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연 리스트” 논란과 그 성격에 대해(1)

현재 “장자연 리스트”가 경찰이나 검찰의 수중에 없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장자연 문건 사본을 보도한 kbs도 리스트를 입수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장자연 문건의 실재를 처음 알렸고 그 “원본”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김대오 기자가 “목숨을 걸고 리스트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김대오 기자가 리스트를 보지 못했다고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하지만 리스트를 본 두 사람이 있다. 그것은 윤지오 배우와 전 호야엔터테인먼트 대표 유장호다. 윤지오배우가 리스트를 보았음을 입증하는 자료들은 다음 네가지다.

1)십 수 차례에 걸친 수사기관 및 진상조사단 증언들과 무엇보다도 대중 앞에 공개적으로 내놓은 증언인 <13번째 증언>의 11장: 여기서 윤지오 배우는 봉은사에서 유장호 대표로부터 문건의 사본을 넘겨받아 보았고 봉은사 땅밑에서 꺼내온 원본을 장자연 씨의 친언니가 읽는 것을 함께 보았고 소각하는 것도 보았다고 말한다.    

2)유장호의 수사기관 초기 진술: 여기에서 유장호는 문건을 윤지오에게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3)고 장자연 배우의 오빠의 진술: 이 진술에서 장자연의 오빠는 문건의 원본과 사본을 보고 태운 현장에 윤지오가 있었다고 말한다 

4)유장호와 윤지오 사이의 통화 녹취록: 이 통화기록에서 유장호는 경찰에 자료를 넘길 때 장자연이 술접대한 사람 ‘목록’은 넘기지 않을 셈이라고 윤지오에게 말한다.

등이다. 

1년 넘게 장자연 사건을 취재해 왔다는 kbs 이지윤 기자는 ‘‘장자연 리스트’는 실재했나? 기록으로 살펴본 ‘장자연 리스트’의 모든 것”(2019년 4월 24일)에서 이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이런 모든 정황을 종합해보면 윤(지오) 씨가 최소한 장자연 문건을 봤다고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일 겁니다.”(https://news.kbs.co.kr/news/view.do?ncd=4187063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수민-김대오-박훈 그룹은 우파 유튜브 채널인 가로세로연구소의 강용석-김용호-김세의와 보조를 맞추면서 “장자연 리스트는 없었다.”고 주장해 왔고 이것은 제도 언론들을 통해 무차별적으로 보도됨으로써 강력한 여론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리스트는 없었다는 이들의 주장은 “윤지오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거짓말하고 있다”는 인신공격 주장으로 발전되었고 다시 그것은 “윤지오는 돈벌이를 목적으로 증언자로 나섰다”는 음해와 모욕 주장으로까지 발전되었다. 그 주장이 주장을 넘어 행동으로까지 발전한 것이 박훈 변호사의 윤지오에 대한 고소와 고발이다. 이것의 정치적 효과가 윤지오 증언자의 증언 자격을 박탈하는 것이고 그 증언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며 재수사의 사유를 제거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가해 권력자들을 보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이들이 장자연 리스트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핵심적 근거는 무엇인가?

1)술자리에서 김수민이 윤지오로부터 들었다는 말: ’윤지오가 리스트를 봉은사가 아니라 수사기관에서 봤다고 했다’.

2)김대오 기자의 증언: 유장호를 만나 입수한 문건에는 리스트가 없었다. 

2)부터 살펴보자. 김대오 기자가 장자연 리스트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유장호의 위 통화기록을 통해 간단히 해석할 수 있다. 유장호가 보여준 문건에서 김대오 기자가 “보지 못했으니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보지 못한 것”은 “없는 것”과 다르다. 우리가 공기 중의 세균을 보지 못한다고 해서 공기 중에 세균이 없는 것은 아니다. 통화기록을 보면, 유장호는 경찰에게 ‘목록’(리스트)은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 기자인 김대오에게 유장호가 ‘목록’(리스트)을 보여주지 않은 것은 한국 사회에서 경찰과 기자의 사회적 위치와 역할을 고려하면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해된다. 그러므로 김대오 기자가 “(이름이) 일목요연하게 (나열된) 리스트는 원본 속에서 없었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놓는데 이것은 목숨을 너무 값싸게 내놓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이라도 자신의 착오와 지나침에 대해 시민들께 사과하고 “내가 본 문건에서 나는 리스트를 본 적이 없다.”고 있는 그대로 발언을 정정하는 것이 신상에 좋으리라 본다.(계속)

보론: <윤지오의 증언을 바라보는 ‘가족주의’와 ‘순수주의’ 시각에 대하여>의 쟁점들

::다중지성의 정원 페이스북에 공유된 나의 글 <윤지오의 증언을 바라보는 ‘가족주의’와 ‘순수주의’ 시각에 대하여> 에 대한 댓글과 그에 대한 나의 답변이다. 누가 말했는가는 중요하지 않으므로 여기에서는 댓글자의 아이디 대신 Response의 R로 대체하고 부분적으로 문장을 수정했다. 댓글을 달아준 분께 감사드린다.(Amelano Joe)

R1: 2009년 당시 윤지오 증언 때문에 장자연 사건의 가해자들이 처벌 받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윤지오씨가 제대로 된 증언자라면 사과는 하고 시작했어야 했지요. 무슨 사과를 했나요? 장자연씨 죽음의 진실을 알리고 싶다기 보다 본인 이름을 알리고 싶었던 사람이었다고 봅니다. 고 장자연사건의 목격자이자 증언자라는 분이, 하루에 한시간씩만 자고 목숨에 위협을 느낀다는 분이..!인스타라이브로 협찬 화장품 파는거보고 경악.

R1에 답합니다.

1. 장자연 사건 재조사는 권력형 성폭력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누가 범죄자인가, 어떻게 해야 이러한 범죄를 방지할 수 있는가를 살피기 위한 조사이지 증언자 윤지오가 정직한 사람인가 부정직한 사람인가, 선한 사람인가 악한 사람인가 등 그의 인격에 대한 조사가 아닙니다.

2. 윤지오 배우가 개인 방송(인스타라이브)에서 협찬화장품 파는 것(‘티글’)에 ‘경악’하신다면 JTBC가 자동차를 파는 것(‘대들보’)을 보실 때는 어떤 느낌이신지요? 

3. 윤지오 배우의 증언 때문에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이 미미했고 유가족이 보잘 것 없는 피해보상만 받았다는 박훈 변호사의 논변은 사법판결이 증언 하나에 좌우된다고 보는 소박한 생각이라고 봅니다. 특히 장자연 사건처럼 권력자들이 판결의 향방을 뒤흔드는 정치적 사건에서, 만약 윤지오가 다르게 증언했으면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엄중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판결의 책임을 이제 갓 스물두살의 단역배우인 증인 여성에게 뒤집어 씌우고 성폭력체제와 그 권력의 전략전술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자학적 사고방법이라고 봅니다. 윤지오 배우가 강요를 인정했다면 어떤 방법으로도 가해자를 면책시킬 구실을 만들어 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지난 10년간 이 사건을 둘러싼 사법사를 고려할 때 정황상 더 합리적인 추론일 것이라고 봅니다.

4. 그런데 윤지오 배우는 <13번째 증언>에서도 자신의 경우에 강요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윤지오 배우가 당시 (아니 어쩌면 지금도) 강요를 직접적 강요나 폭력으로만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장자연 배우와 자신을 옥죄이고 있는 구조적/계약적 폭력과 강요를 ‘강요’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현재 한국의 사법체제도 이 구조적 강요를 ‘강요의 범죄’(강요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바로 이 구조적 강요의 포로입니다. 2009년 재판과 관련하여 한 가지 고려사항을 더 추가한다면 윤지오 씨는 장자연 씨의 죽음 이후에도 살아야 했고 또 배우로서 살고자 했으며 연예계는 바로 그 가해자들이 쥐고 흔드는 권력무대였다는 점입니다. 만약 R1 님이 윤지오 씨와 동일한 경우의 증인으로 법정에 선다면 어떻게 증언하시겠는지요? 이 두가지 사항을 고려하고서도 윤지오 씨가 사과를 해야 할까요?

5. “장자연씨 죽음의 진실을 알리고 싶다기 보다 본인 이름을 알리고 싶었던 사람이었다고 봅니다.”는 R1 님의 주장은 첫째 항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번 사태의 본질과 무관한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으로 화살을 윤지오 배우에게 돌릴 때 성폭력의 당사자들과 성폭력 체제는 쾌재를 부를 것입니다. 윤지오 배우를 증언자로 한국으로 부른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들, 즉 촛불국민입니다. 증언자가 선인, 영웅, 투사여야 할 이유가 있는지요? 증인은 사실에 대한 증언을 하는 사람이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대한 증언을 해줄 사람이라면 평소에 거짓말쟁이거나 사기꾼이거나 도둑이거나 강도거나 심지어 살인자라 할지라도 우리들에게는 소중하므로 그가 ‘사실’에 대한 증언만을 해주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왜 그 증언자가 그 ‘증언’ 때문에 여론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요? 게다가 촛불국민의 여망을 받들어 자신이 다칠 위험을 무릅쓰고 국민이 필요로 하는 사실을 증언해 준다면 (그가 증언 외의 삶에서 무엇을 하건) 그 증언만으로 국민들이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요?   

R2: 진정성을 갖고 재수사를 준비하는 거였다면, 그때의 판결문으로 공격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알수 있었을테지요. 사과를 하고 출발하는 것이 옳았을 것 같고. 순간순간의 거짓말이라든지 태도논란, 돈이 먼저인듯한 행동들은 결국 고인이 된 장자연씨를 이용한 자기 정치일 뿐. 재수사와는 거리가 멀어보여요. 책을 내기 전에 고인 가족들에 최소한의 협의는 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절차는 생각보다 중요한 것이니까요.. 재수사에 방아쇠를 당긴 사람들이 윤지오에게 놀아난 꼴처럼 되어버린 상황이 황망하고 당황스러워서.. 더욱 화가 나네요.

R2에 답합니다.

1. 윤지오 씨는 “진정성을 갖고 재수사를 준비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왔습니다. 물론 한국 정부의 그 요청은 촛불국민의 재수사 요구에 수동적으로 응한 것이구요. 윤지오씨는 한국 정부의 증언 요청에 ‘증언이 자신을 더 위험하게 하므로 오고 싶지 않다’는 거절 의사를 표했으나 거듭된 요청에 부득이 오게 된 것입니다. 증언자 윤지오 씨에게 진정성의 자격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며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만약 윤지오 씨에게 진정성이 없다고 느껴 환멸을 느끼신다면, 그것은 윤지오 씨의 책임이 아니라 환멸을 경험하는 R2 님 자신의 문제일 것입니다.

2.윤지오 씨의 말 중에 거짓말로 ‘확인’된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많은 사람들이 윤지오 씨의 증언을 이미 거짓으로 단정하고 있는데, 그 증언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조사와 수사를 통해 확인해야 할 문제입니다. ‘윤지오의 증언은 거짓’이라는 말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선동이지 진실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윤지오 씨의 증언이 유효하다는 것은 윤지오 씨 논란이 터진 이후에도 과거사진상조사단과 과거사조사위원회에서도 확인해준 사실입니다.

3.윤지오 씨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윤지오 씨의 그 사나와 보이는 표정과 기자들 앞에서의 오만한 태도가 역겹다고 말합니다. 나는 윤지오 씨가 남성 기자들 앞에서 취한 그 ‘오만’해 보이고 ‘사나와’ 보이는 표정과 태도야 말로 권력에 굴종하는 팬시 여성상과는 다른 새로운 여성상을 보여준 백미라고 생각합니다.

4.돈이 먼저인 듯한 행동들이 있었던가요? 인세 12%? <13번째 증언> 같은 이슈파이팅하면서 많은 판매부수가 예상되는 도서에 대해서는 결코 높은 인세가 아닙니다.(참고로 나는 출판인입니다.) 후원계좌, 해외펀딩? 무엇이 돈이 먼저인 듯한 행동인지요? 답해 주신다면 그에 대해 제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5.윤지오씨가 가족들과 협의했는지 않았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김수민 작가가 <증언> 출판에 대한 가족들의 반대가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정보의 출처가 윤지오 씨라면 협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봐야 하겠지요. 협의는 반드시 동의를 포함하지는 않습니다.) 즉 유가족들의 정확한 뜻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김수민 작가가 가족의 뜻의 ‘대의자’로 자임하고 있을 뿐입니다. 혹시 가족의 입장 표명이 있다면 알려주십시요. 경청하겠습니다.

6.재수사에 방아쇠를 당긴 사람들은 촛불국민과 미투운동입니다. 윤지오 씨는 이들을 뒤흔들 수 있을 만큼 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촛불국민과 미투운동의 재수사 요구를 뒤흔들고 있는 것은 윤지오 씨가 아니라 윤지오 씨의 인격에 대한 공격을 통해 그의 증언을 무력화시키고 재수사를 방해하고 있는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와 그 파수꾼들입니다. 

7.‘황망’과 ‘당황’이야말로 그들이 우리들 속에 불러일으키려는 바로 그 심리적 효과입니다. ‘화’를 윤지오 씨가 아니라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와 그 작전세력에게 돌려야 할 때입니다.

윤지오의 증언을 바라보는 “가족주의”와 “순수주의” 시각에 대하여(1)

1.

윤지오 배우의 “13번째 증언” 전에 장자연 사건에 대한 한국사회의 “지배적 진실”(사법적 진실)은  우울증-유서-자살이었다. 이 선언된 진실과 모순되는 다양한 사실들과 진술들, 기사들에도 불구하고 장자연의 죽음의 원인은 우울증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질병에 있는 것으로 판결되었다.

윤지오 배우의 “13번째 증언”은 유서는 없었으며 문건만이 있었고 그것은 이해관계 투쟁 속에서 자의반타의반으로 작성되었을 수 있는 것임을 확인했고 그 문건이 장자연의 죽음에 원인을 제공했을 수 있는 여러 사람(대개는 재계 언론계 정치계 문화계 법조계 등의 권력자들)의 이름과 직함(이른바 ‘장자연 리스트’)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증언은 이전의 “지배적 진실”이 잘못된 것이었고 사태를 재조사해서 참된 진실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최근 김수민 작가, 김대오 기자, 박훈 변호사(김김박)는 윤지오 배우의 증언은 거짓말이라고, 즉 1)윤지오는 ‘장자연’ 리스트를 본 적이 없다 2)윤지오는 거짓말로 대중을 속여 인세, 후원금, 해외펀딩으로 돈벌이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한편 윤지오 배우를 명예훼손, 모욕죄로 고소하고 또 사기죄로 추가고소할 것임을 예고했다. 이러한 폭로 및 사법 행동은 대검찰청 검찰과거사진상조사단이 장자연의 성폭력 피해 의혹에 대해 검찰 수사가 필요하다고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에 요청한 시점과 일치한다. 이제 윤지오 배우의 증언은 진실성을 의심받기 시작했고 이 논란 여부에 따라 검찰 재수사가 이루어질 것인가 말 것인가가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김김박 문제제기와 고소(이하 “김김박론”)의 실제적 효과는 법무부 과거사조사위원회 내부에 이견을 낳고 국민적 여망으로 부상한 장자연에 대한 권력형 성폭력 사건 재조사 문제를 위기에 빠뜨리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재조사가 없다면 우울증-유서-자살이라는 기존의 진실담론이 더욱 더 공고하게 굳어질 것이고 권력형 성범죄는 없었던 것으로 귀착될 것이다. 이것은 2018년 미투 운동 이후 한국 사회 각계에서 무수히 제기되고 또 확인된 권력형 성범죄의 실재와 상충하는 진실이 장자연 사건을 이해하는 진실로 굳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제 누구나 거짓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된 낡은 “사법적 판단”이 “진실”로 행세하게 된다는 뜻이다.

어쨌건 증언에 대한 의혹제기와 고소가 있는 만큼 윤지오 배우의 증언을 둘러싼 “사실이 무엇인가?”는 조사와 판결을 기다려 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김김박론”은 특정한 도덕적 정치적 관점을 전제하고 있고 그 관점에 윤지오 배우의 증언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을 왜곡하는 요소들이 들어 있다고 보기 때문에 나는 사실이 무엇인가가 드러나기를 기다리면서 여기서는 드러날 사실들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김김박론”에서 내가 발견하는 것은 두 가지 편향된 관점이다.  그것은 가족주의와 순수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이제 이 두 가지 관점의 문제에 대해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권력형 성폭력 사건(장자연의 경우)의 현상태와 문제에 대한 메모

1.

‘장자연 사건’이라고 불리는 사건은 언론계 재벌 정치권 사법부 전반에 걸쳐 있는 권력의 여성 착취가 본질이다.

착취의 방식은 특정한 기획사/연예기업(의 불법 탈법 사법적 실리)을 봐주는 조건으로 성상납을 받는 것.

김학의 사건, 승리-정준영 사건 등에서 확인되듯이 이것은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지만 다른 곳보다도 연예산업에 특히 집중되어 있고 연예노동자가 주요 타겟이 된다.

연예산업의 기획사들은 성상납을 위해 자신에게 소속된 연예인들을 성노예로 만든다.

위약금이 그 족쇄다.

윤지오는 위약금을 내고 그 족쇄에서 풀려난 연예노동자.

장자연은 풀려나지 못했던 연예노동자.

2.

지난 10년간 권력은 검찰과 경찰의 수사가 혐의없음으로 나오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즉 법률적으로 권력의 여성착취가 부재하는 것으로 나타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증언과 증거들, 그리고 상식은 권력의 여성착취가 실재했고 또 실재함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모든 증언, 증거들의 진실규명력은 권력 앞에서 무력했다.

3.

윤지오는 장자연이 성추행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실명, 실면으로 진술했다.

장자연 문건에 쓰인 이름들을 보았다고 했다.

<13번째 증언>으로 그 진술을 공론화했다.

이것이 성폭력을 다시 쟁점화한 “실명 실면 증언의 힘”이다.

수사와 처벌을 재론할 수 있는 사회적 힘이다.

이 힘으로 고발뉴스 뉴스룸 뉴스공장 엠비시 CBS 등을 움직여 성폭력의 실재를 사회쟁점화했다.

과거사조사위원회를 움직였고 국회의원을 움직였다.

청와대가 움직일 수 있을까가 관건이었다.

4.

이런 상황에서 김수민 작가는 윤지오 증언의 진실성에 대한 의심을 제기했다.

증언이 순수하지 않고 개인 영달(돈벌이, 출세)이 목적이라는 것이다.

유가족을 비난했다는 것이다.

장자연 문건 원본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장자연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증언을 할만큼 장자연과 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폭력 문제를 재점화한 “실명 실면 증언의 힘”을 뺌으로써 권력형 성폭력의 실재를 의심하고 궁극적으로 사라지게 만드는 휘발장치다.

장자연은 다시 단순한 우울증의 희생자로 규정될 위기에 처해있다.

실제로 윤지오의 420 특별수사단 청와대 청원은 무력화되고 있다.

이것은 다시 성착취 권력이 힘을 회복하고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다.

5.

지금까지 확인한 자료를 기초로 김수민 작가의 문제 제기에 대해 판단하건대 거기에 다시 거꾸로 질문할 수밖에 없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고 느낀다.

-증언은 영리하면 안 되고 순수해야 하는가? 권력과 맞서는 증언일 수록 영리해야 하지 않는가?

-장자연의 부모가 장자연 사망 전에 이미 사망한 상태에서 장자연의 유가족은 누구인가? 오빠를 비롯한 유가족이 오직 장자연만을 위하는 “순수한” 상태에 있다고 전제할 수 있는가? 때로는 “유가족주의”가 진실규명에 장애물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책을 판매해서 인세를 받고 증언자 보호단체를 만들어 모금을 하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인가? 이것은 증언의 힘을 높이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일 수도 있지 않은가? 증언에는 보상받을 수 없는 많은 비용이 들지 않는가? 그것이 한국 사회에서 증언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윤지오의 증언내용이 실재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있는가? 그것을 거짓으로 단정할 증거가 있는가?

-왜 증언의 객관적 내용을 문제삼지 않고 증언의 의도 등 주관적 정황을 문제삼는가?

-윤지오의 증언 동기를 김수민 작가는 의심한다. 같은 의심은 김수민 작가의 반론동기에도 주어질 수 있다. 김수민 작가는 지금 왜 윤지오의 진술에 대한 의심을 제기하는가?

-윤지오 진술에 대한 의심과 신빙성 문제를 쟁점화함으로써 장자연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객관적 사태에 대한 수사와 진상규명은 회복불가능한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 분명한데 이에 대한 김수민 작가의 생각과 입장은 무엇인가?

위안부 문제와 김지은 문제

안희정 무죄 판결에 대해 민주당이 침묵한 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연설에서 문재인은 이렇게 말한다.

1. 위안부 할머니들이 철저한 고립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위안부 문제의 존재를 드러내고 국제사회의 관심과 논의를 진전시켰다.

‘27년 전 오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故 김학순 할머니가 생존자 중 처음으로 피해사실을 공개 증언했습니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할머니들의 당당하고 용기 있는 행동이 이어졌습니다. 그 용기가 이 뜻깊은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 대한민국은 할머니들께 많은 것을 빚졌고,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광복 후에도 오랜 세월 은폐되고 부정되었습니다. 할머니들은 가족들에게도 피해사실을 말하지 못한 채 고통을 안으로 삼키며 살아야했습니다. 국가조차 그들을 외면하고, 따뜻하게 품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복원해낸 것은 국가가 아니라 할머니들 자신이었습니다. 침묵의 벽을 뚫고 나온 할머니들은 거리에서, 강연장에서, 법정에서, 한국에서, 일본에서, 또 세계 각국에서 피해사실을 증언하고 호소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과 연대의 폭이 크게 확장되었고, 아시아 다른 나라의 피해자들에게도 용기를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 중의 여성인권과 성폭력 범죄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과 논의를 크게 진전시켰습니다.’

2. 위안부 문제는 인류 보편적 여성 인권의 문제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일 양국 간의 역사문제에 그치지 않고 전시 여성 성폭력의 문제,
인류 보편적 여성 인권의 문제입니다. 유엔의 모든 인권기구와 세계 여러 나라에서 거의 매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결의가 채택되고 권고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자신들의 명예회복 요구에 머무르지 않고 나비기금을 통해 전시 성폭력 피해자 지원에 나서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파봤기에 그 사람들이 얼마나 아픈지 압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울림이 너무도 큽니다. 할머니들은 자신의 고통과 아픔을 승화시켜 이 순간에도 인권과 평화를 실천하고 계십니다. (…)

우리는 내일 광복 73주년을 맞습니다. 하지만 이미 고령이 되신 피해자 할머니들께는 여전히 광복은 오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마음이 무겁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존엄과 명예를 회복하고, 마음의 상처가 아물 때 비로소 해결될 수 있습니다.’

3. 피해자 중심 문제해결이 국제사회의 인권규범이고 이 규범에 따라 세계 여성인권과 평화의 가치를 실천하겠으며 진실을 외면한 역사를 바로잡고 정의를 세우겠다.

‘정부는 피해자 할머니들과 지속적인 소통에 성의를 다할 것입니다. 피해자 중심 문제 해결이라는 국제사회의 인권규범에 따라, 할머니들을 문제해결의 주체로 존중하겠습니다. 명예와 존엄 회복을 위한 기념사업도 최선을 다해 추진하겠습니다.

피해자들의 증언과 시민사회, 학계의 노력으로 진실의 뼈대는 드러났지만, 아직 길이 멉니다. 기록의 발굴부터 보존과 확산, 연구지원, 교육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픈 상처를 넘어 세계 여성인권과 평화의 가치를 실천해야 합니다. 진실을 외면한 역사를 바로잡고 정의를 세우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저는 이 문제가 한일 간의 외교분쟁으로 이어지지 않길 바랍니다. 양국 간의 외교적 해법으로 해결될 문제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과 일본을 포함한 전 세계가 전체 여성들의 성폭력과 인권문제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굳은 각성과 교훈으로 삼을 때 비로소 해결될 문제입니다.’

그런데 민주당과 문재인은 김지은이 겪은 피해에 대해 외면하고, 진실을 왜곡하는 재판부에 대해 침묵하고, 위안부 할머니들로부터 아무 것도 배운 바가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과연 위안부 할머니들이 겪은 경험과 충북도지사의 수행비서가 겪은 경험이 본질에서 차이가 있는 것일까? 전자는 인류 보편적 여성 인권의 문제이고 후자는 그렇지 않은 것일까? 위안부 할머니들은 철저한 고립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위안부 문제의 존재를 드러냈다면 김지은도 똑 같은 고립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위력에 의한 성폭력’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위안부 할머니에게서 배운 바가 있다면 김지은에게서도 배워야 하지 않는가? 사람들은 판사 조병구가 안희정의 공범으로 사고하고 행동했다고 비판한다. 민주당과 문재인도 위력에 의한 성폭력의 공범으로 자리매김 되고자 하는가?

안희정 1심 무죄 판결 이후의 미투

안희정 1심 무죄 판결 이후의 미투

미투 운동에 대한 사법적 판결은 냉소적이었다. 피고 안희정은 무죄. 미투 운동은 이제 무고 운동으로 내몰릴 위기에 처했다. 어떤 힘들이 미투 운동을 무고로, 범죄로 역전시키는 것일까?

1. 남성이자 민판연 소속 판사인 조병구의 성차별주의적 법해석
2. 한국 사법부의 성차별적 구성과 성차별적 작동 원리
3. 한국 입법부의 성차별적 구성과 법체계의 성차별적 구도
4. 이러한 입법 사법 구조에 기대 성차별과 성폭력을 일상화하고 있는 한국 행정부(아니 한국의 관료 체계 자체)와 언론, 예술, 종교, 스포츠, 교육, 기업 계 등의 성차별적 작동양식(안희정의 위력에 의한 성폭력은 그것의 한 사례일 뿐)
5. 성차별에 의지하여 축적률을 높이는 한국 및 전 세계자본주의의 축적기제

미투 운동의 고발과 폭로가 직면한 장애물은 이러한 것들이다. 이 사실은 미투 운동의 일대 전환을 요구한다. 그것은 무엇을 타격하는, 누구의, 어떤 운동이어야 할 것인가?

안희정 성폭력 사건 재판부의 성차별 논리

1. 증거는 김지은의 진술뿐이다. “그러므로” 안희정의 유죄를 인정할 증거는 전혀 없다. 여자의 진술증거는 증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2. 김지은에게 적극적 거부의 증거가 없다. 적극적 거부에도 불구하고 강제되는 성행위가 성폭력이이므로 성폭력은 없었다. 적극적 거부를 어렵게 만드는 ‘위력에 의한 성폭력’ 같은 것은 없다.

3. 현행법은 성차별과 성폭력에 관대하고 개방적이다. 그 법은 국회에서 만들었으므로 재판결과에 책임이 있는 것은 사법부가 아니라 입법부다.

“사법부와 국회가 적폐”(신지예)라는 반응은 이 사법/입법 기관들이 해체되고 아래로부터 재구성되어야 할 대상임을 시사한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차별받는 소수자들이 스스로를 조직하는 것, 그리고 그 조직력으로 적폐들을 청산하고. 새로운 기구를 구축하는 길 이외에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김성태의 이른바 ‘성정체성 혼란’

김성태는 ‘동성애자’와 ‘성정체성 혼란자’를 혼동하면서 임태훈 군인권센터소장을 성정체성 혼란자로 비난했다.
자유한국당의 이성애-주의는 뿌리 깊다.
이것은 자본가계급이 착취를 위해 다중의 성적 분할과 차별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 즉 다중의 네트워킹과 공통화를 저지할 필요가 있다는 근본적 사실에서 기인하는 이데올로기이자 정치전략이다. 비이성애주의자들에 대한 증오를 유발하는 것. 이런 의미에서 정치가는 자본의 인격적 도구며 정당은 자본의 조직적 도구다.

미투의 전망

미투 운동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고 있는 것은 민주당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 세력이다. 왜 신보수주의 세력은 상대적으로 적은 타격을 받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몇 가지 해석들이 있다. 이 해석들에 대한 비판을 기초로 미투의 미래를 전망해 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첫째로 자유주의 세력 중의 일부가 취하는 태도로서 미투 운동 자체를 신보수주의 우파의 공작의 산물로 보는 음모론적 해석이다. 이것은 미투의 실재적 근거(성차별과 성폭력의 실재성)를 부인하고 미투의 발전과 확산을 가로막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것은 미투로 인해 타격을 받고 있는 자유주의 세력이 취하는 공격적 방어의 방식이다. 이것은 우파를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미투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다. 이것은 젠더을 둘러싼 사회적 적대와 투쟁을 좌/, 진보/보수 간의 정치공학적 대립과 투쟁의 종속변수로 환원시킴으로서 젠더 이슈를 부인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둘째로  보수우파 정치가들이 취하고 있는 태도로서 미투가 좌파의 이중성, 즉 담론과 실제 사이의 분리를 드러낸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것 역사 젠더 문제를 좌우파 대립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정치적 우파라고 해서 젠더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미투의 폭로투쟁이 주로 자유주의 진보 세력 내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보수우파가 성차별, 성억압, 성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것의 증거일 수 없다. 오히려 반대다. 보수우파의 여성억압과 여성수탈은 훨씬 노골적이고 일방적이다. 이들은 여성을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는 시각을 수차례나 드러내었다. 이건희 성매매 사건에서 보이듯이 보수우파는 여성을 그저 하나의 비인간상품으로 간주하는 것에 익숙하다.   젠터문제에서 보이는 자유주의 진보파의 이중성은 그에 비하면인간여성비인간여성사이에서의 심리적 갈등과 자기분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보수우파에게 담론과 실제 사이의 이중성이 없다면[적다면], 그것은 그들이 현실에서 여성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고 있고 담론의 수준에서도 여성을 인간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셋째로 미투 운동이 진보영역에 집중되고 보수 영역에서 드문 이유를, 보수 영역의 피해 여성들은 동일한 피해를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보호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나서지 않고 있다는 데서 찾는 해석이 있다. 이것은 미투의 주체구성에 대한 해석으로서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 서지현 검사의 폭로에서 시작된 최근의 미투 운동이 상대적으로 큰 권력을 갖고 있는 남성들을 대상으로 할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는 주목할 만한 지위를 가진 여성들의 폭로투쟁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래서 비정규직 여성 등이 겪고 있는 일상적인 성차별과 성폭력은 아직 이슈로 제기되지 않고 있다. 즉 주로 보호받아 마땅한 지위의 여성들이 겪은 피해와 그것의 구제가 주요한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미투의 다음 단계가 현실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여성들의 미투여야 할 것임을 시사한다.

이와 연관된 네 번째의 해석이 가능하고 또 부상하고 있다. 3 10일 집회에서 드러난 것처럼 미투를 촛불의 연장으로 보는 해석이 그것이다. 지난 시기의 촛불에서 가장 중요한 동력 중의 하나가 세대를 불문한 다양한 여성집단들이었다는 점은 주목되어야 한다. 탄핵으로박근혜 즉각 퇴진이라는 촛불의 일차 요구가 달성된 상태에서 촛불은 지금성폭력 즉각 퇴출이라는 이차 요구를 향해 진전하고 있다. 이 요구투쟁이 중간층 여성들의 미투에 제한되고 있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미투 운동의 좀더 발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계급적으로 보호받는 여성층을 성적으로도 안전하게 보장하는 운동이라는 현재의 한계를 넘어 성적으로는 물론이고 계급적으로도 전혀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불안정여성노동자들의 미투로의 확산을 통해 미투가 새로운 사회개조, 성별평등과 계급적 평등을 결합시키는 사회건설의 동력으로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미투는 좌우 모두의 한계를 넘는 새로운 사회상의 준거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성폭력이 일어날까?’에 대한 단상.

‘왜 성폭력이 일어날까?’에 대한 단상.

 

가부장적 일부일처제는 본질적으로는 일부다처제인데, 일부일처제가 매춘에 의해 보충되고 있기 때문이다. 혼인관계와 매춘(성매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성관계를 지탱하는 양축이다. 성폭력은 이 두 범주의 경계지대에 서식한다. 그렇다면 성폭력은 왜 어떤 근거에서 생겨날까?

진화적 심리 일반에서: 남성은 여성의 호의적 신호를 성적 신호로 환원하여 읽는 방식으로 진화해 왔다. 그러한 환원이 문제점이 있었지만 번식의 기회를 잃지 않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이 환원 때문에 사회관계에서 여성의 다양한 유형(예의, 친절, 동정 등)의 호의적 태도를 ‘성적 구애’의 신호로 착각하는 많은 경우가 있게 되고 이 때문에 성폭력이 발생한다. 이 환원의 습관이 굳어지면 여성이 보내는 비호의적 신호마저 성적 구애 신호의 역설적 형태로 착각하게 되고 이럴 때 성폭력은 반복적 습관적인 것으로 굳어진다.

자본관계에서: 자본주의는 그 발생기에 여성 착취의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발명했다. 그것은 마녀사냥이었다. 자본주의 이전부터 유전되어온 가부장제에 이 마녀사냥을 결합시킴으로써 자본은 여성의 가사노동을 무상으로 착취할 수 있었다. 가사노동을 무상노동화하고 여성을 남성의 임금에 의존하도록 만든 결과, 남성은 여성을 자신의 소유물, 보잘 것 없는 종속자, 마음 대로 할 수 있는 대상으로 취급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여성의 의사를 무시한 성적 행동, 즉 성폭력이 생겨난다.

사회적 권력관계에서: 위계제에서 권력자는 상하관계 때문에 취할 수 밖에 없는 하위주체의 순종적 태도를 ‘성적 구애’의 제스쳐와 쉽게 혼동한다. 위계제는 정치권, 군대, 교회, 병원, 학교, 연예계, 문화예술계, 재계, 기업, 공장 등 현대 사회 제도의 모든 곳에 편재하는 동형원리이다. 기존 사회 제도에 저항하는 운동단체들도 많은 경우에 위계제를 원리로 구축된다. 오늘날의 위계제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의 우위에 있는 경우는 여성이 남성의 우위에 있는 경우보다 훨씬 많다. 특히 이 비대칭은 위계제 사다리의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훨씬 심해진다. 그 결과 위계적 현대 사회 자체가 성폭력의 온상이 된다.

문화적 헤게모니에서: 최근의 성폭력 사건이 진보적 정치단체 예술단체 학술단체 대학 등을 중심으로 터져나오고 있는 것은 문화적 헤게모니가 성폭력을 조장하는 조건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화에서 새로운 헤게모니는 사회개혁과 사회변동의 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헤게모니는 억압과 동의의 양측면을 갖는다.  많은 부분 남성이 장악하고 있는 문화적 헤게모니 체제에서 헤게모니 주체는 남성의 진화적 경향과 결합되면서 문화적 헤게모니를 성적 헤게모니와 오인하는 경향이 발생한다. 문화적 헤게모니를 성적 헤게모니를 전환시키는 데 실패하여 동의의 축이 빠지게 되면 억압만 남게 되고 여기에서 성폭력의 여러 유형들(희롱, 추행, 폭행)이 출현한다.

오늘날 성폭력이 권력관계의 산물이라는 데에는 거의 사회적 합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위의 3항이 그러한 진단에 가장 가깝다. 그런데 성폭력 현상의 근절을 위해서는 권력관계 외에도 자본관계, 문화적 헤게모니, 진화심리와 같은 요인들을 고려한 좀더 총체적인 관점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