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세계에서 우리는 여러가지 정보들을 오리고 붙이고 지우고 겹치고 비틀 수 있다.
그렇게 새로운 세계를 구성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렇게 오리고 붙여지고 지워지고 겹쳐지고 비틀린  세계에서 숨쉬고 나눈다.

그래도 우리는 원래 세계가 무엇인가? 사실이 무엇인가? 진리가 무엇인가? 라고 묻고 싶어진다. 그래서 그 비틀린 세계 이면의 어떤 본원적 세계에서 문제의 해답을 찾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것은 고고학적 취미일 수는 있어도 유효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원상의 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라 구성된 세계에 사는 것이며 원상을 묻는 그것조차도 복사, 붙이기, 겹치기, 비틀기의 과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극단적으로 우리는 사실들도 구성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디지털 세계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말과 글과 이미지로 교류하는 인간 사회가 디지털 세계 이전의 디지털 세계이다. 여기에서 오려붙이기 지우고 비틀기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좀더 프라그마틱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세계의 이 직조적 성격에 대한 인정에서 출발해야 한다. 거짓만들기가 가능하고 그것이 실재적이라는 것. 실제로 거짓만들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 거짓과 진실의 싸움이 아니라 거짓만들기들 사이에서의 싸움이 중요하다는 것. 어떤 거짓만들기인가? 해방과 자유의 거짓만들기인가 억압과 부패의 거짓만들기인가?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만약 당신이 해방과 자유의 거짓만들기를 선택하려고 한다면 그 길에 충실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거짓을 만들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은 쓸모없다. 왜냐하면 당신 자신도 사실들을 소재로 할 뿐 그것으로부터 거짓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도덕이 아니라 윤리가 필요하다고 한다면 무엇이 우리를 해방시키고 해방을 넘어 자유롭게 할 것인가, 무엇이 그 힘을 증대시킬 것인가에 대한 윤리학적 숙고가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리라.
2009/08/31 10:38 2009/08/31 10:38
대학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은 인문학의 위기를 불러왔다. 인문학과들의 통폐합, 폐과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인문학을 지키려는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첫째는 대학의 인문학과들의 반응이다. 인문학과와 인문학 교수들을 살리는 것에 이 반응의 초점이 있다. 대학이 보호하지 못하는 학과와 교수를 국가의 힘을 빌어 보호하려는 것이다. 그 방법은 국가로부터의 재정지원이다. (이것은 사회적 입장은 차이가 있지만  정리해고로 위기에 빠진 노동 조합들이 국가의 재정지원을 요구하는 것과 맥이 닿아 있다.) 이 흐름은 인문을 사회의 정신적 리더쉽의 특권적 생산공간으로 파악한다.

둘째는 기업과 시장에서 이는 인문붐이다. 예컨대 CEO를 위한 인문학 같은 것. 이것은 생산의 지성화, 비물질화와 연관되어 있다. 인문과 예술은 오늘날 생산의 주요한 요소로 편입된다. 생산의 주요 주체는 사회 자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영은 인간들의 사회를 아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 사회를 어떻게 포획할 것인가가 이 인문붐의 주요 관심사이다.

셋째는 대학이나 기업 밖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나는 인문사회과학운동들이다. 다중지성의 정원, 철학아카데미, 수유+너머, 지행, 문지 사이...등의 단체나 기관들이 맑스, 들뢰즈, 네그리, 푸코, 메를로퐁띠 등의 사상을 소개하고 실천하면서 인문사회과학의 활동공간을 탈제도화하기 시작했다. 이 흐름이 어떻게 발전해 나갈 것인가? 대학들은 이미 이곳의 실험들을 흡수하기시작했다. 중앙게르마니아(중앙대)나 서산철학강좌(연세대)가 그 예이다. 이 흐름이 촛불봉기와 같은 다중운동의 지성적 기관으로 발전하면서 공통체 구축의 에너지로 작용할 것인가 아니면 대학, 기업, 시장의 위기를 보충하는 보완물로 되면서 권력 재구성의 대기실로 될 것인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이 흐름이 다중지성의 기관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인문학, 인문사회과학이라는 말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인문과 사회라는 말은 근대 초기의 분업적 연관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식으로. 오늘날 인간이나 사회는 제2, 제3의 자연이고 자연과 사회, 인간의 구별은 그렇게 뚜렷하지 않다. 경제, 정치, 문화의 경계 역시 그러하다. 점점 삶정치학이 모든 탐구들의 결절점으로 기능하고 있다.



2009/08/30 12:48 2009/08/30 12:48

백남준 비디오아트의 맥락

Posted at 2009/08/30 10:03// Posted in 쓰기(skribi)/시학_P
*1968혁명과 백남준
백남준은 68혁명을 예술에서 지속한다.
첫째 1917혁명의 전기화와는 다른 전자화. "마음에서 마음으로, 위성에서 위성으로 흐르는 전자화".
둘째 활자에서 영상과 소리로. 동시성의 미디어의 최고점인 텔레비전을 예술의 질료로 채택한다.

*혁명과 권력 사이의 비디오아트
비디오아트는 새로운 감각을 도입하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첩보와 정보조작의 수단이 될 수도 있다. 비디오아트가 후자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2009/08/30 10:03 2009/08/30 10:03

슬로우 다운과 액셀 업

Posted at 2009/08/29 20:20// Posted in 쓰기(skribi)/일기_I
배가 부른가, 슬로우 다운. 술을 마셨는가, 슬로우 다운. 나이가 들었는가, 슬로우 다운. 병이 들었는가, 슬로운 다운. 사랑이 식었는가, 슬로운 다운. 감미롭게. 신자유주의가 위기인가, 액셀 업. 허둥지둥, 좌충우돌, 급발진. 비지니스 프렌들리, 피플 프렌들리. 

Cxu vi sxatas? Malakcelu. Cxu vi alkoholajxas? Malakcelu. Cxu vi maljunijxas? Malakcelu. Cxu vi malamigxas? Dolcxe. Cxu la neolibralismo krias? Akcelu. hastige. ....
2009/08/29 20:20 2009/08/29 20:20
백남준은 포스트모던을 예견했고 또 그것을 앞서 실행했다. 정체성에 대한 도전은 그 중 하나이며 가장 중요한 하나이다.

그는 민족적 정체성을 문제삼았다. 정치적 애국심은 물론이고 문화적 애국심도 위험하다고 보았다. 서울, 도쿄, 쾰른, 뉴욕을 오가는 코스모폴리탄으로 산  그의 삶 자체가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도전이다. 작품 속에 그는  서로 다른 민족적 정체성을 섞어 넣었다. 비빔밥 창작방법이 그것이다.

그는 사물적 정체성도 문제삼았다. 사물이 특정한 정체성의 회로를 따라 인식되고 사용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질서가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그 회로를 따라 인식하고 행동함으로써 재생산될 때 누군가가 이득을 보는 질서. 백남준은 사물에 고정된 정체성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파괴라는 방법을 썼다. 그것은 흔히 예술적 테러리즘이라고 불리곤 한다. 연주하던 피아노를 넘어뜨려 부수고 바이얼린을 깨뜨리고 넥타이를 자르고 소머리를 잘라 전시한다.

이미지적 정체성에 대한 도전은 백남준의 고유하고 강렬한 영역이다. 그는 텔레비전 이미지의 정체성을 주사선 합성을 통해 해체한다. 나아가 그는 관객/소비자가 그 합성 과정에 이미지 생산자로서 참여할 수 있는 장치를 삽입함으로써 일방향적 텔레비전 제국과 싸울 수 있는 능동적 힘을 키우려 한다. 그에게서 교육적인 것은 미적인 것이고 미적인 것은 교육적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는 단순한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아니다. 그는 포스트모던을 받아들이고 적극 실천하면서도 그것을 올터모던(altermodern)으로 비틀고 이중화한다. 그는 기술의 인간화가 자신의 목표 중 하나라고 말했지만 기술을 예술화한다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예술은 기술 속의 대안기술이기 때문이다. 예술이 기술의 효용성 논리를 창조성 논리로 재전유하는 양식이 될 수 있음을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 컴퓨터 아트, 위성 아트 등 다양한 미디어 아트를 통해 보여주었다.

정체성을 파괴했을 때 나타나는 효과는 경계가 사라지는 것이다. 경계를 넘는 것은 백남준의 미학적 강령이다. 그는 연주되는 피아노가 내는 선율음과 넘어지는 피아노가 바닥과 부딪혀 내는 소음 사이의 경계를 허문다. 오직 음에 대한 고정된 청각을 가진 사람만이 후자를 소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인데, 그러한 청각양식이 지배적이라는 것은 그 감각을 일반화하는 어떤 지배적 질서가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질서에 포획된 사람에게 소음인 것이 동물에게는 음악일 수 있다. 어떤 음악전시회에 개들이 몰려들었던 것은  개들만이 들을 수 있는 고유한 주파수의 음이 연주되었기 때문이다.  걸어둔 소머리에서 나는 냄새를 견디지 못하는 후각양식, 브래지어를 벗은 상반신을 터부시하는 시각양식 역시 그러한 질서의 효과이지 본래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백남준은 그러한 질서가 자신의 좌표에 위치시킬 수 없는 특이한 것, 괴물적인 것을 도입함으로써 그 질서에 균열을 낸다.

경계를 넘어선 백남준의 상상력은 위성의 수준에서 펼쳐진다.  양의 동서, 국경이나 인종, 피부색, 성 , 계급 등은 협소한 경계이다. 그의 위성예술은 상상력의 공간적 크기를 보여준다. 동시간에 뉴욕, 도쿄, 서울이 연결되고 합성된다. 그것은 견우와 직녀의 만남처럼 특이한 것들의 만남을 만드는 것을 추구한다. 많을 수록 좋다는 다다익선(1003개의 모니터가 이 작품에서 결합된다)의 사유는 넓을 수록 좋다는 사유와 연결된다.

백남준의 비빔밥 미학은 특이한 것들의 혼성, 혼종, 네트워크를 예견하고 또 실천했다. 그것은 차이에 대한 인정과 그것의 연결을 강조했다. 이것은 정체성에 사로잡히고 갇힌 근대성의 논리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의 비빔밥 미학은 분명하게 근대 이후를 지시하면서 대안근대에 대한 미학적 사유를 제시한다. 하지만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의 이행은 그의 미학을 역사적으로 상대화시킨다. 제국은 차이, 탈정체성, 다원성을 흡수하여 자신의 지배 메커니즘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차이와 그것의 혼종은 제국의 지배논리의 일부이다.  예컨대 다문화주의가 그러하다. 그것은 차이를 권유하고 지원하지만 더 큰 틀에서 포획한다. 캐나다에서는 원주민이 바로 전통 문화에 따라 살도록, 즉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백인과는 다르게 산다는 조건 하에서 생활보조금을 지급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국 시대에 정체성의 해체, 차이의 승인, 차이들의 우발적 만남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해방적이지만 자유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좀더 의식적으로 특이한 것들의 연결과 공통화를 추구함으로서 후기근대나 탈근대를 넘는 대안근대성의 형상을 창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파괴를 넘는 건설의 과제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정체성의 해체는 차이가 서로 교차하면서 새로운 것으로 재탄생하는 것을 통해 가능해진다. 이것은 공통되기의 문제를 제기한다. 모든 정체성들로부터의 빼기는 그 탈주하는 것들의 공통되기를 통해 대안을 발견하고 다시 그것의 군주되기를 통해 완성되어야 한다. 물론 우리는 백남준이 공통되기의 비전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코스모폴리탄적 인류인주의의 이상을 예술적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부처, <진화, 혁명, 결단>, 그리고 굿바이 오웰(반비관주의) 혹은 굿바이 키플링(동서양의 융합). 하지만 그 공통되기는 아직 사변적이며 실재적이지 않다. 그것을 달성할 주체성이 구체적으로 발견되지 않고 예술적 이상으로서만 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의 인류인주의에 유토피아적 흔적을 남긴다. 그는 해방공간에서 맑스주의에 접했고 "맑스와 쇤뵈르크"의 결합이 자신의 목표라고 했다. 하지만 북한, 중국, 소련 등의 실패를 목격하면서 그의 맑스는 비판의 맑스로 수축되고 프롤레타리아트와 코뮤니즘의 맑스는 오류로 기각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제국 시대는 우리에게 그가 기각했던 프롤레타리아트와 코뮤니즘의 정치적 재사유를 절박하게 요청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백남준과 맑스"를 재결합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중요한 과제들 중의 하나로 보인다.

지난 세기에 전개된 무수한 투쟁들은 세계시민들의 실재적 공통되기의 평면을 열었다. 비물질노동화와 그것의 헤게모니. 디지털화와 인터넷. 전 지구적 반전연대와 대안지구화 운동. 다중들의 전 지구적 소통 잠재력. 이것은 백남준이 전위적으로 추구하던 코스모폴리타니즘의 실재적 가능성을 제공한다. 예술은 점점 예술가의 수중으로부터 다중의 직접적 삶사유와 삶행동의 수준으로 내려온다. 백남준은 모든 장르들의 경계를 넘는 종합을 예상하고 실천했다. 그런데 오늘날 다중의 비물질적 인지혁명과 대안근대성의 운동이야말로 모든 장르들의 실제적 종합을 요구한다. 다중의 삶이 백남준 예술이 지향한 총체예술의 실제적 아뜰리에로 되었다. 이제 백남준은 다중의 예술을 위한 길을 연 위대한 역사적 중개자로 뚜렷이 기록될 수 있다. 다중은 그가 고독과 은둔 속에서 수행한 작업을, 협력적 공통되기를 통해 구체화하고 그것을 군주되기의 살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2009/08/27 21:29 2009/08/27 21:29

추상기계와 혁명

Posted at 2009/08/27 19:55// Posted in 쓰기(skribi)/철학_F
자본은 추상기계다. 추상노동이 자본의 에너지이다. 20세기에 자본의 추상력은 비약하며 21세기에는 추상이 삶을 완전히 지배한다. 금융자본은 어떤 사실성도 갖지 않는 추상체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엇보다 실재적인 추상체이다.

사실주의의 시대는 19세기 말에 끝난다. 인상주의는 사실에서부터의 최초의 이탈이다. 20세기의 표현주의는 이 이탈을 가속화한다. 자본의 추상기계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추상기계이다. 실증주의나 경험주의로는 자본의 추상기계를 극복할 수 없다. 그래서 이른바 쉬운 글쓰기, 대중적 글쓰기,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자본 추상기계가 사용하는 탄압무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글쓰는 자와 읽은 사람을 클리셰의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러한 글쓰기는 대중의 추상능력을 고양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소모되도록 만든다. 매스미디어의 대량생산 메커니즘은 '추상보다 사실을!'  이라는 보수주의 슬로건을 아예 생리로 갖고 있다.

추상감각과 추상능력은 혁명적 다중이 갖추어야 할 제1의 요건이다. 자본 추상기계는 다중의 추상력을 빼앗으면서 그들에게 사실감각이라는 껍질만을 남겨둔다. 텔레비전은 피상화이다. 텔레비전이 바보상자인 것은 그것이 다중들로부터 추상능력을 박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텔레비전에 습관화된 사람들은 사유할 수 없게 된다. 다중의 대중화는 안방에서 일상적으로 전개된다. 대중은 끊임없이 추상될 뿐 스스로 추상하지는 않는다. 대중에게 추상은 공허로 나타난다. 오직 감각적인 것만이 실제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그러한 감각 자체는 자본 추상기계의 회전판 위에서 전개된다. 추상의 매트릭스, 추상의 큐브를 지각할 수 없는 존재로서의 대중이야말로, 추상을 통한 축적의 가장 좋은 질료이다. 감각의 제국은 자본의 제국의 이면이며 그 필요조건이다.

다중은 추상능력, 추상감각을 요구한다. 그러나 다중의 추상력은 자본의 추상기계를 복제하는 것을 통해 달성될 수 없다. 다중은 가장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 몸으로 만들어야 한다. 추상적 구체성이야말로 다중의 혁명, 다중의 예술, 다중의 과학이 지향해야 할 바이다. 공통체는 추상(공통)의 구체화(체)가 이루어질 정치형태이다. 동시에 그것은 다중의 과학이 지향할 바이고 다중의 에술이 지향할 바이다. 예술작품, 논문, 글은 추상적 구체여야 한다. 추상을 잃을 때 다중은 혁명(의 비전)을 잃으며 몸(네트워크)을 잃을 때 유령에 머문다.

2009/08/27 19:55 2009/08/27 19:55
점점 더 많은 공장, 사무실, 쇼핑센터, 아파트 등이 생산과정을 무인화하고 유통과정을 무인화하는 것은 기계 비용의 저렴화로 노동을 기계로 대체하는 것이 더 수익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가 입장에서 보면 이전의 기계상황에서 구축된 고용관계를 해체하고 피고용자를 해고할 필요성은 점점 높아진다. 그래서 이전의  기계상황을 법적으로 반영한 노동법을 뜯어고치려는 시도가 시시때때로 전개된다. 이런 상황에서 '해고는 살인이다'이므로 해고는 안 된다는 논법으로 대응하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수익성을 사회운영의 근본원리로 내버려 둔 상태에서 수익성을 제1의 원칙으로 추구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익성을 추구하되 최소한의 인간주의적 고려를 하자는 식(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으로 대들어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인간이 무엇인가는 본질적인 물음이 아니고 역사적인 물음이다. 자본주의는 비인간적인 것이라기보다 수익성 원리에 따라 사는 기계를 인간으로 보자는 (강제된) 사회적 약속이며 혹은 그것을 실행하는  사회적 관계형식이다. 자본주의는 나름대로의 인간성 관념을 갖고 있다. 해고는 안 된다는 인간주의적 요구는 다른 인간관을 제시하는 것인데 아무리 보아도 불철저하다. 수익성 인간 개념을 내버려 둔 상태에서 목숨 보존과 같은 최소요구를 지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동정의 연대 원리가  제기되곤 한다. 어찌 사람으로서 그럴 수 있는가 라는 것. 하지만 동정은 가장 취약하고 보수적인 연대원리이다. 동정은 공통되기의 한 방법이지만 부패한 방법이다. 그것은 수익성 원리를 비판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그것을 보존한다. 동정은 양다리를 걸치는 연대원리이다.

문제는 어떻게 수익성 원리를 해체하고 그것을 공통되기의 원리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인가 이다. 완전히 다른 인간 개념으로의 도약을 이루는 것이다. 기계 가격은 점점 싸진다. 그것은 기계적 사고가 사람들의 사유의 공통분모로 자리잡아 가고 있기 때문이고 자발적 기계화가 진행되기 때문이며 다중의 저 자발적 기계화의 능력을 무상으로 (즉 외부성으로) 전유하는 것이 너무나 쉽기 때문이다. 즉 노동의 필요를 축소시키고 있는 것은, 자본가의 나쁜 의도도 아니고 기계 그 자체의 발전도 아니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사람들의 삶의 공통화를 욕망하고 있고 또 그것을  공동으로 도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는 점점 자동기계automaton로 된다. 그런데  삶이 자동적으로 보장되지는 않고 있다. 그것은, 낡은 고용/임금, 노동/소득 원리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의 입장에서는 노동하는 인간이 불필요해졌으므로 이들을 해고하면 된다. 해고된 혹은 해고의 위험에 직면한 다중의 입장에서는 자본관계가 불필요해졌으므로 그것을 해고/청산하면 된다. 이 두 역사적 방향이 지금 대립하고 있다. 자본관계가 불필요해졌다는 것은 자본이 노동자를 해고해야 될 필요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웅변하는 것이다. 자본관계는 임금노동에 기초한 것이다. 그런데 임금노동에 대한 필요가 사라지고 있다면 자본관계 자체도 사실은 필요 없다는 것이다. 지금의 해고는 지난날 자본순환의 한 계기에서 발생했던 일시적 해고, 산업예비군의 발생이 아니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고용된 노동필요성의 보편적 사멸과정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를 해고하지 말라가 아니라 자본관계를 폐지하라, 사적 소유를 폐지하라, 소유관계를 지키는 강권적 주권을 해체하라, 모든 사람의 소득을 보장하라가 다중에게 유효한 방향이다. 이 요구는 다중들 스스로 외에 어느 누구도 들어줄 수 없는 요구이다.  다시 말해 다중들 자신이 기존의 자본/국가 공동체(공화국)를 대체하는 새로운 정치형태를 창출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요구이다.

공장과 사무실과 아파트와 교통수단의 무인화 자체와 싸울 것이 아니라 무인화를 배제의 현장이 아닌 정치적 공통되기와 혁명적 군주되기의 현장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자본주의 발생기에 러다이트들이 기계 그 자체와 싸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기계사용과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꽤 많은 피와 시간이 요구되었다. 기계도입을 통한 무인화(또는 정리해고) 그 자체와 싸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인화의 자본주의적 배치와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도 아마도 그에 못지 않은 피와 시간이 요구될 것 같다.

관련글: 어떤 논리
2009/08/27 12:32 2009/08/27 12:32

백남준에 대한 잠정적 단상들

Posted at 2009/08/27 01:06// Posted in 쓰기(skribi)/시학_P
연구를 위한 메모로서 안정되지 않은 단편들이다. 연구가 진행되면서 생각들은 계속 바뀔 수 있다. -아멜라노


백남준은 괴짜이고 특이한 작가이다.
그는 어떤 정체성에도 고정되지 않는 자유로운 인간이다.
그에게서는 동양과 서양, 인간과 기계, 음악과 소음, 예술과 폭력 사이의 모든 경계가 지워진다.
그는 기존의 가치와 경계를 넘어서는 코스모폴리탄이고 노마드다.
그는 과학기술을 통해 과학기술의 오용과 위험을 경고하고자 했다.
그는 과학기술을 새로운 지각과 감각의 형성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했다.
"전자적 방법을 이용하여 고전적 방식으로 현대사회에 대한 조소를 표현하고자 한다"(24)
그는 예술을 소통의 미디어로 삼고자 했다.
그는 포스트모던에 충실하면서 그것을 인간화하려 한다.

그러나 인간화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에게는 이 질문이 보편적 추상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대안근대성을 창출하려는 욕망이 경계를 넘고자 하는 의지에 의해 이끌린다.
실존하는 대안근대성과의 접목이 굳건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그의 특이성이 충분히 시간적이지 못한 것과 연관이 있다.
그의 경계들은 공간적이며 공간적 경계를 넘는데서 그는 탁월하다.
그러나 시간적 특이성은 분명하게 실현되지 않는다.
시간적 특이성은 교차하면서 공통적인 것을 만들어 내는 힘이다.
그는 공통적인 것을 창출하기보다 경계를 허물면서 잡다한 것을 뒤섞는다.
혼종과 공통의 차이가 설명되어야 한다.
공통이 비빔밥일까?
그의 혼종을 봉기적 교차와 동일시할 수 있는가?
가난의 공통과 소유의 혼종이 동일시될 수 있는가?
인터넷 이전의 전자예술의 개척자

포스트모던 예술은 삶이라는 거대한 예술작품을 의태한다.
삶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며 모든 사조를 뒤섞으면서 그것을 넘어 공통적인 것을 창출할 예술적 현장이다.
백남준은 모든 예술장르의 하나로의 통합을 전망하고 있다(26) 하지만 혁명적 삶이야 말로 모든 예술장르를 넘어 모든 장르의 지식, 행동 등을 통합한 종합예술이자 전위예술임을 그는 받아들이고 있는가?
이런 의미에서 백남준의 예술은 아직 예술 자체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다.

백남준은 포스트모더니즘과 올터모더니즘 사이에서 동요한다.
그래서 그를 한류의 첨병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들끓게 된다.
그가 다중의 특이성의 한 모델을 제공한 것은 어느 정도 맞지만 공통되기의 모델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추상적 세계시민과 혁명적 다중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
그는 민중과 다중에 대해 어떻게 사고했을까?

달이 태양을 따르듯, 하나는 다른 것을 따른다.
자본은 노동을 뒤따른다는 표현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2009/08/27 01:06 2009/08/27 01:06

대안후기근대성

Posted at 2009/08/27 00:35// Posted in 쓰기(skribi)/철학_F
모더니티(근대성)는 지배와 해방의 이중성을 갖는다. 20세기 후반에 적어도 지배 양식으로서의 근대성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난 것이 분명하고 해방의 조건도 따라서 바뀌었다. 우리가 모더니티 속에서 그 대안성, 즉 대안근대성을 찾을 수 있다면 포스트모더니티 속에서 그 대안성, 즉 대안후기근대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안후기근대성은 해방보다 자유를, 민족보다 위성을, 분리보다 혼성을, ... 추구하는 하나의 흐름이다. 그것은 포스트모더니티 속에 있고 그것을 규정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지배양식과는 대항한다.
2009/08/27 00:35 2009/08/27 00:35

백남준 연구자료(추가중)

Posted at 2009/08/26 16:40// Posted in 쓰기(skribi)/시학_P
위키
http://ko.wikipedia.org/wiki/%EB%B0%B1%EB%82%A8%EC%A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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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The more the better
Evolution, Revolution, Resolution
Video Buddha

평론
워홀에서 남준으로(진중권): 디지털 다중과 남준의 공통점을 밝힌다. 미디어아트, 이미지  복사를 넘는 혼합과 제작. 기술에 대한 이중적 태도.
백남준의 비디오예술(김홍희):
-"쟝 폴 파르지에는 백남준 예술의 특성을 '이중'이란 개념으로 풀이하였다. 그가 말하는 이중이란, 이중으로 나뉘는 분리 작용과 이중으로 겹치는 중복 작용을 함께 포함하는 이중화 작업으로서, 파르지에는 이것이 백남준 예술의 기조를 이루는 핵심적 요소라고 주장한다."
-"생방송을 통한 시청자와의 수직적 소통을 위성 중계를 통한 지구적 차원의 수평적 소통으로 확장하여 결국 사방 소통을 이루는 하나의 '지구촌'을 이룩하는 것이다. 이렇게 수직 수평의 상호 소통을 이루는 백남준의 위성 공연은 그의 행위 음악의 연장으로서 비디오 '전자 오페라'에 이어 우주적 차원의 참여 TV를 실천하는 ' 우주 오페라'가 되는 것이다."
-"결국 백남준의 우주 오페라 3부작은 <오웰>에서 TV 매체의 상호 소통 가능성을 역설하고, <키플링>에서 동양과 서양을 만나게 하고, <손에 손잡고>에서 이념과 취미를 초월한 하나의 지구촌을 만들어 전 지구적 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그의 참여 TV이상을 실현한 셈이다. 또한 이 마지막 작업에서는 이전의 두 작업과는 다르게 주요 지역의 공연을 타지역에 보내는 중앙 집권식의 구심적 방송을 탈피하고, 전지역이 공연에 참가하는 지역주의 적인 혹은 민주적인 탈 중심의 중계 방송을 수행함으로써 실제적 의미의 사방 소통을 이룩할 수 있다."

비전
나는 코스모폴리탄이며, 노마드다.
가장 흡족한 작품은 나 자신이다.
그의 삶 자체가 행위 예술이다
비빔밥이 승리한다
가난한 사람은 지루함을 견딜 여유가 없다. 나는 가난하며 가난한 나라 출신이다.
예술와 대중의 차이란 택시와 버스의 차이다
오웰의 비관을 받아들일 수 없고 키플링의 운명적 경쟁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
예술은 반은 사기고 반은 비트는 것이다. 거짓창조하기.
예술이 현실의 속도를 따라갈 때 전위가 된다.
그림은 캔버스를 벗어나야 하고, 미술은 미술관을 벗어나야한다. 이것이 인공위성예술의 정신이다.
첨단기술과 예술을 통합하자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의 간극을 없애자
철학 과학 행위예술 설치예술을 뒤섞자
예술과 운동의 칵테일
TV로 예술을 하자(소통을 향한 참여TV): 참여와 소통
참여와  소통으로 고급예술로 변질된 모더니즘 예술의 계급화에 저항하다
일관된 미디어 작업: TV, 비디오, 로봇, 인공위성
돌발성과 유머
낡은 규칙은 의미가 없다. 진정한 예술을 위해서 기존 규칙은 파괴하고 해체할 대상일 뿐이다.
우상파괴과 필요하다. 피아노, 바이얼린을 부수고 TV를 종이처럼 구기고 접고 붙이고 넥타이를 자르자
과학기술과 인간을,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동양과 서양을 비비자.
"'달은 가장 오래된 TV(1965-67)', 'TV 부처(1968'), 'TV 브래지어(1969)', 'TV 첼로(1971)', 'TV 침대(1972)', '참여 TV(1982)', 'TV 정원(1982)', 'TV 깔때기'(1995, 아래사진), 'TV 스위스시계(1999)' 등 그에게 TV는 종이에 불과하다."
애국하면 나라 망한다
"철학적으로 사고하는 (philosophieren) 지고의 상태는 전체 자아 (the whole personality)의 총체적인 개입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위대한 사상가들의 총체적인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비디오 테이프, 영화, 음향장치, 환상회로기술, 비선형적 인쇄기술, 빛을 이용한 예술, 고속촬영장치, 의학용 전자공학, 뇌파 전송기 등, 새로운 정보처리 기술을 이용해야 한다. 이는 또한 학생들 자신의 철학적 사고에 자극을 주거나 아마도 후기 맥루한주의적, 비선형적, 그리고 도상학적 개념들이 총체적으로 관계되는 22세기 철학을 위해 필요할지도 모른다. 철학이 과거 수세기 동안 유지해왔던 헤게모니를 e되찾고자 한다면 철학과 학생들은 양피지 문헌학 대신 오늘날의 전자공학적 상황에 노출되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야스퍼스나 하이데거의 직접적인 해석이나 설명이 철학교육의 양적, 질적 향상을 위해 좋은 수단이 될 수 있음은 새삼 여기서 지적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방식을 자아와 학문의 결합을 본질적으로 요구하는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에 적용할 수 있다."
"
러시아인들에게 혁명이 1920년의 전기화 (electrification)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1960년 혁명은 전자화 (electrofication)를 의미한다."

TV를 통해 지구촌을 건설하고자 한 맥루한의 조숙하며 고상한 희망 (premature high hope)은 민족주의의 기원을 이동할 수 있는 활자본의 발명에서 찾은 해럴드 이니스의 "커뮤니케이션의 편견" (The Bias of Communication)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비디오 문화는 활자매체보다도 훨씬 민족주의적이다. 우리는 서점에서 쉽게 까뮈나 사르트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최근 프랑스 텔레비전 방송을 본 적 있는가? 몰리에르에서 고다르까지 천재들의 문장을 옮기던 사람이 갑자기 영화 앞에서 경직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가? WGBH 방송의 프로듀서인 데이빗 앳우드는 반대로 말한다. 텔레비전 카메라가 최근 폭력사건이 일어났던 현장을 분주히 비춘다. 텔레비전을 통해서 대부분 교육받은 어린이들은 스위스나 노르웨이 같은 고상한 나라들이 은하수의 어딘가 혹은 적어도 마다가스카르 너머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사건은 바로 이러한 국가들에서 발생했다. 우리는 어떻게 평화를 가르칠 것인가? 우리가 미국의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대면하는 대부분의 아시아인들은 비참한 피난민이거나 참혹한 수용자, 혹은 증오의 대상인 독재자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중산층 아시아인들은 미국의 평범한 가정이 그렇듯 세련되게 포장된 (clean-cut) 오락프로그램을 시청한다. 이러한 정보격차가 베트남에서의 비극을 초래했는가?


사이버네틱스와 업 (karma)은 일체이다. 이는 인연 (hetu-pratyaya)의 네트워크이다.


개들을 위한 케이블 방송이 필요하다
2009/08/26 16:40 2009/08/26 16:40
특이한 자를 우리는 '괴짜'라고 부른다. 특이한 것이 괴물이듯이. 산신이 사람을 잡아가기 때문에 다들 똑 같이 보여 식별을 할 수 없도록 만들기 위해 바가지 머리를 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마을 사람들. 요시노 아주머니가 경영하는 단 하나뿐인 이발관이 그 전통 머리를 제조하는 공장이다. 그 머리를 하지 않고 있는 단 한 사람. 그는 마을 공동체에서 배제된 기케이(きけい) 아저씨. 한자로 奇形인 이름이야 말로 오기나미 나오코 감독이 특이성의 상징으로 배치한 그 괴짜가 아닐까? 하지만 공동체사람들은 그를 예외로, 조롱거리로 추방함으로써 공동체의 규칙을 지켜나간다.

이런 마을의 초등학교에 사카가미라는 이름의 학생이 전학을 온다. 그는 갈색머리를  위로 빗어올린 자기 스타일의 머리를 지키려 한다. 같은 반 아이들의 따돌림도, 요시노 아줌마의 유혹도, 교장 선생님의 훈계도 그에게 먹혀 들지 않는다. 그는 새로운 괴짜이다. 사카가미(극상에서는 上이다)가 한자로 神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사카가미(神)가 산진(야마노가미, 山神)에 대항하는 구도이다.  어린 괴짜 한 사람의 출현으로 마을 전체는 고뇌와 동요에 휩싸인다. 사카가미는  요시노가리(바가지머리) 식 이발을 거부하고 이어 등교를 거부하는 것에서 그 특이한 힘을 발휘한다. 이것은 마을 구석구석에 균열을 도입한다. 그의 저항이 철저하지 못하다면 기케이 아저씨로 될 것이고 그의 저항이 철저하다면 마을 전체에 혁신의 바람이 몰아칠 것이다.
2009/08/26 10:59 2009/08/26 10:59

고르디아스의 매듭 다시 묶기

Posted at 2009/08/25 22:45// Posted in 쓰기(skribi)/시학_P

개요

-기간: 2009년 9월 3일(목) – 9월 4일(금)

-시간: 3일- 13:30-19:00

      4일- 10:30-17:00

-장소: 백남준아트센터

-주관: 백남준아트센터

 

□ 프로그램 소개

<백남준의 선물> 국제세미나 시리즈는 반평생에 걸친 백남준의 넓고 깊은 예술 활동에 대해 보다 심도 있는 학제간 연구를 촉진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하였으며, 금년 2월 처음 시작된 이후 두 번째의 세미나를 열게 된다. <백남준의 선물 1>에서는 주로 백남준의 초기 예술 활동에 초점을 두어 마리 바우어마이스터, 바존 브록 등 독일 체류 시기에 함께 활동하였던 동료 예술가들의 증언과 더불어 김진석, 이진경, 함성호, 김수기 등 국내 이론가들이 비판적 논거를 제시, 검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번 <백남준의 선물 2>에서는 독일 부퍼탈에서의 백남준의 첫 개인전을 재맥락화한 기획전 <신화의 전시-전자 테크놀로지 EXPosition of mythology-ELectronic technology>를 계기로 인류학, 정치학, 미디어 이론, 물리학, 미술사, 퍼포먼스 이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인 국내외 전문가들을 초청하였다.

 

부제 <고르디아스의 매듭 다시 묶기>는 복잡한 문제를 전문적으로 범주화하여 해결한다는 ‘고르디아스의 매듭 자르기’식 근대적 아카데미즘에서 탈피하여 복잡한 상태 그대로 이해하고 다룬다는 의미이다. 분리되어 있는 학문 영역들을 최대한 교차시켜 창조적으로 혼합된 지성으로 백남준 예술에 접근한다는 것이다.

 

비엔나 현대미술관 (MUMOK)의 큐레이터로 2009년 3월에 백남준1963년 전시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을 재현한 전시를 기획한 바 있는 수잔느 노이부르거는 백남준의 첫 전시를 재조망할 예정이며, 일본의 미디어 이론가인 고가와 데츠오는 백남준의 첫 전시에 선보였던 작품의 제목이자 백남준 예술에서 핵심적이었던 ‘랜덤 액세스’ 개념에 의거해 강의 형식의 퍼포먼스를 펼치게 된다. 또한 중앙대 겸임교수 진중권의 백남준의 미디어 미학에 대한 강의를 비롯하여 현대물리학 분야에서는 경상대학교 물리학과 교수인 윤천실, 인류학 분야에서는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겸임교수 박정진의 강의를 들을 수 있다. 정치학 분야에서는 브루노 라투어의 저작을 최근 번역했으며 이번 백남준아트센터 기획전의 참여작가이기도 한 홍철기가 초청될 예정이다. 이 밖에 비디오 작품의 아카이빙에 관해 ‘아나카이브’ 개념을 창안했던 데이비드 저르빕, 뒤샹과 백남준을 비교 고찰한 한성대학교 회화과 교수 정헌이, ‘멀티-인터-트랜스’라는 주제로 강의할 캐나다 아티스트 행크 불, 제국에서 백남준 예술 실천 이라는 주제로   강의할 연세대학교 강사 조정환 등은 신선한 테마를 통해 백남준을 재조명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백남준 선물 2> 세미나는 다음과 같은 여러 논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는 과정이 될 것이다.

1.      자연-인간-테크놀로지-사물 사이의 위계를 누가 만들었고 어떤 구조적 문제점을 안고 있는가? 그 대안적 관점은 무엇일 수 있는가?

2.      백남준의 첫 전시는 예술사에 있어 왜 빅뱅이었는가? 현재까지 그 반응은 어떠한가?

3.      백남준에 대한 인식론적 오해들은 무엇인가?

4.      지위와 권력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유동적 지성’의 모순 관계는 무엇인가? 백남준을 이해한다는 것의 의미와 이 주제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가?  

5.      마르셀 뒤샹과 백남준의 인식론적, 지성적 차이는 무엇인가? 

6.      현대 물리학과 인간존재의 의미, 그리고 그의 작업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7.  미디어, 아트,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관계는 무엇인가?

    8.  탈권력을 지향했던 백남준의 예술은 현실 사회에서 과연 정치적이었는가?

9.  관객이란 무엇인가, 다중의 해방을 향한 미디어 예술의 가능성은 무엇일 수 있는가?

 

* 세미나 종료 후 발표와 토론은 국문과 영어 책자로 발간 국내외 서점에서 판매할 예정이다.

 

 

□ 일정 및 발표자

1st Day (9.3) 일정

시간

구분

진행 내용

13:30-13:40

환영인사

- 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 인사말(3분)

- 백남준아트센터 관장 인사말 및 세미나 소개(5분)

13:45-13:55

서두 영상

- 1950-60년대 연보 중심 발표 (10분)

14:00-14:30

발제 1

-발제자: 박정진 Jungjin Park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겸임교수로, 인문, 사회,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다. 최근 <불교인류학> <종교인류학>을 출간했으며, <마고>를 근간할 예정이다.

-주제: 백남준과 예술 인류학적 비전 (예정)

14:35-15:05

발제 2

- 발제자: 정헌이 Hunyee Jeong

한성대학교 회화과 부교수로 미술 평론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평론집 <현대미술의 신화>를 출간한 바 있으며, “백남준의 선적 시간”을 비롯한 다수의 논문이 있다.

- 주제: 뒤샹과 백남준 (예정)

15:10-15:40

발제 3

- 발제자: 수잔느 노이부르거 Susanne Neuburger

비엔나 현대미술관(Museum Moderner Kunst Stiftung Ludwig Wien (MUMOK)) 큐레이터. 2009년 3월에 <백남준, 모든 감각을 위한 음악>(일명 MUMOK)이라는 제목의 전시를 통해 백남준의 1963년 전시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을 재현해냈다.

- 주제: 백남준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을 재방문하다

16:05-16:35

발제 4

-발제자: 데이비드 저르빕 David Zerbib

파리 제 1대학 및 안시 에꼴 데 보자르 미학 강사. 백남준과 함께 인터랙티브 전자 아카이브인 “아나카이브(Anarchive)” 개념을 창안함. 주로 퍼포먼스에 대해 연구하며, 주요 글로는 아트프레스 2007년 7월호에 개제된 “De la performance au performantiel” 이 있다.

-주제: 백남준기술의 인간화: “테크네”의 또 다른 “로고스”

16:40-17:10

발제 5

- 발제자: 윤천실 Chun Sil Yoon

실험물리학자, 경상대학교 기초과학연구소 연구교수,

미국 페르미 가속기연구소에서 세계 최초로 타우 중성미자(Tau Neutrino)를

발견하는 DONuT 실험(Direct Observation of Nu Tau)에 가담했으며,

현재는 이태리 Gran Sasso 지하 실험실에서 진행되고 있는 중성미자 진동연구인

OPERA 실험을 하고 있다.

- 주제: 현대물리학에서 바라본 백남준의 예술

17:15-19:00

토론

-사회:

이영철

백남준아트센터 초대 관장이며 계원디자인예술대학 교수이다. 1998년 광주 비엔날레와 2000년 부산비엔날레 등의 예술감독을 역임하였으며, 저서로 평론집 <상황과 인식>,<현대미술비평 30선> 등이 있다.,

김남수(백남준아트센터 학예팀 연구원)

무용평론가, 현재 백남준아트센터 교육 및 공공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으며 퍼포밍 아트 잡지 [판] 편집위원이다.퍼포먼스를 중심으로 연극, 춤, 미디어, 설치가 결합되는 다원적 흐름에 관심을 두고 있다.

※ 발제제목 및 사회/발제/토론자는 변경될 수 있음

 

 

2nd Day (9.4) 일정

시간

구분

진행 내용

10:30 - 10:40

의례

- 관장 인사

- 국제 세미나 소개

10:45 - 11:00

서두 영상

- 태내자서전(15분) 영상 관람

11:05 - 11:35

발제 7

-발제자: 조정환 Jeonghwan Jo

현재 성공회대학교 대학원에서 맑스주의 역사와 탈근대 사회이론 및 문화이론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민주주의 민족문학론과 자기비판', '노동해방문학의 논리', '지구 제국', '21세기 스파르타쿠스', '제국의 석양, 촛불의 시간', '제국기계 비판' 등이 있다.

-주제: 제국 시대의 백남준의 예술실천(예정)

11:40 - 12:10

발제 8

-발제자: 행크 불 Hank Bull

퍼포먼스, 비디오, 라디오, 텔레커뮤니케이션 아트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캐나다의 아티스트로 1986년 베니스 비엔날레, 1987년 도큐멘타 9에 참가한 바 있다. 1999년에 문을 연 밴쿠버 국제 아시이 현대미술 센터 (Centre A)의 공동창립자이다.

- 주제: 멀티-인터-트랜스 (multi-inter-trans)

12:15 - 13:20

점심식사

 

13:25 - 13:55

발제 9

-발제자: 고가와 데츠오 Tetsuo Kogawa

도쿄 경제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 교수이자 미디어 이론가이다. 라디오 아트, 미디어 문화, 영화, 도시 공간, 미시 정치 등에 관한 책을 집필한 바 있다. 또한 퍼포먼스 아티스트로서, 간단한 전기 부품들을 통해 FM 송신기를 만드는 워크샵 진행을 통해 참가자들로 하여금 전자기적 방송의 기술적, 정치적, 사회적인 지류를 탐구하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주제: 백남준의 미디어 정치학 내에서의 마셜 맥루한의 급진주의화

14:00 - 14:30

발제 10

-발제자: 홍철기 Chulki Hong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서 ‘박정희 시대의 헌법사상사’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홍철기는 최근 브뤼노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를 번역한 바 있다. 노이즈 음악가, 즉흥음악 연주자, 영화음악작곡가, 사운드아티스트로도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주제: 비인간이란 무엇인가?

14:35 - 15:05

발제 11

-발제자: 진중권 Joongkwon Jin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소련의 구조기호론적 미학」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언어 구조주의 이론을 공부했다. 저서 <미학 오딧세이>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미디어아트> 등과 역서 <컴퓨터 아트의 탄생> 등이 있다.

-주제: 백남준의 미디어 미학 (예정)

15:10 - 17:00

종합 토론

-사회자: 이영준 / 보조-김남수(백남준아트센터 학예연구실 팀원)

서울대학교 미학과에서 석사를 마치고,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계원조형예술대 사진예술과 교수로 재직하며, 이미지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사진, 이상한 예술>, <비평의 눈초리-사진에 대한 20가지 생각>, <기계 비평> 등이 있다.

※ 발제제목 및 사회/발제/토론자는 변경될 수 있음

□ 교통안내

 

○당일 무료 셔틀버스

 

9월 3일 11:40 합정역 2번출구

         12:30 한남동 단국대 맞은편

9월 4일 8:50 합정역 2번출구

         9:40 한남동 단국대 맞은편

 

*예약 안내

reservation@njpartcenter.kr / Tel. 031-201-8529 (담당자: 안지영)

이메일 예약시에는 이름, 연락처, 신청인원, 출발지를 기재 바랍니다.

좌석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모든 예약은 9월 3일 오후 6시에 마감됩니다.

 

○대중교통

 

신갈 오거리를 지나 신갈파출소 하차시 (백남준아트센터까지 도보로 3분거리)

 

- 강남(양재경유) : 5001, 5003(좌석버스 : 강남역 3번출구)

- 잠실 , 강변역, 수서역: 5600 (좌석버스)

- 종각 YMCA, 종로2가, 중앙시네마, 서울역 앞, 한남동: 5000, 5005 (좌석버스)

 

경기도박물관 앞 하차시 (백남준아트센터까지 도보로 6분거리)

- 강남(양재경유) : 1560, 5001-1 (좌석버스: 강남역 6번출구)

- 잠실 : 1116 (일반버스: 잠실역 6번출구)

- 여의도(사당경유) : 7007-1 (좌석버스)

- 광화문(분당경유) : 5500-1 (좌석버스)

- 논현역 : 9404

 

□ 자료문의: 백남준아트센터 학예실

 

담당 : 이희경 eheekyung@njpartcenter.kr, 유경수kyungsoo@njpartcenter.kr

전화 : 031-201-8545, 8544

 

2009/08/25 22:45 2009/08/25 22:45
박지원은 김대중 전대통령이 민주대연합을 유지로 남긴 셈이라고 말했다. 이명박 정권 등장 이후 반이명박 민주대연합 논의는 계속적으로 이루어져왔으니 새삼스런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다. 생전에 김대중은 민주대연합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당이 굳건하게 손을 잡고 시민사회단체 등과 손을 잡고 광범위한 민주연합을 결성해 역주행을 저지하는 투쟁을 한다면 반드시 성공한다. 우리 국민은 이미 이승만 독재, 박정희 독재, 전두환 독재 등 세 독재 정권을 좌절시켰기 때문에 이제는 그 누구도 독재로 성공할 수 없다. 정치에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기회는 비호처럼 왔다가 비호처럼 사라진다."
이번의 이른바 '민주대연합 유지'에는 '정세균 대표를 중심으로 민주당'이 민주대연합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요지가 추가되었다. 안희정은 민주당, 친노세력, 촛불주권시민을 연합주체로 거론한다. 언론들은 이것을 정치적 이슈로 만든다.

민주대연합 구상은 선거연합 구상이다. 선거는 운동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며 부르주아 사회 통치행정의 일부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거를 통해서는 체제의 일정한 수정과 개혁은 가능할지라도 이 그것만으로 사회체제의 깊은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차베스의 베네수엘라에서처럼 운동이 선거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발전해 나갈 때에는 선거가 운동의 변수로 작용할 수도 있다. 지금 민주대연합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 하는 문제를 핵심적 문제로 인식하는 것은 다중 자신이 아니라 대의세력들이다. 다중들의 삶정치의 본령은 생산 속에서의 공통성을 정치적으로 조직해 내는 문제이며 이것은 서로 다른 개인들, 집단들, 계급들, 성별들의 평행적 운동들의 과정적 교차/횡단을 기반으로 해서만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좀더 민주적인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달성할 수 없는 과제가 바로 이 다중들 자신의 직접적 운동과 그 운동들의 정치적 교차/횡단이다.

민주대연합은 운동들의 발전과 공통화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전략이다. 그것은 어떤 지배자를 선택할 것인가라는 양자택일적 강박문법을 벗어나지 않는다. 민주의  실제적 힘은 다중에게 있고 다중의 연합이 민주주의의 기본 전제이다. 다중의 민주주의는 정치가들의 연합으로 환원될 수 없다. 오직 다중의 운동들에 기초한 정치적 연합력이 축적되는 오직 그 만큼만 그 힘에 기초하여 선거과정도 다중의 정치적 활력을 증대시킬 수 있는 압력과 선택의 공간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이른바 '대표자들'을 바라보기 전에 우리 자신을 먼저 바라보아야 한다. 시선은 위가 아니라 앞과 옆을 향해야 한다.


2009/08/24 22:50 2009/08/24 22:50

국민통합과 배제

Posted at 2009/08/24 07:36// Posted in 쓰기(skribi)/정치_P
"고 김대중 대통령의 영결식이 있던 오늘, 경찰이 용산 유족을 폭행하고 도망치는 극악모도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지난 고 노무현 대통령 국민장이 있던 날에도, 용역깡패를 동원하여, 신부님들과 철거민들을 폭행하더니,또 국장 날인 오늘, 유족에게 경찰폭력을 자행한 것입니다. 전직 대통령의 열결식날 마다 발생한 경찰 폭력은,  이런 날 용산 유가족은 쥐죽은 듯 있으라고 위협하는  폭력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2009년 8월 24일, 용산참사범국민대책위가 경찰폭력에 항의하여 쓴 글의 일절이다. 언론과 방송은 장례기간 내내 김대중 대통령이 남긴 것은 화해와 국민통합이라는 정치적 유지였다고 떠들어 왔다. 화해와 통합의 어떤 과정이 진행되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전두환이 빈소를 찾고 김영삼이 화해를 역설했다. 이명박은 장례를 국장으로 만들었다. 현정은이 김정일을 만났듯이 북한의 조문단이 이명박을 만났다. 바로 이 통합의 시간에 용산참사의 유가족들은 경찰에 의해 폭행을 당하고 쌍용자동차 파업농성 노동자는 감옥에서 단식을 한다. 국민통합과 남북화해는 이렇게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가두고 폭행하는 배제의 수단이자 그 장치이다. 통합되는 것은 권력이며 배제되는 것은 다중이다.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통합은 그래서 위험하다.
2009/08/24 07:36 2009/08/24 07:36

승리하기

Posted at 2009/08/24 01:11// Posted in 쓰기(skribi)/철학_F
승리의 본령은 적을 꺼꾸러뜨리는 것에 있지도 타자를 지배하는 것에 있지도 않다. 이러한 승리의 표상은 생산과정과 투쟁과정의 표피만을 보고 그것을 평가하는 객관주의적 시선의 산물이다. 승리의 본령은 생산적 주체성의 집단적 활력을 증대시키는 것에 있고 나머지는 무엇이든 그것에 뒤따라오는 것이다. 승리의 전략과 전술은 상대방을 파괴하는 것에 있지 않고 집단적 주체성의 활력을 증대시키는 방법, 경로, 역량의 배치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스피노자적 의미의 윤리인바 이 때문에 승리는 윤리기계의 기능이어야 한다. 공격과 방어는 날숨과 들숨처럼 힘의 팽창과정에 필요한 두 측면이다. 그것은 연속적일 수도 동시적일 수도 있다.
2009/08/24 01:11 2009/08/24 01:11
『공통체』(Commonwealth, 2009)는 『제국』(Empire, 2000), 『다중』(Multitude, 2004)으로 이어져온 현대 자본주의 및 정치 분석 3부작의 마지막 권이자 그 결론에 해당한다. 『제국』에서 현대 세계의 정치적 구성을, 『다중』에서 제국 시대의 전쟁과 민주주의를 분석한 안또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는 『공통체』에서 마침내 다중의 혁명과 정치적 조직화(즉 다중의 군주되기)의 문제를 다룬다. 인류의 삶의 생산 및 재생산의 점증하는 공통화와 일방주의적 신자유주의 통치의 모순이 폭발한 금융위기 및 경제위기 상황,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정치공백기에서 지난 수 세기 동안 재산(소유)을 관리하던 정치형식이었던 공화국(republic)은 더 이상 유효할 수 없고 가난한 다중들의 삶정치적 혁명과 그 혁명을 공통화하고 제도화할 공통체(commonwealth)의 구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Commonwealth를 우리말로 어떻게 옮길지를 놓고 오래 고심을 했다. 흔히 국가, 공화국, 연방, 주 등으로 번역되는데 이 책에서 사용되는 Commonwealth의 의미와는 부합하지 않는다. Commonwealth는 국가를 의미하는 State와는 대립한다고 할 수 있다.  또Commonwealth는 책 전체가 근대 공화국, 즉 Repulic에 대한 비판이다. Commonwealth는 federation, 즉 연방의 가능성을 인정하지만 역시 비판적 입장에서 그러하다. Commonwealth는 제국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면서 발전하고 있는 공통적인 것the common과 공통재common wealth를 정치적으로 조직화하고 제도화할 몸체에 네그리와 하트가 붙이는 이름이다. 그것은 풍부한 다양성이 공통의 몸으로 조직될 정치형태이다. 이것은 정체성을 특징으로 하는 공동체community와는 다른 방식으로, 즉 탈정체성적인 방식으로 공통적인 것을 조직하는 몸이어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Commonwealth를 '공통체(共通體)'로 옮기기로 했다. (물론 더 좋은 번역어 제안을 환영한다). 共通이 the common을 의미한다면 體는 그 공통적인 것의 다양성, 즉 豊(풍)의 내적 연관(骨, 골)을 함의한다.  그러므로 '체'는 공통적인 것을 조직할 정치적 몸을 지시한다.

이 책은 1개의 서문, 여섯 개의 장, 6개의 보론(추론), 1개의 막간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6개의 장들 외에 6개의 보론(추론)들도 나름대로의 집단적 독립성을 갖는다. 아직 한글본은 물론이고 영문본조차 정식 출판되지 않았지만 나는 다중지성의 정원 2009년 10월 첫째 주 목요일(10월 1일)부터 이 책, 네그리/하트의 『공통체』(Commonwealth)에 대한 강의를 시작할 것이다. 저자들의 책을 살펴보면서 자본주의적 비참의 제도를 코뮤니즘적 행복의 제도로 대체할 수 있는 정치적 가능성과 그 실현 경로를 함께 모색하는 것이 이 강의의 목표인데, [제국]과 [다중]을 읽고 그 후속작이며 마지막 작품인 [공통체]의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을 위해, [제국]과 [다중]의 논의가  정치적 방향성에서는 아직 추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이 시대에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공통체]의 핵심내용을 집약적으로 소개하고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

강의는 아래와 같이 9강으로 구성된다.

1강 다중의 군주되기

2강 공화국(그리고 가난한 자들의 다중)
3강 근대성(그리고 대안근대성의 풍경들)
4강 자본(그리고 공통재를 둘러싼 투쟁들)

5강 막간 1: 사건으로서의 삶정치, 삶정치적 이성, 홀린 사랑, 악과 싸울 힘

6강 제국이 돌아오다
7강 자본을 넘어서?
8강 혁명

9강 막간 2: 메트로폴리스, 문지방을 넘어서, 행복을 제도화하기1. 텍스트

2, 3, 4강과 6, 7, 8강은 여섯 개의 본장들을, 5강과 9강은 여섯 개의 보론(추론)장과 막간장을 다룰 것이다. 1강은 물론 이 책의 핵심 논지를 총괄하는 서문을 다룰 것이다. 수강에 대한 구체적인 안내는 <다중지성의 정원>(http://daziwon.net)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교재는 Michael Hardt & Antonio Negri, Commonwealth, Harvard University Press, 2009(10월 초 출간예정)를 사용할 것이며 참고자료로는 다음의 책들이 사용될 것이다.

네그리/하트, 『제국』(이학사),
네그리/하트, 『다중』(세종서적)
마이클 하트,『들뢰즈 사상의 진화』(갈무리)
마이클 하트, 『네그리 사상의 진화』(갈무리)
조정환, 『아우또노미아』(갈무리)

우리 시대에 가장 중요한 정치학 및 정치철학 저서인 [제국], [다중], [공통체] 를 다루는 연속 강좌([제국] 강의는 한글본이 나오기 전인 1999년에 <다중문화공간 왑>에서, 한글본이 나온 뒤인 2006~7년에 성공회대학원과 <다지원>에서 했고, [다중] 강의는 영어본이 출간되기 전인 2004년 7월에 공간 <새로운 천사>에서, 영어본이 출간된 뒤인 2006~7년에 연세대학과 성공회대에서, 한글본이 나온 뒤인 2008년에 <다지원>에서 한 바 있다) 의 마지막 강좌일 이 강좌에 관심있는 분들의 적극적인 참가와 활발한 토론을 기대한다.
2009/08/23 10:59 2009/08/23 10:59
김대중의 죽음은 병든 의회주의를 살리는 정치적 계기로 이용되고 있다.  이 때문에 그의 장례식은 의회 너머에서 정치를 사고하고 또 행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정치적 공세의 장치로 된다. 그의 빈소와 영결식장을 국회로 정한 것은 죽은 그 자신이기보다도 살아남은 정치가들일 것이다. "국회가 영결식장이어야 하는 이유는 김대중 전대통령이 의회주의자였기 때문"이라고 인터뷰한 것은 전두환과 김대중을 잇는 다리인 박지원이었다. 오늘날 의회는 사유화를 재촉하거나 부패를 정당화하는 따위의 일을 하거나 아니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김대중의 민주주의는, 의회가 이렇게 부패한 의사결정기구로 전락해 있는 시간에, 그러한 의회에 후광을 주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 지금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 그리고 정치적 행복을 위해 유효한 것은 다중으로부터 분리된 의회가 아니라 다중에서부터 나오는 새로운 의사결정의 능력과 기관이다.  신자유주의와 어렵지 않게 결합했던 김대중 민주주의에서 사라지게 할 것과 살릴 것을 가려내는 일은 이 방향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2009/08/21 07:19 2009/08/21 07:19

중국이 위험하다

Posted at 2009/08/20 18:24// Posted in 쓰기(skribi)/단문_F
영화 [삼국지]에서 촉나라 병사들은 죽어가면서도 '촉나라 만세'라고, 위나라 병사들은 '위나라 만세'라고 외친다.  드라마 [이소룡 전기]에서 이소룡은 모든 무술의 장점을 받아들이면서도 일관되게 '무술은 중국에서'라고 외친다. 중국이 위험하다.
2009/08/20 18:24 2009/08/20 18:24
프롤레타리아트를 비계급으로서 정의하려는 노력(예컨대 니롤라스 쏘번, 고병권)은 나름 대로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하나의 정체성으로서, 사회적 실체로서 프롤레타리아를 정의함으로써 혁명을 봉합해온 스탈린주의 전통에 대한 의미 있는 비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와 대칭적인 계급은 결코 아니다. 비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무엇보다 비판, 해체, 탈주로서 규정된다. 하나를 둘로 만드는 것, 그것은 둘을 하나로 만들려는 부르주아 관점에 대한 비판을 제공하는 것으로 마오에 의해 유효하게 제기된 바 있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트는 오늘날 무엇보다도 공통적인 것의 생산자이다. 비판, 해체, 탈주는 공통적인 것 위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공통적인 것에 대한 정의 없이 비판, 해체, 탈주만을 강조하게 되면 공통적인 것을 침식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자본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는 것조차 자본과 동일시하면서 그것의 해체를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중은 특이한 주체성이지만 공통적인 것을 생산하는 주체성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다중의 저항과 탈주는 공통적인 것의 생산과정의 일부로 이해되어야 한다.
2009/08/19 22:19 2009/08/19 22:19
2009년 8월 21일(금) 15시, 민주노총 서울본부 2층 회의실(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1번출구)에서 열릴 맑스코뮤날레 6차 총회를 위한 평가문이다.


2009년 6월 25일에 열렸던 제1세션의 주제는 대중정치였고, 「우리 시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물음」(고병권), 「금융위기와 다중지성의 코뮌」(조정환), 「탈근대의 국민주의와 이주 및 계급 재구성」(이득재․박미선), 「페미니즘 관점에서 본 한국의 사회운동과 패러다임의 전환」(고정갑희) 등 4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청중은 약 30~40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1. 발표논문들은 대체로 '프롤레타리아트의 탈근대적 재구성과 정치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제시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을 묶는 제목이 '대중정치'였다. 발표주제와 세션주제 사이에 약간의 괴리가 느껴졌다. 준비과정에서 전체세션 주제가 먼저 주어지고 개별 발표문들이 사후에 준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발표문들이 취합된 후, 발표문들의 성격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초기의 세션주제에 수정을 주는 방법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 발표와 토론을 합쳐 1시간에 한 논문들이 소화되어야 했다. 발표문들은 모두 자료집 『맑스주의와 정치』에 실려 있었지만 주의 깊게 읽어야 이해될 수 있는 논문들이 2~30분 남짓의 발표시간을 통해서는 깊게 전달될 수 없었다. 발표자들-토론자들-청중 사이의  의사소통 수준은 낮았고 특히 현장에서 짧은 발표를 통해 내용을 파악해야 하는 타 발표자/토론자나 청중의 경우는 발표문의 핵심적 논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발표를 듣고 질문을 해야 했다. 그 결과 세션 내 발표/토론들이 전체 주제 속에서 유기적이고 의식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파편화되는 느낌을 남겼다. 질문들이 지엽적이고 겉도는 경우가 많았다. 이 문제에 대한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본다. 예컨대 해당 세션의 발표/토론자들은 그 세션의 발표/토론문을 사전에 회람할 수 있게 하는 것, 각 논문마다 핵심논제를 몇 개의 명제로 정식화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사전 배포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3. 발표와 토론 시간에 사회자, 발표자, 토론자 3인만 있고 다른 발표자는 청중석에 있거나 아예 불참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은 세션의 집단성을 약화시키고 개별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오는 것 같다. 세션 발표자와 토론자는 (적어도 발표자는) 발표석에 집단적으로 앉아서 발표/토론을 경청하고 때로는 질문자로도 참가하는 것이 토론을 주제 중심으로 집단화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4. 여성문화이론연구소의 참가로 1차 대회부터 시도되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던 여성주의 이론/운동의 맑스코뮤날레 참가가 현실화된 것은 전진이라고 본다. 1세션과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바디우, 아감벤, 랑시에르 등 최근 주목받고 있는 정치철학자들을 연구하고 있는 젊은 연구자들의 참가를 유도하는 것도 맑스주의의 혁신과 심화를 위해 필요한 노력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5. 나머지 세션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지만 사회자가 단순 진행자, 시간 관리자의 역할만을 맡는 경우가 많다. 사회자가 발표내용과 토론내용을 사전에 숙지하고 토론을 좀더 의미있게 만드려는 기술적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면 좋겠다.

6. 역시 맑스코뮤날레 세션 전체에 걸친 문제로, 단상에서는 주로 이론이 발표되고, 청중석에서는 현장 경험이 질문으로 제기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맑스코뮤날레가 이론과 경험이 교류되고 융합되는 현장이 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경험은 주로 질문의 맥락 속에서만 제기됨으로써 충분히 공유될 수 없는 점이 아쉬웠다. 발표자 선정 과정에서 사례나 경험이 주제와 연결될 수 있는 세션에서는 사례연구/경험소개가 이론적 논의와 같은 수준에서 하나의 발표로 이루어질 수 있는 배려가 의식적으로 있으면 좋겠다. 이것은 현재 맑스코뮤날레의 지나치게 학술-정론적인 성격을 보완하는 데에도 유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2009/08/17 09:24 2009/08/17 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