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의 조사편의주의와 윤석열 총장의 과잉대응에 대해

1. 윤석열 검찰총장이 한겨레 하어영 기자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것은 과잉대응이라고 생각한다. 하기자의 기사는 윤총장이 윤중천으로부터 ‘접대’를 받았는가 아닌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왜 진술이 있는데 검찰의 조사나 수사가 없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이 ‘왜 조사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답해야 할 순간에 검찰총장이 나서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며 논점을 벗어난 대응을 하는 것이 첫 번째 과잉이고 그것이 언론의 질문에 말로 답하는 것이 아니라 사법으로 공격하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두 번째 과잉이다. 이것은 언론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협박으로 느껴진다.

2. 윤석열 총장이 매우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공직자인 때에 그 공직자의 접대 혐의에 대한 윤중천의 과거사진상조사단 진술이 있었고 이에 대해 추가 조사/수사가 없었다는 것이 하기자의 보도내용이다. 검찰이 누구를 조사하고 누구를 조사하지 않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주권자 국민의 주권행사의 필요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검찰의 필요와 편의에 따라 결정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보도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기소편의주의와 결합되어 있는 수사편의주의의 악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이 지게 된다.

3. 장자연 사건 재조사 과정에서 윤지오는 과거사진상조사단에서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와 이름이 같은 국회의원의 이름을 장자연 리스트에서 보았다고 진술했다. 그 이름이 홍준표임은 홍준표 자신에 의해 명백하게 밝혀졌다. 홍준표가 조사가 필요하다며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온 과거사진상조사단의 검사를 혼내 주었다고 유튜브를 통해 자랑했기 때문이다. 또 그는 윤지오가 자신의 이름을 과거사진상조사단에서 진술했다며 윤지오를 명예훼손으로 고발했다. 윤석열이 조사를 받지 않은 것이나 홍준표가 조사를 받지 않은 것이나 결과는 동일하다. 문제는 왜 제기된 의혹들에 대해 검찰이 어떤 것은 조사하고 어떤 것은 조사하지 않는가, 하는 것 즉 조사, 수사, 그리고 기소의 임의성이다. 

4. 윤석열 총장은 혐의가 있으면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수사하는 것으로 좋은 평판을 얻은 검사다. 조국 일가에 대한 이른바 ‘먼지털이식’ 수사도 바로 그런 논리와 이미지에 의해 정당화되고 있다. 그런 그가, 자신의 혐의에 대한 검찰의 조사 회피문제를 제기한 하어영 기자를 고소한 것은 자신을 예외의 자리에 놓음으로써 기존의 이미지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어영 기자를 고소하기 전에, 자신에 대해서도 한 치의 남김도 없이 먼지 털듯이 조사하고 수사하라고 말하는 것이 일관된 태도였을 것이다.

5. 조선일보나 김어준은 윤석열이 ‘접대를 받은 적이 없다’는 식의 동문서답을 하고 있고 조국 장관은 그 진술이 ‘사실이 아니라고 판단했다’고 말한다. 검찰이 윤석열을 ‘조사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는 하어영 기자의 주장에 기초한다면, 조선일보나 김어준은 윤석열이 접대를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무엇을 근거로 단정하는가? 또 조국 장관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판단을 무엇을 근거로 내렸는가? 공식적인 조사가 없었는데 그에 상응하는 조사자료가 있었다는 말인가? 이런 발언의 당사자들은 윤중천 진술과 관련하여 윤석열 총장에 대해 갖고 있는 조사자료를 국민 앞에 내놓아야 할 것이며 만약 있다면 그 조사자료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장자연 사건에서 국가의 얼굴, 표정, 행동에 대하여(3)

Scene #3 장자연 문건을 허위문건으로, 고인을 사기꾼으로 만들기

조선일보가 이종걸 의원 등을 상대로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과 관련하여 2011년 10월 10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증인신문이 열렸다. 여기에 증인으로 출석한 사람은 장자연 사건 수사를 담당했던 이모 수사관이었다. 이날 이모 수사관은 피고측 변호인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엉겁결에 장자연 사건 재수사에 대해 경찰이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깊은 무의식의 일단을 드러내고 만다.

“문: 경찰이 장자연의 문건에 기재된 내용 중 확인한 사실은 어떤 것인가요?

답: 수사한 결과 문건에 나온 것은 전부 사실이 아니었고, 아들이 룸싸롱에서 장자연을 만났다는 것은 사실이었습니다.”(이하 모든 문답 인용은 한국일보의 <장자연 사건 진술전문공개: 누가 그녀를 죽였는가>에서 가져온다.) http://interactive.hankookilbo.com/v/dfc34fa8eb2d4eeda905360705cd90bf/index.html#&gid=1&pid=1

놀랍게도 대한민국 경찰의 이모 수사관은 장자연이 남긴 문건의 내용 전부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말한다. 이 답을 듣고 변호인은 문건의 한 항 한 항에 대해 경찰이 사실로서 확인했는지를 묻기 시작한다.

“문: 장자연의 문건 중 “제가 KBS 드라마 꽃보다 남자를 촬영할 때는 진행비를 저에게 부담시켰고 이것도 모자라 매니저 월급 및 스타일리스트 비용 실비 모든 걸 제가 부담하게 강요하여 제 자비로 충당하였습니다”라고 기재된 부분도 사실로 확인되었나요?

답: 수사발표 당시에는 발표를 했었는데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문건의 첫 항에 대한 사실 여부부터 이 수사관의 기억에는 없는 것이다.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어떻게 “전부 사실이 아니었다”고 그토록 강하게 단정할 수 있었던 것일까? 변호인은 이어 문건의 두 번째 항이 사실로서 확인되었는지 묻는다.

“문: 또 문건 중 “어떤 감독님이 태국에 골프 치러 오는데 드라마 스케줄 빼고 태국으로 와서 술 및 골프 접대를 요구하였습니다. 그 요구를 제가 응하지 않자 차량도 네 돈으로 렌트해서 타고 다니시라고 매니저에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라는 부분도 사실로 확인되었나요?

답: 예”

다시 놀랍게도 이모 수사관의 답은 ‘예’이다. 수사를 통해 확인한 결과 “문건에 나온 것은 전부 사실이 아니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첫 번째 항의 사실 여부는 기억에 나지 않고 두 번째 항이 사실로 확인되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전부 사실이 아니었다”는 말이 확실한 거짓말이었음을 보여주지 않는가? 그런데 이런 정도로는 이모 수사관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던 때문인지 변호인은 더 묻는다. 

“문: 문건 중 “저는 김00 사장님 회사에 계약되어 일하고 펜트하우스 코끼리 출연하고도 1,500만원 중 300만원만 받았고 끊임없는 사장님의 지인과의 술접대 강요를 받았으며 그렇게 지내면서 저는 그로 인해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라는 이 부분도 사실로 확인되었는가요.

답: 그런 강요 때문에 정신과 치료를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신과 치료를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대체 사실이 아닌 것이 무엇일까? 변호인은 문건 중의 다른 항목을 질문한다. ‘문건 중 “김00 사장님이 ..저를 방안에 가둬놓고 손과 페트병으로 저를 수없이 때리면서 … 온갖 욕설로 구타를 당했습니다”라는 부분도 사실로 확인되었나요?’ 이모 수사관은 답한다. ‘예, 기소하였습니다.’ 변호인은 또 묻는다. ‘문건 중 “김00 사장님의 강요로 얼마나 술접대를 하였는지 셀 수가 없습니다.” 부분도 김00이 장자연을 수십 회에 걸쳐 술자리에 불러낸 사실을 확인하였나요[?]’ 대한민국 경기지방경찰청의 이모 수사관이 답한다. “예, 경찰에서는 사실로 확인하였습니다.” 

변호인이 이런 방식으로 문건의 세부항목에 대한 사실확인 여부를 하나하나 점검해 들어가 보니, 문건에서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된 것이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모 수사관이 명백하게 위증을 한 것이 아닐까? 이모 수사관은 이 증인신문에 앞서 판사 앞에서 위증의 벌에 대한 경고를 받았고 선서와 서약을 한 바 있다. 그런데 변호인의 질문을 통해 거짓임이 드러나는 이모 수사관의 ‘장자연의 문건은 전부 사실이 아니었다’는 이 거짓 주장, 거짓 의식이 그의 개인적 생각이었을까? 

그는 이 신문과정에서 문건에 대한 이 문답의 시간에 이르기 전에 당시 수사팀이 어떻게 꾸려졌는가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했다. 장자연 사망 직후 분당경찰서가 이 변사사건을 수사하면서 자살동기를 파악하기 위해 유족을 중심으로 수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3월 13일 KBS에서 장자연 문건이 보도되었고 이후 경기지방경찰청에 광역수사대를 편성하여 분당경찰서와 합동 수사를  시작했다. 42명의 거대 수사팀이 꾸려졌고 분당경찰서장을 본부장으로 매일 수사회의를 했으며 50명 이상의 기자에게 매일 브리핑을 했다. 증인신문에 소환된 이모 수사관은 2009년 3월초부터 2009년 7월 9일까지 장자연 수사팀에서 근무했으며 2009년 4월 24일 중간수사발표 직후 가진 기자와의 문답에서 답을 했던 인물이다. 즉 그의 의식은 그 개인의 특별한 생각이라기보다 당시 수사팀의 일반적 생각을 대표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는 증인신문 서두에서 미리 정해진 특별한 수사방향은 없었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으므로 “경찰 수사의 명예를 걸고 떳떳하게 수사하자” “다른 건과 마찬가지로 공평하게 수사하자”고 수사팀원들이 서로 다짐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문건내용의 사실여부 확인 과정에서 그는 판사, 검사, 변호인, 방청객 앞에서 여지 없이 거짓말로 드러날 불공평하고 불명예스런 증언을 무릅쓰게 되었을까? 그가 문건에 대해 이렇게 거짓증언을 한 동기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가 ““문건에 나온 것은 전부 사실이 아니었다”는 주장을 통해, 사실이 아닌 것처럼 만들고자 한 것, 즉 숨기고자 한 사실이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한다. 이 문제와 관련해 변호인과 이모 수사관이 나눈 다음 문답은 시사적이다.

“문: 문건 내용중 2008.10.28 방상훈의 아들 방정오가 강남 라000 유흥주점에서 장자연 김00 등과 술자리를 한 사실은 확인되었나요.

답: 예.

문: 장자연의 문건 중 “2008.9 경 조선일보 방사장의 룸싸롱 접대에 저를 불러서 잠자리 요구를 하게 만들었습니다.”라는 부분만 확인할 수 없었는가요.

답: 예, 그 부분은 확인이 안 되었습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확인이 되었습니다”라는 답이 나온다. 거듭말하거니와 이 말도 문건 내용이 사실이 아닌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경기지방경찰청과 분당경찰서 합동수사팀이 “확인이 안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수동태로 쓰여진 이 “확인이 안 되었습니다”가 ‘정말 확인하기에 어려움이 있어서 확인을 못한 것’인지 ‘덮어두고 확인하고 싶지 않아서 갖가지 이유로 확인하지 않은 것’인지가 확인되어야 한다. 실제로 45쪽 이후 변호인들과 증인 이모 수사관 사이의 문답은 이 문제에 집중된다. 

변호사는 이모 증인의 답을 들은 후 “장자연의 문건에 기재된 내용 중에서 그 시기와 사람이 특정되어 가장 구체적인 진술 부분이라고 보이는 조선일보 방사장의 부분만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는데, 어떠한가요”? 라고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에 대한 이모 수사관의 답은 어딘가 논점을 벗어난 횡설수설로 보이는데, 살펴보면 엄밀해야 할 수사 결론을 답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 생각과 일반적 추론으로 장자연이 남긴 문건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좀 길지만 그대로 옮겨보자.  

“‘아들이 룸싸롱에서 술접대를 시켰습니다’라는 부분도 과장된 문구로 쓴 소송용 문구입니다. 소속사에서 골프 접대를 오라고 하였으나 오지 않아서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하였고 차도 빼앗기고 다 빼앗겨서 옮겨야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장자연이 금전적으로 어려울 때였습니다. 소속사를 옮기고 계약금을 받을 목적으로 유00와 연결이 되어서 소속사를 옮길 목적으로 소송용으로 쓴 것으로 판단됩니다. 나머지 사실인 폭행 등은 있는 사실을 썼다고 보고, 술자리에 다녀간 것도 증인은 여러 군데를 다녀갔다고 봅니다. 과연 조선일보 사장이 룸싸롱 성접대를 했느냐, 그 아들인 스포츠 조선 사장이 룸싸롱에서 술접대를 요구했느냐는 수사가 제일 어려운 수사였고, 룸싸롱에서 만난 것은 맞지만 과정이 장자연만 불러서 장자연만 접대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방정오라는 아들과 한00 등이 술을 마시고 있는 자리에 한00과 김00이 연락이 되어서 갑자기 장자연을 데리가 가서 인사만 시겨준 자리입니다. 그래서 룸싸롱에 저를 불러서 술접대를 했다는 부분은 과장된 것이고 유서라면 사실대로 다 쓰고 자살했을지 모르지만 소송용 문서이기 때문에 협박용으로 과장되지 않았나라는 것이 경찰의 수사입니다.”

뒤죽박죽으로 표출된 그의 생각의 골자를 정리해 보자. (1)장자연은 당시 김종승 사장의 명령을 거부하여 모든 것을 빼앗겨서 돈이 없었다 (2)소속사를 옮겨 계약금을 받을 목적으로 유장호와 함께 소송용 문서를 작성했다. (3) 유서라면 사실대로 다 쓰고 자살했을지 모르지만 소송용 문서이기 때문에 협박용으로 과장을 했을 것이다 (4)그러므로 ‘룸싸롱에 저를 불러서 술접대를 하게 했다’는 문구는 과장이다 (5)그 자리는 김종성이 방정오에게 장자연을 인사만 시킨 자리였다.

이런 추론과 가해(혐의)자에 대한 변론(!)을 통해서 이모 수사관은 장자연 문건을 협박용 허위 문건으로 만든다. 당시 대한민국 “경찰의 수사”를 대표하여 말하고 있는 이 이모 수사관의 추론에 따르면, 장자연은 유장호의 도움으로 과장과 허위의 소송용 문서를 작성해 김종승을 협박하여 계약을 해지하고 새 소속사로 옮겨 계약금을 받아내려한 인물, 즉 ‘사기꾼’에 다름 아니게 된다. 망자를 모욕하는 것으로 이 이상의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러므로 이 생각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위의 이모 수사관 주장 중에서 ‘장자연이 남긴 글은 유서가 아니라 문건이다’라는 주장은 우리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한다. 국민들 상당 부분은 그 글이 유서라고 알고 지난 10년을 보내왔다. 하지만 이모 수사관의 이 진술은 경찰이 처음부터 장자연이 남긴 글이 유서가 아니라 소송용 문서, 즉 증언조서였음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이 유서가 아니었다는 것은 수사기관만 알고 있고 국민은 몰라야 하는 내부비밀이었던 셈이다. 

그것을 비밀로 했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만약 장자연이 남긴 문건이 유서가 아니라면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었다는 것만으로 자살로 단정하기에는 불충분하기 때문에 사인에 대한 분석부터 재수사가 시작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문건 공개로 재수사가 착수된 이상 왜, 언제, 어떻게, 어디서 등 죽음과 관련된 모든 것이 처음부터 수사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모 수사관이 진술에서 몇 번씩이나 “자살”이라는 말을 하는 것처럼 이러한 원점 재수사는 경찰에 의해 전혀 의도되고 있지 않았다. 첫 수사에서 발표된 바의 그 “자살”이라는 설명은 명확한 근거가 없음에도 경찰 재수사의 확고한 전제이고 출발점이었다.

또 하나의 전제이자 출발점은, 유장호, 유가족(오빠), 윤지오가 서로 유사하게 진술한 바 있고 언론과 국민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던 “이른바 ‘장자연 리스트’는 수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초기 수사 당시 수사관들이 이 리스트의 내용에 대해서 구체적인 질문을 하지 않았던 것을 통해 입증된다. 이모 수사관이 말하는 초기 장자연 재수사에서 경찰의 관심은 KBS에서 넘겨 받은 그 4장짜리 ‘문건’이 “(1)고인이 쓴 것인가? (2)그것이 사실인가? (3)그것의 성격이 무엇인가(즉 유서인가 아닌가)? (4) 문서와 그것의 유통이 자살에 영향을 주었는가?”라는 네 가지에 한정되고 또 집중되어 있었을 뿐이다. 이모 수사관은 “증인이 본 2개의 문건 외에 장자연이 작성했다고 제출된 다른 문건이 있었나요.”라는 (피고인의) 질문에 “경찰에 제출된 문건은 없었습니다”라는 말로 간단하게 답할 뿐이다. 그런데 당시 피의자나 참고인들은 4장짜리 문건 외에 3장짜리 편지글 형식에 명단(리스트)이 있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사관들은 그러한 진술을 흘려듣고 그것의 내용을 더 구체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 

이 리스트에 관한 질문이 조사기관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되기까지에는, 이명박 정부를 지나 대통령 박근혜가 파면되고 국민의 손으로 세운 촛불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그리고 과거사조사위원회가 장자연 사건 재수사에 착수할 때까지의 10년여의 시간이 필요했다. 2018년에 구성된 과거사진상조사단은 그 리스트에 누구의 이름이 쓰여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처음으로 던진 국가 조사기관이었다. 진상조사단으로부터 이 질문을 처음으로 받고서야 윤지오가 비로소 “방씨 성을 가진 세 사람”, “이름이 특이한 정치인” 등 그 리스트에서 본 권력자들의 실명을 진술했다. 하지만 이 기관은 공소시효는 대부분 끝났다는 관점을 갖고 사건 재조사를 과거사정리라는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었으며 강제수사권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그 결과 윤지오의 진술은 거명된 그 가해권력자들에 대한 실질적 수사로 이어지기는커녕 오히려 그 진술 자체가 신변위협을 빙자해 돈을 벌기 위한 거짓 진술이라는 가해 권력측으로부터의 역공격에 직면하게 되었다. 윤지오가 장자연이 겪은 “성상납 강요”(즉 성폭행)를 기록한 것이라고 말한 그 ‘리스트’는 봉은사에서 물질적으로 소각되고 경찰에 의해 배제되어 수면에서 사라졌음에도 10년의 세월을 이기고 윤지오의 기억과 진술로 되살아 왔지만 ‘사기를 위한 허위진술’로 매도되어 다시 파묻히는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사라짐을 강요받아온 이 리스트의 이 운명에 두 번의 인간학적 사건이 수반되었는데 그 중의 한 번은 장자연의 죽음이고 또 한 번은 윤지오의 매장이다.

이 두 가지의 부당전제를 갖고 출발한 합동수사팀과 이모 수사관의 위 다섯 가지 주장은 “장자연에게 당시에 돈이 없었다”를 모든 추론의 기초로 삼는데 이것이 타당한 주장일까? 이모 수사관은 이날의 진술(25쪽)에서 피고측 변호인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문: 장자연의 은행계좌 입출금 내역도 조사하였는가요.

답: 예

문: 특이사항이 있던가요.

답: 100만원 이상의 수표가 들어온 것이 많이 있어서 수사를 하였습니다.

문: 그 100만원 권 수표가 대략 어느 정도나 되었나요.

답: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문: 억 단위인가요?

답: 전부 합치면 억이 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그 수표가 기획사 사장 김00이니 김00의 회사로부터 받은 것인가요?

답: 아닌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진술은 장자연에게 소속사로부터의 수입 외에 다른 수입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중 국민에게 알려진 것은 진로소주 회장 박0덕이 김밥값으로 주었다는 1000만원일 뿐 나머지 입금자와 입금사항에 대해서는 수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개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규모가 “억이 넘는 것”이었다고 하므로 누가 봐도, 특히 가난한 연예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상당한 금액이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연이 문건을 쓴 동기를 돈을 벌기 위한 것에서 찾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물론 그러한 돈이 입금된 기록이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사망 당시 장자연에게 돈의 여유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자료가 되지는 않는다. 돈을 다 써버렸을 수 있고 또 사용해서는 안 될 돈으로 간주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 또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정에 제출할 ‘소송용 문서’에 장자연이 “2008.9 경 조선일보 방사장의 룸싸롱 접대에 저를 불러서 잠자리 요구를 하게 만들었습니다.”라고 허위사실을 적어 “300만원” 정도(장자연과 윤지오의 계약서는 동일했다고 하며 계약 당시 윤지오가 받은 계약금이 300만원이었으므로 이를 기준으로 추정한다) 의 계약금을 벌려고 했다는 주장은 터무니가 없어도 지나치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장자연이 조선일보 방사장을 바보로 알만큼 충분히 바보였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조선일보 방사장”이 누구이든 그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것의 몇 배로 그 “허위사실”을 기록한 사람은 치명적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몇 백만원의 돈에 자신의 목숨을 건다는 말인가?

“유서라면 사실대로 다 쓰고 자살했을지 모르지만 소송용 문서이기 때문에 협박용으로 과장을 했을 것이다”라는 생각도 상식에 비추어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 유서라면 사실대로일 것이라는 생각도 문제적이지만, 소송용 문서가 과장을 포함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장자연과 조선일보의 역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억측이다. 소송이야말로 사실인가 허위인가를 다투는 긴 과정을 포함하는데 “나약하고 힘없는 신인배우”가 어떻게 “정권을 창출하기도 하고 퇴출시키기도 하는” “힘 센” 조선일보와의  소송에서 ‘허위사실’을 가지고 승소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이모 수사관은 “문건에 나온 것은 전부 사실이 아니었”다고 말하고도 그 문건에 기록된 나머지 피해사실들 중 단 하나도 허위임을 확인해 주지 못했다. 어떻게 나머지는 모두 사실인데(“나머지 사실인 폭행 등은 있는 사실을 썼다고 보고“) 유독 “조선일보 방사장”에 대한 항목만 과장이고 허위일 수 있겠는가? 이모 수사관은 정황에 비추어 가장 허위이기 어려운 항목이 유독 허위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장자연이 다른 목적(돈을 벌 목적)으로 허위사실을 쓴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경찰의 수사관(팀)이 오히려 다른 목적으로 장자연과 문건에 대한 허위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의 목적과 핵심적 방법은 분명하다. 장자연을 사기꾼으로 만듦으로써 ‘조선일보 방사장 및 그 아들’을 도덕적 지탄과 법률적 유죄로부터 구출하는 것. 이 증인신문조서의 후반부 문답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대한민국 경찰이 사용한 수사기법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끔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나온 것을 중심으로 몇 가지 기법만 간단히 요약해 보자. 무엇보다 (1) 문건내용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기, 그리고  (2)누가 “조선일보 방사장”인지 누가 그 “아들”인지 알 수 없도록 만들고 가능한 혐의자들을 임의로 축소하여 주요 혐의자를 조사 대상에서 빼거나[방용훈의 경우] 다른 인물을 고의로 잘못 지목하기[스포츠조선 하0 사장의 경우]  (3)핵심 증인 윤지오를 밤늦게 불러 새벽까지 반복 조사함으로써 진술 일관성을 뒤흔들기(추가로 참고인 윤지오에게, 장자연과 함께 ‘성접대’ 했잖느냐며 모욕주어 기죽이기) (4) 피해자나 참고인의 통화내용은 1년치를 샅샅이 조사하면서 가해(혐의)자의 통화는 이틀치, 일주일치, 한달치 식으로 소극적으로 조사하기[방상훈의 전화] (5) 가해(혐의)자의 전화기가 몇 대인지를 확인하지 않고 가해(혐의)자 측에서 불러주는 전화번호의 통화내역만 조사하기 [방상훈 전화기의 경우] (5)피해자나 참고인은 소환해서 조사하고 가해(혐의)자는 방문하여 조사하기[여러번에 걸쳐 여러 시간동안 반복된 윤지오에 대한 참고인 조사와 30여분 정도 형식적으로 이루어진 방상훈 조사의 차이] (6)언론에서 보도 나오면 뒤쫓아 수사하는 식으로 수사하기 (7) 수사정보를 가해(혐의)자에게 알려 주어 대응을 준비할 수 있게 하고[김종승 스케쥴표 방상훈에게 전달] 수사내용에 대해 가해(혐의)자 측과 협의하기[방상훈 알리바이의 경우] (8)사법처리 대상자 중에 언론사 대표는 없다는 식으로 정보를 흘려 여론의 반응을 탐지하고 여론을 조성하기 (9)참고인 조사 한 사람(한00)의 자필진술서를 추가로 받아 가해(혐의)자 측을 유리하게 만들기 (10)중간수사결과 발표내용을 발표 전에 가해(혐의)자 측에 유출하기 등등.

대한민국 경찰이 이러한 기법으로 가해(혐의)자 측에 유리한 방식으로 수사를 진행하고 있을 때 이른바 “유력” 언론기관인 조선일보는 경영기획실(강효상)을 비상대책팀으로 운영하고 사회부장(이한동)을 보내 경기지방경찰청장 등에게 수사외압을 행사하고 유리한 증언을 해줄 사람(한00)을 경찰에 보내 허위진술을 하게 하고 사건 직후인 2009년 3월 17일에는 도피중이던 김종승을 단독으로 취재하여 “소송 막으려고 전 매니저가 꾸민 자작극”이라는 기사를 단독으로 보도하여 은연중 수사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식으로 이 사건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적극적인 탈출 노력을 기울이고 있던 중이었다. 이모 수사관의 증인신문조서에 대한 우리의 분석은 대한민국 경찰의 수사가 결국 가해(혐의)자인 조선일보 측의 이러한 노력 및 요구에 부응하고 협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가해(혐의)자 위주의 수사였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끝)

장자연 사건에서 국가의 얼굴, 몸짓, 행동에 대하여(2)

Scene #2 죽음은 ‘자살’로, 문건은 ‘유서’로, 증거는 ‘인멸’로

SBS는 장자연의 이 육성파일의 출처를 밝히지는 않았다. 과거사진상조사단이 10년전 장자연 수사기록에도 등장했던 이 녹음파일에 대한 조사에 나선다는 보도가 있었으므로 과거사조사위원회는 그 출처를 알고 있을 것으로 보이다. 이 음성파일이 장자연의 핸드폰에서 나왔건 통화 상대방의 핸드폰에서 나왔건 간에, 목숨을 내려놓을 정도의 체념을 토로하는 이 순간에도 장자연이 저항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이 통화기록은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왜냐하면 장자연이 주검으로 발견되기 바로 며칠 앞서 통화녹음 기능이 있는 것으로 핸드폰을 새로 바꿨기 때문이다. 만약 이 녹음파일이 장자연의 핸드폰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 통화기록 자체가 새로 바꾼 핸드폰으로 자신에게 닥쳐온 가해위협을 고발하고 기록하는 적극적 저항행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힘 센 자’가 자기를 죽이겠다고 하는데 자신은 그것에 맞서 싸울 힘이 없다는 사실을 토로하는 내용을 음성으로 기록한 것이고 이것은 다른 한편 누군가의 도움과 구조를 요청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녹음파일이 통화상대방의 핸드폰에서 나온 것이라면 장자연이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을 받은 후 다시 협박이 온다면 증거를 남길 목적으로 어느 시점에 핸드폰을 교체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므로 통화기능이 있는 것으로 핸드폰을 교체한 행위 그 자체가 협박에 저항하기 위해 시도한 최후의 수단이었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장자연은 새로 바꾼 핸드폰으로 자신에게 닥친 실제적 위협을 우리가 들은 것처럼 고발하고 기록한 것일까? 아니면 새로운 핸드폰의 통화녹음 기능을 사용해 보기도 전에 죽음이 먼저 찾아 왔던 것일까? 아니면 증거확보를 위한 준비를 갖추었지만 법정에서의 상대적 투쟁의 길 대신 죽음이라는 절대적 소멸의 길을 선택했던 것일까? 

“경찰”이라 불리는 국가기관은 3월 7일 오후 7시 30분경 장자연이 목숨을 잃고 주검으로 발견된 가족(언니)의 신고를 받고서야 죽은 장자연에게로 왔다. 경찰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이 죽음을 단순 자살의 변사로 처리했다. 유서도 없었고 <꽃보다 남자>로 대중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연예인인데도 말이다. 경찰이 이 죽음을 단순자살 변사로 파악한 주요 이유는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2월말에서 3월초까지의 저 긴장된 영화적 시간은 경찰의 관심 대상이 되지 못했다. 

정말 당시 경찰은 장자연이 소속사로부터 벗어나고자 했고 그것을 위해 증언조서인 문건을 작성했으며 이 때문에 죽여버리겠다는 협박까지 받고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던 것일까? 초동수사가 부실했으므로 몰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3월 9일 화장되어 부모의 묘소 근처에 뿌려지기 전에 장자연이 남긴 문건이 있다는 소문은  경찰이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큼 널리 돌고 있었다. 장자연이 죽은 바로 다음 날 호야의 유장호가 미니홈피에 “2주 전부터 자연이가 털어놓은 이야기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자연아 내가 절대 이 싸움을 포기한 건 아니다”, “꼭 지켜봐줘” 식의 글을 게재했으며 유가족들만이 아니라 (장자연이 소속을 옮기고자 했던 연예기획사의) 김0형 대표도 장자연이 남긴 문건이 있다는 사실을 장례 기간 중에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지오도 장례식장에서 이러한 사실을 유가족으로부터 처음 들었다. 장자연이 죽기 전에 문건이 이0숙 등에 의해 자신의 필요에 따라 유통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외에도 복수의 사람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경찰이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경찰이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경찰의 조사를 받았던 주진우 기자는, 2019년 3월 6일에 tbs FM에 출연해, 경찰이 “우울증에 의한 자살이며 부검은 없다”고 발표한 것이 사망 당일 저녁인 점, “자신에게 문건과 관련해서는 절대 수사를 진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 점” 등을 들어 경찰이 문건이 있음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수사하지 않고 단순자살의 변사로 처리한 것에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경찰이 “우울증”을 연예노동자들의 의문의 죽음을 빨아들이는 변명의 블랙홀로 애용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 죽음을 단순자살의 변사로 처리하려 한 경찰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3월 10일 노컷뉴스와 조선일보에 의해 장자연이 남긴 문건이 있음이 보도되었고 3월 13일 KBS에서 타다 만 장자연의 문건 내용이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가족이 재수사를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철저한 조사를 원하는 여론을 거스를 수 없었다. 문건에 소속사 대표의 협박, 강요, 폭행과 같은 범죄사실들이 기술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일보 방사장과 같은 인물들이 이러한 범죄와 연관된 이름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결국 경찰은 2009년 3월 13일 이 사건 재수사에 착수하게 된다.

그런데 이 재수사는 장자연의 죽음이 “단순” 자살은 아닐지라도 자살임에는 분명하다는 경찰의 초기 관점 위에서 이루어졌다. 초기에 경찰은 ‘우울증’을 자살의 동기로 설정했다가 이제 죽음의 ‘복잡한’ 맥락들이 드러나자 장자연이 ‘유서’를 남겼다는 것을 자살 판단의 근거로 삼으려 했다. 이를 위해서는 법정에 제출할 증언조서로 작성된 장자연의 그 ‘문건’을 ‘유서’로 만들어야 했다. 주민등록번호에다가 지장과 간인까지 찍혀 누가 봐도 유서라고 보기 어려운 이 문건을 ‘유서’로 둔갑시키는 데에는 노컷뉴스(김대오)와 조선일보(박은주)의 초기보도가 한몫을 했다. 이 두 기사가 문건의 내용을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것이 유서인 것처럼 이미 보도했기 때문에 그 보도 시각을 경찰이 수사권을 통해 재확인 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이후 장자연이 남긴 문건은 장자연이 ‘자살’하면서 남긴 ‘유서’라는 관점이 지배적으로 된다. 이것이 장자연의 죽음과 관련하여 경찰권력이 언론권력과 연합하여 만들어낸 해석 프레임이다. 

대한민국 헌법 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국가는 개인이 가치는 이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가의 생명보호의무도 이 규정에서 도출된다. 만약 장자연이 자살하지 않았다면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할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며 이에 대해 어떤 형태로건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장자연이 자살했다면 그것은 국가의 생명보호의무의 한계선을 넘은 것으로 국가의 책임범위를 벗어난다. 우울증-유서-자살 프레임은 그러므로 국가에게 편리한 국가중심주의적 해석도식인데 이 경우에는 공공연한 사실조차 무시할 정도로 폭력적이며 책임회피적인 프레임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장자연 자신을 자신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가해자로 지목함으로써 죽음에 책임이 있을 수 있는 다른 가해자를 찾는 노력이나 또 책임이 있다고 ‘문건’에 실제로 기록된 가해자들에 대한 구체적 질문을 원천봉쇄하는 프레임이었다. 

이 시기에 경찰 외에 죽음의 현장 주변에 모습을 나타낸 다른 국가기관이 있다. 국정원이 그것이다. 1999년 1월 21일 국가안전기획부에서 국가정보원으로 개편한 이 기관은 “국외 정보 및 국내 보안정보의 수집·작성 및 배포, 국가 기밀에 속하는 문서·자재·시설 및 지역에 대한 보안 업무, 형법 중 내란의 죄, 외환의 죄, 군형법 중 반란의 죄, 암호 부정사용의 죄, 군사기밀 보호법에 규정된 죄, 국가보안법에 규정된 죄에 대한 수사, 국정원 직원의 직무와 관련된 범죄에 대한 수사, 정보 및 보안 업무의 기획·조정의 직무” 등을 수행하는 대한민국의 중앙행정기관이다. 경찰과 검찰의 조사에서 국정원의 움직임은 전혀 조사대상으로 떠오르지 않아 실체 없는 유령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국정원이 장자연 사망사건에 관여했다는 복수의 진술이 남아 있다. 

당시 호야의 매니저였던 권0성은 장자연 사망 일주일 전, 그러니까 장자연이 문건을 쓴 바로 다음날부터 국정원 직원이 유장호에게 연락이 왔고 유장호가 입원한 병원에 함께 있었다고 했다. 호야 소속 배우 송0미는 유장호 입원 병원에서 국정원 직원으로부터 명함을 받았다고 말했다. 노컷뉴스 기자 김대오도 당시 문건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도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국정원을 포함한 국회, 재계, 조선일보, 청와대, 기무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고 말했다. 윤지오도 유장호가 입원한 병원에서 국정원 직원과 전화번호를 교환했고 봉은사에서 국정원 직원이 문건을 꺼내와 소각했으며 재수사가 시작된 후에는 조사를 어떻게 받고 있고 뭘 알고 있는지에 대한 전화질문을 받았다고 말했다. 국정원에 대한 경검의 조사 내용이 없으므로 국정원이 당시 어떤 목적으로 무엇을 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이 장자연 사건에 관심을 갖고 장자연의 문건과 리스트가 작성된 후부터 줄곧 이 사건의 파장을 관리해 왔다는 것을 우리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누가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모르는지, 경찰은 어떤 조사를 벌이고 있는지를 탐문한다는 것은 이 사건이 어떤 수준에서 관리되어야 하는지를 탐색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문건 작성후 국정원이 장자연의 생명을 보호하지도 않았으며 사망 후 그 죽음의 진실을 규명하는 데 힘을 보태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드러난 행동은 문건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유장호를 감시하고 유장호, 윤지오, 유가족과 함께 봉은사에서 문건과 리스트를 소각한 것이다. 즉 진실 규명의 인적 증거를 관리하고 물적 증거를 소각한 후 그 남은 재를 구둣발로 짓이기고 흙으로 덮어 흔적조차 없게 만든 것이다. 후자는 유가족의 요구에 따른 것이지만 내용상으로는 증거인멸에 공조한 것이다.

이상이 사건 초기 재수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경찰과 국정원이라는 두 국가기관의 표정과 행동에 대한 고찰이다. 이 고찰은, 국가가 위험에 처한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으며 사망 후에도 그 죽음의 원인을 규명하고 가해책임을 밝히는 데 지극히 소극적이었고 오히려 은폐하려 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국가의 기본적 관점과 태도는 장자연이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으니 자신의 책임이며 국가가 관여할 것이 아니라는 인상을 남기는 방식으로 관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과 태도에 배치되는 상황들과 증거들이 이미 드러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외면하거나 은폐하면서 말이다.

증언과 신변위협에 대하여(3)

3. 신변위협은 실재한다.

두 번째로 살펴 보아야 할 것은 윤지오에 대한 신변위협이 없었다는 박훈의 주장에 대해서이다. 이 주장을 살펴 봄에 있어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실재성의 두 차원이다. 실재성은 잠재성과 현실성의 두 차원으로 나뉜다. 신변위협의 문제에서 현실성은 행사의 차원이며 잠재성은 존재의 차원이다. 혼자 밤길을 걷는 여성에게 남성으로부터의 신변위협이 행사되지 않을 때에도 여성이 신변위협을 느끼는 것은 신변위협이 잠재적으로 실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변위협이 행사되고 있을 때에 신변위협이 실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신변위협이 행사되지 않고 있음이 현실일 때조차 신변위협은 잠재적으로 실재한다고 해야 한다. 윤지오는 지난 10년 동안 자신이 경험한 현실적 신변위협과 잠재적 신변위협에 대해 여러 차례 진술해 왔다. 그 진술들 중에서 중요한 몇 가지를 발췌해 보자.

첫째 10년전 밤에 경찰서에 출석하여 새벽까지 이어진 참고인 조사를 마친 후 경찰의 차를 타고 귀가하던 중 조선일보라는 로고를 새긴 차량이 경찰의 차를 미행했다. 미행하는 차를 따돌리기 위해 쫓고 쫓기기를 얼마동안 하다가 수사관이 차를 세우고 물어보니 조선일보 기자였다. 경찰이 그에게 왜 따라오느냐고 물으니 “취재를 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는데 이후에 기사는 나오지 않았다.

둘째 조희천 강제추행에 대해 과거사진상조사단에서 증언한 후 기자들이 윤지오를 찾았다.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윤지오는 이 기자들이 가해자들을 대신해서 증언자인 윤지오를 찾아다니고 가해자들이 할 공격적인 말을 가해자 대신 증언자에게 퍼붓는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한다. 즉 윤지오에게 기자들은 가해자들의 분신처럼 느껴지며 실질적인 보복위협을 하는 가해세력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셋째 JTBC와의 비실명 전화인터뷰에서 고 장자연 사건을 다룬 책을 쓴다고 한 후 자신을 ‘조선일보‘ (기자)라고 밝힌 어떤 사람은 향초 제품 납품회사와 교회에 전화를 걸어’(윤지오와) 연락이 닿지 않아 그런다‘ ’그곳에 윤지오가 다니는 것이 맞냐‘며 물었다.  남긴 번호로 전화를 해 보았지만 없는 전화번호였다. 윤지오는 이것을 가해권력자들이 벌이는 스토킹 위협으로 받아들인다. 

넷째 2019년 1월에 고속도로와 도로에서 두 차례의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이 때문에 근육이 찢어지고 염증이 생기는 부상을 입었다. 교통사고 직후에는 별 것 아닌 평범한 교통사고로 생각하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또 가족들과 지인들이 우려하는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이것들이 우연이 아니라 가해자들이 자행하는 위협공격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고 두려움이 점점 커져 갔다.

다섯째 2019년 4월 전 소속사 매니저였던 권0성이 생전 연락이 없다가 인스타그램으로 갑작스레 연락을 하여 JTBC가 너를 이용하는 것으로 보이니 JTBC와 인터뷰를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 후 정작 그는 뉴시스 기자와 ‘윤지오는 생전에 장자연과 친하지 않았다’는 식의 음해성 인터뷰를 가졌다.

여섯째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고 증언을 시작한 후 기자들은 윤지오가 투숙한 호텔을 찾아내 증언자에 대한 의심을 표현하는 가해자들의 목소리를 윤지오에게 쏟아내기 시작했고 윤지오의 인스타그램에는 ‘공항에 도착하면 칼로 찌르겠다’거나 ‘손톱을 드릴로 뚫고 싶다’는 식의 끔찍한 댓글이 달렸다.

일곱째 2019년 3월 8일 naver-*** 명의의 청원인이 ‘고 장자연씨 관련 증언한 윤**씨 신변보호 청원’을 하고 3월 14일 고소인의 변호사들이 경찰청에 윤지오에 대한 신변보호를 요청한 후 동작경찰서에서 스마트워치를 제공하고 맞춤형 순찰 등의 신변보호조치를 결정했다. 그 후 숙소 화장실 쪽에서 기계음이 들리고 환풍기 부분이 뜯겨있고 출입문 잠금장치가 고장나고 문틀 손잡이에서 액체가 흘러내리고 가스냄새가 나는 일련의 불안한 일들을 경험했다.

여덟째 4월 하순 경에 뮤지컬 배우 ‘민00’씨의 초대로 어머니와 경호원과 함께 뮤지컬을 관람할 예정이었는데 누군가가 숙소 위치를 알아내 그 위치를 무단으로 인터넷에 올리고 새벽에는 모르는 남성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두려운 나머지 예정된 뮤지컬 관람도 하지 못했다. 22일과 23일에는 경찰 및 경호원과 함께 숙소를 변경하였으나 변경한 숙소마저 노출되었다. 어떤 약속도 없이 무작정 찾아와 숙소 1층에서 대기하던 기자가 무단으로 자신을 촬영하는 바람에 경호원이 카메라를 압수해 해당 영상을 삭제한 적도 있다.

이런 것들을 겪으면서 신변위협을 느낀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두고 신변위협을 느낀다고 해야 할까? 2019년 4월 이후 증언자 윤지오에게 쏟아진 엄청난 강요들(‘한국으로 와서 조사받으라’)과 협박들(‘감옥에 가둬라’)은 이 신변위협들의 다른 형태로의 지속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박훈의 고발은 그 다른 형태의 신변위협의 시발점이었다.

2. ‘장자연 리스트’에 대한 증언과 ‘위협 경험’에 대한 증언을 기망행위로 몰기

최나리 변호사의 ‘증여의 의사표시 취소로 인한 부당이득 반환청구소송’에 대한 비판(2)

이제 윤지오의 행위를 ‘기망행위’로 보는 (최나리의) 첫 번째 이유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그것은 “후원금을 받을 목적으로 천명한 이유가 신빙성이 없거나 극히 과장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여기서 먼저 살펴야 할 것은 최나리가 신빙성이 없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제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그것은 장자연 리스트에 대한 윤지오의 진술이 신빙성이 없다는 주장이다. 이미 우리는 뉴시스, 박훈, 김수민, 김대오로부터 SBS, 조선일보까지, 그리고 최근에는 조0천 강제추행 사건 1심 판사 오덕식에 이르기까지 마치 입을 맞춘듯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 장자연 리스트에 관한 윤지오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는 주장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고 장자연에 대한 가해권력자들의 필요와 정확히 부응하는 주장임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윤지오 진술의 신빙성을 뒷받침하거나 확인시켜 주는 10년전의 진술자료나 과거사조사위원회 진상조사단의 보고, 그리고 조희천 강제추행을 기소한 검찰의 기소사유 등을 거스르며 자신의 희망과 욕망을 객관적 사태 속에 투사하는 주관주의적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신빙성이 없다’는 여론과 판단을 만들어 내기 위해 객관적 사태 위에  ‘나는 믿고 싶지 않다’, ‘신빙성이 없어야 한다’, ’신빙성이 없게 만들고 싶다’는 욕망, 당위, 의지의 덮개를 덮어 씌우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김대오는 ‘자신이 문건을 본 적은 결코 없지만 그 문건 속에 결단코 리스트는 없었다’는 해괴한 주장을 펼쳤다. 김수민은 ‘그 리스트라는 것이 윤지오가 참고인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수사관의 책상에서 얼핏 훔쳐본 것일 뿐’이라는 말을 지어내었다. 변호사 겸엄을 하고 있는 시인 박훈은 이번에는 이 두 거짓말을 조합하여 근거로 삼으면서, 윤지오가 장자연 리스트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 거짓말로 펀딩사기를 벌이고 있다는 소설을 써냈다. 

최나리는 이 해괴하거나 날조된 주장들을 자신의 논고의 숨겨진 근거로 삼고 있는데, 이것이 설득력을 갖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2009년과 2010년의 진술조서, 수사발표, 언론보도 등을 송두리째 태워 없애고 최소한 그 2년의 시간을 역사에서 파내 버릴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윤지오가 10년 전의 진술들 속에 리스트가 있었음을 화석처럼 분명하게 새겨놓았고 그것은 유장호와 장자연 오빠 장00의 진술에 의해서도 교차검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당시의 수사발표나 언론보도 속에도 역시 화석들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장자연 리스트 논란과 그 성격에 대해’, ‘김대오의 거짓말’ ‘김대오의 입은 거짓말제조공장인가 자동거짓말기계인가?’ ‘박훈이 장자연 리스트를 없애는 놀라운 방법’ ‘김수민: 살아 있는 모순’ 등에서 장자연 리스트에 관한 윤지오 진술이 갖는 부인할 수 없는 신빙성에 대해 이미 충분히 논했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이것을 입증하는 데 에너지를 사용하고 싶지는 않다. 이런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최나리가 자신의 고소장에서 장자연 리스트에 대한 윤지오의 진술이 신빙성이 없다는 주장을 하면서 어떤 논증도 하지 않으며 고소장 밖에서 이루어진 허구적 주장과 조작된 여론들(주로 김수민이 지어낸 말)을 마치 이미 확인된 사실인 것처럼 인용하는 데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진술이 신빙성 없음’을 ‘기망’의 이유로 삼은 것은 최나리이므로 진술 신빙성이 없음을 입증할 책임도 그에게 있는 것은 분명한데 아직 그는 이에 대해 아무 것도 입증하지 못했다. 

두번째로 살펴야 할 것은 최나리가 ‘극히 과장된 것’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다. 고소장을 보면 이것은 신변위협에 관한 윤지오의 증언에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신변위협 과장에 대한 최나리의 논증 역시 장자연 리스트에 대한 논증만큼이나 허술하기 짝이 없다. 대체 ‘기망’의 다른 이유로 삼은 ‘신변위협 과장’이라는 주장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 것일까?

그가 들고 있는 하나의 근거는 2019년 3월 30일의 윤지오가 청와대 게시판에 올린 국민청원이다. 거기서 윤지오는 경찰측에서 지급해준 위치추적장치 겸 비상호출 스마트 워치가 작동되지 않아 신고를 한 후 9시간이 더 경과했음에도 아무런 연락조차 되지 않고 있음을 들면서 자신이 호출버튼을 누른 이유에 대해 쓴다. 벽쪽에서 기계음이 들리다가 이제 화장실 천정에서 동일한 소리가 들린다, 환풍구의 끈이 날카롭게 끊어져 있다, 출입문 잠금장치가 고장나 수리를 했는데 문쪽을 확인해 보니 오일로 보이는 액체가 문틀 맨위에서 흘러내린 흔적이 있다, 문을 열때 이상한 가스냄새가 났다…이런 이유로 수면을 제대로 못 취하는 중에 소리가 반복되어 비상호출 버튼을 눌렀다는 것이다.

윤지오의 청원은 국민이 국가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는데 국가가 신변보호를 해주지 않아 두려움에 떨고 있는 현실에 대한 경험적 증언이며 증인이 사비로 24시간 경호원을 고용하여 증언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현실은 부당하다는 고발이고 이 부당한 현실이 바로 잡혀야 한다는 개혁의 요청이다. 

다행히 윤지오의 청원이 일부 받아들여져 문재인 정부와 경찰청은 청원마감일이 오기 전에 윤지오에 대한 일정한 경호조치를 취했다. 원경환 서울지방경찰청장은 “보복이 우려되는 중요범죄 신고자나 피해자 보호는 경찰의 중요한 본분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건에 미흡한 업무처리로 윤지오씨는 물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려 최종하다”고 사과했다. 

이후 4월 하순경 경찰이 신고사항에 대한 과학적 조사결과 발표라는 이름으로 기계음, 환풍구, 출입문, 가스냄새 등에 대해 어떤 상황설명을 했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윤지오가 위협으로 느낀 일련의 흔적들과 현상들이 조사결과 실제적 위협의 흔적이나 현상은 아니었다는 설명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설명은 윤지오에 대한 마녀사냥이 본격화된 시점에 이루어졌다. 우선 그 날의 설명은, 경찰조차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윤지오에게 설명해 준 바 없는 스마트워치 조작상의 특성을 윤지오의 조작미숙 때문에 잘못 작동되었다는 식으로 설명하면서 책임전가하는 파렴치한 발표였다. 게다가 몇 가지 개개의 흔적과 현상에 대한 경찰의 설명은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 심지어 언론은 가스냄새가 났다는 문제제기에 대해 ‘어떻게 호텔에서 가스냄새가 날 수 있습니까?’라는 호텔 직원의 해명을 반박 자료로 인용했다. 백보 양보하여 그 상황적인 설명들이 맞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보복우려”에 대한 반증이 아니다. 다시 말해 그것이, 중요 범죄 신고자에게는 “보복 우려”(와 예방공격의 위험)가 따른다는 보편적 사실, 즉 서울지방경찰청장이 인정하고 사과한 바 있는 그 보편적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당시 윤지오가 느낀 기계음이나 환풍구 출입문 가스냄새 등이 설령 위협이 실행되고 있었다는 것의 증거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증언자가 예사롭지 않은 어떤 흔적이나 현상들로부터 우려를 느끼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단순한 심리적 현상이 아니라 실재적인 것이다. 증인이 느끼는 위협감과 두려움은 경찰이 제시한 설명으로 그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보다 더 실제적인 잠재적 실재성(보드리야르)이기 때문이다.  

예방이나 보복은 일반적으로 다양한 유형의 폭력 형태로 가해져 오는 것인데 그것에 대한 우려와 두려움을 과연 과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만약 최나리가 진정으로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러한 생각은 국가가 증언자나 피해자를 보호할 의무를 지지 않아도 됨을 지시함으로써 국민들을 엄청난 위험 앞에 노출시키는 위험한 발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만약 그런 생각에 따라 국가가 실제로 국민들을 방기한다면 국민들은 가해권력의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국가와 별도로, 아니 국가에 맞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자경단이라도 조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실제로 윤지오가 공익제보자 보호를 위한 비영리단체 지상의빛을 설립한 것은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 주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자경단은 아닐지라도 비정부기구를 통해 공익제보자를 돕자는 취지를 반영한 것이다. 

최나리가 드는 “위협 과장” 사례의 또 하나는 윤지오가 2019년 4월 11일 JTBC 뉴스룸에 출연하여 자신의 신변위협을 과장했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손석희 앵커와 가진 윤지오의 이날의 인터뷰는 전직 조선일보 기자였던 조0천 강제추행건에 대한 증언, 한국에서 활동하다 캐나다로 떠나게 된 이유, 2018년 6월과 12월 JTBC와의 익명의 전화 인터뷰 이후 당했던 두 번의 교통사고와 가해권력들로부터 받은 위협들,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 등에 관한 것이었다. 

이날 윤지오는 앵커로부터 증언에 대한 보복이나 위협에 대한 질문을 받고 자신이 위협감을 느낀 세 가지의 사건을 언급한다. (1)“장자연 문건에 언급된 유력 언론사”(조선일보)가 향초납품업체와 교회에 전화를 해서 윤지오 씨와 연락이 안 된다며 소재를 물은 것. (2) 이전의 매니저 권00가 JTBC와 인터뷰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JTBC가 너를 이용하는 기분이 드니” 인터뷰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고 정작 자신은 뉴시스와 인터뷰를 하여 “지오는 옛날부터 유명해지고 싶어 한 친구”, “실제로 지오는 자연이와 친하지 않았다”는 식의 허위주장을 한 것. (3)JTBC와의 전화인터뷰 이후 교통사고가 좀 크게 두 차례가 있었고, 근육이 찢어져서 손상되면서 염증이 생긴 것.

최나리는 여기서 (3)번 항을 신변위협에 대한 과장이라고 규정하고 그 근거를 김수민으로부터 가져온다. “소외 김수민은 피고가 당한 신변 위협은 조작된 것인데 그 중 특히 2019.1 발생한 교통사고는 눈길에서 미끄러지며 뒷차가 충격을 가한 단순한 추돌사고였으며 가해자 차주는 평범한 아이의 아빠라는 사실을 이미 피고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위 JTBC 뉴스룸[에] 출연 당시에 파손이 심한 뒷차 즉 가해자의 차량을 자신의 차량인 것처럼 기망하여 조작을 가하였고…”가 최나리가 해당 사건에 대해 쓴 문장이다.  

“가해자의 차량을 자신의 차량인 것처럼 기망하여 조작을 가하였고”라는 문장은 논박할 가치를 느끼지 않는다. 윤지오가 거대방송사 JTBC의 자료화면을 조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을 하려면 최나리 변호사가 JTBC 측에 확인하여 사실과 상황을 확인하는 정도의 노력은 기울였어야 마땅할 것이다. 문제는 이 사건에 대한 김수민의 비꼬인 해석이다. 카톡 대화 속에 그 교통사고가 ‘애기 아빠가 일 끝나고 애들 데리러 가다가 과실로 발생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는 윤지오의 말이 나온다. 김수민의 해석은 전적으로 이 카톡구절에 의지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귀기울여 듣지 않는 것은 그런 카톡 이후에 윤지오의 마음 속에 일어난 변화이다. 그는 이미 여러차례 이에 대해 밝힌 바 있다. 처음에는 평범하고 단순한 교통사고라 생각했으나 이후 가족을 비롯한 주변사람들로부터 사고를 위장한 가해공격일 수 있지 않느냐, 앞으로 더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점점 그 사고에 대한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나리는 윤지오의 이러한 말은 전혀 참고하지 않고 김수민보다 한술 더 떠서 JTBC에서의 인터뷰를 ‘과장’ ‘조작’ ‘기망’ 등의 언어로 도배해 버린다. 이 인터뷰를 할 당시 앵커 손석희는 윤지오의 말을 듣고 이미, “거기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은 교통사고는 일어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지 않겠는가?]”고 있을 수 있는 반론을 의식하며 질문을 했다. 이에 대해 윤지오는 자신이, 증언으로 인해 불특정다수의 권력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 놓여 있고 교통사고를 이 맥락에서 받아들이게 되는 조건을 토로한다.

“그런데 JTBC에 제가 전화 인터뷰에서 사실을 기록한 사건을 다룬 책을 쓴다라고 한 시점부터, 제 행방을 추적하시는 어떤 분들이 계셨고. 또 사실 어떠한 한 언론사만 주목을 하시는데 사실은 한 곳이 아니라 저는 개인 혼자지만 제가 상대해야 될 분들은 A4용지 한 장이 넘어가는 거의 한 30명에 가까운, 공권력을 행사하실 수 있는 법 위에 선 분이시기 때문에 불특정 다수에게서 저는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고. 그분들에 대해서 또 언급을 직접적으로 하면 명예훼손으로 걸리기 때문에.”

평범한 교통사고로 보일지라도 그것이 불특정다수로부터 가해져오는 위장된 공격의 하나일 수 있다는 답변이다. 가해자는 법 위에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다수의 사람들이고 그렇게 특정하기 어려운 다수로부터 보복이나 예방공격을 당할 수 있는 것이 증언자가 놓여진 위치임을 부정할 수 있을까? 이 말이 설득력을 갖는 한에서 어떻게 교통사고로부터 위협을 느꼈다는 인터뷰 진술이 과장, 조작, 기망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오히려 4월 이후의 사태 전개는 특정하기 어려운 가해권력들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입장이며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윤지오의 말이 참이었음을 뚜렷이 입증해 준다. 왜냐하면 증언자 윤지오에 대한 마녀사냥식 공격이, 조선일보 SBS 뉴시스를 비롯하여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언론사와 통신사, 홍준표를 비롯한 정치가, 박준영 박훈 최나리 강연재 등의 변호사, 김대오 김용호와 같은 기자, 서민과 같은 교수, 김수민과 같은 작가 등의 지적 법률적 정치적 미디어적 화력을 총동원하면서 윤지오에게 집중적으로 퍼부어지는 것을 우리가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이 총력전 과정을 통해 윤지오가 대한민국 시민사회로부터 추방되고 배제된 현실을 고려하면, 윤지오가 자신에게 닥쳐온 위협을 과장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소평가하고, 과소대비했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상황을 더 잘 설명해 주지 않겠는가?(계속) 

유튜브, 인스타그램 영상클립 속의 어떤 ‘호모 사케르’와 법 위의 가해권력들에 대한 단상(끝)

요점: ‘호모 사케르’가 문제가 아니라 ‘호모 사케르’를 창출하고 또 퇴출시키는 ‘지탄 공동체’의 범죄행동이 문제이며 이 문제의 극복은 포함과 배제의 이중구속 상태에 있는 ‘호모 사케르’들의 투쟁을 통해 달성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타락”과 “성스러움” 사이 

당신이 지탄의 무리에 아무 생각 없이 동참하기 전에 한 번 꼭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다. ’타락’(墮落)이란 무엇인가? 누가 어떤 목적에 타락이란 말을 이용하는가,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타락’이란 말은 ’제사상에 올릴 고기가 풀잎처럼 땅바닥에 떨어지다’는 뜻에서 기원한다.  

이것은 지극히 종교적인 용어로서 어떤 것이 신께 바칠 제물로 사용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영상 클립 속 여성이 ‘타락했다’는 것은 그 여성이 더럽혀졌기 때문에 제사상에 올리기에 바람직한 여성이 아니라는 것, 즉 가부장적 성권력에게 바칠 제물(이른바 ‘먹잇감’)로는 부적절하다는 의미이다. 김종승, 김학의, 승리 등으로 인해 유명해진 (그러나 참으로 잔인한) 현세적 용어를 사용해 보자면 그 여성이 ’접대’에 사용될 수 없는 여성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권력형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들이 (‘타락’하지 않았다고 평가되는) 일반 시민으로 되는 것은 권력자들이, 자신들이 ’타락했다’고 보는 여성들을 제물로 ‘접대’받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타락한’ 여성이란 현세에서 이들 성폭력-권력자들의 접대상에 올릴 제물로 사용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존재이다. 그런데 이렇게 ‘접대’될 자격조차 박탈당한 그 ‘타락한’ 여성을, 가부장제 성폭력 체제는 그 누가 짓밟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아무런 범죄로 되지 않을 존재로 간주하곤 한다.

조르죠 아감벤은 로마법에서 이런 존재의 원형을 찾아낸다. 호모 사케르(Homo Sacer), “성스러운 인간”이 그것이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페스투스(Sextus Pompeius Festus)의 『단어의 의미에 관하여』는 호모 사케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어떤 범죄를 저질러서 인민에 의해 고발당한 자를 성스럽다(sacer)고 한다. 그를 희생의 제물로 삼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그를 죽인다면, 그 사람은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최초의 호민관 법에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민투표를 통해 성스럽게 된 사람을 죽이더라도 살인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악하고 불결한 사람을 가리켜 ‘성스럽다’고 말하는 관습이 있다.”

이 인용을 보면, 로마법은 특이하게도 우리가 앞서 ‘타락했다’고 표현한 존재를 ‘성스럽다’고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표현방식이야 어떻든 이 인용은 로마 사회가 ‘인간 접대’의 문화를 갖고 있었음도 보여준다. “성스러운 인간”(호모 사케르)은 ‘접대’ 제물로 사용될 수 없는 존재였으며 ‘접대’ 당할 수 있는 인간이라 함은 그 ‘접대’ 당함을 통해 신의 세계, 신의 질서로 넘어갈 수 있는 인간으로 이해되었다. 조선시대 일반 백성의 딸이 왕에게 ‘상납’됨으로써 왕의 질서(“궁녀”)로 넘어가는 것에 비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접대’용으로 사용될 수 없는 “범죄자”들은, 그 “성스러움” 때문에 신의 세계로 넘어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인간의 세계 내부에 자리를 얻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누구든지 죽여도 무방한 존재, 항상적 배제상태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호모 사케르는 경계의 존재이다. 그는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 모두에서 배제됨으로써 비로소 거기에 포함되는 모순의 존재이다. 아감벤은 로마법 속의 이 개념을 ‘벌거벗은 생명’이라고 부르면서 우리 시대로 가져와 현대의  국가권력이 본질적으로 로마법에서 말한 이 “호모 사케르 =벌거벗은 생명”을 창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분석한다. 현대의 국가주권은 법을 만들 수 있는 권력이라기보다 법을 멈추고 예외상태를 선포하며 모든 권한을 박탈당한 저 호모 사케르, 벌거벗은 생명을 창출하는 권력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의 현대적 국가주권에 의해 법질서 외부로 추방당하는 방식으로 법질서에 겨우 포함되는 생명형태들은 수를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다. 나치 하의 ‘유대인’, 일제 하의 ‘조센징’, 전후 대한민국에서의 ‘빨갱이’, 1990년대 말 이후의 ‘종북’, ‘좌빨’, 9/11 이후의 ‘테러리스트’, 트럼프 하의 ‘미등록자’ ’이주민’, ‘난민’ 등등등. 여성을 ‘호모 사케르’로 만들면서 특별히 붙이는 이름으로는 ‘마녀’, ‘풍기문란녀’, ‘꽃뱀’, ‘매춘부’, ‘창녀’ 등등이 있다. 그런데 아감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게 특수한 생명형태들만이 아니라 현대인 모두가 언제 어디서든 국가주권이라 불리는 폭력에 의해 바로 이런 식의 예외존재로 낙인 찍히고 법질서 바깥으로 추방당해 임의의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계정들이 영상 클립 속의 그 등장인물을 도덕적으로 타락한 여성으로 형상화하고 댓글러들로 하여금 그 여성을 마음 대로 짓밟을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호객을 하는 것은 로마 사회나 현대의 국가주권이 호모 사케르를 창출하는 방식을 흉내낸다. 그런데 영상 속 인물이 로마법에서 말하는 범죄자인가? 그들이 마구 짓밟는 그 영상 속 인물이 타인을 살해하는가? 그 인물이 타인을 성적으로 착취하고 수탈한 후 어쩔 수 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모는가? 영상 속의 그 인물이 누구를 폭행하는가? 그 인물이 누구에게 ‘성접대’를 강요하는가? 그 인물이 누구를 특수강간하는가? 그 인물이 누구를 성추행하는가? 그 인물이 누구를 성희롱하는가? 그 인물이 누구를 협박하는가? 그 인물이 증거를 인멸하고 수사외압을 행사하는가? 가해자를 감추기 위한 부실수사를 하는가? 그 인물이 불법으로 획득한 영상물을 고객들에게 송출하는가? 그 어느 것도 하지 않는다. 범죄가 될 만한 그 어느 것도 하지 않는다. 나는 윤지오가 터무니 없는 무고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것과 똑같이 영상 클립 속 그 인간도 그가 누구이든 터무니 없는 지탄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도 타자의 인권을 침해할 자유를 부여받지는 않았다.  

‘지탄 공동체’의 범죄성에 대해

오히려 범죄적 행동을 하는 것은 영상 속 인물을 손가락질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들이다. 그 영상 클립들을 바라보고 조롱하고 댓글을 달고 그 계정을 응원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누구인지 모를 동영상 속의 실제 인물로부터 어떤 동의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그 인물의 사생활 장면들을 공중 앞에 드러내 공연(公然)히 전시하고 성희롱적 댓글들을 역시 공연(公然)히 전시한다. 이 지탄의 제의(祭儀) 속에서 이들은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되고 공동체를 이룬다.

그런데 동의 없는 저작물의 사용은 명백히 저작권법을 위반하는 것이고 사실이건 허위사실이건 타인의 명예를 공연히 훼손하는 것은 형법상의 명예훼손죄에 해당되는 범죄행동임에도 불구하고 계정 운영자들과 “악플러”들은 이런 범죄적 행동을 매일매일 반복한다. 이들은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의 부품이 되어 죄의식도, 도덕감정도, 양심의 가책도, 주저도 보여주지 않는다. 아마도 대한민국의 경찰과 검찰이 이 불법들을 버젓이 보고 있으면서도 그냥 ‘좌시(坐視)’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이들 사실상의 범죄혐의자들이, 실제로는 어떤 범죄 행동도 하지 않는 영상 속 인물의 도덕성을 규탄하고 있는 것은 적반하장식 아이러니다. 이들 중 A씨는 윤지오를 규탄하는 1인시위 쇼를 하더니 며칠 전에는 영상클립 속 인물이 윤지오라고 주장하며 ‘통신매체이용음란죄’로 고발(김수민에 따르면 이 사람은 고발장에 자신의 이름을 “서준혁”으로 밝혔다고 한다)을 하면서 윤지오를 잡기 위해 캐나다까지 가겠다고 나서기까지 했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대한민국 ‘언론’은 그의 1인시위와 고발을 대서특필했다.

그런데 <한겨레21>(https://news.v.daum.net/v/20190108113802124)에 따르면 “서준혁”은 2016년 게이오대병원 정신과 의사를 사칭하다 걸렸고, 부동산 전문가를 사칭해 피해자를 만들었으며, 서울시 도시재생 연구위원을 사칭한 인물이라고 한다. 그가 제출한 고발장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그가 슛맨과 짜고 윤지오 마녀사냥 놀이를 통해 슈퍼챗을 챙기려 한 것이라는 소식까지 들린다. 슛맨은 그 슈퍼챗이 실수로 들어온 것이며 모두 돌려줄 것이라는 황급한 해명을 해야 했다. 기자였던 적이 없는데 전직이 기자였다고 사칭했지 않느냐는 의혹은 빼고 말이다.

정권을 창출하기도 하고 퇴출시키기도 하는 것으로 소문난 조선일보가 이렇게 정권을 쥐고 흔드는 방법이 이런 사기전문가의 뒤를 따라다니며 그의 말과 행동을 홍보해주고 더러운 이미지를 세탁해주는 것이었다고 생각하니 참 안쓰럽다. 그래도 이제 조선일보가 대답해야 할 차례인 것 같다. 언론이 ‘증언자 윤지오’에게 ‘놀아나는’ 것은 나쁜 것이고 ‘사기전문가’에게 ‘놀아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인가?  

이들 범죄혐의자들에게는 안 된 이야기지만, 로마의 노예제 권력이 ‘호모 사케르’라고 부른 특수한 인간존재를 창출하고 로마법이 누구나 그를 죽여도 좋은 것으로 인정했다고 해서, 21세기 대한민국의 법률까지 그런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법에 누구나 짓밟아도 그것이 죄가 되지 않는 특수한 인간존재는 없다. 로마에서 ‘호모 사케르’로 되는 사람들은 로마법을 위반한  범죄자들이었는데 이 법을 따른다면 누구나 짓밟아도 되는 사람은 영상 속 인물이라기보다 영상 클립의 자의적 이용으로 타자의 명예를 훼손하고 저작권법을 침해하는 계정주와 댓글러들일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법은 고대 로마법과 다르며 누구든지 짓밟고 죽여도 될 ‘벌거벗은 생명’을 적어도 법 속에서는 규정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누구든지 타인의 인권을 짓밟고 명예를 훼손하는 자들을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확실히 이들은 사법적 단죄가 필요한 대상으로 나타난다. 그런데도 이들에게 왜 이토록 죄의식이 없을까? 법적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없을까? 어떻게 이토록 국법을 우습게 볼까? 이것에 대한 설명을 위해 우리는 다시 아감벤을 참조해야 한다. 아감벤은 현대의 국가주권이 부시가 그러했듯이 법을 중지시키는 권력으로, 법 위의 권력, 법 밖의 권력으로 행세하며 벌거벗은 생명을 창출한다고 했다. 윤지오도 장자연 사건의 가해권력들을 여러 차례 ‘법 위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유튜브, 인스타그램의 계정주들도 자신을 예외권력으로 사고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이것은 이들 계정주들이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가해권력의 일부, 마디, 톱니바퀴, 끄나풀, 심부름꾼, 알바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 범죄혐의자, 가해권력의 톱니바퀴들은 영상 속 인물 즉 타인의 인권, 명예, 성적 자기결정권, 저작권을 짓밟으면서 그것에 ‘정의’의 이름을 붙이기까지 한다. 1980년대 초 “살인마” 전두환이 광주시민에 대한 자신의 학살행위를 “폭도”를 처단하는 ‘정의’의 행동이라고 불렀던 것과  똑같이 말이다. 당시 전두환(과 노태우)을 정점으로 하는 독재정당은 “민주정의당”(1981~1990)이라는 이름으로 폭력통치를 수행했다. 그 통치행위가 범죄행위로 입증되기까지(아직도 충분치 않다!) 무려 4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러가고 있다. 

유튜브, 인스타그램에 산재한 가해권력의 작은 기계입들이 나날이 자행하는 인권침해, 명예훼손, 성희롱, 저작권침해 등이 범죄로 입증되는 데에도 그런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까?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전두환은 계엄군으로 광주를 포위할 수 있었고 계엄령으로 전 국민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지만 지금 윤지오를 2차, 3차… n차 가해하고 있는 장자연 사건의 그 가해권력자들은 돈을 통해 전문가를 매수하고 언론을 통해 가짜진실=환상을 창출하고 고소고발의 사법소동을 벌이는 것 이상의 수단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진실을 가리는 것 이상의 수단 외에는 마땅히 사용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탈근대적 디지털 세계는 진실을 가리는 것도 쉽게 만들지만, 가려졌던 진실이 지하에서 더 큰 폭발력을 모아 되돌아오는 것도 더 쉽고 빠르게 만든다. 문제는 누가 언제 어떻게 저 진실을 가리는 환상의 장막을 찢어내어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의 적나라한 범죄적 얼굴을 드러내고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사회관계, 인간관계의 형상을 새로이 그려낼 것인가에 달려 있다. 세계를 뒤흔든 1968년의 혁명이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순간에 뜻밖에 찾아 왔듯이 대한민국을 뒤흔든 2008년, 2016년의 촛불봉기와 촛불혁명도 그렇게 몰래 그리고 갑자기 찾아 왔었다. 진실은 어느새 우리 곁으로 찾아올 것이다.

맺음말: 우회로도 샛길도 없다

하지만 혁명을 신비화하지는 말자. 2016년의 촛불혁명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이후 유가족을 주축으로 하는 시민사회의 끈질긴 연대투쟁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었던 사건이다. 촛불혁명의 스모킹건은 태블릿 피시 이전에 세월호 가대위의 진상규명 투쟁이었다. 박근혜에 대한 탄핵도, ‘세월호 7시간’을 설명하지 못하는, 정부책임자의 그 무책임성 때문이었다. 장자연의 죽음의 진상은 윤지오에 대한 음해공작으로 인해 10년이 지난 지금도 규명되지 못했다. 이제 고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려면 그것을 켜켜이 뒤덮고 있으며 지금도 진행중인 윤지오 음해공작의 쌓이는 잔해들을 먼저 걷어치우지 않으면 안 된다. 우회로도 샛길도 없다. 장자연을 죽음에 이르게 한 그 가해권력이 지금 윤지오를 음해하는 바로 그 권력인 한에서 지금 작동하고 있는 현재의 그 가해권력에 대한 투쟁과 음해폭력에 대한 진상규명 없이 어떻게 과거의 그 가해권력의 폭력에 대한 진상규명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조선일보가 고삐를 쥐다

요점: 6월 15일에 초고를 썼지만 여러 조건을 고려하여 공개하지 않았던 글이다. 조선일보와 장자연 사건 가해권력이 국민의 대표로 선출된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국민들을 배반하게 함으로써 국민을 무력하게 만들고 국가권력의 비선실세로 행세하는 과정에 대해 서술한다. 

2019년 6월 14일 조선일보는 증언자 윤지오에 대한 대한민국 권력자들(그 중의 하나가 언론권력인 조선일보 자신이다)의 마녀사냥 놀음을 ‘거짓 증언 논란’으로 부름으로써 5월에 유행했던 ’증언 신빙성 논란’이름을 한 단계 더 부정적인 이름으로 불렀다. 이렇게 “유일한 증언자”를 “거짓 증언자”로 만든 후, 조선일보는 ‘윤지오와 함께 하는 의원모임’을 만들었던 9인의 국회의원과 청와대를 그 거짓의 방조자, 협력자로 고발하는 정치공세에 나서고 있다. 6월 14일자로 나온 몇 개의 기사제목이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조선일보가 지금도 정권을 ‘창출’하기도 하고 ‘퇴출’시키기도 하는 권력으로 행세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경기지방경찰청장을 협박했던 그 조선일보가 이제 국회의원을 무릎 꿇리고 청와대를 질책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가 거꾸로 서있다. 제 대로 된 나라라면 그 나라를 구성하는 나랏사람들이 주인이어야지 사기업체가 주인이어서는 안 된다. 주권이 나랏사람들로부터 나와야지 사기업체에서 나오면 안 된다. 국민들이 정권을 창출하기도 하고 퇴출시키기도 해야지 일개 사기업체의 신문이 그런 짓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조선일보는 정권을 창출하고 퇴출할 뿐만 아니라 “유일한 증언자”를 “거짓 증언자”로 만드는 엄청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변호사 직함을 가진 자유한국당 소속인 박민석, 강연재, 그리고 조선일보의 친구인 최누리, 그리고 사법행동에서 이들과 공조하고 있는 ‘사회주의자’ 박훈 등이 고소고발로 윤지오를 짓밟아 그가 들고 있던 증언 촛불의 마지막 불씨까지 구둣발로 비벼끄고 나면, 그리하여 지금은 “거짓 증언자”로 부르는 윤지오를 “사기꾼 윤지오”로 명확히 부를 수 있는 날이 오게 되면 조선일보는 대한민국에서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언론권력으로, 공식 체계 바깥에서 공식적 대의권력을 쥐고 흔드는 비선실세(秘線實勢)의 권력으로 우뚝 서게 되지 않겠는가?

대체 어떻게 이러한 헌법유린이 가능해지는 것일까? 어떻게 나랏사람들의 주권이 이토록 무참히 짓밟히고 비선(秘線)의 의제된 주권이 들어서는 것일까? 여러가지 조건과 이유가 작용하고 있겠지만 국회의원 안민석이 2019년 6월 14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조선일보는 이 글을 “궁색한 사과문”이라고 부른다. 누구에 대한 사과문인지는 뒤에서 밝혀질 것이다.) 속에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비밀이 표현되어 있는 것 같다.

안민석입니다.

우리 사회의 큰 잘못이었던 장자연 사건의 진상을 밝혀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고 가해자들을 찾아내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증언자로 자처한 윤지오 증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선한 의도로 윤지오 증인을 도우려 했던 여야 국회의원들이 난처한 입장에 처했습니다. 모두 제 탓입니다. 그분들은 저의 제안으로 선한 뜻으로 윤지오 증인을 도우려 했습니다.

윤지오 증인 국회 간담회에 참석한 의원들은 이후 한차례도 모이지 않았습니다. 증인이 국회의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윤지오 출판기념회는 성직자 한분께서 선의로 도와 달라고 요청하셔서 제가 도와 준것이니 다른 국회의원들과는 상관없음을 밝힙니다. 저 역시 두달 전 출판기념회 이후 윤지오와 접촉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보 기사를 쓴 기자에게 유감을 표합니다.

윤지오 증인을 도운 것이 국민들의 판단을 흐리게 했을만큼 국민들이 어리석지는 않다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평소 공익제보자는 보호되야 한다는 믿음이고 노승일 부장 박창진 사무장 박관천 경정과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서로 도우며 지내고 있습니다. 혹시 모를 피해를 걱정해서 공익제보자들이 내미는 손을 외면하는 비겁한 정치인이 되긴 싫습니다.

앞으로도 그들이 내미는 손을 따뜻하게 잡아 줄것입니다. 정치인의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의정활동 하겠습니다.

“장자연 사건의 진상을 밝혀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고 가해자들을 찾아내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싶었습니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윤지오가 “증언자로 자처”했는가? 아니다. 윤지오를 증언자로 불러들인 것은 대한민국의 국민을 대의하는 정부(법무부)였고 직접적으로는 검찰 과거사조사위원회였다. 이후 국민의 이 부름에 응한 후, 윤지오가 자신이 “유일한 증언자”로 자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보다 잘 알고 있을 사람들이 증언, 즉 진실말하기에 나서지 않고 있는 현실에 대한 유감과 안타까움을 함축한 것이었다. 함께 진실을 말하자는 제안을 담은 것이었다. 안민석은 윤지오가 마치 스스로 “증언자”로 나선 것처럼 표현함으로써, “증언자로 자처하고 신변위협을 과장해 국민을 기망한 사기꾼”으로 몰아 붙이는 가해권력자들의 마녀사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어 안민석은 곧장 “윤지오 증인을 도우려 했던 여야 국회의원들”의 “난처한 입장”에 관심을 돌린다. 그러면서도 지금 가해권력자들의 유도(誘導)에 따라 수천수만의 군중들의 손가락질과 욕설을 한 몸으로 받으면서 죽은 장자연과 성폭력에 고통받는 여성들, 노예계약에 시달리는 연예노동자들, 그리고 권력자들에게 개돼지로 학대당하는 국민들을 대표하여 촛불증언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증언자 윤지오의 고통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짐짓 스스로 윤리적인 체하며 핏발선 눈으로 사람들은 외친다. ’허언증 환자’, ’사기꾼’, ‘탕녀’는 감옥으로, 라고.  로마권력자들의 눈에는 예수도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계속 주장하는 ‘허언증 환자’, ‘미친 사람’이었고 천국이라는 헛소리로 사람들을 “기망”하여 주변에 불러 모으는 “사기꾼”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비난했는가? 심지어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조차 예수를 비난했다. 

왜 십자가의 역사가 교훈이 되지 않고 동일하게 반복될까? 왜 안민석은 “증언자 윤지오”와 동행하겠다고 약속했다가 지금은 윤지오를, “선한 의도”로 그를 도우려 했던 의원들을 난처한 입장에 빠뜨리는 마치 악한 의도를 가진 말썽꾸러기처럼 묘사하는가? 동행하겠다는 약속의 침이 마르기도 전에, 그리고 재판도 열리기 전에 왜 안민석은 가해자들의 안내를 받아 군중이 윤지오에게 덧씌운 범죄자 혐의를 사실로서 묵인해 버리는가? 윤지오의 증언이 어느 것 하나 진실이 아닌 것으로 입증되지 않은 상황에서, 아니 오히려 지금까지 조작되어온 가짜진실을 바로 잡아온 상황에서 왜 그 증언, 공익제보를 외면하는가? 왜 안민석은 “촛불국민이 부른 윤지오”의 증언을 배신하는 유다의 길을 선택하는가? 

물론 안민석도 “모두 제탓”이라고 하며 십자가를 짊어진다. 그 십자가가 누구의 십자가인가? 국민의 십자가인가? 촛불국민의 십자가인가? 아니다. 동료 국회의원들을 위한 십자가일 뿐이다. 여야 가릴 것 없는 동업자 국회의원들의 십자가일 뿐이다. 안민석은 말한다. “장자연 사건의 진상을 밝혀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고 가해자들을 찾아내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싶었”다고. 

윤지오가 위험을 무릅쓰고 증언을 하는 동안 국회의원들은 무얼 했는가? 장자연 사건의 진상을 밝혔는가? 그의 억울한 죽음을 위로할 수 있도록 가해자들을 찾아냈는가? 안민석은 윤지오 증인이 국회의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윤지오와의 동행을 약속한 국회의원들이 “한차례도 모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것이 국회의원의 동행 방식인가?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들이 손놓고 있을 때 국민이고 증언자인 윤지오는 국정감사보다 살벌하고 청문회보다 더 가혹한 신상털이를 당하고 있었다. 오직 힘 없는 네티즌들만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었다. 

국민과 증언자가 도움을 요청할 때에만 도움의 손길을 내밀겠다는 것이 국회의원들이 선의를 표현하는 방식인가? 물에 빠진 자가 살려달라고 외치며 손을 뻗어 구조를 요청하지 않을 때는 방관하겠다는 것이 국회의원들의 윤리학인가? 그 윤리학이, 침몰하는 세월호에서 구조요청이 들려오지 않는다고 손놓고 있었던 해경의 방관과 무엇이 다른가? 촛불국민, 미투여성, 윤지오가 탄 증언의 세월호가 마녀사냥의 암초에 부딪혀 침몰하고 있는 지금 그 배에 동행을 약속했던 국회의원 안민석이 하고 있는 행동이 어떠한가?  해경123정을 타고 기관원들(동료 국회의원들)과 함께 가장 먼저 줄행랑을 친 세월호의 선장의 행동과 무엇이 다른가?

안민석은 말한다. 나의 동료 국회의원들은 윤지오와 “상관없”다고. “저 역시 두달 전 출판기념회 이후 윤지오와 접촉하지 않았다.”라고. 나의 몸은 “나병”에 옮지 않은 깨끗한 몸이라고. …. 자신의 결백을 믿어달라는 이 사정의 말은 누가 들으라고 하는 것인가? 촛불국민들에게 하는 말인가? 미투여성들에게 하는 말인가? 증언자 윤지오에게 하는 말인가?  ‘호형호제’하며 지내는 공익제보자들에게 하는 말인가?

국민들은 ‘나의 결백을 믿어달라’는 안민석의 당부의 말이 촛불국민, 미투여성, 증언자 윤지오, 공익제보자 들보다는 조선일보와 장자연 사건 가해권력자들의 귀에 들리도록 하는 말임을 모를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또 국민들은 안민석이 조선일보를 비롯한 권력자들 앞에서 무릎꿇고 비는 모습에 상황판단이 흐려질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공익제보자들이 내미는 손을 외면하는 비겁한 정치인이 되긴 싫”어서 앞으로 “그들이 내미는 손”을 따뜻하게 잡아줄 그 손이 공익제보자들을 결정적으로 범죄자로 만들 수 있는 함정일 수 있다는 것을, 이번 경험을 겪고도, 모를 만큼 국민들이 어리석지는 않다. 그리고 조선일보와 장자연 사건 가해권력이 국민의 대표들에 대한 집요한 대인공격을 통해 그 대표들이 국민을 배반하고 자신들 앞에 무릎 꿇게 함으로써 국가권력의 비선실세가 되고 있다는 것을 모를 만큼 어리석지도 않다. 

가해권력자들의 입 TV조선이 ‘탐사보도 세븐’에서 증언자 윤지오를 음해하는 정치적 이유

요점: 1. 윤지오는 장자연이 남긴 글이 유서가 아니라 문건임을 밝혔다. 2. 장자연이 남긴 글이 유서가 아니고 문건이라면 장자연의 죽음은 원점에서 재수사되어야 한다. 3. 장자연의 글을 유서라고 보게 만들어 국민을 속이고 이로부터 이익을 편취해온 가해권력자들이 증언자 윤지오에 대한 음해공작을 시작했다. 4.그럼에도 윤지오는 장자연 죽음의 진실을 직접 국민들께 알리기 위해 책으로, 인터뷰로 증언을 이어갔다. 5. 윤지오를 사기꾼으로 만들기 위한 음해공작이 시작된 후 정치권은 윤지오를 음해하는 세력과 그 음해를 방조하는 세력으로 구분될 뿐이다. 6. 이 음해공작을 깨뜨릴 조직된 저항세력이 없는 한 가해권력자들은 윤지오 음해를 향후 총선과 대선의 주요 이슈로 밀고 나갈 것이다. 7. 윤지오의 증언을 지켜서 장자연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규명할 시민들의 아래로부터의 직접행동이 절실한 시간이다. 8. 미투시민행동의 페미시국광장은 그 첫걸음일 수 있다.  

  • 2009년 3월 7일 직후의 첫 언론보도(사실은, 조작)로 인해 국민 대다수는 지난 10년간 장자연이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것으로 오인하게 되었다. 2009년 3월 10일, 노컷 뉴스의 기자 김대오 기자, 조선일보의 기자 박은주가 호야엔터테인먼트의 대표 유장호와 합작하여 만들어낸 이미지가 장자연이 유서를 남겼다는 가짜-이미지다. 김대오는 장자연 문건을 “유서성격의 심경고백글”이라고 보도했고 박은주는 사망하기 직전 남긴 “장문의 글”(“유서’의 사전적 의미가 바로 죽기 전에 남긴 글이다)이라고 보도했다. 김대오는 제2보에서 그 글이 “혹시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가지고 있어달라”고 장자연이 부탁해서 보관하고 있었던 글이라는 유장호(‘장자연의 한 측근’)의 말을 아무런 검증 없이 그대로 인용보도함으로써 그 글이 유서임을 의심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 하지만 장자연의 문건을 실제로 본 경찰, 검찰, 법관은 그것이 유서가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언론이 대중을 대상으로 꾸며낸 이 가짜 이미지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하지는 않았다. 왜 그랬을까? 국민으로 하여금 유서라고 오인하게 하는 것이, 또 그 오인을 방치하는 것이 가해권력을 무혐의로 만드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자연의 죽음이 자살이 아닐 가능성은 배제되는 것이며 이렇게 됨으로써 그 죽음에 연루되었을 수 있는 다층다양한 가해권력들이 샅샅이 노출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이것은 언론권력, 경찰권력, 검찰권력, 사법권력이 계약직 연예노동자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국민을 기망하는 연합된 사기권력으로 행동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알고 있으면서” 국민을 속이는 고의적인 국민 기망의 권력이었다. 이 권력은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도 않고 통제되지도 않는 권력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국민들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가장 큰 관심을 갖고 감시해야 할 것은 이들 권력들이 국민들을 속일 위험이라는 문제이며 국민의 안전이라는 시각에서 그 위험을 통제할 장치를 실제적으로 고안하는 문제다.
  • 윤지오는 장자연이 남긴 글이 유서가 아니라 문건임을 증언한 유일한 증언자이고 그 문건에 ‘명단’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일관되게 증언해온 유일한 증언자이다. 시민사회는 몰랐지만 장자연이 남긴 글이 유서가 아니라 증언조서(문건)라는 것은 법정에서는 공인된 사실이었으며 이상호가 재판과정에 대한 취재를 통해 대중 앞에 드러낸 사실이고, 심지어 장자연이 남긴 글을 ‘유서성격의 심경고백’이라고 보도했던 김대오도 [아무런 이유설명도 사과도 없이 말을 바꿔] 인정한 사실이다. 
  • 윤지오의 <13번째 증언>과 언론 인터뷰 이후 한국 국민들 중에 장자연의 글이 문건이 아니라 유서라고 우기는 사람은 더 이상 없게 되었다. 장자연이 유서를 남기지 않았다는 것, 즉 장자연의 글이 유서가 아니라는 것은 장자연의 죽음을 자살로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음을 의미한다. 또 그 글이 유서가 아니라 문건이라면 장자연이 그 문건을 왜, 어떤 정황 속에서 작성하게 되었는지 명백한 조사가 필요하며 국민들에게 그것들이 설명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토록 오랫동안 왜 국민들이 장자연이 남긴 글이 유서라고 잘못 알게 되었는지, 왜 국민들이 그토록 장기적인 오해무지 속에 방치되어 왔는지 조사되고 규명되어야 하며 진실을 은폐한 책임자를 찾아내 문책해야 함을 의미한다. 
  • 윤지오의 증언으로 인해 분명해진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 지난 10년여 동안 가해권력자들을 무혐의로 풀어주는 데에 봉사해온 언론, 경찰, 검찰에 의해 기망(欺罔) 당했으며 그 이득을 편취(騙取)한 것은 가해권력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국민을 대신해서 수사를 맡아온 사람들과 기관들은 장자연의 글이 유서가 아니라 문건이라는 관점에서 국민들에게 장자연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해내야 하며 그 관점에서 범죄행위자를 다시 조사해서 처벌을 해야 한다. 이것이 2019년 3월 18일 문재인 대통령이 장자연, 김학의 버닝썬 사건에 대한 철저한 수사 및 엄정한 처리를 지시하게 된 조건이다.
  • 윤지오의 증언은 바로 이런 맥락 속에 놓여 있다. 그는 증언을 통해 대한민국 수사기관과 사법기관에 진실을 알리고 처벌을 촉구했다. 그는 2018년 말 조희천 성추행 사건에 대해 증언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증언들에 힘을 실어 실제적 처벌로 이어지도록 만들기 위해 2019년 3월에는 다칠 위험을 무릅쓰고 얼굴과 실명을 공개하기까지 했다. 
  • 그가 공개적으로 책을 내고 방송 인터뷰에 응한 이유는 무엇인가? 자신이 진실을 증언해도 진실이 국민들께 전달되지 않는 것을 10년 내내 경험했기 때문이다. 국민이 가해자를 비호하는 권력기관들에 의해 철저히 기망 당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언론, 경찰, 검찰 당당자들이 사실을(장자연이 남긴 글이 유서가 아니라 법정투쟁용 문건, 즉 증언조서임을) 알고 있으면서 국민들에게는 그것을 숨기고 수사를 부실하게 할 뿐만 아니라 가해권력자들을 무혐의 처분하는 것을 보고 겪었기 때문이다. 사건을 취급하는 조사/수사기관과 국민 사이의 이 간극 속에서 국민들이 조작된 무지 상태에 방치되고 허구가 진실을 대체하는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국민의 힘으로 장자연 사건이 재조사 대상으로 오른 것(“이슈화”)을 이용하여 허구가 가려버린 진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 그는 이를 위해 2018~9년에는 과거사진상조사단의 조사에 적극적으로 협력했고 이와 별도로 조사나 수사기관의 매개를 거치지 않고 국민들께 직접 사실을 널리 알려서 국민으로 가해자들을 처벌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랐다. 이것이 지난 10년간 계속된 그의 증언경험을 토대로, 국민의 힘으로 부패한 권력을 탄핵-파면하고 이어 권력형 성범죄자들을 단죄해온 촛불과 미투의 경험을 자기성찰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그의 방식이었다. 그는 이것을 “이슈를 이용하여” “지금까지 해 보지 못했던 것을 영리하게 해 보려한다”는 말로 표현했는데 이 ‘영리한 행동’이라는 계획은 내가 <절대민주주의>(2017)에서 ‘국가권력에 대한 다중의 절대민주주의적 섭정(攝政)’이라고 불러온 것, 즉 아래로부터 민주주의를 절대화하는 삶정치적 운동과 상통하는 구상이다.
  • 일정기간 동안 이 영리한 섭정의 행동은 국민들의 지지 속에서 성공적으로 전개되었다. 하지만 청원행동에 나선 국민들은 아직 스스로를 수평적으로 조직화한 연합세력이 아니었고 흩어져 있으면서 그때그때의 상황과 역관계에 반응하는 흩어진 개인들이고 언론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여론적 존재였다. 일부 여성단체들과의 협력이 있었지만 일시적 협력이었고 윤지오는 개인인 증언자로서 움직였다. 
  • 아래로부터의 섭정력이 충분히 자기조직화되지 못한 상태에서 윤지오의 증언행동과 그에 대한 시민연합은 SNS, 유튜브와 같은 기업적 소셜네트워크에 의지하고 있었다. 녹색당과 같은 원외정당, 정의연대와 같은 일부의 시민단체를 제외하면 증언을 통해 제기되는 이슈를 사회적 의제로 전환시킬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했다. 윤지오의 증언이 첨예한 것에 비해 그것을 뒷받침하고 사회이슈로 전환시킬 수 있는 조직화 역량이 미약한 상태였기 때문에 시민들은 개인으로서 국민청원을 통해 과거사위원회 조사기간 연장을 청원하거나 윤지오 증언자에 대한 신변보호를 요청하거나 경호를 위한 후원금을 제공하는 것 이상의 행동적 연대를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 이런 상황에서 윤지오에 대한 보호를 자처하고 나선 것은 안민석을 비롯한 몇몇 국회의원들(이른바 ‘동행모임’)이었다. 지금 수개월에 걸쳐 점점 규모를 키워가며 지속되고 있는 ‘사기꾼 만들기’ 집단음해공작의 강도에서 반증되다시피, 윤지오의 증언행동은 상당한 위험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보호가 필요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지만 이 국회의원들이 윤지오에 대한 실질적 보호조치를 했는지, 그 보호조치가 아래로부터 시민사회의 연대력의 취약성을 보완하는 힘을 발휘했는지는 의문이다. 
  • 안민석이 페이스북에서 스스로 밝혔듯이 4월 8일 윤지오 국회초청간담회를 가진 이후 이들은 윤지오를 보호하기 위한 어떤 실질적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며 ‘동행모임’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서로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은 국회의원으로서 플러스가 될 수 있는 ‘공익제보자를 돕는다’는 이미지를 챙겼음에도 불구하고 4월 중순 이후 윤지오에게 실질적인 음해시도가 시작되고 위험이 분명해졌을 때에는 사실상 어떤 보호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이들은 수수방관했으며 자신들에게 미칠 악영향을 계산하고 자신들을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거의 동시에, 윤지오에게 우호적이었고 또 윤지오를 통해 구독자를 늘렸던 고발뉴스, 뉴스공장 등의 유튜브들도 윤지오에 대한 가해권력측의 공세가 뚜렷해진 4월 말 이후로는 윤지오와의 관계를 청산했다. 
  • 윤지오가 국민의 부름을 받아 과거사진상조사단에서 증언을 하고 여성단체와 연대하여 세종문화회관에서 발언을 했을 때 그는 비록 단단하게 자기조직화된 시민들의 지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전국민적 여론의 보호를 받았다. 하지만 윤지오가 보호자를 자처한 동행자 국회의원들과 연결되자마자 윤지오는 정파투쟁과 정권투쟁의 회오리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보수 정파와 보수 언론이 빠르게 결집하여 증언자 윤지오를 반(反)정권투쟁의 초점으로 삼기 시작했을 때 동행자를 자처한 세력들은 신속하게 증언자 윤지오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 그것이 혹자가 조롱조로 말하듯이 윤지오가, 현 집권세력에게 기대하는 바의 큰 정치이슈를 갖다 주지 못한 탓일까? 내가 보기에 그 이유는 윤지오가 제기하는 문제들(조선일보 방씨 일가, 의문사와 타살 가능성, 국정원의 개입, 홍준표, 마약주입과 성폭행 의혹 등)이 현 집권세력으로서는 다루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 문제를 원칙적으로 다루어 나간다면 현 집권세력 자신도 그 일부로 속해 있는 가부장제 성폭력 질서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무렵 여성주의 이슈가 문재인 정권에 대한 남성 20대의 지지율을 떨어뜨린다는 보고서까지 제출되면서 이것이, 장자연-윤지오를 둘러싼 쟁점에서, 집권세력이 남성 20대 지지율을 높이고 총선에서 표를 얻기 위해 물러나는 쪽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쟁점은 본질적으로 가부장제 성권력 체제와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미디어스>의 전혁수 기자가 잘 정리한 것처럼, 지금까지 장자연 사건에 대한 가해자로 지목되어 지탄 받아온 조선일보는, 윤지오에 대한 성폭력적이고 인권말살적인 융단폭격을 퍼부은지 약 2개월여에 만에, 이제 자신을 (가해자가 아니라) ‘사기꾼 윤지오’를 단죄하고 사기꾼을 방조한 정치인들을 꾸짖는 정의의 언론으로 내세우기 시작한다. 6월 14일 안민석의 비굴한 페이스북 항복 문서는 이러한 전환점을 보여준다. ‘정권을 창출하기도 하고 퇴출시키기도 한다’는 조선일보의 위력은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어내고 피해 조력자에게 비겁한 변명을 하게 만들면서 자신을 정의의 투사처럼 우뚝 세우는 교활한 정치공작술을 통해 다시 한 번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 <탐사보도 세븐> 2019년 7월 19일자 ‘누가 윤지오에게 놀아났는가?’는 이 정치공작술의 연속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종합판본이다. SBS의 ‘궁금한 이야기 Y’가 윤지오를 거짓말쟁이, 사기꾼으로 만들기 위한 편집노하우를 보여주었다면, ‘탐사보도 세븐’은 <Y>가 만들어낸 이미지를 기초로 집권여당계 정치인들이 윤지오에게 이용당할(“놀아날”) 만큼 어리석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편집노하우를 보여준다. 10년 동안 경찰과 검찰이, 장자연의 글이 유서가 아니라 문건(증언조서)이라는 것을 국민 몰래 알고 있었듯이, 지금 조선일보나 SBS도 국민 몰래 윤지오가 사기꾼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고 나는 본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윤지오를 포함한 83명에 대해 포괄적 조사를 수행했던 과거사진상조사단처럼, 폭넓은 취재력을 통해 팩트를 알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언론이 팩트를 말하는 기관이 아니라 팩트를 편집하는 기관이고 진실을 말하는 기관이 아니라 대중이 소비할 진실을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내는 기관이라는 점에 있다.
  • 교활한 ‘사기꾼’에게 이용당하는 무능한 권력은 존재이유가 없다는 메시지를 통해 정권교체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이 <세븐>의 기획의도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세븐>은 윤지오에 대한 음해를 집권권력에 대한 공격의 수단으로 삼는다. 윤지오를 둘러싼 내기판이 점점 커져 가고 있다. 조선일보와 자유한국당이 무고한 시민이자 장자연 사건의 피해자이고 또 장자연 사건의 증언자인 윤지오를 총선을 앞두고 정쟁의 볼모로 이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세븐>의  진행자 유오성의 형인 유상범이 서울중앙지방검찰청 3차장검사로 재직할 당시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 수사를 지휘했고 이 사건으로 인해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직후인 2017년 7월 법무연수원 연구위원으로 좌천되었다는 것도 이 프로그램의 이러한 정치적 배경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여러 요소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 ’거짓 증언자 윤지오’, ’사기꾼 윤지오’라는 구호는 조선일보를 비롯한 가해권력들이 이런 정치적 이유에서 만들어낸 날조된 구호이다. 이들은 총선에서의 다수당화와 차기 집권을 위해 이 구호를 향후 수 년 간 밀고 나가려 할 것이다. 젠더 입장에서나 계급 입장에서 여성-계약직-연예-노동자였던 윤지오나 장자연보다는 오히려 가해권력과 더 큰 공통점을 가진 현 집권세력은 윤지오를 방어하고 증언자 윤지오와 함께 고 장자연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재수사와 가해자 및 책임자 처벌을 위해 싸워나갈 어떤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 이미 이들은 이 사건을 (바둑에서의) ’내준 집’으로 간주하고 정치적 악영향의 최소화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 고 장자연 사건을 규명할 힘은 다시 아래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지난 7월 8일 350여개 여성단체들이 미투운동과함께하는시민행동(미투시민행동)을 조직하고 고 장자연 사건과 김학의 사건, 버닝썬 사건을 통해 드러난 경찰과 검찰의 행태를 규탄하고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매주 금요일 서울 광화문에서 ‘페미시국광장’을 무기한 열기로 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시사적이다. 첫 집회는 7월 12일 저녁 7시 동화면세점 앞에서 열렸는데 이들은 장자연 사건과 관련하여 조선일보를 적폐언론으로 규정하고 조선일보의 폐간을 주장했다. 여기에서 이들은 “검경 개혁, 여자들이 하자”고 외치기도 했다. 이들이 시작한 싸움에 여성들이 얼마나 결합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지만 남자들이 얼마나 결합하는가는 이 싸움의 승패를 결정짓는 관건이 될 것이다.
  • 한마디 덧붙이자면 나는 절대민주주의적 섭정론에 따라, 국민에게 제대로 “이용당하는” 정부, 국민에게 “놀아나는” 정부를 원한다. 지금까지 너무 많은 정부들이 국민들을 개돼지로 무시하면서 재벌에게, 미국에게, 일본에게 “놀아났다”. 조선일보, 티비조선 같은 가해권력들이 (지금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 사태에서 나타나듯이) 그러한 반국민적 매판정부를 창출해 왔고 자신들의 의사에 반해 국민에게 “놀아나는” 정부가 들어서면 그것을 퇴출시키는 데 온 힘을 쏟아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 윤지오에게 놀아났는가?”라는 비난성 질문은 정부가 국민을 위하지 말고 재벌, 미국, 일본을 위하라는 언론권력의 반동적이고 매판적인 명령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