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오의 증언을 바라보는 “가족주의”와 “순수주의” 시각에 대하여(3)

가족주의(계속): 가부장주의 가족주의 개인주의는 한 묶음

장자연의 죽음을 부끄러운 것으로, 좋지 않은 일로 독해하는 것은 책임을 죽은 장자연의 것으로 돌리는 것이고 성폭력을 행사한 권력자들을 면책하는 것이며 여성이 남성 권력자들의 성적 노리개로 취급되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가부장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유가족들이 이러한 관점을 받아들이는 것은 가부장주의가 한국 사회, 아니 본질적으로 세계 자본주의 전반의 지배체제이고 지배이데올로기라는 점을 고려하면 정황상 이해될 수 있는 일로 보인다. 페미니스트 마리아 미즈는 말한다: “여성에 대한 직접 폭력의 다양한 양상은 시대와 무관한 남성의 타고난 가학성 때문이 아니다. 이는 남성이 부와 생산적 자본을 경제적 힘이 아니라 직접적인 폭력과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통제를 통해 축적하고자 하는,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원시적 축적’ 과정의 메커니즘 때문이다.”(<가부장제와 자본주의>, 43쪽) 그런데 언론을 통해 ‘페미니스트’로 소개되고 있는 김수민 작가가 가부장주의(의 일부인 가족주의)에 공감하고 동조한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김수민 작가는 “그렇게 나에게 유가족 욕을 해 놓고선 방송이나 언론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자연언니랑 자연언니 유가족을 위해서 책을 냈다는 말을 하는 걸보고 인연을 끊어야 겠단 결심을 햇었습니다”라고 쓴다. 실제로 윤지오가 방송이나 언론 앞에서 그렇게 했는지 나는 모른다. 윤지오 배우의 유가족에 대한 비난이 단순한 “욕”이 아니라 윤지오의 “고유한 사태이해 방식”일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다. 그럼에도 윤지오가 “자연언니 유가족을 위해서 책을 냈다”는 말을 정말 했다면 그것은 그의 진심이라기보다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가족주의의 압박을 윤지오도 피할 수 없었고 그것에 타협하는 모습이라고 해석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가족주의의 성격과 한계를 문제삼는다고 해서 유가족의 말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2014년 4월 16일 이후 지금까지 자신의 가족들이 왜 죽었는가 진실을 밝히라고 수년동안 온갖 비난, 조롱, 냉대를 무릅쓰고 질문하고 항의하고 탐사하고 있는 주체들이다. 나는 이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대의정부보다 더 실제적인 생명정부로 기능해 왔다고 쓴 바 있다.(<절대민주주의>, 10장) 이것은 그 누구보다도 유가족에게 실재/진실로 육박해갈 잠재력이 있고 그것이 또 현실화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세월호를 탔던 사람중 304명은 선사, 선주, 선장, 선원들 그리고 정부의 차가운 무관심 속에서 침몰하는 배에 갇힌 채 들을 수도 없는 비명을 지르면서 죽어갔다. 장자연은 소속기획사 대표와 권력자들이 쳐놓은 야합과 착취의 거미줄에 걸려 청춘을 빨리면서 발버둥치다 죽어갔다.

윤지오 배우는 <증언> 15장 ‘끔찍한 제안’에서 자신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다. 드라마 제작사이면서 엔터테인먼트 대표인 아버지뻘 되는 남자로부터 ‘잠자리를 같이하면 자신이 제작하는 드라마에서 큰 역할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거절한 이야기다. ‘아버지로서 혹시 따님이 밖에서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어떠실 것 같으세요?’(윤지오)라는 물음에 그 남자는 화를 내며 ‘내 딸은 내 딸이고 너는 너다” “빨리 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왜 사서 고생하며 긴 시간을 뺑뺑 돌아가려 하냐?…이런 제안을 받고 싶어서 나를 만나려는 배우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냐?”라고 말한다.

대들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면 잘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가만히 있으라”는 세월호 방송과 다른가? 장자연과 윤지오는 작은 세월호를 타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은 구조되었고 또 한 사람은 구조되지 못했을 뿐이다. 김수민 작가는 촛불 국민들의 여망으로 겨우 점화된 장자연 사건 재조사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윤지오 배우에게 조언한다: “조사단인지뭔지 공식적인 그런거 아니면 하지마 도와주지 말고. 너가 해줄 필요 없잖아. 너가 손해보면서까지 해줄 필요가 뭐있어?” 이것은 사회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이 충돌할 때는 개인의 이익을 선택하라는 개인주의를 설교하는 것이다. 그런데 윤지오 배우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장자연 사건에 대해 진실을 증언할 의지를 가진 유일한 즉 대체불가능한 증언자이다! 김수민 작가는 가족의 동의가 필요하다면서 출판을 통한 증언을 막으려 했다. 그리고 나아가 진상조사단에서의 증언까지 막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왜 그랬던 것일까? 나는 대검의 과거사 진상조사단과 법무부 과거사 조사위원회가 이 점에 대해서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윤지오의 증언을 바라보는 “가족주의”와 “순수주의” 시각에 대하여(2)

  • 가족주의 관점

김수민 작가가 “13번째 증언”(이하 <증언>) 출판과정에서 유가족과 관련해 윤지오에게 조언해 준 것은 다음 두 가지다. 1)<증언>은 장자연에 관한 책이고 장자연 이름으로 홍보하게 될 것이며 거기에서 수입이 발생할 것이므로 장자연의 유가족 동의를 구해야 한다 2)유가족 동의를 구하지 않고 책을 내는 경우에는 책에서 장자연 이름을 빼야 할 것이다. 

이런 조언을 하게 되는 김수민 작가의 고유한 감성양식이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유가족의 입장을 자신의 입장으로 바꿔 생각해봄으로써 이러한 조언을 하게 되는데 그 입장바꾸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1)내 가족이 좋지 않은 사건으로 자살을 했다면 나라도 그 기억을 가슴 속 깊이 묻어버리고 싶을 것이다 2)더구나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 그 사건을 책으로 낸다면 나라도 원치 않았을 것이다 3)이에 비추어 볼 때 유가족은 장자연이라는 이름이 사람들 입방아에 다시 오르 내리는 걸 원치 않을 것이고 책의 출판을 반대할 것이다.

이것은 <증언>의 출판여부를 유가족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강한 판단을 표명하는 것이며 김수민 작가 자신이 <증언>의 출판에 심정적으로 반대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는 “<13번째 증언>이라는 책은 고 장자연님의 유가족들의 동의를 얻지 않고 진행되었고 유가족측에서는 지오가 책을 내는 걸 반대했었다고 들었습니다”라고 쓴다. 누구로부터 들었는지 밝히고 있지 않지만 어쨌든 <증언>에 대해 김수민 작가는 가족이 책의 출판을 반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책을 출판하는 것에 자신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고 이러한 입장을 “유가족의 동의를 구하라”는 방식으로  윤지오 배우에게 “몇 차례” 표명했음이 분명해 보인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김수민 작가의 감성양식(“인간의 도리”)에 비추어 보면 <증언>은 출판되어서는 안 되는 책이며 출판될 수도 없는 책이다. 왜냐하면 유가족이 이 책의 출판에 반대하고 있으며 자신이 보아도 유가족 동의 없는 책은 출판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김수민 작가는 윤지오 배우의 책과 언론 인터뷰 사이의 간극에서 “인연을 끊어야 겠단 결심”을 할 정도의 위선과 환멸을 느꼈다고 서술했지만 이미 책의 출간 여부를 둘러싼 논의과정에서부터 갈등이 발생하여 커가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윤지오 배우는 <증언>의 출판을 강하게 원하고 있었고 김수민 작가는 그것에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갈등의 성격은 무엇인가?

김수민 작가의 조언에 대한 윤지오 배오의 반응은 무엇이었을까를 먼저 살펴보자. 김수민 작가는 “장자연 유가족들은 돈밖에 모르는 인간들이다. 이 사건 덮으려고 했던 건 장자연 유가족들이라며 유가족을 모함했”다고 쓴다. 이것은 장자연을 다루는 책이고 장자연으로 홍보할 것이니 유가족의 동의를 구하라는 조언에 대해 윤지오 배우가 “저는 제가 희생하고 인터뷰 자체에서 제 얼굴 이름 공개하고 쓰는 거고 내놓고 자연언니 이야기 쓰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연예계에 전반적인 이야기를 하는 거고 그 중에 언니의 이야기는 일부분이고 이니셜로 모든 처리할거고요”라고 한 후에 “유가족은 돈밖에 모르고 저도 고인에 대해서 명예훼손하시싫고(원문대로) 그쪽 가족은 오히려 언니를 제물삼아 모든 사건을 덮고 은닉하려했엉ㅅ(원문대로)”라고 응답한 것에 대한 해석일 것이다.

‘모함’은 사전적으로 “나쁜 꾀로 남을 어려운 처지에 빠지게 함”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윤지오 배우의 말은 왜 김수민 작가에게 ‘모함’으로 해석되었을까? 김수민 작가가 유가족은 비난되어서는 안 된다, 유가족의 아픔은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다, 유가족이 “좋지 않은 사건”이 공개되는 것이 싫어서 장자연 문건의 소각을 요구하고 실행한 것은 무조건적으로 정당하다는 가족중심적 사태이해를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유대표가 제시한 장자연 문건의 소각을 강력하게 요구한 것이 유가족이었다는 데에는 증언들이 일치한다. <증언> 111쪽에는 이 문건의 소각에 이르는 유대표와 유가족 사이의 팽팽한 논란 과정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유대표는 “이 문건을 없애면 돌이킬 수 없다”, “자연이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언론에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그가 공개를 요구하는 동기가 장자연에 대한 관심이 아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무시한다). 유가족은 “왜 내 동생 이름이 또 세상에 나와야 해? 좋은 일도 아닌데… 죽은 애가 살아돌아오는 것도 아닌데!”라며 소각을 주장한다. 그 문건에 무엇이 담겨 있었는가? K 사장의 협박, 드라마촬영비를 배우에게 전가함, 어떤 감독의 술접대 골프접대 요구,  K사장의 술접대요구, K 대표의 접대강요 및 반복되는 욕설과 구타, 잠자리 강요, ㅈ일보 B 사장의 잠자리 요구, 그 아들의 술접대 … 등등이다.(<증언> 126, 127쪽)

김수민 작가가 장자연 사건을 “좋지 않은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유가족도 “좋은 일이 아닌” 것으로 바라본다. 이것은 누구의 시선일까? 장자연 문건의 작성맥락이 이해관계 투쟁이었음을 이제 우리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하지만 문건에 서술된 것은 장자연이 차마 말못하고 있었던 “억울함과 한”의 기록이었음이 이 맥락 때문에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가족의 선택들이 주어진다. 분노할 것인가 부끄러워할 것인가? 장자연과 공감할 것인가 장자연을 대상화할 것인가? 다시 말해 장자연 입장에 설 것인가 내/가족의 입장에 설 것인가? 아니 사회적 존재로서의 장자연 입장에 설 것인가 개인적 존재로서의 장자연 입장에 설 것인가? 권력자들이 잘못이라는 입장에 설 것인가 장자연이 잘못이라는 입장에 설 것인가? 궁극적으로 “좋지 않은 것”은 권력자인가 장자연인가, 권력자가 책임져야 하는가 장자연이 책임져야 하는가, 이것이 문제로 주어진다.

내가 보기에 가족들은 후자의 관점을 받아들였고 김수민 작가도 후자의 관점에 공감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자의 관점을 받아들였다면 문건은 소각되어서는 안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권력자들에게 책임을 묻고 권력형 성폭력을 억제하는 장자연의 소중한 증언이자 “인간의 도리”를 지시하는 안내판으로 기능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윤지오 배우의 말 “그쪽 가족은 오히려 … 모든 사건을 덮고 은닉하려했엉ㅅ”는 이런 맥락에서 재해석된다면 결코 ‘모함’으로 규정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윤지오 배우 고유의 사태이해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윤지오 배우는 <증언>의 맨 마지막 문장을 “나는 말한다. ‘내 잘못이 아니야, 네 잘못도 아니야’”(245: 나는 여기서 ‘네’를 ‘자연 언니’로 해석한다)로 끝맺으면서 “죽음으로 말하려 했던 언니의 고통이 다시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는 그 기억들을 피하지 않고 다시 마주했다”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윤지오의 증언을 바라보는 “가족주의”와 “순수주의” 시각에 대하여(1)

1.

윤지오 배우의 “13번째 증언” 전에 장자연 사건에 대한 한국사회의 “지배적 진실”(사법적 진실)은  우울증-유서-자살이었다. 이 선언된 진실과 모순되는 다양한 사실들과 진술들, 기사들에도 불구하고 장자연의 죽음의 원인은 우울증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질병에 있는 것으로 판결되었다.

윤지오 배우의 “13번째 증언”은 유서는 없었으며 문건만이 있었고 그것은 이해관계 투쟁 속에서 자의반타의반으로 작성되었을 수 있는 것임을 확인했고 그 문건이 장자연의 죽음에 원인을 제공했을 수 있는 여러 사람(대개는 재계 언론계 정치계 문화계 법조계 등의 권력자들)의 이름과 직함(이른바 ‘장자연 리스트’)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증언은 이전의 “지배적 진실”이 잘못된 것이었고 사태를 재조사해서 참된 진실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최근 김수민 작가, 김대오 기자, 박훈 변호사(김김박)는 윤지오 배우의 증언은 거짓말이라고, 즉 1)윤지오는 ‘장자연’ 리스트를 본 적이 없다 2)윤지오는 거짓말로 대중을 속여 인세, 후원금, 해외펀딩으로 돈벌이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한편 윤지오 배우를 명예훼손, 모욕죄로 고소하고 또 사기죄로 추가고소할 것임을 예고했다. 이러한 폭로 및 사법 행동은 대검찰청 검찰과거사 진상조사단이 장자연의 성폭력 피해 의혹에 대해 검찰 수사가 필요하다고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에 요청한 시점과 일치한다. 이제 윤지오 배우의 증언은 진실성을 의심받기 시작했고 이 논란 여부에 따라 검찰 재수사가 이루어질 것인가 말 것인가가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김김박 문제제기와 고소(이하 “김김박론”)의 실제적 효과는 법무부 과거사조사위원회 내부에 이견을 낳고 국민적 여망으로 부상한 장자연에 대한 권력형 성폭력 사건 재조사 문제를 위기에 빠뜨리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재조사가 없다면 우울증-유서-자살이라는 기존의 진실담론이 더욱 더 공고하게 굳어질 것이고 권력형 성범죄는 없었던 것으로 귀착될 것이다. 이것은 2018년 미투 운동 이후 한국 사회 각계에서 무수히 제기되고 또 확인된 권력형 성범죄의 실재와 상충하는 진실이 장자연 사건을 이해하는 진실로 굳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제 누구나 거짓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된 낡은 “사법적 판단”이 “진실”로 행세하게 된다는 뜻이다.

어쨌건 증언에 대한 의혹제기와 고소가 있는 만큼 윤지오 배우의 증언을 둘러싼 “사실이 무엇인가?”는 조사와 판결을 기다려 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김김박론”은 특정한 도덕적 정치적 관점을 전제하고 있고 그 관점에 윤지오 배우의 증언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을 왜곡하는 요소들이 들어 있다고 보기 때문에 나는 사실이 무엇인가가 드러나기를 기다리면서 여기서는 드러날 사실들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김김박론”에서 내가 발견하는 것은 두 가지 편향된 관점이다.  그것은 가족주의와 순수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이제 이 두 가지 관점의 문제에 대해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권력형 성폭력 사건(장자연의 경우)의 현상태와 문제에 대한 메모

1.

‘장자연 사건’이라고 불리는 사건은 언론계 재벌 정치권 사법부 전반에 걸쳐 있는 권력의 여성 착취가 본질이다.

착취의 방식은 특정한 기획사/연예기업(의 불법 탈법 사법적 실리)을 봐주는 조건으로 성상납을 받는 것.

김학의 사건, 승리-정준영 사건 등에서 확인되듯이 이것은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지만 다른 곳보다도 연예산업에 특히 집중되어 있고 연예노동자가 주요 타겟이 된다.

연예산업의 기획사들은 성상납을 위해 자신에게 소속된 연예인들을 성노예로 만든다.

위약금이 그 족쇄다.

윤지오는 위약금을 내고 그 족쇄에서 풀려난 연예노동자.

장자연은 풀려나지 못했던 연예노동자.

2.

지난 10년간 권력은 검찰과 경찰의 수사가 혐의없음으로 나오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즉 법률적으로 권력의 여성착취가 부재하는 것으로 나타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증언과 증거들, 그리고 상식은 권력의 여성착취가 실재했고 또 실재함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모든 증언, 증거들의 진실규명력은 권력 앞에서 무력했다.

3.

윤지오는 장자연이 성추행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실명, 실면으로 진술했다.

장자연 문건에 쓰인 이름들을 보았다고 했다.

<13번째 증언>으로 그 진술을 공론화했다.

이것이 성폭력을 다시 쟁점화한 “실명 실면 증언의 힘”이다.

수사와 처벌을 재론할 수 있는 사회적 힘이다.

이 힘으로 고발뉴스 뉴스룸 뉴스공장 엠비시 CBS 등을 움직여 성폭력의 실재를 사회쟁점화했다.

과거사조사위원회를 움직였고 국회의원을 움직였다.

청와대가 움직일 수 있을까가 관건이었다.

4.

이런 상황에서 김수민 작가는 윤지오 증언의 진실성에 대한 의심을 제기했다.

증언이 순수하지 않고 개인 영달(돈벌이, 출세)이 목적이라는 것이다.

유가족을 비난했다는 것이다.

장자연 문건 원본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장자연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증언을 할만큼 장자연과 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폭력 문제를 재점화한 “실명 실면 증언의 힘”을 뺌으로써 권력형 성폭력의 실재를 의심하고 궁극적으로 사라지게 만드는 휘발장치다.

장자연은 다시 단순한 우울증의 희생자로 규정될 위기에 처해있다.

실제로 윤지오의 420 특별수사단 청와대 청원은 무력화되고 있다.

이것은 다시 성착취 권력이 힘을 회복하고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다.

5.

지금까지 확인한 자료를 기초로 김수민 작가의 문제 제기에 대해 판단하건대 거기에 다시 거꾸로 질문할 수밖에 없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고 느낀다.

-증언은 영리하면 안 되고 순수해야 하는가? 권력과 맞서는 증언일 수록 영리해야 하지 않는가?

-장자연의 부모가 장자연 사망 전에 이미 사망한 상태에서 장자연의 유가족은 누구인가? 오빠를 비롯한 유가족이 오직 장자연만을 위하는 “순수한” 상태에 있다고 전제할 수 있는가? 때로는 “유가족주의”가 진실규명에 장애물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책을 판매해서 인세를 받고 증언자 보호단체를 만들어 모금을 하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인가? 이것은 증언의 힘을 높이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일 수도 있지 않은가? 증언에는 보상받을 수 없는 많은 비용이 들지 않는가? 그것이 한국 사회에서 증언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윤지오의 증언내용이 실재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있는가? 그것을 거짓으로 단정할 증거가 있는가?

-왜 증언의 객관적 내용을 문제삼지 않고 증언의 의도 등 주관적 정황을 문제삼는가?

-윤지오의 증언 동기를 김수민 작가는 의심한다. 같은 의심은 김수민 작가의 반론동기에도 주어질 수 있다. 김수민 작가는 지금 왜 윤지오의 진술에 대한 의심을 제기하는가?

-윤지오 진술에 대한 의심과 신빙성 문제를 쟁점화함으로써 장자연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객관적 사태에 대한 수사와 진상규명은 회복불가능한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 분명한데 이에 대한 김수민 작가의 생각과 입장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