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으로 중요한 범죄” 개념의 가해자중심주의적 전도

2009년 대한민국 경찰은 사회적 파장이 크고 수사 요구가 높았던 장자연 사건 가해권력의 “사회적으로 중요한 범죄” 혐의를 ‘적색수배’하기는커녕 부실한 조사로 덮어 버렸다. 2018년부터 시작된 과거사 재조사조차도 용두사미로 끝나버렸다. 대통령의 엄정조사 지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과거사조사위원회의 심의결과가 보여주는 대한민국 수사기관(검경)의 적나라한 실태가 이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경찰은 과거사조사위원회 심의결과가 발표된 지 경우 반 년 만에, 마치 심기일전(心機一轉)이라도 한 듯이, 바로 그 “사회적으로 중요한 범죄”에 대해 증언한 증언자를 도리어 “사회적으로 중요한 범죄”의 혐의자로 적색수배 요청하고 ‘엄정수사’를 다짐하고 있다. 가해자가 처벌되지 않으면 피해자가 2차, 3차, n차 가해에 노출된다는 것을 이보다 여실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 

도대체 증언자 윤지오에게 씌워진 ‘사회적으로 중요한 범죄’ 혐의들이 무엇인가? 경찰에 따르면 그것은 ‘사기와 명예훼손’이다. “명예훼손과 사기 혐의 모두 인터폴 자체의 적색수배 요건인 2년 이상 징역에 포함되는 범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윤지오에게 씌워진 사기와 명예훼손 혐의가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가리키는가? 그리고 그 행동의 범죄화를 통해 사법권력이 사람들에게 던지고자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첫째 사기 혐의에 대해 생각해 보자. “당신은 증언하는 동안에 혹은 그 이후에 신변위협이 있었다고 말했고 당신의 지지자들로부터 경호비와 비영리단체 지상의 빛 후원금으로 1억 3천여 만 원의 돈을 모금했다.”가 그 혐의의 지시내용이다. 이것이 범죄혐의라는 주장은 무엇을 함의하는가? 당신이 증언자라면, 기자가 당신의  소재지를 추적하며 가해자 입장에서의 질문을 퍼붓더라도,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하더라도, 그런 것을 대중 앞에서 발설하면 안 된다. 국가가 당신을 증언자로 불렀더라도 증언자를 보호해 달라고 국가에 요구해서도 안 된다. 증언자에게 닥쳐오는 신변위협과 고통을 달게 받아 들여라. 권력형 성폭력에 대한 증언을 지지하고 격려하며 연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경호비를 보내겠다고 아우성을 치더라도 결코 계좌번호를 알려주어서는 안 된다. 계좌번호를 공개해서 그곳으로 후원금이 입금되면 후원자를 기망하여 재물을 편취한 죄, 즉 사기죄로 단죄될 수 있다. 혹시 그렇게 당신에 대한 연대의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계좌번호를 알려주어서 증언을 위한 경호비로 사용하여 신변안전을 도모하라고 조언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그의 말을 의심하라. 당신을 지지한다, 돕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을 믿지 마라. 증언에 대한 지지자가 당신의 적으로 돌변할 수 있다. 당신에게 경호비를 후원한 사람이 후원금반환소송을 제기하여 당신의 사기혐의를 뒷받침할 증인으로 나설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들은 원금 외에 고리대를 요구하는 사채업자처럼 돌변할 수 있도 있다. 후원회비로 운영되는 비영리단체를 만들어 증언자를 보호하려는 노력 같은 것은 하지 말라. 증언자 피해자 목격자가 겪는 고통에 무관심하라. 그들의 어려움을 외면하라. 당신이 그들을 돕겠다고 나서면서 후원회비를 모집하게 되면 언제든지 그것이 기부금품법 위반의 대상으로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무엇보다도 권력자들에 대한 증언을 하겠다고 나서지 말라. 그들이 성추행을 하건 성폭행을 하건 오직 방관하라. 그것에 대한 증언은 언제든지 ‘사회적 중요범죄’로 지목될 수 있다. 권력자들 앞에서 침묵하라. 그들에게 굴종하라. 그것이 신변위협을 받지 않고 당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길이며 적색수배를 피할 수 있는 길이다.

둘째 명예훼손 혐의에 대해 생각해 보자. 당신은 김수민 작가를 ‘이수역 사건 2차 가해자’라고 말하여 그의 명예를 훼손했다.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대한민국에서는 인물을 특정하여 제3자가 들을 수 있는 공연성의 환경에서 그를 비난하면 명예훼손이 된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사회에 너무나 흔한 사건으로서 ‘사회적 중요범죄’로 보기는 어렵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구준표와 이름이 같은 정치인’을 장자연 리스트에서 보았다고 말한 것이다. 당신이 과거사진상조사단에서 증언한 후 홍준표 의원은 과거사진상조사단의 검사로부터 장자연 리스트에 이름이 있었다는 진술이 있으니 조사를 받으러 나오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즉각 당신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했다. 홍준표 의원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인물이고 그가 당신을 범죄 혐의로 고발했다는 것은 당신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범죄’ 혐의가 있음을 보여준다. 당신이 설령 장자연 리스트에서 ‘홍준표’라는 이름을 보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과거사진상조사단에서 말해서는 안 되었다. 그 이름을 우회적 방법으로라도 시민단체에서 말해서는 안 되었다. 권력자들은 그것을 자신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받아들이며 사법적 보복을 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해도 범죄가 될 수 있다. 권력자들의 탈법이나 부패에 대한 증언은 언제든지 명예훼손이나 무고로 단죄될 수 있음을 명심하라. 침묵하라, 침묵하라, 침묵하라! 

이렇게 ‘사회적 중요범죄’로 규정된 두 가지 혐의는 가해권력자들의 불의에 대해 증언을 하지 않도록, 침묵하도록 만드는 효과를 가져 온다. 가해권력자들에 대한 증언이 명예훼손죄로 제소될 수 있으며 후원금 모금을 통해 가해권력자들의 보복으로부터 증언자의 신체를 방어하기 위한 노력은 사기죄로 제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정의 실현의 노력이 사법에 의해 부정의로, 범죄로 정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변호사, 기자, 작가와 같은 전문가들, 신문사, 방송사, 통신사 같은 언론사들, SNS 계정주 같은 시민사회 행위자들만이 아니라 경찰, 검찰, 법원, 정당, 그리고 국회의원 같은 국가권력의 기구들이 가해권력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 즉 ‘증언자의 범죄화’를 위한 총력전을 전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맥락에서 보면 “경찰청 자체 기준에 비춰 봐도 윤씨 사건이 사회적 파장이 크고, 수사 요구가 높은 사안인 만큼 중요사범으로 볼 수 있다”는 경찰관계자의 설명은 증언자의 고립과 범죄화를 위해 가해권력이 주도하는 이러한 전 사회적 총력전의 하나의 전술단위처럼 들린다. 왜 이렇게 들리는 것일까? 

촛불시민들은 윤지오가 증언한 권력형 성폭력 범죄 혐의를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으로 보고 그것에 대한 수사와 재수사 요구를 높이 제기했다. 그런데 경찰은 지난 10년간 이 요구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행동했다. 그 결과가 2009년 KBS의 장자연 문건 보도 이후의 수사에서 성범죄를 비롯한 다양한 범죄 혐의의 대상으로 떠올랐던 가해권력자들이 무혐의 처분된 것이고 2018년에 재개된 과거사 재조사가 혐의자들에 대한 재수사로 연결되지 않게 된 것이다. 촛불시민의 요구와 정반대되는 방향에서 가해권력자들은 윤지오가 행한 증언 자체와 그에 따른 부대 행위들(후원금, 숙소제공 등)을 ‘사회적 파장이 큰’ 범죄 혐의로 정죄하면서 지난 수 개월간 그에 대한 수사 요구를 ‘높이’ 제기해 왔다. 그 결과가 윤지오에게 열 가지 이상의 고소고발장이 날아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앞서 언급한 경찰관계자는 정확히 가해권력자들과 동일한 입장과 방향에서 윤지오의 증언행위를 바라보면서 그것을 범죄화하라는 가해권력자들의 시각과 요구를 고스란히 ‘경찰청 자체’의 시각과 요구로 대변하고 있다. 요컨대 경찰 관계자가 말하는 범죄 혐의의 ‘사회적 중요성’ 평가가 촛불시민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가해권력자들의 입장에서 내려지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실혐오 극장의 등장

윤지오가 ‘숨어 살기’를 거부하고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기로 결심한 진짜 이유_에필로그

검찰 과거사조사위원회 활동기간이 2주 남은 때인 3월 15일 오전 10시 30분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는 한국여성의전화·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전국연대 등의 여성단체가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등에 의한 성폭력 사건 및 고 장자연씨 사건 진상규명촉구’ 기자회견을 열었고 윤지오도 이 자리에 참석해 발언했다. 그런데 여기서 윤지오의 발언은 기존의 통념이나 보도기조와 사뭇 결이 다르다. 대부분의 언론들이 이 발언의 기조를 ‘진상규명 요구’라고 보도했지만 아래의 녹취록이 보여주는 것은 그 ‘진상규명 요구’가 직접 ‘가해자에 대한 처벌 요구’와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준다.(명확하게 들리지 않아 추정으로 삽입한 부분, 보충이 필요한 부분, 발언실수로 보여 바로잡은 부분은 [ ]로 표시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유일한 목격자가 아닌 유일한 증언자 윤지오입니다.

제가 대중[앞에 보다] 더 많은 매체와 인터뷰를 무리해서까지 응하고 있는 것은 사실을 전하고 싶고 여러분들도아셔야할권리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분명 가해자가 단 한 번이라도 보셨으면 했고, 꼭 보셔야 할 것이라고, 그 분들 보시라고 인터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하게 해 드리[는] 인터뷰를 할 수 밖에 없어서 너무 죄송한 마음입니다.

또 언론이 [다른 타겟을 덮는 현상은] 저와 같이 체감하셨으리라고 보고 여러분의노력으로 나약한 제가 아직 어리다고 할 수 있는 나이에 이렇게 멀리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단순 자살이 아니라고 보고 수사가 들어간다면 공소시효가 10년이 아닌 25년으로 변경되어 집니다.

공소시효란 어떤 범죄가 일어났을 때, 일정기간이 지나서까지 범인이 잡히지 않으면 형벌권이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범죄종류에 따라 그 기간이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시점으로부터 10년에서 25년에 달하는데 정해진 공소시효 기간이  지나버리면 증거가 있다고 해도 벌을 줄 수 없습니다.

2007년 [12월 21일]에 살인죄를 범한 범인[에 대해] 공소시효를 15년에서 25년으로 10년 늘렸습니다.

그런데 2007년 [12월 20일]이전에 일어난 사건들의 공소시효가 그대로 15년입니다.

이슈가 이슈를 덮는 정황을 많은 분들이 실감했을 테고 [이제] 이러한 불상사가 더 이상 되풀이 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거대한 [골리앗]을 쓰러뜨릴 수 있는 용기를주신국민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버틸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윤지오는 사건의 중요 쟁점과 관련해 자신이 유일한 목격자가 아니라는 것, 즉 목격자는 자신 이외에도 있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그 목격자들이 진상규명에서 증거가 될 만한 말을 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아서 자신을 [현재로서는] ‘유일한 증언자’로 칭한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권력형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에 대해 증언한다는 것이 권력의 위협에, 그리고 증언자를 향한 2차, 3차 가해에 대상으로 노출될 수 있는 행동이라는 사실이다. 가해자들의 추가 가해의 방식은 일정하게 정형화되어 있지만 그것의 수준은 예측불허이다.

윤지오는 자신이 인터뷰를 하면서 두 가지 청중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하나는 국민들이다. 국민들이 사실을 알 권리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국민들께 사실을 전한다는 것이다. 윤지오가 고려하고 있는 또 하나의 특이한 청중이 있는데 그것은 가해자들이다. 윤지오는 가해자들에게, 그들이 자신의 인터뷰를 보았으면 하는 희망만이 아니라 보아야 한다는 명령을 전달한다. 가책(苛責)을 기대했기 때문일까? 만약 이것이 가책에 대한 기대를 표명한 것이라면 윤지오가 처벌적 정의에 앞서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를 추구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가해자들이 가책을 받고 자책하여 피해자가 입은 피해를 회복하기 위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공동체적 관계를 회복하는 방향의 정의에 기대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대목은 윤지오의 태도가 그러한 회복적 정의의 추구와는 다르거나 최소한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3월 15일의 발언에서 윤지오는 지금까지 장자연 사건과 관련하여 그 어느 누구도 주장하지 않았던 것을 주장한다. 그것은 장자연 사건의 가능한 공소시효가 10년이 아니라 25년일 수 있다는 주장이며 원점에서의 재수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조희천 성추행 사건 외에는 공소시효가 다했기 때문에 장자연 사건은 과거사일 뿐 본질적으로 재수사할 사건이 아니라는 검찰 과거사조사위 측의 주된 기류에 반하는 주장이다. 윤지오는 범죄를 저질렀다면 처벌되어야 한다는 ‘처벌적 정의’의 관점에서 지금도 재수사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한다. 공소시효 만료된 사건을 어떻게 재수사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사건을 단순 자살이 아니라고 보고 수사가 들어간다면” 가능하다는 것이 윤지오의 주장이다. 그렇게 되면 “공소시효가 10년이 아닌 25년으로 변경되어”지고 공소시효가 아직 15년이나 남게 되기 때문이다.(참고로, 2015년 7월 24일 대한민국에서도 살인죄에 대한 공소시효는 폐지되었다.)

장자연의 죽음을 의문사로 바라보면서 수사기관에 재수사를 요청하는 윤지오의 문제제기는 몇 가지 근거들을 갖고 있다. 이 근거들에 대해서는 “살인 혐의 수사는 왜 고려조차 되지 않았는가?”(http://amelano.net/?p=673)에서 이미 다루었으므로 여기서 나는 뒤로 돌아가지 않고 이 문제제기가 증언자 윤지오에게 미친 영향에 관심을 집중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윤지오가 3월 15일에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전 국민과 가해자들에게 호소하면서 국가를 향해서는 장자연의 죽음을 단순자살이 아닌 시각에서, 즉 살인의 시각에서 수사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 윤지오의 증언행보에 가져온 반발력에 주목하고자 한다.

윤지오의 요청은 장자연 사건에 대한 지금까지의 굳어진 통념을 깨뜨리는 시각이었다. 이 무렵, 대한민국 국민들의 상당 부분(경찰과 검찰 등 수사자료에 접할 수 있었고 장자연이 남긴 문건이 유서가 아님을 알고 있었던, 하지만 그것이 유서로 인식되도록 조장하고 방치했던 수사기관은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은 장자연이 우울증으로 시달리다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는 것을 믿고 있던 상황이었다. 

윤지오는 하루 전인 3월 14일 고발뉴스에서, 유서라고 알려진 그것이 실제로는 유서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 한 바 있다. 이날 그는, 장자연이 유장호의 요구에 따라 권력자들의 성폭력 범죄를 고발하는 문건과 리스트를 작성한 후, 그 문건과 리스트가 자신의 의지를 벗어나 유통되는 당황스런 상황을 맞이 했을 뿐만 아니라, 며칠 후 유서조차 없는 채 주검으로 발견되었고, 그 주검은 부검도 없이 화장되었으며 유장호, 경찰들, 그리고 기자들이 누가봐도 유서가 아닌 그 문건과 리스트를 유서로 만들어 공표한 사실을 상기할 것을 요구했다. 이런 근거 위에서 3월 15일에 그는, 장자연의 죽음의 진상이 처음부터 조작된 것으로 보이므로 수사기관이 진상규명을 위해 단순자살이 아니라 살인의 관점에서 재수사해줄 것을 정식으로 요구하면서 아직 처벌가능한 시효 즉 공소시효가 남았음을 언급한 것이다. 

이 요구는, 한국 사회의 적어도 세 유형의 세력에게, 응답하지 않으면 안 될문제를 던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 세 가지 세력이 누구일까?

첫째는 혹시 이 의문의 죽음에 대한 재수사를 통해 그 범죄행위가 드러나게 될 지도 모를 어떤 살인 가해자이다. 실제로 그러한 살인 가해자가 숨어 있었고 윤지오의 발언을 들었다면 필사적으로 상황을 반전시키려 노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을 ‘직접적 가해권력’이라고 불러 보자.

둘째는 장자연의 죽음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 데 책임이 있는 경찰과 검찰, 즉 행정권력이다. 경찰은 초동 수사에서 장자연의 죽음을 단순자살로 처리했고, 검찰은 김종승과 유장호에게 경미한 형벌을 준 것 외에 장자연의 죽음과 관련하여 중대한 혐의를 받고 있던 대부분의 인물들을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했기 때문이다. 이 주체들 역시 지난 10년의 행적이 직접적 가해권력을 비호한 것으로 의심되고 재수사의 칼날이 자신들에게 향함으로써 자신들이 실제로 문책 당할 수 있는 상황의 도래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셋째는 장자연 문건에 이름이 등장하며 장자연 사건을 한 연예인의 불행한 자살사건으로 보게 만드는 사회적 인지프레임의 형성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주체, 즉 조선일보 같은 언론권력이다. 이미 수사과정에서 황제조사, 증거인멸, 위장증언, 수사혼선, 수사외압, 거짓보도 등을 행하면서 자신의 보존에 급급했던 이 언론권력이 살인 관점에서 재수사가 재개될 수 있는 상황을 방치할 리는 만무할 것이다. 

증언자 윤지오에 대한 검증의 목소리가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이며 그 검증몰이는 ‘윤지오 사기꾼 만들기’로 발전했다. 이어 긴 시간에 걸쳐 증언자의 인성, 도덕성, 행실, 사생활 문제에 대한 아주 전형적인 인신공격이 쏟아졌다. 장자연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처벌적 정의의 관념에 따라 윤지오가 행한 증언행동이 맞닥뜨린 철벽이 이것이다. 그런데 그 철벽은 가변적으로 움직이는 트랜스포머형 철벽이었다. 윤지오는 적어도 이때까지는 국민들로부터 용기를 얻고 국민과 함께 “멀리까지” 왔다. 하지만 단순자살이 아니라는 시각에서 재수사해 줄 것을 눈물로 호소한 다음부터, 윤지오와 국민을 이간시키는 전문가-기계, 언론-기계, 유튜브-기계 등이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가동되었고 윤지오로부터 국민들을 하나하나 분리시켰다. 이것들은 가해자들을 시야 바깥 안전지대로 은폐하면서 피해자이기도 한 여성 증언자의 사생활을 들춰내어 조롱하는 센세이셔널한 3류극장 속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그 무대에 올려진 윤지오는 천하에 둘도 없는 ‘사기꾼’의 형상으로 모질게 그려진다. 가부장제 성폭력 극장에서 성폭력의 피해자인 서지현과 김지은을 ‘꽃뱀’의 형상으로 그렸듯이 말이다. 이 극장은 가해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들을 처벌되어야 할 자로 그리는 책임전가의 극장이고 젊은 여성은 믿을 수 없고 오직 이용될 수 있을 뿐이라고 가르치는 성차별의 극장이며 더 이상 증언은 불가능하다고 명령하는 진실혐오진실종말의 극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