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적 몸만들기

Posted at 2010/01/31 22:07// Posted in 쓰기(skribi)/문화_K
2010년 1월 29일부터 31일까지 지리산 실상사에서 생명평화결사대회가 열렸다. 내게 청탁된 기조강연의 주제는 ‘몸에 자유를 허하라!’였다. 몸의 정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기꺼이 청탁에 응했다. 실상사 대중방에는 10대에서 70대에 걸쳐 세대를 넘는 60~70명의 '생명평화 등불들'이 함께 했다. 나의 강연은 송기득 교장선생님의 인사강연과 도법 스님의 지리산 성지화 운동 설명강연에 이어 1월 29일 밤 7시 30분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우리가 현실에서 노예라는 점을 직시하자고 이야기했고, 그럼에두 불구하고 우리에게 해방과 자유의 잠재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지금 개인수준에서 강제되고 있는 몸만들기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새로운 공통체적 몸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 중년의 한 여성 생명명화 등불은 우리 삶이 너무 우울하고 허망하게 느껴진다고 이야기했고 역시 중년의 또 한 사람의 여성 생명평화등불은 너무 낙관주의적으로 들린다고 이야기했다. 이 이중의 느낌이야말로 우리 삶이 처한 역설적 상황 그 자체를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여기에 강연을 위해 준비해 갔던 노트를 옮겨둔다. -아멜라노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이 부자유하다고 느끼는가?

사람은 몸존재이다. 몸이 없이 사람은 살 수 없다. 아니, 살아가는 것이 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몸은 매일매일 생산되고 또 재생산되어야 한다.

몸의 생산과 재생산은 부단히 외부의 것의 섭취와 배설, 즉 신진대사를 필요로 한다. 몸은 자기충족적인 것이 아니라 외부와 교류하는 것이다. 외부의 것을 먹고 입는 것의 반복, 신진대사의 반복은 몸을 살아 있는 것으로 유지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이 외부는 오늘날 자연적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산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몸의 생산과 재생산에 필요한 소재를 생산하는 것은 몸의 성장과 유지의 필수조건이다.

현대의 생산에는 생산의 수단이 필요하다. 그런데 생산수단은 오늘날 누군가의 소유로 되어 있다. 생산을 하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을 빌려 사용할 수 있겠지만, 대개의 경우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일정한 액의 화폐를 받고 자신의 몸을 팔 수밖에 없다.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으며 산 노동과 교환되는 화폐를 우리는 자본이라고 부른다.

자본에게 팔린 몸은 일정한 시간동안 자신의 욕망이나 의사와는 무관하게 노동하도록 강제된다. 그 시간동안 몸은 타자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몸이 부자유스럽다고 느낀다.

몸만들기

몸만들기가 오늘날은 생존전략으로 되고 있다. 에어로빅, 요가, 다이어트, 성형수술 등 운동적 외과적 조식(調食)적 방식들이 모두 동원된다. 이것에 웰빙이라는 문화적 가치가 덧붙여진다. 덕분에 몸만들기는 하나의 거대한 산업분야로 성장했다.

이것이 섭생의 필요에 따른 자연스런 요구의 표현일까? 현재의 몸만들기가 건강과 섭생의 내적 필요 이상의 추진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논증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목숨을 건 경쟁의 논리에 의해 이끌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몸이 자본의 요구와 기준에 맞추어야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의 결과이다. 슬림, 스탠다드, 혹은 180센티미터 이상의 키... 등등. 이 기준을 맞추지 못하는 사람들은 루저(loser)로 간주된다.

몸만들기는 가부장적 남성사회에서 오랫동안 여성에게 강요되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몸만들기가 이제 남성에게까지, 그러니까 인간종 전체에게 강제된다. 그것이 처음에는 분명 강제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이 기준들은 점차 몸을 파는 사람들에게 내면화되어 그들 스스로 경쟁적으로 선택하는 삶의 기준이 된다.

이것은 인간과 그 몸이 자본에게 실질적으로 포섭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몸에 대한 자본의 요구는 일차적으로는 노동력에 대한 요구이다. 20세기 초에 청교도와 금욕주의는 노동력을 싱싱하게 유지하도록 만드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 이제 웰빙과 경쟁과 몸만들기의 문화가 이 역할을 대신한다.

몸의 자본에의 실질적 포섭은 인간이 자본이 제시하는 척도 외에 다른 삶의 방향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의 징후이다. 몸만들기는 개인의 수준에서 전개된다. 몸들의 경쟁은 사회적 몸의 형성을 저지한다. 사회적 몸의 형성을 배제하면서 개인적 몸만들기가 지배하는 현실은 오늘날 임금체제와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신자유주의 이전에 임금체제는 사회적 연대임금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그런데 점차 임금, 월급 등은 사회적 연대를 통해서 획득하는 몫이 아니라 개인들이 경쟁을 통해서 획득하는 몫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몸을 파는 사람들의 협상력은 떨어지고 자본이 제시하는 기준이 유일무이한 척도로 기능한다. 그 결과 몸만들기 역시 개인화되어 사회적 몸의 형성을 배제하는 개인적 몸만들기로 된다.

오늘날 몸만들기가 부상하는 우리 시대 특유의 조건을 생각해 보는 것도 가능하다. 물질노동 시기에 몸팔기는 물질적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신체적 물리적 힘(즉 노동력)의 판매였다. 노동이 점점 비물질화, 서비스화되면서 즉 타자와의 관계로 되면서 타자의 시각적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몸에 대한 요구가 강하게 대두되었다. 미적 예술적 관계적 소비의 부상은 몸을 미적 예술적 가공의 대상으로 사고하게 만든다. 특히 정규직노동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가 수행할 노동이 관계적 수행적 성격의 것이면 그럴수록 몸이 만들어져야 한다. 이렇게 해서 몸에 대한 강제, 몸에 대한 명령권력이 우리의 삶을 짓누르게 된다.

몸값

임금은 몸의 가격, 좀 정확하게는 노동력의 가격이었다. 임금은 노동력의 생산비용, 즉 그 노동력 상품을 생산하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었다. 오늘날은 임금계산에서 노동시간보다 중요한 것이 몸으로 되고 있다.

만들어진 몸일수록 몸값이 비싸다. 노동력보다 매력이 더 중요한 것으로 되고 있는 것의 결과이다. 오늘날 정규직 노동자에게는 생산하기보다 거짓말하기, 속이기라는 역할이 부여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타인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그럴듯한 몸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매력은 바로 이 거짓말과 속이기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고 이것이 오늘날 자본의 착취/수탈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살: 자본의 신체에서 삶의 몸으로

자본에 개인으로 맞설 때 몸만들기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 몸을 만들어 자본으로부터 더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일시적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몸만들기에 열중하여 만들어진 몸이 평균화되면 몸의 가격은 다시 하락한다.

만들어진 몸을 매력적 몸이라고 불러보자. 그것은 거짓말과 속임수의 도구로 기능할 수 있다. 거짓말과 속임수를 통해 누군가의 사적 소유로 돌려지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공통의 것, 공통된 것이다. 사람들 모두의 소통과 지적 정서적 교류를 통해 형성된 공통의 것이다. 공통된 것이 누군가의 사적 소유물로 축적되면서 그것은 자본의 신체를 구성한다.  자본의 신체가 크면 그럴수록 그것이 명령할 수 있는 권력도 커진다.

몸만들기의 개인화는 공통된 것이 공통된 몸으로 되지 못하게 가로막는 요소이다. 공통적인 것은 그래서 자본의 신체에 그 고유의 몸을 갖지 못한 살로 남아 있다. 그것은 잠재적으로는 몸이지만 아직 몸이 못된 살로서 남아 있다. 그것은 자본의 신체로서의 뼈에 붙어서 자본의 신체를 만드는 구성요소로 기능한다. 다시 말해 공통적인 것의 잠재력이 자본의 신체에 합체되어 잉여가치의 원천으로 착취되는 것이다. 그 자본의 신체는 오늘날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하에서 조직되는 노동의 삶을 착취하고 수탈하는 인지자본주의 사회구성체이다.

새로운 몸

이 잠재력으로서의 공통된 것의 살을 공통된 몸으로 만들 때에만 우리는 강요된 그리고 개별적인 몸만들기의 강제에서 해방될 수 있다. 이것을 위해서는 공통된 것의 살로부터 그 뼈를, 자본관계=자본신체를 빼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살들이 뼈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수평적이고 횡적인 연대를 맺을 수 있는 자유의 새로운 공간을 열어야 한다.

이 자유의 새로운 공간에서 구축될 몸은 우선 특이한 몸들이다. 차이와 다양성이 생산수단 소유자의 강제와 명령에서 해방되고 그것에 내재적인 자유를 찾아나서면서 나타나는 효과일 것이다. 이것은 희소성의 세계가 아니라 풍부성의 세계를 열 것이다. 무한히 다른 것들은 단일한 척도를 파괴하고 조롱거리로 만들면서 풍부함을 특질로 하는 새로운 몸의 자원이 될 것이다. 특이한 것들이 획일성의 뚝을 무너뜨리면서 이미 그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다양함과 풍부함의 힘을 드러낼 것이다.

그렇지만 특이한 것들의 풍부함이 상충과 갈등의 증폭으로 나타난다면 다시 그것을 특정한 척도에 종속시키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과 관념들 및 체제들이 다시 승리하게 될 것이다. 풍부함은 개개의 것들의 분리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상호연결, 제3의 것의 생산을 위한 합성, 파생 등은 고립 속에 있는 특이성들의 잠재적 에너지를 훨씬 더 크게 해방시킬 것이다. 공통되기는 특이성을 묶는 식의 결속이 아니라 특이성을 새로운 생산과정 속으로 가져가는 식의 연합이다.

오늘날의 삶은 다양성 속의 공허, 풍부 속의 가난, 자유 속의 강제, 광대함 속의 협착함 등을 특징으로 한다. 특이하고 풍부하며 공통된 삶(Singular Wealthy Common Life)은 가능하다!  오늘날 강제된 가난하고 협착한  그래서 공허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이 느끼는 불만족이, 그들이 갖고 있는 거대한 생산능력이 바로 이러한 특이/풍부/공통의 삶을 일으켜 낼 주체성이다.

2010/01/31 22:07 2010/01/31 22:07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을 읽으면서, 특히 어제 세미나를 마치고 나서 밀려 드는 의문을 정리해둘 필요를 느낀다. 앞으로의 세미나 시간이 이 의문들에 어떤 대답을 줄 수 있을지 궁금해 하면서 묻기를 시작한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지능은 본성상 평등하며 보편적이다.
지능은 보편적으로 혼자서 익힐 수 있는 능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능에는 위계가 없다. 불평등은 (지능의) 그 발현에 있을 뿐이다. 지적 능력의 본성상의 평등을 의식하는 것이 바로 해방이다. 지성 발현의 불평등은 의지가 지능에 전달하는 에너지의 차이에 달려 있다. 의지가 충분하지 않을 때 스승이 필요하다. 스승이 관여하는 능력의 영역은 지능이 아니라 의지이다. ( 그래서 랑시에르의 교육학은 지능의 교육학이 아니라 의지의 교육학이다.)

그렇다면 스승은 학생에게 부족할 수 있는 의지를 전달하는 자인가? 의지는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그것의 차이는 왜 나타나는가? 지금까지 읽은 것에 따르면 의지는 위급상황에서 조성된다.
"조국의 위급함, 세계를 탐험해야 하는 아이의 위급함, 식자와 발명가의 욕망의 위급함." 의지의 체계적 강제가 스승의 역할이라면 그것은 위급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위급상황, 즉 비상사태를 만들어내는 것이 스승의 역할이다. 비상사태를 만드는 것은 주권자의 기능이다. 그렇다면 스승은 학생에 대해 설명의 주권자로 나서지 말고 의지강제의 주권자로 나서야 한다는 말인가?

랑시에르는 지성이 본성상 평등하다고 가정하면서 왜 의지는 본성상 평등하다고 가정하지 않는 것일까? 왜 그는 '스승/교사'라는 권위주의적 범주를 유지하는 것일까? 그는 지성의 공통되기를 인정한다. "각자 행위하고 자신이 한 것을 이야기하고 자신의 행위의 실제성을 입증하는 수단을 제공하는 곳에 지능이 있다. 두 지능 사이에 위치한 공통된 것/사물은 이 평등을 보증하는 보증물이다." 그런데 왜 그는 의지에 있어서만은 평등과 공통되기를 유보하는가? 그는 소크라테스를 바보만들기의 개선된 형태로 비판한다. 그런데 그의 해방의 교육학은 주권자 만들기의 개선된 형태일 수 있는가? 그의 해방의 교육과정에서 학생은 자유로울 수 있는가? 해방(emancipation)을 넘는 자유화(liberation)가 랑시에르의 교육학에서 사유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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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다지원 교육학 세미나 발제문 일부를 모은 것]
스승이 책에 내재한 설명을 설명하기 위해 학생에게 책의 내용을 다시금 설명한다면, 이는 책의 설명을 이해하는 방식을 말로 설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스승은 자신의 설명을 통해서 책의 설명을 학생들이 이해했는지의 여부를 판정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스승은 책과 학생 사이의 거리를 식별하는 사람이자, 자산의 말을 통해서 그 거리를 없애는 사람이다. 글로 쓰인 설명을 설명하기 위하여 스승이 하는 말은 설명자의 질서에 있어 글에 대해 말이 갖는 특권을 의미한다.(첫 번째 역설) 그런데 학생이 가장 잘 이해하는 말은 선생이 설명을 하기 이전에 배운 말들이다.(두 번째 역설) 스승의 설명은 학생 자신의 고유한 지능을 통해서 학생 스스로가 무언가를 이해할 수는 없다는 듯이 이루어진다. 자코토의 깨달음은 이와 같은 설명의 논리를 뒤집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바로잡기 위해 설명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며, 반대로 이 무능력이란 설명자의 세계관이 지어낸 허구일 뿐이다. 설명은 교육학이 만든 신화이다. 교육학의 신화는 지능을 둘로, 즉 열등한 지능과 우월한 지능으로 분할하고, 우월한 지능을 가진 스승이 학생의 지적 능력에 맞춰 설명을 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는 바보 만들기의 원리일 뿐이다.

설명자와 피설명자의 구분이 이해시키는 교육의 원리이다. 자코토는 “우연히” 사실과 대면한 사람이다. 어떤 사실인가? 그것은 물질적인 것/사물보다 더 확실한 것으로서의 정신의 사실이다. 그것은 행동하고 자신의 활동을 의식하는 정신인바, 학생들이 설명의 도움 없이 프랑스어로 말하고 쓰는 것을 스스로 익혔다는 사실이다.(23) 이 혼자 익힘에 세 가지 지능적 계기가 있다. 1)저자 페늘롱의 지능, 2)번역자의 지능, 그리고 3)프랑스어를 배우려는 초심자의 지능. 1)과 2)가 텍스트라면 텍스트와 대면하고 있는 것은 그것을 번역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번역하려는 의지와 텍스트가 같은 본성에 속하는 지성인 이유는 텍스트 역시 번역가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관찰하기, 기억에 담아두기, 되풀이하기, 검증하기, 알려고 하는 것과 이미 아는 것을 연관시키기, 행하기, 행한 것에 대해 반성하기 등. 이것은 우연을 따라가면서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지능의 고유한 운동형태들이다. 삶은 다양한 위급상황들로 구성된다. 조국의 위급함, 세계를 탐험해야 하는 아이의 위급함, 식자와 발명가의 욕망의 위급함. 이 위급상황들은 그 원리에서 다르지 않다. 위급상황은 우연의 상황이며 우연의 방법은 평등의 방법이고 동시에 의지의 방법이다. 그래서 랑시에르는 말한다. “사람은 배우고자 할 때 자기자신의 욕망의 긴장이나 상황의 강제덕분에 설명해 주는 스승 없이도 혼자 배울 수 있다.”

스승의 지능을 빼냄으로서 학생의 지능이 온전히 책의 지능과 씨름하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교육의 실천에서 식자의 기능과 스승의 기능이 분리되었다. 또한 책의 지능은 스승과 학생에게 공통된 것이기 때문에 둘을 지적으로 평등하게 만들어주었다.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에는 두 지능과 두 의지가 있다. 인간이 자신의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을 만큼 의지가 충분히 강하지 않을 때, 스승이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한 의지가 다른 의지에 예속되는 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설명하는 자는 의지와 지능을 동시에 예속한다. 이것을 바보 만들기라고 하자. 반대로, 의지의 관계와 지능의 관계의 차이가 인정되고 유지되는 것을 해방이라 부르자. 교육 행위의 목적이 스승이 학생에게 학식을 전달하는 것이라는 기존의 교육학 논리는 단지 무지와 학식의 관계를 살핀다. 이제는 지능과 의지가 분리됨에 따라 바보 만들기와 해방의 더 근본적인 철학적 관계도 살펴야 한다. 가르치는/배우는 행위는 이 네 가지 한정-해방과 바보 만들기, 학식과 무지-의 다양한 조합에 따라 산출할 수 있다.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고 조합하기 위해 의지가 지능에 전달하는 에너지가 더 크냐 작으냐에 따라서 지능의 발현들에 불평등이 있다. 그러나 지능의 위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지적 능력의 본성상의 평등을 의식하는 것이 바로 해방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것이 앎의 나라로 가는 모든 여행길을 연다.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더 잘 배우거나 못 배우거나, 더 빨리 배우거나 더 늦게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학생이 그의 고유한 지능을 쓰도록 강제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을 가르칠 수 있다.’(34) 이것은 해방, 능력의 현실화, 인간 정신의 진정한 힘을 깨닫는 것이다. 이와 달리 낡은 방법(구식), 역량의 고리는 ‘자신을 선전해야만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무지한 자도 혼자 힘으로 익힐 수 있다고 믿지 않는’ 즉 설명자와 학생을 이어주는 무능의 고리를 뜻한다. 자코토는 자연의 진행방식으로서 사실을 배우고, 그것을 따라하고, 자신을 아는 것을 통해 스스로의 힘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게 해준 우연의 방식을 체계적으로 지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코토는 진보론자들과 실업가들의 상호교육(랭커스터가 고안한 일종의 ‘조교제도’)은 해방하지 않고 가르치는 것. 즉 ‘바보 만들기’의 굴레로 보았다. 해방은 지도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알려야 할 혜택이다. ‘해방하는 자는 해방된 자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걱정할 일이 없다. 해방된 자는 그가 원하는 것을 배울 것이다. 어쩌면 아무 것도 배우지 않을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이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자코토는 가르치는 자 자신이 먼저 해방되는 것을 보편적 가르침의 ‘필요조건’으로 본다. 자코토는 이러한 보편적 가르침에 대한 해방, 혜택을 다른 이들에게 알림으로써 연대의 관계들을 현실화하는 새로운 사회성에 이바지 한다고 보았다. ‘모든 인간은 평등한 지능을 갖는다는 원리에 따라 나머지 모든 것과 연결하라.’(40) 공부의 결과를 판단하고, 학생의 학식을 검증하려면 유식해야 한다. 하지만 무지한 자는 학생이 작업한 결과를 검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적게’ 하고, 학생이 들인 수고와 주의를 검증하고, 나아가 지능의 평등을 입증하기 때문에 ‘더 많이’ 한다. 무지한 스승이 그의 학생에게 요청해야 하는 것은, 학생 자신이 주의 깊게 공부했음에 대한 증명이다. 이 요청은 학생에게 끝없이 계속 해야 하는 과제로서의 모든 것을 내포하며, 무지한 점검자에게 줄 수 있는 어떤 지능을 준다.(68)

 ‘어머니의 직관’은 칼립소(감추는 여자 또는 꾀바른 여자) 안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안에는] 인간 지능의 표시, 이성의 가장 기초적인 꾀-각자에 고유하고 모두에 공통된 참된 이성이 있다. 이는 무지한 자의 앎과 스승의 무지가 서로 평등해지면서 지적 평등의 힘들을 증명하는 곳에서 본보기처럼 발현된다. 무지한 스승의 실천은 학식이 더 이상 도움을 주지 않는 곳에서 이성의 순수한 힘들을 해방하는 결정적 실험이다. 무지에는 위계가 없으므로 한 명의 무지한 자가 한 번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무지한 자들이 언제나 할 수 있으며, 무지한 자들과 유식한 자들 모두 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지적 존재의 힘이라고 부른다.(70)

평등의 힘은 이원성의 힘인 동시에 공통성의 힘이다. 하나의 정신과 다른 정신의 엉김, 즉 묶음이 있는 곳에는 지능은 없다. 각자 행위하고 자신이 한 것을 이야기하고 자신의 행위의 실제성을 입증하는 수단을 제공하는 곳에 지능이 있다. 두 지능 사이에 위치한 공통된 것/사물은 이 평등을 보증하는 보증물이다.

무지한 스승은 무지한 자만큼이나 아는 자도 지도할 수 있다. 아는 자가 지속적으로 구하고 있는지 검증하면서. 구하는 자는 항상 찾는다. 하지만 그것을 반드시 찾거나, 찾아야만 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알던 것/사물과 연관시킬 수 있는 새로운 어떤 것을 찾는다. 중요한 것은 경계를 지속하고, 무분별-아는 자는 무분별에 있어서 무지한 자처럼 탁월하다-에 안주하지 않고 주의가 결코 느슨해지지 않는 것이다.

스승이란 구하는 자가 그의 길을 계속 가도록 유지하는 자이다. 그 길에서 구하는 자는 혼자 구해야 하며 구하기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각각의 지적인 발현 속에서 인간 지능의 전체를 찾는 것은 해방하는 방법의 핵심이다. 해방된 자가 할 수 있는 자는 해방하는 자가 되는 것이며, 그것은 자신의 지능이 다른 모든 지능과 평등하다고 보고, 또 모든 다른 지능이 자신의 지능과 평등하다고 볼 때 지능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식을 주는 것이다.

 인민을 바보로 만드는 것은 지도 부족이 아니라 인민의 지능이 열등하다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열등한 자들’과 ‘우월한 자들’ 모두를 바보로 만든다.  이 믿음 속에서 열등한 자들의 보편적 우월성은 우월한 자들의 보편적 열등성과 결합되어 어떤 지능도 그와 평등한 것에서 자신을 인정받을 수 없을 세계를 만들게 된다.

 보편적 가르침은 철학과 인간성이 관건이다. 보편적 가르침은 먼저 비슷함에 대한 보편적 입증이다. 모든 해방된 자들, 즉 다른 이와 비슷한 인간으로 스스로를 생각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그것을 할 수 있다. 텔레마코스의 모험과 같이 한 언어가 그것의 형태와 힘의 정수를 보여주는 하나의 전체가 되는 책- 간단히 말해 고전 -을 통해 무언가를 배우고, 그것을 나머지 전체와 연결시켜야한다. 이것이 보편적 가르침의 원리이다. 구식의 원리는 어떤 것을 배우고 나서 또 다른 것을 배우는 선별, 개선, 불완전 순환을 의미한다. 학생은 항상 앎의 쪼가리들을 배우며 스승보다 뒤쳐짐을 느끼고 다른스승과 보충설명을 필요로 한다. 즉 앎의 체계적인 개선은 무한정 되풀이되는 훼손이다. 구식의 원리로 설명하는 자는 이해를 하지 못하는 즉, 무언의 책 앞에 남아 있는 열등한 자들에게 우월의식을 이용해 지능의 위계에 맞는 설명 유형을 선택해 지도하려 할 것이다.

학생은 혼자 힘으로 늘 세 가지 질문에 답하며- 무엇을 보는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지- ‘나는 할 수 없다는 속임수를 쫓아내야 한다. 기호를 배우고 문장을 배우고 책을 통째로 외우자. 그러면 역량의 고리가 시작되며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훌륭하다고 말해지는 스승은 질문함으로써 학생의 지능의 발현을 명령한다. 그는 학생의 지능을 조심스럽게 이끈다. 이것이 소크라테스의 방법, 흔히 훌륭한 스승의 방법이라 말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노예로 남아 있도록 운명 지어진 자에게 질문을 던져 그의 앎을, 아니 그의 무지를 증명하는 방법이다. 소크라테스의 방법으로는 앎에 도달할 수 있을지라도 해방으로 갈 수는 없다. 소크라테스주의는 바보 만들기의 개선된 형태다. 무지한 자가 자신이 지도받기 위해 모르는 것을 질문하는 것이 자코토의 방법이며 진정한 질문들이다. 그러나 반대파는 말할 것이다. 무지한 자가 가르치면, 학생이 점점 더 알아감에 따라 학생이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 무지한 자는 검증할 수 없게 된다.

타인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해방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지적 주체로서 인식해야 한다. 그런데 진보의 시대에는 관례에 따르는 잘못된 통념 대신에 이성의 원리에 기초한 건전한 통념들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고자 하였다. 문제는 인민의 아이를 그에게 운명처럼 주어진 조건들과 이 조건들에 결부되어 있는 통념들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 사회 질서를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진보론자들이 찾아낸 해결책은 지도와 교육을 균형있게 배정하는 것, 학교 스승이 맡는 역할과 가장이 맡는 역할을 균형있게 배정하는 것이었다. 지도를 통해서 스승이 아이에게서 잘못된 통념들을 쫓아내지만 동시에 가장이 다시금 아이에게 관례에 따라서 주어진 조건에 머물러 있도록 하는 덕을 가르치는 것이다.

하지만 지도와 교육의 조화로운 균형은 이중의 바보 만들기의 균형이다. 해방은 이것과 대립된다. 해방은 모든 인간이 자기가 가진 지적 주체로서의 본성을 의식하는 것이다. 보편적 가르침의 실천은 ‘너 자신이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물음에 기초하여 학생 스스로 해방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능이 평등하다는 것인데, 보편적 가르침에서 이는 아이 스스로 책의 저자의 지능과 자기 자신의 지능이 평등함을 입증함으로써 확인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보편적 가르침의 실천은 바로 가장이 무지한 스승이 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2010/01/29 08:29 2010/01/29 08:29
Nick Hewlett, Badiou, Balibar, Rancière: Rethinking Emancipation

랑시에르는 Demos의 정치적 적법성에 대한 방어자이며 권력의 치안적 성격에 대한 탐구자이다. 그는 계급을 정체화하거나 계급을 역사의 진보적 힘으로 확정하기를 주저한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급진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정치가 유지될 수 있는지를 제안하지 않는다. 그의 사회주의 봉기는 경험적으로 정의된 행위자를 갖지 않고 있다.

랑시에르는 발화를 급진적 해방의 필요를 설명하기 위한 정치적 행위로, 미학으로 '정치의 시학'으로 간주한다. 봉기가 실제적 물질적 과정이기보다 이데올로기적이기 때문에 그의 봉기는 현상태로 재빨리 역전되고 만다. 그래서 랑시에르의 고유한 체계는 예외철학 혹은 무질서의 철학으로 된다.

랑시에르의 치안 개념은 바디우의 상황국가(상황상태?) 개념과 유사하다. 또 랑시에르는 바디우처럼 정치적인 것이 발생하는 것은 개인들이나 집단들이 사건에 대한 충실성 속에서 행동할 때라고 본다. 셋째로 이 두 사람은 정치적인 것이 급진적 평등의 언어적 표현이라는 데 동의한다. 끝으로 이들은 모두 정치적인 것이 상황의 비가시적 측면을 가시적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믿는다.
2010/01/28 19:29 2010/01/28 19:29
2010년 1월 27일부터 29일까지 한국에서 최초로 기본소득국제학술대회가 열리고 있다. 어제 (27일) 2부의 사회로 참가했고 이후 진행과정을 지켜본 나는 기본소득을 바라보는 입장들의 차이가 상상 이상으로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떠한 자산 심사나 노동요구도 없이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개별적으로 지급하는 조건없는 소득"이라는 결론에 대한 동의가 큰 것에 비교하면 그것에 이르는 추론들은 너무나 다양했다. 입장들과 추론들의 다양성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기본소득 논의를 지금과 같은 기술적 수준의 문제에서 좀더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망을 갖는 개념/실천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향후의 사회적 토론에서 기본소득 문제에  접근할 기본 입장이 무엇인가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해 둘 필요성을 느낀다.

첫째 기본소득은 자본주의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며 또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다른 원리를 제안하는 것이다. 기본소득의 원리는 자본주의의 착취/수탈 원리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원리이다. 그것은 흔히 사회정의, 평등 등의  이념적 용어나 보편복지 등의 사회적 용어로 설명되곤 하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을 류로서 구축하는 주체성의 원리, 즉 인류성의 원리이다. 자본주의가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를 원리로 하는 한에서 그것은 인간을 류로서 정립할 수 없다. 인간들 내부에 분열을, 그것도 적대적 분열을 도입하기 때문이다. 반면 기본소득의 논리는 그 분열과 간극을 넘는 소득의 유동성을  제도화함으로써, 그리고 기본적 소득 획득을 통한 삶의 안정성과 자유를 제공함으로써 적대로 인한 인류성의 제한을 타파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기본소득은 그 원리에서, 특이한 개개인들이 소득수준, 직업, 신분, 성별, 연령, 인종, 지역, 소속 등을 넘어 공통된 류로서 자신을 재구축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장치이다. 기본소득을 통해 각각의 개개인은 시민이나 공민(국민)임을 넘어 인류인의 차원을 획득할 수 있는데, 이것은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오늘날 통합된 세계자본주의의 문제를 타개해 나가기 위해 필수적으로 주어지는 요건이다.

둘째 기본소득이 인류 및 인류인의 구축으로 사고될 때 그것은 결코 지역적, 일국적 수준에서는 완성될 수 없고 전 지구적 수준에서만 실제적으로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지역이나 국가를 기본소득의 예외지대로 남겨둔 상태에서 기본소득은 실효성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의 기본소득은 그 재원이 설령 해당 국가나 지역의 정치공동체에서 지불된다 할지라도 (현대의 세계시장적 조건을 고려하면) 기본소득을 향유하지 못하는 지역 주민들로부터의 잉여이전일 가능성을 항상 내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구적 수준에서의 분열을 용인할 뿐만 아니라 조장하는 것으로서의 '기본소득'은 오래 전 레닌이 노동귀족이라고 불렀던 층이 향유한 일정한 특권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것은 기본소득 쟁취운동이 지역적 수준이나 국가적 수준에서 시작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수준들에서 기본소득 쟁취운동이 시작되더라도 전 지구적 차원에서의 기본소득이라는 시각을 결코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셋째 기본소득은 자본주의 내부에서의 개혁방안이지만 이것은 또한 인간혁명의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요소로 이해되어야 한다. 기본소득이 개혁방안이지만 그것이 자본주의와 이질적인 원리에 입각한 개혁방안임이 주목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의 착취원리와 기본소득운동의 인류구성원리는 대칭적 구도에서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양자가 대칭적 대립관계에 있다면 우리는 자본주의 내부에서 기본소득을 제안할 수 없을 것이다. 양자는 비대칭적이며 서로 다른 발전경로를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양자는 무관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착취 원리가 인류구성 원리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착취는 인류구성의 역사적 과정, 인간들의 공통되기에 대한 착취였고 이 점은 오늘날의 인지자본주의하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구성의 발전경로로서의 기본소득은 자본주의적 착취와 직접적으로 대립하지 않는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기본소득을 구매력 제공을 통한 성장논리(즉 착취논리)의 한 요소로 사고하고 또 이것이 일면에서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하지만 성장논리 속에서 기본소득이 고려되는 한, 기본소득에는 제한이 가해지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의 기본성을 상실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적 성장은 결코 일관될 수 없고 파동을 치며 성장에 불리한 국면에서는 기본소득에 대한 침식을 통해 위기를 돌파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기본소득 획득을 위한 노력은 아래로부터의 운동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그것이 위로부터의 정책으로 나타날 때조차 아래로부터의 운동에 뿌리를 두지 않는 한 무력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기본소득이 주체성의 구축, 인류성의 건설을 향한 운동이기 때문이다. 주체성 구축과정으로부터 유리된 상태에서 위로부터 시혜적 온정주의적으로 주어지는 소득은 대중통제의 수단으로 활용되기 십상이다. 그 소득에  (자산심사나 노동요구 등) 어떤 조건도 달려 있지 않을 때에도 한 가지 조건, 그 소득의 공여자가 권력이라는 조건만은 제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권력의 유지가 대중의 삶의 유지를 위한 필수적인 조건으로 될 때 권력에 의한 대중통제는 용이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소득은 운동으로서, 즉 사람들 사이의  공통성을 실질적으로 인식하고 실천하는 과정으로서 조직되어야 한다. 요컨대 기본소득운동은 다중들이 자본이라는 축적된 죽은 노동을 재전유하여 삶의 산 피로 재가공하는 코뮤니즘적 유동화의 운동이어야 한다.

다섯째 자본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혹은 자본의  성장을 도모하는 방향에서 기본소득이 보장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우리는 이 양자가 직접적 대칭적으로 대립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양자의 적대성이 부재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은 하루하루 자신의 몸을 팔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며 그렇기 때문에 착취, 수탈, 강탈, 사기 등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몸 팔 사람들을 만들어 왔다. 몸을 팔아야 하는 강제는 생활수단의  부족에서부터 발생한다. 기본소득운동은 기본적인 생활수단을 어떤 조건도 없이 제공함으로써 원리적으로 몸을 팔아야만 하는 강요된 상황을 제거하는 것이고 바로 이 조건에서 삶의 창조성에 실질적 자유를 보장할 필요를 선언하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장에 대한 전혀 다른 개념이 창안되어야 한다. 자본의 성장이 아니라 삶의 성장이 문제이다. 나는, 삶이 실질적으로 자유로와지면 노동유인이 감퇴될 것이라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1 그것은 자본주의적 강제노동이 계속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자본가적 세계상을 기본소득 개념에 투영시키는 것이다. 기본소득이 삶을 강제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수준이 된다면 오히려 노동은 삶의 내적 욕구로 되어 무한히 다양한 노동들이 창발될 것이다. 자본에게 문제인 것은 이 다양한 노동들이 점점 자본의 축적 원천으로 기능할 수는 없게 되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가치화로 이 새로운 생산과 성장의 흐름을 가치화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소득이 자본주의 내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설득하는 외교론적 노력과는 별개로 자본가들의 저항과 공세에 대항할 실질적 주체성과 힘을 조직하는 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점점 공통되는 삶의 활동들을 조절할 전혀 다른 가치원리의 필요성이 대두될 것이다. 기본소득운동의 실제화는 자본주의적 가치성장을 부적절한 것으로 만들면서도 공통적 부의 성장, 삶의 행복의 성장과 선분배를, 진정한 공통복지를 가능케 할 것이다.

여섯째 하지만 기본소득은 결코 만병통치약이 아니며 몇 가지 집합적 요구의 하나로서  제시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행장치로서의 기본소득이 인류성의 구축으로서 사고되는 한에서 그것은 전 지구적 시민권의 쟁취 없이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불구적일 수밖에 없다. 또 오늘날 집단적 생산수단인 정보재에 대한 일반적 접근권이 쟁취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생산능력은 억제될 것이고 (기본소득 재원 부담이 늘어나는 것과는 별개로) 공통화는 그만큼 지체될 것이다. 또한 생태계에 대한 사유화의 축소와 공동영유권의 확장 역시 기본소득으로 인한 소비증가 우려를 불식시킴과 동시에 인류성의 구축을 인간중심주의로부터 분리시키면서 인간해방을 인간으로부터의 해방과 결합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본소득운동은 삶의 자유와 행복의 제도화를 위한 (이와 연관된) 몇 가지 다른 집합적 요구들과 공동으로 제기될 때 그 실효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1. 빠레이스도 곽노완도 모든 경제적 소득이 기본소득으로 분배되면 노동유인이 감퇴되고 결국 미래의 경제적 몰락이 불가피해지고 기본소득은 축소되어 지속가능하지 않게 된다고 생각한다.([글로벌 시대의 지속가능한 유토피아와 기본소득], 160쪽) [Back]
2010/01/28 06:36 2010/01/28 06:36

특수문자

Posted at 2010/01/26 17:44// Posted in 쓰기(skribi)/안내(anon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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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6 17:44 2010/01/26 17:44

헤겔 법철학 비판

Posted at 2010/01/26 00:31// Posted in 분류없음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과 우리 시대

전도된 세계의 의식으로서의 종교와 비판의 과제
인간이 종교를 만들지 종교가 인간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인간의 세계, 즉 국가나 사회이다. 우리 세계가 전도되어 있기 때문에 전도된 세계의식인 종교를 생산한다. 그러므로 종교 비판은 이 세계에 대한 비판이다. 민중의 환상적 행복으로서의 종교의 지양은 민중의 현실적 행복에 대한 요구이다. 종교에 대한 비판은 법에 대한 비판으로, 신학에 대한 비판은 정치에 대한 비판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우리는 맑스의 이후의 행보에서 정치에 대한 비판이 경제에 대한 비판으로 변화됨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경제에 대한 비판이 삶에 대한 비판으로 변화되어야 하고 삶에 대한 비판은 삶의 구성적 노력의 일부임을 확인하고 있다.

비판의 본질과 목적
비판은 무기이다. 비판의 대상은 비판의 적이며 비판의 목적은 논박이 아니라 절멸에 있다.(374) 비판은 현실의 억압에 그 억압에 대한 의식을 부가함으로써 그 억압을 더욱 억압적인 것으로 만들고 치욕을 공개함으로써 그 치욕을 더욱더 치욕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고 물질적 힘은 물질적 힘에 의해 전복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만 이론도 역시 그것이 대중을 사로잡는 순간 물질적 힘이 된다.(380)  우리는 이것을 거꾸로도 말할 수 있다. 물질적 힘에 의한 전복도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는 없다. 물질적 힘이 정신을 사로잡는 순간, 그것은 비판의 무기가 될 수 있다. 그것을 맑스는 "사유가 실현으로 나아가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현실이 스스로 사유에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382)고 표현한다.

세계사에서 비극과 희극
역사는 낡은 형태를 무덤으로 보낼 대 많은 국면을 통과하다. 처음에는 비극의 국면을 다음에는 희극의 국면을 통과한다. 왜 역사는 이러한 경로를 밟는가? 그것은 인류로 하여금 그들의 과거와 유쾌하게 결별하게 하기 위해서이다.(376) 유쾌함은 가벼움이 아니다. 그것은 철저한 혁명이 주는 기쁨의 감정이다.

독일, 그리고 독일에서 실천적 당과 이론적 당의 입장
독일인은 현재의 역사적 동시대인이 아니면서도 현재의 철학적 동시대인이다. 독일 철학은 독일 역사의 관념적 연장이다. 독일인들은 다른 민족들이 실제로 행했던 것을 정치학 속에서 사유했다. 독일에서 실천적 당은 철학을 실현하지 않고서는 철학을 지양할 수 없다. 독일에서 이론적 당은 철학을 지양하지 않고서는 철학을 실현할 수 없다. 이에 이어 맑스는 "프랑스에서는 부분적 해방이 보편적 해방의 기초이다. 독일에서는 보편적 해방이 모든 부분적 해방의 필수조건이다"(386)라고 쓴다. 이제 세계도처에서 부분적 해방이 보편적 해방의 기초가 되고 보편적 해방이 모든 부분적 해방의 필수조건이 되는 공시성이 일반화되었다.

맑스의 문제의식과 우리 시대의 문제의식
독일은 원리의 수준에 이른 실천에, 다시 말해 혁명에, 근대의 민족들의 공식적 수준에는 물론 이들 민족들의 바로 다음의 미래가 될 인간적 수준die Menschliche Hoehe으로까지 고양된 혁명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인간적 수준이 류로서의 인류의 수준인 한에서 그 수준은 민족이나 국가가 실제적으로 지엽적 범주로 되고 있는 우리 시대의 문제이다.

열정의 계기
한 계급이 사회 전체를 해방시키려면 사회전체가 이 계급 안에서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시민사회의 어떤 계급도 자신 및 대중 속에서 열정의 계기를 불러일으키지 않고는 이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열정의 계기란 무엇을 말하는가? "열정의 계기란 그 속에서 한 계급이 사회와 일반적으로 화합하고 융화하며 사회와 혼동되고 사회의 일반적 대표자로 느껴지고 인정받는 그런 계기이다."(384) 이런 계기 속에서 그 계급의 요구와 권리는 사회 자체의 요구와 권리가 되고 따라서 그 계급은 실질적으로 사회의 머리요 사회의 심장이 된다. 맑스는 여기서 특수와 보편의 범주로 문제를 풀려고 한다. 하지만 하나의 특수한 계급이 특수한 계급으로서 사회의 일반적 대표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지난 세기 세계사의 경험이 말해주는 바이다. 특수한 계급들은 실제로 다른 계급계급과의 공통되기를 이루어냄으로써만 그리하여 자신의 특수성을 실제적으로 지양해 냄으로써만, 그리하여 그 실제적 공통되기 속에서 독특성들을 활성화시킴으로써만 이 열정의 계기를 지속할 수 있다. 맑스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이어야 한다."야말로 반항적 표어라고 쓴다. 그런데 세계 구성은 오히려 "나는 나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너와 더불어 모든 것이다."라는 표어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지 않을까?

세계사의 운동
맑스는 독일에서 왕국/귀족에서 공국/관료으로, 공국에서 국가/부르주아로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대체를 서술한다. 그 끝에서 그는 코뮌/프롤레타리아트로의 대체를 서술하고 있다. 이제 우리 시대의 경험들은 이 대체의 연쇄가 인류공통체/다중으로 이어질 것임을 시사한다. 출현과 더불어 한계가 나타나고 그것이 새로운 것에 의해 대체되는 운동은 독일에서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에서 일어나고 있다.

해방의 실질적 가능성, 프롤레타리아트
근본적으로 사슬에 얽매인 한 계급의 형성 속에, 시민사회의 한 계급이지만 시민 사회의 계급이 아닌 한 계급의 형성 속에, 어떤 특별한 부당함이 아니라 부당함 그 자체가 그들에게 저질러지는 계급, 그래서 특별한 권리의 요구나 역사적 명분이 아니라 오직 인간적 명분menschlichen Titel만을 내세올 수 있는 계급, 국가체제의 결과가 아니라 국가체제의 전제들과 전면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계급, 사회의 다른 모든 영역들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야 하며 동시에 사회의 다른 모든 영역들까지도 해방시켜야 하는 계급, 완전한 인간상실로 말미암아 인간의 완전한 재획득을 통해서만 자신을 획득할 수 있는 계급 속에 해방의 실질적 가능성이 있다. 맑스는 이러한 계급이 "프롤레타리아트"라고 단언한다. 우리 시대에 이러한 의미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누구인가?

철학과 프롤레타리아트
인간해방die Emanzipation des Menschen의 두뇌는 철학이요 그 심장은 프롤레타리아트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양 없이 철학은 실현될 수 없고 철학의 실현 없이 프롤레타리아트는 지양될 수 없다.(388) 만약 우리의 자유가 인간해방을 넘어서 인간homme으로부터의 해방에 의해서만 주어질 수 있다면, 인간으로부터의 해방이 인간해방의 필수조건이 된다면 인간으로부터의 해방은 이미 우리 사회에서 인간이 아닌 계급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아닌 계급을 인간을 표준으로 하여 그것을 박탈당한 계급으로 보게 되어서는 안 된다. 실제적 비인간, 실제적으로 인간은 극복한 초인Ubermensch, 비인간이기 때문에 불행하다기보다 오히려 행복할 수 있는 모든 전제들을 이미 집적하고 있는 계급을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다중을 사고하기 시작하는 것이 유의미하다면 바로 이런 의미맥락에서일 것이다.
2010/01/26 00:31 2010/01/26 00:31
앞서 나는 자본이 사람들의 부채 욕망을 자극한다고 했다.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왜 자본은 그렇게 하는 것일까? 부채 욕망을 자극하는 것은 이자에 대한 탐욕의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가진 것도 없으며 고용되지도 않은 존재로부터 어떻게 이자가 나올 수 있을 것일까?

1971년 달러의 금태환 중지 이후의 부채는 신비한 느낌을 준다. 금태환 시기에 부채는 태환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발행가능한 것이었겠지만 금태환 중지 이후 부채는 마치 무한한 것처럼 보인다. 인쇄기의 용량이 부채발행의 한도를 규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부채의 운동 메커니즘을 간략하게 스케치해 보자.

부채는 무에서 창조된 자산이다. 그것이 기업에게 주어지는 경우의 가치화 메커니즘(부채-고용-노동-잉어가치)은 쉽게 분석가능하므로 여기서는 생략하자. 그것이 다중에게 주어지는 경우, 즉 소비자 신용의 경우는 어더할까? 여기서는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새로운 노동형태인 삶정치적 노동의 흐름을 생각해 보자. 1)부채소득으로 생필품을 구매하여 신체력을 생산한다 2)인지노동을 수행한다 3)무형의 사용가치가 생산된다 4)자본이 이 사용가치를 집적하고 집중한다(인터넷 포털사이트를 생각해 보자) 4)외부에서 창출된 이 무형의 자산의 집적과 집중을 통해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6)무상으로 집중시킨 다중의 인지노동이 거대한 주목가치(attention value)를 창출한다(예 광고비의 상승).

이러한 순환메커니즘이 기능하는 한에서 부채는 낭비나 기생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마중물로 기능한다. 그런데 이 마중물은 거대하게 퍼올릴 수 있는 한 없는 깊이를 갖고 있다. 얼마나 한 없는 깊이일까? 사람들 사이의 믿음과 실제적 협력의 가능성만큼이다. 그 가능성은 측량하기 어렵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사람들 사이의 믿음을 실제적이고 진정하게 확장시키기에는 부적절한 체제이다. 개인화와 경쟁이 끊임없이 사람들 사이의 믿음을 가로막고 협력을 중단시키기 때문이다. 신용평가기관들은 언어행위를 통해 신용의 양과 정도를 평가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거짓을 재생산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음이 2008 금융위기에서 드러났다. 신용수축은 팽창의 실제적 불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즉 거품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 믿음이 중단되는 순간에 찾아드는 것일 아닐까? (만약 거품이 원인이라면 금융적 축적의 매시기에는 거품[신용팽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항존하므로 위기는 항상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의 믿음을 지속할 수 있고 협력과정을 지속할 수 있는 관계와 제도의 구축이 실제적 대안으로 되는 것이 아닌가? 거품 없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인간들과 기계들과 사물들 사이의 유물론적 믿음관계로서의 공통되기가 유효한 대안으로 되는 것이 아닐까?
2010/01/24 02:13 2010/01/24 02:13

부채, 복지, 기본소득

Posted at 2010/01/24 01:48// Posted in 쓰기(skribi)/정치경제_PE
부채와 고전적 복지, 그리고 기본소득(혹은 더 강력한 보장소득형태)은 임금과는 별개의 소득 형태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이것들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축소된 임금소득의 보완물로서 다중이 불가피하게 선택하거나(부채의 경우), 국가의 정책으로 선택되거나(고전적 복지), 혹은 아래로부터의 운동에 의해 조직된다. 이것들은 살아있는 존재들의 삶의 요구에 대한 응답양식들이다.

이것들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먼저 고전적 복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케인즈주의 하에서 수요관리 정책의 일환으로 도입된 고전적 복지는 조건에 따른 선별적 복지이다. 특히 그것은 노동에 따른 소득이라는 관념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구멍을 파고 다시 덮는 방식으로 노동을 하게 하면서 이루어지는 복지이다. 그래서 그것은 일반성을 결여했다. 복지적 사회안전망은 산업예비군을 유지하는 장치로 기능했다.  그리고 그것은 시장실패적 산업영역들(학술, 예술)에 대한 보조금을 통해 그 활동들을 기간산업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한다. 지식생산, 정보생산, 미적생산은 일종의 기간산업으로 된다. 물론  우리는 복지가 노동자의 힘에 대한 자본의 승인방식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소득이 연대적으로 규정되었던 것은 바로 집단으로서의 노동계급의 힘에 의해 복지소득 형태의 다른 임금(사회적 정치적 임금)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일반화된 부채소득에 대해 생각해 보자. 부채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소득이 아니지만 사실상은 소득으로 기능한다. 그것은 살아 있을 수 있게 하며 활동하게 한다. 복지에 조건이 따라붙는다면 부채에는 그보다 더 강한 명령이 따라붙는다. 갚지 않으면 압류와 처벌이 뒤따를 수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임금이 개인화되듯 부채는 소득을 철저히 개인적인 것으로 만들면서 사회연대 원리를 해체한다. 부채체제하에서 노동계급의 단합된 힘은 승인되지 않는다. 다만 개개인들이 생을 보존할 필요성에 대한 승인만이 약하게 인정된다. 아니다. 자본은 다중이 살아야 한다고 설득하고 그러할 필요성을 강조하며 이를 통해 더 많은 부채에 대한 욕망을 갖게 만든다(삶정치).

기본소득은 부채에 뒤따르는 명령(생사여탈의 권력)이나 복지에 뒤따르는 조건과 선별의 철거를 요구하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이것은 소득을 직접적 노동(고용노동)으로부터는 분리시키지만 삶정치적 노동을 위시한 사회적 노동 일반에는 오히려 소득을 접근시키는 것이다. 삶정치적 노동의 시대에 삶은 노동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중첩되며 잉여가치 창출은 직접적 노동에 의해서라기보다 삶노동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고 살권리에 대한 기본소득의 주장은 삶정치적 노동에 소득을 제공하라는 요구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본소득은 결코 동정이나 시혜일 수 없고 살아 있는 자들의 당당한 권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당이나 국가의 정책이기에 앞서 다중들의 운동에 의해 요구되고 주장되어야 할 성격의 것이다.

2010/01/24 01:48 2010/01/24 01:48
진보, 생태, 느림의 이념에 의해 시발된 대안학교. 이 학교를 다닌 학생들이 대안학교가 공교육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획일성을 강요했다고 말하고 있는 사태에 주목해야 한다! 왜 동양자수는 되고 서양레이스는 안 되는가!? 왜 한국제는 되고 외제는 안 되는가!? 등등.

생태성이 현대문명에서 산출되는 (비록 적대적 사회구조에 의해 자본의 전유물로 되고 있지만) 생산물들과 그 풍부성들을 생태적 현상들로 파악할 수 없는 한, 그래서 그것들에 대한 네가티브 윤리학을 주장하는 데 머무르는 한, 이러한 문제는 극복될 수 없을 것이다. 대안은 문명의 생산적 가능성을 전혀 다른 조건과 관계 속으로 가져가는 것에서 찾아져야지 그것을 파괴하는 것에서 찾아져서는 안 된다. 단순소박한 삶이라는 이념의 문제는 여기에 있다. 단순함과 소박함보다는 특이함과 공통성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10/01/23 19:06 2010/01/23 19:06

『신자유주의와 화폐의 정치』(갈무리, 1999) 2장으로 내가 번역했던 존 홀러웨이의 글, 「심연이 열리다: 케인즈주의의 상승과 몰락」을 읽고 중요한 메시지를 정리해 본다. 우리 시대의 전사를, 아니 최근의 금융위기의 조건을 이해할 수 있는 핵심적 내용이 이 글에 담겨 있음을, 번역할 때에는 느끼지 못했던 생생함을 느낀다.

<케인즈주의의 상승>

-노동의 권력을 봉쇄하는 양식으로서의 케인즈주의의 붕괴를 검토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26)

-사회주의운동이 활성화되자 자본가들은 숙련노동자들이 산업발전의 조건에서 그것의 방해물로 바뀌었다고 판단하고 이들을 해체하기 위해 테일러주의와 케인즈주의로 전환한다(27)

-1920년대 전쟁 이후 세 가지 중요한 쟁점: 1)국제관계의 문제로서 혁명 러시아에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케인즈의 회유-포섭론에 대항하여 제재론을 규정한 베르사이유 조약이 체결되다) 2)국가의 역할 문제로서 전쟁기간에 증대된 국가의 생산장악을 유지할 것인가 다시 재사유화할 것인가(후자의 승리) 3)화폐통제 문제: 금표준의 복구로 민족통화가 금가격에 묶이게 되었다. 요컨대 혁명과 패전 국가에 대한 제재, 재사유화, 금표준의 복구가 진보주의자에 맞서는 보수주의자의 태도였다.(32)

-노동과의 화해를 주장한 진보주의의 대응은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것이 숙련의 파괴와 단조로운 노동의 도입으로 되자 노동자들은 이직으로 맞섰고 이것을 진화하기 위해 포드는 하루 5달러(2배이상의 임금) 정책을 도입했다. 이것은 죽음의 노동과 소비의 삶 사이의 교환이면서도 자본의 노동에의 종속을 의미했다.

-어째서 1929년과 1917년 사이에 10년 이상의 차이가 있는가? 혁명이 구질서를 타격한 이후 왜 10년이나 지나 붕괴가 찾아왔는가? 위기가 노동계급 권력의 표현이라면 왜 그것은 노동계급 패배가 명확해진 시점에 찾아왔는가? 그 답은 신용과 화폐에서 주어진다. 자본은 생산에서 수익성 하락에 직면했지만 신용과 화폐를 통해 (은행차관과 주식시장에서의 허구적 팽창에 의해) 재팽창의 계기를 찾았다. 그러나 실제 잉여가치와 투기된 잉여가치 사이의 격차는 1929년에 거대한 규모로 폭발했다.

-노동계급의 제도적 통합은 1925년 영국 총파업의 패배 이후였다. 특히 그것은 1929년의 붕괴를 계기로 구질서가 붕괴하고 체제 개혁의 요구가 들끓으면서 이루어졌다.

-포드주의 하에서 노동관계의 재편, 미숙련노동자로의 노동의 재구성이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이것이 자본주의의 재구조화의 충분한 장치는 되지 못했고 전쟁을 통해서, 국가 수중으로의 권력의 이동, 불변자본의 파괴와 탈가치화, 사용을 위한 생산, 그리고 무엇보다 수많은 노동력의 피살과 폐기 등을 통해 성취되었다.

<케인즈주의의 몰락>

-60년대 말 찾아온 케인즈주의의 위기는 노동과 자본의 관계의 위기, 즉 노동권력을 봉쇄하는 특수한 양식의 위기이다. 1)노동권력의 상승은 높은 임금, 즉 화폐 비용의 증대로 나타났다. 2)노동권력 상승의 또 다른 측면은 기계화였다. 이것은 유기적 구성을 고도화했는데, 이것은 착취의 비용이 점증한다는 사실의 표현이다. 3)노동권력 상승으로 착취의 간접비용도 증가했다. 재정지출이 늘어난 것이다. 생산에서의 기계화, 분배에서의 임금상승, 그리고 정치에서의 재정지출 증대는 케인즈주의적 자본축적에 한계를 부여한다. 이것이 1960년대 말 이윤율 하락과 사회적 불안정성 증대의 원인이다. 노동조합 권력도 그것이 대의하는 노동자들의 실제적 요구(노동거부, 국가거부 등)와 분리되면서 형해화되기 시작했다.

-1933년 금표준의 포기는 민족경제의 관리를 세계시장의 위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방식으로 화폐의 지배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1944년 브레턴우즈 체제는 미국 자본의 압도적 힘에 의해 가능해진 것으로 달러의 인플레이션적 유연성을 국제적 화폐 흐름 속으로 도입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또 세계시장으로부터 민족경제들을 일정하게 보호했는데 그것은 고정환율제에 의해 가능해졌다(격리효과). 이 두 장치를 통해 ‘무질서한 군중’의 권력인 노동권력은 국제통화체제 속으로 통합되었지만 그 속에서 불안정성으로 재출현했다.

-불안정은 신용확장으로 나타난다. 일국에서의 신용확장에 큰 자유가 주어졌고, 미국에서의 인플레이션이 제도화되었다. 1)신용확장의 지점은 국가라기보다 민간(기업과 소비자에 대한 은행당좌대출)이었다. 2)신용확장에 대한 국가통제의 결여는 미국 외의 달러시장(유로시장, 오일달러시장)을 창출했다.

-이 두 가지 화폐시장의 팽창은 금태환성을 약화시켰다. 고정환율제는 만성적인 수지불균형을 가져왔다. 태환가능성의 약화에 대한 우려는 달러를 금으로 바꾸고자 하는 욕망을 부채질했고 1971년 달러의 금태환성이 포기된다. 브레턴우즈체제가 포기되자 국가정책들은 다시 국제시장의 화폐흐름에 종속된다. 달러에 대한 투기적 압력이 고조된다. 케인즈주의의 죽음이 명백해지고 통화주의 경제이론에 자리를 내준다.

2010/01/23 18:01 2010/01/23 18:01
다음은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분리원칙을 부활시키는 것으로 현재의 금융문제에 대해 대응하겠다는 오바마의 1월 21일 발표를 알리는 한겨레 기사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21일 발표의 핵심은 대형 은행들의 위험도 높은 거래 금지와 금융산업의 덩치 키우기 제한이다. 그 방안으로 1930년대 대공황 이후 금융규제의 표준이던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분리 원칙을 되살리겠다는 것이다. 지난주 고액 보너스 잔치를 벌인 월가 은행들에 금융위기 책임을 묻는 새로운 조세를 도입하기로 한 것에 이은 근본적인 개혁안이다.

■ 표적은 자기자본투자 오바마 대통령은 상업은행이 고객의 예금과 신탁자산을 안정적으로 운용하는 데 머물지 않고 위험한 투자로 고수익을 추구하다가 위기를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이로 인해 국민의 혈세로 구제금융을 받는 관행을 더는 용인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배경에는 투자은행과 상업은행의 통합이라는 상황이 있다. 미국에서는 대공황 발발 직후 1933년 카터 글래스와 헨리 스티걸 의원이 제안한 ‘글래스-스티걸 법’이 발효돼, 투자은행과 상업은행을 분리했다. 일반인들의 예금을 받는 상업은행이 고객의 예금으로 주식 투자 등 위험성 있는 금융거래를 할 수 없게 한 것이다. 그러나 1999년 이 법이 폐지돼, 상업은행도 투자은행 업무를 겸하면서 모든 은행과 고객의 예금이 위험에 노출됐다.

물론 은행들이 고객의 예탁금(고객 계정)으로 주식 거래나 파생상품 거래를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투자은행 업무를 겸하다가 실패하면 은행이 부실해져 결국 같은 영향을 받게 됐다. 이 때문에 오바마 행정부는 이른바 ‘프랍거래’(proprietary trading)라는 자기자본투자(PI) 영업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 자기자본투자는 고객의 예금이 아닌 자기자본이나 차입금(자기자본 계정)에 의존해 위험도 높은 각종 금융거래를 하면서 고수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위험은 있지만 수익이 막대해, 투자은행과 상업은행을 통합한 은행들이 앞다퉈 나서며 덩치를 키웠다.

<뉴욕 타임스>는 오바마 행정부가 은행들의 헤지펀드와 사모펀드 소유·투자·후원, 프랍거래 개입을 금지하는 한편 고객들의 예탁금에 불리하게 거래하는 것을 규제하기를 원한다고 전했다.

■ 커지는 반발과 회의 하지만 이해당사자인 월가는 물론이고, <뉴욕 타임스> 같은 비교적 진보적인 언론들도 금융 환경이 바뀐 상황에서 실효성이 있을까 의문을 표하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오바마의 제안이 채택되더라도 금융산업을 별로 바꾸지 못할 것이라고 금융계 종사자들의 말을 전했다. 표적이 되는 프랍거래는 대형 은행 수입의 10% 미만이고, 모건스탠리의 경우 지난해 해당 부서를 폐지했다고 신문은 보도했다. 시티그룹, 뱅크오브아메리카, 제이피모건체이스는 프랍거래 규제가 채택되더라도 수입의 3% 미만만 줄어들 것이라고 전했다. 이런 새로운 금융규제를 외국 금융회사들에도 적용시킬 수 있을지도 불명확하다.

바니 프랭크 하원 금융위원장은 “금융기관에 단기간에 한꺼번에 이 규제를 실행하면 (상업은행들이 자기자본 투자를 철수하는 과정에서 자산 매각이 불가피하므로) 자산가격이 폭락할 수 있다”며 “아직 미국 경제 회복이 불안전한 상황에서 위험한 일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신규 제안 자체는 지지한다”면서도 “한번에 급격히 할 일은 아니며, 3~5년에 걸쳐 실행할 일이다”라고 말해, 오바마의 제안이 입법화되려면 길고 험한 길을 가야 할 것임을 시사했다.

이번 금융규제안을 밀어붙인 쪽은 폴 볼커 경제회복자문위원회 위원장과 백악관의 정무팀이다. 이들은 의료보험 개혁 이슈에 다른 개혁과제들이 묻혀버렸다며, 개혁의 고삐를 놓을 경우 오바마 행정부가 무력화될 수 있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오바마도 “미국 납세자들이 다시는 대마불사의 신화에 빠진 은행의 볼모가 되지 않게 하겠다”며 강력한 전의를 보였다.1

투자은행과 상업은행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투자은행이 상업은행보다 우위에 서게 된 것이 단순한 정책잘못 때문일까? 그것은 오히려 사회의 저변에서 일어난 생산력의 변동에 대한 대응양식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금융위기는 정책실패라기보다 이러한 대응이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 즉 금융에 의한 자본주의적 팽창양식이 공통적인 것을 포섭할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오바마의 개혁방안은 금융자본가들의 저항으로 통과되기도 어렵겠지만 설령 그것이 통과된다고 해도 통합된 세계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다중은 이 논쟁이 지배위기의 징후이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둘러싼 세계지배계급 내 논쟁이라는 것을 직시하면서  좀더 근본적인 방안, 현재의 공통적 부를 다중 스스로가 관리하고 재생산하는 방향으로의 세계재편을 향한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1. 정의길 선임기자,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globaleconomy/400546.html [Back]
2010/01/23 11:56 2010/01/23 11:56

발제에 관하여

Posted at 2010/01/23 10:58// Posted in 쓰기(skribi)/의견_O
다지연 정원칼럼에 쓴 글이다.(http://waam.net/xe/?mid=column&document_srl=14176)

세미나에 참가하면 발제를 맡게 됩니다.

발제는 세미나에서 가장 주체적인 행위형식입니다. 발제는 자신을 교육하는 행위이자 동시에 참가한 동료들을 교육하는 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의 집중력과 책임감으로 그 행위를 다듬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나 자신과 여러분들을 위해서, 그리고 다지원에서 열리는 세미나들을 위해서 몇 가지 생각을 적어보고 싶습니다.

첫째 발제는 최대한 명확해야 합니다. 모호한 것은 질문의 방식으로 명확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경계짓지 못하면 지성은 밟고 나아갈 디딤돌을 잃게 됩니다.

둘 째 발제는 주어와 술어를 갖춘 분명한 문장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정보들을 나열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그렇게 나열된 정보들은 이후에 과잉되어 결국 정보쓰레기로 됩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단순한 정보를 넘어 지식의 성격을, 더 나아가 사상으로서의 성격을 획득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문장, 단락, 글이라는 물적 형태들 갖추어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문자를 통해 수행을 하고 있는 한에서 문장이야말로 우리의 사유의 발전을 도와줄 가장 확실한 도구입니다.

셋째 사전을 찾는 것에 친숙해지고 습관이 들어야 합니다. 모르는 것은 무조건 (각종의 다양한) 사전을 찾아서 알아내려고 해야 합니다. 발제자는 거기서 얻은 지식을 발제를 통해 타인에게 전해주려는 교사적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사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을 질문으로 제기하는 것은 절대적 시간 부족의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더 많은 경우에 지적 게으름의 표현입니다. 

넷 째 질문이 없거나 혹은 토론 거리가 없다는 것은 수동적으로 읽고 있다는 것의 표시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독서는 창조적일 때 가장 생산적일 수 있습니다. 문장과 문장의 관계, 아이디어와 아이디어의 관계, 이 텍스트와 저 텍스트의 관계, 이 저자와 저 저자의 관계, 텍스트의 시대와 우리의 시대의 관계 등을 사유하면서 빈틈을 더듬고 그것을 물어나갈 때 독서는 가장 힘있고 강력한 지적 성장의 무기로 될 수 있습니다. 능동적으로 읽기 위해서는 발제만으로는 부족하고 그것이 토론으로, 나아가 실천으로 연결될 수 있는 고리들을 창출해 나가야 합니다.

다섯째 형식이 내용을 규정하는 측면을 이용합시다. 이미 올려둔 발제문의 서식을 이용하여 우리의 옛 습관을 교정하는 데 도움을 얻고 그 발제서식이 불필요한 구속으로 느껴지는 넘쳐흐르는 창조성의  시간에 과감하게 그 서식을 깨고 나갑시다.

세미나는 집단지성, 다중지성의 학교이고 공장임을 유의하면서 이곳에서 우리가 명확하고 새롭게 사고하지 못하면 세계의 변화가능성은 그만큼 줄어든다는 생각으로 세미나 시간을 혁명의 시간으로 이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10/01/23 10:58 2010/01/23 10:58
루카치 미학에 대한 잠정적 생각

루카치는 근대예술과 근대과학의 충실한 설명자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특히 부르주아 혁명기에 탄생한 근대예술의 원리들과 형식들을 이념화한다. 그런 한에서 루카치의 미학은 프롤레타리아 혁명, 특히 오늘날의 다중의 혁명의 예술적 이념으로 그대로 사용할 수 없다.

『미학』 1권 1장과 2장에서 루카치는 일상생활에서의 반영과 과학에서의 반영을 식별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전자는 직접적이고 인간중심적인 반면, 후자는 매개적이고 탈인간중심적이라는 것이 주요한 주장이다.

반영개념은 오늘날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에 합리적 핵심이 있다면 대상의 감각적 직접성을 넘어서는 보편적 특성을(예술적 반영의 경우는 대상의 특수성) 반영해야 한다는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대상들 사이의 내적 관계와 대상과 인식주체 사이의 관계를 아우르는 다면적 관계들의 구축이라는 의미로 재개념화함으로써, 다시 말해 반영을 공통관념의 구축과 공통되기의 실천의 계기로 재정위함으로써 그 함의 중의 일부를 다시 사용할 수 있다.

루카치는 노동을 축으로 하는 일상생활에서부터 예술과 과학의 분화를 설명하려 한다. 이것은 예술과 과학의 노동으로의 재통합을 설명하려하는 네그리와는 상반되는 지적 노력이다. 그래서 루카치가 미학에서 맑스의 『그룬트리세』(의 고정자본에 관한 장)를 명백히 참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과학기술의 생산과정에의 적용에도 불구하고 남는 과학기술(그리고 예술)의 독자성을 설명하는 데 역점을 둔다. 우리는 이것이 과학자, 예술가 등의 분업적 특수성을 옹호하는 것으로 귀착되리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루카치는 노동으로부터 정치의 독자성을, 그리고 활동적 삶으로부터 관조적 삶의 독자성을 옹호하려 한 한나 아렌트와 기본 정신에서 일맥상통한다.)

루카치는 오늘날의 노동에서 이전의 노동과 비교하여 과학적 범주가 훨씬 더 큰 중요성을 지닌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이어 그는 "그렇다고 해서 일상적 사고의 기본적 특성이 폐기되는 것은 아니며 과학적 요소를 더 많이 받아들인다고 해서 일상적 사고가 과학적 태도로 변화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라고 급히 덧붙인다. 일상생활과 과학 사이의 엄연한 특성적 구분을 유지하는 것이다.

루카치는 예술과 과학의 독자성에 대한 주장이 예술을 위한 예술이나 과학을 위한 과학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위한 독자성임을 세심하게 덧붙인다는 점에서 일상생활 대 예술.과학을 경직되게 구분짓는 경향과는 선을 긋는다. 그에 따르면 과학적 방법이 일상생활의 직접적 요구로부터 (물론 상대적으로) 결별한 것은 일상생활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다. 예술과 일상생활의 차이도 그와 같은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루카치는 예술과 과학이 일상생활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이 점점 더 예술적 과학적 계기에 의해 크게 자극되고 있는 경향을 인지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일상생활에서 예술과 과학이 차지하는 역할에 대한 인지는 예술.과학과 일상생활 사이의 엄격한 구분을 흐리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루카치는 노동하는 다중들이 스스로 예술과 과학의 수용자를 넘어 창조자로 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인정에 인색하며 그럼으로써 다중이 그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과 또 그렇게 되어야 할 필요성을 제시하는 데에는 무력하다.

그래서 그는 근대성의 이념에 누구보다도 충실한 미학자로 남아 있다. 이 입장은 그에게 플라톤주의적인 초월주의적 관념론의 전근대적 흐름을 올바르게 비판할 힘을 제공하지만  그로하여금 근대성의 경직된 분업을 넘어서려는  노력들 중의 의미 있는 부분까지도 근대에 대한 낭만주의적 비판이라는 이름 하에 기각하도록 만든다.

주목할 점은 그가 스피노자를 중시한다는 점이다. 스피노자의 인식의 진화론은 루카치에게서 일상적 반영으로부터 예술적 과학적 반영으로의 진화라는 형태로 재구성된다. 스피노자에게서 인식의 이러한 진화는 몸들의 진화, 몸들의 공통되기와 평행하는 것이며 그것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헤겔은 표상(종교)-직관(예술)-개념(철학)으로의 절대이성의 진화를 서술했지만 스피노자에게서 그것은 표상-이성-직관으로의 윤리적 진화로 나타났던 것이다.

루카치에게서 인식의 진화는 몸의 진화와 평행하기보다는 도구, 기술, 개념, 방법의 진화에 의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들이 변증법적 매개 개념에 의해 포괄되고 있는 바이다. 그리하여 매개 개념은 직접성에 대한 강력한 공격지대를 구축한다.

매개를 통한 직접성의 극복(루카치)과 공통되기를 통한 직접성의 재구성(네그리)가 대비될 수 있다. 두 사람은 대비되지만 한 가지 점에서 중요한 공통점을 갖는다. 그것은 노동과 그 진화에서 원리를 찾는 것이다. 루카치는 노동을 일상생활의 기본범주로 본다. 예술과 과학을 경유하여 혹은 그것들의 흡수를 통해 일상적 반영은 유적 자기의식에로 접근해 갈 수 있다고 그는 파악한다. 반면 네그리는 동일하게 노동에서 원리를 찾으면서도 노동의 비물질화, 지성화, 미학화와 과학화를 통해 노동의 담당층이 변화하며 이 과정에서 생성된 다중이 노동 주체이자 예술주체이고 과학주체로 되어가는 경향에 주목한다.

우리는 루카치에 맞서 직접성에서부터 공통성의 개념을 구출할 수 있다. 직접적으로 보이는 것들은 비매개적 방식으로 연결되는 다양체이자 공통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통체는 도구나 기술을 사용하지 않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도구나 기술조차도 실제로는 공통되기의 한 요소로 이해될 수 있다. 공통되기의 과정은 자연(환경)-기계-인간(생명)이 새로운 연관을 창조하는 과정이다. 기계는 매개하는 존재라기보다 그 자체가 공통되기의 창조과정의 참가자로 이해될 수 있다.
2010/01/23 00:56 2010/01/23 00:56
질문들
루카치는 과학은 이야기하는데 철학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철학도 과학적 반영의 일부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
과학적 반영에서 주관적인 것의 배제나 괄호치기가 가능한가?
들뢰즈의 탈기관체화와 루카치의 객관화의 차이와 공통성은 무엇인가?

2010/01/22 20:32 2010/01/22 20:32

맑스의 [임금노동과 자본](김태호 옮김, 박종철출판사)에서 몇 구절을 발췌하고 한 두마디의 생각을 덧붙여 보자. 2010년 1월 19일-아멜라노

 

예속

1. "개별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예속되어 있지는 않지만 계급으로서의 노동계급은 자본계급에게 예속되어 있다."(31) 즉 자유로운 노동자도 계급으로서는 노예이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노동력과 그 가치

2. 특정 상품의 가격은 그것의 가치보다 높거나 낮지만 전체로서의 상품의 가격은 그것의 가치에 조응한다.(38)

3. 무질서의 전체운동으로서의 부르주아 질서를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조정하는 것은 경쟁이다.(38)

4. 노동력의 가치에 들어가는 것은 노동력의 번식, 유지, 그리고 훈련이다.(41)

관계로서의 자본

5. 흑인은 흑인이다. 그는 일정한 관계 속에서만 노예이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이다.(42)

6. 생산관계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이기도 하다. 이 관계를 통해 특정한 역사적 사회가 생산된다.(43)

권력으로서의 자본

7. 자본은 산 노동을 지배하는 사회적 권력(으로서의 죽은노동)이다.(46)

*창조력-노동력-지배력이라는 세 개 유형의 권력형태, 권력 수준을 정의할 수 있을까?

*오늘날 좌파는 총고용 주장을 통해 노동의 더 많은 고용을 주장한다. 이것은 자본의 더 많은 성장을 주장하는 것이고 결국 자본과 노동의 이해관계가 동일하다는 부르주아 경제학자의 주장을 반복하는 것이다. (읽은 부분: 48~49)

8. 여러 곳에서 맑스는 '자본의 성장은 노동에 대한 자본의 권력, 지배력의 성장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특히 57, 58.

9. 실질임금은 임금과 교환될 상품과의 관계를 지칭하며 상대임금(비교임금)은 이윤과 임금의 관계를 표현한다.(53)

경쟁과 그 효과

10. 자본의 수의 증대는 자본가간 경쟁을 증대시키고 더 많은 노동자를 산업군대로 끌어들인다.(60)

11. 경쟁은 자본가들이 노동분할, 기계개량, 새기계도입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한다.(65)

12. 더 많이 노동함으로써 임금을 상승시키려는 시도는 자신에게 더 적은 임금을 가져다준다.(66)

13. 자본가간 경쟁에서의 기계의 도입은 숙련노동을 미숙련노동으로, 남성노동을 여성노동으로, 성인노동을 아동노동으로 대체하며 더 많은 노동자들을 퇴역시킨다.(67) 더 많은 기계 도입의 결과로 "노동자들이 작은 무리로 된다"고 했을 때, 맑스가 염두에 두고 있는 이 작은 무리의 계급적 역사적 성격은 무엇인가? 오늘날 비정규직 노동과 관련하여!

신용과 공황

14. 맑스가 1849년에 신용에 대해 쓰는 단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자본가들이 이미 있던 거대한 생산수단을 더욱더 큰 규모로 남김없이 이용하고 또 이런 목적으로 신용의 모든 용수철을 작동시키도록 강요받는 정도로, 상업세계가 부, 생산물들, 심지어는 생산력들 등의 일부를 지하세계의 신들에게 제물로 바침으로써만 자신을 유지하게 되는 상업지진이 증대한다. 한 마디로 공황이 증가한다."(70)

 

2010/01/19 14:09 2010/01/19 14:09

Reading of Deleuze Studies

Posted at 2010/01/19 00:07// Posted in 쓰기(skribi)/철학_F

Diagrammatic Actualism

This paper is on Deleuze's Diagrammatic Actualism, and discusses two versions of Deleuze that struggle for pre-eminence within Deleuzianism. One is that of the Virtual and the Concept - the other is of the Actual and The Diagram. Naturally, when it comes to Deleuze, such tendencies are always intertwined, but we still need to establish whether the Virtual and the Concept deserve the ontological priority they have hitherto received within Deleuzian scholarship. Perhaps the Actual can be retrieved from its currently derivative status when its ontology is understood diagrammatically. This paper is a first attempt at such a retrieval by looking at the way diagrams work both conceptually and phenomenologically in Deleuze's work as well as philosophy in general.

http://www.eri.mmu.ac.uk/deleuze/journaljanuary06_2.php

http://www.streaming.mmu.ac.uk/eri/del ··· rkey.wmv


In Difference and Repetition, the third synthesis of time is the privileged locus for an apocalyptic individuation whereby, in a striking inversion of Heidegger, the future 'ungrounds' the past and death become the subject of a time that splits the Self. For Deleuze, contra Heidegger, time, like death, is never 'mine': it is no-one's. The affirmation of eternal recurrence effects a mode of psychis individuation which transforms throught into sign of impersonal death.

http://www.streaming.mmu.ac.uk/eri/deleuze/brassier.wmv



This paper uses Gilles Deleuze’s philosophical approach to cinema to explore how certain contemporary films use unusual narrative time schemes to negotiate national identity at times of crisis or transformation. Deleuze’s categories of movement-image and time-image are often considered separate entities, illustrative of an epistemic shift that occurred after WWII. However, here the movement- and time-image are reconsidered as extreme poles of the same phenomenon. This reading of Deleuze’s work explains the existence of a number of recent films that contain aspects of both movement- and time-image, and use them to examine changes to national identity. Two contrasting examples of such films are discussed in depth, Sliding Doors (UK/US, 1997) and Peppermint Candy (South Korea, 2000), to illustrate the global applicability of this reading of Deleuze’s work.

http://www.streaming.mmu.ac.uk/eri/del ··· aper.wmv


The Production of the New

In this paper I introduce the collection of essays edited by Stephen Zepke and myself on Deleuze, Guattari and the Production of the New. I then go on to present a series of theses about the new – in relation to art and subjectivity – and, perhaps more importantly, offer up some questions, or doubts, in relation to these points and capitalism’s own intoxication with, and utilisation of, the new. My guiding problem here is the identification of that which constitutes a genuine event within art and life. This means that the paper is also involved in puzzling through some issues to do with time and temporality. I attempt to do all this through recourse to Deleuze’s precursors (especially Bergson and Spinoza) and, we might say, to his fellow travellers (especially the late Foucault and Negri), that is, specifically not through what Deleuze himself has to say on the matter.

Simon O'Sullivan, Goldsmiths College, University of London, U.K.

Simon O'Sullivan is lecturer in art history/visual culture in the department of Visual Cultures at Goldsmiths College, University of London. He has published widely on aesthetics and modern and contemporary art, with specific reference to Deleuze and Guattari, in journals such as Angelaki, Pli: Warwick Journal of Philosophy, Journal of the British Society of Phenomenology, Parallax and Afterall. He also writes catalogue essays, and is involved in collaborative art practice, with David Burrows, under the name Plastique Fantastique.

http://www.streaming.mmu.ac.uk/eri/del ··· ivan.wmv

2010/01/19 00:07 2010/01/19 00:07

la lecture majeure de Astérion

Posted at 2010/01/18 23:43// Posted in 쓰기(skribi)/철학_F
La figure socratique : du miasme au paradigme

Hayek lecteur des philosophes de l’ordre spontané : Mandeville, Hume, Ferguson

Industrialisation et mécanisation de la guerre, sources majeures du totalitarisme

Barbarisation moderne des guerres dans l’empire global : le paradigme de la guerre de banlieue [Texte intégral]
Alain Joxe

L’analyse des passions dans la dissolution du corps politique : Spinoza et Hobbes [Texte intégral]
Julie Saada-Gendron

Corps et esprit : l’identité humaine selon Spinoza [Texte intégral]
Lamine Hamlaoui

État et généalogie de la guerre : l’hypothèse de la « machine de guerre » de Gilles Deleuze et Félix Guattari [Texte intégral]
Guillaume Sibertin-Blanc

Théories de la connaissance en économie : théories rationnelles appliquées à l’économie et théorie intuitive selon Edgar Salin [Texte intégral]
Bertram Schefold et Gilles Campagnolo

« Contre-révolution », « guerre civile », « lutte entre deux classes»  : Montlosier (1755-1838) penseur du conflit politique moderne [Texte intégral]
Marie-France Piguet

2010/01/18 23:43 2010/01/18 23:43

빈곤사회연대에서 보내온 성명서이다.이명박 정부와 오세훈시장이 지금 시민들을 어떻게 사냥하고 있는지를 잘 묘사하고 있다.-amelano

[1.15 왕십리 뉴타운 동절기 강제철거 규탄 성명]


살인적인 동절기 강제철거 즉각 중단하라!


얼마나 더 죽어야 하는가! 지난 1월 15일 새벽, 왕십리 뉴타운지구에서 살인적인 동절기 강제퇴거가 자행되었다.

1년 가까이 장례도 치르지 못한 용산참사 철거민열사들을 보내드린지 일주일 만에, 지난 12월 동절기 강제철거에 떠밀려 60대 용강동 철거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한 달 만에, 또 다시 이명박 정부와 오세훈 서울시장은 철거민들의 죽음을 강요하고 있다.


특히 이번 왕십리에서의 자행된 동절기 강제퇴거에서는 단 두 건물에 대한 명도를 진행하고자 백 여명의 용역깡패들이 동원됐다고 한다. 게다가 두 곳 중에는 작은 가게에 주거를 겸하고 있는, 70대 노부부의 마지막 생존공간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깜깜한 영하의 추운 새벽에 아무런 저항의 능력도 없는 70대 노부부에게 행해진, 폭력적인 강제집행은 자칫 또 다른 죽음으로 이어졌을 수도 있었기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언제까지 세입자 보호를 운운하는 뻔뻔한 거짓말을 지속할 것인가! 이미 지난 2008년 11월 서울시는 동절기 강제철거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하며, 세입자 보호에 나서겠다고 언론에 홍보하며 약속했었다. 그러나 그 후 서울지역 수많은 곳에서 동절기 철거가 자행되었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거짓말과 변명으로 일관해 왔다. 법적으로 진행되는 명도는 막을 수 없다며 변명하기도 했고, 용산은 동절기 철거와 상관없다며 발뺌했으며, 용강동 철거민의 죽음 이후에도 동절기 철거는 없었다는 뻔뻔한 거짓말을 자행했었다. 이번에는 또 무어라 변명하며 거짓으로 넘어갈 것인가.


이미 한국의 강제퇴거의 현실은 국제사회에 큰 비난의 대상이 되어왔다. 동절기에 행해지는 퇴거 및 철거는 ‘반인권적인 행태’라며, 유엔에서 수차례 금지를 권고했었다. 그럼에도 역대 정권과 이명박 정권은 이를 철저히 무시로 일관해 왔다. 특히 왕십리뉴타운지구는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 추진한 시범뉴타운 지구 이다. 이명박 정권은 경제성장과 주택공급을 운운하며 뉴타운/재개발을 포함한 광역개발을 빠른 속도로 밀어붙여, 대책없는 강제철거라는 반인권적인 행태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더 이상 죽이지 마라! 이명박 정권과 오세훈 서울시장은 도시의 세입자들과 가난한 민중들을 죽음의 벼랑 끝 ‘망루’로 몰아붙이는, 살인적인 강제철거를 당장 중단하라! 개발이득만을 위해 폭력도 죽임도 서슴지 않는, 핏빛 재개발정책을 전면 개정하라!


동절기 강제철거, 이명박, 오세훈 규탄한다!

살인개발 중단하고, 개발악법 철폐하라!

개발보다 인간이다! 철거민 주거생존권 보장하라!


2010년 1월 18일

빈곤사회연대

공공노조 사회복지지부, 관악주민연대, 광진주민연대, 노들장애인야간학교, 노숙당사자모임한울타리회, 동자동사랑방, 문화연대, 민주노동당, 민주노동자연대, 민주노총,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민중복지연대, 반빈곤네트워크(대구), 사회당, 사회진보연대, 성공회나눔의집협의회,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 위례복지센터, 장애여성공감, 장애인실업자종합지원센터,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전국빈민연합, 전국실직노숙인종교시민단체협의회, 전국자활노동조합,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전국학생행진, 정태수열사추모사업회, 주거권실현을위한국민연합, 주거권실현을위한 비닐하우스주민연합, 중랑장애인자립생활센터, 진보신당, 천주교빈민사목위원회, 최옥란열사추모사업회, 피노키오자립생활센터, 한국백혈병환우회, 한국빈곤문제연구소, 향린교회, 홈리스행동(준)

2010/01/18 22:40 2010/01/18 22:40
비물질노동과 부채에 관한 이미지적 연구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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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8 16:16 2010/01/18 16:16
지오바니 아리기의 세계체제론적 금융위기론에 대한 논평: 중국보다 다중에 주목하자

아리기는 『세계체제론으로 보는 세계사』(원저, 1999)에서 세계체제론에 입각하여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와 금융팽창에 관한 아래의 다섯 가지 명제를 제시한다. 이미 금융위기를 경험한 지금 우리는 그것을 이 위기에 대한 예측이자 판단으로 읽을 수 있다.

다섯 가지 명제는 두 가지 전제에 입각한다. 하나는 '1)패권국가의 주도 아래에 일어난 체계 전체에 걸친 팽창은 새로운 패권국가가 전임 패권국가가 연 경로에서 직면한 문제들과 모순들을 해결하기 위해 체계를 재편하면서 다른 발전경로를 열었을 때 비로소 재개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2)과거의 패권이동들을 분석하면 이 이동들의 본질과 장래의 결과를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반복과 진화의 패턴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를 파악하는 시각은 정치적으로는 새로운 발전경로를 여는 패권국가들의 교체에 두어져 있다. 그에게서 세계체제는 국가간 체계가 발현되는 방식으로 이해되며 주요 행위자는 특정한 국가이다. 이 정치학은 반복과 진화의 패턴을 찾아내는 철학에 의해 지지된다. 시간은 동일성의 지속으로 이해되며 그렇기 때문에 진화도 동일성의 진화로 나타난다. 맑스는 '루이보나빠르뜨 18일'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반복이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전의 혁명들의 특징이며 이러한 혁명들은 과거로부터 통치기술을 가져온다고 비판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이와는 달리 미래로부터 영감을 가져오면서 낡은 것을 철저히 파괴하는 자기비판적 혁명으로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럴 때 진화가 작용한다면 그것은 도약과 폭발을 함축하는 것으로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에 더 접근할 것이다. 그런데 아리기는 패턴의 연속과 반복과 진화라는 동일성을 찾아내는 데 이론의 역점을 두는데, 이는 차이와 경향을 찾아내는 데 역점을 두는 맑스, 들뢰즈-가타리, 네그리-하트의 방법론과는 대립된다. 심지어 루카치도 항시 역사적 새로움을 탐구하는 데 역점을 두었음이 상기되어야 한다. 아리기가 국가라는 범주를 역사적으로 과도적이고 그래서 불안정한 생산관계이자 권력관계로서보다 릴레이하듯 되풀이될 안정적인 범주로 설정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철학관의 정치적 효과라고 해야 할 것이고 이것이 아리기 이론에 커다란 보수성을 각인한다.

그가 제시하는 다섯 가지 명제가 여기에 있다.(괄호안은 쪽수)

명제1. 최근 약 20년 동안의 세계적인 금융팽창은 세계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도 “세계시장의 다음 패권”의 선발대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패권의 위기가 현재 한창 진행 중임을 나타내는 가장 분명한 표지이다. 그러므로 이 팽창은 쇠퇴하는 패권이 이 위기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큰 파멸 또는 적은 파멸로 끝날 일시적인 현상일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431)

명제2. 현재의 패권위기에서 지정학적으로 가장 새로운 점은 과거의 패권이동에서 전례가 없는 군사능력과 금융능력의 분기이다. 이 분기는 체계의 가장강력한 구성단위들 사이에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을 감소시킨다. 그러나 이것이 현재의 패권위기가 다소간 긴 체계 대혼란으로 악화될 가능성을 감소시키지는 않는다.(435~6)

명제3: 세계적인 금융팽창과는 달리, 다국적 조직과 지역사회의 수와 다양성의 급증은 현재의 패권위기의 새롭지만 되돌릴 수 없는 특징이다. 이것은 미국의 패권질서가 해체되는 한 주요요인이며 결코 보편적으로는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국가의 권력을 약화시킴으로써 계속해서 체계의 변화를 형성할 것으로 예상된다.(441)

명제4: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세계적 금융팽창에 수반된, 사회운동(특히 노동운동)의 약화는 대체로 과도기적인 현상이다. 그것은 미국이 주창한 세계적 뉴딜정책의 약속을 이행하는 것과 관련된 어려움을 나타낸다. 새로운 사회적 갈등의 물결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크며, [그것은-인용자] 세계 노동력의 더 큰 프롤레타리아화와 점증하는 여성화와 변화하는 공간적. 인공적 구성을 반영할 것로 예상된다.(446)

명제5: 서양문명과 비서양 문명 간의 충돌은 우리 앞에 놓여 있다기보다 우리 뒤에 놓여 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현대 세계를 서양문명과 비서양문명(특히 다시 떠오르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문명) 사이의 변화하는 세력균형을 반영하는 문명들의 연합으로 변화시키는 데 따르는 어려움이다. 이 변화가 얼마나 격심하고 고통스러울지는(그리고 심지어 이 변화가 결국 문명간의 상호파괴가 아닌 연합으로 끝날지는) 궁극적으로 두 가지 조건에 달려 있다. 그것은 첫째, 서양 문명의 주요 중심지들이 얼마나 현명하게 보다 덜 높은 신분에 적응할 수 있느냐와 둘째, 다시 떠오르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문명의 주요 중심지들이 미국의 패권이 뒤에 남긴 체계 수준의 문제들에 대한 체계 수준의 해결을 제공할 과제를 공동으로 감당할 능력을 갖출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452)

나는 이 명제들이 근대사에 대한 유의미한 통찰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흥미 있는 것은 3과 4의 명제이다. 아리기는 동일성의 반복이라는 주요한 인식론적 목적 하에서이지만 반복 속에서 드러나는 차이의 지점들을 언급한다. 3에서 말하는 것, 즉 국가권력을 침식하는 초국적 조직과 지역사회들의 증식이 그 하나이고 4에서 말하는 '세계 노동력의 더 큰 프롤레타리아화와 점증하는 여성화'가 그것이다. 그럼에도 5에서 그의 관심은 새로운 패권국가로서의 중국이 새로운 발전경로를 열면서 현재의 국가권력의 침식을 만회하는 것에 관심을 둔다. 차이는 반복에 종속된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 장기 20세기서문 에서 아리기가 네그리/하트가 『제국』에서 수행한 아리기에 대한 비판이 자신에게는 억울하다고 한 것이 근거 없음이 드러난다. 차이가 서술되지만 그것은 반복에 종속되고 그래서 돌파와 단절의 가능성은 닫히기 때문이다.

내친 김에 덧붙이자. 4에서 아리기는 사회운동, 노동운동의 복귀를 점치지만 이러한 시각은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가 바로 새로운 유형의 사회운동에 대한 자본의 대응(반혁명) 양식이었다는 것, 요컨대 사회운동은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이라는 점을 감춘다.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것은 그의 반복론이 가하는 효과로 인해 중국을 대안중심으로 인식할 때, 그리고 중국 패권에 대한 서구의 적응을 요구하는 정치학을 그가 제시할 때, 주체성의 복귀에 대한 그의 비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패권들의 릴레이라는 거대한 순환을 장식하는 장식물로 전락하고 만다. 중국이 아니라 다중(그의 말 속에서는 여성화된 프롤레타리아트)이 '체계 수준의 문제들에 대한 체계 수준의 해결을 제공할 과제를 공동으로 감당할 능력'을 갖출 수 있다고,  아니 '자본의 세계체계의 해체와 다중의 전 지구적 공통체의 구축을 공동으로 감당할 능력'을 갖출 수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세계체제론의 순환적 릴레이라는 관점을 폐기해야 할 것이고 '반복과 진화'가 아니라 '차이의 반복'1을 사유하기 시작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1.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반복되는 것은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뿐이라고 말한다. [Back]
2010/01/17 12:09 2010/01/17 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