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여혐오: 김수민의 “사기야!”의 경우(7)

나가며

지금까지 우리는 김수민의 증여 혐오 감성을 사례로 증여사회와 교환사회의 관계에 대해 고찰했다. 교환사회에서도 증여관계는 소멸되지 않는다. 심지어 증여관계는 교환사회의 바탕에서 교환의 가능조건을 제공하고 교환사회의 한계를 보충하며 교환사회를 넘어 도래할 사회에 대한 상상을 제공한다. 김수민은 증여사회에 한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관념상에서 증여를 부정하고 특히 화폐적 형태의 증여(후원금)에 대해서는 혐오 알레르기를 보인다. 이수역 사건 피해 여성, 고 장자연 사건 증언자 윤지오가 후원금과 관련되자마자 김수민은 ‘사기야!’를 외쳤다. 그는 증여관계의 실재를 부정하고 교환관계만을 유일하게 합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시장근본주의적 태도를 보였다. 김수민의 변호인을 자청한 박훈의 사회주의도 이 시장근본주의, 즉 교환지상주의에서 멀지 않다는 것은 양자의 협력관계를 통해 반증된다. 그런데 이들의 경우에는 관념과 정동 사이에 괴리가 있고 모순이 있다. 이들과 달리 5월 이후 윤지오에 대한 고소고발에 나선 최나리, 강연재(홍준표), 박민석 등은 시장근본주의를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뉴라이트적 태도 속에서 사건을 바라본다. 문제는 더욱 심화되고 사건은 더욱 철저해진다.  

김수민의 세 번째 “사기야!”와 그 이후의 행보, 그리고 그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태들은 시장근본주의가 교환의 가상 아래에서 본질적으로는 진정한 사기행각을 벌이는 체제임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사칭은 언론사와의 교환 계약을 통해 합법화된다. 즉 누구든 돈만 내기만 하면 의사, 부동산투자자문가, 교수, 기자 그 무엇으로도 될 수 있다. 언론이 돈을 주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 사람이 누구이건 뭘 하는 사람이건 그가 원하는 바로 그 직업의 사람이라고 기사홍보를 해주기 때문이다. 내가 ‘X’라고 사칭할 필요가 없다. 언론이 화폐와의 교환 조건으로 내가 말하는 것을 사칭해 주기 때문이다. 성폭력을 한 사람도 돈만 내기만 하면 무죄의 사람으로 세탁될 수 있다. 피해자나 증언자 같은 무죄의 사람도 언론과 변호사에게 돈만 내기만 하면 가해자, 사기꾼 같은 유죄의 인간으로 만들 수 있다. 증여에 대한 혐오를 기초로 드높아진 김수민의 교환에의 열정은 이처럼 폭력, 절도, 사기 등 등가교환이 추방하고자 했던 모든 어두운 관계들과 행동들을 뒷문으로 불러들이는 열정임이 드러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증여사회에서 교환사회로의 이행이 시초축적을 위해 생산수단으로부터 생산자를 분리시키는 국가권력의 사기적 입법 폭력, 무자비한 엔클로져(enclosure) 폭력, 그리고 여성을 수천년 걸쳐 익숙해진 생활환경에서 분리시키고 남성에게 종속시키는 마녀사냥 폭력 등에 의해 강제되었음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교환사회가 폭력, 강탈, 사기에 의해 탄생했던 만큼 그것의 지속과 재생산도 교환의 탈을 쓴 폭력, 강탈, 사기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증여혐오: 김수민의 “사기야!”의 경우(6)

“사기야!”의 종국과 본질

증여-수증-증여의 호혜적 순환은 자본주의적 상품사회와는 별개의 논리와 메커니즘을 갖고 가동되는 다른 질서다. 증여관계는 오늘날 자본주의적 시장사회의 바탕에서 시장질서의 한계를 보충하는 보조적 기능을 담당하는 데 머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증여관계는 언젠가 시장질서가 더 완전해지면 사라질 그 무엇으로 인식되곤 한다. 하지만 그 반대가 진실일지도 모른다. 등가의 시장질서야 말로 가치로 측정할 수 없는 것들의 공통장, 즉 호혜적 증여관계 위에서 파생된 역사적으로 일시적인 질서일지 모른다. 증여의 공통장이 시장보다 더 근본적인 것일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시장질서가 점점 더 폭력, 수탈, 절도, 사기에 의해 지배되어가는 현대적 경향 속에서 좀더 분명해지는 것 같다. 시장의 완숙이 철저한 등가질서를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예상과는 달리 오히려 철저한 부등가의 질서, 불평등의 질서, 사유화의 독재를 가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맑스의 생각을 참조하면 시장 질서 속에 과연 등가교환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었는지, 등가의 질서가  단 한 번이라도 성립한 적이 있었는지 의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맑스는 우리가 등가교환으로 알고 있는 상품교환의 질서야 말로 부불노동의 절도라는 부등가교환을 그것의 내적 비밀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잉여가치, 이윤은 등가를 지불하지 않은 것이고 그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이다. 자본주의는 잉여가치의 절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질서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대의 시장이 점점 강탈, 절도, 사기에 의해 지배되어 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시장질서의 세포관계인 상품교환 그 자체가 애초부터 내포하고 있었던 부등가교환과 절도의 맹아가 만발하여 등가교환 질서를 침식하고 파괴하기에 이르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김수민은, ’윤지오의 귀국 목적은 증언이 아니라 돈과 명성이었다’ ‘윤지오는 자기홍보에 장자연을 이용했다.’’윤지오는 출판과 사업을 통해 돈을 모으려 했다’ ‘윤지오는 돈을 모으기 위해 위험을 과장했다’ ‘윤지오는 유가족의 뜻을 무시했고 유가족을 비난했으며 그들과 나눠야할 할 돈을 독차지했다.’ 등등의 말로 윤지오의 증언을 돈벌이를 위한 사기 수단으로 폄하했다. 김수민의 고발논리는 윤지오의 증언은 1억원 이상 화폐 후원금과 교환될 수 없고 또 교환되어서도 안 된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김수민의 생각대로 그것이 ‘가식’과 ‘가짜’의 증언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 증언은 제로가치(0원)일 것이고 그러니 1억원과 교환될 수는 없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김수민은 시장근본주의적 인식 속에서 증언-증여라는 현상을 파악한다. 이러한 인식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는 10년 동안에 걸친 16번의 증언을 모두 돈을 목적으로 한 사기행동으로 만드는 불합리한 시간소급까지 행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고 장자연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재벌, 정치권, 언론계, 법조계, 연예계의 성폭력 권력이 문제가 아니라 ‘윤지오라는 새로운 권력이 문제다’라는 표적 바꾸기를 가져왔다. 이후 그는 ‘사기꾼’ 타도라는 구호 아래에서 윤지오를 죽이는 데 총력을 기울였고다. 김수민은 말로는 ‘장자연 사건이 희석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조선일보 SBS 등 장자연 사건과 연관된 이른바 ‘가해권력’과 손잡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김수민이 이 방송사들의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윤지오의 증언은 거짓이고 사기’라고 말할 때, 이 가해권력들은 확실한 면죄부를 얻고 장자연 사건의 본질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희석’시킬 수 있었다. 문제는 성폭력 가해권력이 아니라 윤지오의 증언 신빙성으로 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 때문에 사람들이 김수민을 가해권력이 증언 대오에 들여보낸 트로이의 목마로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김수민은 모순에 찬 자신의 증여 혐오를, 한 번은 이수역 피해 여성 그리고 또 한 번은 증언자 윤지오를 향해 표현했다. 이들을 돈벌이를 목적으로 한 사기행위자로 고발한 두 번의 행동이 그것이다. 이솝우화 속의 양치기 소년도 두 번 “늑대야!”라고 외쳤지만 그 소년은 늑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김수민은 자신이 사기꾼으로 고발한 사람들이 사기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이수역 사건에서 ㅎㅇ가 김수민에게 피해 여성이 사기를 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었음에도 김수민은 모른체하며 이른바 “공론화”(피해여성측에서 보면 2차가해이자 무고)를 멈추지 않았다. 윤지오가 김수민에게 “당신이 나에 대해 행하는 것은 이수역 사건 피해여성에 대한 2차가해와 동일한 2차가해이자 무고”라고 알려주었음에도 김수민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 말이 자신에 대한 명예훼손이라 주장하며 변호사 박훈과 함께 고소를 했다. 김수민은 이들이 사기꾼이 ‘아님’을, 혹은 적어도 ‘아닐 수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 모른체한다. 이것은 결국 알고 모름, 즉 인식이 근본 문제가 아니라 상대방을 무너뜨리고 처벌받게 하고 싶다는 의지, 욕망이 근본 문제임을 보여준다. 

양치기소년은 실제로 늑대가 몰려 온 세 번째 순간에도 “늑대야!”라고 외쳤지만 아무도 그 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양들은 늑대의 먹잇감이 되었다. 김수민도 이 양치기 소년처럼 “사기야!”라고 외쳐야 하는 세 번째 계기를 맞게 된다. 서0혁이 나타나 슛맨과 손잡고 윤지오에 대한 유튜브 방송 까판을 벌렸을 때다. 김수민은 이들과 손잡고 윤지오 비난 까판에 합류했다. 하지만 얼마 뒤 김수민은 서0혁이 사칭 전문가임을 알게 된다. 김수민은 늘 그렇듯이 이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윤지오 까판을 슈퍼챗(후원금)을 얻는 데 이용한다며 다시 한 번 “사기야!”라고 외치게 된다. 이번에는 진짜 ‘늑대’가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김수민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도리어 김수민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사기꾼과의 투쟁’이라는 미명하에, 한 번은 피해자를, 또 한 번은 증언자를 사기로 몰아 여론의 뭇매를 맞게 만듦으로써 가해자를 유리하게 만들었던 김수민의 “사기야!”는, 실제의 사칭 전문가가 나타났을 때에는 어떤 경보기능도 하지 못했으며 늑대들이 양들을 먹어치울 수 있도록, 즉 사칭과 사기가 여론을 지배할 수 있도록 활짝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피해자와 증언자를 사기꾼으로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독을 내뿜는 화기로 사용되었던 김수민의 인스타그램은, 드디어 진짜 사기가 나타났을 때에는 그것과 싸우는 무기로 기능하기는커녕 안온한 일상의 혼잣말로 돌아가 그 진짜 사기를 방조하는 평화로운 잡담장소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윤지오라는 새로운 권력’에 대한 고발의 본질이 진짜 가해권력을 돕는 것에 있었고, “사기야!”의 본질이 진짜 사기를 돕는 것에 있었음을 자백이라도 하려는 듯이.

증여혐오: 김수민의 “사기야!”의 경우(1)

들어가며

‘증여(贈與)’를 순우리말로 표현하면 ‘주다’라는 뜻이다. 영어에서 증여를 뜻하는 ‘gift’도 주다는 뜻의 ‘give’에서 나온다. ‘주다’는 물건, 시간, 자격, 권리, 역할, 지식, 감정, 경고, 암시, 마음 등 물질적이거나 비물질적인 것을 넘겨주어 그것을 누리거나 느끼게 하는 행동을 지칭한다.  이 말은 ‘투자하다’, ‘기부하다’ 등의 (준)경제적 행동; ‘수여하다’, ‘하사하다’, ‘상납하다’, ‘선사하다’ 등의 사회적 행동; ‘투여하다’, ‘베풀다’ 등의 윤리적 행동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주다’는 ‘얻다’나 ‘뺏다’보다는 ‘받다’에 대응한다. 우리말 ‘받다’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받치는 모양을 암시한다. 즉 ‘받다’는 물질적 비물질적 은혜를 입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에 돌려주어야 할 책무, 즉 ‘갚’을 의무를 어느 정도 함축한다.

‘주다-받다-갚다’의 연쇄는 근대 이전의 시대에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원리, 아니 기본적 원리였다.  마르셸 모스는 이것을 ‘증여-수증-답례’의 순환적 반복연쇄라고 표현했다. 여기서 답례는 새로운 증여이기 때문에 이로부터 새로운 수증과 새로운 답례의 순환이 촉발되기 때문이다. 얼핏보면 증여사회를 구성하는 이 원리는 근대 이후 사회의 교환원리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교환사회에서도 상품을 주고 화폐를 받으며 화폐를 주고 상품을 받는 C-M-C의 부단한 순환이 관철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증여사회와 교환사회 사이에서 주고-받음은 두 가지 커다란 차이가 있다. 증여사회에서 주고-받음은 계약한 두 당사자간의 주고 받음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을 공동체 내의 다른 사람에게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고 받음이 개인들(계약 당사자들) 사이의 주고-받음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 속에서의 주고-받음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차이가 있다. 교환사회에서는 주는 것과 받는 것은 등가여야 한다는 원리가 작동함에 반해 증여사회에서 주는 것과 받는 것이 같게 되는 것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주는 것과 받는 것이 다르고 부등가일 때 오히려 의미를 갖는 것이 증여였다. 증여사회의 후기에 관찰되는 포틀래치 경쟁은 이 다름의 원리가 받은 것보다 경쟁적으로 더 많은 것을 줌으로써 자신의 명예 및 권력 상의 우위를 확인하려는 문화로 될 때 나타나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증여형식이었다.

이 자리는 증여사회가 어떻게 교환사회로 이행했는지에 대해서 논할 자리는 아니다. 다만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에는 맑스의 시초축적에 대한 분석(<자본론>)이나 실비아 페데리치의 마녀사냥에 대한 분석(<캘리번과 마녀>), 정신병원 감옥 임상의학 등의 탄생에 관한 푸코의 분석(<광기의 역사>, <감시와 처벌>, <임상의학의 탄생>) 등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만 언급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이 저자들은 한결같이 이 이행이 자연스럽고 순조로운 이행과정이 아니라 입법만이 아니라 총칼이나 감금, 화형식과 같은 군사적 사회적 종교적 폭력을 동원한 과정이었다고 서술한다. 사람들을 교환사회 질서에 순응하도록 만들기 위해 증여사회의 인지양식, 문화, 관습에 대한 대대적 공격이 필요했다. 증여에 대한 혐오가 그것인데, 부등가의 교통형식인 증여는 등가교환의 질서를 안착시키지 못하도록 막는 장애물이었기 때문이다.  증여혐오는 증여질서의 구성원으로서 그것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사회질서 바깥으로 추방하거나 강제로 수용하여 감금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술사, 예언자, 점술가, 음유시인, 떠돌이, 예술가, 혁명가 등이 이 증여혐오의 주요 표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