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5/161 Articles

  1. 2008/05/16 한국정치현실의 easton 모형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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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 현실의 Easton 모형에의 적용


<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중심으로 (1985∼1987) >

1. 당시 전두환 정권의 성격(Political System)      : 국민적 정당성을 결여한 폭력적이고 폐쇄적인 권위주의적 군사 독재 정치체제  

2. 시대적 환경(Environment)

(1) 정치 : 1983년말에서부터 1985년 중반에 이르는 시기는 체제 정비를 마친 권력이 탄압을 일정 정도 완화시켜 이른바 유화 국면이 전개되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학원정책의 변화로 시작된 이러한 유화조치는 5공화국정부의 고육책이자 1980년 이후 3년간의 정치적 경험을 통해 통치능력을 강화한  5공화국이 그에 기반해 나름대로의 정치적 자신감을 근거로 공세적으로 채택한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정치'가 완전히 배제된 지배보다는 '정치'를 병행하며, 궁극적으로 '정치적' 지배로 이행하는 것이 지배세력 전체의 이익에 부합된다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독재권력의 '유화'보다 이를 계기로 복구된 민족 민주 세력의 '강화'가 더 두드러졌던 특징을 보이고 있다. 학생 운동은 강력한 조직적 투쟁을 통하여 독재 권력에 도전했으며, 노동 운동 역시 조직적 연대를 모색하면서 점차 정치투쟁적 성격을 강화시켜 나갔다. 재야 세력도 조직적 통일을 적극 모색하였다. 한편 체제 정비기에 제도권 밖으로 배제되었던 재야 야권은 1984년 5월 '민주화 추진 위원회(민추협)'을 결성하며 점차 정치활동의 여지를 넓혀가다 1985년 2월 12일 총선에서 신한민주당의 이름으로 승리함으로서 일거에 제1야당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2) 경제 :  1980년을 전후해 세계적인 공황의 영향과 불안정한 정치 상황으로 인한 마이너스 성장과 외채의 급증이라는 상황에 등장한 5공화국은 경제 안정화 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이러한 자유주의적인 경제안정정책이 외부환경의 변화와 물가안정정책의 성과라는 유리한 조건과 맞아 떨어져, 한국경제가 외형상 경제적 침체에서 벗어나 경기회복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는 집권과정에서의 정당성 결여를 경제적 업적으로 메우려는 전두환 정권의 의지가 성공한 것 처럼 보여 전정권은 정권의 안정화에 어느정도 자신감을 갖기 시작한다. 정치적 유화조치는 어느정도 이러한 정권의 자신감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정권의 경제업적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전정권에 대한 '신뢰' 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3) 사회 : 당시 한국 사회는 정치적 선호를 놓고 국민들 사이의 심각한 분열상태가 표출되고 있었다. 즉 전두환 정권을 지지하거나 그것을 야당이나 재야보다 선호하려는 국민층과, 그 정권을 반대할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해 강한 적대심 또는 반감을 갖는 국민층 사이의 차이와 구별이 매우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의 정치문화 속에 과거 어느 때에도 볼 수 없었던 폭력에 의해서라도 정권을 퇴진시켜야 한다는 전투적인 정치적 성향이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80년대의 한국사회는 정권을 놓고 찬성과 반대라는 선명한 선호패턴을 나타내는 균열구조를 갖게 되었을 뿐 아니라 정권세력과 반대세력이 날카롭게 대립하는 양극화된 불안정한 정치문화로 변해가고 있었다.

3. 진행과정(Input, Output, Feedback)

제 1 기

(1) 투입 : 전두환의 1986. 1. 16 국정연설에서 88년 평화적 정권교체가 끝난후에 개헌논의 시사에 대한 Feedback으로써 청년·학생 및 사회운동단체들은 2월 4일 서울대집회에서 '헌법철폐투쟁대회 및 개헌서명운동 추진본부 결성식'을 갖고 이를 계기로 직선제를 핵심으로 하는 민주헌법쟁취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신민당도 2월 12일 ‘2·12총선 1주년기념식’을 기해 1천만 개헌서명운동을 전격적으로 시작함으로써 민주헌법쟁취투쟁에 가담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민우 신민당총재와 양김씨는 난국타개 6개항을 제시하였는데, 그것은 1986년 가을 대통령직선제 개헌완료, 87년 가을 대통령선거 실시 등 제도권정치의 복원을 주요내용으로 한 것이었다.(Demand) 여기에서 직선제쟁취라는 당면의 정치적 목표를 같이하는 신민당 등 야권과 민주화운동세력간에 민주대연합이 형성되었다. 1986년 3월부터 신민당은 개헌추진위 각 지부 결성식을 통해 직선제개헌쟁취투쟁을 대중집회의 형식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3월 30일 광주에서 개최된 '개헌추진위 전남지부 결성대회'에 35만 명의 시민이 참가하여 직선제개헌쟁취투쟁의 대중성을 크게 고양시켰으며, 지식인·종교인·교수들의 시국성명 역시 이 시기 직선제개헌의 당위성을 대중적으로 선전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였다. (Support)

(2) 산출 : 이와 같이 개헌 서명 운동이 장외에서 급속히 확산되자 5공 정권은 임기내 개헌 불가의 당초 입장에서 물러나, 신민당과 재야를 분리시키고 개헌 논의를 정치권 안으로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1986. 4. 30 전두환은 청와대 3당 대표 회동에서 국회가 합의한다면 임기내 개헌에 반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Decision) 그러나 국회내 합의 개헌이 지지부진하자 5공 정권은 여야 합의 개헌보다는 '합의성 합법 개헌', 곧 일부 야권과 결탁하여 다수의 힘으로 의원 내각제 개헌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키고자 하는 시도를 모색하였다. 그 과정에서 12월 24일 '이민우 구상'이 나왔다. 이민우 구상의 핵심적인 내용은 7개항의 민주화가 선행된다면 내각제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1987. 2. 12일 민정당 확대간부회의는 '내각제 합의개헌'을 부동의 당론으로 재확인하였다. (Policies)  

제 2 기   Feedback

(1) 투입 : 이민우 구상이 공론화 되던 1986년 12월 김영삼, 김대중 양 김씨는 대통령 직선제를 고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재야세력과 연합전선을 구축하였다. 그들은 1987년 4월 74명의 국회 의원과 더불어 신민당을 탈당하여 신당창당을 선언하였고 대통령 직선제에 대한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Demand, Support)

(2) 산출 : 국회내 개헌 논의의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여당과 재야를 갈라놓는데 성공한 5공 정권은, 그 사이 재야 운동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여 그들의 세력을 꺾어 놓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국민대중과 양 김씨의 이민우 구상에 대한 반대로 내각제 개헌을 통하여 보수대연합적 지배구도를 정착시키려던 의도가 좌절되었으며, 양 김씨와 재야의 거쎈 반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5공 정권은 1987년 4월 13일 일체의 개헌 논의를 중단하며 헌행 헌법으로 차기 정부를 구성하겠다는 호헌조치를 취하게 된다. (Policies)

제 3 기   Feedback

(1) 투입 : 5공화국이 선택한 무모한 4·13호헌조치에 대한 정치적 반대는 초기에는 광범위한 지식인들의 성명전으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대중적으로 강력하게 조직되었다. 4·13분쇄와 직선제쟁취투쟁이 점차 대중적 세를 형성하던 5월 27일 재야와 통일민주당등 80여 명의 각계대표가 모여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발기인대회 및 결성식을 거행하기에 이르렀다. 국민운동본부는 6·10대회를 박종철사건 조작 규탄뿐만 아니라 4·13호헌조치의 철회와 민주개헌쟁취에도 초점을 맞추기로 함으로써 정치국면의 성격을 개헌공방으로 보다 분명히 규정하였다. 국민운동본부의 결성으로 인하여 4·13호헌조치 전 1년여에 이르는 개헌운동과 4·13호헌조치 직후부터 전개된 민주헌법쟁취운동이 결여하고 있던 정치적 구심이 건설됨으로써 민주헌법쟁취운동은 전국적·전국민적 대중정치투쟁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하여 이제 '6월항쟁'이라고 불리우는 범국민적인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Demand, Support)

(2) 산출 : 이 같은 민중들의 대규모 투쟁에 결국 5공화국 정권은 1987년 6월 29일 '6·29 선언'을 통해 일단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서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수용, 대통령 선거법 개정, 김대중씨 사면 복권 및 극소수를 제외한 시국 관련 사범 석방, 국민 기본권 신장, 언론 자유 창달, 지방 자치제 실시와 대학의 자율화, 정당의 자유로운 활동 보장, 과감한 사회 정화 조치등 8개항을 약속 했다. (Policies)

4. 結

 이상으로 6·29 선언이 나오기 까지의 정치적 과정을 Easton의 체제모형에 적용을 해보았다. 그런데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야당과 민주화 세력들의 요구와 그에 대한 산출로써 도출된 정책을 볼 때, 그러한 요구에 부합하는 정책이라기 보다는 당시 집권세력의 정치체제를 유지시키며 요구를 무마하기 위한 미봉책으로써의 정책이라는 성격이 짙다. 이렇게 볼 때, 산출로써 나타나는 정책이 언제나 투입에 부응하여 결정되는 것이라는 Easton모형은 당시 한국사회를 설명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지울수 없다.  


본 글은 동아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정치과정론' 강의(1998, 이대규교수님)때 'David Easton 모형의 현실적용'이라는 주제에 대해 94학번 이병권, 김광진 95학번 차선희가 조사하여 발표했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