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심변호사 박준영의 절차주의적 ‘정의’관은 누구를 이롭게 하는가?(3)

우리는 4월 16일 김수민이 윤지오를 폭로하는 긴 글을 공개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약 일주일 뒤인 4월 23일에 박준영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모두 냉정하게 윤지오 씨의 말과 행동을 검증합시다. 검증으로 밝혀지는 사실이 있으면, 있는 그대로 공개합시다. 사건이 정리되면, 우리가 이런 상황까지 온 과정과 이유를 분석해 봅시다. 이 사건이 우리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앞서 그는 윤지오의 “증언”에 대해 검증할 필요가 있다는 말로 그에 대한 의혹제기를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이 말 자체가 자신이 조사를 맡지 않은 건에 대해서는 주제 넘는 말이다. 왜냐하면 진상조사단이 바보들이 아닌 한에서 모든 증언들을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사실과 혼동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검증이 조사의 필수적 구성요소인 한에서, 오히려 박준영 자신이 윤지오를 검증해야 한다는 자기목적성을 과잉으로 드러내고 있으며 그 자기목적성은 윤지오에 대한 그의 원초적 불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4월 23일에 와서 바뀌고 있는 것은 박준영이 윤지오의 “증언”이 아니라 그의 “말과 행동”을 검증하자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것은 증언 검증과는 전혀 다른 문제이고 인격 검증을 하자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 그가 장자연 사건에 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가 아니라 그가 그 증언 밖에서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는지를 검증하자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가 요청한 증언 밖에서 윤지오가 무슨 말과 행동을 하는가는 헌법에 규정된 그의 기본권에 속하는 문제다. 그리고 법의 테두리 속에서 누구든지 말과 행동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박준영은 법 전문가의 말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검증선동에 나선다. “우리 모두 냉정하게 윤지오 씨의 말과 행동을 검증합시다.”라는 말이 그것이다. 그는 검증의 주체로 진상조사단도 검경도 아닌 “우리 모두”를 끌어들인다. “우리 모두”가 경찰이나 검찰과 법원 같은 국민 대의기구들을 통하지 말고 직접 검증하고, 그 “검증으로 밝혀지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공개합시다”라고 그의 제안한다. 이것이 여러 차례 반복해서 그가 강조해온 “책임”이라는 말에 값하는 방식인가?

왜 박준영은 아니고, 또 김수민, 박훈, 김대오는 아니고 윤지오만 검증대에 올라야 하는가? 또 윤지오를 검증할 검증력이 어디서 나올 것인가? 무슨 수단으로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 그가 검증을 거부할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 검증의 결과가 허구가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을 누가 무엇으로 보장할 것인가? 객관적이고 공정한 사실로 확인되지 않은 검증 결과의 공개가 미칠 악영향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모든 의문을 제쳐둔 채 박준영은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라고 목적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그의 제안에 따라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윤지오 검증행동은 거의 한 가지도 사실로 확인되지 않은 채 5월 말 현재 “윤지오는는 성매매업소에 다닌 매춘부였다”는 식으로 확인되지 않은 정보의 “있는 그대로의 공개”, 즉 성폭력적 테러행동으로 치닫고 있다. 검증몰이가 도달한 이 집단광기적 상황과 그 효과에 대해 나는 박준영이 책임을 나눠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4월 23일의 페이스북 메시지가 실제로는 역사에서 가부장주의 성폭력 체제가 반복적으로 행해온 바의 “마녀사냥” 선동과 거의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박준영은 자신의 선동이 미칠 결과를 이미 어느 정도 의식한 듯 다음과 같은 주의사항에 대해 미리 말한다.

“분명히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윤지오 씨의 진술로 전 조선일보 기자가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 진술의 가치가 지금 벌어지는 일들로 인한 영향을 조금이라도 덜 받았으면 합니다. 그 당시는 이런 다양한 이해관계가 없었다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법원이 냉철하게 판단해주리라 믿습니다.”

요컨대 자신의 검증 선동이 전 조선일보 기자 조희천 재판에 미칠 영향을 축소하자는 것이다. 왜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그 당시는 이런 다양한 이해관계가 없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모호한 답이다. 이 표현을 해석해 보면 조희천이 기소된 2018년 6월에는 윤지오의 진술이 다양한 이해관계들에 의해 오염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오염되었다고 본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단계구분은 현실을 충실히 반영하는 말이 아니다. 최근 발표된 과거사진상조사단의 조사는, 장자연 사건이 박준영이 말하는 “다양한 이해관계들”에 의해 오염되지 않았던 순간이 단 한 순간도 없었음을 보여준다. 소속사들은 소속사대로, 조선일보는 조선일보대로, 경찰과 검찰은 또 자신의 필요와 외부 압력의 정도에 따라, 다른 언론사는 또 언론사의 필요에 따라, (그리고 아마도 국정원은 국정원 대로) 자기 나름의 자기목적성, 전략, 음모, 기획에 따라 이용하고 관리했다. 그리고 그 이해관계들의 상충과 어우러짐이 그때그때의 결과들(크게 보면 힘없고 돈 없는 사람들은 유죄,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은 무혐의)을 낳아 왔다. 진실규명을 원하는 사람들의 세력이 너무나 약했기 때문에 장자연 사건은 진실을 덮고자 하는 사람들의 수중에서 편의대로 처분되고 관리되어 왔다. 2016년 촛불혁명과 더불어 세력관계가 바뀌어 촛불과 미투의 힘이 강화된 것이 현재와 지난 10년과의 차이일 뿐이다. 그리고 행정 국회 법조 내 각 정파와 재계, 언론계 제 세력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상황을 이끌고 가려는 본질적 경향은 변함이 없고 촛불세력과의 관계에서 그 세력판도가 달라져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박준영의 선동(“검증합시다”!)의 파급효과는 그가 멈추고자 하는 선을 훨씬 멀리까지 넘쳐 흘러갈 것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박준영이 이 선동을 통해 경계하고 제어하고 약화시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여론”, “세간의 의혹”, “국민적 의혹”이다. 이것들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지만 그 중 박준영이 가장 위험한 것으로 경계하는 것은 촛불과 미투운동이 불러일으킨 “여론”이다(물론 그는 이것을 아래로부터의 촛불의 영향으로 보지 않고 특정한 ‘이해관계’를 가진 세력의 영향으로 일면적으로만 이해한다). 촛불과 미투 이전에 장자연 사건은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로 자리매김되어 있었고 이러한 정리를 뒤흔들 수 있는 요소들은 증거 없는 “의혹”으로 치부되었다. 촛불과 미투는 이 “의혹”들을 “여론”으로 만들고 장자연을 죽게 만든 가해자, 가해집단, 가해체제의 해체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왔다. 의혹이 커지고 재조사와 재수사의 여론이 드높아진 것은 “객관적 사실” 자체가 권력자들의 외압에 의해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거나 규명된 사실조차 은폐, 편집, 삭제되었다는 사실이 하나하나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준영이 “세간의 의혹”과 “기록된 사실”을 대립시키고 사실에 충실할 것을 주장하는 것은 장자연 사건의 경우는 부당하다. 왜냐하면 그 “기록된 사실” 자체가 이처럼 축소, 은폐, 편집, 삭제의 조작을 거친 후 남아 있는 엉터리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세간의 의혹”이 “기록된 사실”만큼이나 중요한 사실가치를 갖는 것으로 고려될 필요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여기서도 박준영은 철저히 절차주의적 정의를 앞세운다. 그리고 세간의 의혹을 냉각시킬 방법으로 ‘증거법적 판단’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윤지오 씨가 이전 수사과정, 법정 그리고 조사단에서 여러 차례 진술했고, 언론을 통해 한 말들이 있습니다. 믿을 수 있는 것, 의심이 드는 것, 믿을 수 없는 것 등을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구분을 함에 있어서는 철저한 증거법적 판단이 필요합니다. 근거가 없거나 부족함에도 여론 때문에 섣부른 판단을 해서는 안 됩니다. 수사기관에 수사의뢰는, 혐의가 드러나 있거나 수사를 통해 드러날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냥 공을 떠넘기는 식의 수사의뢰는 무책임한 것입니다.”

섣부른 판단을 경계하자면서 그는 수사의뢰를 “무책임”한 것으로 단정하는데 이것은 ‘장자연 사건에서 재수사를 통해 드러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어떤 판단을 전제할 때에만 타당한 것이다. 이러한 판단이 장자연 사건을 바라보는 기존의 프레임을 고착화시키고 성폭력 체제의 실재를 감추게 될 것은 당연하다.

이처럼 박준영은 시종일관 장자연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문제제기를 봉쇄하고 억제하는 역할을 “냉정”, “신중”, “책임”의 이름으로 떠맡는다. 촛불과 미투의 힘에 의해 형성된 진실규명 요구를 잠재우려는 이 보수주의적 태도가 윤지오의 증언을 억제하고(‘사회적 파장이 큰 증언이므로 증언에 신중해야 한다’) 이에서 더 나아가 그의 ‘말과 행동’을 검증하자는 주장으로, 다시 말해 그가 그토록 강조한 “냉정”을 잃은 마녀사냥 식 선동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선동행위에 사례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방법이 윤지오가 주장하는 위협에 아무런 실체가 없었다는 경찰의 조사발표를 무비판적으로 4월 24일의 페이스북에 올리는 것이었다. “경찰이 윤지오 씨가 주장하는 위험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했던 ‘노력’”이 상당했으므로 그 발표에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는 식의 논평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증언자가 느끼는 위협은 결코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팀이 복도 시시티브이(CCTV) 분석을 통해 객실 출입자를 확인하고, 소음 측정, 경찰청의 지문 감식,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오일 감정, 호텔 시설담당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앞서 말했다시피 오직 직관을 통해서만 공감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험이 그 실체를 과학적 분석 대상으로 나타내는 때는 대개는 그것이 이미 살상과 같은 현실로 전화하여 위험이 해소된 상태에서다. 경찰이 찾았던 것은 위험의 실체가 아니라 그 자취인데, 위험의 자취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해서 위험의 실체가 부정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준영은 이 양자를 혼동하면서 윤지오에 대한 경호지원이 특혜이며 자원배분에서의 불합리라고 단정한다. 이런 섣부른 단정은 그의 절차주의적 정의관과 맞짝을 이루고 있었던 염치론, 즉 이해관계들의 양적 조정론(합리적 배분론)에 근거하여 나타나는 안일한 현실인식이다. 그의 시야는 성폭력과 같은 우리 삶의 실질적 갈등의 심부로 파고들기보다 삶의 표면을 거닐면서 편안한 조정/배분의 길을 찾는데 집중되고 있다. 이 경쟁적 이해관계론의 관점에서 ‘힘센 사람들’의 폭력 앞에서 내지르는 장자연의 절규가 공감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연의 죽음이 박준영에게 단지 “안타까운” 것으로서만 받아들여지고 윤지오의 증언이 객관성과 공정성을 잃은 과장된 진술로 비춰지는 것이 필연적인 것으로까지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연 사건과 관련하여 지금 필요한 것은 합리의 이름으로 껍데기(형해)의 세상을 만드는 절차주의를 넘어서 ‘실질’과 ‘실질에 고유한 절차/방법’를 주장하는 여성-다중의 실질적 과잉(excess)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약을 탄 술을 마신 것 같다. 왜냐하면 눈이 풀려 있었고.”라는 윤지오의 추측진술은 ‘과장된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여 돈을 벌기 위한 것’이라는 프레임 속에서가 아니라 ‘진실에 다가가기 위한 여성-다중의 이 실질적 과잉’이라는 맥락에서 더 실체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심변호사 박준영의 절차주의적 ‘정의’관은 누구를 이롭게 하는가?(2)

4월 16일 박준영은 <검증>이라는 제하에 “객관적이고 공정한 사실에 근거”할 것을 주문한다. 하지만 일견 타당해 보이는 그의 이 주장은 이미 빛을 잃고 있다. 윤지오 진술의 신빙성에 대한 검증 요구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그가 뉴시스 보도의 진실성에 대한 검증도 동시에 요구했어야 한다. 그는 윤지오 진술에 대한 검증이 더 “엄격하게”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를 그것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크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과연 뉴시스 보도의 진실성에 대한 검증을 그가 외면한 것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있는가? 4월 초의 시점은 윤지오의 진술을 둘러싸고 격렬한 사회적 투쟁이 전개되는 시기로 그의 진술의 신빙성을 주장하는 세력과 그것을 부인하는 세력 사이에 화해불가능할 정도의 논쟁이 전개된 시점이다. 뉴시스 기사는 후자를 대표하고 선도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은 박준영이 (자신이 의식했던 못했건 간에) 뉴시스를 옹호하면서 그것을 검증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윤지오를 검증대에 올리려는 자기목적성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사실에 근거”한 주장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의 정체를 알기 위해 그의 이야기를 조금 더 따라가보자. 그는 윤지오 진술에 대한 검증이 필요한데, 그 검증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한탄한다. 그는 “이 검증은 도대체 누가 하고 있나요. 이런 분위기에서는 할 수 있는 검증 그리고 검증의 결과 발표도 한계가 있는 겁니다.”라고 쓴다. 당연히 주권자 국민들은 과거사조사위원회와 진상조사단에 진술들에 대한 조사와 검증의 임무를 맡겼다. 그러므로 그 단위에서 증거와 증언에 대한 검증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 최종 결과가 국민에게 보고되어야 한다. 그 보고가 국민을 만족시킬 수 없을 때에 국민은 다시 조사를 명할 권리가 있다. 그런데 박준영은 조사팀을 나온 후 조사위원회와 진상조사단 내부에서 진술들에 대한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일종의 내부고발을 페이스북을 통해 쏟아내고 있다.

“형제복지원 사건, 피디수첩 사건, kbs 정연주 사장 사건 조사를 마친 후 재배당된 김학의 사건 조사를 맡아 사건기록을 봤습니다. 조사팀을 나올 때까지 기록을 꼼꼼히 보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제 게으름을 탓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건의 실체에 대중이나 언론보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장자연 사건 등 다른 사건을 조사하는 단원들과도 고민과 고충을 나누면서 주워들은 얘기가 있습니다. 이걸 풍문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내부고발의 정보 출처는, 장자연 사건에 있어서는, “사건을 조사하는 단원들과도 고민과 고충을 나누면서 주워들은 얘기”정도이다. 박준영은 자신의 개인적 조사체험에 대해 과도한 가치부여를 하면서 “사건의 실체에 대중이나 언론보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는 식의 권위주의적이고 오만한 태도를 주저없이 내세운다. 주권자인 국민 “대중”은 그에게 조사를 잘 하라고 명령한 것이지 그 조사 경험을 근거로 “사건 실체에 국민 대중보다 더 가까이 다가갔다”는 식의 오만을 부리는데 사용하도록 허락한 바가 없다.

실제로 조사원들이 세부 정보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국민들보더 더 많이 알게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사건의 실체에 그 조사원이 국민대중보다 더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조사원의 경우는 가령 수백년동안 조사해서 정보를 산 더미처럼 뇌에 집어 넣는다고 하더라도 사건의 실체에 단 한 발도 더 다가갈 수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특히 장자연 사건처럼 남성 가해자들에 의한 성폭력이 쟁점인 사건에서 남성 조사원이 “자기를 버리는 혁명”(여성되기 혁명) 없이 그 사건의 국민대중보다 실체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고 믿는 것 자체가 오만이요 환상이다. 게다가 박준영이 입수한 정보는 다른 조사원들로부터 “주워들은” 이야기인데 그것으로 내부고발을 해도 무방할 정도로 과거사진상조사단이 형편 없는 조직인가? 박준영이 자신이 “주워들은 이야기”가 “풍문”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이 조사원의 신분이나 지위와 같은 권위에 의해 뒷받침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반드시 “객관적이고 공정한 사실”과 “실체적 진실”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과연 박준영은 자신이 “주워들은 이야기”가 “객관적이고 공정한 사실”과 “실체적 진실”에 의해 뒷받침되는지 “검증”을 거쳤을까? 자신의 생각에 대한 “검증”은 뒤로 한 채, 박준영은 이렇게 계속 말한다.

“윤지오 씨가, 장자연 씨가 술이 아닌 다른 약물에 취한 채 강요를 당했을 가능성을 제기한 것으로 아는데, 이 진술이 언제 비로소 나왔는지 그리고 어떤 경위로 나왔는지, 이 진술을 뒷받침할 정황이 존재하는지를 따지지 않고 특수강간죄를 논하고 공소시효 연장 등 특례조항 신설을 이야기하는 건 나가도 너무 나간 주장입니다.”

이 진술을 뒷받침할 정황은 진상조사단 활동 전인 10년전 사건 조서에서 이미 명백히 나타난다. 장자연 소속사였던 더콘텐츠의 대표 김종승은 장자연 사망 당시 마약복용 혐의로 일본 도주 중이었다. (나는 이것이 김종승이 마약혐의로 해외도피한 첫 번째 사례가 아닌 것으로 어디선가 읽은 바 있는데 확인은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당시 장자연의 지인 언니인 이모씨의 진술 중에는 김종승이 “약 니동생이랑 같이 했다”는 내용의 문자를 보내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장자연이 ‘떳떳함’을 주장하므로 이 진술을 ‘객관적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버닝썬 사건에서 드러나듯이 여성 피해자들의 상당 수가 자신이 마신 음료에 (남성 가해자들이 몰래 탄) 마약이 들어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을 감안하면 이 진술이 객관적 사실일 ‘정황’은 실재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게다가 장자연이 약물에 취해 성폭행 당했을 가능성은 윤지오 외의 다른 진술자들의 교차증언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다음은 KBS 김경래의 최강시사에서 진상조사단 총괄단장 김영희의 발언이다.

“▷ 김경래 : 그런데 그런 평가들도 있어요. 과거사진상위원회에서 낸 자료에서도 나오는데 윤지오 씨의 진술이지 않습니까, 구체적으로는? 특수강간 의혹과 관련해서는. 그 부분의 진술의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김영희 : 윤지오 씨 진술뿐만 아니라 윤지오 씨는 정확하게는 약을 탄 술을 마신 것 같다는 얘기를 한 거고요. 그리고 아마 자기가 없을 때 성폭행을 당하지 않았겠나하는 추측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윤지오 씨 진술은 오히려 추측성이라고 한다면 본인이 본 것은 사실관계에 관한 것은 “약을 탄 술을 마신 것 같다. 왜냐하면 눈이 풀려 있었고.” 이런 진술인데 오히려 윤지오 씨가 아니라 당시 매니저였던 윤모 씨가 저희 조사단에게 처음 했던 진술은 장자연 씨가 쓴 문건에 성폭행을 심하게 당했다는 내용도 썼었다는 겁니다. 

▷ 김경래 : 지금까지 남아 있지 않은 문건에요. 

▶ 김영희 : 그렇죠. 처음에 썼던 문건에 그런 내용이 있었다고 진술을 했고. 물론 이것을 나중에 윤모 씨가 진술을 번복했으나 처음에 했던 진술은 어쨌든 성폭행을 심하게 당했다는 내용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장자연 씨가 문건에 남겼다는 진술이 있었고요. 그리고 또 하나는 또 다른 A씨가 뭐라고 얘기했느냐면 당시 장자연 씨 문건에 술에 약을 탔다는 내용도 있었다고 문건을 봤던 이모 씨가 그런 내용을 불러줬다는 진술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윤지오 씨 진술은 자기는 약을 탄 술을 마신 것 같다는 것을 봤다는 진술인 반면에 윤모 씨 진술은 성폭행을 당했다고 장자연 씨가 문건에 썼었다는 거고 굉장히 중요한 진술이죠. 그리고 또 하나는 또 장자연 씨 문건에 술에 약을 탔었다는 내용이 있었다는 또 다른 2명의 진술이 있었기 때문에 이 진술을 저희 조사단으로서는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중요한 진술이고 저희 조사단은 굉장히 한계가 많기 때문에 이 부분과 관련해서 추가적으로 수사를 해야 되지 않느냐? 수사기관이 판단해서 이 부분은 강제수사권이 있는 수사기관에 기록을 넘겨서 봐달라는 그런 취지였습니다.” 

그러므로 특수강간 의혹은 냉정을 잃은 사람들의 몰염치한 소행에 의해 부채질된 것이 아니라 비록 진술들이지만 ‘객관적이고 공정한 사실’ 진술들에 의해 뒷받침되는 의혹인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박준영이 이제 막 진술증거들을 확보중인 상태에서 “진술이 언제 비로소 나왔는지 그리고 어떤 경위로 나왔는지”를 살피자면서 초점 흐리기와 논점 전환을 시도하는 강한 “자기 목적성”을 몰”염치”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태도는 어떤 문건의 객관적 내용이 자신들에게 가져올 위험성을 문건 유출 경로의 불법성을 가지고 덮어버리곤 했던(예컨대 정윤회 문건 사건) 공작정치의 테크놀로지를 방불케 한다.

나는 이것이 여성이 겪었을 수 있는 성폭력에 대한 실감을 결여한 상태에서, 특수강간 혐의로 그것의 가능성을 수사하게 해야겠다는 진상조사단 일부와 윤지오의 실질적인 ‘자기목적성’의 절실함을 그 진술의 발생 시점, 발생 경로 등을 밝혀야 한다는 절차적 정당성에 관한 박준영 고유의 ‘자기목적성’으로 덮어버리는 남성중심적 보수주의의 발로라고 생각한다.  박준영의 이러한 사고경향은 이제 뉴시스 보도에 대한 다음과 같은 동조로 나타난다.

“무조건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가, 숙소를 마련해주고 경호팀을 붙여주는 등의 국가 예산 지출로 이어졌습니다. 도대체 윤지오 씨가 주장하는 ‘가해의 실체’는 있는 것인지 의문입니다.”

가해의 실체가 의문시되는 상황에서 숙소를 마련해 주고 경호팀을 붙여주는 국가예산지출은 냉정을 잃은 불공정한 처사라는 비판이다. 증언자로서의 윤지오가 느끼는 가해위협은 자신의 증언행위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법 위의 사람들’(권력자들)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장자연에 대한 가해혐의자로 지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누구나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분석적 검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박준영은 윤지오에 대한 보호를 요구하는 ‘가해의 실체’가 과연 있는지 물음으로써 윤지오가 장자연의 죽음을 이용해 거짓말로 사적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는 뉴시스발 의혹들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것이 정의로움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변호사의 동조이고 정당화였기 때문에 그것의 힘은 강력한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가해의 실체’에 대한 박준영의 의심이 심각한 자기모순임을 보여주는 한 대목을 발견한다. 그것은 4월 21일에 올린 <새끼들>이라는 글이다.

“자식들 사진입니다. 약촌오거리 사건 재심을 준비할 때 다음 스토리 펀딩으로 진범을 공개하면서 sns에 있는 아이들 사진을 내렸습니다. 이번에 프로필 사진을 바꾸면서 아이들 앞모습 사진을 올리지 못하는 이유는, 재심 사건을 진행하면서 맺게 되는 악연에 대한 부담 때문입니다. 약촌오거리 사건의 진범의 개명과 개명한 이름은 한동안 제게 현실적인 두려움이었습니다. 외모와 달리 겁이 많은 박상규 기자는 몽둥이를 옆에 두고 잠을 잤습니다.”(4월 21일 페이스북, 강조는 인용자)

그는 “재심 사건을 진행하면서 맺게 되는 악연에 대한 부담” 때문에 프로필 사진에 아이들 앞모습 사진을 못올리고 뒷모습을 올리거나 혹은 아이들 사진을 내리기도 한다. 그 악연의 부담은 그가 말하듯이 “현실적인 두려움”이다. 이 부담과 두려움을 이해하는 데 분석과 증거가 필요한가? 그것은 생명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생명체험에 비추어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부담이며 두려움이고 사진을 내리거나 뒷모습만을 올리는 것은 누가 봐도 합리적으로 이해되는 조치이다. 그런데 왜 그는 그 자신과 마찬가지로 윤지오도 증언에서 맺게 될 악연에 대한 그부담을 가질 수 있고  그것을 “현실적 두려움”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윤지오가 느끼는 위협의 “실체”라는 것을 감각하지 못하는 것일까? 왜 그는 여성, 타자, 약자(‘힘 없는 신인배우’)에 대해 이토록 둔감한 것인가? 윤지오가 증언을 통해 악연을 맺게 될 그 법 위의 사람들을 재심을 통해 악연을 맺게 될 약촌오거리 사건의 그 진범보다 왜 덜 위협적인 것으로, 위협의 실체가 없는 사람들로 생각하는 것일까? 이것은 윤지오가 실제적 두려움으로 경험하는 그 ‘법 위의 남자들’에 대해 박준영 자신은 친화감과 믿음(그러니까 ‘한 패 의식’)을 갖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빼놓고는 이 둔감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이 불가능하다.

박준영은 자신이 “법의 불평등” 때문에 서러움을 느끼는 사람들, 이른바 “서민”의 대변인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자의식을 갖고 있다. 그런데 장자연 사건과 김학의 사건에 대한 자신의 주장들이 ”사건의 본질을 흐릴 수 있고, 가해자들의 책임을 면하거나 경감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바로 그 서러운 사람들(특히 여성들이다)의 실제적 “우려”(그는 자신의 글에 대한 ‘댓글들’에서 이 ‘우려’를 읽는다)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는 댓글자들에게 앞으로 자신이 쓸 글들을 보면 이 갈등이 해소될 것이라고 계속 말한다. 어떻게 해소된다는 것일까? 그의 행보는 ‘서러운 사람들의 실제적 우려’를 외면하고 ’나는 서민들을 위한다’는 자의식에 기대, 가해자에 대한 조사와 수사는 법 절차에 맞아야 한다는 절차주의적 정의를 밀고 나가는 쪽을 향한다. 그는 “저는 서럽다는 분들을 대변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지 이유 없이 강자 쪽에 서고 싶지 않습니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습니다.”라고 주장하지만 소용 없는 일이다. 실질로부터 절차를 분리시키고 절차적 정의를 앞세울 때, 그것이 절차에 대한 온갖 통제권력(수사외압, 통화기록 삭제와 임의편집, 녹취록 빼돌리기, 조사않기, 등등)을 가진 그 “강자”를 바로 “지금” 이롭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그는 외면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쌓아온 정의의 이미지 모두를 한 순간에 상실하는 순간이라는 점도 보지 못한다.

재심 변호사 박준영의 절차주의적 ‘정의’관은 누구를 이롭게 하는가?(1)

영화 <재심>으로 인해 박준영 변호사는 재심 전문변호사라는 명성과 정의로운 변호사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박훈, 김대오, 김수민으로 이어지는 ‘윤지오 검증몰이’가 힘을 얻게 된 것이 박준영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그 검증몰이의 과정에 법률적 도덕적 정당성을 불어넣어 준 한 축으로 작용한 것만 분명하다.  이 사실은 그의 페이스북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다. 

과거사진상조사단의 조사단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던 박준영이 조사단 활동을 끝마친 것은 2019년 3월 8일인데 그가 자신의 조사건이 아닌 장자연 사건에 대해 처음 페이스북에 포스팅을 한 것은 공교롭게도 변호사 박훈이 이상호-윤지오를 적대시하는 포스팅을 올린 바로 다음날인 3월 29일이다. 그 포스팅에는 이후 그가 장자연 사건 재조사를 바라보는 기본 시각이 모두 나타나 있다.

“때론 세간의의혹과기록으로확인되는사실의괴리도 확인했다. 이걸 알거나알수있는위치에있으면서의혹을키우고활용하는 ‘염치없는자기목적성’도 보게 된다. 그 끝이 어디일지 가늠할 수 없어 답답하지만, 사필귀정임을 믿는다. 여성의몸과성이여러형태로이용되고착취당하는현실. 한국사회에서뿌리뽑아야할적폐다. 이런 문제를사건을통해공론화하고해결하는것은큰의미가있다고생각한다. 대통령의 철저한 수사지시도 이런 생각을 담은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대통령이 ‘사건에담긴여러이해관계와문제점’을충분히알고계셨다면그지시를함에있어신중하지않았을까생각도해본다. 대통령이 김의겸 대변인의 이런 투자를 알았다면, 대변인 선임과정에서 좀 더 신중한 판단을 했을 것이다. 윤중천과김학의의잘못, 장자연사건의가해자들을두둔할생각은전혀없다. 반드시 정의롭게 해결되었으면 한다. 단, 사건 속 여러 이해관계를 냉철히 살펴보고 정의로운해결의 ‘절차와방식’을 고민했으면 한다. 어렵지만 목소리를 내는 것이 길게 보면 신뢰를 얻는 길임을 믿는다. 믿고 의지할 곳 없다는 서민들의절망을 가장 우선시했으면 한다.”(3월 29일 페북)

그는 성폭력 체제가 한국 사회의 적폐로 실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것이 공론화되고 해결되는 것이 의미있음에 대해 인정한다. 자신은 가해자를 두둔할 생각이 없다고도 말한다. 이렇게 말로 성폭력 체제의 실재와 그 해결의 의미를 인정하는 립서비스를 한 후 그는 곧장 이 문제의 해결에서 내용적(실질적) 정의보다 그 문제 해결의 절차와 방식의 정의, 즉 형식적(절차적) 정의 쪽으로 관심을 돌린다. 이 논리 전개는 정의는 절차에 있지 실질에 있는 것이 아님을 주장하는 것이거나 적어도 절차적 형식적 정의가 충족되지 않을 때는 내용적 실질적 정의는 달성될 수 없다고 하는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절차적 정의가 재조사에서 충족되고 있는가 없는가를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나는 이것이 실질로부터 절차를 분리시킨 후 절차를 우위에 놓는 형식주의적-절차주의적 사고법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생각을 조금 더 들어보자. 그가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조사단 경험과 연관되어 있다. 그 경험은, 세간의 의혹과 기록으로 확인되는 사실 사이의 괴리를 알거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의혹을 키우고 활동하는 염치없는 자기목적성을 자기가 보았다는 말로 압축될 수 있다. 누군가가 고의로 사실과 괴리되도록 의혹을 부풀리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아래 인용은 이 경험에 대한 좀더 상세한 설명을 제공한다.

“과거사 사건을 조사하면서 그리고 조사를 지켜보면서 사건 속 다양한 이해관계를 봤다. 이익이 되는 사실을 부각하려 애를 쓰고 반면에 모순을 애써 외면하거나 침묵하는 모습도 봤다. 이런 모습은 사건 관계자, 언론, 공권력, 사건 속 연대 세력, 정치권 모두에게 공통되는 문제였다. 부끄럽지만, 관여하고 있는 재심사건 3건이 조사대상인 나도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은 자기목적적 존재라 하지 않았던가. 그 목적성이 치열하게 대립하는 건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하지만, 염치가 없을 때는 문제가 심각해진다.”(3월 29일 페북)

재조사 사건에서 사건 관계자, 언론, 공권력, 사건 속 연대 세력, 정치권, 그리고 자기자신도 그 사건을 두고 이해관계 투쟁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염치가 없을 때는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얼핏 보면 진솔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질적 정의를 형식적 정의로 환원한 것과 연결되는 중요한 문제점을 갖고 있다. 하나의 사건 속에 여러 세력들의 전략(이것이 ‘자기목적성’의 의미이다. 이 전략들은 ‘음모’라고 표현되어어 무방할 것이다.)이 교차하고 그것들 사이에 투쟁이 벌어진다는 생각은 옳다. 하지만 그 투쟁을 다양한 ‘이해관계’들의 투쟁으로 이해할 때 그 투쟁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에 중대한 왜곡이 발생한다. 이것은 투쟁 당사자들 사이의 절대적 대칭과 등질성을 부당 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자연의 죽음을 성폭력 체제에 대항하는 절규로서 이해할 때, 가해자와 피해자, 가해의 진실을 밝히려는 자와 그것을 은폐하려는 자 사이의 투쟁은 결코 대칭적이거나 등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해관계 투쟁으로 결코 환원할 수 없는 고유한 정치적 질과 방향을 갖는다. 박준영은 이 정치적 질을 무시함으로써 다양한 관계 당사자들 사이의 투쟁을 이해관계 투쟁으로 환원하며 이 틀 속에서 ‘문제는 염치다’라고 주장한다. 염치는 지나치지 않도록 행동하기 위해 필요한 체면 감정이며 그것은 경쟁의관계에있는 권력자들 사이 혹은 자본가들 사이, 혹은 노동자들 사이의 이해관계들을 적당하게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이다. 하지만 성차별 인종차별 계급차별 등 적대의 관계는 이해관계의 양적 차이가 아니며 그 관계 자체의 해체 없이는 해결 불가능한 비조정의 관계이다. 박준영이 이 ‘지나치지 않음’을 자신의 조사윤리로 삼는 것은 앞에서 실질보다 절차를 우위에 놓는 정의관과 마찬가지로 적대관계까지 경쟁관계로 환원하고 경쟁관계를 우위에 놓는 관점과 상통한다. 이런 식으로 그는 모든 사건 속에서 다양한 그러나 등질적인 이해관계들이 경합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즉 그 투쟁의 질, 목적의 이질성을 이해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 이해관계들 사이의 양적 분배적 적당함(염치있음)을 추구하고 그 분배적 적당함은 절차적 정의에 의해 보장될 수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조사윤리와 정의관에 따라 그는 3월 18일 대통령 문재인이 “공소시효가 끝난 일은 그대로 사실 여부를 가리고, 공소시효가 남은 범죄 행위가 있다면 반드시 엄정한 사법처리를 해 주기 바란다”고 한 것에 관해 사건에담긴여러이해관계와문제점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부적절하게 내린 지시로 규정한다. 그런데 위의 지시는 과거사조사위원회의 설치 목적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 것에 불과한 것이지 않은가? 그런데 박준영은 이 지시가 절차적 정의를 어기고 조사를 염치없도록(이해관계 세력들 사이의 관계를 불평등하게) 만드는 어떤 계기를 제공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그것이 특정 세력에게 부당하게 힘을 실어주어 의혹이 사실과 더 괴리되도록 만드는 계기로 된다는 비판이다.

그로부터 약 열흘 뒤인 4월 9일 박준영은 4월 8일 노컷뉴스 기사, “윤지오 “뉴시스 기자님 오셨나요?”…법적대응 예고”(김형준.김광일 기자)를 올리면서 <이건 아닌 것 같아요>라는 제목 하에 한줄로 “윤지오 씨를 비판하면 ‘악’인건가요? 우리 좀 더 냉정합시다.”라면서, 의문문과 청유문 속에 꽤 단호한 비판과 명령을 표현한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반응은 무엇에 대한 것일까? 이 기사는 뉴시스 최지윤의 취재수첩에 법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윤지오의 대응 외에 민주당 안민석, 바른미래당 김수민, 민주평화당 최경환, 정의당 추혜선 등이 ‘윤지오와 함께 하는 의원모임’을 만들어 윤지오를 지원하기로 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서 박준영이 뉴시스 4월 7일자 기사를 (읽어보았는지 않았는지 알 수 없지만) 윤지오에 대한 ‘비판’으로 본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그 기사의 내용을 “뉴시스와 김수민”(http://amelano.net/?p=399)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한 바 있다.  

1)윤지오는 장자연과 친하지 않았다 2)윤지오는 고비용의 과도한 경찰보호를 받으며 생활중이다 3)윤지오는 옛날부터 유명해지는 것이 꿈이었는데 이제 장자연을 이용하여 팔로워 76만명이 넘는 SNS 스타가 됐다 4)윤지오는 장자연을 이용하여 후원계좌를 열어 돈을 벌고 있다 5)윤지오는 거짓 증언을 했으며 그의 진술은 신빙성이 없다. 

이것이 과연 윤지오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은 사실근거에 의해 확인되지 않은 정보들을 윤지오 마녀화의 프레임 속에서 버무린 것으로 언론을 빙자한 인신공격에 다름 아닌 것으로 읽힌다. 나는 이 보도가 이후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사용될 윤지오 마녀사냥의 기본 프레임을 제공한 것으로 본다. 윤지오는 뉴시스 기자를 악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기사이므로 정정보도를 하라고 요청한 것이다. 이 기사는 결국 뉴시스가 자체판단에 따라 삭제했다. 이것은 스스로 이 기사가 윤지오에 대한 온당한 비판이 아니라 기사가치를 갖지 않는 불법적인 것임에 대한 승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전개는 타인들(아마도 그 자리에 참석한 국회의원들이 주요 대상일 것이다)에게 냉정을 요구하는 박준영 자신이 실제로는 냉정을 잃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고 생각한다. 그의 용어로 표현하면 그것은 그의 자기목적성이 과도하여 염치를 잃고 자기 이해관계를 내세운 경우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용어로 보면 그것은 뉴시스가 행한 성차별적인 인격권 침해와 인격 모독이라는 뉴시스 보도행위의 고유한 질(質)[성폭력 체제의 재생산]을 그가 인지할 능력(혹은 의사)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녀사냥의 암구호들 2: “(유)가족을 욕되게 하지 말라”

가족이라는 집단은 흔히 누구도 모욕하거나 경시해서는 안 될 ‘신성한 조직’으로 간주되곤 한다. 부모, 자녀, 혈족은 불가침의 영역이며 그 어떤 가치도 그것 위에 있지 않은 것처럼 묘사되곤 한다. 국가, 교회, 학교, 법원, 매스미디어 등이 이러한 가치관을 확대시키는 주요 기관들이다. 그래서 장자연 사건과 윤지오 논쟁에서도 유가족을 욕되게 하지 말라, 가족을 욕되게 하지말라 등의 가족주의 구호가 사람의 행동을 평가하는 절대적 가치기준인양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윤지오를 비난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만약 가족이 지배적 국가기관들이 말하는 것처럼 신성하고 불가침한 조직이라면 왜 가족의 의미는 사람들마다 다 다르게 느끼는 것일까? 가족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또 사람마다 왜 다 다른 것일까?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이 좋은 삶의 전형임에 반해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이 나쁜 삶의 표상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이 보금자리임에 반해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이 지옥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으로 인해 생명을 보장받음에 반해 어떤 사람은 가족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이 따뜻한 관계를 상징함에 반해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이 참혹한 관계를 대표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이 서로 돕고 공생하는 공동체 조직으로 나타남에 반해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이 어떤 민주적 가치도 지켜지지 않는 최악의 폭력 조직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가족에 대한 한 사회의 지배적 통념과 가족의 현실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합당한 것 같다. 가족에 대한 체험은 성별에 따라, 계급에 따라, 인종에 따라, 연령과 세대에 따라, 장애인인가 아닌가에 따라, 성적 취향, 정치적 지향에 따라 제 각각이며 다양하고 또 이질적이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신성한 공동체 조직으로서의 가족이라는 통념이 우리 사회의 일부 구성원에게 타당하고 또 바람직할런지 몰라도 그것이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타당한 생각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기관들이 가족을 신성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데에는 그만한 체제적이고 물질적인 이유가 있고 또 목적이 있다. 하나는 가족을 통해 여성의 노동을 무임금으로 착취하기 위한 것이다. 여성의 몸은 산업공장이나 사회공장과는 구분되는 신체공장으로서 그 신체가 노동력의 재생산을 주로 담당하도록 분업화되어 있다. 임신, 출산, 양육, 돌봄, 부양의 노동이 그것이다. 이것은 막대한 시간과 정성과 에너지를 요구하는 인류 재생산의 필수적 요소이다. 자본주의는 여성을 노동력 재생산 노동에 특화시키는 성별분업 체계를 구축한 후 이 재생산노동을 마치 자연을 수탈하듯 무상으로 수탈한다. 이 수탈체제를 은폐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이 재생산노동을 신성화, 신비화하는 것이다. 다양한 유형의 국가기관들에 의해 이 재생산노동은 생물학적인 것, 자연적인 것, 신성한 것 등으로, 즉 이성적 사유 너머에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신성하기 때문에 그것에 가격이 붙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노동은 노동이 아니라 헌신과 사랑이라고 묘사된다. 이런 방식으로 국가와 자본은 재생산노동을 비임금노동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가족의 신성화를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첫번째 목표는 거대한 여성노동의 비임금노동화와 그에 대한 수탈이다.

가족의 신성화가 노리는 두 번째 목표는 계급질서의 재생산이다. 그것은 가족을 독점적 상속기관으로 만드는 것에 의해 가능해진다. 자본주의 사회에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라는 두 개의 계급이 있듯이 상속과 관련하여 가족은 두 종류의 가족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상속할 양(+)의 재산을 가진 가족과 그렇지 못한 가족이 있다. 상속할 양(+)의 재산을 가진 가족은 일반적으로 부르주아 가족이다. 프롤레타리아 가족의 경우 그렇게 상속할 만한 의미 있는 재산을 갖지 못하거나 오히려 음(-)의 재산, 즉 채무를 남긴다. 그러므로 상속제가 유의미한 것은 주로 부르주아 가족의 경우다. 부르주아지는 가족 경로를 통해 유산을 상속함으로써 계급체제를 대물림하는 데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재산의 상속이 불가능하다면 부르주아지는 계급질서를 세대마다 재생산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가족을 신성화해야 할 두 번째 이유이다. 가족을 불가침의 신성영역으로 만듦으로써 자본가계급은 자본주의 질서의 재생산에 대한 노동계급과 다중의 도전을 효과적으로 봉쇄할 수 있다.

두 번째 기제는 첫 번째 기제의 성공에 의해 뒷받침된다. 여성을 노동력 재생산에 할당하는 성별분업의 유지와 막대한 무상노동의 수탈이 착취적 계급질서 재생산을 뒷받침해 준다. 전자, 즉 성별분업의 유지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가부장적 지배를 필요로 한다. 성차별주의는 이런 조건 속에서 번성한다. 가부장제 자본주의에서 여성은 그러므로 계급과는 별개의 어떤 범주라기보다 특수한 의미의 계급 개념에 속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차별과 성폭력은 계급적대가 나타나는 특수한 양상들이다. 

장자연의 죽음은 이중적 의미에서 계급적 죽음이다. 장자연이 계약직 노동자였다는 점에서 그것은 비정규직 프롤레타리아트의 죽음이다. 또 장자연이 성서비스 노동과 성폭력의 환경 속에서 죽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여성 프롤레타리아트의 죽음이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힘 없음으로 인한 고통과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음을 기록한 문건과 리스트를 남겼음에도 그것들에 대한 관리와 처분의 권한은 아주 당연한 듯이 ‘(유)가족’에게 귀속된다. 그 문건과 리스트는 한 인간을 둘러싼 사회적 적대의 조건, 그 구조와 메커니즘 및 양상에 관한 기록이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관리와 처분의 독점적 권한이 가족에게 귀속되는 것이 정당한가? 그것이 사회적 정의인가?

지금까지 알려진 정황과 사실들에 따르면 장자연 문건 및 리스트가 관리되고 처분된 과정은 이러하다. 1)2009년 2월 28일 문건 4장이 장자연(과 유장호)에 의해 작성되고 유장호에게 맡겨진 후 다음날(3월 1일) 장자연이 리스트가 포함된 3장의 편지글을 유장호에게 전달한다. 2)장자연이 유장호에게 문건과 리스트의 반환을 요구하던 중 사망한다. 3)유장호가 문건을 공개해야 할 실리적 필요성과 문건/리스트가 가족에 의해 관리되고 처분되어야 한다는 통념 사이에서 고민한다. 4)유장호가 가족과의 협의 없이 문건의 존재와 문건의 일부 내용을 언론에 공개한다. 5)유장호가 윤지오에게 문건/리스트 사본을 보여준 후, 그것을 봉은사 땅 밑에 묻어두었던 원본과 함께 유가족의 결정에 따라 소각한다. 6) 이후 유가족은, 가족 동의 없이 문건을 공개한 것에 대해 유장호와 3명의 기자를 상대로 사자명예훼손혐의로 고소한다. 7)경찰은 사자명예훼손은 술접대의 사실 여부가 가려진 후에만 적용가능하다고 보고 이 혐의는 적용하지 않았지만 유족에 대한 명예훼손혐의는 적용가능하다고 결론내린다. 등등.

이러한 과정은 한국사회에서 가족중심주의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첫째 문건과 리스트의 공개가 무엇보다 유가족의 명예를 훼손하게 된다는 법리적 판단은 한국 사회의 개인들의 행위 공과(功過)가 무엇보다도 가족에 미치는 영향을 중심으로 평가되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둘째 문건/리스트의 공개여부의 권리가 전적으로 가족의 의사에 맡겨져 있음으로써 그것을 공개한 자와 심지어 그것을 보도한 기자까지 고소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것은 가족의 이해관계 판단이 언론자유보다 상위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셋째 유가족의 결정으로 장자연 문건/리스트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소각되는데 이것은 사회적 의미를 갖는 사건의 증거물 인멸의 합법적 권리까지 가족이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실은 장자연의 죽음의 사회적 진실을 알고 국가로 하여금 그러한 사태의 재발을 방지할 제도개혁을 실행하도록 명령할 수 있는 국민-다중들의 기본적 권리와 상충한다. 국민의 이 기본적 권리와 가족의 명예인격권 사이의 상충에서 가족의 명예인격권이 우선함으로써, 장자연의 죽음의 비밀을 풀 수 있는 핵심 단서였던 문건/리스트가 소각되어 사라져 버린 것이 지금까지 이 문제가 사회적 논란으로 남게 된 조건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유가족의 권리에 대한 주장은 여기에서 더 나아간다. 김수민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윤지오가 유가족의 동의 없이 <13번째 증언>을 출판한 것이 부당하다는 논리를 폈다. 이것은 윤지오의 기본권인 사상, 표현, 출판의 자유를 유가족의 동의에 종속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유가족의 권리를 국민의 기본적 권리를 상당히 침해할 정도로까지 확장하는 논리를 선택하는 것이 만약 옳다면 국민들이 장자연 사건의 재조사와 재수사를 국민청원으로 촉구하는 것도 유가족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는 부당한 것이 될 것이며 이 사건을 재조사하는 과거사조사위원회 그 자체도 유가족의 동의 없이는 부당하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실제로 유가족들이 문건/리스트의 소각에서부터 그 문건/리스트 일부의 언론공개를 명예훼손으로 제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 일관되게 장자연 사건의 사회적 공개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해온 것을 고려하면 유가족의 동의를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에서 유가족의 동의가 증언, 조사 등 이 사건에 관련된 모든 활동의 전제라는 주장은 국민들의 기본권리에 대한 침해로 귀착될 것이다.

이런 문제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중심)주의는 윤지오의 출판증언를 비롯한 증언활동을 억압하고 비난하는 강력한 정동적 무기로 사용되었다. 특히 김수민과 그 주변 사람들이 특히 그랬다. 그들은, 윤지오의 증언활동에 반대하면서 힘으로 딸의 의지를 꺾으려한 아버지의 요구를 윤지오가 거스르는 것, 또 증언활동과 <지상의 빛>을 위해 이에 반대하는 아버지와의 관계까지 단절할 것을 고려하는 것을 ‘패륜’이라고 부른다. 패륜이란 윤리에 어그러진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윤리’가 여성의 재생산노동을 무상으로 수탈하는 것의 관습적 정당화 기제를 지칭하고 사회적으로 성차별적 자본권력에 의한 성적 서비스 노동의 착취와 성폭력을 일상화하는 관념적 장치라면 어떨까? 그것이 성폭력 질서에 대한 증언을 억압함으로써 가부장질서를 안정되게 재생산하기 위한 윤리라면 어떨까? “가족을 욕되게 하지 말라”면서 윤지오를 ’패륜아’라고 비난할 때, 그 비난은 가부장적 착취체제를 정당화하고 그것에 복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것에 도전하는 사람에게 덧씌우는 억압의 굴레가 아닐까?

공통장 감수성의 징후와 예술인간-예술체제의 동선

-장자연 사건과 윤지오의 증언투쟁을 중심으로

맑스코뮤날레 <다중지성의 정원> 세션  발표개요 : 2019년 5월 25일 오후 1시~3시, 서강대 정하상관

장자연 사건 재조사의 정치적 배경

2002년 월드컵 서포터즈(응원부대) 레즈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권력장을 ‘대~한민국’이라는 국민 공통장으로 재구성하려는 다중의 욕망을 표현했다. 2008년 촛불봉기는 공통장으로서의 대~한민국이 헌법1조에 어렴풋이나마 이미 규정되어 있는 형상임음을 발견한다. ‘대한민국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민주공화국’이라는 규정이 그것이다. 이 헌법규정은 ‘주권이 자본에게 있고 모든 권력이 자본으로부터 나오는 자본공화국’의 현실과 상충하는 상태에 있었다. 수 개월간 메트로폴리스를 중심으로 전개된 촛불봉기는 국가가 자본의 이익(자유무역)을 위해 광우병이라는 반생명적 질병을 도입하는 것에 무심하다는 사실을 고발하면서 이 상충과 모순을 축소하고 ‘공통장 대~한민국’을 회복하려는 투쟁이었다.  

2014년 세월호 참사는 현실의 대한민국의 행정, 입법, 사법, 언론 등의 권력부(府)들이 국민들의 생명을 보호하기는커녕 수장시키는 기관이며 이것들이 이윤중독적 자본주의 체제를 떠받치고 있는 정치적 기둥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이때 다중들의 공통장 감수성은 미안함, 즉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로 나타났다. 그것은 자신들도 그 체제에 한 발이 묶여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공감의 정동이었다. 2016년에 이르러 2년간의 세월호 진실규명 투쟁에 의해 정부가 국민다중이 아니라 대자본에 의해 섭정되고 있음을 발견한 촛불국민들은 생명 공통장을 자본에 갖다 바치는 박근혜 대의정부를 퇴진시키고 대~한민국을 다중의 촛불공통장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다시 일어섰다. 그 최초의 성과가 국회와 헌법재판소에 대한 촛불 섭정을 통해 달성한 대통령 박근혜에 대한 파면이고 그 두번째 성과는 차기정부가 촛불정부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압박하는 것이었다. 문재인 정부가 자신을 촛불정부라고 말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2018년, “내가 겪은 성폭력”을 고발하면서 법조계, 정치권, 문화예술계 등 각계에서 터져나온 미투운동은 사회 및 생활 곳곳에 보편적으로 확산되어 있는 성폭력 체제를 가시화했다. 그것은 이른바 ‘촛불정부’가 남북관계, 한미관계, 적폐청산, 권력기관 혁신, 소득분배 등 몇몇 영역에서 거둔 일정한 개혁성과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를 온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폭로이고 도전이었다. 촛불혁명 이후의 대한민국이 여전히 성차별과 성폭력으로 분단되어 있는 현실에 대한 여성들의 이 대중적 폭로와 거부는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에 대한 전면적 여성 대중봉기의 형태로 나타났다. 미투(me-too)는 ‘미(me)’라는 특이점의 성폭력 체험과 그에 수반되는 아픔을 공통의 것으로 만들어 반-성폭력 공통장을 구축하려는 투쟁이었다. 이것은 여성에게 보편적인 체험들을 사적이고 개인적이며 특수한 수치(羞恥) 체험으로 만들어 온 권력장의 개별화 및 분할지배 테크놀로지에 대한 집단적 거부와 연합을 표현했다.  위드유(“당신과 함께”) 운동은 이 미투봉기 공통장에 대한 연대 감수성의 표현방식이었다.

미투위드유 봉기가 다중의 섭정정치의 형태로 표현된 것이 2018년 2월 장자연 사건 진상규명 청와대 국민청원이었다.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를 적폐로 규정하고 국가기구로 하여금 그것을 청산하도록 명령하는 것이 이 섭정운동의 본질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공약으로 내건 적폐청산의 틀 속에서 미투위드유 운동으로부터 제기된 장자연 사건 재조사 국민청원을 받아들여 2018년 4월 2일 장자연 사건을 과거사조사위원회의 사전조사대상으로 선정하고 5월 28일 검찰에 이 사건의 재조사를 권고했다. 이것은 미투위드유를 통해 구축된 반성폭력 공통장이 권력장의 성폭력적 구조를 개혁하도록 압박하는 섭정 사례이다.

윤지오의 증언투쟁

윤지오는 장자연과 함께 연예기획사 더콘텐츠에 소속되어 일했던 계약직 연예노동자였다. 그의 꿈은 훌륭한 배우가 되는 것이었지만 그의 꿈과 달리 계약기간 중 그의 노동력은 다중을 위한 연기가 아니라 권력자들을 위한 성적 서비스노동(식사 및 술 접대)으로 이용되었다. 그런데 더콘텐츠와 체결한 계약은 그러한 노동을, 연예활동 기회를 얻기 위한 프로모션, 이벤트, 인터뷰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러다가는 이미지만 실추되고 영영 배우가 되기는 어렵겠다고 판단한 그는 기획사 대표에게 다른 소속사에서 연예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과 계약 중도해지에 대한 반성문 및 600만원의 합의금을 지불한 후 계약을 해지할 수 있었다.

2009년 3월 7일 장자연의 사망과 장례식 후 장자연이 남긴 문구 “저는 나약하고 힘 없는 신인배우입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윤지오는 “나의 언니 장자연이 왜 죽어야 했나?”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세월호의 침몰과 승객들의 난망(難忘)한 죽음 앞에서 사람들이 느꼈던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감수성의 한 걸음 진전된 발현이었다. 그는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유장호와의 통화들을 녹취하여 수사기관에 제출하는 한편 봉은사에서 본 문건 및 리스트의 사본과 원본에 대해 진술했다. 이후 그의 삶은 윤지오로서가 아니라 장자연의 동료배우로, 그리고 장자연 문건/리스트에 대한 증언자로서 규정되었다. 여러 차례의 경찰, 검찰, 법정 증언에도 불구하고 장자연과 자신이 겪었던 부당한 대우(노예계약)에 대해서는 인정되지 않았고 ‘장자연 문건’에 등장하는 ‘힘센 자들’인 방사장 일가는 무혐의처분되고 ‘리스트’는 수사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으며 처벌은 겨우 기획사 대표들인 김종승, 유장호를 가볍게 처벌하는 것에 머물렀다. 이것이 그에게는, 언론기관이나 사법기관이 진실을 밝히기보다는 진실을 흐지부지 덮는 것을 업으로 하는 기관들이라는 것을 경험한 배신과 각성의 시간이었다.

9년 후인 2018년 한국에서 일어난 미투 봉기와 위드유 운동의 물결은 그에게 성폭력 체제와 장자연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이제 혹시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주었다. 이 기대 때문에 그는 2018년 여름 PD수첩 <故 장자연>의 인터뷰에 응했고 과거사 조사위원회 진상조사단의 증언자 요청을 계기로 마침내 장자연 사건 재조사의 증인으로 나갈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로써 윤지오는 권력이 장자연의 죽음에 대해 지난 10년간 구축해온 지배적 이미지(‘우울증-유서-자살’)에 도전하는 특이점으로, 반성폭력 공통장의 실제적 첨점으로 부상했다. 그는 한국으로 와서 조선일보 기자였던 조희천의 성추행 현장에 대해 증언했다. 윤지오의 증언을 근거로 조희천은 기소되었다. 이것은 윤지오의 증언이 실제적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시발점이었다. 이것은 2019년, 그 존재에 대해서는 유장호, 장자연 오빠, 윤지오가 공히 진술했으면서도 지금까지 아무도 그 내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진술하지 않았던 ‘장자연 리스트’의 일부 내용을 증언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것이 권력자들의 성폭력 행위 가능성에 대해 증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성폭력 체제 권력장과 가해자들의 반발이 충분히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그 반발은 아마도 재계, 정치권, 언론계, 법조계, 연예계 등의 저 ‘힘센 사람들’(장자연), ‘법 위의 사람들’(윤지오)로부터, 그리고 그 체제와 인물에 의존하고 있는 익명의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가해져 올 것이었다. 이것은 증언자가 아닌 사람들은 경험하기도 실감하기도 힘든 실제적 압력이었다.

윤지오는 이것을 회피하기보다 정면으로 맞서는 길을 택했다. 지금까지 그는 수사기관 진술증언과 언론 인터뷰에서 가명과 모자이크 처리된 가면을 사용했지만, 이제 그는 가림을 통해 자신을 방어하는 방법 대신 실명과 실면을 공개하고 증언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것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보호장치를 필요로 했다. 첫째로 그는 생존방송(라이브방송)을 통해 자신의 신체를 대중의 시선에 노출시켜 그 시선이 자신의 신체를 보호할 수 있도록 배치하는 한편 다수의 사람들과의 집단적 이동 및 회견을 통해 신체를 집합화함으로써 물리적 백래쉬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했다. 둘째로 그는 국가에 대해 자신의 개인 행동 시간에 대한 경호를 요청하고 이를 제도화할 수단으로 증인보호법 제정을 국민청원했다. 이것은 진실규명을 위한 핵심장치로서 진실증언자에 대한 국가보호를 확고히 하려는 섭정노력의 표현이었다. 또 그가 “5대 강력범죄에 속하지 않는 범죄의 증언자, 목격자, 제2의 피해자들이 실질적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시설과 24시간 경호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서 비영리단체 <지상의 빛>을 조직하고 후원계좌를 개설한 것도 반권력 공통장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말하려는 사람이 두려움 없이 그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국가 지원의 부족함을 보충할 수 있는 시민들의 자구노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근거한다. 이것은 체험한 사람만이 구체적으로 감각할 수 있는 필요였고 그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하기 위한 실천이었다.

그는 증언의 범위와 대상도 넓혔다. 지금까지는 주로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에서의 진술증언의 형식 속에서 수사관, 법관, 기자가 그 증언의 대상이었지만 그들이 진실의 사회화를 가로막는 행위자들일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JTBC, 다스뵈이다, 고발뉴스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를 통한 실시간 인터뷰 증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의 기자회견 등을 통해 다중들이 장자연 사건에 대한 좀더 직접적 앎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는 유튜브, 인스타그램 라이브방송도 다중들에게 이 사건에 관해 직접 증언할 수 있는 기회로 이용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2019년 3월 7일 장자연 10주기를 맞아 <13번째 증언>을 출판한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증언에 확고부동한 물질적 실체를 부여했고 그 물질성을 통해 다양한 유언비어들을 잠재울 수 있는 실효적 장치로 기능했다. 이러한 것들은 지금까지 경찰, 검찰, 법관, 진상조사단 등 엘리뜨의 수중에서 검토되고 자신들의 계급적 신분적 정치적 필요에 따라 인용되어온 그 증언들을 다중이 직접 읽고 검토하면서 아래로부터 장자연 사건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다중적 에너지가 분출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것들이 윤지오가 권력장 가해자들에 맞서 실명, 실면의 증언을 하기 위해 ‘영리하게’(smartly) 선택한 물질적이고 실천적인 장치들이었다.

성장하는 반성폭력 공통장을 해체하기 위한 백래쉬의 방향과 양상들

진실 공통장을 확대하고 아래로부터 다중의 참여를 불러내기 위한 윤지오의 이러한 ‘영리한’ 시도가 반발을 가져오리라는 것은 권력장과 공통장의 적대라는 우리 사회의 배치구조를 고려할 때, 그리고 다중지성 공통장의 특이점들(2008 촛불의 미네르바, 2014 세월호의 홍가혜, 2016 촛불의 혜경궁김씨)이 범죄자로 낙인찍혀 고초를 겪어온 역사를 고려할 때 충분히 예상될 수 있는 것이었다. 권력장의 백래쉬 공세는 윤지오의 증언 자체를 흔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많은 사실들이 그 증언을 뒷받침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김학의 사건, 버닝썬 사건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었던 권력형 성범죄는 장자연의 죽음이 어떤 구조 속에서 전개된 것인지를 간접적으로 짐작케 하는 살아 있는 물증으로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백래쉬는 증언보다는 윤지오라는 증언자/메신저를 겨냥해서 주로 이루어졌다. 증언자를 관종, 패륜아, 거짓말쟁이, 사기꾼으로 만드는 여론몰이가 그것이었다.

가장 먼저 이루어진 공세는 한국 사회 가부장제의 대리인격체인 ‘아버지’로부터 가해진 폭력이다. 이 폭력은 <13번째 증언> 출판 직후인 3월 8일에 이루어졌다. 아버지는 딸이 장자연 사건에 증언하는 것에 반대했고 성과도 없이 끝날 그 증언이 어리석은 것임을 가르쳐주고자 했다. 이것은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의 가내수행자인 가부장이, 자신의 딸이 고 장자연 사건에 대해 증언한다면서 권력자들에게 성적 서비스 노동을 수행한 것을 공개리에 대중 앞에 발설할 때 그 증언들이 지금까지 늘 진실이 흐지부지되어온 역사를 고려할 때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역사적 직관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할 그 숨은 이력의 공개증언을 가문의 수치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사(私事)화하고 특수화하는 관점에서 나올 수 있는 통념적이고 일반적인 반응양식이다. 가부장의 폭력은 보통 가족 구성원을 자신의 재산으로 또 노예(실제로 가족의 영어표현인 family의 어원 famulus는 ‘하인’, ‘노예’라는 뜻이다)로 간주하고 그 구성원의 행위가 자신의 뜻과 위배될 때 가부장이 행사하는 처벌형식이다. 가부장은 가문의 보존과 안녕(安寧)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무릅쓴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 구성원이 자신의 뜻에 거스르면 처벌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인데, 국가는 가정에서 가부장(혹은 그 대리인들)의 이 사적 처벌 행동에 최대한 덜 관여함으로써 가부장제를 돕고 그것과 동맹하는 방식으로 가부장제 가족을 자신의 세포기관으로 포섭한다.

두번째 공세는 권력자들과 깊게 결부된 미디어들로부터 가해져왔다. 예컨대 윤지오의 증언이 사회적 설득력을 강하게 얻어서 국회에서 윤지오가 여야 국회의원들과 간담회를 가진 날(4월 7일) 뉴시스는 이후 지속될 반윤지오 공세의 밑그림과 가이드라인(“‘증인’ 윤지오와 장자연 사건”)을 권력장 행위자들에게 제공했다. 그것은 다음 다섯 가지의 내용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1)윤지오는 장자연과 친하지 않았다 2)윤지오는 고비용의 과도한 경찰보호를 받으며 생활중이다 3)윤지오는 옛날부터 유명해지는 것이 꿈이었는데 이제 장자연을 이용하여 팔로워 76만명이 넘는 SNS 스타가 됐다 4)윤지오는 장자연을 이용하여 후원계좌를 열어 돈을 벌고 있다 5)윤지오는 거짓 증언을 했으며 그의 진술은 신빙성이 없다. 이것들은, “윤지오가 친하지도 않았던 장자연에 대한 거짓 증언을 이용하여 유명세와 돈을 버는 사기행각을 하고 있다”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 것으로 윤지오를 ‘제2의 왕진진(전준주)’으로 만들어 추락시키기 위한 포석이었다.

세번째 공세는 <13번째 증언>의 북콘서트가 국회에서 열린(4월 14일) 직후에 박훈-김대오-김수민 반윤지오 트리오로부터 가해져왔다. 이들은 변호사, 기자, 작가라는 전문가 지위를 윤지오를 무너뜨리는 무기로 이용했다. 이들의 주장은 크게 보면 이미 뉴시스에 의해 생산된 반윤지오 가이드라인을 자신들의 입지에서 확대재생산하는 것이었다. 박훈은 2010년 유가족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예로 들며 윤지오가 가해자의 편이지 장자연과 그 유가족의 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김대오는 장자연 문건 ‘원본’에는 ‘리스트’가 없다고 주장했다. 김수민은 공적으로 알려진 윤지오는 자신이 사적으로 알고 있는 윤지오와는 다른 위선적 윤지오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들의 결합체는 윤지오를 관종, 위선자, 거짓말쟁이로 만들었다. 실제로는 가해자 편이면서 장자연을 위하는 것처럼 연극하여 사적 실리를 챙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네번째 공세는 가족, 미디어, 전문가로부터 가해진 앞의 세 유형의 공세를 유튜브, SNS를 통해 다른 형태로 무한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언어폭력과 결합시켜 윤지오의 인스타그램과 라이브방송에 퍼붓는 우/극우 세력들의 연합적이고 집중적인 디지털 테러공세로 나타났다. 이것은 justicewithus와 같은 디지털저격수, 무수한 댓글로 공격하는 디지털소총부대, 심지어 윤지오 지지자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은밀히 공격을 퍼붓는 디지털 편의대 등을 포함하는 다방면의 조직적 공세였다. 이것들은 한결같이 윤지오를 여자-왕진진으로 만드는 것에 집중되었다.

이 떼몰이 공세에 사용되는 언어들이 곰곰이 살펴보면 어떤 근거도 없는 거짓말, 지어낸 소문, 모욕 등이지만 그것들이 사실의 편린들과 결합하여 폭발성 있는 디지털 화약으로 기능함으로써 이 공세는 지배계급이 필요로 하는 낡은 감정질서 및 인지프레임을 선동적으로 재생산하면서 반성폭력 공통장을 해체하고 권력장의 영토를 넓혀 나갔다. 이 언어화약들은 진실의 편린들과 낡은 도덕감정, 그리고 가짜뉴스를 마구 버무려 만들어 낸 폭발물이었는데 이것들이 기술적으로 조직되고 반복적으로 사용되면 여론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재확인해 되었다. 그것의 효과는 미투-위드유 운동 이후에 윤지오의 증언에 의해 성장되어오던 반성폭력 공통장이 균열되어 그 일부가 권력장에 재포섭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장자연 사건을 다루는 과거사 진상조사단 내부의 갈등으로도 나타났다. 어떤 언론은 이것을 ‘국론 분열’로 표현했다.

예술인간-예술체제의 특이점과 그 동선

백래쉬로 나타난 권력장의 이러한 재포섭 전략에 대항하는 투쟁들은 어떠했는가? 권력장의 수복을 위한 반윤지오 공세가 개시된 후 그 전에 윤지오의 증언행동을 지지하고 뒷받침했던 언론들과 인사들의 상당부분은 방어를 하기보다 뒤로 물러나 관망하는 태도를 취했다. 주로 친문 언론들이 그런 태도를 취했다. 이것은 아마도 윤지오에 대한 법적 조력이 반문-비문 경향의 정의연대로부터 나왔다는 것과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윤지오 증언의 힘을 살려 내고 지키는 투쟁은 제도권의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거의 전적으로 비제도 성폭력 공통장 다중으로부터 주어져야 했다. 이 투쟁은, (1) 백래쉬 주장들의 허구성에 대한 사실검증 투쟁 (2) 반성폭력 공통장의 첨점이자 특이점인 윤지오를 지키기위한 투쟁  (3)장자연 사건 재수사와 특검 요구 투쟁 그리고 (4)윤지오의 자기방어 투쟁 등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백래쉬 주장들의 허구성에 대한 사실검증 투쟁은 그 주장들이 근거 없는 풍문이나 사실에 대한 편협한 해석과 오판, 혹은 과잉된 비난 욕구 등에 의해 조작된 것들임을 비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백래쉬 주장들은 특히 ‘장자연 리스트’가 없었다는 주장에 집중되었다. 이것은 장자연의 죽음이 개인적 문제이거나 기껏해야 소속 기획사의 문제이지 성폭력 권력체제나 권력자들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뒷받침하여 그 체제와 가해 당사자들을 방어하는 효과를 낳는다. 따라서 이 주장에 대한 사실 검증투쟁은 장자연 리스트가 실재했음을 확인하는 투쟁으로 나타났다. 이민석 변호사와 JTBC 이호진 임지수 기자 등의 노력은 이 문제를 다룸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SBS <그날이 알고 싶다>에서 방송된 장자연의 녹취육성도 장자연 리스트가 실재할 가능성이 높다는 방향에서 조사를 수행해 나갈 수 있는 중요한 동력을 제공했다. 이처럼 장자연이 ‘힘센 사람들’로부터 받고 있는 압력을 육성으로 표현한 것, 윤지오가 유장호와의 통화내용을 녹취하여 검찰에 제출한 녹취록에서 명단과 목록이 거론된 점, 2009-10년 사이의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이루어진 진술서(유장호, 윤지오, 장자연 오빠)에 ‘조심해야 할 사람들’의 명단 등이 진술된 점 등이 장자연의 실재성을 증거하는 물질적 증거로 사용될 수 있었다.

윤지오 지키기 투쟁은 반윤지오 백래쉬를 성폭력 체제의 자기방어와 재생산을 위한 ‘마녀사냥’으로 규정하고 그러한 마녀사냥식 공세에 대한 방어를 수행하는 한편 마녀사냥에 의해 입게 된 윤지오의 심리적 정신적 상처를 정서적 인지적 유대를 통해 치유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 그리고 윤지오가 청원한 증인보호법에 동의서명하고 증인보호법 제정을 촉구하는 1인 시위 등에 참여하는 것 등으로 나타났다.

장자연 사건 재수사와 특검 요구 투쟁은 정의연대와 녹색당 등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들 시민단체와 원외 정당은 지난 10년간의 수사가 부실수사로 드러났고 조선일보 등에 의한 수사방해 외압이 실재했던 만큼 철저한 재수사가 요구되며 이를 위해서는, 이미 장자연 사건에 연루되어 있는 기존 검찰이 아니라 특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윤지오의 자기방어 투쟁이었다. 윤지오는 4월 24일 백래쉬가 폭발하던 시점에 캐나다로 몸을 옮겨 자신의 신체를 보호한 후, 인스타그램 포스팅과 라이브방송을 중심으로 방어투쟁을 전개했다. 이것은 배우지망 신인 예술가였던 윤지오가 증언자 윤지오를 거쳐 예술인간 윤지오로 변모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이것은 성폭력 체제가 자신을 관종으로 이미지화하려는 시도에 맞서 자신을 예술인간으로 내세우고 예술인간 공통장을 구축하려는 시도였다. 그 시도들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포함한다.

첫째는 권력장과 그 파수꾼 및 십자군들을 향한 것으로 이들의 마녀사냥식 인신공격 디지털 테러의 범죄성을 고발하는 것이었다(선처 없는 처벌).

둘째는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는 공세에 대해 자신의 존엄함과 떳떳함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셋째는 누구나의 특이성과 존엄성(당신들은 놀랄 만한 존재이다. 스스로 자신을 믿는 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타인에게 증명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을 주장하고 연합한 특이자들의 힘(시민의 힘)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넷째는 요리 식사 잡담 등과 같은 생활시간을 투쟁과 연합의 시간으로 만드는 것이었다.(라이브방송)

다섯째는 투쟁을 음악, 만화, 일러스트, 시, 에세이 등의 예술형식들과 결합하는 것이었다

여섯째는 투쟁을 유머와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일곱째 이러한 예술인간적 투쟁 속에서 윤지오는 증인보호법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역설했고 증인보호를 위한 비영리단체 <지상의 빛>의 구상을 구체화했다.

이 투쟁 속에서 윤지오는 고펀드미의 펀딩을 해제하여 펀더들에게 모두 되돌려줌으로써 박훈의 사기죄 고발을 무력화시키고, 후원금을 착복했다는 비난에 대해 1원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반박하고, 디지털 댓글테러에 대한 처벌을 통해 받을 벌금을 <지상의 빛> 후원금으로 돌리겠다고 말하고, 자신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다양한 기사, 에세이, 자료들을 지지자들과 공유하여 장자연 리스트가 없었다는 친권력담론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라이브방송을 통해 시민들과의 정서적 교감을 지속하고, 좋아하는 음악의 교류를 통해 취향공통장을 확대해 나갔다. 또 진상조사단의 행보나 발표를 비롯하여 장자연 사건 조사 관련 발언들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여 지지자들과 공유하는 것도 중요한 예술인간적 실천이었다. 가족을 욕되게 한다는 비판에 맞서 그는 가부장제 전통이 말하는 혈연적 제도적 가족이 아니라 오직 현실에서 삶을 함께 나누는 특이자들의 모임(assemblage)만이 우리 시대에 필요한 가족일 수 있다는 새로운 가족형상을 제시함으로써 전통적 가족주의의 후진성과 억압성을 고발했다. 또 고인을 욕되게 한다는 비난에 맞서 그는, 살아생전에 장자연을 알지도 못했고 고인이 된 장자연의 진실규명을 위해 삶의 단 한조각도 나누지 않은 ‘자격 없는 자’들이 산 장자연을 이용한 권력자들에게 고인을 다시 갖다 바칠 목적으로 ‘고인을 이용하지 말라!’는 자가당착적 구호를 이용하고 있다고 맞섰다.

자신을 관종으로 왜곡하고 사기꾼으로 범죄화하려는 성폭력 체제와 가해의 권력장에 대항하는 이 자기방어투쟁의 과정 속에서 윤지오는 권력장의 영토를 해체하여 공통화하는 투쟁의 예술인간 특이점으로, 삶예술의 비전문가 배우/행위자(actor)로 나타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에서 공통장을 가시화하고, 지키고, 확장해온 것은 지금까지 권력이 ‘폭도'(광주의 항쟁시민들), ‘허위사실유포자'(미네르바), ‘허언증환자'(홍가혜) 등으로 불러, 죽이고 가두고 고립시켰던 사람들의 예술인간적 행동들이었다. 윤지오의 이 예술인간 증언행동도 이러한 역사적 비운을 피할 수 없을 것인가? 아니면 이 역사적 비운을 비스듬히 비켜가는 동선을, 사선(斜線)의 도주로를 열 것인가?

마녀사냥의 암구호들 1: “고인을 이용하지 말라”


산사람을 이용한 자들이 죽은 사람도 이용한다

장자연은 배우가 되고 싶었고 배우를 하고 싶었다. 신인배우가 되기 위해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권력자들에게 성서비스 노동을 강요당해야 하는 억울함을 견뎌야 했다. 소속사 사장 김종승(갑)과 맺은 노예계약 때문이었다. 윤지오의 계약서와 동일한 그 계약서에서 장자연(을)은 “연예활동 전반에 걸쳐 ‘갑’의 결정 및 지시에 충실히 따라야”(3조 바) 했고 “방송활동, 프로모션, 이벤트, 각종 인터뷰 등 ‘갑’이 제시하는 활동에 전적으로 수락하여야” 했으며 “행사불참 또는 방송사고를 일으켰을 경우 ‘을’은 ‘갑’이 제시하는 민, 형사상의 모든 책임을 져야 했다”(4조 다). ‘갑’인 김종승의 결정에 따라 지시된 성적 서비스노동은 ‘갑’에 의해 “[방송기회를 얻기 위한] 프로모션, 이벤트, 인터뷰”의 기회로 해석 및 주장되었고 계약에 따르는 의무적 활동으로 강제되었다. 이러한 노동이 부당하게 느껴져 중도해약하고 싶을 때에는 “위약벌금 1억 원과 ‘갑’이 ‘을’을 관리하기 위해 발생한 비용 중 증빙자료가 있는 모든 경비에 대하여 ‘을’은 이의제기 없이 계약 해지일로부터 일주일 이내에 현금으로 ‘갑’에게 배상하고 잔여기간 동안 발생하는 모든 모든 수익활동의 20%를 ‘갑’에게 손해배상금으로 지불”해야 했다(7조). 그러한 악조건의 중도해약마저 ‘갑’의 합의가 없으면 불가능하게 되어 있었다(6조 가). 또 ‘을’이 연예활동을 중단한다 해도, “그 기간만큼 계약기간은 자동연장”(3조 바)되도록 되어 있었다. 장자연이 체결한 계약서는 ‘갑’이 계약기간 중 철저하게 노예소유주로서 노예노동자인 ‘을’을 이용할수있는 조밀한 장치들을 빈틈 없이 갖추고 있다. 소속사는 배우가 되고자 하는 장자연의 희망을 이용하여 그의 생명력을 쥐어짜는 맷돌이었고 그 생명 에너지의 이용자=소비자는 재계, 정치계, 법조계, 언론계, 연예계의 권력자들이었다. 이것이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와 성폭력 권력이 가동되는 메커니즘이었다.   

장자연은 이러한 상황을 견딜 수 없었고 이 상황에서, 기회가 있다면, 빠져나오고자 했다. 그런데 그가 이 강제수용소에서 어떻게 빠져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 노예노동수용소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장자연의 필사적 저항과 탈출의 시도가 무엇이었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경험한 연예계를 구성하고 재생산하는 마약, 폭력, 협박, 강요, 수탈, 착취, 부당이용의 사례들을 낱낱이 적시하여 보여주고 자신을 이용한 권력자들, ‘조심해야 할’ 권력자들의 리스트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는 오늘날의 인지자본주의가 어떻게 여성들의 예술적(연예적) 능력과 성적 에너지를, 요컨대 생명력을 착취하는지를 구체적으로 폭로했고 그 착취를 수행하는 인격적 행위자들을 만천하에 드러내고자 했다. 하지만 이러한 폭로행위에는 큰 위험이 따른다. 그것은 작게는 연예계에서 고립되어 더 이상 배우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실현할 수 없게 될 위험으로부터 크게는 초법적 권력자들의 손에 가족들이 큰 피해를 입거나 자신이 목숨을 잃을 가능성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폭로의 필요와 그것이 가져올 위험 사이에서 장자연의 고뇌는 깊었다. 김종승 기획사와의 싸움에서 장자연의 폭로 문건을 자신의 기획사에 유리하게 이용하고자했던 유장호가 삭제를 요구해야 할 만큼 권력자들의 성범죄 행위에 대한 장자연의 폭로 의지는 강렬했다. 하지만 그 폭로문건이 기획사들의 소송전의 도구로 전락할 위험을 발견한 후에 그는 그러한 위험을 막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유장호에게, 그 문건을 자신의 의지 밖에서 불법적으로 유통시키지 말고 그 문건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유장호는 그 요구를 묵살한 채 자신의 유통행보를 계속했다. 이 시간, 그러니까 2009년 2월 28일 장자연이 문건과 리스트를 작성한 후 약 일주일 뒤인 3월 7일 주검으로 발견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자세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나는 힘도 없고 빽도 없고 미련도 없다”며 자신을 옥죄어 오는 ‘힘센 자들’에 대한 절규를 표현한 절박한 통화기록이 그의 심경을 가감없이 전달하는 생생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기업가들과 권력자들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를 철저하게 이용했다. 계약상의 ‘갑’인 김종승이 그를 노예노동자로 이용했고, 권력자들은 김종승을 매개로 그를 성노예로 이용했음은 분명하다. 김종승은 수사기관에서 유장호의 기획사가 자신과의 싸움에 장자연을 이용했다고 진술한다. 이상호는 이명박의 국정원이 장자연의 죽음을 당시의 법란(판사파동)이 가져올 수 있는 사회적 파장을 최소화하는 데 이용하기 위해 장자연 문건 및 리스트의 공개와 은폐의 과정에 유장호를 매개로 개입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것은 장자연이 죽기 전에 남긴 문건과 리스트조차도 정치적 이용의 도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윤지오가 증언을 시작하자마자, 아니 증언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윤지오는 ‘고인을 이용하지 말라’는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누가 장자연을 죽였는가,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를 밝히기 위한 진상조사에서 증언하는 것이 물론 고인을 생물학적으로 되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증언은 고인이 현대 자본주의의 가부장적이고 노예제적인 성폭력 체제에 저항하다 권력자들에 의해 희생된 인격임을 밝히고 가해자와 책임자를 처벌함으로써 고인의 존엄을 되살릴 수 있고 존엄의 체제를 구성하는 데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윤지오의 증언은 고인 장자연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증언자 자신이 고인 장자연을 빙의하여 말하는 것으로 증언자 윤지오의 생명을 고인 장자연과 산 장자연들을 위해 이용하는 우애와 선물의 행위이다.

그렇다면 장자연 문건과 리스트에 이름을 남긴 권력자들 및 그 권력자들이 만들어 가고 있는 체제는 증언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질 것인가? 그들이 그 이름들과 체제를 보호하려고 하는 것은 생리상 당연한 것이다. 그 이름들과 체제들이 성착취자, 성범죄자, 살생자로 역사에 기록되고 또 법률적 수사와 재수사를 받지 않게 하기위해서는 윤지오의 증언을 막아야 했다. 증언을 막는 것은 다양한 수준의 목표지점들을 갖는다. 첫째로는 증언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둘째로는 증언을 막지 못한다면 증언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셋째로는 증언을 축소시키지 못했다면 증언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넷째로 증언을 왜곡시키지 못했으면 증언자를 쓰러뜨려 증언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윤지오의 생존방송과 경호요구, 증언자보호법 청원, 비영리단체 구성 등의 노력은 증언을 끝까지 수행하면서 증언의 원천봉쇄, 축소, 왜곡의 시도들을 돌파할 수 있는 힘이었다. 권력자들이 증언자를 쓰러뜨리는 방법에 총력을 다한 것은 증언이 끈질기게 진행된 후 선택한 최후의 방법(윤지오는 이것을 ‘최후의 발악’이라고 표현한다)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권력자들이 이 최후 대공세에 ‘고인을 이용하지 말라!’는 구호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권력자들과 그 파수꾼들이야말로 살아있는 장자연을 ‘어머니 기일’에까지 이용한 자들이며 죽은 후에도 이용한 자들이다. 이들은 타인노동의 착취(이용=exploitation)를 자기재생산의 본질로 삼는 자본주의의 권력자들이고 체제의 대행자들이다. 이제 이들은 ‘고인’이라는 이름으로 장자연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고 영구화하면서 증언자 윤지오의 목소리로 귀환하고 있는 장자연의 절규를 다시 땅속 깊이 파묻으려 한다. 세월호의 생명을 수장한 바로 그 반생명적 죽음의 권력이 댓글, 고소, 고발, 보도, 유튜브 채널, 페이스북 등 온갖 수단들을 동원하여 윤지호의 증언을 아귀(餓鬼)들의 소음 속에 파묻는다. 이것은 윤지오의 목소리로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한 장자연의 절규, 그 문건과 리스트를 영원한 침묵과 어둠 속에 파묻는 여론장(與論葬)의 행렬이다. 박훈, 김대오, 김수민 트리오와 강용석, 김용호의 가로세로연구소 등이 보조를 맞추면서 “고인을 욕되게 하지 말라!”, “고인을 이용하지 말라!”고 부르짖으면서 윤지오의 은행계좌를 뒤져 불순한 기록들을 찾으려 하고 가족관계에 있는/있었던 사람들을 이간시켜 증언자를 비난하도록, 혹은 그 비난이 널리 유통되도록 도울 때 이들이, 고인이 된 장자연이 영원히 죽어 있도록, 장자연의 절규가 영원히 잊혀지도록, 고인의 주검을 결코 부활할 수 없는 죽은 시신 그대로 이용하려는 주검정치(necropolitics)의 집행위원들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이들의 이러한 행보가 본인들이 의식하건 못하건 간에 거대자본의 분식회계, 차명계좌, 자금도피, 투기놀음 등의 경제범죄와 각종 유형의 성범죄를 은폐하는 가림막이며 생명을 위한 촛불행진을 가로막았던 2008년 광화문 ‘명박산성’의 현재태라고 생각한다.

“윤지오의 증언이 장자연 유가족들의 손해배상 청구 사건에서 결정적 패소 원인이었다”는 박훈 변호사의 주장이 어떻게 윤지오의 진실을 가려버렸나?

박훈은 2019년 4월 *일의 페이스북에서 “윤지오의 증언이 장자연 유가족들의 손해배상 청구 사건에서 결정적 패소 원인이었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인용한다. 여기에 그 구절과 박훈의 주장, 그리고 그 주장이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보여주는 댓글 일부를 캡쳐한 이미지가 있다.

이 포스팅은 (내가 캡쳐할 당시) 무려 37회 공유되었고 231명이 좋아요를 달았으며 4개의 댓글이 달려 있다. 이후 윤지오는 유가족 편이 아니라 가해자의 편을 들었던 인물이라는 이미지가 마치 사실인 것처럼 유통되었다. 정말 그럴까?

박훈이 인용한 위 캡쳐대목의 핵심내용은, 윤지오가 “피고[김종승]가 부른 모임에 연예 관계자들이 많이 있는 편이었고 참석할 때 신인 배우로서 얼굴을 알리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노래와 춤을 출 때도 있었지만 강압적으로 한 것은 아니고 피고가 술을 따르게 하거나 술을 마시게 하는 등 술 접대를 요구한 적이 없고 성 접대를 하라고 강요한 사실이 없다”라고 증언한 점을 들어, ‘김종승이 장자연을 폭행 협박하여 식사나 술자리에 참석하도록 강요하였다거나 술 접대를 강요하였음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며 성매매를 알선하였음을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라는 이유로 전부 혐의 없음 불기소 처분을 했다는 것이다. 정확히 위의 인용문건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밝혀져 있지 않지만 문투로 보아 아마도 사건 판결문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이 구절에 기초해서 박훈은 “2010년 장자연 유가족들이 김종승을 상대로 한 술접대, 성접대 강요에 따른 불법행위 책임을 묻는 항목에서 윤지오 증언은 결정적인 패소 원인으로 나온다. 이런 논리는 대법원까지가 확정된다. 유가족들은 김종승이 장자연을 때린 것과 잦은 술자리에 대한 위자료로 거의 무의미한 수준의 금액만을 판결 받았을 뿐이다.”라고 결론 내린다.

판사[위 캡쳐 이미지가 판결문이라고 가정하여 판사라고 부른다]가 윤지오의 진술을 인용근거로 원고[유가족] 패소(사실은 부분승소였지만 여기서는 무시한다) 판결을 내렸다고 해서 윤지오가 피고[김종승]의 편을 들었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판단인가? 판사가 윤지오의 참고인 진술들로부터 몇몇 단편만을 들어 편의적으로 인용하거나 혹은 오판을 할 가능성도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는가? 여기서 나는 박훈에게 윤지오의 참고인 진술들로부터 판사가 요약인용하고 있는 것이 윤지오의 진술들에 대한 정확한 요약인지 잘못된 요약인지 직접 윤지오의 진술들을 읽고 다시 평가해 줄 것을 요청한다.  박훈이 윤지오의 진술문으로부터 직접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판사가 인용한 것을 재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박훈이 판사[?]의 판결문 만으로 윤지오를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심각한 엘리뜨주의를 느낀다. 참고인의 진술을 읽지 않고도 그 진술에 대한 판사의 인용만으로 그 참고인을 판단할 수 있다는 태도가 그렇다. 이것은 참고인을 무시하는 태도이며 지금 이 경우에는 사태를 오판하는 위험한 조건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나는 윤지오의 진술조서 속에서 정말 윤지오가 저 인용에 나와 있는 것처럼 김종승(가해자)를 편들었는지를 판결문이 아니라 윤지오의 진술문을 가지고 검토해 보려 한다. 

먼저 윤지오는 김종승 회사에서의 노동이 매우 좋지 않았고 김종승이 욕과 폭행을 하는 것을 봤다고 진술했다. 예컨대 “김종승은 평소에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직원들에게 욕을 하고 폭행을 하는 것을 봤고 언니들로부터 그날그날 분위기에 따라 행동을 조심해야 된다는 말을 들었고 계약기간 동안에 방송활동 기회는 한 번도 얻지 못하고 김종승이 요구하는 식사자리 술자리에 무조건 나가는 상황에서 이러다가 연기활동은 전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우려스러웠기 때문에 이런 악조건에 동의하고 해약을 했다.”는 진술이 그것이다.

계약을 해지하는 조건도 매우 나빠 부당한 조건들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계약을 해지했다고도 했다. 예컨대 “계약해지를 할 때 600만원의 합의금을 김종승에게 지불하는 것 외에 연예활동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해야 했다. 이 약속을 하지 않으면 김종승이 위약금을 많이 요구하거나 민사소송을 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713)는 진술이 그것이다.

그 외에도 윤지오는 김종승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은 진술을 했다. 아래에서는 각 진술주제 하에 윤지오의 진술문을 그대로 옮겨둔다.

1. 김종승의 폭행

2. 김종승의 부당한 노동강요

3. 부당계약을 배경으로 한 접대 강요

4. 또 다른 노동강요

5. 직접 폭력은 없었지만 술접대를 계약에 의해 강요당했다

6. 장자연도 노동을 강요당해서 싫어하는 표정이었다.

7.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때는 보복이 두려웠다

8. 접대 자리에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억지로 나갔다

9. 전속계약서가 아니었으면 나는 또래 친구들과 놀지 접대 자리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술자리에서 노래부르고 춤추게 한 것은 김종승 대표가 잘못한 것이다.

10. 조희천이 강제로 장자연의 손목을 끌어당겨 가슴과 허벅지를 만졌다(앞부분 일부 생략)

11. 김종승은 약속한 생활비도 제대로 입금해 주지 않았다

이상은 윤지오가 김종승의 노동강요에 관해 집중적으로 질문받았던 2009년 7월 8일 진술로부터의 부분 발췌이다. 2010년 6월 25일에 윤지오는 다시 한 번 김종승에 관해 진술한다. 이때의 질문은 주로 문건에 집중되었고 김종승에 관한 진술은 오히려 부차적이었다. 이 진술에 법관이 김종승에게 유리하도록 인용할 수 있는 진술이 부분적으로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참고인 윤지오가 가해자의 편을 드는 진술을 한 것이라고 보는 것은 부당하다고 본다. 윤지오는 앞의 2009년 진술에서는 김종승이 자신과 체결한 계약의 구조적 부당성과 폭력성에 대해 진술했고 뒤의 2010년 진술에서는 그럼에도 술자리에 나가 접대하는 개개의 행동에서 직접적 압박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판결문은 후자의 발언에서 인용을 해서 작성되는데 이것은 윤지오 진술을 전체적으로 고려한 위에서 나온 인용으로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판결문에 기초하여 윤지오의 도덕성과 입장을 문제삼고 있는 박훈의 판단은 일면적이라고 생각한다.

박훈이 ‘장자연 리스트’를 없애는 놀라운 방법(3)

윤지오를 ‘장자연 리스트’를 보지 못한 사람으로 만들기

박훈이 장자연 리스트를 없애는 방법은 “장자연 리스트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박훈이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선택하는 방법은 “장자연 리스트가 있었다”고 증언하는 ‘사람’을 제거하는 것(이것을 그는 ‘가지치기’라고 부른다)이다. 2009~2010년 사이에 장자연 리스트가 있었다고 말한 사람은 최소한 두 사람이다. 한 사람은 유장호이고 또 한 사람은 윤지오이다. 이 중에서 유장호는 장자연 사건의 이해당사자로서 진실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증언할 의지가 불분명한 사람이다. 이것은 최근 진상조사단 비공식조사에서 성폭력을 당했다는 장자연의 진술을 자신이 지우라고 했다고 말했다가 보름 뒤에는 자신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말을 바꾸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므로 장자연 리스트를 증언해 줄 유일한 사람으로 윤지오가 남는다. 그러므로 박훈이, 윤지오가 장자연 리스트를 보지 못했음을 입증하기만 하면 “장자연 리스트가 없었다”는 자신의 주장은 부정될 수 없는 타당성을 갖게 될 것이다.

윤지오가 장자연 리스트를 보지 못했음을 입증하는 박훈의 일차적인 방법은 윤지오 스스로 보지 못했다고 자백하도록 압박하는 것이다. 4월 21일까지 박훈은 이 방법에 주력한다. 

그는 4월 16일에 세상에 이미 알려진 4장짜리 장자연 문건을 자신의 수타로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이것이 현존하는 “장자연 문건”의 전부임을 선언한다. 그 현존하는 문건은 유장호가 보관하고 있던 사본의 일부로서 KBS가 입수, 보도한 것이다. 

박훈은 윤지오가 문건을 보지 못했음을 입증하는 근거로 문건의 원본과 사본이 장례식장(3월 7-9일)에서 소각되었으므로 윤지오가 3월 12일에 봤다고 한 것은 거짓일 것이라고 쓴 바 있다. 그는 4월 16일에야 사실이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고 윤지오가 맞았음을 비로소 인식한다. 그래서 그는 문건의 원본과 사본이 3월 12일에 봉은사에서 소각되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윤지오가 그 문건들을 봤다는 것까지 인정하지는 않는다. “아뭏든 보지 못했을 수 있다”며 의심을 지속하는 것이다. 자신의 과오를 발견하고도 왜 저 의심을 거두지 않는 것일까?

4월 13일에 쓴 박훈의 글은 참으로 혼란스럽다. 

이 자가 왜 유일한 목격자가 된 것인가? 장자연 문건을 봤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유일하게 말을 한 사람이 윤지오다. 그러나 장자연 문건을 실제로 본 사람들은 아무도 아직까지도 입을 열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거대한 권력의 압박을 받아서? 누구 말대로 국정원 공작 때문에? 아님 고인을 위해서?)

이 글에서 박훈의 주장은 단 하나도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우선 윤지오는 ‘유일한 목격자’를 주장하지 않는다. <13번째 증언>의 표지와 목차에 ‘유일한 목격자’라는 구절이 들어가 있지만 이것은 윤지오의 인식이 아니라 출판사의 인식과 의지일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윤지오는 여러 차례 자신이 ‘유일한 목격자’가 ‘아니라’ ‘유일한 증언자’라고 말해야 했다. 장자연 문건을 본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여럿이다. 윤지오 외에 유장호, 스타일리스트 이00, 유가족, 그리고 국정원 직원으로 알려진 ‘유장호의 경호원’ 등이 있다.  둘째로 문건의 내용에 대해 아직 아무도 말하지 않고 오직 윤지오만이 말하고 있다는 주장 역시 거짓이다. 문건의 내용은 KBS 보도를 통해 이미 대중에게 공개된 터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박훈은 문건과 리스트를 구분하지 않고 혼란스럽게 이야기하는데, 리스트를 본 사람은 정황상으로는 유장호, 경호원, 윤지오, 유가족인데, 리스트의 존재에 대해 말한 사람은 유장호와 윤지오(그리고 장자연의 오빠)이고 그 내용에 대해 말을 한 사람은 윤지오가 유일하다. 박훈은 문건과 리스트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놓고 리스트에서 문건으로, 문건에서 리스트로왔다 갔다 한다. 이 혼란을 벗어나려면 문건과 리스트가 있고 문건과 리스트를 장자연으로부터 받았거나 함께 작성한 유장호가 문건만을 보여준 사람과 문건과 리스트를 다 보여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4월 18일 박훈은 여전히 문건과 리스트를 혼동하면서 이런 질문을 윤지오에게 던진다.

“님이 본 장자연 문건에 4,50명이 있었는데 그게 2009. 3. 12. 봉은사에서 유장호가 보여줬다는 것에 있었는지요? 님이 본 것이 진짜 봉은사에서 본 것이 맞는지요.”

윤지오는 이미 10년 전의 수사기관 진술에서, 박훈의 질문에 답했다. 유장호가 넘겨준 문건과 리스트를 봉은사 차 속에서, 그리고 소각 시에 봤다고. 이미 진술되어 있는 것을, 그리고 유장호와 유가족 진술의 교차검증을 통해 확인된 사실을 왜 묻는 것일까? 윤지오가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고 강변하기 위한 것이다.

4월 19일에 박훈은 드디어 “장자연이 직접 작성한 리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그 리스트가 무엇인지, 어디서 봤는지도 자신은 알고 있고 누가 작성했는지도 알고 있다고 말한다. 과연 그 리스트는 누가 작성한 리스트이며 [윤지오가] 어디서 봤다는 것일까? 같은 날 밤, 박훈은 “장자연 리스트의 진실은 이것이다”라는 제하에 장자연 리스트라고 불리는 것이 실은 장자연 계좌로 수표를 입금한 사람들의 이름을 경찰이 리스트로 작성한 것이라고 단정한다. 즉 장자연이 남긴 문건에는 리스트가 없었고 리스트라 불리는 것은 사후에 경찰이 작성한 수표송금 리스트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윤지오가 참고인 조사를 받으면서 수사 서류에 있던 “그 명단이나 수사 대상자로 올린 50여명의 리스트를” 우연히 “잠깐” 봤을 개연성은 있다.’고 쓴다.

윤지오의 말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하여 가능한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쓴 소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여기에는 4월 16일 작가 김수민이 술자리에서 새벽에 윤지오로부터 들었다며 한 이야기가 주요 구성요소로 차용되고 있는데, 그 이야기에는 윤지오가 리스트를 수사기관에서 우연히 봤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가상의 시나리오는 3월 12일 윤지오가 녹취하여 제출한 유장호와의 통화기록에 등장하는 장자연 관련 ‘목록’이라는 말, 그리고 유장호와 윤지오가 10년 전에 이미 일관되게 진술하는 편지글 형식 속에 담긴 ‘명단’에 관한 진술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이미 물질화되어 존재하는 진술문서를 외면하고서야 성립할 수 있는 상상의 시나리오라고 할 수 있다. 하루 뒤인 4월 20일에도 그는 윤지오가 리스트를 봤다면 그것은  ‘경찰이 작성한 “수사대상자 리스트”, “장자연 수표 리스트”, 아니면 “전준주 리스트”다.’라고 씀으로써 자신의 가상의 시나리오를 기정사실인 것처럼 내세울 뿐, 장자연 리스트의 부재에 대한 어떤 신뢰할 만한 분석이나 증거도 내놓지 못한다.

“헛소리 지껄이는 변호사”라는 윤지오의 반격

이 때는 이미 김수민, 김대오, 박훈의 발언들이 윤지오의 증언들을 뒤흔들기 시작한 때이다. 박훈은 다음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자신의 질문에 대한 윤지오의 최초의 응답을 올리는데 그 응답에서 윤지오는 박훈을 “헛소리 지껄이는 변호사”로 묘사하고 ‘헛소리 하려거든 본인 일기장에 하고, 자신의 인생이나 똑바로 살아라’고 말한다. 왜 윤지오의 응답이 이렇게 거칠었을까? 그것은 박훈이 증언자 윤지오를 증언과는 상관 없는 문제로 인신공격하여 그의 증언행동을 실추시키고 인격을 모독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모독들인가?

첫째로는 장자연 사건 관련 재판에서 윤지오가 가해자 김종승에게 유리한 진술(“노래나 춤을 추게 된 것도 강압적이 아니었다”)을 했다는 비난이다. 윤지오는 김종승과 관련하여 두 번 진술했다. 한 번은 ‘김종승과 체결한 계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노래나 춤을 추는 자리에 나가게 되었다’고 김종승에게 불리한 진술을 했고(2009) 또 한 번은 김종승이 자신[윤지오]에게 ‘강압적으로 춤을 추게 했는가’라는 물음에, ‘강압은 없었다’는 취지로 답했다(2010). 그런데 후자가 판결문에서 김종승에게 유리한 진술로 인용되고 박훈은 이 판결문에서 윤지오가 가해자를 편들었다는 이미지를 끌어낸 후 윤지오 공격에 사용한다. 윤지오의 대답은 일견 모순된 것처럼 보이고 후자만을 맥락에서 떼 내어 읽으면 윤지오가 가해자 편을 드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구조적 압력과 직접적 압력을 구분해서 접근하면 이 진술은 윤지오 내부에서는 일관된 것이다. 두 번의 진술을 통해 윤지오는, 김종승이 자신에게 직접적 압력을 가하지는 않았지만 계약서를 통해 구조적(계약적) 압력을 가했다고 진술한 것이다. 박훈은, 판사가 윤지오의 진술로부터 가해자에게 유리하게 인용한 판결문만을 보고 윤지오가 가해자에게 유리한 “거짓” 진술을 했다고 단정한다.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윤지오는 장자연을 위한 증언을 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을 끌어낸다.

둘째로 박훈은 윤지오가 의문의 교통사고와 증언으로 인해 ‘법 위의 사람들’로부터 가해져 올 위험을 언급할 때 그것을 “쇼”로 단정한다. 이것은 유튜버들과 댓글들을 통해 무한 재생산된 윤지오 악마화의 이미지다. 박훈이 이런 생각을 내놓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럼 그의 주장대로라면 리스트를 수 도 없이 본 유장호와 김대오 (Dae O Kim) 기자는 이미 살해됐어야 했다. (실제 이들은 윤지오가 주장하는 리스트를 본 적이 없다. 왜? 장자연씨가 만든 적이 없으니까)”

마지막 구절, “왜? 장자연씨가 만든 적이 없으니까”라는 말이 잘못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했다. 분명히 리스트의 물적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김대오는 리스트를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법 위의 사람들로터의 위협을 받을 일도 없다. 유장호는 리스트를 보았고 그 존재를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그 리스트의 공개를 처음부터 차단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한 사람이고 이 때문에 ‘자신의 경호원’이라는 신분으로 유장호를 보호/감시했던 국정원의 협력자이거나 국정원으로부터 통제를 받는 사람으로 의심받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그런 태도를 유지하는 한 그가 ‘법 위의 사람들로터의 위협을 받을 일도 없다’. 두 사람은 윤지오와 전혀 비교할 수 없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박훈은 잘못된 비교를 통해 윤지오가 실제적으로 느끼는 위험을 허구화하고 위협에 대한 발언을 쇼라고 단정한다. 그는 윤지오가 왜 ‘혼자 법 위의 30명을(원래 4,50명 이었다) 상대”하는가?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질문하지만 그에 대한 악의적인 인격적 의심(거짓말쟁이, 사기꾼) 외에 어떤 진지한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

셋째로 박훈은 윤지오에 대한 이러한 의심의 심리에서 출발하여 윤지오에 대한 경호를 혈세낭비로 규정하거나 윤지오의 후원계좌 개설을 돈벌이로 규정하는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으며 급기야는 윤지오의 증언행동을 멈춰세워햐 한다(“윤지오는 가고 장자연의 억울한 죽음만이 남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소, 고발, 그리고 변론의 자가당착

이러한 인신공격은 4월 23일 김수민을 대리하여 윤지오를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모욕’ 혐의로 고소하는 법률행동으로 나타났다. 당일 기자회견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윤지오씨는 고 장자연씨의 억울한 죽음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윤지오씨는 조모씨 성추행 건 이외 본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장자연 리스트 봤다” “목숨 걸고 증언”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 윤지오씨가 봤다는 “장자연 리스트”는 김수민씨의 폭로로, 수사과정에서 수사 서류를 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고 장자연씨는 결코 목록을 작성한 적이 없습니다.

여기서 그는 가상적인 자신의 시나리오를 근거로, 윤지오가 장자연 리스트를 봤다는 사실을 일방적으로 부정한다. 또 그는 윤지오가 거짓말로 후원을 받고 있다는 자신의 근거 없는 추정을 확립된 사실처럼 주장한다. 또 그는 “윤지오씨가 봤다는 “장자연 리스트”는 김수민씨의 폭로로, 수사과정에서 수사 서류를 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면서 자신의 상상을 마치 실제인 것처럼, “밝혀졌다”는 말로 표현한다. 또 그는 “고 장자연씨는 결코 목록을 작성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주장하면서 10년전의 진술증거가 일관되게 보여주는 사실의 신빙성을 전혀 검토하지 않은 채 자신의 임의적 주장을 확인된 결론처럼 내세운다. 한 인격에게 결정적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이러한 허구적 변론폭력이 과연 용납되어도 좋은 것인가? 

박훈은 말한다. “나아가 저를 비롯한 진실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을 “가해자 편”에 서서 자신을 공격하고 있다고 합니다.”라고. 윤지오의 인격에 대한 공격과 고소고발 행위가 윤지오 증언의 신빙성을 낮출 것이며 윤지오가 처벌을 기대하며 내놓은 ‘법 위의 사람들’에 대한 그의 진술이 힘을 잃으리라는 것을 박훈도 알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 박훈의 이러한 행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가해자들을 이롭게 하는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박훈은 자신이 조선일보를 싫어하며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 응하지 않을 것이고 자신은 사회주의자라는 진보혁명가-제스쳐로 자신이 가해자의 편이라는 일련의 비판을 차단하면서 4월 26일 윤지오를 사기혐의로 고발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과 다른 의견을 표현하고 있는 이호진, 손석희, 노영희, 정지영, 안민석 등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피력하는 것을 넘어 윤지오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 일반을 ‘윤지오한테 농락당하고 있는 것도 모르는 한심한 작자들’이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단순논리는, 박훈 자신이 ‘권력에 농락당하고 있는 한심한 작자’라는 역공에 직면할 수밖에 없으며 그 자신이 ‘장자연의 억울한 죽음을 이용하여 돈벌이를 한다’는 비난에 노출될 수 밖에 없다.

알렉산드로스인가 돈키호테인가?

증언자 윤지오를 향한 박훈의 이 돈키혼테적 돌진과 칼질이 성공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재수사의 무산이라는 비극적인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와는 달리, 그는 장자연 리스트의 매듭을 결코 끊어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박훈이 장자연 리스트를 삭제하는 방식에는 중요한 약점 즉 아킬레스건이 있기 때문이다. 박훈이, 유장호와 윤지오가 이미 10년 전에 수사기관에서 “장자연 리스트”를 보고 읽었다고 말한 사실을 끝까지 외면한 것이 그것이다. 이미 확인된 진실을 외면한 것이 그의 아킬레스건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변론을, 10년 전에 장자연 리스트는 물론이고 장자연 문건의 마지막 단 한 구절 외에는 문건의 내용도 형식도 본 적이 없다고 진술한 자신의 ‘기자친구’ 김대오(가 문건을 보았다는 가정)와 ‘작가친구’ 김수민에 기대서 끌어낸다. 그런데 김대오가 문건도 리스트도 전혀 본 적이 없으며 윤지오가 그것 모두를 보았다는 사실은 한국일보가 대중에게 공개한 ‘누가 장자연을 죽였나?’의 유장호, 윤지오 진술서 디지털 프린트물에서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이 진술서들이야말로 장자연 리스트가 있었다는 것에 대한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물질적 흔적이며 가장 중요한 흔적이다. 윤지오의 진술들은 10여년 전의 진술들이므로, 오늘날의 진술처럼 거짓말이라거나 사기라거나 하는 잡음 없이 읽을 수 있는 것들이다. 여기에 “장자연 리스트”의 흔적이 또렷이 새겨져 있다. 설령 박훈을 비롯한 사람들이 윤지오를 도덕성의 심급에서 파멸시키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윤지오의 이 증언만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장자연 리스트”를 보았다는 그의 증언의 진실가치는 불변으로 남을 것이다. 나는 박훈이 이 진술을 알면서 모른 체 하는 지, 아니면 누구나 본 그 진술을 보지 않으려는 옹고집스러운 태도로 윤지오 죽이기를 위한 변론의 칼을 벼리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장자연 리스트의 이 물적 흔적 때문에 장자연 리스트를 없었던 것으로 만들려는 박훈의 칼질은 여론의 일시적 흥분을 이용하여 잠시 성공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결코 장자연 리스트의 실재라는 그 매듭을 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매듭을 푸는 힘겨운 과제는 진상조사단과 과거사조사위원회가 진실규명의 의지를 확고히 하지 않으면 않을 수록, 더 분명하게 다중의 집단지성에, 촛불 공통장의 힘에 맡겨질 수밖에 없다.[끝]

특수강간죄 수사권고 없는 진상조사보고에 대한 윤지오의 생각에 대하여

진상조사단은 왜 재수사를 적극적으로 권고하는 것을 포기했나?

사람들의 이목이 과거사진상조사단에 집중되었던 2019년 5월 13일. 과거사진상조사단은 김종승 위증혐의 고발, 수사과정에서 조선일보의 외압 인정 외에 핵심적 쟁점인 장자연 리스트와 성서비스노동 강요 및 권력자들의 성범죄 행위에는 과거 수사가 미흡했다고 했을 뿐, 재수사 권고 없는 진상보고서를 제출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진상조사단이 이처럼 모호한 결론으로 재수사 권고를 회피하여 결국 김종승이나 조희천 같은 하위 행위자들에 대한 처벌요구에  머무르게 된 것에 대해 네 가지 사유를 들고 있다.

  1. 피해자가 사망했다
  2. 주요 인물들의 조사 비협조(소환불응)로 가해자 특정에 어려움이 있었다
  3. 핵심의혹인 술접대 성접대 강요 의혹 및 사회유력인사들의 성범죄 연루 의혹에 대해서는 윤지오의 증언 외에 수사를 시작할 정도의 확실한 증거가 확보되지 못했다
  4. 리스트와 특수강간 문제에 관한 핵심 증인인 윤지오 진술의 신빙성을 두고 논란이 있었다

이 이유들은 합당한 이유들인가?

첫째 피해자는 사망했지만 피해자가 남긴 문건이 확보되어 있으며 리스트에 대한 진술들이 있고 이에 대한 윤지오의 증언이 있다는 점에서 피해자가 생존해 있지 않다는 것이 재수사 회피의 충분한 이유로 될 수는 없다. 둘째 주요 인물들의 조사 비협조가 가해자 특정에 어려움을 주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특검과 같은 강력한 재수사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다. 셋째 술접대와 성접대 강요는 고 장자연이 문건에서 직접 친필로 호소하고 있는 범죄이며 문건에서 이미 조선일보 방씨 일가의 성범죄 의혹은 충분히 제기되었다. 물론 재수사는 공소시효를 요구한다. 

그런데 윤지오는 장자연이 술이 아니라 약물에 취해 성범죄 피해를 입었을 가능성에 대해 진상조사단과 “KBS1 오늘밤 김제동”에서 증언했으며 이외에도 진상조사단은 “장자연이 약물에 의한 성범죄 피해를 당한 것 같다는 여러 명의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3256927&code=61121111) 또 유장호도 진상조사단 비공식조사에서 “처음에 장자연 씨가 성폭행을 심하게 당했다는 이야기를 했고 그것을 문건에도 썼는데 자신이 지우라고 했”으며 “성폭행한 그 사람을 자신은 알고 있는데 이것을 밝힐 수 없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다.(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808701). 이러한 유형의 특수성범죄(특수강간, 강간치상)는 공소시효가 15년이므로 진상조사단이 의지만 있다면 과거사조사위원회에 재수사를 의뢰하기에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왜 진상조사단은 재수사를 권고하지 않는 것일까?

유장호는 위의 진술을 한 후 보름 뒤에 자신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며 말을 바꾸었고 약물에 의한 성범죄 피해 가능성을 제기한 복수의 인물들이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유일하게 알려져 있는 증언자인 윤지오는 그 “진술의 신빙성”을 두고 논란이 있기 때문에 재수사 권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귀착된다.

그러므로 진상조사단이 성서비스노동(술접대, 성접대) 강요와 권력자 성범죄에 대한 재조사 권고를 하지 않는 것의 최종적 사유는 윤지오 증언의 신빙성 문제에서 찾아진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왜 지난 수십일 동안 한겨레, JTBC 등 극소수의 언론을 제외한 대부분의 제도언론들과 가로세로연구소를 비롯한 우파 유튜브, 그리고 이에 동조하는 SNS 사용자 등 한국 사회의 특정 세력들이 광기의 윤지오 마녀사냥과 윤지오 죽이기에 총력을 기울여 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윤지오 검증론” 트리오의 표정들

특히 우리는 장자연 사건 진상 조사가 재수사로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는 데 있어서 박훈, 김대오, 김수민 트리오의 역할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윤지오 증언의 신빙성을 결정적으로 떨어뜨린 것은 뉴시스를 비롯한 제도언론이나 우파 유튜브, SNS가 아니라 바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나는 조선일보를 싫어한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거짓을 제거해야 한다”, “장자연 사건 진실규명과 윤지오 검증은 별개이다”, “촛불정권을 제대로 지켜야 한다”, 심지어 “나는 사회주의자이다” 등을 주장하면서 윤지오를 거짓과 사기를 단죄하는 단두대 쪽으로 끌고 가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장자연 사건을 역사의 무덤에 조용히 묻어두고 권력자들에게 활개칠 자유의 공간을 열어주는 데서 이들의 “공로”(?)는 반드시 평가받아야 할 것으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5월 13일 진상조사단이 과거사위원회에 조사보고를 한 바로 그날 이들의 표정이 어떤지 살펴보았다.

박훈: 침묵

김대오: “입장과 의견을 떠나 과거사진상조사댠 모든 분들 수고하셨습니다. 최선이었을 겁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김수민: 그의 반응은 좀 길면서 두서가 없다. 그래서 그 반응의 일부를 발췌하고 그 밑에 그것에 대한 나의 생각을 주석으로 기록하여 이해를 돕고자 한다.

“여러분들이 그토록 의혹을 품고 있는/ 조선××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는지/ 유일한 목격자 윤지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윤지오는 무엇을 증언하고 누구에게/ 신변 위협을 당했다는 건지”. 

::증언을 방해하는 세력들로부터 위협 당했으며 바로 증언의 신빙성을 떨어뜨린 사람들이 조사를 부실하게 만들었다.

“40-50명이 적힌 리스트를 봤다고/ 왜 거짓말을 친 건지/ 문건을 봤단 거랑 리스트를 본 거랑은/ 엄연히 다른 말입니다”. 

::맞다. 문건을 본 것과 리스트를 본 것은 다르다. 하지만 2009~2010년의 진술조서들은 김대오는 리스트를 못 보았고 윤지오와 유장호는 리스트를 보았음을 진술서라는 물적 증거로서 보여준다. 

“고인과 친분이 없는 나도 이렇게 초조하고/ 애타게 지켜보고 기다렸는데/ 모든 사람들이 오늘만을 기다렸을텐데/ 과거사위가 또 미뤘네요/ 문구를 다시 수정,보완 해서 발표 한다고 합니다”. 

::나는 과거사위원회의 이 고뇌 속에서, 장자연 사건의 조사발표가 몇몇 개인의 이해관계 문제를 넘어 정권의 존망, 체제의 존망과 연결되어 있음을 과거사조사위원회 자신이 느끼고 있으며 결과 발표가 정권이나 체제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려는 보신주의적 세심함을 본다.

“근데 윤지오 씨는 오늘 목숨을 바쳐서 진술을 했던/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잊고 산 적이 없던/ 고인의 수사 결과 발표가 있었던 날이었는데/ 별로 관심이 없으셨나 봐요.”

::고인에 대한 수사 발표가 아니라 장자연 사건에 대한 강제력 있는 재수사 여부를 가늠할 조사발표다. …

윤지오의 눈, 윤지오의 힘

김수민의 생각과는 달리 윤지오는 5월 13일 진상조사단 조사발표에 대해 “약물과 성폭행..특수강간죄를 권고하지 않다니요”라는 제목하에 다음과 같은 반응글을 올렸다.

제 외에 추가 증언으로 증인들이 마약과 성폭행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헌데 어찌 이럴 수가 있나요…/국민청원을 또 게재한들 바뀔까요?/ 특수강간죄가 권고되어야 공소시효는 이미 종료된 10년이 아닌 15년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핵심을 빼고 권고를 요청하다니요./이 모든 것이 몇몇 악의적인 사람들로 인하여 /가해자들은 웃는 세상이 되겠군요./자연언니를 위해서라더니 당신들이 저지른 만행 좀 보십시오./정말 반드시 이들만이라도 처벌하여 반드시 다 되돌려 놓아야 합니다.

김수민이 지금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자신이 행하고 있는 것의 정치적 효과가 “고인”을 위한다는 자신의 표면적 대의와 갖는 실제적 충돌과 모순을 외면하면서 윤지오 죽이기에 전력을 다하는 것과는 달리 윤지오는 이 짧은 글 속에서 전체 상황을 통찰하고 이 상황에 참여하고 있는 각종의 행위자들의 동태와 이후의 과제에 대해 예리하게 발언한다. 그 요지를 열 가지 테제로 다시 정리해 보자.

  1. 검찰과거사조사위원회의 과거사진장조사단의 조사발표는 핵심문제를 회피한 비열한 발표로 분노를 금할 수 없다.
  2. 핵심문제는 가해 권력자들의 특수강간 성범죄를 처벌하여 제2, 제3의 장자연이 발생하지 않도록 사회를 바꾸는 것이다.
  3. 처벌을 위한 재수사는 공소시효가 15년인 특수강간죄에 대한 수사권고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4. 나[윤지오]도 마약과 성폭행에 대해 증언했지만 나 이외에도 이에 대해 증언한 증인들이 있고 특수강간죄목 수사권고는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었다고 본다.
  5. 과거사조사위원회가 이미 확보된 증언들마저 외면하면서 가해자, 권력자들을 징치하는 일을 두려워한다면 또 다시 국민청원을 한들 재수사가 이루어지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6. 과거사진상조사단의 진상보고는 가해자들이 웃고 활개칠 세상을 보증해 준다.
  7. 과거사진상조사단이 특수강간죄 재수사 권고를 하지 않음으로서 장자연(들)의 고통과 눈물과 절규는 영구히 계속될 것이다.
  8. 이러한 결과는 몇몇 악의적인 사람들이 증언자 흔들기를 통해 증언 신빙성을 떨어뜨림으로써 초래되었으므로 이들에게 책임이 있다.
  9. 고인을 위한다는 이름으로 이들은 고인에게 영원한 침묵을 강요했다.
  10. 이들만이라도 처벌하여 (특수강간죄 공소시효가 남은 향후 5년 이내에) 장자연사건 재수사를 달성하기 위한 새로운 출발의 조건을 만들자.

상황과 대안에 대한 이 명확한 통찰은 메신저 윤지오를 무너뜨리기 위한 온갖 공세에도 불구하고 그가 무너지기는커녕 아직 굳건하게 진실규명의 진지를 지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진지를 혼자 지킬 수는 없다. 이 진지를 지켜내면서 그것을 어디나의 진지, 누구나의 진지로 사회화하고 지구화하는 일은 이제 누가 맡아 나갈 것인가?

박훈이 ‘장자연 리스트’를 없애는 놀라운 방법(1)

박훈과 고르디우스 매듭

서구 제국 권력의 놀라운 힘을 과시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 중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푼 방법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프리기아의 수도 고르디움에 고르디우스의 전차가 있었고 그 전차에 매우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매듭이 달려 있었다. 그 매듭은 오직 “아시아를 정복하는 사람”만이 풀 수 있는 매듭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어느날 알렉산드로스가 그 지역을 지나가다가 고르디우스의 매듭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단칼에 그 매듭을 끊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단칼에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었다고 소문이 난 사람이 한국에 한 사람 있다. 변호사 박훈이 그 사람이다. 그가 드디어 10년동안 풀리지 않고 있던 ‘장자연 리스트’의 매듭을 풀었다고 한다. 그는 장자연 리스트의 “실재”를 증언했던 윤지오를 거짓말쟁이, 사기꾼으로 만들어 그를 해외로 “추방”하는 방식으로 이 난제를 단칼에 해결했다고 하는데, 그가 사용한 주장은 놀랍게도 ‘장자연 리스트는 애초에 없었다’는 아주 단순한 주장이다. 이로써 애초에 리스트는 없었으므로 이제 리스트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모조리 거짓말쟁이가 되며 사기꾼이 될 위험에 놓이게 된다. 이로써 그는 리스트에 거명되어 왔던 언론계, 정치권, 법조계의 모든 사람들을 ‘악몽’에서 해방시키고, 리스트에 대한 부실수사로써 권력자들에게 부역했다는 비난을 들어온 검경의 ‘누명’을 벗겨주고 이 사건의 최상위 개입자로 지목되어온 이명박 청와대와 국정원에 자유를 주어 장자연의 죽음 자체를 초기 경찰수사(3월 9일)의 결론처럼 단순 변사에 가까운 것으로 축소시킴으로써 장자연의 죽음이 가져왔던 지난 10년의 미망에서 전 국민과 세계시민이 깨어나도록 촉구하는 저 단칼의 알렉산드로스가 된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것일까? 그간 10년 동안 우리는 미망에 사로잡혀 권력자들을 의심하고 그 의심의 눈 때문에 장자연 리스트가 있었을지 모른다는 환상에 사로잡혔던 것일까? 

윤지오가 본 권력, 법, 그리고 국가

장자연 문건과 리스트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매듭임이 분명하다. 그 문건과 리스트는 힘없는 계약직 연예노동자인 장자연이 노예계약을 통해 한국의 기업가, 정치가, 법조인 등의 권력자들로부터 당한 참을 수 없는 강제노동과 학대의 고통을 적은 눈물의 기록이다. 그것이 유장호의 기획사와 김종승의 기획사 간의 갈등 속에서 만들어진 문건과 리스트라고 해도 이 점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문건과 리스트 중 언제부터인가 문건만 남고 리스트가 사라졌다. 아니 문건도 리스트도 소각되었으나 문건만이 기적처럼 부활했다고 하는 편이 오히려 정확할지 모르겠다. 

지난 10년간 엄청난 수사력이 동원되어 뭔가를 조사하는 듯이 부산스레 움직였지만 두 기획사 대표에 대한 가벼운 처벌이 있었을 뿐 피의자였던 권력자들은 전부 증거불충분 등으로 무혐의 처리되었다. 긴 수사과정과 재판과정은 결과적으로 사건을 ‘흐지부지’하게 만들면서 결국 이들 권력자들에게 법적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고비용의 절차, 고난도의 테크놀로지에 다름 아니었다. 윤지오는 이 과정에서 ‘법 위의 사람들’의 실재를 확인한다. 그는, 대한민국에 법이 있고 법을 다루는 공무원들이 있지만 법, 경찰, 검찰, 판사 등은 권력자들을 위해 있는 것이지 장자연과 같은 계약직 노동자들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며 법적 처벌은 권력자들에 대해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을 비롯한 힘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가해지는 무전유죄의 형틀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느꼈다. 

장자연 사건을 다루는 증언과 조사의 과정에서도 계급차별은 분명하게 나타났다. 방상훈 같은 자본가는 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수사관이 조선일보로 찾아가 경우 35분 동안 황제처럼 모시면서 조사를 하고 윤지오처럼 계약직 노동자였다가 그 계약이 노예제 계약임을 깨닫고 가까스로  탈출하여 비정규직 노동자가 된 사람에게는 피의자가 아니라 참고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사관이 한 밤부터 새벽까지 똑 같은 질문을 돌아가며 반복적으로 던짐으로써 증언을 견디기 어려운 노동으로 만들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윤지오의 이 증언노동은 열 번 이상 반복되었다. 이것은 국가가 윤지오에게 진실을 외면하는 것은 쉽지만 진실을 말하는 것은 고통스럽다는 것을 실제 경험을 통해 실감나게 가르쳐 주는 과정이었고 그에게 진실을 지키며 살기보다 진실을 외면하면서 살라는 명령을 내리는 과정이었다. 진실을 말하는 자에게는 소진(燒盡)과 정신질환이 있을 뿐이다! 사법에서의 증언의 시간은 국가가 다중을 학대하는 또 다른 강제노동의 시간이었다. 장자연의 죽음과 더불어 윤지오가 경험한 대한민국은 이런 나라였다.

촛불의 힘

‘이게 나라냐!’라는 집단성찰, 집단절규의 힘으로 박근혜를 파면한 촛불혁명이 없었다면 그간의 증언 과정에서 충분히 실망하고 소진된 윤지오가 다시 증언대에 설 힘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가 다시 장자연 사건 인터뷰에 응한 것은 조희천 강제추행 공소시효 만료가 얼마 남지 않았던 2018년 여름이었다.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PD수첩의 <고 장자연> 인터뷰에 응했던 윤지오는 이후의 소감을 이렇게 말한다.

“진실도 때로는 사람을 다치게 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머지 않아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상처라고 나는 믿는다. 오히려 침묵하는 진실은 독이 되는 법. 나는 인터뷰에 응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9년이 지나 새롭게 밝혀진 내용들이 사건의 실체를 규명하는 데 새로운 에너지가 그리고 기폭제가 되기를 빌었다.”(<13번째 증언>, 228)

이 인용구의 첫 문장은 아마도 그간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진실을 말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었던 힘듦, 실망, 소진의 경험을 표현한 것일 것이다. 그런데 그가 검찰의 소환을 받아들여 진상조사단의 증언에 임한 이후 진실이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다는 이 명제는 지금까지 겪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게 폭발한 백래쉬로 현실화되었다. 그 기폭의 도화선이 앞서 언급했던 한국의 알렉산드로스 박훈이고 그가 내친 칼이 ‘애초에 장자연 리스트는 없었다’는 마법의 칼이다.

박훈의 가짜 칼

이제 그의 칼이 어떻게 주조된 칼인지, 즉  ‘장자연 리스트는 없었다’는 명제가 어떻게 구성된 명제인지를 살펴보자. 다행히 그는 자신의 칼/명제가 만들어져 온 과정과 제조법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자세히 공개하고 있다.

그가 처음 윤지오에 대해 부정적 관점을 갖기 시작한 것은 2019년 3월 28일로 나타난다. 

“고김광석 부인 서해순을 남편 살해범으로 몬 이상호가 윤지오 배우를 통해 장자연 사건을 폭로한다면서 이미숙을 공격하던데 또 다른 참사를 저는 목도하는 바입니다. 서로들 맘대로 씨부린 뒤에 무슨 재가 남는지 알아 봅시다. 난 이상호가 하는 일은 나의 일이라 봅니다. 어이 자네 좀 있다 보세.”(3월 28일)

이것은 뉴시스의 반윤지오 비난보다도 열흘은 앞서 나타나고 있는, 그리고 그 뉴시스 흐름과는 다른 흐름의 반윤지오 기류이다. 이것은 이상호의 서해순 공격이 잘못된 것인데 이상호의 이미숙 공격 역시 잘못된 것이고 윤지오가 후자의 잘못된 공격의 도구(무기)로 이용되고 있다는 시각이다. 이 첫 포스팅에서 윤지오는 박훈의 반이상호 전선에서 부차적 위치에 놓여 있는 인물이다. 그로부터 12일이 지난 4월 9일에 박훈은 윤지오에 관한 세 개의 글을 페이스북에 순차적으로 올린다. 4월 7일 윤지오가 민주당 안민석, 정의당 추혜선 등의 초청으로 국회에서 북콘서트를 가진 직후다.

“아놔 진짜! 이상호가 선동한 남편 살해범 서해순을 처단하기 위해 이른바 “김광석 법” 발의에 나타난 안민석, 추혜선이 또 등장했다. 쫌 알고나 했으면 한다마는. 윤지오 배우가 장자연 사건의 진실 독점자인가? 진짜로? 그이가 하는 말은 다 진실인가? 이렇게 막 가겠다는 것인가?”(4월 9일)

전선이 확대된다. 이상호에 안민석, 추혜선이 더해진다. 윤지오는 이제 이상호의 도구이기를 넘어 민주당 안민석, 정의당 추혜선으로 이어진 범진보의 도구로 인식된다. 주요 공격 방향(주공방)은 이상호-안민석-추혜선으로 이어지는 여권 범진보다. 하지만 주요 타격은 그것이 휘두르는 도구인 윤지오를 향한다(주타방). 중요한 것은 위의 짧은 포스팅에서 윤지오에 대한 이후의 타격 방향의 윤곽이 암시된다는 것이다.  이상호에 대해서와는 달리 윤지오에 대한 박훈의 입장설정 방식은 적이 아니라 경쟁자이다. ‘진실 독점자’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독점 비판은 나눠가짐(分有)을 지향한다.  자유경쟁 상태가 독점 비판의 지향점이다. 윤지오가 진실 독점자일 수 없다는 말은 나도 장자연 사건에 대한 진실을 나눠 갖고 싶다는 것을 시사한다. 어떻게 하면 그것이 가능한가? 그것은 윤지오의 말에 거짓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을 들춰내어 진실권을 분유받으려는 전술이다. 방법론은 사회를 향해 “그이[윤지오]가 하는 말은 다 진실인가?”라고 묻는 것인데 이것이 일주일 뒤 4월 16일 김수민의 입을 통해 “윤지오의 말은 100% 진실일까요?”라는 장문 폭로글로 나타났음은 주지의 것이다. 박훈 식의 전쟁적 시각을 이 현상에 적용해 보면 김수민은 박훈의 반-범진보 전쟁의 도구다.

이 날 4월 9일, 주공방과 주타방을 정한 후에 주공방에 한 통, 주타방에 한 통 도합 2통의 편지를 보낸다. 하나는 주공방 타겟인 이상호에게 보내는 편지다.

[이상호에게] 

자네 그만 두게나/ 안타까워 하는 말이라네 / 자비는 없을 것이네/ 그러나 /윤지오 배우는 놔 주게나 / 부탁이네.(4월 9일)

이것은 장자연 사건으로 이미숙, 국정원을 공격하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경고이면서 윤지오를 거기에 이용하지 말라는 ‘부탁’이다. 이것은 이미숙이라는 사적 연예인이, 그리고 국정원이라는 공적 기관이 장자연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이상호와 세간의 의심과 주장이 허망한 것이라는 강한 비판을 표현한다. 여기까지 윤지오는 어떠한 자율성도 없는 도구 혹은 꼭두각시로 간주된다. 박훈에게서 윤지오 자율성에 대한 부정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된다. 나는 이것이 박훈의 노동운동, 정당운동 체험(과 그 실패)이 남긴 부정적인 유산이며 200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등장한 새로운 주체성에 대한 맹목, 그리고 공론장과 구분되는 공통장에 대한 감수성의 미형성이 가져온 박훈 세계관의 사각(死角)지대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서 박훈이 주타방 대상인 윤지오에게 당일 남긴 편지를 읽어보자.

[윤지오 배우에게 간단한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님이 봤다는 이른바 “장자연 문건”은 두 가지 버전이 있습니다. 장자연씨가 유장호와 같이 쓴 것이 14장 짜리 초안하고, 8장짜리 최종본이 있습니다. (8장 짜리 최종본은 내 친구인 김대오 기자가 봅니다. 그리고 이상호와 님이 그걸 까더군요) 

그것 님 말대로 전혀 유서 아닙니다. 제가 알기로는 고 장자연씨가 유장호에게 넘겨준 저 “문건”들은 장례식장에서 다 태워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모두 사망 전 일주일 상간으로 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님이 도대체 본 것이 무엇인지요? 

혹여 낸시랭 남편이었던 전준주 (왕진진) 사기꾼이 감옥에서 조작한 내용과 혼동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요? 간단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저는 이 사건에 뛰어 들기로 작정했습니다. 실체적 진실을 위해서 말입니다. (4월 9일) 

실체적 진실! 윤지오와 진실을 나눠가지려고 한다는 반독점 투쟁으로 출발한 지 아주 짧은 시간 뒤에 박훈은 “실체적 진실을 위해서”를 기치로 내세우는 데 이것은 윤지오의 진실이 비실체적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포석에 다름 아니다. 박훈의 목적은 바뀌었다. 그것은 윤지오와 진실을 놓고 경쟁하려 하는 데서 더 나아가 윤지오의 진실을 비실체적인 것으로 규정하여 해체하고 파괴함으로써 자신을 진실독점자의 위치에 놓는 것으로 이동한다. 그것은 윤지오를 경쟁자가 아니라 적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이 목적 달성을 위해 어떤 수단을 사용하는가?

하나는 “장자연 문건”에 대한 임의의, 즉 근거없는 규정을 사용해 자신의 프레임 속으로 상대방을 끌고 들어오는 것이다.  “장자연 문건에 두 가지 버전이 있다. 초안 14장, 최종본 8장이 그것이다.”는 말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주장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KBS보도자료(4장)만이 눈으로 확인된 문건의 일부이며 나머지는 진술로만 확인되는데 유장호와 윤지오는 4장의 문건, 리스트가 포함된 3장의 편지글이라고 진술한다. (페이스북 포스팅의 순서로 보면) 박훈은 “장자연 문건”에 대한 검토를 이 글 이후에 본격적으로 착수(뛰어듦)하는 것이 분명해 보이므로 “이 사건에 뛰어들기로 한” 순간의 박훈이 얻은 “문건” 관련 정보는 그의 “친구” 김대오로부터 얻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런 추론일 것이다.

그런데 김대오는 어떤 인물인가? 노컷뉴스 기자였을 당시인 2009년 3월 10일 장자연 문건을 보도할 때 그는 문건이 “12장”이었다고 썼다.(“이 문건의 양은 당초 알려진 A4지 4장에서 훨씬 늘어난 총 12장 분량으로 모두 친필로 썼다.” 노컷뉴스 2009. 3.10) 이 12장 짜리 문건은 위의 초안과 완성본 중 어느 버전에 속하는가? 아니면 또 다른 버전인가? 진술서의 김대오는 노컷뉴스 기자인 김대오와는 또 전혀 딴판인 진술을 한다. 유장호는 김대오에게 장자연의 마지막 문구(“나는 힘없는…벗어나고 싶습니다”)를 사진 찍게 한 것 외에 내용이나 형식 등 일체를 김대오에게 보여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김대오 역시 증인선서 한 후의 진술에서 자신은 위의 글 귀에 “장자연 문건”의 내용이나 형식에 대해 본 바가 전혀 없다고 진술했다. 그러므로 12장 짜리라고 말할 수 있는 ‘언술 권리’가 그에게는 없다. 그리고 2019년 4월말부터 공개적으로 그는 “장자연 문건”을 보았다고 주장하면서 그 분량의 장수를 말할 수는 없고 4장+알파다라는 식의 모호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2019년 4월 24일 YTN 이동형과의 인터뷰에서 “실제적으로 저는 이 장 수 부분이 굉장히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이 있거든요. 그래서 그 부분만큼은 앞으로도 이러한 문제들이 계속적으로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몇 장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말씀드리기가 뭐하고”라며 장 수에 대해 언급하기를 회피한 후, “저는 이제 진실을 밝히기보다는 장자연과 관련한 가짜 부분들을 밝히는 데 문건을 본 사람으로서, 만진 사람으로서 그것이 소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에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인물이다. 진실을 규명하기보다 감별사 역할을 하겠다는 주장이다. 모두가 패를 깠는데 자기 패는 보여주지 않겠다고 하는 이 궤변, 나는 문건의 장 수에 대한 모든 주장들의 초월자이다는 궤변을 “나는 모른다” 이상으로 해석하는 것이 상식일까? 김대오가 본 문건에 대한 진술은 “본 적이 없다, 12장이다, 4장+알파다, 말할 수 없다” 등인데, 누구보다 증거를 분명히 해야 할 박훈 변호사가 여기에 더하여 “초안은 14장, 최종본은 8장”이라는 주장을 (김대오를 기초로) 내놓는다. 김대오의 이 어떤 일관성도 없는 주장들을 “내 친구”의 말이라는 이유로 믿는 것이 박훈의 변호법인가? 

다음으로 박훈은 장자연 문건과 관련된 일련의 전후 사정을, 그것도 핵심적인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윤지오를 다그친다. “제가 알기로는 고 장자연씨가 유장호에게 넘겨준 저 “문건”들은 장례식장에서 다 태워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모두 사망 전 일주일 상간으로 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님이 도대체 본 것이 무엇인지요?”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장자연 장례식은 2009년 3월 7일부터 3월 9일까지 치러진다. 지금 그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않으며 모든 증거와 진술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것은 3월 12일 봉은사에서 문건이 소각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12일에 벌어진 “장자연 문건의 소각이라는 사건”이 7일에서 9일 사이에 열려 있었던 장례식장에서 벌어진다는 것인가? 이런 기적은 모세라고 해도 이루어낼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윤지오는 너무나 분명하게 말한다. 2009년 3월 12일 봉은사에 도착하여 차 안에서 유장호가 건네주는 사본을 읽었고 땅 밑에서 ‘유장호의 경호원’이 파온 원본을 가족들과 함께 보았노라고. 그리고 유장호와 유가족들도 모두 윤지오가 그 문건을 보았고 또 소각에 함께 했음을 진술했다. 이것이 “실체적” 진실이다.

세번째의 질문은 참으로 유치하고 상투적인 수법이다. 그것은 이미 사기범으로 확인된 전주주(왕진진)과 윤지오를 연결시키는 이미지를 통해 윤지오를 사기꾼으로 몰아가는 술책이다. 그것은 조심스럽지만 간교한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나타난다. “혹여 낸시랭 남편이었던 전준주 (왕진진) 사기꾼이 감옥에서 조작한 내용과 혼동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요?” 이 수법은 약 1주일 뒤 김수민의 저 유명한 폭로글에서 ‘윤지오가 훔쳐본 리스트’라는 테마로 다시 재활용될 것이다.

박훈은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이 사건에 뛰어든다고 했지만 그 용감한 돌진은 불행하게도 짙은 안개보다도 더 모호한 김대오의 오락가락에, 그리고 장자연 리스트와 관련된 가장 핵심적인 사실(그리고 조금이라도 이 사건에 진지한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한 완벽한 무지와 오판 위에서 출발하고 있다.  돈키호테가 애마 로시난테를 타고 풍차를 향해 돌진한 이유는 그가 풍차를 괴물로 보았기 때문이다. 박훈이 김대오를 타고 풍차를 향해 달려들 때 그는 윤지오를 무엇으로 보고있었던 것일까? 이제는 다 알고 있듯이, “사기꾼”으로….. 박훈의 저 “실체적 진실”을 향한 돌진에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