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19일 촛불집회의 분화, 그 양상과 의미에 대한 관찰메모

  • 2019년 10월 19일 촛불집회는 서초동과 여의도로 분산 개최되었다.
  • ‘분열’이 아니라 ‘분화’라고 표현하는 것은 집회의 이슈와 강조점이 다변화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 촛불은 반드시 단일해야 할 이유가 없다. 다양화하고 분산되는 것은 반드시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서로를 인정하기만 한다면, 그리고 서로 연결되고자 한다면 분산은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 물론 현재는 서로를 인정하기보다 경쟁하고 때로는 적대하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그러한 태도가 전체 촛불을 약화시키는 요소로 작용한다.
  • 9차까지의 서초동 촛불집회의 주최측을 자임했던 개국본이 10월 12일을 갑작스런 마지막 집회로 선언한 것이 이 경쟁적 분화의 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집회의 종료를 선언할 명분이 뚜렷하지 않았고 참가자들의 암묵적 동의를 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일방적 종료 선언이었고 이것이 촛불을 지속하자 하는 사람들을 별도의 경향적 세력으로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즉 서초동인가 여의도인가의 분화가 있기 전에 종료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계속하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의 분화가 있었다.
  • 북유게 사람들이 촛불을 지속하기로 결정한 것은 조국이 사퇴한 날과 겹치는 월요일(10월 14일)이었다. 개국본이 여의도 촛불을 결정한 것은 수요일(10월 16일)이었다. 종료나 계속이냐의 분화가 여의도인가 서초동인가의 분화로 나타났다.   
  • 섭정의 관점에서 두 개의 촛불 중에서 하나를 취사선택할 이유는 없다. 촛불다중에게는 두 주최측, 두 집회의 에너지가 사회개혁의 집합적 에너지로 공동으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두 집회의 공통점은 검찰을 개혁하자는 것이었다.
  • 서초동 집회는 “검찰이 범인이다”라는 슬로건을 통해 현존하는 검찰권력의 불법성을 크게 강조했다. 여기에 윤석열 수사, 구속 등 검찰총장에 대한 강한 사법적 압박 요구가 더해졌다.
  • 여의도 집회는 “공수처 설치”와 “응답하라, 국회” 등의 입법적 개혁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서초동과 여의도의 뚜렷한 차이는 여의도에서 윤석열에 대한 비판적 구호를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 서초동 집회는 이전 9차 집회까지와 마찬가지로 ‘조국 수호’를 외치면서 조국을 이슈화했다. 여의도 집회는 ‘조국 수호’라기보다 ‘조국 계승’(수고했습니다) 쪽으로 초점을 옮기는 분위기였다. 서초동이 조국을 현재화한다면 여의도가 조국을 과거화한다는 느낌이었다.
  • 서초동 집회보다 여의도 집회에 더 많은 사람(감으로는 약 1.5배~2배)이 모인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언론이 여의도 집회를 거의 전면적으로 부각시킨 것을 고려하면 서초동에 모인 사람들의 수는 상당히 많았다고 할 수 있다.
  • 성별 측면에서 서초동 집회는 여성이 주축이었다. 8대 2 정도로 여성이 더 많은 느낌이었다. 반면 여의도 집회는 5:5로 동등하거나 6:4 정도로 남성이 더 많은 집회였다.
  • 세대 측면에서 서초동 집회는 2~30대가 주축이고 여의도는 그보다는 연령이 더 놓은 세대가 주축이었다.
  • 서초동 집회는 참가자들의 자유발언 중심이었던 것에 반해 여의도 집회는 공연과 유명인사들의 연설 중심이었다. 
  • 서초동 집회에 비해 여의도 집회가 미디어 동원이 많았다. 여의도 집회는 스크린이 과잉동원되었다는 느낌이었다. 9월 28일의 과소동원과 대조되는 풍경. 전체적으로 너무 큰 마이크 소리로 집중이 어려웠다. 국회의사당역 출구의 포스트잇 시위는 흥미로운 것이었다. 서초동의 경우는 미디어 동원이 적었지만 전체적으로 균형잡히고 안정된 느낌이었다. 주요 슬로건을 담은 큰 깃발들 대오가 외곽을 오가며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 전체적으로 여의도 집회의 방식이 전통적 조직운동의 집회방식이라면 서초동 집회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네트워킹 방식을 오프라인 집회에 전용하는 것이었다.
  • 수백개의 시민사회단체들의 연대체가 구심점을 이루면서 촛불다중의 자발적 참여가 이루어졌던 2008년이나 2016년 촛불집회와는 달리 2019년의 촛불집회는 개국본이나 북유게 등 개별 단체나 커뮤니티가 주최측이 되어 집회를 개시하고 다중들이 그것에 참여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즉 주최측의 정치적 색깔이 집회 전체의 색깔을 좌우할 수 있고, 주최측 간의 의견차이나 갈등이 촛불 다중들의 갈등으로 비화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 공통의 목적을 위해 의견의 차이를 어떻게 생산적 토론의 공간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주최측이 뚜렷한 데서 오는 이 위험성을 어떻게 제어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가 극복해야 할 문제로 나타난다. 

검찰개혁의 발본화를 위한 조건: 2019년 9월 28일 서초동 촛불집회에 대한 단상

검찰권력은 행정권력 중에서 군사권력에 상응하는 강력한 권력이다. 군사권력은 전쟁을 통해 타인을 살상할 수 있는 권력임에 반해 검찰권력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통해 타인을 처벌할 수 있는 권력이다. 군사권력은 원칙적으로는 타국의 국민들을 겨냥하지만(전두환 시기의 군부에서 보듯이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을 경우가 많다), 검찰권력은 자국의 국민들을 겨냥한다.

군사권력과 검찰권력의 수뇌는 선출된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고 대통령의 명령을 받는다. 하지만 그 수뇌들은 위로부터 대통령의 통제보다도, 오랜 시간 속에서 재생산되는 군부 및 검찰 관료집단들의 통제를 더 많이 받는다. 해당 관료조직의 이해관계가 국민의 이익을 위배하면서 관철될 수 있는 여지는 여기서 발생한다. 검찰이 형벌권을 관료조직과 관료계급의 이익을 위해 사용할 때 국가체제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조국은 공수처 설치와 수사권 조정 주장을 통해 검찰개혁을 추진해 온 인물이다. 이 두 방안을 통해 검찰이 실제적으로 현재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소박한 생각일 것이다. 관료는 이미 하나의 계급을 구성할 만큼 완강한 세력이다. 조국의 개혁 방안은 관료체제와 관료계급을 온존시키면서 관료제도를 개혁할 수 있다는 발상에 근거한다. 검찰과 경찰 사이의 수사권 조정은 관료계급 자체를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관료계급 내부 역관계를 조정하는 것이다. 검찰만이 아니라 경찰도 관료조직이며 관료계급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관료계급의 문제를 방기하는 한, 공수처도 그러한 관료계급의 일부로 편입되어 들어갈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므로 경검 사이의 수사권을 조정하고 고위직을 대상으로 하는 수사행위를 하는 새로운 관료기구를 설치하는 것은 관료계급 내에서의 일정한 세력균형을 가져올 수는 있겠지만 국민에 대한 관료계급의 지배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이러한 방안에 머문다면 그러한 검찰개혁의 방향은 계급으로서의 관료를 오히려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관료조직의 역관계 재배치를 통해 실질적 변화가 도입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질적 변화는 다중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율적으로 움직이고 다중을 대상으로 통치행위를 수행하는 관료계급을, 자기조직화된 다중의 아래로부터의 통제에 맡겨 관료들이 독자적 계급으로서 재구성될 수 없도록, 국가기관이 다중의 절대민주적 권력의 명령을 이행하는 수단으로 기능하도록 만듦으로써만 가능하다. 즉 관료권력의 재분배와 재조직을 넘어 권력체제 그 자체의 아래로부터의 재구성과 권력기구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통제가 필요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개인으로서의 조국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중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그 조직력을 기초로 대의기구에 대한 섭정 능력을 갖추어 가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관료계급을 약화시키고 궁긍적으로 해체하는 방향에서 검찰 관료조직을 개혁하는 장기혁명의 방향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검찰의 수사권을 경찰이 아니라 국민에게로 넘겨주어야 한다. 자기조직화된 국민들이 원칙적으로 수사권을 갖고 필요한 수사행위를 자율적 시민수사기구, 각 분야의 전문 수사기구, 경찰 등에 필요에 따라 위임, 배당한다는 구상 위에서 검찰개혁을 사고할 필요가 있다. 세월호 참사의 수사를 둘러싼 논란과정에서 수사권을 갖는 시민주도의 특별조사위원회가 제안된 바가 있는데 이것은 검찰 개혁을 사고함에 있어서 중요한 사례로 참고될 수 있을 것이다.   

조국이 법무부 장관의 자격이 없다는 담론이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검찰이 조국 일가에 대한 수사에 착수하여 표창장, 사모펀드, 웅동학원 등을 수사선상에 올리고 범죄혐의를 운위하면서다. 이 담론은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을 통해 지배적 담론으로 정착되어 갔다. 그러한 ‘부적격’ 담론은 조국이 말과는 달리 실제에서는 정의롭지 못하며 사회 하층의 청년들과는 다른 세상(계급)에 살고 있으므로 법무부 장관의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전개되었다. 사적 생활과 공적 발언 사이에 격차가 크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한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가(메시지)보다 그가 어떤 사람인가(메신저)에 주의를 돌리는 주장이다.

보수언론, 보수정당, 경검 등 제도적 보수세력 속에서 이러한 담론이 생성되고 유통되는 것은 지금까지의 역사를 보건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개혁에 거의 무조건적으로 저항함으로써만 자신의 이익을 지켜나갈 수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개혁과 혁명을 지향하는 좌파이다. 개혁과 혁명적 사회변혁을 추구해온 좌파 세력의 상당 부분이 조국 사태에서는 무관심을 표명하거나 이러한 우파의 주장에 동조한 것은 보수우파가 그렇게 반응한 것만큼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어떤 동기에서건 좌파가 무관심하거나 반조국 전선에 가담함으로써  반조국전선은 의도되지 않은 좌우합작 전선으로 강화되어 왔다.

혁명적 사회변혁은 필요하다. 그리고 조국의 개혁노선은 어중간하여 실질적 변화의 필요성과 실질적 변화의 방안을 은폐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위험 때문에 좌파가 검찰개혁 문제가 사회적 쟁점으로 되는 상황에서 우파 주도의 반조국전선에 가담하여 공조하고 있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조국이 법무부장관 자격이 없으므로 대통령이 조국을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하지 말아야 한다던 주장은 이제 조국 장관이 사퇴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대통령이 조국을 해임해야 한다는 주장으로까지 나타난다. 임명 전과 비교해 이제 조국이 ‘범죄자’라는 미확인의 주장까지 더해졌다.

조국이 만약 범죄자임이 확인된다면 그가 장관직을 수행해서는 안 될 것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아직 그러한 사실이 확인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보수정당들과 보수언론들의 일방적 주장만으로 사퇴나 해임 심지어 구속을 주장하는 것은 불확실한 여론으로 여론재판을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또 이런 식의 재판에서는 언론, 방송 등을 장악하고 있는 우파 언론 집단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은 지극히 위험한 사태라고 할 수 있다.

좌파적 입장을 내세우면서 조국이 법무부 장관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법무부 장관’이라는 부르주아 사회기관과 직책에 대한 환상을 퍼뜨리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법과 법무행위가 좌파적 시각에서 그토록 ‘정의’로운 것이었는가? 부르주아 사회의 법과 법무행위는 원리상 부르주아적 정의와 부르주아 체제를 재생산하는 기관일 뿐 프롤레타리아 다중의 정의와 다중의 해방을 실현하는 기관이 아니다. 역대 법무부 장관의 면면은 이 사실을 너무도 여실히 보여준다. 왜 지금까지 어느 법무부 장관에게도 적용하지 않던 ‘프롤레타리아적 정의’라는 기준을 조국에게만 적용하는가?

조국이 계급적으로 비정규직 청년들과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논점도 같은 이유에서 문제적이다. 지금까지 어떤 법무부 장관이 비정규직 청년들의 삶을 진정으로 고민하고 이들의 아픔을 함께 앓으며 이들의 삶의 개선을 위해 노력해 왔는가? 나는 이런 기준을 충족시킬 법무부 장관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기대를 기준으로 조국의 자격 문제를 논하는 것은 관념적이다.

법무부 장관이라는 직책은 관료지배계급의 고위직으로서 혁명의 대상이지 혁명의 주체가 아니다. 나는 반조국전선에 서 있는 좌파 부분이 혁명의 대상과 주체를 혼동하는 심각한 범주 착오에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법무부장관 임명, 직위의 문제는 지배계급 내부의 개혁 문제로 제기되고 있지 계급간 문제 즉 혁명의 문제로서 제기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개혁의 문제는 혁명의 문제로 전이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실천적으로는 우파 주도의 반개혁노선과 공조하게 되는 도덕주의적 행위양식을 통해서 달성될 수는 없다. 

비정규직 청년들의 삶을 개선할 힘은 그 청년들의 자기조직화와 직접행동에서 나오는 것이지 법무부 장관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물론 자신들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더 대의할 수 있는 법무부 장관이 임명되도록 만드는 것도 청년들의 자기조직화와 직접행동의 한 표현일 수 있다. 그러나 반조국 흐름은 지금 명확하게 개혁에 반대하는 지배계급 내 우파 주도로 개시되고 또 전개되고 있다. 그러므로 더 나은 삶을 향한 행동은 이러한 우파 흐름에 맞서 조국과의 연합을 통해 조국을 더 급진적인 개혁방향으로 나서도록 촉구하는 것, 즉 혁명의 대상인 법무부장관을 혁명의 동반자로 전용하는 섭정의 정치행동을 통해 가능한 것이지 반개혁 우파 흐름에 실천적으로 연합하게 되는 반조국좌우연합전선의 구축을 통해 가능한 것이 아니다.

2019년 9월 28일 토요일 서초동 대검찰정 앞에서 열린 검찰개혁 촛불집회는 이런 점에서 교훈적이다. 150만명의 사람들이 운집한 이 집회에서 촛불시민들은 정치검찰 퇴진, 자유한국당 해체, 조중동 폐간, 검찰 개혁, 공수처설치, 조국 수호를 외쳤다. 이곳에 운집한 사람들이 박근혜를 파면시킨 2016-7년의 촛불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구호, 깃발, 리듬, 호흡 등을 통해 느끼고 알 수 있다. 당시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좌파 일부의 촛불로부터의 철수였다. 이 철수는 촛불시민을 ‘우중’으로 보는 관점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좌파 대오를 서초동 촛불에서 찾기는 어려웠다. 반면 반촛불 우파는 비록 왜소한 형태였지만 대검찰청 앞에서 촛불시민과 대치하며 성조기와 태극기를 흔들었고 문재인 탄핵, 조국 구속을 외쳤다.

촛불시민은 박근혜를 탄핵했던 아래로부터의 섭정정치를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촛불시민을 ‘우중’으로 보는 것은 다중의 섭정감각을 간과하는 엘리뜨주의 지식인의 편협한 관점일 수 있다. 좌파는 조국 수호에 알레르기적 거부감을 보인다. ‘조국 수호’ 슬로건이 ‘메신저 조국’을 수호한다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조국 수호’는 인격으로서의, 계급으로서의 조국을 수호한다는 것이 아니라 조국의 ‘메시지’, 즉 검찰개혁이라는 메시지를 개혁에 반대하는 우파의 기도로부터 수호하자는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문재인 정부가 적폐청산을 제도적 청산으로 만들지 못하고 사법적 인적 청산으로 만듦으로써 적폐권력인 검찰의 힘이 더욱 강화되는 역설이 전개되어 왔다. 조국 사태는 적폐를 통해 적폐를 청산해온 이 역설의 효과가 드러나는 현장의 하나이다. 조국은 스스로 ‘가진 자’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비록 약하고 불충분하나마 대한민국의 적폐권력인 검찰의 개혁을 일관되게 추구해온 드문 지식인 중의 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가진 자’로서의 행보와 ‘사회개혁’의 행보 사이에 드러난 간극과 모순을 단순히 ‘위선’으로 평가해 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것을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계급적 존재기반을 넘어서려는 지적 노력으로 볼 수는 없을까? 조국 스스로가 인정하듯이 그것이 비록 불철저하고 불충분한 노력이었지만 말이다. 

그 노력이 실제로 성과를 얻고 더 발본적으로 되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 가는 것은 그 자신의 몫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다중 전체의 몫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정작 중요한 위험은 흔히 주장되듯이 그가 검찰개혁을 주장했으면서 사생활에서 그에 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도덕적 모순에 있는 것이 아니라(존재와 의식 사이의 이 괴리와 모순은 조국만의 특수한 문제라기보다 진보와 좌파를 자처하는 상당히 많은 지식인이 겪고 있고 또 공유하고 있는 일반적 문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오히려 그의 검찰개혁 구상이 불철저하다는 것, 그래서 그의 개혁행보가 관료계급과 자본의 공동이익을 위해 언제라도 반개혁적 관료세력과 타협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가, 사모펀드를 통해 치부를 추구하고 대입제도를 이용해 자녀의 영달을 추구한 한 가족의 구성원이고 가장이라는 점을 들어 지명철회를 요구하고 해임을 요구하며 사퇴를 촉구하는 것은 아래로부터의 촛불다중의 절대민주주의적 섭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너무 근시안적인 것이다. 치부와 영달의 추구는 부르주아 사회가 모든 개인에게 강제하는 생활 논리, 즉 생리의 문제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면 ‘가진 자’의 집단은 치부와 영달추구를 위한 매우 많고 다양한 수단들을 갖고 있는 반면 ‘못 가진 자’의 집단은 그 수단이 지극히 협소하거나 전무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리를 벗어나는 길로서 유력한 것은 타인노동의 착취에 기초한 사회를 공동생산 및 공동증여의 사회로 바꾸는 것이다. 이것은 특정의 개인을 도덕적으로 지탄하는 방식으로는 달성할 수 없고 사회를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주체인 다중 자신의 자기조직화와 자기가치화를 통해서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 사회의 구조 그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금 필요한 것은 다중이 연합하여 조국으로 하여금 자신이 말한 검찰개혁을 법무부 장관의 권한을 사용하여 더 발본적으로 실행하도록 촉구하고 압박하는 것이지 그의 해임, 사퇴, 구속 등의 요구로 그의 검찰개혁 노선을 좌절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반응양식은 실천적으로 검찰개혁을 급진화하고 발본화해야 할 시기에 검찰개혁에 반대함으로써 문재인 정부 이후 더욱 비대해진 검찰 적폐권력의 독주를 허용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것이 좌파라면 조국에 대한 도덕적 계급적 비판을 하는 것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그 비판의 논리를 기초로 촛불시민들과 함께 검찰개혁을 요구하고 그 검찰개혁이 더욱더 근본적인 개혁이 될 수 있도록, 즉 사회혁명의 문을 여는 개혁으로 될 수 있도록 법무부장관인 조국과 관련 기관에게 촉구하고 압박하는 개혁적 섭정행동에 나서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검찰개혁의 발본화로 나아갈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아래로부터의 길, 좌파적 길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