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이 부자유하다고 느끼는가?
사람은 몸존재이다. 몸이 없이 사람은 살 수 없다. 아니, 살아가는 것이 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몸은 매일매일 생산되고 또 재생산되어야 한다.
몸의 생산과 재생산은 부단히 외부의 것의 섭취와 배설, 즉 신진대사를 필요로 한다. 몸은 자기충족적인 것이 아니라 외부와 교류하는 것이다. 외부의 것을 먹고 입는 것의 반복, 신진대사의 반복은 몸을 살아 있는 것으로 유지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이 외부는 오늘날 자연적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산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몸의 생산과 재생산에 필요한 소재를 생산하는 것은 몸의 성장과 유지의 필수조건이다.
현대의 생산에는 생산의 수단이 필요하다. 그런데 생산수단은 오늘날 누군가의 소유로 되어 있다. 생산을 하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을 빌려 사용할 수 있겠지만, 대개의 경우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일정한 액의 화폐를 받고 자신의 몸을 팔 수밖에 없다.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으며 산 노동과 교환되는 화폐를 우리는 자본이라고 부른다.
자본에게 팔린 몸은 일정한 시간동안 자신의 욕망이나 의사와는 무관하게 노동하도록 강제된다. 그 시간동안 몸은 타자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몸이 부자유스럽다고 느낀다.
몸만들기
몸만들기가 오늘날은 생존전략으로 되고 있다. 에어로빅, 요가, 다이어트, 성형수술 등 운동적 외과적 조식(調食)적 방식들이 모두 동원된다. 이것에 웰빙이라는 문화적 가치가 덧붙여진다. 덕분에 몸만들기는 하나의 거대한 산업분야로 성장했다.
이것이 섭생의 필요에 따른 자연스런 요구의 표현일까? 현재의 몸만들기가 건강과 섭생의 내적 필요 이상의 추진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논증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목숨을 건 경쟁의 논리에 의해 이끌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몸이 자본의 요구와 기준에 맞추어야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의 결과이다. 슬림, 스탠다드, 혹은 180센티미터 이상의 키... 등등. 이 기준을 맞추지 못하는 사람들은 루저(loser)로 간주된다.
몸만들기는 가부장적 남성사회에서 오랫동안 여성에게 강요되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몸만들기가 이제 남성에게까지, 그러니까 인간종 전체에게 강제된다. 그것이 처음에는 분명 강제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이 기준들은 점차 몸을 파는 사람들에게 내면화되어 그들 스스로 경쟁적으로 선택하는 삶의 기준이 된다.
이것은 인간과 그 몸이 자본에게 실질적으로 포섭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몸에 대한 자본의 요구는 일차적으로는 노동력에 대한 요구이다. 20세기 초에 청교도와 금욕주의는 노동력을 싱싱하게 유지하도록 만드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 이제 웰빙과 경쟁과 몸만들기의 문화가 이 역할을 대신한다.
몸의 자본에의 실질적 포섭은 인간이 자본이 제시하는 척도 외에 다른 삶의 방향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의 징후이다. 몸만들기는 개인의 수준에서 전개된다. 몸들의 경쟁은 사회적 몸의 형성을 저지한다. 사회적 몸의 형성을 배제하면서 개인적 몸만들기가 지배하는 현실은 오늘날 임금체제와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신자유주의 이전에 임금체제는 사회적 연대임금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그런데 점차 임금, 월급 등은 사회적 연대를 통해서 획득하는 몫이 아니라 개인들이 경쟁을 통해서 획득하는 몫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몸을 파는 사람들의 협상력은 떨어지고 자본이 제시하는 기준이 유일무이한 척도로 기능한다. 그 결과 몸만들기 역시 개인화되어 사회적 몸의 형성을 배제하는 개인적 몸만들기로 된다.
오늘날 몸만들기가 부상하는 우리 시대 특유의 조건을 생각해 보는 것도 가능하다. 물질노동 시기에 몸팔기는 물질적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신체적 물리적 힘(즉 노동력)의 판매였다. 노동이 점점 비물질화, 서비스화되면서 즉 타자와의 관계로 되면서 타자의 시각적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몸에 대한 요구가 강하게 대두되었다. 미적 예술적 관계적 소비의 부상은 몸을 미적 예술적 가공의 대상으로 사고하게 만든다. 특히 정규직노동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가 수행할 노동이 관계적 수행적 성격의 것이면 그럴수록 몸이 만들어져야 한다. 이렇게 해서 몸에 대한 강제, 몸에 대한 명령권력이 우리의 삶을 짓누르게 된다.
몸값
임금은 몸의 가격, 좀 정확하게는 노동력의 가격이었다. 임금은 노동력의 생산비용, 즉 그 노동력 상품을 생산하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었다. 오늘날은 임금계산에서 노동시간보다 중요한 것이 몸으로 되고 있다.
만들어진 몸일수록 몸값이 비싸다. 노동력보다 매력이 더 중요한 것으로 되고 있는 것의 결과이다. 오늘날 정규직 노동자에게는 생산하기보다 거짓말하기, 속이기라는 역할이 부여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타인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그럴듯한 몸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매력은 바로 이 거짓말과 속이기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고 이것이 오늘날 자본의 착취/수탈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살: 자본의 신체에서 삶의 몸으로
자본에 개인으로 맞설 때 몸만들기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 몸을 만들어 자본으로부터 더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일시적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몸만들기에 열중하여 만들어진 몸이 평균화되면 몸의 가격은 다시 하락한다.
만들어진 몸을 매력적 몸이라고 불러보자. 그것은 거짓말과 속임수의 도구로 기능할 수 있다. 거짓말과 속임수를 통해 누군가의 사적 소유로 돌려지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공통의 것, 공통된 것이다. 사람들 모두의 소통과 지적 정서적 교류를 통해 형성된 공통의 것이다. 공통된 것이 누군가의 사적 소유물로 축적되면서 그것은 자본의 신체를 구성한다. 자본의 신체가 크면 그럴수록 그것이 명령할 수 있는 권력도 커진다.
몸만들기의 개인화는 공통된 것이 공통된 몸으로 되지 못하게 가로막는 요소이다. 공통적인 것은 그래서 자본의 신체에 그 고유의 몸을 갖지 못한 살로 남아 있다. 그것은 잠재적으로는 몸이지만 아직 몸이 못된 살로서 남아 있다. 그것은 자본의 신체로서의 뼈에 붙어서 자본의 신체를 만드는 구성요소로 기능한다. 다시 말해 공통적인 것의 잠재력이 자본의 신체에 합체되어 잉여가치의 원천으로 착취되는 것이다. 그 자본의 신체는 오늘날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하에서 조직되는 노동의 삶을 착취하고 수탈하는 인지자본주의 사회구성체이다.
새로운 몸
이 잠재력으로서의 공통된 것의 살을 공통된 몸으로 만들 때에만 우리는 강요된 그리고 개별적인 몸만들기의 강제에서 해방될 수 있다. 이것을 위해서는 공통된 것의 살로부터 그 뼈를, 자본관계=자본신체를 빼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살들이 뼈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수평적이고 횡적인 연대를 맺을 수 있는 자유의 새로운 공간을 열어야 한다.
이 자유의 새로운 공간에서 구축될 몸은 우선 특이한 몸들이다. 차이와 다양성이 생산수단 소유자의 강제와 명령에서 해방되고 그것에 내재적인 자유를 찾아나서면서 나타나는 효과일 것이다. 이것은 희소성의 세계가 아니라 풍부성의 세계를 열 것이다. 무한히 다른 것들은 단일한 척도를 파괴하고 조롱거리로 만들면서 풍부함을 특질로 하는 새로운 몸의 자원이 될 것이다. 특이한 것들이 획일성의 뚝을 무너뜨리면서 이미 그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다양함과 풍부함의 힘을 드러낼 것이다.
그렇지만 특이한 것들의 풍부함이 상충과 갈등의 증폭으로 나타난다면 다시 그것을 특정한 척도에 종속시키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과 관념들 및 체제들이 다시 승리하게 될 것이다. 풍부함은 개개의 것들의 분리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상호연결, 제3의 것의 생산을 위한 합성, 파생 등은 고립 속에 있는 특이성들의 잠재적 에너지를 훨씬 더 크게 해방시킬 것이다. 공통되기는 특이성을 묶는 식의 결속이 아니라 특이성을 새로운 생산과정 속으로 가져가는 식의 연합이다.
오늘날의 삶은 다양성 속의 공허, 풍부 속의 가난, 자유 속의 강제, 광대함 속의 협착함 등을 특징으로 한다. 특이하고 풍부하며 공통된 삶(Singular Wealthy Common Life)은 가능하다! 오늘날 강제된 가난하고 협착한 그래서 공허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이 느끼는 불만족이, 그들이 갖고 있는 거대한 생산능력이 바로 이러한 특이/풍부/공통의 삶을 일으켜 낼 주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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