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여 공통장(gift commons)의 등장

윤지오의 신한은행 통장의 삶정치적 성격에 대한 논고

‘증언’은 ‘진실을 밝히는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증언은 과학, 예술, 철학과 공통점을 갖는다. 과학, 예술, 철학이 증언의 요소를 갖는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윤지오는 장자연이 더 이상 증언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장자연의 증언을 이어받아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의 현주소에 관해 증언했다. 이 증언은 성폭력적 가해권력이 엄청난 재력, 광대한 인맥, 노련한 기법을 동원해 역사의 어두운 곳으로 은폐해온 진실을 꺼집어 내 말하는 것이다. 이 증언은 이렇게 진실을 증여함으로써 국민들로 하여금 지금까지 차단되어 있었던 정보들에 접근할 수 있게 하고 또 이것들에 기초하여 과거의 사건에 대한 새로운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함으로써 지금-여기에서 자신의 주권을 올바르게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런 의미에서 증언은 한 개인의 표현의 자유의 행사일 뿐만 아니라 국민이 주권을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행사할 수 있도록 돕는 언어적 증여의 행동이다. 

2019년 3월 4일 이후 윤지오는 자발적이고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이 언어적 증여행동에 나섰다.  지난 10년간 경찰, 검찰, 법원을 통해 이루어진 간접적이고 매개적인 증언이 가해자를 찾아내고 실제로 처벌하도록 만드는 데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과거사진상조사단에서 그가 ‘이 조사를 통해서 국가가 실제로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던 것은 이 때문이다. 이때마다 진상조사단은 ‘기록’에 남는다거나 ‘역사적 평가’가 남는다는 식으로 사건을 역사화하는 답변을 준다. 하지만 윤지오에게 장자연 사건은 자신의 청춘이 아로새겨져 있는 역사이면서 동시에 치유하지 않으면 안 될 신체적 정신적 상처이고 극복되어야 할 현재적 아픔이다. 이 상처의 치유와 아픔의 극복은 가해자의 규명과 단죄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므로 기록이나 역사적 평가로 만족될 수는 없는 문제인 것이다. 그가 김수민과의 카톡에서 ‘이 책[13번째 증언]이 어떻든 이슈가 될 것이고 그 책이 얼마나 팔리든 상관 없이 그것을 바탕으로 영리하게 지금까지 못해본 것을 해 보려 한다’고 말했을 때, 그 ‘영리하게’의 실질, 영리하게 해보려는 그 과제는 바로 이것을 지칭한다.

수사기관을 매개로 한 증언이 아니기 때문에 이때부터 이 증여언어의 수증자는 바로 직접적으로 국민 자신이 된다. 신문, 방송, SNS 등에서 윤지오의 증언을 접한 시민들과 네티즌들이 ‘당신의 용기를 응원합니다’ ‘언니는 용기있고 멋진 사람이에요’ 등의 의사를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이 때문이다. “밝은 세상에서 재미있게 삶을 살아냈을 아름다운 젊은이를 무자비하게 짓밟고 소리내지 못하게 했던 더러운 이름들을 딛고 더 나은 세상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해준 지오님을 응원합니다”(juk***won,  2019년 3월 7일, ohmabella 인스타그램)라는 댓글은 윤지오의 증언증여가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 증여인지를 명백히 드러낸다. 그것은 가격으로 측정할 수는 없지만 ‘더 나은 세상으로의 한 걸음’이라는 긍정적 가치로 인지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곧 ‘더러움’은 일의적이지 않다는 것, 그것은 사회적 갈등 속에 노출되어 분열된다는 것이 드러난다. 앞의 댓글에서 ‘더러움’은 가해권력의 특징으로 나타나지만, 증언자에게서 ‘더러움’을 보는 가해자적 시각이 바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가해자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고인의 이름을 빌려 나타난다. “더러운 년. 최소한 고인의 아픔을 덜어주는게.? 고인을니야욕에이용하지마라.더불어 정치액션그만둬”(sim1****, 2019.3.5)에서 표현된 “더러움”이 그것이다. 

가해권력에 대한 증언이 있자마자 ‘고인’이라는 이름으로 죽은 장자연을 숭고화하면서 살아있는 증언자를 더럽다고 모욕하는 언어가 즉각적으로 발화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고인에 대한 숭고화와 숭배는 산 사람들을 죽은 사람들 아래에 굴복시키는 종교적이고 제의적인 수단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 고인 숭고화와 숭배는 권력자들이 산 사람들의 생명력을 착취하고 수탈하기 위해 산 사람들의 자기가치를 격하하는 통제양식이었음을 상기할 수 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모욕받지만 죽은 후에는 숭배될 수 있다는 믿음을 조장함으로써 살아있는 동안의 모욕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드는 기법이 고인에 대한 숭고화와 숭배라는 테크놀로지이다. 

이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의 삶의 목적은 죽음이 된다. 그런데 이 테크놀로지는 다른 한편에서 특수한 죽음, 장자연의 죽음만은 비하하고 격하해도 좋다는 예외조항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고인이 숭고한 것은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장자연이는 죽어서도 좌빨들 노리개신세로구나ㅎㅎㅎㅎㅎㅎㅎ!!”(inte****, 2019.3.5)라는 정치적 비난의 수사가 그것이다. 죽음은 숭고한 것이지만 어떤 죽음은 모욕되어도 된다는 태도로 이들은 고인이 된 장자연을 비하한다. 그 비하는, “시체팔이 그만해라…”(thde****)라며 고인을 ‘시체’로 물건화하고 상품화하는 언어조차 주저 없이 사용하는 행동양식이다.

이렇게 출판과 공개증언의 개시에 때맞춰 연대자들의 지지와 격려와 더불어 나타난 이 격렬한 정치적 반동(reactions)과 비인간적 모욕(insult) 그리고 진실에 대한 보복(revenge)의 사회심리는 윤지오에게 즉각 신변보호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을, 숨어있던 가해권력이 증언에 대하여 취하는 대응과 위협으로 읽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19년 3월 8일 가족간 카톡 소통은 증언 이후에 닥쳐오고 있는 이 신변불안을 여실하게 나타낸다.

“엄마: 빨리 와 그게 최선이야 …비행기 변경해서오버되는 돈 엄마가 줄게 … 늘 조심하고 밤에 돌아 다니지 마 사람 많은 곳에 있고 뒷골목으로 절대 나니지 말고 …꼭 택시타고.. 숙소 꼭 알려주세요!!! 이동시마다 알려주세요!!!!!!! 되도록 빨리 와!!! 그게 최선일 듯

내사랑: 댓글은 보호 안해주니까”

그런데 3월의 2차 한국 방문은 국가가 불러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국가로부터 신변보호 조치를 기대하기 어려웠고 국민이 행한 청와대 신변보호 청원은 많은 사람이 동의참여를 했지만 한 달 뒤인 4월 초가 되어야 정부의 답변을 받을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3월 13일 윤지오 가족은 응급조치로 어쩔 수 없이 사비로 사설경호원을 고용하기로 결정한다.

“오빠: 엄마가 무장경호원 붙여준데 지금 견적 뽑았음 24시가 2명 교대로…차량 지원해준데.

윤지오: 나는 증언자인데..한국은 항상..사건사고후에 움직이는게 슬프다 오빠..

오빠: 여기도 마찬가지야 사람이 죽어야 경찰오고 수사시작돼…..

엄마: 안전이 최고! …이제 경호원이 밀착해서 경호해 줄거니 안심해 차량도 지원해주니 편하게 다녀”

정치경제학적으로 보면 윤지오의 자비 무장경호는 가해권력자들에 의한 보복이 따를 수 있는 증언에 수반되는 필수경비이다. 이것은, 윤지오의 증언과 더불어, 국민과 대한민국의 주권 증진과 세계시민들의 행복증진에 이바지하는 윤지오 가족으로부터의 증여에 해당한다. 이것은 분명 계약과 교환에 의해 주어지는 가치는 아니다. 하지만 진실을 밝힐 수 있는 힘과 가치가 윤지오와 그 가족으로부터 국민들과 시민들에게  주어진다(be given)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경호비는 윤지오 자신의 재산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 증여를 위해 엄마의 재산이 사용되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윤지오는 엄마에게 빚진 것이 되며 이 때문에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해야 했다.

“네 감사해요. 그간 맘고생하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하지만 엄마가 또 곁에서 큰 힘이 되어 주셨기에 이렇게까지 용기내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신께서는 감당할 고통만 주실테고 제가 감당할 수 있기에 감사해요. 앞으로 제가 엄마도 지킬 수 있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또 선한 기업인이 되도록 노력할께요.”

좀 냉혹해 보이지만 정치경제학적 분석을 이 가족 대화에도 적용해 보자. 감사(thank)는 정치경제학적 의미에서는 채무를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think)는 약속이다. 윤지오는 엄마에게 선한 기업인이 되어 엄마를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겠다는 약속을 한다. 자신을 대신해서 엄마가 경호비용을 부담하게 되었기 때문에, 윤지오는 자신의 신변을 보호받는 조건으로 가족 관계 속에서 빚진자(채무자)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미래시간과 미래의 삶이 가족에게 담보로 잡히게 되는 것이다. 미래에 그는 선하지 않으면 안 되고 엄마를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빚짐의 의식은 더 일반화되어 윤지오는 엄마만이 아니라 신에게도 감사를 표한다. 신에게도 정신적으로 빚지는 것이다. 

물론 엄마는, “고마워~~ 울 딸이 힘들 때마다… 엄마가 도울 수 있어서 다행이야”라고 말하면서 딸을 위한 경호비용 지출을 자신의 ‘큰 행복’(‘다행’)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전통적 증여 공동체인 가족의 태도이다.

그런데 정작 헌법과 공익신고자 보호법(공익신고자 보호법 13조 1항 신변호보조치: “공익신고자 등과 그 친족 또는 동거인은 공익신고 등을 이유로 생명.신체에 중대한 위해를 입었거나 입을 우려가 명백한 경우에는 위원회에 신변호호에 필요한 조치를 요구할 수 있다. 이 경우 위원회는 필요하다고 인정되면 경찰관서의 장에게 신변호조조치를 요청할 수 있다. 2항 제1항에 따른 신변보호조치를 요청받은 경찰관서의 장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즉시 신변보호조치를 하여야 한다)에 따라 신고자/증인의 보호에 대해 법적 책임을 져야 할 국가 ‘공동체’는 어떤가? 국가는 국민으로부터 윤지오 신변보호 청원을 받고도 이후 다시 변호사로부터 윤지오 신변보호 요청을 받을 때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증언자가 명백히 국민의 알권리와 주권 증진을 위해 증언을 하고 있고 그 증언으로 인한 보복 우려에 대비해 사설 경호비용을 지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을 대의하는 국가는 아무런 보호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일이 생기는 것일까?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는 항상 국민이 직접 행동에 나서는 것이 역사적 상례였다. 1980년의 광주민중항쟁이나 1987년의 시민항쟁, 2008년의 촛불집회나 2014년의 세월호 집회, 그리고 2016년의 촛불혁명 등은 대의민주주의가 기능장애에 빠진 순간에 시민의 직접행동이 그것을 치유하는 힘으로 등장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용된 사람들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때 주인이 나서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2019년 9월 28일의 서초동 촛불집회도 선출되지 않은 검찰권력이 비대해져 선출된 대의권력을 압도하는 상황에서 권력원천인 국민이 ‘검찰개혁’이라는 요구를 내세우며 직접 자신의 사법주권을 주장하며 나선 사건이다. 

국민을 위한 증언자가 국가 공동체에 의해 방치되는 상황을 지켜본 네티즌들은 윤지오 님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면서 “이게 나라입니까? 너무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ma_***ong, 2019년 3월 13일 ohmabella 인스타그램)는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후원계좌 열어주세요. 사람 한명 살린다 생각하고 후원할 거예요. 진짜….경찰들은 믿을만한 것들이 못되네요. 예전부터 생각해 왔던 거지만… 이제 더 이상 뉴스에서 안 좋은 소식은 안 듣고 싶네요. 용기내어주신 윤지오님 항상 응원할게요”(amd*****13, 2019년 3월 13일 ohmabella 인스타그램)라며 후원계좌 개설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기도 한다. 

3월 14일에도 후원계좌 개설을 요구하면서 한 네티즌은  “이건 윤지오 님만을 위한 것이 아닌 장자연 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피해자분들 그리고 넓게 봐서는 우리 국민들을 위한 겁니다! 윤지오 님이 끝까지 안전하게 싸워주셔야 우리도 이런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 최대한 도움을 드리고 싶어요 ㅠㅠ 연대합시다”(byj****)라고 말한다. 증언은 증인의 몫이지만 증인이 안전하게 싸울 수 있도록 최대한 연대하는 것은 국민 모두의 몫이라는 정확한 인식에 따라 후원금 계좌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연대의 입장에서 후원금 계좌 개설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다.

“지오씨 항상 응원하는 사람입니다. 혹여 지오시가 혼자라는 생각이 들어 지쳐하실까봐 매번 걱정입니다. 저를 비롯한 많은 여성분들이 밤에도 눈 한번 감지 않고 지켜볼 것이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겁먹지 말고 지쳐하지 말아주세요. … 남성들에 의해 마치 고깃덩어리마냥 죽어나가고 죽어나갈 여성들만 생각하면 화가 납니다. 우리 여성들은 끝까지 싸울 것이고 연대할 것이고 이길 것입니다. 용기내주시고 힘써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항상 응원합니다. 그리고 혹시 경호비 모금 받으실 생각 없으신 건가요? ㅠㅠ”

이러한 목소리들에 윤지오는 이렇게 답한다.

“너무나 많은 분들이 신변보호에 걱정을 해주시고 그런 염려를 하게 해드리고 마음을 무겁게 해드리는 것 같아 국가에서의 도움을 받기에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어머니의 판단에 사설 경호원을 24시간 대동하게된것을 말씀드렸어요. 현재의 상황이기도 했고요. 이런 사실을 아시고 너무나 많은 분들께서 생각지도 못한 후원계좌를 말씀해주고 계신것 같아요.댓글과 DM[으로]도 놀라울 정도로 많은 분들이 말씀해주시고 계시지만 제가 감히 뭐라고 여러분의 열정으로 창출한 귀하고 값진 금액을 받을 수 있을까. 내가 이 정도로 한것이 아직 없는데.. 그렇게 고민을 하고있고 아직도 무엇이 좋은지 방법과 자문을 구하고 신중히 제 개인만을 위한것이 아니라 저보다 어려움을 겪고 계시고 도움을 드릴 수 있는 분들께 전달되어지면 너무나 의미있고 더 뜻깊지 않을까란 생각이되었어요.”(3월 14일 인스타그램)

후원계좌는, 윤지오가 사기를 기획했다는 고발자나 악플러들의 생각과는 달리 그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후원계좌 공개 제안을 받고서야 윤지오는 비로소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런데 증여교환의 관계와 영역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그에게 풀리지 않는 것이 있다.  일정한 돈을 받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가치를 먼저 지불했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이 정도로 한 것이 아직 없는” 것이다.  

그런데 증여증언은 계약교환의 관계형식 속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증여증언은 측정될 수 없는 가치, 교환가치로서 서로 비교불가능한 말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몸과 행동으로 증언이라는 증여행위에 참여하고 있으면서도 증여-수증-답례의 순환으로 나타나는 증여관계는 잘 이해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계약교환의 관계가 지배적으로 된 현대 자본주의에서 증여교환의 관계는 예외적 교환양식으로 치부되고 억압되며 부단히 계약교환의 문법, 관례, 언어로 번역되고 치환됨으로써만 마치 이해된 것처럼 간주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비합리적인 어떤 것으로 간주되곤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증여관계는 여전히 우리 삶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당장 개개인의 출생부터가 계약에 의한 것이 아니다. 가족관계, 친구관계와 같은 상당 부분의 관계가 계약관계가 아니다. 이런 전통적 관계만이 아니라 디지털 온라인 커뮤니티들도 계약교환의 관계가 아니다. 이렇게 삶의 상당부분이 증여교환의 관계로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그 관계를 계약교환 관계의 문법을 통하지 않고는 번역할 수 없는 의식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현대의 세계시민들인이 처한 보편적 딜렘마이다.  증여관계는 전근대적 친밀성 관계나 탈근대적 온라인 관계 모두에서 일상적으로 실재하는 흔하디흔한 관계이면서도 상품교환의 관계의 지배로 인해 관계와 교류의 합당한 형식으로 이해되거나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화를 거치면서 이루어진 증여관계의 이러한 역사적 정치적 위상변화로 인해 증여는 뇌물, 사기와 부단히 혼동되는 비운을 겪는다. 

그렇기 때문에 윤지오의 증언증여와 시민들의 자발적 후원증여를 계약교환의 문맥에서 독립된 증여교환의 독자적 문법 속에서 더 일관되게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네티즌들의 이러한 후원계좌 개설 요구를 받아 방송에서 처음(3월 15일)으로 언표한 것이 고발뉴스의 이상호 기자이다.  이상호 기자는 이미 3월 13일에, 신변보호 요청을 한 윤지오가 자비로 경호를 하기로 한 사실을 고발뉴스에서 보도한 바 있다. 또 그는 장자연 사건 ‘보도’로 인해 이미숙 배우로부터 고소를 겪은 바 있는 경험자로서, 윤지오가 ‘증언’으로 인해 권력의 보복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신변보호를 위한 경호비만은 국민들의 손으로 마련해 주자는 뜻으로 후원금 통장 개설을 제안했던 것으로 보인다. 증여론의 맥락에서 이 제안은, 국가가 증언자로부터 받은 증여에 대해 필요한 답례증여를 행하지 않고 있는 무례(無禮)의 상황에서, 그리고 그 무례가 증언자의 신체를 위험에 방치하는 상황에서 국가의 주인이고 주권자인 국민이 증언자의 생명과 신체의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답례증여를 직접 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하지만 윤지오는 3월 14일과 동일한 취지에 따라 이 제안에도 응하지 않는다.    

“후원계좌도 너무 많이 말씀해 주시는데 여러분들이 고생하시면서 번 돈을 감히 받기가 너무 죄송스럽고요. 저는 젊잖아요. 아직 저야 뭐 노동을 통해서도 열심히 벌면 되고 … 또 거절하는 것조차도 또 되게 건방진 것 같아서 계속 고민은 하고 있습니다. 알아주셨으면 좋겠구요.”(3월 15일 발언 녹취: https://www.youtube.com/watch?v=kOh4CrB_nSk&list=PLnjhiitCpmZtTDRnfnPhDdPn8mAoxPRRO&index=25, 1시간 53분 전후)

시민들이 고생해서 번 돈을 받기는 죄송스러운데 거절만 하는 것도 무례한 것 같아 난처하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실제로 계약교환이 아닌 증여교환의 관계에서는 증여가 공동체적 연대의 의사표시인 만큼 그에 대한 답례도 공동체적 연대의 의사표시이다. 따라서 증여교환의 관계에서 답례의 거부는 연대의 거부로 인식되어 상호 연대관계를 깨고 전쟁관계로 들어가자는 의사표시로 해석되곤 한다. 후원금에 대한 거절이 ‘건방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 같아 난처하다는 생각은 이러한 증여교환 관계의 맥락을 고려하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틀 뒤인 3월 17일  윤지오는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분들을 위한 4.16 기억저장소에 개인 후원금을 기부하러 갔다. 이 자리에서 4.16기억저장소 대표인 김00 어머니로부터 4.16기억저장소도 100% 후원금으로 운영되는데, 후원금에 대한 무조건적 거부는 예(禮)가 아니라는 취지의 조언을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하루 뒤인 2019년 3월 18일 윤지오의 신한은행 통장은 일대 사건이 기록된 장소로 나타난다. 신한은행 통장에 입금된 후원금액(약 1억 1천 7백만원, 참고로 현재의 잔고도 약 1억 1천 7백만원이다)보다 놀라운 것은 후원행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수다. 3월 18일 22시 45분부터 3월 19일 13시 50분까지 총 15시간 5분 동안 동안 무려 5745건의 송금참여가 이루어진다. 1분당 약 6.4명이 후원송금에 참여한 것이다. 

단 시간에 이런 속도의 송금참여가 이루어진 경우가 있을까? 나로서는 이런 경우를 떠올릴 수조차 없지만 있다면 아마 사익을 위해 경합이 붙은 경우일 것이다.  그런데 증언자 윤지오에 대한 후원참여의 경우에 송금 하나하나는 사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익을 위한 것이고 좀더 엄밀히 말하면 공통장을 확장하기 위한 것이다. 즉 장자연 사건에 대한 윤지오의 증언에 공감하면서 그 용기에 감복하고 이 사건의 진상이 규명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증언을 해달라는 요구와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연대의사를 담은 송금이었다. 

이것은 증여교환 순환관계에서의 행동, 즉 윤지오의 증여증언에 대한 답례증여이다. 그리고 그것에는 증인의 신변안전을 바라는 열망과 증인의 신체와 생명을 보호하려는 연대의 취지가 아로 새겨져 있다. 이것은 증인의 신체가 나의 신체이고 그 역도 마찬가지라는 공통장적 인식의 표현이다. 실명으로 증여한 사람도 있고 익명으로 증여한 사람들도 있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구호를 이름 대신 적어 보냈다. 그 구호들은 통장 위에서 집회의 깃발이나 만장처럼 펄럭인다. 아래에 이름 대신 찍힌 문구들 중 이 후원금의 의미를 알 수 있게 하는 것들을 몇 개 골라 적어보자. (아마도 8자로 제한된 것으로 보이는 글자 제한 때문에 문구가 잘려 있는 경우도 있는데, 잘린 글자는 잘린 그대로 쓴다)

“윤지오짱예쁨, 힘내세요~~^^, 강0예지 존경, 유00고발후원, 고맙습니다, 적어서미안해요, 윤지오지킨다,정00(홧팅!!), 그대미소영원, 진실은승리한다, 항상응원할게요, 응원합니다, 지오님 감사해, 증언자윤지오, 벨라 화이팅, 멋진사람윤지오, 적게나마보태요, 함께하겠습니다.그동안수고하, 제주도연우맘, 정의사회구현, 용기에감사합, 고마워요!힘내, 딴게니키스오, 지지합니다, 끝까지함께해요, 혼자가아니에요,도움이되길, 용기내주셔서, 소액이라죄송,다담주에더보낼, 무너지지말아요, 끝까지함께가요, 언니힘내세요, 당신이지치지않, 용기감사합니다,연대합니다, 끝까지연대하겠, 나00달려라, 이시대영웅입, 경호는내가맡는, 같이해요!화이, 터널지오최고ㅋ, 전재산이이것, Justice…, 무탈기원, 용기잃지마세요, 꼭취뽀해서힘드, 멋져요힘내요, 증언에는후원, 긴시간을지나가, 지오님힘내세요, 금쪽같은 윤지오, 부디안전하시길, 힘네세요고맙습, 쫄지말기!!힘내, 함께싸울게요,실수투성이밤,딴지방판소년단,끝까지싸워주세, 대신해서 감사, 용기에응원과, 촛불하나, 아자!, 배우님힘내세요, 지나가는과객, 15번째증언응원, 깨어있는시민, 사필귀정, 적은돈죄송해요, 연대합니다, 작은용기가모여, 힘이되어드리고, 저희가함께할께, 백수라서,조금, 진실은밝혀진다, 두달연장화이팅, 감동감사함께해, 포기하지마세요, 사설경호후원금, 늘초심으로힘내, 고기도사드세요, 담엔더보낼게요, 그 용기에 박수, 다치지마세요, 많은여자들이같, 걱정하지마세요, 이제우리가지켜, 같은여자로써응, 김00.지켜줄, 증언감사합니다, 지치지말아요, 짐을지워미안해, 정의가승리하기, 진실이밝혀지기, 쭉 연대할께요, 봄은꼭돌아오거,진실은침몰하지, 학생이라부족하, 지나가는스님입, 훌륭하십니다.., 기도보탤께요, 끝까지살아주세, 지오님지지마세요, 김학의구속, 이것밖에힘이안, 학생이라죄송해, 홀로싸웠을시간, 커피사드세요, 언니아프지마요, 적지만마음만은, 당신은착한사람, 우리모두가증인, 이봐요힘내요딴, 큰용기감사합, 끝까지지지말아, 우리가지키겠, 밥한끼라도힘나, 아자아자!!!!, 돈패닉, 정의는이긴다, 그대의 용기에, 대한민국이응, 두딸의아빠 힘, 이렇게라도제망, 미안해요고마워, 용기내줘고마워, 딴게이와같이가, 함께임을잊미마, 이길수있습니다, 무사기원부탁, 지켜드릴게요, 토론토박00힘, 000국회의원, 일반시민, 기린은울지않는, 윤지오씨를국회,KOOL하게, 의인은힘내시라, 한국페미니스트, 서로의용기, 경호비용지원, 정읍아인이아빠, 행복합시다-딴, 성불하십시오, 본명이더예뻐, 진실을 응원합, 어느시각장애인, 소시민의정의, 사랑합니다.응, 죄지은자반드시, 윤배우님고맙습, 용기가대단해요, 힘들어지오화이, 우리는서로의용, 진실승리, 낙숫물이바위, 곁에있어요, 진실규명을위, 꿋꿋하고당당, 행복하게사세요, 윤지오씨경호비, 머리숙여감사드, 당신은멋진사람, 온마음으로연대, 이길거에요, 잊지않고지지합, 강한멘탈을지지, 당신이자랑스럽, 핸사리반짝, 차비라도보태요,  ……..”

위의 문구들은 틀림 없이 서로 다른 곳에 있었을 각기 다른 사람들에 의해 대동소이하게 여러 차례 반복되는 문구들이다. 다시 말해 이것들은 서론 다른 사람들의 공통의 정동과 공통의 인식, 공통의 의지를 표명한다. 천원부터 백만원까지 (평균하면 1인당 약 2만원의, 그러나 결코 평균해서는 안 될) 크고 작은 송금들은 하나하나 고유한 방식으로 합류하는 무수히 많은 응원과 격려(힘내세요, 이깁니다 등등), 무수히 많은 연대결의(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끝까지 함께연대하겠습니다 등등) 무수히 많은 감사(당신의 증언과 용기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미안함(짐지워서 미안합니다, 소액이라 죄송합니다 등등)의 격류이다.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이 정동의 격류는 서로를 전혀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후원금 흐름의 형태로 이루어진 집회(assembly)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증인의 용기에 감사하고 지치지 않도록 격려하며 진실의 승리를 기원하고 끝까지 연대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다. 이것은 윤지오의 진실증언 증여에 대한 답례의 증여로서 진실규명과 진실승리를 위한 용기와 연대의 공통장(commons)을 구축하는 힘의 출현이다. 측정할 수 없는 것들의 상호증여를 통해 서로의 진실과 힘을 다지는 무형의 공간이 생성되어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사건을 ‘증여 공통장의 등장’이라고 부르고 싶다. 

2019년 3월 18일 이후 15시간 여에 걸친 윤지오의 신한은행 통장은, 우리의 서랍에서 흔히 발견되는 은행통장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겠지만, 결코 경제적 수입과 지출이 기록되는 사인(私人)의 통장이 아니다. 그것은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와 이 체제의 가해권력에 대한 저항의 용기, 진실규명의 의지, 함께 이 체제와 맞서자는 연대의 결의, 이 실천에 함께 하는 사람들에 대한 서로빚짐(감사)의 확인이 표현된 정치적 공간이고 그 정치적 목소리들이 낱낱이 기록된 삶정치적(biopolitical) 문서이다.  이 통장에는 경제적 일상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드물다(rare)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특이하다(singular)는 의미에서 사건의 문서이다. 

이 사건은 화폐로 기록된 사건이다. 맑스는 화폐가 교환수단, 지불수단, 축장수단, 세계화폐라는 네 가지 기능을 갖는다고 말했다.  신한은행의 화폐는 이 중 어디에 속하는 기능을 하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 이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이 통장에 입금된 화폐는 상품의 대금으로 송금된 것도 아니며 이미 산 상품의 대금을 지불한 것도 아니며 부를 모으기 위한 것도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논의한 맥락에서 신한은행 통장의 화폐는 증여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그 증여는 경호비라고 불리는 특이한 목적을 위해 이루어진 것이다. 5745명(이 숫자는, 15시간 여의 입금흐름 후 신한은행 계좌를 윤지오가 닫음으로써 강제로 제한된 숫자이다)의 후원집단이 무엇을 ‘경호’하려고 한 것인가? 무엇을 ‘지키려고’ 한 것인가? 윤지오의 신체를 지킴으로써 가부장적 성폭력 체제의 진실을 지키고 그것에 대항 저항을 지키며 그 저항의 연대를 지키고 서로에 대한 빚짐과 상호의존을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었던가? 다시 말해 진실의 연대를 위한 증여의 공통장을 경호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런 의미에서 신한은행 통장의 화폐는, 결코 경제적 수치로 환원될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되는,  삶정치적 화폐였고 삶정치적 언어 그 자체였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송금 그 자체가 경제적 행위가 아니라 이미 삶정치적 실천이었기 때문이다.

증여혐오: 김수민의 “사기야!”의 경우(3)

이수역 사건 피해 여성이 후원금을 요청한 실제 이유

우선 우리는 당시 김수민 및 피해 여성측 사이에서 양자 모두와 소통할 수 있었던 ㅎㅇ의 반응을 통해 사건의 진실에 한 걸음 접근해 갈 수 있다. ㅎㅇ은 맨 처음 김수민으로부터 이야기를 듣고는, 피해여성의 후원금 요구가 합리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다며 김수민의 생각에 공감하는 대화를 나누었다.  김수민이 피해 여성으로부터 받은 후원금 요청 메시지를 ㅎㅇ과 공유하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ㅎㅇ도, 개인후원을 비밀리에 요청한다는 것이 이상하고 변호사가 공개모금한 돈으로는 수임을 받을 수 없고 비밀모금한 돈으로는 수임을 받겠다고 한 것도 이해되지 않는다고 반응한 것이다. 하지만 ㅎㅇ은 김수민보다는 신중하게 피해여성들과 함께 일해온 지인에게 사정을 더 알아보고 연락하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연락이 도착하기도 전에 김수민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피해 여성의 후원금 요청을 ‘사기’로 보는 자신의 주관적 해석을 공개해 버린다. 위에 인용한 구절이 그것이다. ㅎㅇ은 이 공개가 문제적이라는 지적과 함께 김수민에게 자신이 파악한 내용을 말해 준다. 피해 여성과 함께 일해온 지인이 “변호사가 사회적으로 격렬한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에서 공개리에 모금을 하여 자신이 변호사임이 공개되면 여론상 사건을 수임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 사실이고 이런 사정 때문에 첫 변호사가 사임하여 두 번째 변호사를 선임하는 방법으로 비밀, 개인 후원 방법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말했음을 알려주면서 ㅎㅇ은 인스타그램에 공개한 글을 보관으로 돌려 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이 요청을 거부하고 김수민은 그 글의 공개를 (일정 시간 동안) 유지한다.

이 글을 읽고 개인 후원금 메시지를 보냈던 피해 여성이 이 사태와 관련하여 김수민에게 보낸 메시지는 이 사태의 진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직접적 증언의 목소리이다.

“작가님 께서 올리신 새로운 인스타 피드를 보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드린 메세지가 오해를 살 수도 있었겠다 하는 생각에 해명을 해야 할 것 같아 다시 메세지 드립니다. 그간 있었던 무수한 일들을 짧은 메세지로 축약해 보내는 과정에서 저희의 상황이나 의도가 온전히 전달 되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간과했습니다. 많이 당황스럽고 부담스러우셨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어 정말 죄송합니다. 혹시 의아하신 점이나 짚고 넘어 가고 싶으신 점 등이 있다면 얼마든지 연락주십시오. 저희는 모든 이야기를 가감없이 솔직하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작가님께 부담이나 스트레스를 남겨드릴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불쾌하시거나 오해를 살만한 점이 있었다면 대화를 나누면서 자세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여기에서 피해 여성은 자신들의 불찰로 오해의 소지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당황스럽고 부담스러우셨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어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하며 대화를 통해 오해를 풀고 싶으니 연락을 달라고 말한다. 

제3자인 ㅎㅇ의 사태조사(즉 지인의 말)와 피해자의 직접적 해명은 일치한다. 만약 이 해명이 사실이라면 김수민이 여성 피해자를 2차 가해하는 상황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여성 피해자는 앞서 본 바처럼 김수민을 비판하기보다 자신의 불찰을 성찰하고 사과와 대화를 통한 오해풀기를 제안한다. 

지금까지 여성측이 남성측을 가해자로 몰면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해 왔다고 주장해온 남성측 지지자들도 김수민의 이러한 돌변을 반겨 하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김수민이 이수역 사건의 당사자 여성을 사기꾼으로 몰면서 자신은 빠져 나가고 사건 당사자 여성에게 독박을 씌운다는 식으로 반응했다. 

“그니까 ..어쨌든 작가란 X도 병신짓 했고 이제서야 깨달아서 이래나 저래나 까발려지면 매장 될 판인데 좀 살 수 있는 루트 만들어서 자기는 쏙 빠져나가고 저 이수역 X들이 다 독박 씌우겠다 이거네???”

김수민으로서는 난처한 반응들이 이렇게 연속된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피해 여성에게 제공한 언어적 증여가 답례로 보답 받기는 커녕 오히려 추가의 화폐 증여 요구로 이어졌다고 느끼면서 언론 제보와 인스타그램 피드 공개로 대응한 것이 가져온 응보였는지 모른다. 어쨌든 여기에서 우리는 화폐 증여에 대한 김수민의 혐오 반응을 읽을 수 있다.  김수민은 요청 받지도 않은 언어적 증여를 피해 여성을 위해 자발적으로 제공한 바 있다. 그런데 왜 요청까지 받은 화폐 증여는 결코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는 식의 혐오 반응을 보인 것일까?

피해 여성이 김수민에게 해명과 사과 및 당부를 담은 위의 메시지를 보낸 후 김수민이 이에 응답한 글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 암시해 준다.  

“네 많이 불쾌하고 혼란스러웠습니다. 공식적인 후원도 아닌 갑자기 디엠을 보내와서 계좌번호 던져 주고는 후원 부탁한다 대신 침묵해 달라 알려져선 안 된다 주변 사람에게 이야기를 전달해 달라 부담 없이 읽어달라는 건 무슨 뜻이죠 저한테는 듣는 순간 부담이 무척 되더군요 그거 알죠 그쪽과 저랑은 일면식도 없는 사이입니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그리고 저도 당신들을 위해 싸워주고 분노해 주고 해명해 주는 거 변호사 모금을 후원해 주는 거 이중에서 그 어떤 것도 당연한 건 없습니다 단지 같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당신들 편을 드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고 무조건 억울한 피해자라고도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당신들이 잘해서 그렇게 당신들을 위해 글을 쓰고 해명하려고 노력하고 당신들 편을 들어주는 게 아니란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딱하나 분명 서로 잘못은 있지만 어찌됐던 여자는남자 보다 약자고 그쪽은 수가 더 많았고 남자쪽은 다친 것이 없었고…”

여기서 김수민이 피해 여성측을 “사기”로 보는 글을 올려 ‘공론화(?)’한 것을 정당화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원래 피해 여성측에도 잘못이 있었다는 것이다. 즉 과실은 쌍방에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공식 후원 형식을 따르지 않는 후원 요청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표명함으로써 김수민은 이제 이수역 사건 여성측의 내부고발자가 된다. 여성측에게도 잘못이 있음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여성측이 피해자를  가장한 사기꾼일 수 있다는 생각을 퍼뜨리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김수민의 이 내고고발로 인해 피해 여성들은 사기꾼의 누명을 뒤집어 쓰고 여론의 질타를 받게 된다. 

그런데 피해 여성들의 입장에서 첫째 이유는 쟁점사항이지만, 둘째 이유는 참으로 억울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후원금을 비공개로 모금했던 것은 첫 번째로 선임된 변호사가 사임하고 새로 변호사를 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변호사들이 공개모금 방식을 거부한 데 따른 불가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대체 애초 피해 여성이 보낸 디엠이 어떠했길래 김수민은 “공식적인 후원도 아닌 갑자기 디엠을 보내와서 계좌번호 던져 주고는 후원 부탁한다 대신 침묵해 달라 알려져선 안 된다 주변 사람에게 이야기를 전달해 달라 부담 없이 읽어달라는 건 무슨 뜻이죠”라고까지 반응한 것일까? 김수민 작가에게 피해 여성측에서 보낸 애초의 인스타그램 디엠은 다음과 같다.

“부끄럽지만 현재 저희에게 도움을 주시겠다는 분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공식 모금을 열지 못했습니다 변호사들이 모두 사건에 쏠린 여론, 변호사로서의 이후 본인 커리어에 영향을 줄 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모금을 통한 변호사 선임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변호사 선임, 치료비 등 그간 약 8백만원에서 1000만원에 가까운 비용을 본인이나 최측근들이 부담할 수밖에 없었던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현재 변호사를 재선임 해야 하는데 역시 공개적인 모금을 원치 않으며 모금이 없어야 변호사 선임 가능성이 조금 더 올라 갑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금전적인 문제의 큰 어려움을 격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몸을 추스린 저희가 직접 한분 한분께 연락을 드리며 도움을 요청 하는 중입니다 비용에 대한 부분은 투명하게 진행 할 것을 약속 드립니다 갑작스러운 긴 텍스트에 놀라셨겠지만 금전적 후원이 가능하시다면 도움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조심스럽게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 모금과정이 누설되면 저희측의 변호사 선임이 불가능해질 가능성이 매우 높아져 비밀 엄수를 꼭 부탁드립니다 더불어 조금 모순되는 말이지만 주변에 정말 신뢰 가능한 분들이 계시다면 저희 이야기를 전달해주실 수 있을까요 계좌는 시티은행…”

읽은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를 수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이 디엠에는 비공개 방식의 사적 후원 방식을 선택한 이유가 분명하게 서술되어 있다.  처음에 김수민의 이야기를 듣고 김수민의 말에 공감했던 ㅎㅇ도, 이러한 방식의 후원금 요청이 ‘사기’가 아니라 불가피한 사정에 의해 선택된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것을 열심히 김수민에게 설명해 준다. 사실을 확인해 보니 피해 여성들이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보았던 자신의 처음의 의심이 사실과 다르고 오히려 피해 여성이 처음 김수민 작가에게 보낸 메일의 문구 그대로가 사실이라고 말이다.  

“이수역 피해자분들이 지금 여러가지로 언론도 그 누구도 못믿고 일이 틀어질까봐 걱정도 되고 또 이런 식으로 선임을 거부할까봐 최대한 몸사리며 하고 있는 중이라서 더 그랬던 것 같다고, 사기나 이용하려던 건 정말 아니라고 하는데 이 분은 제가 개인적으로 많이 만나고 하는 분이라 신뢰도가 있거든요. 작가님도 많이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우셨겠지만 그쪽에서 답장이 올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줄 수 있으실까요?ㅠ”

이런 조사를 기초로 ㅎㅇ이, (자신과 김수민의 오해와는 달리) 피해 여성들이 변호사 선임했다가 계약 파기되고 재선임하고 있는 것이 사실로 보이니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을 보관으로 돌려달라고 요청하지만 이에 대한 김수민의 응답은 냉담하고 확고하다. 

“공론화하는 게 맞는 거 같아서요. 침묵해 주는 게 옳지 않는 것같아요. 그럼 그들은 뒤에서 계속 그렇게 비밀스럽게 돈을 달라는 메시지를 보낼 것이고 사람들한테 피해자든 뭐든 분명 저건 옳지 않아요.”

“피해자든 뭐든 분명 저건 옳지 않아요”라는 말은 사실보다 규범이 우선이라는 자신의 확신을 표현한다. 이렇게 시간을 두고 기다리면서 사실을 더 확인해야 할 순간에 자신의 주관적 규범을 앞세움으로써, 김수민은 이수역 사건 여성 피해자들에 대한 지지자, 언어적 증여자에서 ‘내부고발자’ 형식의 ‘2차 가해자’로 변신한다. 

이 변신의 순간에 김수민이 피해 여성에 대한 자신의 이전의 지지가 “증여”였음을 분명히 밝히는 것은 흥미롭다. 앞서 말한 지지의 세 가지 성격 중 ‘자기실현’이나 ‘연대’의 성격을 제외시키고 ‘증여’의 성격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그쪽과 저랑은 일면식도 없는 사이입니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그리고 저도 당신들을 위해 싸워주고 분노해 주고 해명해 주는 거 변호사 모금을 후원해 주는 거 이중에서 그 어떤 것도 당연한 건 없습니다.”에서 “주다”(증여)는 네 번 등장한다. “싸워 주고, 분노해 주고, 해명해 주고, 후원해 주다”가 그것이다. 감정의 증여, 해명의 증여, 투쟁의 증여, 후원금의 증여. 

이 네 가지 증여 중 “당연한 건 없습니다”라는 말은 무엇인가? 증여에는 일정한 답례의 의무가 따른다는 것이다. 자신은 이미 분노의 증여, 해명의 증여, 투쟁의 증여를 했다. 그런데 수증자로부터 돌아온 것이 답례증여이기는커녕 추가의 증여, 그것도 화폐 증여에 대한 요구였다. 현대 사회에서 화폐는 교환수단이며 교환수단이기 때문에 지불수단, 축장수단으로 사용된다. 그런데 그것이 증여수단일 수 있을까? 김수민은 이에 부정적으로 답한다. 화폐는 증여의 수단이 아니다. 이런 관점 때문에 김수민은 화폐적 형태의 후원금 요구를 ‘사기’로 파악하면서 그 요구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피해 여성을 ‘사기 가해자’로 묘사하는 글을 인스타그램에 공개하기에 이른다.

증여혐오: 김수민의 “사기야!”의 경우(1)

들어가며

‘증여(贈與)’를 순우리말로 표현하면 ‘주다’라는 뜻이다. 영어에서 증여를 뜻하는 ‘gift’도 주다는 뜻의 ‘give’에서 나온다. ‘주다’는 물건, 시간, 자격, 권리, 역할, 지식, 감정, 경고, 암시, 마음 등 물질적이거나 비물질적인 것을 넘겨주어 그것을 누리거나 느끼게 하는 행동을 지칭한다.  이 말은 ‘투자하다’, ‘기부하다’ 등의 (준)경제적 행동; ‘수여하다’, ‘하사하다’, ‘상납하다’, ‘선사하다’ 등의 사회적 행동; ‘투여하다’, ‘베풀다’ 등의 윤리적 행동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주다’는 ‘얻다’나 ‘뺏다’보다는 ‘받다’에 대응한다. 우리말 ‘받다’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받치는 모양을 암시한다. 즉 ‘받다’는 물질적 비물질적 은혜를 입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에 돌려주어야 할 책무, 즉 ‘갚’을 의무를 어느 정도 함축한다.

‘주다-받다-갚다’의 연쇄는 근대 이전의 시대에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원리, 아니 기본적 원리였다.  마르셸 모스는 이것을 ‘증여-수증-답례’의 순환적 반복연쇄라고 표현했다. 여기서 답례는 새로운 증여이기 때문에 이로부터 새로운 수증과 새로운 답례의 순환이 촉발되기 때문이다. 얼핏보면 증여사회를 구성하는 이 원리는 근대 이후 사회의 교환원리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교환사회에서도 상품을 주고 화폐를 받으며 화폐를 주고 상품을 받는 C-M-C의 부단한 순환이 관철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증여사회와 교환사회 사이에서 주고-받음은 두 가지 커다란 차이가 있다. 증여사회에서 주고-받음은 계약한 두 당사자간의 주고 받음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을 공동체 내의 다른 사람에게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고 받음이 개인들(계약 당사자들) 사이의 주고-받음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 속에서의 주고-받음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차이가 있다. 교환사회에서는 주는 것과 받는 것은 등가여야 한다는 원리가 작동함에 반해 증여사회에서 주는 것과 받는 것이 같게 되는 것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주는 것과 받는 것이 다르고 부등가일 때 오히려 의미를 갖는 것이 증여였다. 증여사회의 후기에 관찰되는 포틀래치 경쟁은 이 다름의 원리가 받은 것보다 경쟁적으로 더 많은 것을 줌으로써 자신의 명예 및 권력 상의 우위를 확인하려는 문화로 될 때 나타나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증여형식이었다.

이 자리는 증여사회가 어떻게 교환사회로 이행했는지에 대해서 논할 자리는 아니다. 다만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에는 맑스의 시초축적에 대한 분석(<자본론>)이나 실비아 페데리치의 마녀사냥에 대한 분석(<캘리번과 마녀>), 정신병원 감옥 임상의학 등의 탄생에 관한 푸코의 분석(<광기의 역사>, <감시와 처벌>, <임상의학의 탄생>) 등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만 언급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이 저자들은 한결같이 이 이행이 자연스럽고 순조로운 이행과정이 아니라 입법만이 아니라 총칼이나 감금, 화형식과 같은 군사적 사회적 종교적 폭력을 동원한 과정이었다고 서술한다. 사람들을 교환사회 질서에 순응하도록 만들기 위해 증여사회의 인지양식, 문화, 관습에 대한 대대적 공격이 필요했다. 증여에 대한 혐오가 그것인데, 부등가의 교통형식인 증여는 등가교환의 질서를 안착시키지 못하도록 막는 장애물이었기 때문이다.  증여혐오는 증여질서의 구성원으로서 그것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사회질서 바깥으로 추방하거나 강제로 수용하여 감금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술사, 예언자, 점술가, 음유시인, 떠돌이, 예술가, 혁명가 등이 이 증여혐오의 주요 표적이 되었다. 

4. 증여 윤리 타락의 극점: 수증자를 채무자로 만들기

최나리 변호사의 ‘증여의 의사표시 취소로 인한 부당이득 반환 청구소송’에 대한 비판(4)

그런데 소장의 구성방식을 보면 최나리가, 자신이 제시한 주위적 청구원인(‘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 청구’)이 법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기각되라라는 것을 미리 예상하고 예비적 청구원인을 준비하고 있는 점이 그러하다. 그러므로 본 소송의 실제적 핵심은, 윤지오가 수증자로서 불법행위를 했다는 식의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청구’에 있다기보다, ‘증여의 의사표시 취소로 인한 부당이득반환 청구’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청구는 과연 법리적 타당성이나 근거를 갖고 있는가?

“가사 위와 같은 불법행위가 민법 제750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불법행위에 해당하지 아니하여 주위적 청구가 기각된다 하더라도, 원고들은 피고의 기망행위, 즉 사기를 원인으로 하여 증여의 의사표시를 취소하는 바이며, 그 취소의 의사표시는 이 사건소장으로 갈음하는 바입니다. (…) 원고들이 후원금에 대한 증여의 의사표시를 민법 제110조 제1항에 의하여 취소하는 이상, 피고가 받은 후원금은 법률상 원인 없이 이익을 얻은 것이므로 부당이득에 해당하여 원고들에게 반환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편 피고는 악의의 수익자라 할 것이므로, 원고들이 지급한 후원금 총 10,231,042원에 연 5%의 비율로 법정이자를 붙여 반환하여야 할 것이고(다만 그 기산점은 계산의 편의를 위하여 이 사건 원고들 중 최후로 후원금을 지급한 2019.4.23을 기준으로 합니다) 이 사건 소장부본 송달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이 정한 연 12%의 비율로 인한 지연이자를 지급하여야 할 것입니다.”

민법 750조는 “고의 또는 과실로 인한 위법행위로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자는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되어 있다. 최나리는 피고의 기망행위가 원고들에게 손해를 배상할 책임을 갖는 위법행위가 아니라서 주위적 청구원인이 기각된다면 이제 동일한 원인, 즉 ‘기망행위=사기’를 근거로 하여 이 고소장으로 ‘증여의 의사표시에 대한 취소’를 갈음하니 이 ‘악의의 수익자’로부터 부당이득을 돌려받게 해 달라고 청구한다.

이 청구에서도, 비록 손해배상청구에 비해 청구금액은 축소조정되었지만(손해배상금을 뺀 약 1000만원) 고리대 원칙은 동일하게 적용되어 있다. 법정이자 5%와 지연이자 12%. 즉 ‘선의’의 증여를 고리대를 착복하기 위한 ‘악의’적 수단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것이다. 최나리가 사용하는 이런 악의적 방식을 통해 증여자가 채권자로 변신하고 있기 때문에, 증여자의 선의를 받아들인 그 수증자는 고리대 채권자로 변한 그 증여자에게 원금과 상환을 독촉 당하는 억울한 채무자로 위치지어질 수밖에 없다. 

증여가 채권으로, 수증이 채무로 둔갑하는 이 경악스러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우리는 대체 ‘증여가 무엇인가’, ‘인간은 왜 증여하고 수증하는가?’ ‘증여와 수증의 성격이 현대 사회에서 왜 이런 변질을 겪는가?’ 라는 본질적인 물음들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 물음들에 답하기 위해서는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에서 시작되어 레비스트로스(<마르셀 모스의 저서에 대한 서론>)와 모리스 고들리에(<증여의 수수께끼>)에 의해 비판적으로 정정/확장되었으며 가라타니 고진(<세계사의 구조>)에게서 정치적 대안원리로까지 받아들여진 이 증여의 문제의식과 그것의 유효성을 검토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곳이 그 작업을 하기에 적합한 자리는 아니므로 다른 기회로 미루어두고자 한다. 

다만 여기서 나는, ‘증여의 윤리’의 관점에서 볼 때 한편에서는 경악스럽고 다른 한편에서는 우스꽝스러운 이러한 고소사태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는, 애초에 ‘후원자들이 왜 윤지오에게 후원하고자 하는 의지(선의)를 갖게 되었던가?’라는 질문을 떠나서는 해명될 수 없다는 점만을 강조해 두고 싶다. 즉 ‘후원자들의 증여’에서 출발해서는 안 되고 그에 선행했던 ‘윤지오의 증여’에서 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이것은 ’윤지오가 후원자들에게 무엇을 주었길래(원-증여) 후원자들이 그를 후원(답례-증여)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던가?’라는 물음을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 물음은, 후원자를 출발점으로 삼은 ‘증여-수증’의 과정만을 놓고 그것이 ‘사기였던가 아니었던가?’라는 프레임 속에 우리를 가두는, 철저히 시장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박훈-최나리의) 소송행렬 속에 묻혀 제기조차 되지 않고 있다. 이것은 ‘3월 15일까지 후원의지를 가진 사람들의 거듭된 계좌공개 요구를 받아들이는 데에 주저하던 윤지오가 왜 3월 18일에 후원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던가?’라는 물음을 포함하는 것이다. 명백히 이것은, 수증이 ‘기회’라기보다 ‘의무’가 되고 수증거부가 연대의 거부와 전쟁의 선포로 되는 상황 속에 윤지오가 놓여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셀 모스는 포틀래치적 증여경쟁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러한 상황의 맥락과 의미를 설명한 바 있다.)

아무튼 최나리는 이 소장에서 윤지오를 ‘증여의사 표시의 취소’를 한 원고들의 채무자로 사로잡는 데 집중한다. 여기서 그는 민법 110조 1항(‘사기나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는 취소할 수 있다’)을 그 포획의 그물로 사용한다. 그런데 그것으로 법률적 포획이 가능한가? 나는 이미 앞에서, 그가 ‘사기=기망’의 근거로 든 것들이 실제로는 근거가 없다는 점에 대해서 설명했다. 장자연 리스트는 2009년에 그 실재가 인정되었던 것이고 2019년의 진술들에 의해 창작된 것이 아니므로 그 신빙성이 의심될 여지는 없으며 증언자에 대한 가해권력의 위협(보복이나 예방공격의 가능성)은 윤지오에 의해 과장되었다기보다 오히려 과소인식되고 과소평가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이다. 그러므로 ‘사기=기망’은 최나리에 의해 욕망되고 상상되고 있는 것일 뿐 실재하지는 않는다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사기’가 없었던 한에서 ‘증여의사 표시의 취소’는 물론 법률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부당이득반환청구는 근거를 잃는다. 그래서 오히려 윤지오의 증언들을 ‘사기=기망’의 행위라고 주장하면서 부당이득반환청구의 소장을 내미는 이 집단고소행위야말로 허위사실을 가지고 윤지오를 무고하여 국가형사권과 징계권을 어지럽히고 이를 통해 고리대 수준의 부당이득을 취하려는 행동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이런 점을 스스로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일까? 최나리는 소장의 결론 부분에서 이렇게 덧붙인다. “이 사건과 동일한 사실관계로 박훈 변호사에 의하여 서울지방경찰청에서 피고에 대한 사기고소가 이루어진 상황이므로, 해당 사건의 추이를 보고 추가로 주장 및 입증을 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쓴다. 실제로 최나리는 장자연 리스트에 대한 진술이 신빙성이 없다거나 증언자가 위협을 과장하고 있다는 등의 자신의 청구 원인에 대한 어떤 객관적 입증도 하지 못했으며 유일하게 윤지오의 말이 100% 진실은 아니라는 김수민의 고발문건에 그 해석적 근거를 의존해 왔다. 

이제 결론 부분에서 그는 자신이 청구의 원인으로 삼은 ‘기망행위=사기’와 관련해 박훈의 ‘사기 고발’에 의존하려는 나약한 태도를 보인다. 그런데 최나리에게는 불행하게도 박훈의 바로 그 ‘사기 고발’ 행위가, 2019년 8월 2일 정의연대에 의해. ‘윤지오에 대한 명예훼손과 무고’로 고발되었다. 최나리가 의존하려고 한 지지대가 몸을 기댈만큼 든든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제 자신의 청구를 정당화하기 위해 최나리는 어디에서 의지할 곳을 찾으려고 할까?(끝) 

3. 재테크로서의 ‘증여’?

최나리변호사의 ‘증여의의사표시취소로인한부당이득반환청구소송’에대한비판(3)

이에 비춰보면 윤지오가 신변위협을 과장하여 기망행위를 했다는 고소장의 주장은 거짓말이다. 오히려 이후에 명백히 확인되는 것은 가해권력이 벌인 거대하고 집중적이며 스펙타클적인 ‘기망’ 작전이기 때문이다. 이 작전이 국민들을 밑도 끝도 없는 거짓의 수렁 속에서 방황하도록 만들면서 진실을 알아야 할 권리를 무참할 정도로 짓밟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실태를 모르는 철없음 때문일까? 아니면 눈 뜬 사람 코를 베려는 야욕 때문일까? 변호사 최나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원고들은 피고의 위의 기망행위를 신뢰하여 ‘피고의 신변보호와 증인들에 대한 지원 등을 목적으로’ 피고의 신한은행 계좌에 후원금을 지급하였는 바, 그 금액은 적게는 1,000원에서부터 많게는 150,000원에 이르며 총 10,231,042원에 이르는 금액을 지출하였습니다. 그러나 앞서 본 바와 같이 피고가 후원을 독려할 당시 밝힌 사용목적은 허위이거나 극히 과장되어 있으며, 피고 본인의 영달을 위하여 후원금을 사용하였다고 볼만한 충분한 사정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원고들은 피고의 기망행위로 인하여 각 후원금에 상응하는 경제적 손해를 입었으며 피고의 진실성을 믿고 소액이나마 후원을 하였던 선의가 짓밟히는 등 회복할 수 없는 정신적인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한편 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자료에 대하여는, 원고들과 피고의 관계, 이 사건 피고가 수많은 언론플레이를 하며 공신력을 쌓은 후 이 사건 기망을 하였던 점, 이에 대한 피고의 책임의 정도, 이로 인하여 원고들이 앞으로 선한 의도의 기부나 후원활동이 위축되어질 것이 염려될 정도로 크나큰 정신적 충격을 받은 사실 등 제반사정을 참작하여 볼 때 그 액수는 20,000,000원이 상당하다 할 것입니다. 이에 피고는 원고들에 대하여 경제적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금으로 10,231,042원과 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자료로 20,000,000원 즉 총 30,231,042원을 배상하여야 할 것이며  이 사건 소장부본 송달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이 정한 연 12%의 비율로 인한 지연이자를 지급하여야 할 것입니다.”

원고들이 4월 23일 이전에 윤지오의 신변보호 등을 목적으로 후원한 돈은 증여(贈與, gift)로 볼 수 있다. 증여는 법률적으로는 ‘일방(一方)의 당사자(贈與者)가 자기 재산을 무상으로 상대방에게 준다는 의사를 표시하고 수증자가 이것을 수락함으로써 그 효력이 발생하는 계약’(민법 554조)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증여는 우리가 알다시피 이미 이행되었다. 이미 이행된 증여에 대해 증여[계약]이 해제될 수 있는 경우란 수증자가 증여자에게 폭행 등 범죄행위(불법행위)를 저지른 경우뿐이다.

과연 윤지오가 원고들에게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가? 이 질문에 대해 최나리는 증여 후에 저지른 범죄나 불법행위가 아니라 증여를 유발한 행위를 불법행위로 단정하고 또 증여 후에 후원금이 목적과 다르게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임의의 추정을 자신의 소송의 근거로 삼는다. “피고가 후원을 독려할 당시 밝힌 사용목적은 허위이거나 극히 과장되어 있으며, 피고 본인의 영달을 위하여 후원금을 사용하였다고 볼만한 충분한 사정이 있습니다.”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펴본바 이 주장은 허위사실이다. 후원금 계좌를 공개하면서 내건 사용목적은 증언자 보호였는데, 그것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경호비가 사비로 지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 장자연 사건 증언자가 보복이나 예방공격에 노출될 위험이 있다는 점 역시 서울지방경찰청장도 인정했듯이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예컨대 윤지오는 정권을 창출하기도 퇴출시키기도 한다고 자임하는 언론사의 전직 기자의 강제추행 혐의에 대해 증언했고 그 사주의 성폭력 혐의에 대해 증언했다. 이후 해당 언론사는 수 십 차례에 달하는 보도로 윤지오의 진술신빙성을 떨어뜨리고 사기꾼으로 몰면서 인성과 도덕성을 실추시켰다. 이것은 교통사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가혹하고 잔인한 공격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잠재적이거나 현실적인 신변위협에 대한 당시 윤지오의 증언은 과장되기는커녕 오히려 과소평가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리고 “피고 본인의 영달을 위하여 후원금을 사용하였다고 볼만한 충분한 사정”이라는 표현은 무고를 해서라도 어떤 형태로건 윤지오를 처벌토록 하려는 최나리의 야욕과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경찰도 통장조회와 압수수색을 통해 확인한 바 있듯이 후원금은 개인적 영달을 위해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돈을 윤지오가 “개인적 영달을 위해서 사용하였다고 볼만한 충분한 사정”은 최나리의 잘못된 사태인식과 상상세계에만 존재하는 것이며 엄연한 무고에 해당한다. 

최나리는 고소장에서 원고들이 “피고의 기망행위로 인하여 각 후원금에 상응하는 경제적 손해를 입었다”거나 “피고의 진실성을 믿고 소액이나마 후원을 하였던 선의가 짓밟히는 등 회복할 수 없는 정신적인 상처를 입게 되었다”며 읽는 이로 하여금 실소를 금치 못하게 만든다. 원고들이 선의에 따른 자신들의 증여행동을 “경제적 손해”로 오인하기까지, 그리고 윤지오로 인해 “정신적 상처”를 받았다는 식의 일종의 착란을 경험하기까지 언론방송들의 마녀사냥용 가짜뉴스폭탄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부어졌던가? 수증자를 고소하기에 나선 증여자(원고)들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제 정신을 갖고 사태를 이해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에 때 맞춰 김수민의 인스타그램은 변호사(최나리)가 무상 변호를 제공할 예정이니 제발 후원금 반환소송에 나서달라고 얼마나 간곡한 호소를 했던가? 오랜 호소에도 불구하고 몇 명 밖에 신청하지 않아 아무래도 어렵겠다는 좌절감까지 피력하면서 말이다. 이미 준비되었던 무상 고소가 한참 시간이 지난 뒤인 6월 10일에야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선의의 증여행위를 경제적 손해로 오인하고 증여행위에서 얻은 자긍심을 정신적 상처로 오인하는 원고집단(그것도 전체 후원자의 10분의 1도 채 되지 않는 집단)을 만들어 내는 데 그만큼 긴 시간과 어려운 노동이 요구되었던 때문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최나리의 고소장은 ‘신뢰’ ‘선의’와 같은 도덕적 언어와 ‘피해’ ‘손해’ 등의 경제적 용어, 그리고 ‘기망’ ‘사기’ 등의 법률적 언어를 엮어서 만든 그럴듯한 장식물로 치장되어 있다. 그런데 그 장식들을 벗겨 보면 무엇이 남는가? ‘1000만원 투자하여 한 달 만에 3000만원으로 만들기’의 재테크 기술이다! 게다가 여기에는 “이 사건 소장부본 송달 다음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이 정한 연 12%의 비율로 인한 지연이자”를 지급받을 수 있다는 유혹적인 고리대 조건도 붙어 있다. 성공만 한다면 수입이 짭짤한 것이다.

일정한 금액을 증여한 후에 수증자를 사기꾼으로 만들어 그 수증자로부터 증여액의 세 배 이상에 달하는 재산을 가로채려는 최나리의 이 소송을 나는 신종 재태크 사기술을 실험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수법이 만에 하나 성공한다면 그것은 이미 시장 교환의 지배에 억압당하고 있는 증여의 문화를 송두리째 도려내고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증여를 수익성 높은 재테크 기술로 만드는 이러한 소송사건을 통해 사람들은 “선한 의도의 기부나 후원활동”에 대해 철저하게 의심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그것이 “위축되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런 결과에 대한 책임은 윤지오가 아니라 최나리(와 원고집단)가 조야할 것이다. 

물론 이 소송이 기소로까지 이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며 그 재테크 실험은 실패할 것이라고 나는 예상한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이 소송의 혜택을 이미 얻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누구일까? 후원금 반환소송의 제기를 통해 윤지오의 증언 신빙성을 떨어뜨림으로써 고 장자연 사회적 타살 사건의 가해권력자라는 지탄을 벗어나고자 하는 세력들이다. 이들은 이 소송을 ‘후원자들까지 돌아섰다’는 여론조작의 도구로 사용함으로써 윤지오의 증언은 믿을 수 없는 것이라는 이미지를 퍼뜨려 그것의  직접적 수혜자가 되었다. 이 상황의 본질을 통찰할 수 있었던 일부의 사람들이, 한 때 윤지오에 대한 증여자였던 수백명의 ‘원고집단’이 이들 성폭력 가해권력이 휘두르는 여론용 몽둥이로 변질되어 가해권력을 위해 이용되는 것에 안타까움과 분노를 표했던 것은 이런 맥락 속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다.(계속)

2. ‘장자연 리스트’에 대한 증언과 ‘위협 경험’에 대한 증언을 기망행위로 몰기

최나리 변호사의 ‘증여의 의사표시 취소로 인한 부당이득 반환청구소송’에 대한 비판(2)

이제 윤지오의 행위를 ‘기망행위’로 보는 (최나리의) 첫 번째 이유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그것은 “후원금을 받을 목적으로 천명한 이유가 신빙성이 없거나 극히 과장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여기서 먼저 살펴야 할 것은 최나리가 신빙성이 없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제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그것은 장자연 리스트에 대한 윤지오의 진술이 신빙성이 없다는 주장이다. 이미 우리는 뉴시스, 박훈, 김수민, 김대오로부터 SBS, 조선일보까지, 그리고 최근에는 조0천 강제추행 사건 1심 판사 오덕식에 이르기까지 마치 입을 맞춘듯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 장자연 리스트에 관한 윤지오의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는 주장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고 장자연에 대한 가해권력자들의 필요와 정확히 부응하는 주장임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윤지오 진술의 신빙성을 뒷받침하거나 확인시켜 주는 10년전의 진술자료나 과거사조사위원회 진상조사단의 보고, 그리고 조희천 강제추행을 기소한 검찰의 기소사유 등을 거스르며 자신의 희망과 욕망을 객관적 사태 속에 투사하는 주관주의적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신빙성이 없다’는 여론과 판단을 만들어 내기 위해 객관적 사태 위에  ‘나는 믿고 싶지 않다’, ‘신빙성이 없어야 한다’, ’신빙성이 없게 만들고 싶다’는 욕망, 당위, 의지의 덮개를 덮어 씌우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김대오는 ‘자신이 문건을 본 적은 결코 없지만 그 문건 속에 결단코 리스트는 없었다’는 해괴한 주장을 펼쳤다. 김수민은 ‘그 리스트라는 것이 윤지오가 참고인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수사관의 책상에서 얼핏 훔쳐본 것일 뿐’이라는 말을 지어내었다. 변호사 겸엄을 하고 있는 시인 박훈은 이번에는 이 두 거짓말을 조합하여 근거로 삼으면서, 윤지오가 장자연 리스트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 거짓말로 펀딩사기를 벌이고 있다는 소설을 써냈다. 

최나리는 이 해괴하거나 날조된 주장들을 자신의 논고의 숨겨진 근거로 삼고 있는데, 이것이 설득력을 갖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2009년과 2010년의 진술조서, 수사발표, 언론보도 등을 송두리째 태워 없애고 최소한 그 2년의 시간을 역사에서 파내 버릴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윤지오가 10년 전의 진술들 속에 리스트가 있었음을 화석처럼 분명하게 새겨놓았고 그것은 유장호와 장자연 오빠 장00의 진술에 의해서도 교차검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당시의 수사발표나 언론보도 속에도 역시 화석들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장자연 리스트 논란과 그 성격에 대해’, ‘김대오의 거짓말’ ‘김대오의 입은 거짓말제조공장인가 자동거짓말기계인가?’ ‘박훈이 장자연 리스트를 없애는 놀라운 방법’ ‘김수민: 살아 있는 모순’ 등에서 장자연 리스트에 관한 윤지오 진술이 갖는 부인할 수 없는 신빙성에 대해 이미 충분히 논했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이것을 입증하는 데 에너지를 사용하고 싶지는 않다. 이런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최나리가 자신의 고소장에서 장자연 리스트에 대한 윤지오의 진술이 신빙성이 없다는 주장을 하면서 어떤 논증도 하지 않으며 고소장 밖에서 이루어진 허구적 주장과 조작된 여론들(주로 김수민이 지어낸 말)을 마치 이미 확인된 사실인 것처럼 인용하는 데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진술이 신빙성 없음’을 ‘기망’의 이유로 삼은 것은 최나리이므로 진술 신빙성이 없음을 입증할 책임도 그에게 있는 것은 분명한데 아직 그는 이에 대해 아무 것도 입증하지 못했다. 

두번째로 살펴야 할 것은 최나리가 ‘극히 과장된 것’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다. 고소장을 보면 이것은 신변위협에 관한 윤지오의 증언에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신변위협 과장에 대한 최나리의 논증 역시 장자연 리스트에 대한 논증만큼이나 허술하기 짝이 없다. 대체 ‘기망’의 다른 이유로 삼은 ‘신변위협 과장’이라는 주장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 것일까?

그가 들고 있는 하나의 근거는 2019년 3월 30일의 윤지오가 청와대 게시판에 올린 국민청원이다. 거기서 윤지오는 경찰측에서 지급해준 위치추적장치 겸 비상호출 스마트 워치가 작동되지 않아 신고를 한 후 9시간이 더 경과했음에도 아무런 연락조차 되지 않고 있음을 들면서 자신이 호출버튼을 누른 이유에 대해 쓴다. 벽쪽에서 기계음이 들리다가 이제 화장실 천정에서 동일한 소리가 들린다, 환풍구의 끈이 날카롭게 끊어져 있다, 출입문 잠금장치가 고장나 수리를 했는데 문쪽을 확인해 보니 오일로 보이는 액체가 문틀 맨위에서 흘러내린 흔적이 있다, 문을 열때 이상한 가스냄새가 났다…이런 이유로 수면을 제대로 못 취하는 중에 소리가 반복되어 비상호출 버튼을 눌렀다는 것이다.

윤지오의 청원은 국민이 국가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는데 국가가 신변보호를 해주지 않아 두려움에 떨고 있는 현실에 대한 경험적 증언이며 증인이 사비로 24시간 경호원을 고용하여 증언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현실은 부당하다는 고발이고 이 부당한 현실이 바로 잡혀야 한다는 개혁의 요청이다. 

다행히 윤지오의 청원이 일부 받아들여져 문재인 정부와 경찰청은 청원마감일이 오기 전에 윤지오에 대한 일정한 경호조치를 취했다. 원경환 서울지방경찰청장은 “보복이 우려되는 중요범죄 신고자나 피해자 보호는 경찰의 중요한 본분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건에 미흡한 업무처리로 윤지오씨는 물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려 최종하다”고 사과했다. 

이후 4월 하순경 경찰이 신고사항에 대한 과학적 조사결과 발표라는 이름으로 기계음, 환풍구, 출입문, 가스냄새 등에 대해 어떤 상황설명을 했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윤지오가 위협으로 느낀 일련의 흔적들과 현상들이 조사결과 실제적 위협의 흔적이나 현상은 아니었다는 설명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설명은 윤지오에 대한 마녀사냥이 본격화된 시점에 이루어졌다. 우선 그 날의 설명은, 경찰조차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윤지오에게 설명해 준 바 없는 스마트워치 조작상의 특성을 윤지오의 조작미숙 때문에 잘못 작동되었다는 식으로 설명하면서 책임전가하는 파렴치한 발표였다. 게다가 몇 가지 개개의 흔적과 현상에 대한 경찰의 설명은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 심지어 언론은 가스냄새가 났다는 문제제기에 대해 ‘어떻게 호텔에서 가스냄새가 날 수 있습니까?’라는 호텔 직원의 해명을 반박 자료로 인용했다. 백보 양보하여 그 상황적인 설명들이 맞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보복우려”에 대한 반증이 아니다. 다시 말해 그것이, 중요 범죄 신고자에게는 “보복 우려”(와 예방공격의 위험)가 따른다는 보편적 사실, 즉 서울지방경찰청장이 인정하고 사과한 바 있는 그 보편적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당시 윤지오가 느낀 기계음이나 환풍구 출입문 가스냄새 등이 설령 위협이 실행되고 있었다는 것의 증거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증언자가 예사롭지 않은 어떤 흔적이나 현상들로부터 우려를 느끼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단순한 심리적 현상이 아니라 실재적인 것이다. 증인이 느끼는 위협감과 두려움은 경찰이 제시한 설명으로 그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보다 더 실제적인 잠재적 실재성(보드리야르)이기 때문이다.  

예방이나 보복은 일반적으로 다양한 유형의 폭력 형태로 가해져 오는 것인데 그것에 대한 우려와 두려움을 과연 과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만약 최나리가 진정으로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러한 생각은 국가가 증언자나 피해자를 보호할 의무를 지지 않아도 됨을 지시함으로써 국민들을 엄청난 위험 앞에 노출시키는 위험한 발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만약 그런 생각에 따라 국가가 실제로 국민들을 방기한다면 국민들은 가해권력의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국가와 별도로, 아니 국가에 맞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자경단이라도 조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실제로 윤지오가 공익제보자 보호를 위한 비영리단체 지상의빛을 설립한 것은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 주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자경단은 아닐지라도 비정부기구를 통해 공익제보자를 돕자는 취지를 반영한 것이다. 

최나리가 드는 “위협 과장” 사례의 또 하나는 윤지오가 2019년 4월 11일 JTBC 뉴스룸에 출연하여 자신의 신변위협을 과장했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손석희 앵커와 가진 윤지오의 이날의 인터뷰는 전직 조선일보 기자였던 조0천 강제추행건에 대한 증언, 한국에서 활동하다 캐나다로 떠나게 된 이유, 2018년 6월과 12월 JTBC와의 익명의 전화 인터뷰 이후 당했던 두 번의 교통사고와 가해권력들로부터 받은 위협들,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 등에 관한 것이었다. 

이날 윤지오는 앵커로부터 증언에 대한 보복이나 위협에 대한 질문을 받고 자신이 위협감을 느낀 세 가지의 사건을 언급한다. (1)“장자연 문건에 언급된 유력 언론사”(조선일보)가 향초납품업체와 교회에 전화를 해서 윤지오 씨와 연락이 안 된다며 소재를 물은 것. (2) 이전의 매니저 권00가 JTBC와 인터뷰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JTBC가 너를 이용하는 기분이 드니” 인터뷰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고 정작 자신은 뉴시스와 인터뷰를 하여 “지오는 옛날부터 유명해지고 싶어 한 친구”, “실제로 지오는 자연이와 친하지 않았다”는 식의 허위주장을 한 것. (3)JTBC와의 전화인터뷰 이후 교통사고가 좀 크게 두 차례가 있었고, 근육이 찢어져서 손상되면서 염증이 생긴 것.

최나리는 여기서 (3)번 항을 신변위협에 대한 과장이라고 규정하고 그 근거를 김수민으로부터 가져온다. “소외 김수민은 피고가 당한 신변 위협은 조작된 것인데 그 중 특히 2019.1 발생한 교통사고는 눈길에서 미끄러지며 뒷차가 충격을 가한 단순한 추돌사고였으며 가해자 차주는 평범한 아이의 아빠라는 사실을 이미 피고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위 JTBC 뉴스룸[에] 출연 당시에 파손이 심한 뒷차 즉 가해자의 차량을 자신의 차량인 것처럼 기망하여 조작을 가하였고…”가 최나리가 해당 사건에 대해 쓴 문장이다.  

“가해자의 차량을 자신의 차량인 것처럼 기망하여 조작을 가하였고”라는 문장은 논박할 가치를 느끼지 않는다. 윤지오가 거대방송사 JTBC의 자료화면을 조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을 하려면 최나리 변호사가 JTBC 측에 확인하여 사실과 상황을 확인하는 정도의 노력은 기울였어야 마땅할 것이다. 문제는 이 사건에 대한 김수민의 비꼬인 해석이다. 카톡 대화 속에 그 교통사고가 ‘애기 아빠가 일 끝나고 애들 데리러 가다가 과실로 발생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는 윤지오의 말이 나온다. 김수민의 해석은 전적으로 이 카톡구절에 의지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귀기울여 듣지 않는 것은 그런 카톡 이후에 윤지오의 마음 속에 일어난 변화이다. 그는 이미 여러차례 이에 대해 밝힌 바 있다. 처음에는 평범하고 단순한 교통사고라 생각했으나 이후 가족을 비롯한 주변사람들로부터 사고를 위장한 가해공격일 수 있지 않느냐, 앞으로 더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점점 그 사고에 대한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나리는 윤지오의 이러한 말은 전혀 참고하지 않고 김수민보다 한술 더 떠서 JTBC에서의 인터뷰를 ‘과장’ ‘조작’ ‘기망’ 등의 언어로 도배해 버린다. 이 인터뷰를 할 당시 앵커 손석희는 윤지오의 말을 듣고 이미, “거기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은 교통사고는 일어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지 않겠는가?]”고 있을 수 있는 반론을 의식하며 질문을 했다. 이에 대해 윤지오는 자신이, 증언으로 인해 불특정다수의 권력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 놓여 있고 교통사고를 이 맥락에서 받아들이게 되는 조건을 토로한다.

“그런데 JTBC에 제가 전화 인터뷰에서 사실을 기록한 사건을 다룬 책을 쓴다라고 한 시점부터, 제 행방을 추적하시는 어떤 분들이 계셨고. 또 사실 어떠한 한 언론사만 주목을 하시는데 사실은 한 곳이 아니라 저는 개인 혼자지만 제가 상대해야 될 분들은 A4용지 한 장이 넘어가는 거의 한 30명에 가까운, 공권력을 행사하실 수 있는 법 위에 선 분이시기 때문에 불특정 다수에게서 저는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고. 그분들에 대해서 또 언급을 직접적으로 하면 명예훼손으로 걸리기 때문에.”

평범한 교통사고로 보일지라도 그것이 불특정다수로부터 가해져오는 위장된 공격의 하나일 수 있다는 답변이다. 가해자는 법 위에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다수의 사람들이고 그렇게 특정하기 어려운 다수로부터 보복이나 예방공격을 당할 수 있는 것이 증언자가 놓여진 위치임을 부정할 수 있을까? 이 말이 설득력을 갖는 한에서 어떻게 교통사고로부터 위협을 느꼈다는 인터뷰 진술이 과장, 조작, 기망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오히려 4월 이후의 사태 전개는 특정하기 어려운 가해권력들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입장이며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윤지오의 말이 참이었음을 뚜렷이 입증해 준다. 왜냐하면 증언자 윤지오에 대한 마녀사냥식 공격이, 조선일보 SBS 뉴시스를 비롯하여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언론사와 통신사, 홍준표를 비롯한 정치가, 박준영 박훈 최나리 강연재 등의 변호사, 김대오 김용호와 같은 기자, 서민과 같은 교수, 김수민과 같은 작가 등의 지적 법률적 정치적 미디어적 화력을 총동원하면서 윤지오에게 집중적으로 퍼부어지는 것을 우리가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이 총력전 과정을 통해 윤지오가 대한민국 시민사회로부터 추방되고 배제된 현실을 고려하면, 윤지오가 자신에게 닥쳐온 위협을 과장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소평가하고, 과소대비했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상황을 더 잘 설명해 주지 않겠는가?(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