성 피해자들의 상당 수가 자신이 마신 음료에 (남성 가해자들이 몰래 탄) 마약이 들어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을 감안하면 이 진술이 객관적 사실일 ‘정황’은 실재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게다가 장자연이 약물에 취해 성폭행 당했을 가능성은 윤지오 외의 다른 진술자들의 교차증언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다음은 KBS 김경래의 최강시사에서 진상조사단 총괄단장 김영희의 발언이다.

“▷ 김경래 : 그런데 그런 평가들도 있어요. 과거사진상위원회에서 낸 자료에서도 나오는데 윤지오 씨의 진술이지 않습니까, 구체적으로는? 특수강간 의혹과 관련해서는. 그 부분의 진술의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김영희 : 윤지오 씨 진술뿐만 아니라 윤지오 씨는 정확하게는 약을 탄 술을 마신 것 같다는 얘기를 한 거고요. 그리고 아마 자기가 없을 때 성폭행을 당하지 않았겠나하는 추측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윤지오 씨 진술은 오히려 추측성이라고 한다면 본인이 본 것은 사실관계에 관한 것은 “약을 탄 술을 마신 것 같다. 왜냐하면 눈이 풀려 있었고.” 이런 진술인데 오히려 윤지오 씨가 아니라 당시 매니저였던 윤모 씨가 저희 조사단에게 처음 했던 진술은 장자연 씨가 쓴 문건에 성폭행을 심하게 당했다는 내용도 썼었다는 겁니다. 

▷ 김경래 : 지금까지 남아 있지 않은 문건에요. 

▶ 김영희 : 그렇죠. 처음에 썼던 문건에 그런 내용이 있었다고 진술을 했고. 물론 이것을 나중에 윤모 씨가 진술을 번복했으나 처음에 했던 진술은 어쨌든 성폭행을 심하게 당했다는 내용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장자연 씨가 문건에 남겼다는 진술이 있었고요. 그리고 또 하나는 또 다른 A씨가 뭐라고 얘기했느냐면 당시 장자연 씨 문건에 술에 약을 탔다는 내용도 있었다고 문건을 봤던 이모 씨가 그런 내용을 불러줬다는 진술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윤지오 씨 진술은 자기는 약을 탄 술을 마신 것 같다는 것을 봤다는 진술인 반면에 윤모 씨 진술은 성폭행을 당했다고 장자연 씨가 문건에 썼었다는 거고 굉장히 중요한 진술이죠. 그리고 또 하나는 또 장자연 씨 문건에 술에 약을 탔었다는 내용이 있었다는 또 다른 2명의 진술이 있었기 때문에 이 진술을 저희 조사단으로서는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중요한 진술이고 저희 조사단은 굉장히 한계가 많기 때문에 이 부분과 관련해서 추가적으로 수사를 해야 되지 않느냐? 수사기관이 판단해서 이 부분은 강제수사권이 있는 수사기관에 기록을 넘겨서 봐달라는 그런 취지였습니다.” 

그러므로 특수강간 의혹은 냉정을 잃은 사람들의 몰염치한 소행에 의해 부채질된 것이 아니라 비록 진술들이지만 ‘객관적이고 공정한 사실’ 진술들에 의해 뒷받침되는 의혹인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박준영이 이제 막 진술증거들을 확보중인 상태에서 “진술이 언제 비로소 나왔는지 그리고 어떤 경위로 나왔는지”를 살피자면서 초점 흐리기와 논점 전환을 시도하는 강한 “자기 목적성”을 몰”염치”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태도는 어떤 문건의 객관적 내용이 자신들에게 가져올 위험성을 문건 유출 경로의 불법성을 가지고 덮어버리곤 했던(예컨대 정윤회 문건 사건) 공작정치의 테크놀로지를 방불케 한다.

나는 이것이 여성이 겪었을 수 있는 성폭력에 대한 실감을 결여한 상태에서, 특수강간 혐의로 그것의 가능성을 수사하게 해야겠다는 진상조사단 일부와 윤지오의 실질적인 ‘자기목적성’의 절실함을 그 진술의 발생 시점, 발생 경로 등을 밝혀야 한다는 절차적 정당성에 관한 박준영 고유의 ‘자기목적성’으로 덮어버리는 남성중심적 보수주의의 발로라고 생각한다.  박준영의 이러한 사고경향은 이제 뉴시스 보도에 대한 다음과 같은 동조로 나타난다.

“무조건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가, 숙소를 마련해주고 경호팀을 붙여주는 등의 국가 예산 지출로 이어졌습니다. 도대체 윤지오 씨가 주장하는 ‘가해의 실체’는 있는 것인지 의문입니다.”

가해의 실체가 의문시되는 상황에서 숙소를 마련해 주고 경호팀을 붙여주는 국가예산지출은 냉정을 잃은 불공정한 처사라는 비판이다. 증언자로서의 윤지오가 느끼는 가해위협은 자신의 증언행위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법 위의 사람들’(권력자들)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장자연에 대한 가해혐의자로 지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누구나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분석적 검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박준영은 윤지오에 대한 보호를 요구하는 ‘가해의 실체’가 과연 있는지 물음으로써 윤지오가 장자연의 죽음을 이용해 거짓말로 사적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는 뉴시스발 의혹들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것이 정의로움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변호사의 동조이고 정당화였기 때문에 그것의 힘은 강력한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가해의 실체’에 대한 박준영의 의심이 심각한 자기모순임을 보여주는 한 대목을 발견한다. 그것은 4월 21일에 올린 <새끼들>이라는 글이다.

“자식들 사진입니다. 약촌오거리 사건 재심을 준비할 때 다음 스토리 펀딩으로 진범을 공개하면서 sns에 있는 아이들 사진을 내렸습니다. 이번에 프로필 사진을 바꾸면서 아이들 앞모습 사진을 올리지 못하는 이유는, 재심 사건을 진행하면서 맺게 되는 악연에 대한 부담 때문입니다. 약촌오거리 사건의 진범의 개명과 개명한 이름은 한동안 제게 현실적인 두려움이었습니다. 외모와 달리 겁이 많은 박상규 기자는 몽둥이를 옆에 두고 잠을 잤습니다.”(4월 21일 페이스북, 강조는 인용자)

그는 “재심 사건을 진행하면서 맺게 되는 악연에 대한 부담” 때문에 프로필 사진에 아이들 앞모습 사진을 못올리고 뒷모습을 올리거나 혹은 아이들 사진을 내리기도 한다. 그 악연의 부담은 그가 말하듯이 “현실적인 두려움”이다. 이 부담과 두려움을 이해하는 데 분석과 증거가 필요한가? 그것은 생명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생명체험에 비추어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부담이며 두려움이고 사진을 내리거나 뒷모습만을 올리는 것은 누가 봐도 합리적으로 이해되는 조치이다. 그런데 왜 그는 그 자신과 마찬가지로 윤지오도 증언에서 맺게 될 악연에 대한 그부담을 가질 수 있고  그것을 “현실적 두려움”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윤지오가 느끼는 위협의 “실체”라는 것을 감각하지 못하는 것일까? 왜 그는 여성, 타자, 약자(‘힘 없는 신인배우’)에 대해 이토록 둔감한 것인가? 윤지오가 증언을 통해 악연을 맺게 될 그 법 위의 사람들을 재심을 통해 악연을 맺게 될 약촌오거리 사건의 그 진범보다 왜 덜 위협적인 것으로, 위협의 실체가 없는 사람들로 생각하는 것일까? 이것은 윤지오가 실제적 두려움으로 경험하는 그 ‘법 위의 남자들’에 대해 박준영 자신은 친화감과 믿음(그러니까 ‘한 패 의식’)을 갖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빼놓고는 이 둔감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이 불가능하다.

박준영은 자신이 “법의 불평등” 때문에 서러움을 느끼는 사람들, 이른바 “서민”의 대변인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자의식을 갖고 있다. 그런데 장자연 사건과 김학의 사건에 대한 자신의 주장들이 ”사건의 본질을 흐릴 수 있고, 가해자들의 책임을 면하거나 경감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바로 그 서러운 사람들(특히 여성들이다)의 실제적 “우려”(그는 자신의 글에 대한 ‘댓글들’에서 이 ‘우려’를 읽는다)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는 댓글자들에게 앞으로 자신이 쓸 글들을 보면 이 갈등이 해소될 것이라고 계속 말한다. 어떻게 해소된다는 것일까? 그의 행보는 ‘서러운 사람들의 실제적 우려’를 외면하고 ’나는 서민들을 위한다’는 자의식에 기대, 가해자에 대한 조사와 수사는 법 절차에 맞아야 한다는 절차주의적 정의를 밀고 나가는 쪽을 향한다. 그는 “저는 서럽다는 분들을 대변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지 이유 없이 강자 쪽에 서고 싶지 않습니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습니다.”라고 주장하지만 소용 없는 일이다. 실질로부터 절차를 분리시키고 절차적 정의를 앞세울 때, 그것이 절차에 대한 온갖 통제권력(수사외압, 통화기록 삭제와 임의편집, 녹취록 빼돌리기, 조사않기, 등등)을 가진 그 “강자”를 바로 “지금” 이롭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그는 외면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쌓아온 정의의 이미지 모두를 한 순간에 상실하는 순간이라는 점도 보지 못한다.

재심 변호사 박준영의 절차주의적 ‘정의’관은 누구를 이롭게 하는가?(1)

영화 <재심>으로 인해 박준영 변호사는 재심 전문변호사라는 명성과 정의로운 변호사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박훈, 김대오, 김수민으로 이어지는 ‘윤지오 검증몰이’가 힘을 얻게 된 것이 박준영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그 검증몰이의 과정에 법률적 도덕적 정당성을 불어넣어 준 한 축으로 작용한 것만 분명하다.  이 사실은 그의 페이스북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다. 

과거사진상조사단의 조사단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던 박준영이 조사단 활동을 끝마친 것은 2019년 3월 8일인데 그가 자신의 조사건이 아닌 장자연 사건에 대해 처음 페이스북에 포스팅을 한 것은 공교롭게도 변호사 박훈이 이상호-윤지오를 적대시하는 포스팅을 올린 바로 다음날인 3월 29일이다. 그 포스팅에는 이후 그가 장자연 사건 재조사를 바라보는 기본 시각이 모두 나타나 있다.

“때론 세간의의혹과기록으로확인되는사실의괴리도 확인했다. 이걸 알거나알수있는위치에있으면서의혹을키우고활용하는 ‘염치없는자기목적성’도 보게 된다. 그 끝이 어디일지 가늠할 수 없어 답답하지만, 사필귀정임을 믿는다. 여성의몸과성이여러형태로이용되고착취당하는현실. 한국사회에서뿌리뽑아야할적폐다. 이런 문제를사건을통해공론화하고해결하는것은큰의미가있다고생각한다. 대통령의 철저한 수사지시도 이런 생각을 담은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대통령이 ‘사건에담긴여러이해관계와문제점’을충분히알고계셨다면그지시를함에있어신중하지않았을까생각도해본다. 대통령이 김의겸 대변인의 이런 투자를 알았다면, 대변인 선임과정에서 좀 더 신중한 판단을 했을 것이다. 윤중천과김학의의잘못, 장자연사건의가해자들을두둔할생각은전혀없다. 반드시 정의롭게 해결되었으면 한다. 단, 사건 속 여러 이해관계를 냉철히 살펴보고 정의로운해결의 ‘절차와방식’을 고민했으면 한다. 어렵지만 목소리를 내는 것이 길게 보면 신뢰를 얻는 길임을 믿는다. 믿고 의지할 곳 없다는 서민들의절망을 가장 우선시했으면 한다.”(3월 29일 페북)

그는 성폭력 체제가 한국 사회의 적폐로 실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것이 공론화되고 해결되는 것이 의미있음에 대해 인정한다. 자신은 가해자를 두둔할 생각이 없다고도 말한다. 이렇게 말로 성폭력 체제의 실재와 그 해결의 의미를 인정하는 립서비스를 한 후 그는 곧장 이 문제의 해결에서 내용적(실질적) 정의보다 그 문제 해결의 절차와 방식의 정의, 즉 형식적(절차적) 정의 쪽으로 관심을 돌린다. 이 논리 전개는 정의는 절차에 있지 실질에 있는 것이 아님을 주장하는 것이거나 적어도 절차적 형식적 정의가 충족되지 않을 때는 내용적 실질적 정의는 달성될 수 없다고 하는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절차적 정의가 재조사에서 충족되고 있는가 없는가를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나는 이것이 실질로부터 절차를 분리시킨 후 절차를 우위에 놓는 형식주의적-절차주의적 사고법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생각을 조금 더 들어보자. 그가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조사단 경험과 연관되어 있다. 그 경험은, 세간의 의혹과 기록으로 확인되는 사실 사이의 괴리를 알거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의혹을 키우고 활동하는 염치없는 자기목적성을 자기가 보았다는 말로 압축될 수 있다. 누군가가 고의로 사실과 괴리되도록 의혹을 부풀리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아래 인용은 이 경험에 대한 좀더 상세한 설명을 제공한다.

“과거사 사건을 조사하면서 그리고 조사를 지켜보면서 사건 속 다양한 이해관계를 봤다. 이익이 되는 사실을 부각하려 애를 쓰고 반면에 모순을 애써 외면하거나 침묵하는 모습도 봤다. 이런 모습은 사건 관계자, 언론, 공권력, 사건 속 연대 세력, 정치권 모두에게 공통되는 문제였다. 부끄럽지만, 관여하고 있는 재심사건 3건이 조사대상인 나도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은 자기목적적 존재라 하지 않았던가. 그 목적성이 치열하게 대립하는 건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하지만, 염치가 없을 때는 문제가 심각해진다.”(3월 29일 페북)

재조사 사건에서 사건 관계자, 언론, 공권력, 사건 속 연대 세력, 정치권, 그리고 자기자신도 그 사건을 두고 이해관계 투쟁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염치가 없을 때는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얼핏 보면 진솔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질적 정의를 형식적 정의로 환원한 것과 연결되는 중요한 문제점을 갖고 있다. 하나의 사건 속에 여러 세력들의 전략(이것이 ‘자기목적성’의 의미이다. 이 전략들은 ‘음모’라고 표현되어어 무방할 것이다.)이 교차하고 그것들 사이에 투쟁이 벌어진다는 생각은 옳다. 하지만 그 투쟁을 다양한 ‘이해관계’들의 투쟁으로 이해할 때 그 투쟁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에 중대한 왜곡이 발생한다. 이것은 투쟁 당사자들 사이의 절대적 대칭과 등질성을 부당 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자연의 죽음을 성폭력 체제에 대항하는 절규로서 이해할 때, 가해자와 피해자, 가해의 진실을 밝히려는 자와 그것을 은폐하려는 자 사이의 투쟁은 결코 대칭적이거나 등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해관계 투쟁으로 결코 환원할 수 없는 고유한 정치적 질과 방향을 갖는다. 박준영은 이 정치적 질을 무시함으로써 다양한 관계 당사자들 사이의 투쟁을 이해관계 투쟁으로 환원하며 이 틀 속에서 ‘문제는 염치다’라고 주장한다. 염치는 지나치지 않도록 행동하기 위해 필요한 체면 감정이며 그것은 경쟁의관계에있는 권력자들 사이 혹은 자본가들 사이, 혹은 노동자들 사이의 이해관계들을 적당하게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이다. 하지만 성차별 인종차별 계급차별 등 적대의 관계는 이해관계의 양적 차이가 아니며 그 관계 자체의 해체 없이는 해결 불가능한 비조정의 관계이다. 박준영이 이 ‘지나치지 않음’을 자신의 조사윤리로 삼는 것은 앞에서 실질보다 절차를 우위에 놓는 정의관과 마찬가지로 적대관계까지 경쟁관계로 환원하고 경쟁관계를 우위에 놓는 관점과 상통한다. 이런 식으로 그는 모든 사건 속에서 다양한 그러나 등질적인 이해관계들이 경합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즉 그 투쟁의 질, 목적의 이질성을 이해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 이해관계들 사이의 양적 분배적 적당함(염치있음)을 추구하고 그 분배적 적당함은 절차적 정의에 의해 보장될 수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조사윤리와 정의관에 따라 그는 3월 18일 대통령 문재인이 “공소시효가 끝난 일은 그대로 사실 여부를 가리고, 공소시효가 남은 범죄 행위가 있다면 반드시 엄정한 사법처리를 해 주기 바란다”고 한 것에 관해 사건에담긴여러이해관계와문제점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부적절하게 내린 지시로 규정한다. 그런데 위의 지시는 과거사조사위원회의 설치 목적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 것에 불과한 것이지 않은가? 그런데 박준영은 이 지시가 절차적 정의를 어기고 조사를 염치없도록(이해관계 세력들 사이의 관계를 불평등하게) 만드는 어떤 계기를 제공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그것이 특정 세력에게 부당하게 힘을 실어주어 의혹이 사실과 더 괴리되도록 만드는 계기로 된다는 비판이다.

그로부터 약 열흘 뒤인 4월 9일 박준영은 4월 8일 노컷뉴스 기사, “윤지오 “뉴시스 기자님 오셨나요?”…법적대응 예고”(김형준.김광일 기자)를 올리면서 <이건 아닌 것 같아요>라는 제목 하에 한줄로 “윤지오 씨를 비판하면 ‘악’인건가요? 우리 좀 더 냉정합시다.”라면서, 의문문과 청유문 속에 꽤 단호한 비판과 명령을 표현한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반응은 무엇에 대한 것일까? 이 기사는 뉴시스 최지윤의 취재수첩에 법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윤지오의 대응 외에 민주당 안민석, 바른미래당 김수민, 민주평화당 최경환, 정의당 추혜선 등이 ‘윤지오와 함께 하는 의원모임’을 만들어 윤지오를 지원하기로 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서 박준영이 뉴시스 4월 7일자 기사를 (읽어보았는지 않았는지 알 수 없지만) 윤지오에 대한 ‘비판’으로 본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그 기사의 내용을 “뉴시스와 김수민”(http://amelano.net/?p=399)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한 바 있다.  

1)윤지오는 장자연과 친하지 않았다 2)윤지오는 고비용의 과도한 경찰보호를 받으며 생활중이다 3)윤지오는 옛날부터 유명해지는 것이 꿈이었는데 이제 장자연을 이용하여 팔로워 76만명이 넘는 SNS 스타가 됐다 4)윤지오는 장자연을 이용하여 후원계좌를 열어 돈을 벌고 있다 5)윤지오는 거짓 증언을 했으며 그의 진술은 신빙성이 없다. 

이것이 과연 윤지오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은 사실근거에 의해 확인되지 않은 정보들을 윤지오 마녀화의 프레임 속에서 버무린 것으로 언론을 빙자한 인신공격에 다름 아닌 것으로 읽힌다. 나는 이 보도가 이후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사용될 윤지오 마녀사냥의 기본 프레임을 제공한 것으로 본다. 윤지오는 뉴시스 기자를 악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기사이므로 정정보도를 하라고 요청한 것이다. 이 기사는 결국 뉴시스가 자체판단에 따라 삭제했다. 이것은 스스로 이 기사가 윤지오에 대한 온당한 비판이 아니라 기사가치를 갖지 않는 불법적인 것임에 대한 승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전개는 타인들(아마도 그 자리에 참석한 국회의원들이 주요 대상일 것이다)에게 냉정을 요구하는 박준영 자신이 실제로는 냉정을 잃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고 생각한다. 그의 용어로 표현하면 그것은 그의 자기목적성이 과도하여 염치를 잃고 자기 이해관계를 내세운 경우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용어로 보면 그것은 뉴시스가 행한 성차별적인 인격권 침해와 인격 모독이라는 뉴시스 보도행위의 고유한 질(質)[성폭력 체제의 재생산]을 그가 인지할 능력(혹은 의사)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녀사냥의 암구호들 2: “(유)가족을 욕되게 하지 말라”

가족이라는 집단은 흔히 누구도 모욕하거나 경시해서는 안 될 ‘신성한 조직’으로 간주되곤 한다. 부모, 자녀, 혈족은 불가침의 영역이며 그 어떤 가치도 그것 위에 있지 않은 것처럼 묘사되곤 한다. 국가, 교회, 학교, 법원, 매스미디어 등이 이러한 가치관을 확대시키는 주요 기관들이다. 그래서 장자연 사건과 윤지오 논쟁에서도 유가족을 욕되게 하지 말라, 가족을 욕되게 하지말라 등의 가족주의 구호가 사람의 행동을 평가하는 절대적 가치기준인양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윤지오를 비난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만약 가족이 지배적 국가기관들이 말하는 것처럼 신성하고 불가침한 조직이라면 왜 가족의 의미는 사람들마다 다 다르게 느끼는 것일까? 가족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또 사람마다 왜 다 다른 것일까?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이 좋은 삶의 전형임에 반해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이 나쁜 삶의 표상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이 보금자리임에 반해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이 지옥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으로 인해 생명을 보장받음에 반해 어떤 사람은 가족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이 따뜻한 관계를 상징함에 반해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이 참혹한 관계를 대표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이 서로 돕고 공생하는 공동체 조직으로 나타남에 반해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이 어떤 민주적 가치도 지켜지지 않는 최악의 폭력 조직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가족에 대한 한 사회의 지배적 통념과 가족의 현실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합당한 것 같다. 가족에 대한 체험은 성별에 따라, 계급에 따라, 인종에 따라, 연령과 세대에 따라, 장애인인가 아닌가에 따라, 성적 취향, 정치적 지향에 따라 제 각각이며 다양하고 또 이질적이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신성한 공동체 조직으로서의 가족이라는 통념이 우리 사회의 일부 구성원에게 타당하고 또 바람직할런지 몰라도 그것이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타당한 생각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기관들이 가족을 신성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데에는 그만한 체제적이고 물질적인 이유가 있고 또 목적이 있다. 하나는 가족을 통해 여성의 노동을 무임금으로 착취하기 위한 것이다. 여성의 몸은 산업공장이나 사회공장과는 구분되는 신체공장으로서 그 신체가 노동력의 재생산을 주로 담당하도록 분업화되어 있다. 임신, 출산, 양육, 돌봄, 부양의 노동이 그것이다. 이것은 막대한 시간과 정성과 에너지를 요구하는 인류 재생산의 필수적 요소이다. 자본주의는 여성을 노동력 재생산 노동에 특화시키는 성별분업 체계를 구축한 후 이 재생산노동을 마치 자연을 수탈하듯 무상으로 수탈한다. 이 수탈체제를 은폐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이 재생산노동을 신성화, 신비화하는 것이다. 다양한 유형의 국가기관들에 의해 이 재생산노동은 생물학적인 것, 자연적인 것, 신성한 것 등으로, 즉 이성적 사유 너머에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신성하기 때문에 그것에 가격이 붙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노동은 노동이 아니라 헌신과 사랑이라고 묘사된다. 이런 방식으로 국가와 자본은 재생산노동을 비임금노동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가족의 신성화를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첫번째 목표는 거대한 여성노동의 비임금노동화와 그에 대한 수탈이다.

가족의 신성화가 노리는 두 번째 목표는 계급질서의 재생산이다. 그것은 가족을 독점적 상속기관으로 만드는 것에 의해 가능해진다. 자본주의 사회에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라는 두 개의 계급이 있듯이 상속과 관련하여 가족은 두 종류의 가족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상속할 양(+)의 재산을 가진 가족과 그렇지 못한 가족이 있다. 상속할 양(+)의 재산을 가진 가족은 일반적으로 부르주아 가족이다. 프롤레타리아 가족의 경우 그렇게 상속할 만한 의미 있는 재산을 갖지 못하거나 오히려 음(-)의 재산, 즉 채무를 남긴다. 그러므로 상속제가 유의미한 것은 주로 부르주아 가족의 경우다. 부르주아지는 가족 경로를 통해 유산을 상속함으로써 계급체제를 대물림하는 데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재산의 상속이 불가능하다면 부르주아지는 계급질서를 세대마다 재생산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가족을 신성화해야 할 두 번째 이유이다. 가족을 불가침의 신성영역으로 만듦으로써 자본가계급은 자본주의 질서의 재생산에 대한 노동계급과 다중의 도전을 효과적으로 봉쇄할 수 있다.

두 번째 기제는 첫 번째 기제의 성공에 의해 뒷받침된다. 여성을 노동력 재생산에 할당하는 성별분업의 유지와 막대한 무상노동의 수탈이 착취적 계급질서 재생산을 뒷받침해 준다. 전자, 즉 성별분업의 유지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가부장적 지배를 필요로 한다. 성차별주의는 이런 조건 속에서 번성한다. 가부장제 자본주의에서 여성은 그러므로 계급과는 별개의 어떤 범주라기보다 특수한 의미의 계급 개념에 속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차별과 성폭력은 계급적대가 나타나는 특수한 양상들이다. 

장자연의 죽음은 이중적 의미에서 계급적 죽음이다. 장자연이 계약직 노동자였다는 점에서 그것은 비정규직 프롤레타리아트의 죽음이다. 또 장자연이 성서비스 노동과 성폭력의 환경 속에서 죽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여성 프롤레타리아트의 죽음이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힘 없음으로 인한 고통과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음을 기록한 문건과 리스트를 남겼음에도 그것들에 대한 관리와 처분의 권한은 아주 당연한 듯이 ‘(유)가족’에게 귀속된다. 그 문건과 리스트는 한 인간을 둘러싼 사회적 적대의 조건, 그 구조와 메커니즘 및 양상에 관한 기록이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관리와 처분의 독점적 권한이 가족에게 귀속되는 것이 정당한가? 그것이 사회적 정의인가?

지금까지 알려진 정황과 사실들에 따르면 장자연 문건 및 리스트가 관리되고 처분된 과정은 이러하다. 1)2009년 2월 28일 문건 4장이 장자연(과 유장호)에 의해 작성되고 유장호에게 맡겨진 후 다음날(3월 1일) 장자연이 리스트가 포함된 3장의 편지글을 유장호에게 전달한다. 2)장자연이 유장호에게 문건과 리스트의 반환을 요구하던 중 사망한다. 3)유장호가 문건을 공개해야 할 실리적 필요성과 문건/리스트가 가족에 의해 관리되고 처분되어야 한다는 통념 사이에서 고민한다. 4)유장호가 가족과의 협의 없이 문건의 존재와 문건의 일부 내용을 언론에 공개한다. 5)유장호가 윤지오에게 문건/리스트 사본을 보여준 후, 그것을 봉은사 땅 밑에 묻어두었던 원본과 함께 유가족의 결정에 따라 소각한다. 6) 이후 유가족은, 가족 동의 없이 문건을 공개한 것에 대해 유장호와 3명의 기자를 상대로 사자명예훼손혐의로 고소한다. 7)경찰은 사자명예훼손은 술접대의 사실 여부가 가려진 후에만 적용가능하다고 보고 이 혐의는 적용하지 않았지만 유족에 대한 명예훼손혐의는 적용가능하다고 결론내린다. 등등.

이러한 과정은 한국사회에서 가족중심주의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첫째 문건과 리스트의 공개가 무엇보다 유가족의 명예를 훼손하게 된다는 법리적 판단은 한국 사회의 개인들의 행위 공과(功過)가 무엇보다도 가족에 미치는 영향을 중심으로 평가되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둘째 문건/리스트의 공개여부의 권리가 전적으로 가족의 의사에 맡겨져 있음으로써 그것을 공개한 자와 심지어 그것을 보도한 기자까지 고소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것은 가족의 이해관계 판단이 언론자유보다 상위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셋째 유가족의 결정으로 장자연 문건/리스트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소각되는데 이것은 사회적 의미를 갖는 사건의 증거물 인멸의 합법적 권리까지 가족이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실은 장자연의 죽음의 사회적 진실을 알고 국가로 하여금 그러한 사태의 재발을 방지할 제도개혁을 실행하도록 명령할 수 있는 국민-다중들의 기본적 권리와 상충한다. 국민의 이 기본적 권리와 가족의 명예인격권 사이의 상충에서 가족의 명예인격권이 우선함으로써, 장자연의 죽음의 비밀을 풀 수 있는 핵심 단서였던 문건/리스트가 소각되어 사라져 버린 것이 지금까지 이 문제가 사회적 논란으로 남게 된 조건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유가족의 권리에 대한 주장은 여기에서 더 나아간다. 김수민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윤지오가 유가족의 동의 없이 <13번째 증언>을 출판한 것이 부당하다는 논리를 폈다. 이것은 윤지오의 기본권인 사상, 표현, 출판의 자유를 유가족의 동의에 종속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유가족의 권리를 국민의 기본적 권리를 상당히 침해할 정도로까지 확장하는 논리를 선택하는 것이 만약 옳다면 국민들이 장자연 사건의 재조사와 재수사를 국민청원으로 촉구하는 것도 유가족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는 부당한 것이 될 것이며 이 사건을 재조사하는 과거사조사위원회 그 자체도 유가족의 동의 없이는 부당하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실제로 유가족들이 문건/리스트의 소각에서부터 그 문건/리스트 일부의 언론공개를 명예훼손으로 제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 일관되게 장자연 사건의 사회적 공개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해온 것을 고려하면 유가족의 동의를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에서 유가족의 동의가 증언, 조사 등 이 사건에 관련된 모든 활동의 전제라는 주장은 국민들의 기본권리에 대한 침해로 귀착될 것이다.

이런 문제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중심)주의는 윤지오의 출판증언를 비롯한 증언활동을 억압하고 비난하는 강력한 정동적 무기로 사용되었다. 특히 김수민과 그 주변 사람들이 특히 그랬다. 그들은, 윤지오의 증언활동에 반대하면서 힘으로 딸의 의지를 꺾으려한 아버지의 요구를 윤지오가 거스르는 것, 또 증언활동과 <지상의 빛>을 위해 이에 반대하는 아버지와의 관계까지 단절할 것을 고려하는 것을 ‘패륜’이라고 부른다. 패륜이란 윤리에 어그러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윤리’가 여성의 재생산노동을 무상으로 수탈하는 것의 관습적 정당화 기제를 지칭하고 사회적으로 성차별적 자본권력에 의한 성적 서비스 노동의 착취와 성폭력을 일상화하는 관념적 장치라면 어떨까? 그것이 성폭력 질서에 대한 증언을 억압함으로써 가부장질서를 안정되게 재생산하기 위한 윤리라면 어떨까? “가족을 욕되게 하지 말라”면서 윤지오를 ’패륜아’라고 비난할 때, 그 비난은 가부장적 착취체제를 정당화하고 그것에 복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것에 도전하는 사람에게 덧씌우는 억압의 굴레가 아닐까?

공통장 감수성의 징후와 예술인간-예술체제의 동선

-장자연 사건과 윤지오의 증언투쟁을 중심으로

맑스코뮤날레 <다중지성의 정원> 세션  발표개요 : 2019년 5월 25일 오후 1시~3시, 서강대 정하상관

장자연 사건 재조사의 정치적 배경

2002년 월드컵 서포터즈(응원부대) 레즈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권력장을 ‘대~한민국’이라는 국민 공통장으로 재구성하려는 다중의 욕망을 표현했다. 2008년 촛불봉기는 공통장으로서의 대~한민국이 헌법1조에 어렴풋이나마 이미 규정되어 있는 형상임음을 발견한다. ‘대한민국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민주공화국’이라는 규정이 그것이다. 이 헌법규정은 ‘주권이 자본에게 있고 모든 권력이 자본으로부터 나오는 자본공화국’의 현실과 상충하는 상태에 있었다. 수 개월간 메트로폴리스를 중심으로 전개된 촛불봉기는 국가가 자본의 이익(자유무역)을 위해 광우병이라는 반생명적 질병을 도입하는 것에 무심하다는 사실을 고발하면서 이 상충과 모순을 축소하고 ‘공통장 대~한민국’을 회복하려는 투쟁이었다.  

2014년 세월호 참사는 현실의 대한민국의 행정, 입법, 사법, 언론 등의 권력부(府)들이 국민들의 생명을 보호하기는커녕 수장시키는 기관이며 이것들이 이윤중독적 자본주의 체제를 떠받치고 있는 정치적 기둥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이때 다중들의 공통장 감수성은 미안함, 즉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로 나타났다. 그것은 자신들도 그 체제에 한 발이 묶여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공감의 정동이었다. 2016년에 이르러 2년간의 세월호 진실규명 투쟁에 의해 정부가 국민다중이 아니라 대자본에 의해 섭정되고 있음을 발견한 촛불국민들은 생명 공통장을 자본에 갖다 바치는 박근혜 대의정부를 퇴진시키고 대~한민국을 다중의 촛불공통장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다시 일어섰다. 그 최초의 성과가 국회와 헌법재판소에 대한 촛불 섭정을 통해 달성한 대통령 박근혜에 대한 파면이고 그 두번째 성과는 차기정부가 촛불정부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압박하는 것이었다. 문재인 정부가 자신을 촛불정부라고 말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2018년, “내가 겪은 성폭력”을 고발하면서 법조계, 정치권, 문화예술계 등 각계에서 터져나온 미투운동은 사회 및 생활 곳곳에 보편적으로 확산되어 있는 성폭력 체제를 가시화했다. 그것은 이른바 ‘촛불정부’가 남북관계, 한미관계, 적폐청산, 권력기관 혁신, 소득분배 등 몇몇 영역에서 거둔 일정한 개혁성과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를 온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폭로이고 도전이었다. 촛불혁명 이후의 대한민국이 여전히 성차별과 성폭력으로 분단되어 있는 현실에 대한 여성들의 이 대중적 폭로와 거부는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에 대한 전면적 여성 대중봉기의 형태로 나타났다. 미투(me-too)는 ‘미(me)’라는 특이점의 성폭력 체험과 그에 수반되는 아픔을 공통의 것으로 만들어 반-성폭력 공통장을 구축하려는 투쟁이었다. 이것은 여성에게 보편적인 체험들을 사적이고 개인적이며 특수한 수치(羞恥) 체험으로 만들어 온 권력장의 개별화 및 분할지배 테크놀로지에 대한 집단적 거부와 연합을 표현했다.  위드유(“당신과 함께”) 운동은 이 미투봉기 공통장에 대한 연대 감수성의 표현방식이었다.

미투위드유 봉기가 다중의 섭정정치의 형태로 표현된 것이 2018년 2월 장자연 사건 진상규명 청와대 국민청원이었다.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를 적폐로 규정하고 국가기구로 하여금 그것을 청산하도록 명령하는 것이 이 섭정운동의 본질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공약으로 내건 적폐청산의 틀 속에서 미투위드유 운동으로부터 제기된 장자연 사건 재조사 국민청원을 받아들여 2018년 4월 2일 장자연 사건을 과거사조사위원회의 사전조사대상으로 선정하고 5월 28일 검찰에 이 사건의 재조사를 권고했다. 이것은 미투위드유를 통해 구축된 반성폭력 공통장이 권력장의 성폭력적 구조를 개혁하도록 압박하는 섭정 사례이다.

윤지오의 증언투쟁

윤지오는 장자연과 함께 연예기획사 더콘텐츠에 소속되어 일했던 계약직 연예노동자였다. 그의 꿈은 훌륭한 배우가 되는 것이었지만 그의 꿈과 달리 계약기간 중 그의 노동력은 다중을 위한 연기가 아니라 권력자들을 위한 성적 서비스노동(식사 및 술 접대)으로 이용되었다. 그런데 더콘텐츠와 체결한 계약은 그러한 노동을, 연예활동 기회를 얻기 위한 프로모션, 이벤트, 인터뷰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러다가는 이미지만 실추되고 영영 배우가 되기는 어렵겠다고 판단한 그는 기획사 대표에게 다른 소속사에서 연예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과 계약 중도해지에 대한 반성문 및 600만원의 합의금을 지불한 후 계약을 해지할 수 있었다.

2009년 3월 7일 장자연의 사망과 장례식 후 장자연이 남긴 문구 “저는 나약하고 힘 없는 신인배우입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윤지오는 “나의 언니 장자연이 왜 죽어야 했나?”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세월호의 침몰과 승객들의 난망(難忘)한 죽음 앞에서 사람들이 느꼈던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감수성의 한 걸음 진전된 발현이었다. 그는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유장호와의 통화들을 녹취하여 수사기관에 제출하는 한편 봉은사에서 본 문건 및 리스트의 사본과 원본에 대해 진술했다. 이후 그의 삶은 윤지오로서가 아니라 장자연의 동료배우로, 그리고 장자연 문건/리스트에 대한 증언자로서 규정되었다. 여러 차례의 경찰, 검찰, 법정 증언에도 불구하고 장자연과 자신이 겪었던 부당한 대우(노예계약)에 대해서는 인정되지 않았고 ‘장자연 문건’에 등장하는 ‘힘센 자들’인 방사장 일가는 무혐의처분되고 ‘리스트’는 수사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으며 처벌은 겨우 기획사 대표들인 김종승, 유장호를 가볍게 처벌하는 것에 머물렀다. 이것이 그에게는, 언론기관이나 사법기관이 진실을 밝히기보다는 진실을 흐지부지 덮는 것을 업으로 하는 기관들이라는 것을 경험한 배신과 각성의 시간이었다.

9년 후인 2018년 한국에서 일어난 미투 봉기와 위드유 운동의 물결은 그에게 성폭력 체제와 장자연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이제 혹시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주었다. 이 기대 때문에 그는 2018년 여름 PD수첩 <故 장자연>의 인터뷰에 응했고 과거사 조사위원회 진상조사단의 증언자 요청을 계기로 마침내 장자연 사건 재조사의 증인으로 나갈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로써 윤지오는 권력이 장자연의 죽음에 대해 지난 10년간 구축해온 지배적 이미지(‘우울증-유서-자살’)에 도전하는 특이점으로, 반성폭력 공통장의 실제적 첨점으로 부상했다. 그는 한국으로 와서 조선일보 기자였던 조희천의 성추행 현장에 대해 증언했다. 윤지오의 증언을 근거로 조희천은 기소되었다. 이것은 윤지오의 증언이 실제적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시발점이었다. 이것은 2019년, 그 존재에 대해서는 유장호, 장자연 오빠, 윤지오가 공히 진술했으면서도 지금까지 아무도 그 내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진술하지 않았던 ‘장자연 리스트’의 일부 내용을 증언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것이 권력자들의 성폭력 행위 가능성에 대해 증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성폭력 체제 권력장과 가해자들의 반발이 충분히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그 반발은 아마도 재계, 정치권, 언론계, 법조계, 연예계 등의 저 ‘힘센 사람들’(장자연), ‘법 위의 사람들’(윤지오)로부터, 그리고 그 체제와 인물에 의존하고 있는 익명의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가해져 올 것이었다. 이것은 증언자가 아닌 사람들은 경험하기도 실감하기도 힘든 실제적 압력이었다.

윤지오는 이것을 회피하기보다 정면으로 맞서는 길을 택했다. 지금까지 그는 수사기관 진술증언과 언론 인터뷰에서 가명과 모자이크 처리된 가면을 사용했지만, 이제 그는 가림을 통해 자신을 방어하는 방법 대신 실명과 실면을 공개하고 증언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것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보호장치를 필요로 했다. 첫째로 그는 생존방송(라이브방송)을 통해 자신의 신체를 대중의 시선에 노출시켜 그 시선이 자신의 신체를 보호할 수 있도록 배치하는 한편 다수의 사람들과의 집단적 이동 및 회견을 통해 신체를 집합화함으로써 물리적 백래쉬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했다. 둘째로 그는 국가에 대해 자신의 개인 행동 시간에 대한 경호를 요청하고 이를 제도화할 수단으로 증인보호법 제정을 국민청원했다. 이것은 진실규명을 위한 핵심장치로서 진실증언자에 대한 국가보호를 확고히 하려는 섭정노력의 표현이었다. 또 그가 “5대 강력범죄에 속하지 않는 범죄의 증언자, 목격자, 제2의 피해자들이 실질적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시설과 24시간 경호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서 비영리단체 <지상의 빛>을 조직하고 후원계좌를 개설한 것도 반권력 공통장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말하려는 사람이 두려움 없이 그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국가 지원의 부족함을 보충할 수 있는 시민들의 자구노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근거한다. 이것은 체험한 사람만이 구체적으로 감각할 수 있는 필요였고 그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하기 위한 실천이었다.

그는 증언의 범위와 대상도 넓혔다. 지금까지는 주로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에서의 진술증언의 형식 속에서 수사관, 법관, 기자가 그 증언의 대상이었지만 그들이 진실의 사회화를 가로막는 행위자들일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JTBC, 다스뵈이다, 고발뉴스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를 통한 실시간 인터뷰 증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의 기자회견 등을 통해 다중들이 장자연 사건에 대한 좀더 직접적 앎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는 유튜브, 인스타그램 라이브방송도 다중들에게 이 사건에 관해 직접 증언할 수 있는 기회로 이용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2019년 3월 7일 장자연 10주기를 맞아 <13번째 증언>을 출판한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증언에 확고부동한 물질적 실체를 부여했고 그 물질성을 통해 다양한 유언비어들을 잠재울 수 있는 실효적 장치로 기능했다. 이러한 것들은 지금까지 경찰, 검찰, 법관, 진상조사단 등 엘리뜨의 수중에서 검토되고 자신들의 계급적 신분적 정치적 필요에 따라 인용되어온 그 증언들을 다중이 직접 읽고 검토하면서 아래로부터 장자연 사건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다중적 에너지가 분출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것들이 윤지오가 권력장 가해자들에 맞서 실명, 실면의 증언을 하기 위해 ‘영리하게’(smartly) 선택한 물질적이고 실천적인 장치들이었다.

성장하는 반성폭력 공통장을 해체하기 위한 백래쉬의 방향과 양상들

진실 공통장을 확대하고 아래로부터 다중의 참여를 불러내기 위한 윤지오의 이러한 ‘영리한’ 시도가 반발을 가져오리라는 것은 권력장과 공통장의 적대라는 우리 사회의 배치구조를 고려할 때, 그리고 다중지성 공통장의 특이점들(2008 촛불의 미네르바, 2014 세월호의 홍가혜, 2016 촛불의 혜경궁김씨)이 범죄자로 낙인찍혀 고초를 겪어온 역사를 고려할 때 충분히 예상될 수 있는 것이었다. 권력장의 백래쉬 공세는 윤지오의 증언 자체를 흔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많은 사실들이 그 증언을 뒷받침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김학의 사건, 버닝썬 사건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던 권력형 성범죄는 장자연의 죽음이 어떤 구조 속에서 전개된 것인지를 간접적으로 짐작케 하는 살아 있는 물증으로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백래쉬는 증언보다는 윤지오라는 증언자/메신저를 겨냥해서 주로 이루어졌다. 증언자를 관종, 패륜아, 거짓말쟁이, 사기꾼으로 만드는 여론몰이가 그것이었다.

가장 먼저 이루어진 공세는 한국 사회 가부장제의 대리인격체인 ‘아버지’로부터 가해진 폭력이다. 이 폭력은 <13번째 증언> 출판 직후인 3월 8일에 이루어졌다. 아버지는 딸이 장자연 사건에 증언하는 것에 반대했고 성과도 없이 끝날 그 증언이 어리석은 것임을 가르쳐주고자 했다. 이것은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의 가내수행자인 가부장이, 자신의 딸이 고 장자연 사건에 대해 증언한다면서 권력자들에게 성적 서비스 노동을 수행한 것을 공개리에 대중 앞에 발설할 때 그 증언들이 지금까지 늘 진실이 흐지부지되어온 역사를 고려할 때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역사적 직관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할 그 숨은 이력의 공개증언을 가문의 수치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사(私事)화하고 특수화하는 관점에서 나올 수 있는 통념적이고 일반적인 반응양식이다. 가부장의 폭력은 보통 가족 구성원을 자신의 재산으로 또 노예(실제로 가족의 영어표현인 family의 어원 famulus는 ‘하인’, ‘노예’라는 뜻이다)로 간주하고 그 구성원의 행위가 자신의 뜻과 위배될 때 가부장이 행사하는 처벌형식이다. 가부장은 가문의 보존과 안녕(安寧)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무릅쓴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 구성원이 자신의 뜻에 거스르면 처벌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인데, 국가는 가정에서 가부장(혹은 그 대리인들)의 이 사적 처벌 행동에 최대한 덜 관여함으로써 가부장제를 돕고 그것과 동맹하는 방식으로 가부장제 가족을 자신의 세포기관으로 포섭한다.

두번째 공세는 권력자들과 깊게 결부된 미디어들로부터 가해져왔다. 예컨대 윤지오의 증언이 사회적 설득력을 강하게 얻어서 국회에서 윤지오가 여야 국회의원들과 간담회를 가진 날(4월 7일) 뉴시스는 이후 지속될 반윤지오 공세의 밑그림과 가이드라인(“‘증인’ 윤지오와 장자연 사건”)을 권력장 행위자들에게 제공했다. 그것은 다음 다섯 가지의 내용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1)윤지오는 장자연과 친하지 않았다 2)윤지오는 고비용의 과도한 경찰보호를 받으며 생활중이다 3)윤지오는 옛날부터 유명해지는 것이 꿈이었는데 이제 장자연을 이용하여 팔로워 76만명이 넘는 SNS 스타가 됐다 4)윤지오는 장자연을 이용하여 후원계좌를 열어 돈을 벌고 있다 5)윤지오는 거짓 증언을 했으며 그의 진술은 신빙성이 없다. 이것들은, “윤지오가 친하지도 않았던 장자연에 대한 거짓 증언을 이용하여 유명세와 돈을 버는 사기행각을 하고 있다”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 것으로 윤지오를 ‘제2의 왕진진(전준주)’으로 만들어 추락시키기 위한 포석이었다.

세번째 공세는 <13번째 증언>의 북콘서트가 국회에서 열린(4월 14일) 직후에 박훈-김대오-김수민 반윤지오 트리오로부터 가해져왔다. 이들은 변호사, 기자, 작가라는 전문가 지위를 윤지오를 무너뜨리는 무기로 이용했다. 이들의 주장은 크게 보면 이미 뉴시스에 의해 생산된 반윤지오 가이드라인을 자신들의 입지에서 확대재생산하는 것이었다. 박훈은 2010년 유가족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예로 들며 윤지오가 가해자의 편이지 장자연과 그 유가족의 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김대오는 장자연 문건 ‘원본’에는 ‘리스트’가 없다고 주장했다. 김수민은 공적으로 알려진 윤지오는 자신이 사적으로 알고 있는 윤지오와는 다른 위선적 윤지오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들의 결합체는 윤지오를 관종, 위선자, 거짓말쟁이로 만들었다. 실제로는 가해자 편이면서 장자연을 위하는 것처럼 연극하여 사적 실리를 챙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네번째 공세는 가족, 미디어, 전문가로부터 가해진 앞의 세 유형의 공세를 유튜브, SNS를 통해 다른 형태로 무한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언어폭력과 결합시켜 윤지오의 인스타그램과 라이브방송에 퍼붓는 우/극우 세력들의 연합적이고 집중적인 디지털 테러공세로 나타났다. 이것은 justicewithus와 같은 디지털저격수, 무수한 댓글로 공격하는 디지털소총부대, 심지어 윤지오 지지자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은밀히 공격을 퍼붓는 디지털 편의대 등을 포함하는 다방면의 조직적 공세였다. 이것들은 한결같이 윤지오를 여자-왕진진으로 만드는 것에 집중되었다.

이 떼몰이 공세에 사용되는 언어들이 곰곰이 살펴보면 어떤 근거도 없는 거짓말, 지어낸 소문, 모욕 등이지만 그것들이 사실의 편린들과 결합하여 폭발성 있는 디지털 화약으로 기능함으로써 이 공세는 지배계급이 필요로 하는 낡은 감정질서 및 인지프레임을 선동적으로 재생산하면서 반성폭력 공통장을 해체하고 권력장의 영토를 넓혀 나갔다. 이 언어화약들은 진실의 편린들과 낡은 도덕감정, 그리고 가짜뉴스를 마구 버무려 만들어 낸 폭발물이었는데 이것들이 기술적으로 조직되고 반복적으로 사용되면 여론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재확인해 되었다. 그것의 효과는 미투-위드유 운동 이후에 윤지오의 증언에 의해 성장되어오던 반성폭력 공통장이 균열되어 그 일부가 권력장에 재포섭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장자연 사건을 다루는 과거사 진상조사단 내부의 갈등으로도 나타났다. 어떤 언론은 이것을 ‘국론 분열’로 표현했다.

예술인간-예술체제의 특이점과 그 동선

백래쉬로 나타난 권력장의 이러한 재포섭 전략에 대항하는 투쟁들은 어떠했는가? 권력장의 수복을 위한 반윤지오 공세가 개시된 후 그 전에 윤지오의 증언행동을 지지하고 뒷받침했던 언론들과 인사들의 상당부분은 방어를 하기보다 뒤로 물러나 관망하는 태도를 취했다. 주로 친문 언론들이 그런 태도를 취했다. 이것은 아마도 윤지오에 대한 법적 조력이 반문-비문 경향의 정의연대로부터 나왔다는 것과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윤지오 증언의 힘을 살려 내고 지키는 투쟁은 제도권의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거의 전적으로 비제도 성폭력 공통장 다중으로부터 주어져야 했다. 이 투쟁은, (1) 백래쉬 주장들의 허구성에 대한 사실검증 투쟁 (2) 반성폭력 공통장의 첨점이자 특이점인 윤지오를 지키기위한 투쟁  (3)장자연 사건 재수사와 특검 요구 투쟁 그리고 (4)윤지오의 자기방어 투쟁 등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백래쉬 주장들의 허구성에 대한 사실검증 투쟁은 그 주장들이 근거 없는 풍문이나 사실에 대한 편협한 해석과 오판, 혹은 과잉된 비난 욕구 등에 의해 조작된 것들임을 비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백래쉬 주장들은 특히 ‘장자연 리스트’가 없었다는 주장에 집중되었다. 이것은 장자연의 죽음이 개인적 문제이거나 기껏해야 소속 기획사의 문제이지 성폭력 권력체제나 권력자들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뒷받침하여 그 체제와 가해 당사자들을 방어하는 효과를 낳는다. 따라서 이 주장에 대한 사실 검증투쟁은 장자연 리스트가 실재했음을 확인하는 투쟁으로 나타났다. 이민석 변호사와 JTBC 이호진 임지수 기자 등의 노력은 이 문제를 다룸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SBS <그날이 알고 싶다>에서 방송된 장자연의 녹취육성도 장자연 리스트가 실재할 가능성이 높다는 방향에서 조사를 수행해 나갈 수 있는 중요한 동력을 제공했다. 이처럼 장자연이 ‘힘센 사람들’로부터 받고 있는 압력을 육성으로 표현한 것, 윤지오가 유장호와의 통화내용을 녹취하여 검찰에 제출한 녹취록에서 명단과 목록이 거론된 점, 2009-10년 사이의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이루어진 진술서(유장호, 윤지오, 장자연 오빠)에 ‘조심해야 할 사람들’의 명단 등이 진술된 점 등이 장자연의 실재성을 증거하는 물질적 증거로 사용될 수 있었다.

윤지오 지키기 투쟁은 반윤지오 백래쉬를 성폭력 체제의 자기방어와 재생산을 위한 ‘마녀사냥’으로 규정하고 그러한 마녀사냥식 공세에 대한 방어를 수행하는 한편 마녀사냥에 의해 입게 된 윤지오의 심리적 정신적 상처를 정서적 인지적 유대를 통해 치유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 그리고 윤지오가 청원한 증인보호법에 동의서명하고 증인보호법 제정을 촉구하는 1인 시위 등에 참여하는 것 등으로 나타났다.

장자연 사건 재수사와 특검 요구 투쟁은 정의연대와 녹색당 등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들 시민단체와 원외 정당은 지난 10년간의 수사가 부실수사로 드러났고 조선일보 등에 의한 수사방해 외압이 실재했던 만큼 철저한 재수사가 요구되며 이를 위해서는, 이미 장자연 사건에 연루되어 있는 기존 검찰이 아니라 특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윤지오의 자기방어 투쟁이었다. 윤지오는 4월 24일 백래쉬가 폭발하던 시점에 캐나다로 몸을 옮겨 자신의 신체를 보호한 후, 인스타그램 포스팅과 라이브방송을 중심으로 방어투쟁을 전개했다. 이것은 배우지망 신인 예술가였던 윤지오가 증언자 윤지오를 거쳐 예술인간 윤지오로 변모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이것은 성폭력 체제가 자신을 관종으로 이미지화하려는 시도에 맞서 자신을 예술인간으로 내세우고 예술인간 공통장을 구축하려는 시도였다. 그 시도들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포함한다.

첫째는 권력장과 그 파수꾼 및 십자군들을 향한 것으로 이들의 마녀사냥식 인신공격 디지털 테러의 범죄성을 고발하는 것이었다(선처 없는 처벌).

둘째는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는 공세에 대해 자신의 존엄함과 떳떳함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셋째는 누구나의 특이성과 존엄성(당신들은 놀랄 만한 존재이다. 스스로 자신을 믿는 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타인에게 증명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을 주장하고 연합한 특이자들의 힘(시민의 힘)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넷째는 요리 식사 잡담 등과 같은 생활시간을 투쟁과 연합의 시간으로 만드는 것이었다.(라이브방송)

다섯째는 투쟁을 음악, 만화, 일러스트, 시, 에세이 등의 예술형식들과 결합하는 것이었다

여섯째는 투쟁을 유머와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일곱째 이러한 예술인간적 투쟁 속에서 윤지오는 증인보호법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역설했고 증인보호를 위한 비영리단체 <지상의 빛>의 구상을 구체화했다.

이 투쟁 속에서 윤지오는 고펀드미의 펀딩을 해제하여 펀더들에게 모두 되돌려줌으로써 박훈의 사기죄 고발을 무력화시키고, 후원금을 착복했다는 비난에 대해 1원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반박하고, 디지털 댓글테러에 대한 처벌을 통해 받을 벌금을 <지상의 빛> 후원금으로 돌리겠다고 말하고, 자신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다양한 기사, 에세이, 자료들을 지지자들과 공유하여 장자연 리스트가 없었다는 친권력담론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라이브방송을 통해 시민들과의 정서적 교감을 지속하고, 좋아하는 음악의 교류를 통해 취향공통장을 확대해 나갔다. 또 진상조사단의 행보나 발표를 비롯하여 장자연 사건 조사 관련 발언들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여 지지자들과 공유하는 것도 중요한 예술인간적 실천이었다. 가족을 욕되게 한다는 비판에 맞서 그는 가부장제 전통이 말하는 혈연적 제도적 가족이 아니라 오직 현실에서 삶을 함께 나누는 특이자들의 모임(assemblage)만이 우리 시대에 필요한 가족일 수 있다는 새로운 가족형상을 제시함으로써 전통적 가족주의의 후진성과 억압성을 고발했다. 또 고인을 욕되게 한다는 비난에 맞서 그는, 살아생전에 장자연을 알지도 못했고 고인이 된 장자연의 진실규명을 위해 삶의 단 한조각도 나누지 않은 ‘자격 없는 자’들이 산 장자연을 이용한 권력자들에게 고인을 다시 갖다 바칠 목적으로 ‘고인을 이용하지 말라!’는 자가당착적 구호를 이용하고 있다고 맞섰다.

자신을 관종으로 왜곡하고 사기꾼으로 범죄화하려는 성폭력 체제와 가해의 권력장에 대항하는 이 자기방어투쟁의 과정 속에서 윤지오는 권력장의 영토를 해체하여 공통화하는 투쟁의 예술인간 특이점으로, 삶예술의 비전문가 배우/행위자(actor)로 나타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에서 공통장을 가시화하고, 지키고, 확장해온 것은 지금까지 권력이 ‘폭도'(광주의 항쟁시민들), ‘허위사실유포자'(미네르바), ‘허언증환자'(홍가혜) 등으로 불러, 죽이고 가두고 고립시켰던 사람들의 예술인간적 행동들이었다. 윤지오의 이 예술인간 증언행동도 이러한 역사적 비운을 피할 수 없을 것인가? 아니면 이 역사적 비운을 비스듬히 비켜가는 동선을, 사선(斜線)의 도주로를 열 것인가?

마녀사냥의 암구호들 1: “고인을 이용하지 말라”


산사람을 이용한 자들이 죽은 사람도 이용한다

장자연은 배우가 되고 싶었고 배우를 하고 싶었다. 신인배우가 되기 위해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권력자들에게 성서비스 노동을 강요당해야 하는 억울함을 견뎌야 했다. 소속사 사장 김종승(갑)과 맺은 노예계약 때문이었다. 윤지오의 계약서와 동일한 그 계약서에서 장자연(을)은 “연예활동 전반에 걸쳐 ‘갑’의 결정 및 지시에 충실히 따라야”(3조 바) 했고 “방송활동, 프로모션, 이벤트, 각종 인터뷰 등 ‘갑’이 제시하는 활동에 전적으로 수락하여야” 했으며 “행사불참 또는 방송사고를 일으켰을 경우 ‘을’은 ‘갑’이 제시하는 민, 형사상의 모든 책임을 져야 했다”(4조 다). ‘갑’인 김종승의 결정에 따라 지시된 성적 서비스노동은 ‘갑’에 의해 “[방송기회를 얻기 위한] 프로모션, 이벤트, 인터뷰”의 기회로 해석 및 주장되었고 계약에 따르는 의무적 활동으로 강제되었다. 이러한 노동이 부당하게 느껴져 중도해약하고 싶을 때에는 “위약벌금 1억 원과 ‘갑’이 ‘을’을 관리하기 위해 발생한 비용 중 증빙자료가 있는 모든 경비에 대하여 ‘을’은 이의제기 없이 계약 해지일로부터 일주일 이내에 현금으로 ‘갑’에게 배상하고 잔여기간 동안 발생하는 모든 모든 수익활동의 20%를 ‘갑’에게 손해배상금으로 지불”해야 했다(7조). 그러한 악조건의 중도해약마저 ‘갑’의 합의가 없으면 불가능하게 되어 있었다(6조 가). 또 ‘을’이 연예활동을 중단한다 해도, “그 기간만큼 계약기간은 자동연장”(3조 바)되도록 되어 있었다. 장자연이 체결한 계약서는 ‘갑’이 계약기간 중 철저하게 노예소유주로서 노예노동자인 ‘을’을 이용할수있는 조밀한 장치들을 빈틈 없이 갖추고 있다. 소속사는 배우가 되고자 하는 장자연의 희망을 이용하여 그의 생명력을 쥐어짜는 맷돌이었고 그 생명 에너지의 이용자=소비자는 재계, 정치계, 법조계, 언론계, 연예계의 권력자들이었다. 이것이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와 성폭력 권력이 가동되는 메커니즘이었다.   

장자연은 이러한 상황을 견딜 수 없었고 이 상황에서, 기회가 있다면, 빠져나오고자 했다. 그런데 그가 이 강제수용소에서 어떻게 빠져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 노예노동수용소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장자연의 필사적 저항과 탈출의 시도가 무엇이었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경험한 연예계를 구성하고 재생산하는 마약, 폭력, 협박, 강요, 수탈, 착취, 부당이용의 사례들을 낱낱이 적시하여 보여주고 자신을 이용한 권력자들, ‘조심해야 할’ 권력자들의 리스트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는 오늘날의 인지자본주의가 어떻게 여성들의 예술적(연예적) 능력과 성적 에너지를, 요컨대 생명력을 착취하는지를 구체적으로 폭로했고 그 착취를 수행하는 인격적 행위자들을 만천하에 드러내고자 했다. 하지만 이러한 폭로행위에는 큰 위험이 따른다. 그것은 작게는 연예계에서 고립되어 더 이상 배우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실현할 수 없게 될 위험으로부터 크게는 초법적 권력자들의 손에 가족들이 큰 피해를 입거나 자신이 목숨을 잃을 가능성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폭로의 필요와 그것이 가져올 위험 사이에서 장자연의 고뇌는 깊었다. 김종승 기획사와의 싸움에서 장자연의 폭로 문건을 자신의 기획사에 유리하게 이용하고자했던 유장호가 삭제를 요구해야 할 만큼 권력자들의 성범죄 행위에 대한 장자연의 폭로 의지는 강렬했다. 하지만 그 폭로문건이 기획사들의 소송전의 도구로 전락할 위험을 발견한 후에 그는 그러한 위험을 막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유장호에게, 그 문건을 자신의 의지 밖에서 불법적으로 유통시키지 말고 그 문건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유장호는 그 요구를 묵살한 채 자신의 유통행보를 계속했다. 이 시간, 그러니까 2009년 2월 28일 장자연이 문건과 리스트를 작성한 후 약 일주일 뒤인 3월 7일 주검으로 발견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자세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나는 힘도 없고 빽도 없고 미련도 없다”며 자신을 옥죄어 오는 ‘힘센 자들’에 대한 절규를 표현한 절박한 통화기록이 그의 심경을 가감없이 전달하는 생생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기업가들과 권력자들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를 철저하게 이용했다. 계약상의 ‘갑’인 김종승이 그를 노예노동자로 이용했고, 권력자들은 김종승을 매개로 그를 성노예로 이용했음은 분명하다. 김종승은 수사기관에서 유장호의 기획사가 자신과의 싸움에 장자연을 이용했다고 진술한다. 이상호는 이명박의 국정원이 장자연의 죽음을 당시의 법란(판사파동)이 가져올 수 있는 사회적 파장을 최소화하는 데 이용하기 위해 장자연 문건 및 리스트의 공개와 은폐의 과정에 유장호를 매개로 개입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것은 장자연이 죽기 전에 남긴 문건과 리스트조차도 정치적 이용의 도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윤지오가 증언을 시작하자마자, 아니 증언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윤지오는 ‘고인을 이용하지 말라’는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누가 장자연을 죽였는가,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를 밝히기 위한 진상조사에서 증언하는 것이 물론 고인을 생물학적으로 되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증언은 고인이 현대 자본주의의 가부장적이고 노예제적인 성폭력 체제에 저항하다 권력자들에 의해 희생된 인격임을 밝히고 가해자와 책임자를 처벌함으로써 고인의 존엄을 되살릴 수 있고 존엄의 체제를 구성하는 데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윤지오의 증언은 고인 장자연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증언자 자신이 고인 장자연을 빙의하여 말하는 것으로 증언자 윤지오의 생명을 고인 장자연과 산 장자연들을 위해 이용하는 우애와 선물의 행위이다.

그렇다면 장자연 문건과 리스트에 이름을 남긴 권력자들 및 그 권력자들이 만들어 가고 있는 체제는 증언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질 것인가? 그들이 그 이름들과 체제를 보호하려고 하는 것은 생리상 당연한 것이다. 그 이름들과 체제들이 성착취자, 성범죄자, 살생자로 역사에 기록되고 또 법률적 수사와 재수사를 받지 않게 하기위해서는 윤지오의 증언을 막아야 했다. 증언을 막는 것은 다양한 수준의 목표지점들을 갖는다. 첫째로는 증언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둘째로는 증언을 막지 못한다면 증언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셋째로는 증언을 축소시키지 못했다면 증언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넷째로 증언을 왜곡시키지 못했으면 증언자를 쓰러뜨려 증언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윤지오의 생존방송과 경호요구, 증언자보호법 청원, 비영리단체 구성 등의 노력은 증언을 끝까지 수행하면서 증언의 원천봉쇄, 축소, 왜곡의 시도들을 돌파할 수 있는 힘이었다. 권력자들이 증언자를 쓰러뜨리는 방법에 총력을 다한 것은 증언이 끈질기게 진행된 후 선택한 최후의 방법(윤지오는 이것을 ‘최후의 발악’이라고 표현한다)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권력자들이 이 최후 대공세에 ‘고인을 이용하지 말라!’는 구호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권력자들과 그 파수꾼들이야말로 살아있는 장자연을 ‘어머니 기일’에까지 이용한 자들이며 죽은 후에도 이용한 자들이다. 이들은 타인노동의 착취(이용=exploitation)를 자기재생산의 본질로 삼는 자본주의의 권력자들이고 체제의 대행자들이다. 이제 이들은 ‘고인’이라는 이름으로 장자연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고 영구화하면서 증언자 윤지오의 목소리로 귀환하고 있는 장자연의 절규를 다시 땅속 깊이 파묻으려 한다. 세월호의 생명을 수장한 바로 그 반생명적 죽음의 권력이 댓글, 고소, 고발, 보도, 유튜브 채널, 페이스북 등 온갖 수단들을 동원하여 윤지호의 증언을 아귀(餓鬼)들의 소음 속에 파묻는다. 이것은 윤지오의 목소리로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한 장자연의 절규, 그 문건과 리스트를 영원한 침묵과 어둠 속에 파묻는 여론장(與論葬)의 행렬이다. 박훈, 김대오, 김수민 트리오와 강용석, 김용호의 가로세로연구소 등이 보조를 맞추면서 “고인을 욕되게 하지 말라!”, “고인을 이용하지 말라!”고 부르짖으면서 윤지오의 은행계좌를 뒤져 불순한 기록들을 찾으려 하고 가족관계에 있는/있었던 사람들을 이간시켜 증언자를 비난하도록, 혹은 그 비난이 널리 유통되도록 도울 때 이들이, 고인이 된 장자연이 영원히 죽어 있도록, 장자연의 절규가 영원히 잊혀지도록, 고인의 주검을 결코 부활할 수 없는 죽은 시신 그대로 이용하려는 주검정치(necropolitics)의 집행위원들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이들의 이러한 행보가 본인들이 의식하건 못하건 간에 거대자본의 분식회계, 차명계좌, 자금도피, 투기놀음 등의 경제범죄와 각종 유형의 성범죄를 은폐하는 가림막이며 생명을 위한 촛불행진을 가로막았던 2008년 광화문 ‘명박산성’의 현재태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