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와 기업에 대한 다중의 섭정을 위한 상상

공무원을 국민이 섭정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공무원이 국민에 의해 고용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섭정이 정치적 과제로서 나타나는 것은 대의제가 과도한 나머지 공무원이 자립성을 갖게 되고 심지어 공무원이 주인인 공무원을 지배하는 상황으로 치닫기 때문이다. 이것은 직접 민주제의 간접 민주제로의 대체라는 극단적 결과를 가져왔다. 공직의 사유화와 권력화는 그것의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아래로부터 국민-다중의 섭정은 공직을 부름에 대한 응답, 즉 소명(Beruf)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것이며 사유화된 공직을 다중을 공통화시키는 봉사활동으로 개조하기 위한 것이다. 예컨대 검찰이 권력기관이 아니라 국민-다중의 권력에 봉사하는 서비스기관으로 기능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국민배심제 하의 AI검찰’이라는 형상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기업의 경우에는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있어 자본가의 권력이 인정되는 것이 통례다. 이 영역에서는 노동자가 자본가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으로 위치지워지며 대다수 국민들은 기업 영역에서 주권을 잃고 노예로 전화한다. 이러한 상황은 정치 영역에서 국민-노동자의 주권됨과 모순된다. 또 기업체제가 지배적으로 되면 국민-노동자는 정치영역에서 자신의 주권성을 망각하게 되며 자신의 기관인 국가와 자신을 고용한 기업의 배신적 유착도 심화되게 된다. 대의제가 기업제와 동화되면서 정치적 대의자들이 기업주처럼 군림하고 국민이 노예처럼 되는 역전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로써 국민주권은 실질적으로 해체된다. 정치영역에서 국민-다중의 주권회복이 기업영역에서 노동자의 주권쟁취와 결합되지 않으면 안 될 이유는 여기에 있다. 기업영역에서도 노동자-다중이 주인으로 될 때에만 다중에 의한, 다중을 위한, 다중의 정치/경제가 실질적으로 가능해질 것이다. 이것은 ‘다중통제 하의 AI기업’의 형상으로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기업영역의 공통화의 가능성은 무엇보다도 노동으로부터 노동자의 해방에서 주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해방이 현재는 노동에서 해방된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기계화, 정보화, 자동화로 인한 실업과 비정규직화의 경향이 그것인데, 노동(여기서는 ‘고용노동’을 지칭한다)과 소득을 강제로, 그리고 인위적으로 결합시켜온 자본주의의 오랜 경향과 장치들이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무소득, 저소득과 묶어 놓기 때문이다. 그 결과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의 경향은 직접적으로 삶의 고통으로 나타난다. 고용노동=강제노동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수행하는 삶정치적 활동은 노동으로 평가되지 않고 무상수취되는 경향이 있다. 기본소득 및 무조건적 보장소득에 대한 토론은 이러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일반화되는 상황이 삶의 고통으로 나타나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모색되고 있다. 이 방안의 핵심은 ‘고용되어 노동하는가 그렇지 않는가’를 소득 문제와 분리시키는 것이다. 삶의 생산과 재생산을 위한 활동은 기업적 고용세계 바깥에서도 전개되고 있고 기업들은 이 활동들을 외부효과로서 전유하고 착취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 없이 소득 없다’(예컨대 무노동무임금)는 관념만큼 현실과 동떨어진 것은 없다.

노동자가 강제노동에서 해방되어 욕망으로서의 삶정치적 활동에 자유롭게 종사하면서도 그것이 삶의 고통으로 나타나지 않는 체제의 구축이 필요하다. 욕망으로서의 삶정치적 활동에 행복한 느낌으로 충실할 수 있을 때 국민과 노동자 사이의 현재의 배리현상(주인이 노예되는 현상)은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삶정치적 활동에 종사하는 (비)노동자들은 기업을 자신을 위해 복무하는 기관으로 섭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럴 때 기업은 고용된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기관이 아니라 (비)노동자-다중의 부름을 받아 공동체의 살림살이를 지탱하는 소명기관(Beruf-organ)으로 전화될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이 착취기관에서 소명기관으로 전화하는 것과 국가가 권력기관에서 소명기관으로 전화하는것은 하나의 과정의 두 측면이다. 하나의 과정이란 다중의 자기조직화와 섭정능력이 향상되고 확장되어 가는 과정을 말한다. 다중의 공통화 없이 국가와 기업의 공통화 없다. 국가와 기업에 대한 섭정 능력을 위한 사유실험과 행동실험이 끊임없이 시도되면서 그 성과들의 공통화-연결망(commoning-network)이 섬세하게 구축되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것은 촛불을 통해 이제 막 첫 걸음을 내딛었을 뿐이다. 이 첫 걸음에 어떤 잠재력이 있는지는 아직 누구도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장자연 사건에서 국가의 얼굴, 몸짓, 행동에 대하여(1)

장자연이 억울할 뿐만 아니라 의문에 가득찬 죽음을 당했는데도 10년 동안 대한민국의 수사기관은 그 죽음의 비밀을 밝히기는커녕 증거인멸에 조력했으며 행정, 입법, 사법을 보충하는 권력의 제4부라고 불리는 언론기관은 이 죽음과 관련해 유일하게 유의미한 증언을 해 오던 윤지오를 사기꾼으로 몰아 그 증언의 능력을 박탈해 버림으로써 비밀의 규명 그 자체를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최후의 증거인멸 시도를 벌이고 있는 이 기이한 사건에서 ‘대한민국’이라 불리는 국가는 무엇을 했는가? 이것이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이다. 이 질문을 통해 나는 국가가 국민들이 기대하는 바의 ‘진정한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 아니면 가해자와 피해자, 수탈자와 피수탈자, 착취자와 피착취자로 나눠진 적대적 사회를 은폐하는 ‘가면 공동체’의 역할을 하는 데 머물고 있는지 살펴 보고 싶다. 

Scene #1 계약과 해약

장자연과 윤지오가 소속사 더콘텐츠에서의 활동을 고통으로 느끼기 시작한 이후에도 선뜻 소속사를 떠나지 못한 것이 김종승과 체결한 계약 때문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1억의 위약금에다가 추가적인 제재 및 손해보상의 조항 그리고 사장중심의 계약해석권 등을 담고 있는 이 계약서는 이들을 연예활동을 빙자한 이른바 “술접대” 노동에 단단히 결박시켜 놓는 노예계약과 다를 바 없었다. 계약서가 갖는 그 단단한 결박의 효과가 계약서 자체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약이 갖는 힘은 국가가 그 계약을 자신의 합법적 폭력을 통해 보증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계약관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계약관계 속에서 공포의 권력이었던 사장의 주먹이나 발길질이 더 이상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장의 고소고발에 반응하여 배달될 경찰의 출두요구서와 수사, 검찰의 수사와 기소, 법원의 재판과 벌금, 그리고 감금장치인 감옥과 그에 부속된 간수, 징벌방 등의 폭력장치들이다. 시장에서의 사적 계약은 이 일련의 국가 폭력 기구들이 그 이행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면 사람들을 그 계약관계 속에 단단히 결박시킬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연과 윤지오가 계약관계 속에서 부당함과 고통을 느끼면서도 소속사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궁극적 힘은 김종승의 불법적인 주먹폭력보다는 그 배후에서 기능하고 있는 국가의 합법적인 제도폭력에 있었다고 하는 편이 합리적일 것이다. 적어도 장자연・윤지오가 김종승과 체결한 계약에서 최소한 그 계약이 사장에게 유리한 바로 그 만큼은 국가가 사장을 편들고 사장의 권력을 보증하는 배후의 불평등 폭력으로 기능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약서에는 계약으로부터의 다른 출구, 즉 쌍방합의를 통한 ‘중도해약’의 출구가 규정되어 있었다.(‘6조 가’ 항) 이것은 1억의 위약금을 물지 않고도 계약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위약’보다는 쉬운 경로이지만 사장의 동의를 끌어내야 하는 어려운 조건이 붙어 있는 경로였다. 윤지오의 경우는 이 쌍방합의를 통한 탈출에 성공한 운좋은 경우에 속한다. 계약금 300만원에 지출경비 보상금 300만원을 합친 총 600만원의 합의금, 그리고 다른 소속사에서 연예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약속 및 반성문. 장자연도 이 쌍방합의를 통한 탈출을 시도하지만 2009년 3월 7일 사망하기 전까지 그것에 성공하지 못하고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는다. 마약과 강제추행 혐의로 일본에 도피 중이었던 김종승 측이 합의금을 계속 상향 제안한 것이 그 이유 중의 하나였지만 장자연이 윤지오보다 훨씬 더 깊이 더콘텐츠와 연관되어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그 밖의 이유들도 있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그 이유들을 그 이후 사태들을 통해 오직 간접적으로만 알 수 있다. 장자연은 합의를 통한 윤지오식 탈출에 성공하지 못하자 (호야의 대표 유장호와 함께) 김종승의 근로기준법 위반을 이유로 김종승과의 계약관계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시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근로기준법 19조 1항은 “제17조에 따라 명시된 근로조건이 사실과 다를 경우에 근로자는 근로조건 위반을 이유로 손해의 배상을 청구할 수 있으며 즉시 근로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강조는 인용자)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장자연이 문건과 리스트에서 적시한 사항들은 하나 같이 김종승의 근로기준법 위반과 관련된 내용들이다. 김종승이 폭행, 협박, 강요를 했다는 내용을 담은 문건이나 김종승으로 인해 “성상납을 강요당한”(즉 성폭행을 당한) 사람들의 명단을 적은 것으로 보이는 리스트는 폭행과 협박에 의해 계약과는 다른 노동을 강요당한 사실에 대한 육필 기록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문건과 리스트는 김종승과의 계약관계에서 탈출하기 위해 법정에 제출될 증언조서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증언조서는 작성되자마자 장자연이 기대한 것과는 다른 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호야 소속 연예인인 이0숙은 이 증언조서를 자신과 김종승과의 계약관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푸는 데 이용했고 이 과정에서 이 증언조서는 장자연의 기대범위를 훨씬 넘어서까지 유통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던가는 장자연이 문건을 작성한 것으로부터는 이틀 뒤이고 편지글형식의 리스트를 유장호에게 전달한 바로 다음날인 3월 2일 경 ‘동료로 추측되는 인물’과의 육성대화 녹음 파일(이 파일은 SBS를 통해 2019년 4월 27일 처음 공개되었다)을 통해 드러난다. 이 대화에서 장자연은, 잘못한 것도 없고 회사에서 하라는 거 그대로 충실히 하고 있는 자신에게 김종승이 “엄청난 말들과 엄청난 입을 가지고” “내가 무슨 늙은이랑 만났다는 둥 별의별 이야기를 다 하면서 장난을 쳤”고 “그쪽에서 연락이 와서 나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을 하고 있음을 토로한다.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을 하고 있는 “그쪽”이 누구일까? 우리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장자연은 알고 있었던 “그쪽”. 장자연은 우리에게 “그 사람은 발이 넓고 힘 센 사람이야. 김 사장도 소리 못 지르고 ‘아, 예’ 그런 사람이란 말이야”라는 암시적 증언만을 남겨 두었다. “그쪽”은 “힘 센 사람” 즉 권력자라는 뜻이다. 장자연은 자신과 “그쪽”의 관계를 이렇게 권력관계 맥락에서 파악하면서 “아무 것도 없는” 자신과 대비시킨다. 나는 “누구도 백도 없고 지금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다. “힘센 사람” 대(對)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자신”과의 이 절대적 권력 비대칭을 “바위” 대(對) “계란”의 적대적 비대칭 관계(“나는 아무 힘도 없고 바위에 계란치기 밖에 되지 않아.”)로 파악하면서 장자연은 이 사이에서 발생한 문제를 풀 힘이 자신에게는 없고 그것의 압박을 약으로도 해결할 수 없으니 “죽이려면 죽이라고 해. 나는 미련도 없어”라는 체념의 자세로 받아들인다. 장자연은 신고라거나 고발과 같은 흔하디 흔한 법률적 호소의 방법으로 국가에 의지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장자연은 마치 “그쪽”이 국가 자체이거나 국가와 한 패임을 보았기라도 한 듯이, 자신의 생명을 조용히 국가 ‘공동체’의 바깥에 내려 놓는다. “저는 힘 없는 신인배우입니다.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습니다”라며 해약을 시도했던 몸부림이 이렇게 불과 이틀만에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으로 되돌아온 지 닷새 뒤 장자연은 실제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그 주검 곁에 유서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