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의 '공산주의'와 반역사적 주의주의 비판. 3---프롤레타리아트는 무엇으로 단결할 것인가?

1. 이 문제를 풀기 위한 이론적 논거들을 지젝은 대부분 네그리, 까를로 베르체롤네 등 이탈리아의 비물질노동학파와 연관된 자율주의자들의 연구성과에서부터 가져온다. 물론 그는 단순한 차용에 머물지 않고 그 고유의 전치와 한계부여를 통해 그것을 비판하고 또 넘어서고자 하지만 내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그 비판과 넘어섬이 과연 정당하고 유효한가 하는 문제이다.

2. 지젝은 현대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개념(네그리/하트) 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한다. 문화적 자본주의에서 우리는 더 이상 문화적 또는 감정적 경험을 초래하는 대상을 팔지 않고 (그리고 사지 않고) 직접 그러한 경험을 파는 (그리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문제는 이제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핵심적 문제는 후기 자본주의 내의 '지적 노동'의 우위(혹은 심지어 주도적 역할)가 노동의 객관적 조건으로부터의 노동의 분리, 그리고 이러한 조건의 주체적 재전유로서의 혁명이라는 맑스의 기본적 구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275)라고 올바르게 정식화된다.

3. 그런데 노동의 비물질화는 지젝에게, 사람들간의 관계가 사물들 간의 관계의 형태를 띠는  상품물신주의라는 맑스의 고전적 관념을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해야 할 필요성으로 다가간다.(275) 여기서 그는 맑스의 고전적 관념 자체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 의해 잘못 이해된 관념을 다룬다. 물신주의는 지젝의 생각과는 달리 사람들의 노동이 생산물이라는 대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 자체에서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들의 교환이 일반적 등가물로서의 화폐에 의해 매개된다는 사실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지젝은 자본주의의 고유한 현상인 상품물신주의를 단순상품생산사회에 고유한 그 무엇으로 전치시키는 논리조작을 통해 맑스(와 네그리)를 비판할 장치를 마련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자기 마음 대로 다룰 수 있는 인형이나 허수아비를 세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지젝에 맞서 상품물신주의는 맑스의 상품물신주의의 공식이 금융자본의 헤게모니가 뚜렷해진 현대에 와서 더 보편화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물질상품의 교환에 의해 매개되는 인간들 사이의 간접적 사회관계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직접적인 사회관계를 생산하는 비물질상품들조차도 화폐에 의해 매개됨으로써 상품물신주의가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4. 물신주의 체제의 이러한 보편화는 착취양식의 일정한 변화를 수반하는데, 그것이 '이윤에서 rent로'의 전환이다. 여기서 잠깐 번역어의 문제를 지적하고 넘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rent를 한글본 역자는 '세'로 옮기고 있는데 '지대'로 번역해야 옳다. 세는 물건과 건물과 같은 것을 임대하고 받는 사용료로서 대부자본의 잉여수취 형식이다. 그런데 지젝이 이 용어를 가져오고 있는 까를로 베르첼로네를 비롯하여 이윤에서 rent로의 잉여수취 형식의 전환을 주장하고 있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rent를 토지자본의 잉여수취 범주인 지대(특히 절대지대)의 의미로 사용한다.1 이 전환은 '지대에서 이윤으로의 전환'이라는 근대자본주의에 본질적으로 보였고 케인즈주의에서 그 정점에 이르렀던(지대수취 계급의 안락사) 경향의 역전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5. 지젝이 이윤에서 지대로의 착취양식의 전환을 사고하면서 염두에 두는 것은 '일반지성의 사유화'이다. 여기서도 지젝은 맑스가 일반지성의 사회적 차원을 경시했기 때문에 일반지성 자체의 사유화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했다는 식의 터무니 없는 농단을 하고 있다. 맑스는 당시의 기계류체제/고정자본을 일반지성의 물화형태로 보았는데, 고정자본이 사유화되어 있다는 것을 맑스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었던 사람이 또 있었던가? 그리고 그는 과학기술의 생산과정에의 응용이 더욱 일반화되고 노동이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것으로 나타날 때 개별 노동자들의 육체노동의 필요성이 사라지고 노동시간이 가치척도로서 기능하지 않게 될 가능성까지도 상상했다. 그럼에도 일반지성의 사유화가 이윤의 지대화 경향의 근거가 되고 있다는 지젝의 차용은 옳다. 그런데 사유화 자체는 지대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생산수단들의 사적 소유는 지대의 원천이 아니라 이윤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통적인 것의 사적 소유 독점만이 지대(특히 절대지대)의 원천이 된다고 말해야 한다. 이는 1)자연에 주어진 것이며 누구의 생산물도 아닌 공통적인 것으로서의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 독점이 2)공업과는 다른 자본구성을 조건으로 3)산업분야간 평균이윤 형성을 저지하는 장치로 작용하면서 토지소유자에게 공업에서의 평균이윤 이상의 초과이윤을 가져다주는 것이 곧 지대라는 맑스의 분석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맑스가 보지 못한 것(아니 볼 수 없었던 것)은 자연적인 공통된 것으로서의 토지를 넘어서 지대가 발생할 수 있을 가능성이었다. 일반지성, 아니 다중지성의 생산력으로의 전환과 그것의 헤게모니는 인간의 생산능력과 생산과정 전체를 사회화하고 공통화함으로써 착취가 공통적인 것의 착취 이외에는 불가능하도록 만들고 있고 그래서 자본이 바로 이 공통적인 것의 사유화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것에 오늘날 잉여수취 형식으로서 지대 범주의 부활과 일반화라는 현상의 근거가 있다.

6. 그런데 지젝은 맑스의 것이라면서 사실은 그 자신이 위조한 물신주의 개념을 이용하여 바로 공통적인 것의 일반화라는 현상 자체를 허구적인 것, 환상적인 것으로 몰아부친다. 만약 이것이 진실이라면 이윤에서 지대로의 전환이라는, 그가 옳다고 판단하는 주장도 동시에 허구가 될 것이다. 그가 이제 주장하고 싶어하는 것은 '사물들가의 [객관적인 시장] 관계가 의사 인격화된 사람들 간의 관계의 환영 같은 형태를 띠는 경향'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비물질노동화가 생산의 공통화를 가져오고 생산은 곧 공통적인 것의 생산이라는 네그리/하트의 주장은 바로 이 환영의 덫에 걸린 결과로서의 착시로 된다. 그래서 그는 "그들(하트와 네그리)이 직접적인 삶의 생산으로 칭송하는 것은 이런 유형의 구조적 환상이다"(281)라고 말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7. 계속 지젝의 시야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은 공통적인 것이라는 범주이다.  아니, 그는 공산주의 이념이 공통적인 것에 정초한다고 말하고 공통적인 것의 3대형태를 인정한 후에, 끊임없이 그 공통적인 것들의 범주를 의제적인 것으로 만들고, 허구화하고 심리학화(환영화)함으로써 그것을 해체하는 데 열심이다. "사람들 간의 관계의 물화(그 관계가 환영같은 사물들간의 관계라는 형태를 띤다는 사실)은 언제나 일견 정반대되는 과정, 즉 실제로는 객관적인 사회적 과정인 것의 허위적 인격화('심리화')로 인해 가중된다"(280)고 말할 때 그가 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지젝이 보기에, 네그리/하트가 공통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는 심리학화되고 환영화된 시장관계, 즉 허구에 다름 아니다. 노동의 공통되기, 다중의 공통되기, 공통적인 것의 생산의 중심에서의 부활이라는 현상을 허구/환상으로 치부하는 것은 실제로는 공산주의로부터 모든 유물론적 기초를 제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지젝에게는 문제일 수 없을지 모른다. 그는 한편에서는 공산주의를 공통적인 것에 정초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을 신념에 정초했고 전자가 붕괴된다고 해도 후자로 도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8. 지젝은 공통적인 것을 허구화하는 '시차적 전환'을 통해 자본주의적 시장관계의 침범하기 어려운 능력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중의 삶정치적 역량을 자본주의적 제도화를 넘는 과잉의 힘으로 사유하는 네그리에 반대하여 지젝은 자본주의적 네트워크 자체가 생산적 다중의 흐름을 넘어선느 진정한 과잉이며 다중의 생산이 직접적으로 삶을 생산하면서 거기에 그치지 않고 어떤 과잉, 자본이라는 과잉을 생산한다고 말한다.(279) 결국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유목적 다중의 끊임없는 분자적 운동에 몰적 구조가 기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중의 분자적 운동이 자본주의적 네트워크, 그 몰적 구조의 효과라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이 아니라 자본을 역사의 주인으로 만든다. 역사를 적으로 보면서 공산주의를 신념으로 정의하는 지젝의 주의주의 정치학은 일관되지는 않지만 철저하게 니체적 의미의 노예정신(탓은 주인에게 있다)에 의해 점철되고 있다.

9. 지젝이 일관되고자 했으면 공산주의를 공통적인 것 위에 정초하지 말아야 했을 것이며(아니면 그것이 나의 '오독'의 효과인가?) 이윤이 지대로 전환된다는 명제를 승인할 것이 아니라 이윤의 지대로의 전환이란 이윤의 자기운동의 착시효과이자 환상이라고 했어야 할 것이다. 지젝이 보기에 공통적인 것은 없고 사적인 것의 전일적 지배가 있을 뿐이다. 지젝이 대타자는 없다고 말할 때 그 진심이 '공통적인 것은 없다'에 있다는 것을 이제는 잊지 말아야 겠다. 그래서 지젝은 노동의 공통되기보다는 노동 내부의 분파화에 더 큰 주의를 기울인다. 지적 노동자, 육체노동자, 추방자 등의 세 분파로의 노동의 분화가 그것이다. 지적노동자(보편자)는 계몽된 쾌락주의와 다문화주의를, 육체노동자(특수자)는 포퓰리즘적 근본주의를, 추방자 분파(개별자)는 더욱 극단적이고 독특한 형태의 생활방식과 이데올로기를 가진다. 이 분파화는 "본래의 사회적 삶, 세 분파가 함께 만날 수 있는 공적 공간의 점차적 붕괴"이며 "그러한 상실에 대한 보충물"로서 "온갖 형태의 정체성 정치"(289)의 창궐인데, 대체 지젝에서 '본래적 사회적 삶'이 있기나 했던 것인가? 기원과 그 상실이라는 실락원적 테마로의 이러한 복귀는 대타자는 없다고 단언하는 지젝으로서는 지나치게 일관성이 없는 사고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10. 그런데 정작 놀라운 것은 지젝이 서로 반목하는 이 세부분의 프롤레타리아를 염두에 두면서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라는 옛 외침이 어느 때보다 적실하다고 말하는 것인데, 공통적인 것을 모두 해체당한 상태의 이 프롤레타리아트, 역사적 과정 자체의 경향에 의해 어떤 단결의 보증도 받을 수 없는 이 프롤레타리아트가 무엇을 계기로 단결할 수 있을까는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의 도착점을 이미 알고 있다. 말세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공산주의라는 기획된 신념/예견에 따라 선행하는 과거를 창출함으로써 말세의 가능성을 변화시키는 것. 반역사적 순수 주의주의의 공산주의 모험정신이 치를 예방전쟁에 반공산주의 좌파지식인들을 불러모으는 것. 이것이 이윤에서 지대로의 전환을 토대로 발전하고 있는 아시아적 가치에 기초한 권위주의 정부들에 맞서 지젝이 내세우는 '공산주의적' 단결의 전략이다. 지젝은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하라, 돌아오라!'고 호소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공산주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가 살아 있는 감정능력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1. 이에 대해서는 안또니오 네그리의 글, '절대지대에서 절대민주주의로'를 참조하라. [Back]
2010/09/02 23:31 2010/09/02 23:31
지젝의 '공산주의'와 반역사적 주의주의 비판. 2 --신념으로서의 공산주의

11. 그렇다면 그가 굳이 '공산주의'라는 말로 자신의 신념을 표현할 이유가 있었을까? 만약 그럴 이유가 있었다면 그것은 어떤 공산주의의 신념일까? 그는 자신의 공산주의가 출발점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몇 번이고 시작을 반복하는 (바디우적 의미의) 가설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바디우란 "공산주의적 가설은 올바른 가설이며 그 외의 어떤 올바른 가설도 발견할 수 없다. 만일 이 가설이 포기되어야 한다면 집단행동 차원의 어떤 일도 행할 가치가 없다. 공산주의의 관점 없이는 이 이념 없이는 역사적 정치적 미래의 어떤 것도 철학자의 흥미를 끌만한 종류가 되지 못한다"(175)고 말한 그 바디우이다.  지젝은 바디우의 이 생각과 더불어  "공산주의는 하나의 이상이 아니라 그러한 적대에 대응하는 운동"이라는 맑스의 생각을 덧붙이면서 그것이 여전히 전적으로 타당하다고 하지만 양자는 결코 나란히 놓일 수 있는 주장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디우의 것은 공산주의를 하나의 이념으로 신념으로 설정하지만 맑스는 그러한 생각에 반대하며 지젝이 '그러한 적대에 대응하는 운동'이라는 식으로 대강 인용하고 있지만 맑스는 실제로는 '현존하는 모순을 타파하기 위한 실재적 운동'으로 공산주의를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실재적 운동이야말로 실재적 경향의 표현 그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 지젝의 앞선 논리와도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다.  맑스와는 달리 지젝은  공산주의를 과학이나 지식에 의해 발견되어야 할 실재적 경향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신념과 의지적 선택에 의해 정립된 영원한 이념으로 보기 때문에 그로서는, "어떻게 공산주의 이념을 계속해서 창출해낼 적대를 정식화할 것인가?"(177)가 중요하게 된다.

12. '공산주의 이념을 창출해 낼 적대'가 주의주의적 자유선택의 산물임을 잊지 않도록 하자. 지젝은 이제 공산주의 이념에 충실한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이 이념에 실천적 긴박감을 부여하는 적대를 역사적 현실 안에서 찾아내야 한다"고 부언한다. 이것은 '공산주의적 선택을 하게 되면 그 선택으로 인해서 과거들(역사적 현실)이 그 선택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적대를 생산하므로 그렇게 재정렬된 과거를 발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이 해석만이 "어떤 사건이 --우발적으로-- 일어난다면 그 사건은 그것을 불가피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선행하는 연쇄를 창조한다"(296)는 말과 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지젝은 그러한 적대를 네 가지로 정식화하는 데, 1)다가오는 생태적 파국의 위협 2)새로운 기술-과학적 발전의 사회윤리적 함의 3)소위 '지적재산권'과 관련한 사유재산 개념의 부적절함 4)새로운 장벽과 빈민간의, 즉 새로운 형태의 아파르트헤이트의 생성 등이 그것이다.

13. 앞의 세 가지는 하트와 네그리가 말한 공통적인 것들, 즉 1)외적 자연의 공통적인 것 3)내적 자연의 공통적인 것 3)문화의 공통적인 것 등에 대한 사유화, 혹은 울타리치기로 인해 발생하는 적대이다. 지젝이 '공산주의라는 관념의 소생이 정당화되는 것은 공통적인 것과 관련해서다'(184)라고 말할 때 확실히 그는 네그리/하트와 공유되는 생각을 피력하는 것이며 그의 의도를 넘어서 '역사의 실재적 경향'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셈이다.

14. 그렇다면 그는 공산주의를 공통적인 것과 어떻게 관련짓는가? 무엇보다 그는 공통적인 것의 울타리치기와 사유화의 과정에 주목하는데, 이로부터 그는 프롤레타리아라는 이름을 호명한다. 자신의 실체에서 배제되는 자들, 꼬기또가 사라지는 지점으로 영락한 주체들, 잃을 것은 족쇄밖에 없는 주체가 아니라 모든 것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는 주체들, 상징적 실체를 빼앗기고 유전자 염기는 심하게 조작되고 살 수 없는 환경에서 비실대며 모든 실체적 내용이 결여된 추상적 주체, 호모 싸케르, 몫없는 자들....이들이 지젝의 프롤레타리아이다. 우리는 이 프롤레타리아를 맑스의 프롤레타리아트와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맑스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울타리치기를 역사적 전제로 형성되지만 울타리치기가 프롤레타리아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맑스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배제나 박탈을 전제로 하면서도 그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정에 결합되어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동시에 생산하는 창조적 주체성이다. 그것은 생산수단에서 유리된 존재이고 시장에서는 노동력상품으로 나타나는 존재이며 생산과정에서는 불변자본과 융합되는 가변자본으로 나타나는 존재이며 유통과정에서는 소비자로 나타나는 존재이지만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적 재생산 전체의 심부에서 자연, 기계, 인간을 생산 속에서 통합하는 주체성이며 역사의 잉여를 생산하는 주체성이다. 그는 족쇄에 묶여 있지만 세계를 창조하는 불이다. 자본은 바로 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의존하기 때문에, 특히 현대에는 이들의 전 지구적이고 전 사회적인 결합노동, 사회적 노동, 공통노동에 의존하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공통적인 것 모두를 빼앗을 수는 없다. 만약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것을 자본이 통째로 뺐는다면 자본은 더 이상 재생산될 수 없을 것인 바, 자본이 착취하고 수탈하는 것이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능력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자본에게는 안 됐지만 프롤레타리아트로 하여금 능력 있도록 함으로써만 자본은 사유화와 울타리치기와 사유화와 축적을 계속할 수 있는 역설 속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영락의 이미지를 부여하는 것(몫없는 자, 호모 사케르, 쓰레기, 모든 것을 잃은자 등)은 일면의 진실을 갖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결코 진실이 아니다. 지젝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좌파지식인이 프롤레타리아에게 부여하는 이미지일 뿐이다. 이것은 역사를 종말론적 서사에 따라 재구성하는 방식의 하나인데, 지젝은 "이것이 종말론적으로 들린다면, 우리는 종말론적 시대게 살고 있다고 대꾸하는 수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화의 세 가지 과정 각기이 어떻게 종말론적 종점을 가리키고 있는지는 분명하다. 생태계의 와해, 인간의 조작가능한 기계로의 유전자공학적 환원, 우리 삶에 대한 총체적 디지털 제어 .... 이 모든 차원에서 상황은 제로 지점에 다가서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이를 자인하고 정당화한다. "마지막 때가 가까이 왔다"(186)고 말이다. 멸망의 위협을 급진적인 해방적 재생의 기회로 사고하자고 하는 점은 지젝만의 고유한 주장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모든 종말론들의 공유부분이다. 문제는 기회를 어디에서, 어떤 힘에서, 어떤 길에서 찾는가이고 종말론적 인식이 지금껏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킬 여우의 계기를 찾아오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15. 지젝은 "우리가 공산주의자의 이름값을 하고자 한다면 그러한 종말론적 프롤레타리아화로는 부족하다"(190)고 덧붙인다. 그 부족함이 무엇일까? 그것은 네 번째 적대인 프롤레타리아 대 비프롤레타이아의 적대(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의 적대)를 앞의 세 가지 적대에 우선하며 핵심적이고 결정적인 적대로 설정하는 것이다. 이 적대야말로 앞의 세 적대에 전복적 효력을 부여하는 그 적대이다.  이 적대는 생존의 문제라기보다 정의의 문제며 행위자에게서 실체적 내용을 박탈하는 것이라기보다 사회정치적 공간에서 일정 인물들을 배제한다는 형식적 사실을 뜻한다. 이제 문제는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 사이에서 어느 쪽이 다른 세 가지 적대에 헤게모니를 장악할 것인가?(197)로 된다. 지젝은 여기에서 위에서 실체를 빼앗겨 영락한 주체로 정의된 프롤레타리아트를 '사적 질서 안에 딱히 정해진 자리가 없는 연유로 보편성을 직접 표상하는 사회집단'(198)으로 재정의한다. 이 몫이 없는 부분인 프롤레타리아에게 지젝이 할당한 보편성이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좌파지식인들에게 그가 할당한 보편성과 결합함으로써 진정으로 해방적인 정치를 열 수 있다(199)고 지젝은 말한다. 전위와 대중의 이분법을 다시 재생산하는 듯한, 모호하기 그지 없는 이 정식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권을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정의하는 곳(205)에서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서술된다. 그것은  배제된 자들을 기존의 자유민주주의적 틀 안에 포함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공적 사용자들이 정치공간과 정치적 조직형태를 배제된 자들에 맞도록 재조직하는 것이다. 배제된 자를 기존 틀에 포함하는 것(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비해 배제된 자에 맞게 정치공간을 재조직하는 것(지젝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은 분명히 진일보한 측면을 갖지만, 여전히 배제된 자는 이성의 공적 사용자들의 시혜를 기다려야 하는 존재로 남아 있다. 이것은 몫 없는 자들의 평등요구라는 랑시에르의 평등정치학에 비해서도 약한 해방성을 보여주는 것이지 않은가?

16. 계속 문제가 되는 것은 배제와 배제된 자들을 다루는 방식이다. 지젝은 20 대 80의 사회에서 80%의 사람들을 무의미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정의한다.(206) 여기서 지젝은 '능력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권력'이라는 푸코의 관념이 배제 자체가 포함의 양식으로 되는 비가시적 존재, 고유의 자리를 갖지 못한 존재(혹은 배제의 자리가 고유한 자리인 존재)로서의 프롤레타리아(바디우)를 다룰 수 없다는 이유로 부적당하다고 비판하는데, 이것은 프롤레타리아가 자본주의적 적대 속에서 획득하는 능력들에 대한 탐구를 애써 기피하고 해방정치의 문제를 배제된 자, 무력한 자, 무의미한 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 위에 정초한다.  그렇기 때문에 잉여로서의 노동자, 쓸모 없고 무가치하게 된 모든 자들로서 사유되는 프롤레타리아의 재통합이라는 공산주의 기획/가설은 프롤레타리아를 공통적인 것의 물적 담지자로 파악할 수 없는 한에서 공통적인것과 하등 상관이 없는 이념이자 신념이 된다. 이 논리적 자기모순이야말로 그가 지도자를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프롤레타리아를 대신해서 이성의 공적 사용자들인 좌파지식인을 공산주의의 고유한 주체성으로 끌어들이게 되는 배경, 그래서 프롤레타리아를 역사의 잔재로 파악하면서 그것과 역사의 가장 진보한 측면(이 단어는 틀림 없이 반공주의적 전력을 가진 순수한 좌파를 지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의 직접적 단락이 문제라고 말하게 되는 배경이 아닐까?

16. 지젝의 공적 이성-프롤레타리아 단락론은 사회주의와 대중의 결합이라는 테마의 변주임이 분명하다. 이 변주는 "헤겔과 아이띠"의 단락이야말로 공산주의의 가장 간결한 정식(222)이라는 주장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헤겔은 좌파지식인에 대한, 아이띠는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은유이다. 내가 여기서 관심을 갖는 것은 지젝의 프롤레타리아관이다. 최초의 성공한 노예반란으로 평가되는 아이띠의 사례에서 지젝이 읽은 것은 몫이 없는 자들의 독특한 보편성, '라 마르셰예즈를 부르고 있는' 아이띠 반란자들이다. 여기서 지젝은 능동화한 반란자들의 형상, 보편성의 운동을 제시한다. 나는 몫 없는 자들의 '보편성'의 잠재력에 동의한다. 그러나 지젝과는 달리 그 보편성은 몫이 없다는 사실 자체에서 주어진다기보다 (분배와 소유에서의 사적 제약들, 불평등들에소 불구하고) 삶과정에서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 관계에서 그 보편성의 요구가 주어진다고 생각한다. 살아 간다는 것은 보편적 교류와 소통의 필요성을, 모든 사람들의 공통관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지젝은 바디우를 따라 공산주의를 끈질기게 존속하며 때때로 폭발하는 영원한 이념으로 정의한다.(254) 그렇다 공산주의는 영원한 이념이다. 그러나 그것은 박탈과 배제를 근거로 삼는 영원한 이념일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삶과 생명의 진화의 영원성과 그 실재성에 근거하는 영원한 이념이다.

17. 그런데 자본주의는 그것이 아이띠든 파리코뮌이든 러시아혁명이든 1968혁명이든 지금까지의 모든 공산주의적 폭발을 흡수하는 데 성공해 왔다. 자본주의 체제는 그것을 넘어서는 과잉을 배제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대놓고 자신의 추동력으로 정립해 왔다. 끊임없는 자기혁명화, 끊임없는 한계 극복을 통해서만 자본주의는 자기자신을 재생산한다.(252) 그래서 끊임없는 역전, 위기, 재발명을 동반하면서 축제화된 것은 바로 자본주의의 정상적 삶이며 그 어느 때보다 예외로 보이는 것은 안정된 윤리적 입장에서의 자본주의 비판이다.(255) 이것은 지난 역사에 대한 사실적인 서술이다. 그렇다면  반역과 그것의 자본주의 속으로의 재기입이라는 순환을 깨뜨릴 혁명은 어떻게 가능할까? 지젝은 이 역사적 순환을 악순환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진보가 없다는 인식의 표현이며 역사를 적으로 하나의 악몽으로 간주하는 관점의 표현이다. 그래서 지젝은 사건적 폭발에 정상성으로의 귀환이 뒤따르는 패턴을 더 이상 따르지 않기 위해서는 "반역으로부터 새로운 질서를 강제하는 데로 뻔뻔스럽게 이행해야 한다"(259)고 주장한다. 그는 "적은 이제 국가가 아니라 영구한 자기혁명화의 흐름"(259) 자체라고 하면서 공산주의 운동에서 국가와 정치의 관계에 관한 두 가지 공리를 제안한다. 첫번째 공리는 공산주의적 국가-당 정치의 실패는 무엇보다 반국가적 정치의 실패로서 국가적 조직형태를 자기조직화의 직접적, 비대의적 형태의 평의회로 대체하려는 노력의 실패라고 단언하는 것이다. 이러한 진단 위에서 그는 두번째 공리로 진정한 과제는 국가에 거리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체를 비국가적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259) 국가를 변형하고 그것의 기능이나 토대에 대한 그것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국가를 민중참여의 새로운 형식들에 의존하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면, 그리고 그것만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면 그것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실현되어야 할 과제인가?

18. 첫 번째 공리와 관련하여 우리는 지젝에게 정말로 국가를 평의회로 대체하려는 실험이, 그것이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역사 속에서 진지하게 시도된 적이 있는가? 물어야 한다. 오히려 역사에서 문제는 평의회를 봉기의 기관으로서만 사고할 뿐 권력기관으로는 사고하지 않았던 전위들의 뿌리깊은 대중불신이 국가에 대한 억압, 해체, 파괴가 아니라 평의회에 대한 억압, 해체, 파괴를 가져오면서 공산주의를 저지하는 것으로 작동하지 않았던가? 두 번째 공리와 관련하여 국가 자체를 비국가적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지젝의 서술들이 그것을 프롤레타리아 자신에게서 찾기보다 반역사적 순수주의주의를 따르는 좌파지식인에게서 찾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프롤레타리아를 존재론적 공통되기의 계급이 아니라 배제되고 영락한 존재, 즉 호모사케르나 쓰레기로 된 몫 없는 부분으로 간주하는 지젝의 관점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직접 그러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오를 수는 없을 것이고 실제로 프롤레타리아의 직접적 공통체 구축을 역사적 실패로 단정하는 입장에서 국가의 기능전환은 결국 좌파지식인들의 몫으로 돌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젝의 생각은 또 하나의 대의주의로 보아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곳곳에서 나타나는 대의주의 비판이 그것을 부정하지만, 그보다 좌파지식인은 지젝에게서 이성을 공적으로/합법적으로 사용하는 보편적 주체이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를 대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 집단은  민중에 대한 신뢰에 기초하지만, 자신의 신념에 따라 1)평등주의적 정의 2)처벌적 테러 3)정치적 주의주의(250)를 실행하는 것으로 국가의 그러한 기능전환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 그 기능전환의 양식이 의회민주주의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지젝은 의회민주주의를 민중의지를 수동화하고 의지를 비의욕으로 변화시키는 정치형식이라고 파악하기 때문이다.(268) 이미 자유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경쟁하는 당들이 정치를 조직하는 형식 자체를 통해 특정한 가치와 실천들에 특권을 부여한다. 그것은 결코 중립적인 것이 아니며 다중을 정치로부터 배제시키는 형식이다.

20. 대의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의 이 유럽적 정치실천의 형식이 최근 아시아적 가치에 입각한 다양한 유형의 권위주의 정치(중국의 후진타오,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러시아의 푸띤 등)에 의해 대체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답하면서 지젝은 그 답지 않게 "현시대 자본주의의 논리 자체에 이러한 부활의 내적 필요성이 있다"는 식의 유물론적 분석방법에 의지한다. 이 문제에 대한 지젝의 응답은 좀더 자세히, 비판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는 중요한 논점을 제시한다.



2010/09/02 10:00 2010/09/02 10:00
지젝의 '공산주의'와 반역사적 주의주의 비판. 1---반역사적 주의주의

1. 21세기의 첫 십년의 교훈을 정리하는 책,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창작과비평, 2010)에서 지젝은 '다시 공산주의communism다!'라는 슬로건을 꺼내든다. 네그리와 가타리는 이미 1983년에 '코뮤니즘communism을 오늘날의 악평에서 구출하라'는 슬로건을 제시한 바 있다. 1990년대에 가라타니 고진도 다시 ‘코뮤니즘’을 되살리는 작업에 나선 바 있고 알랭 바디우도 같은 작업을 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최종적 승리를 선포하는 시기가 바로 공산주의/코뮤니즘를 본격적인 화두로 등장시킨 시기였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그리고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이제 우리는 '문제는 공산주의communism다!'라고 하는 것이 적실한 시대, 이 말이 결코 농담이나 헛소리로 들리지 않는, 뭔가 진지한 내용을 담은 말로 들리기 시작하는 시대를 살기 시작했다.

 2. 1930년대에 '문제가 리얼리즘이다'라는 명제가 '어떤 리얼리즘인가?'를 둘러싼 논쟁으로 나타났듯이, '문제는 공산주의다!' 라는 것은 '어떤 공산주의인가?'라는 논쟁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지젝은 위 책에서 네그리와 하트의 공산주의 개념에서 출발하고 그것의 문제의식 상당부분을 수용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개념과는 매우 상이한, 그리고 그들의 개념에 대해 비판적인 공산주의 개념을 제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공산주의가 어떤 공산주의인지를, 다시 말해 그것이 누구의 공산주의인지, 누구를 위한 공산주의인지, 무엇을 가능케 하는 공산주의인지 등을 묻지 않을 수 없다.

3. 지젝의 호소는 이렇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라, 돌아오라! 그대는 지금까지 나름대로 반공산주의적 놀이를 즐겼고, 그에 대해 용서함을 받았다 --이제는 다시 진지해질 때다!'(308) 여기서 그대는 누구이구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새로운 끄랩쩬꼬들, 20세기 공산주의에 실망했었지만 처음부터 다시 공산주의를 재발명할 준비가 된 사람들(307)이다. 그리고 그대는 아직 공산주의를 재발명할 준비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럴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지젝이 생각하는 반공산주의 좌파들이다. 2008년의 금융위기라는 희극적 사건은 이들로 하여금 자본주의가 파국을 맞을 가망성이 크다는 것을 알게 하고 이들로 하여금 역경을 뚫고 행동할 준비를 갖추도록 자극하는 사건이다.

4. 지젝은 명시적으로 (미국, 인도, 중국, 일본,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중동, 서유럽, 동유럽 등지에서 출현하여 서로 이질적이며 각기 다른 언어를 말하지만 결코 적은 수는 아닌 이들) 반공산주의 좌파들의 공산주의로의 재결집(다시!)을 호소하는 책이다. 공산주의로 재결집하는 반공산주의 좌파, 그러나 20세기의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어떤 향수도 지니지 않은 좌파가 그러므로 지젝의 공산주의의 주체성이다. 그래서 지젝은 말한다: "오랜 갈망의 대상인 급진적 사회변혁을 촉발할 수 있는 새로운 행위자의 도래를 애타게 기다리는 좌파 지식인들에게는 단 하나의 올바른 답변이 있다. 그것은 호피족의 옛 속담인데 거기에는 실체에서 주체로의 멋진 헤겔적 뒤틀림이 있다--'우리가 기다리던 사람들은 바로 우리다'."(302) 반공산주의 좌파지식인들을 주체로 불러내는 것, 그들에게 기다려야 할 대타자는 없음을 각성케하고 그들을 비활동성의 늪에서 구출하여 파국과 종말을 향해 치닫는 세계를 구출하는 행위에 나서도록 만드는 것이 지젝의 공산주의 전략이다.

5. 대타자가 없다는 말은 지젝에게서 보편적 해방이라는 예정된 과업을 완수할 프롤레타리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대타자는 프롤레타리아트에서 곧바로 역사로 직행한다. 대타자가 없다는 말이, 역사는 우리(이 '우리'가 반공산주의 좌파지식인들임을 잊지 말도록 하자) 편에 있지 않다는 말로 전치되기 때문이다.(303) 그리고 연이어 지젝은 '없다'을 '적대적이다'로 바꾼다. 그래서 지젝은 이제 "역사가 우리 편에 있다는 고전 맑스주의의 믿음과 달리 현시대의 형세를 보면 대타자는 우리에게 적대적이다"(303)라고 말하게 된다. 처음에 대타자는 해방자 프롤레타리아와 동일시되고 다음에 그것은 다시 역사와 동일시된다. 역사는 지젝에게 존재하지 않으며 적대적이다. 존재하지 않는 적대적인 것, 이것이 이데올로기란 말의 고유한 내용이 아닐까? 지젝에게서 역사는 이데올로기이며 환상이다. 그래서 그는 역사의 기관차를 멈춰 세우는 것을 혁명으로 파악한 벤야민의 은유를 받아들이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정치적 행위라고 말한다. 그러나 역사의 기관차를 멈춰 세우는 그 행위는 (벤야민에서와는 달리) 과거의 모든 셈을 청산하는 상징적 최후 심판에 관한 어떤 기대도 포함하지 않는 말세론적 종말론에 입각한다. 역사의 진보라는 기차가 환상열차(꿈)일 뿐만 아니라 역사 자체가 환상이고 마야(Maya)이다. 이것은 부처가 해탈의 논리를 정초하는 인식론적 토대이며 벤야민이 각성의 모티브를 설치하는 장소이다.

6. 맑스도 상품물신성의 세계를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로 파악했지만 그것은 사회적 노동이라는 실재가 화폐매개를 거치면서 나타나는 현상형식이었을 뿐이다. 다시 말해 맑스에게 역사는  그것이 아무리 환상적인 현상형태를 취한다 할지라도 실재적인 것이지 결코 환상적인 것이 아니다. 대타자가 없다는 데에서 시작된 지젝의 추론은 명확히 맑스의 '역사적 유물론'과는 대립하며 그것과 적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역사를 비존재적 적대자로 설정하는 것이 그 첫 발걸음으로서의 반역사주의라면 '역사적 필연을 거슬러 행동하려는 우리의 자유로운 결정'에 내기를 거는 것, 그가 '순수한 주의주의'라고 명명한 것이 그것의 두번째 발걸음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유물론 반역사적 주의주의 사이를 가르는 심연이 맑스와 지젝 사이에 놓여 있음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7. 순수한 반역사적 주의주의가 '대타자는 없다'를 역사는 없으며 있다면 그것은 적대적인 것으로서만 있다고 해석할 때, 이 해석은 시간에 대한 새로운 관념에 근거하는 것이다(295). 장 삐에르 뒤삐의 '기획의 시간' 개념으로부터 지젝은 "어떤 사건이 --우발적으로-- 일어난다면 그 사건은 그것을 불가피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선행하는 연쇄를 창조한다. (...) 이러한 의미에서 비록 우리는 운명에 의해 결정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운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자유는 자신의 운명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자유다."(297)는 생각을 이끌어낸다. 얼핏보면 이것은 맑스가 말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시간 개념과 매우 유사하다. 맑스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과거가 아니라 오직 미래로부터만 이룰 수 있다고, 이전의 혁명들은 자기 자신의 내용에 관해 자기 자신을 속이기 위해 세계사를 회상할 필요가 있었지만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은 과거에 대한 모든 미신을 떨쳐 버려야만 스스로 시작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혁명은 미래로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루이 보나빠르뜨 브뤼메르 18일」의 생각이 맑스에게서 '실재적 경향'(아마 지젝이 역사적 진보의 환상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일 것이다. 304쪽 참조)과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개개인의 의지로부터 출발하는 것을 의미할 수 없다는 것은 『자본론』을 비롯한 맑스의 다른 저작들이 증명하는 바이다.

8. 역사 속에서의 실재적 경향에 대한 탐구를 환상으로 치부하면서 자유의지를 그 대안으로 제시하는 지젝의 주의주의에서 자유론은
파국론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가능성의 차원에서 우리의 미래가 끝장나게 되어 있다는 것, 파국이 일어나리라는 것, 파국이 우리의 운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297). 그런데 파국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파국이 실재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므로 파국의 가능성들에 대한 따져봄은 의미가 없다. 내가 보기에 지젝에게서 파국이 결정된 운명인 것은 그것이 선택된 운명이기 때문이다. 진보가 어떤 실재적 결정조건들을 갖지 않는 환상이듯이 파국을 결정하는 어떤 실재적 조건들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파국은 주체가 선택하는 자유의지적 운명이다. 다시 말해 '나는 세계가 파국에 이를 것(미래)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야만 세계가 파국에 이르지 않을 수 있게 할 행위를 지금(미래의 과거) 할 수 있다'는 사유 매트릭스에 입각한 파국의 운명이다. 이런 방식으로 파국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운명을 변화시킬 자유로운 선택을 하는 것이라면 그 받아들임과 선택 및 그에 입각한 행위가 또 하나의 꿈, 꿈 속의 꿈이 아니라고 누가 어떻게 밝혀줄 수 있겠는가?

9. 이러한 도전을 이미 예상하고 있다는 듯이, 지젝은 '참된 행위가 의존하는 확실성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신념의 문제다'(298)라고 미리 말해 버린다. 맑스의 공산주의자되기는 주관적 관념론, 객관적 관념론, 기계적 유물론을 넘어서는 실천적 유물론으로의 전환을 수반했다. 그것은 포이에르바하 테제 1에서 제시된 바의 것이다.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그것이 잊혀져 가는 속도에 저항하기 위해 한 번 다시 인용해 보자.
이제까지의 모든 유물론(포이에르바하의 것을 포함하여)의 주된 결함은 대상, 현실(Wirklichkeit), 감성(Sinnlichkeit)이 단지 '객체 또는 관조(Anschauung)'의 형식 하에서만 파악되고, '감성적인 인간 활동, 즉 실천'으로서, 주체적으로 파악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활동적' 측면은 유물론과 대립되는 관념론―이것은 물론 현실적이고 감성적인 활동 그 자체는 알지 못한다―에 의해 추상적으로 전개되었다. 포이에르바하는―사유객체와는 현실적으로 구별되는―감성적 객체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활동 자체를 '대상적' 활동으로는 파악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의 본질』에서 오직 이론적인 태도만을 참된 인간적 태도로 보고, 반면에 실천은 단지 저 불결한 유대적 현상형태 속에서만 파악 하고 고정시켰다. 따라서 그는 ‘혁명적인’, ‘실천적·비판적인’ 활동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지젝에게서는 대상, 현실, 감성이 사라진다. 그것에 대한 관조도 사라진다. 감성적 객체도 사라지고 대상적 활동도 사라지며 혁명적인 실천적 비판적 활동도 사라진다. 유물론은 철처히 짓밟히며 참된 정치적 행위의 유일한 토대는 개개인의 신념으로 된다. 세계가 파국에 이를 것이라는 것도 신념이며 지금 세계를 파국에 이를 조건들을 변경시키 그것을 파국에서 구출하겠다는 것도 신념이다. 앞서 말한 바처럼 지젝에게서는 신념이 행위의 진리(확실성)를 보장하기 때문에, 참된 행위는 그에 관해 완벽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어떤 투명한 상황 속의 전략적 개입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참된 행위가 지식의 틈새를 메워야 한다. 그래서 그것은 네오콘의 테러와의 전쟁에서 사용되는 예방행동론(선제공격론)의 발상을 과감하게 복원할 것을 요구한다.(298) 나는 오래 전에 지젝의 『신체 없는 기관』에 나타난 문화정치학이 테러리즘에 접근하고 있다는 생각을 표현한 바 있는데1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는 그 경향을 순수한 반역사적 주의주의라는 이론으로 체계화하고 안정화하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10. 지젝의 주의주의는 지금까지 역사를 지배해온 주지주의적 경향들에 대한 침식, 즉 플라톤적 철인왕의 포기, 안다고 가정되는 주체로서의 지도자에 대한 거부, 지식과 주인의 격리 등을 넘어서 '창조적 실험을 위한 집단적[전혀 필연적인 말이 아니다-인용자] 의지'와 '자신의 법칙과 객관적 경향(앞의 분석에 따르면 이러한 것은 환상의 법칙이요 환상의 경향일 것이며 실제로는 의지가 선택하는 법칙이요 경향일 것이다)을 지닌 역사'를 대립시키는 것으로 나아간다. 그 결과 그는, 전자의 풍차를 향해 후자의 돈끼호테가 돌진하도록 요구하는 정치학을, 진정으로 정치적인 행위에 대한 이론으로 제시하게 된다.






2010/09/02 06:40 2010/09/02 06:40
국가를 상품commodity유통이 아니라 코몬common유통의 기관으로 만들기

출현하는 코뮤니즘, 도래하는 공동체를 사유하면서 마이클 하트(Politics of Common1)가 공통적인 것을 두 수준으로 나누고 그 두 수준의 공통적인 것의 상충과 소통을 고찰했음에 반해 닉 위데포드는 2006년에 쓴 Circulation of Commons2에서 공통적인 것을 세 수준으로 나누고 그것들의 복합과 혼성을 고찰한다.
Marx deemed the cellular form of capitalism to be the commodity, a good produced for exchange between private owners. His model of the circulation of capital traced the metamorphosis of the commodity into money, which commands the acquisition of further resources to be transformed into more commodities. The theorists of autonomist Marxism demonstrated how this circulation of capital is also a circulation of struggles, meeting resistances at every point. But although this concept proved important for understanding the multiplicity of contemporary anti-capital, it says very little about the kind of society towards which these struggles move, a point on which the autonomist tradition has mainly been mute. Today, new theorizations about multitude and biopolitics should to reconsider this silence. I suggest that the cellular form of communism is the common, a good produced to be shared in association. The circuit of the common traces how shared resources generate forms of social cooperation—associations-- that coordinate the conversion of further resources into expanded commons. On the basis of the circuit of capital, Marx identified different kinds of capital—mercantile, industrial and financial—unfolding at different historical moments yet together contributing to an overall societal subsumption. By analogy, we should recognise differing moments in the circulation of the common. These include terrestrial commons (the customary sharing of natural resources in traditional societies); planner commons (for example, command socialism and the liberal democratic welfare state); and networked commons, (the free associations open source software, peer-to-peer networks, grid computing and the numerous other socializations of technoscience). Capital today operates as a systemic unity of mercantile, industrial and financial moments, but the commanding point in its contemporary, neoliberal, phase is financial capital. A twenty-first century communism can, again by analogy, be envisioned as a complex unity of terrestrial, state and networked commons, but the strategic and enabling point in this ensemble is the networked commons. These must however, also be seen in their dependency on, and even potential contradiction, with the other commons sectors. The concept of a complex, composite communism based on the circulation between multiple but commons forms is opens possibilities for new combinations of convivial custom, planetary planning and autonomous association.(강조는 모두 Amelano의 것)
닉 위데포드가 말하는 terestrial commons는 마이클 하트가 말하는 ecological commons와, networked commons는 socio-economic commons와 상응한다. 차이는 planner commons이라는 개념이 마이클 하트에게는 없고 닉 위데포드에게서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세 가지 코몬 중에서 네트워크코몬이 전략적으로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본다는 점에서 전통적 사회주의 관점과는 다른 입장에 서 있다.)3 그는 그 예를 사회주의 국가나 복지국가에서 찾고 있다. 기존의 사회(민주)주의적 국가를 코몬의 형식으로(commons forms)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일까? 왜 그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그의 견해를 조금 더 들어보자.

Primitive communism (so called), based on a terrestrial commons that involves the sharing of natural resources, such as land, game, firewood and water, on the basis of associations shaped by custom. In so  far(far는 Amelano에 의한 삽입) as these associations take as their foundation the apparently given quality of natural resources, we can say they proceed from Commons to Association (C-A). In contrast, various forms of planner commons emerged as radical project for the public ownership and state management in the factories and urban conurbations of the industrial revolution. Insofar as these centered on the marshalling of new industrial capacities of production into forms of collectivity, they proceeded from Production to Commons (P-C). The main examples are the command economies of authoritarian socialism and the welfare state of liberal capitalism, bit there are also the important minoritarian traditions of the cooperative and self-management movements. Finally, a networked commons proceeds on the basis of social communicative capacities, from language on up, that enable Associative practices to occur. So the movement here is from A-C. Today we are seeing an explosion of new developments in this sub-circuit, including open source software, peer-to-peer networks, grid computing and other socializations of labor intrinsic to high technoscience, which we will discuss further in the next section.
여기서 우리는, 닉 위데포드가, 공적 소유와 국가관리가 새로운 산업능력을 집단성의 형식으로 정렬하는 한에서 그것은 생산에서 코몬으로의 이행을 촉진하는 기관으로 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공통도시』(갈무리, 2010)에서 내가 20세기의 역사를 사회(민주)주의의 역사로 파악하고 나아가 신자유주의 역시도 사회(민주)주의의 부정이라기보다 오히려 그것의 전 지구적 확산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낫다고 했을 때, 즉 국가와 제국이 수행하는 집단화의 효과를 중심으로 역사를 고찰했을 때의 관점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국가와 제국의 모순적 기능, 이중기능이라는 현상에 직면한다. 한편에서 그것은 민중과 다중을 착취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그것은 사람들을 더 크고 깊은 어소시에이션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렇지만 우리는 공통적인 것을 사적인 것으로뿐만 아니라 공적인 것으로부터도 구분해 오지 않았던가? 분명히 국가형태 속에서 정립되는 공적인 것은 공통적인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순수하게 사적인 것도 아니다. 공적인 것은 사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의 복합체요 긴장이다. 국가가 계급투쟁의 장이 되는 것은 이 이중성과 복합성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국가를 사유화하려는 계급들의 투쟁이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를 공통화하려는 계급들의 투쟁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가를 직접적으로 코몬의 형식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그것이 코몬의 형식으로 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직시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국가는 코몬은 아니다. 하지만 잠재적으로 그것은 코몬이다.

위데포드는 산업자본과 계획자 코몬을 상인자본의 지구생물적 코몬에 대한 공세에 대한 대응으로 이해하고 그것이 소통산업과 연결된 금융자본의 등장으로 쇠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Like the different types of capital, these different forms of commons have blossomed or blazed at distinct historical epochs. Indeed, the varying forms of capital and commons should be seen as each summoning each other, or provoking one another into being. Thus terrestrial commons were attacked by the forces of mercantile capital, which in doing so lay the basis for the industrial capitalism to which the planner commons was a response. The temporary success of these largely state based commons was then undermined by the fluid mobility of finance capital, whose appearance is however, inextricably tied up with the development of a means of communication—the Internet—which provided the basis for the mergence of networked commons. The concept of the cycle of struggles can be re-written as the story of this antagonistic spiral, between the circulation of capital and the circulation of the commons.
나는 상인자본이 생태코몬에 대한 착취형식인과 것과 마찬가지로 산업자본과 계획자국가도 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코몬에 대한 착취형식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이 측면에서 보면 계획자 국가는 차티스트 운동이나 노동조합 운동, 혹은 정당 조직과 같은 아래로부터의 사회적 코몬들에 대한 흡수장치로서 등장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요컨대 닉 위데포드는 계획자 국가를 그 직접적 형식에서 코몬형식으로 간주하는 쪽으로 기울어진 서술들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투쟁의 순환 개념이 자본유통과 코몬유통의 적대적 나선의 서사로 다시 씌어질 수 있다"는 주장은 의미심장한 것이며 오늘날 자율주의 이론의 중요한 진전을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2010년에 닉 위데포드는 같은 제목의 글4에서 자신의 2006년 주장에 일정한 비판적 수정을 가한다. 그 수정에서 눈에 띄는 것은 국가에 대한 관점의 변화이다. 그 변화의 지점들을 살펴보자.

There is one other factor which Marx did not explicitly include in his map of the  circulation of capital, but which I think today we must include. At the centre of the circuit of capital, like hub connected by spokes to a wheel, is the state apparatus. It protects private property and defends it with coercive force; provides the judicial framework for the sale of labour power, in communication the intellectual property laws, and, has we have seen recently, when the  circuit fails steps in promptly to the rescue . . .

여기서 닉 위데포드는 국가기구가 강제력으로 사유재산을 지키며, 노동력 판매를 위한 사법적 틀을 제공하고 소통에 지적재산권을 제공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강조는 2006년 글에는 발견되지 않았던 요소이다. 그렇다고 그가 현대의 코몬운동에서 국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라틴아메리카 좌파정치에서 이 문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 사례를 발견한다.

Where one can see elements of this type of project in action is in some of the ‘solidarity economics’ of the Latin American left, in Brazil but also in Venezuela, Ecuador, El Salvador. Here we see models of social change that works on the basis of a ‘quilt’ or ‘patchwork’ of decommodified activity includes interaction between central state planning and a decentralized network of worker cooperatives, self-management projects, nuclei of development, and so on. In the work of solidarity economists such as Euclides Mance, the units of these networks are conceived not just as individually following principles of social and environmental justice, but as providing inputs for each other, to create an autopoeitic, self-boosting system whose logic is similar to that outlined here. What is being increasingly thrown into the mix in Venezuela, Brazil is now publically sponsored use of open source systems—networked commons. So the recipes are being tested.

집권적 국가계획이 노동자 협동체의 탈집권적 네트워크와 상호작용하면서 탈상품화 활동의 퀼트나 쪽모이의 기초를 제공하는 사회변화의 모델을 그는 브라질, 베네수엘라, 에쿠아도르, 엘 살바도르에서 찾는다. 이것은 바로 안또니오 네그리의 『글로발』(GlobAL)(갈무리, 근간예정)의 주제(그것은 정부government와 운동movement의 협정론으로 요약할 수 있다)이며 하트와 네그리가 『다중』에서 제시했던 '마그나카르타적 계기'(군주에 대항하는 다중과 귀족의 협정론)의 실례이다. 2010년에 위데포드는 다시 한 번 국가의 중요한 위치를 강조한다.

It is worth emphasizing (if only to excite some controversy)  that in this map of circulating commons the state apparatus has a place, an important place. I mentioned at the beginning that one of the important things about commons for the movement of movements was that it provided a non-statist model of social change, thereby freed it from the historical shadow of authoritarianism. But this does not mean that we dodge the issue of the state.

위데포드는 운동들의 운동을 위한 코몬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변화의 비국가적 모델을 제공하는 것, 그리하여 권위주의의 역사적 그림자로부터 그것을 해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점에서 2006년에서의 일정한 변화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국가 문제를 회피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그는 덧붙인다. 이제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것, 즉 비국가적 모델를 추구하면서 국가를 회피하지는 않는 길이 무엇인가로 된다. 위데포드의 제안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사빠띠스따와는 다른 라틴아메리카 사례들을 국가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실험실로 간주하면서 그것이 국가와 코몬제도들의 상호작용을 통한 협력체들의 파종으로 파악한다. 국가가 상품유통의 기계가 아니라 코몬유통의 기계로 기능하도록 만드는 것이 운동의 한 활동영역일 수 있다는 것이 그가 도달하는 지점이다.

Zizek is correct when he says the true task is neither to take over the state, nor to smash the state, but to “make the state itself work in a non-statal mode”—as a machine for incubating and growing commons. For that reason I have recently started, provocatively, to talk not so much of commonism or commonwealth but about biocommunism. Commons projects are projects of planning; regulation of carbon emissions (or other ecological pollutants); the distribution of a basic income (or of public health or education) programs, the establishment of networked infrastructures are extremely difficult of any large scale without the exercise of governmental power. To speak of the circulation of the common is also to think both how large scale molar governmental planning creates the conditions for autonomous projects—by funding coops or adopting open source and peer to peer standards-- and, in turn, how these autonomous molecular units in turn guaranteed innovation, variegated input and dissent against the dangers of bureaucratization, rigidity, and sectional interest.

여기서 나는, 국가가 비국가적 양식으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 즉 국가가 상품유통을 보장하는 기관이 아니라 코몬 유통의 기관으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면서, 그것을 가능케 할 조건이 무엇인지를 숙고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다. 국가형태는 사회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집중기관이다. 그것은 결코 자동적으로 코몬 유통의 기관으로 기능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래로부터 네트워크 코몬의 전략적 중심성에 대한 강조는 아무리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다. 네트워크 코몬의 전략적 중심성이 약화될 경우, 국가는 네트워크 코몬의 힘을 흡혈하는 기관으로 순식간에 돌변할 것이다. 그리고 아래로부터 네트워크 코몬의 양육과 확산을 통해서만 국가가 비국가적으로 기능하도록 하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국가형태의 해소, 비국가적=공통적 사회변화의 길이 더욱 탄탄해질 것이다.
  1. http://www.zcommunications.org/politics-of-the-common-by-michael-hardt. 이 글의 요약은 [Back]
  2. http://www.fims.uwo.ca/people/faculty/dyerwitheford/Commons2006.pdf [Back]
  3. "while a twenty-first century communism should be envisioned as a complex unity of terrestrial, state and networked commons, the strategic and enabling point in this ensemble is the networked commons of immaterial labor." [Back]
  4. http://www.globalproject.info/it/in_movimento/Nick-Dyer-Witheford-the-Circulation-of-the-Common/4797 [Back]
2010/08/28 13:24 2010/08/28 13:24
4대강 사업에 대한 10가지 테제

1.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주요한 정치적 쟁점은 과학논쟁과 맞물리고 있다. 광우병, 천안함, 4대강 모두가 전문적인 과학논쟁을 수반하면서 정치쟁점화되었다. 이는 한편에서는 현대 정치가 지략화하고 있는 것의 효과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다중들의 지성화의 효과이다. 계급투쟁은 과거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지성투쟁의 성격을 띤다.

2. 4대강 사업을 둘러싼 논쟁이 비생산적인 것으로 되고 줄줄이 꼬이고 있는 것은 이명박 정부가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는 4대강 사업이 1)홍수를 막고 2)물부족을 해소하며 3)수질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거짓말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업의 핵심인 4대강 내 16개의 보건설과 대규모 준설은 이 세 가지 목표를 달성할 수 없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홍수빈발지역, 물부족지역은 4대강 사업 대상 외부에 더 많이 위치해 있으며 보건설과 준설이 수질을 개선하기보다 악화시킬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3. 4대강 사업을 둘러싼 갈등은 광우병, 천안함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명박 정부의 일방주의 때문에 심화되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업에 반대하거나 아직 유보적인 상황에서 이명박 정부는 보건설과 준설에 박차를 가했고 시민사회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일방주의는 겉으로 보면 그 주체의 힘의 표현으로 보인다. 밀어부칠 힘이 있기 때문에 일방적일 수 있다는 느낌이 그것이다. 하지만 일방주의는 그 주체의 무력과 위기의 표현이라는 것, 통제불가능성이 표현되는 방식이 일방주의라는 것은 부시 정부와 그것의 금융위기를 통한 붕괴를 통해 입증되었다.

4. 그렇다면 왜 이명박 정부는 자신의 명운을 걸고 4대강 사업을 추진하는 것일까? 정부가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추론의 영역에 속한다. 많은 사람들이 4대강은 한반도 대운하의 전단계라는 의심을 버리지 않고 있고 실제로 현재의 사업방식은 그것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한반도 대운하란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경부운하'를 비롯 영산강과 새만금을 잇는 '호남운하' 및 '새만금 운하', 금강을 중심으로 지천을 잇는 '충청운하' 등 남한의 12개 노선 2,100여km, 그리고 북한의 평양과 개성을 잇는 '평개운하', 평양과 원산을 잇는 '평원운하' 등 5개 노선 1,000여km를 통칭하는 것이었다. 인수위 시절에 이명박은 한반도 대운하 사업의 경제가치를 강조했다. 1)예상되는 물류 문제 해결 2)고용창출 3)관광산업 발전 4)전력생산 5)골재수급 등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전적으로 개발논리에 속한다.

5. 이명박 정부가 이 개발논리를 전면에 내세우지 못하게 된 것은 2008년 촛불집회에서 등장한 생명논리의 도전과 그로 인한 상처 때문이다. 당시 이명박 정부가 겪은 상처로 인해, '한반도 대운하' 구상은 4대강 '살리기'라는 생명논리로 재명명되었다. 하지만 그것의 개발주의적 몸통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생명논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이 사업을 4대강 '죽이기'로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6. 경제적 가치생산이라는 개발논리가 홍수, 물부족해소, 수질개선이라는 생명논리의 탈을 쓰고서야 겨우 행진할 수 있도록 억눌리게 만든 것은 촛불봉기다. 국민이 원치 않는다면 대운하를 하지 않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는 끊임없이 두더지 정치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4대강 사업의 앞날이 밝지 않은 것은 이명박 정부의 입장이 이처럼 난처하고 표리부동하며 공명정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7. 홍수는 막아야 하며 물부족은 해소되어야 하고 수질은 개선되어야 한다. 이것은 사람들의 절박한 요구이다. 이것은 반대입장에서 말하는 환경과 생태의 보존과 상충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논리적으로는 상충하지 않는 것이 상충으로 나타나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논리와 실제 사이의 엄청난 괴리이다. 현정부가 말로는 생명논리를 펼치면서 행동으로는 경제적 개발논리에 따라 4대강 사업에 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따로 행동따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현행의 4대강 사업에 반대하지 않을 수 없다. 4대강 사업은 즉각 중단되어야 하며 사회적 토론에 회부되어야 한다.

8. 그러나 반대논리의 일부에도 맹점이 있다. 그것은 인간과 생태를, 인공과 자연을 대립시킬 때에 나타난다. 인간 일반을 잠재적 환경파괴자로 몰고 갈 때이다. 이것은 개발에 대한 낭만주의적 반대를  강화시킨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지 그 외부에 있지 않다. 지나친 생태론은  극단적 개발논리와 똑 같이 인간과 자연, 사람과 강의 대립관계를 받아들인다. 이 대립관계에서, 생태론은 자연/강을, 개발론은 인간을,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차이를 보일 뿐이다.

9. 중요한 것은 인간과 자연의 공통성을 이해하고 공통되기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이 풍요로울 때에 더 풍요로울 수 있는 존재이고 자연 역시 인간의 풍요 위에서 더 풍요로울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공통되기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놀랍게도 인간들 사이의 적대이다. 오늘날 인간 사회는 소수의 인간이 다수의 인간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관계를 극단화하고 있다. 인간의 생산과 재생산에서의 공통관계는 전 지구적 수준에서 더욱 확장되고 또 심화되고 있는데 그 성과를 전유하고 소유하며 그 관계를 통제하는 차원에서는 사적인 적대관계가 전 지구적 수준에서 더욱 확장되고 심화되고 있다. 이 적대관계로 인해 인간과 자연 사이의 적대도 심화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과 자연 사이의 적대 문제의 해결과 생태적 공통관계의 확립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적대관계의 해결 없이는 달성할 수 없는 과제로 되고 있다.

10. 이것은 결코 지속가능한 발전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다.1 지속가능한 발전의 개념은 사회적 적대에 기초한 지금까지의 경제발전을 원형으로 삼고 그 적대의 조절을 꾀하려 한다. 이것은 나쁜 효과를 완화시킬 수 있을지 모르나 실제로는 문제해결을 유예하는 것이다.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공통관계를 확립함으로써 인간과 자연의 적대를 해소하는 공통되기의 운동, 즉 생태적 공통체와 사회적 공통체를 관리하는 정치적 공통되기로서의 코뮤니즘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과제는 현재의 대의주의적 권력체제에 도전하고 그것을 해체하는 것에서 시작되지 않을 수 없다.
  1. 박창근은 「4대강 사업 어디로 가는가」(『창작과 비평』 2010, 가을)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Back]
2010/08/27 07:51 2010/08/27 07:51
4대강 문제가 개발인가 보존인가라는 문제로 한정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공통적인 것을 확장하고 또 관리하는 유효한 방법일 수 있을까? 이 문제를 사유함에 있어 도움이 될 수 있는 자료로 마이클 하트의 최근글, 「공통적인 것의 정치학」(Politics of the Common, http://www.zcommunications.org/politics-of-the-common-by-michael-hardt )의 대강의 요지를 아래에 정리해 본다. -아멜라노


 「공통적인 것의 정치학」(마이클 하트)와 생태적 사회적 투쟁의 연대의 문제

공통적인 것에는 두 개의 영역이 있다. 하나는 생태적인 공통적인 것이며 또 하나는 사회경제적인 공통적인 것이다. 이것을 자연적인 공통적인 것과 인공적인 공통적인 것으로 나눌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삶정치적 관점에서 이 두 영역의 경계는 흐려진다. 이 두 영역은 동일한 논리에 따라 작동한다. 가령 소유관계에 의해 이 두 영역은 모두 도전받고 악화된다. 그리고 두 영역은 전통적인 경제적 가치를 좌초시키며 삶의 가치를 가치평가의 유일하게 정당한 저울접시로 만든다.

그렇지만 이 두 공통적인 것이 상반된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두 개의 본질적 측면이 있다. 우선 생태적 담론은 공통적인 것을 보존에 초점을 맞추 취급하고, 지구 및 생물형식들의 제한성에 초점을 맞춤에 반해 공통적인 것의 사회적 인공적 형식들에 대한 토론은 일반적으로 창조에, 공통적인 것의 생산의 무한하게  열린 성격에 초점을 맞춘다. 둘째, 사회적 담론이 인가의 이해관계를 중심적으로 취급함에 반해 호나경담론은 인간 혹은 동물 세계보다 훨씬 넓은 이해관계의 영역을 만들어낸다. 내가 괌심을 갖는 것은 공통적인 것의 이 두 영역들, 질들, 그리고 그들의 잠재적 관계에 대한 대화의 필요성이다.

2009년 12월 코펜하겐에서 열린 유엔기후회의를 둘러싼 행동의 준비에 포함되었던 조직적 논쟁을 생각해보면, 반자본주의운동 및 다른 사회운동과 생태운동의 합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 운동의 성공은 각각의 운동들의 일차적 목표들인 공통적인 것의 각 영역을 서로 이애하고 협상하는 것에 달려 있었다.

출발점은 공통적인 것의 중심성이다. 생태운동에서 이것은 다른 영역보다 잘 인지되어 있다. 사회경제적 사유에서 공통적인 것의 중심성은 널리 인지되지 않고 있다. 산업생산에서 삶정치적 생산으로의 이행기인 오늘 이 문제는 중요하다. 1) 산업생산의 헤게모니는 산업사회를 창출했다. 2)더 이상 산업생산은 헤게모니적이지 않다. 3)헤게모니적인 것은 비물질적 생산의 인지적 정서적 활동과 그 구조이다. 현대의 생산형식은 사회관계와 삶형식을 창조한다는 의미에서 삶정치적이다. 삶정치적 생산과 생태적 사유 사이에 근접성이 있다. 양자는 모두 삶형식의 생산/재생산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 그것이다. 생태적 사유가 인간과 동물의 한계 너머로 삶형식의 개념을 확장시킨다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삶정치적 생산이 헤게모니적인 것으로 되어가는 과정을 소유형식에서의 위계변화의 관점에서 접근해서 이해해 볼 수도 있다. 산업생산의 헤게모니 이전에는 부동산 소유가 지배적 위치를 점했다. 산업생산이 지배적으로 되면서 상품소유가 지배적으로 되었다. 오늘날은 비물질적 소유(특허권, 저작권 등)가 물질적 소유보다 지배적 위치를 점한다. 부동상품인가 이동상품인가가 문제였던 때에서 배타성과 복제가능성의 문제로 초점이 옮아가고 있는 것이다. 비물질상품의 유용성은 나눠진다고 해서 소진되지 않고 오히려 나눠짐으로써(즉 공통적인 것으로 됨으로써) 더 유용하게 된다.

오늘날 자본주의 경제에서 공통적인 것이 중심적인 문제로 되고 있다. 지배적 생산형식은 공통적으로 되는 경향이 있는 비물질적 삶정치적 재화들이다. 미래의 경제적 발전에서 그러한 재화의 생산성은 그것들이 공통적인 것으로 되는 데 있다.

생태적 영역과 사회적 영역에서 공통적인 것이 공유하는 첫 번째 논리적 특징은 그들이 소유관계에 의해 도전되고 퇴락한다는 것이다. 사회경제적 영역에서 소유의 비물질적 형식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관리하는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미래적 생산성을 감소시킨다.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생산성을 위해 공통적일 필요와 자본주의적 축적을 위해 사적일 필요 사이에 강력한 모순이 발생한다. 이것은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축적의 사적 성격 사이의 모순의 확장판이다.['사회적 생산에 사회적 통제양식을!'이 맑스 시대의 요구였다면,  '공통적 생산에 공통적 통제를!'이 우리 시대의 요구이다.-아멜라노] 생태적 영역에서도 공통적인 것은 소유관계에 의해 도전되고 또 퇴락된다. 환경의 유리한 혹은 해로운 결과는 항상 국경의 경계도, 소유의 한계도 넘어선다. 신자유주의는 교통, 서비스, 산업의 형태로 된 공적인 것의 사유화를 추구한 것처럼 우간다의 석유, 시에라레온의 다이아몬드, 볼리비아의 리튬, 아이슬란드 주민의 유전정보 등과 같은 자연적 공통적인 것을 사유화하려 했다. 생산의 공통적 성격은 점점 자본주의적 축적의 사적 성격과 충돌한다. 그것은 지난 수십년간의 공통적인 것의 사유화에 대항하는 수많은 투쟁들(2000년 볼리비아 코차밤바에서 물 사유화에 대한 투쟁, 2003년 엘 알토에서 가스 사유화에 대한 투쟁) 속에서 표현되었다.

두 영역의 공통적인 것이 공유하는 두 번째 특징은 그것들이 가치의 지배적 척도를 파괴하고 초과한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의 외부효과, 무형자산 등의 개념은 이미 사회경제적 공통적인 것을 가리킨다. 금융위기는 이 삶정치적 생산을 자본주의적 척도로는 장악할 수 없다는 사실의 표현이다. 삶은 척도를 초과하며 오늘날의 경제적 재화나 활동의 가치는 전통적 척도를 초과하며 벗어난다. 생태적 영역에서도 공통적인 것의 가치는 측정불가능하다. 파괴되는 삶형식들의 가치는 측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뱅글라데쉬의 침수, 에디오피아의 가뭄, 이누이트족의 생활형식의 파괴가 얼마의 달러로 계산될 수 있는가?

교토의정서나 Waxman-Markey 협정1에서의 탄소세 계획은 측정불가능한 것을 측정가능한 것으로 환원한다. 이때 이것이 이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겠지만 측정불가능한 상품에 일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재앙에 이를 수 있다. 그 재앙은 금융위기로 이미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소유논리와 시장계획은 빈곤과 배제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전 지구적 사회적 위계를 악화시킬 수 있다. 삶의 형식들은 측정불가능하며 삶/생명 가치에 기초한 근본적으로 다른 저울눈(이것은 우리가 아직 발명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다)에 따른다.

공통적인 것의 두 개의 상이한 형식들이 모두 소유관계에 도전할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적 합리성의 전통적 척도에도 도전한다는 점은 자율(자치)와 공통적인 것의 민주적 관리를 향한 정치적 행동주의의 형식들을 서로 연결시킬 기초를 제공한다. 공통적인 것의 두 형식은 물론 상반된 방향으로 작동하곤 한다. 생태적 사유는 지구의 유한성과 그 생명체제의 유한성을 강조한다. 지구, 특히 그것의 야생공간은 산업발전과 다른 인간활동의 손상으로부터 방어되어야 한다. 반면 경제사회적 영역의 공통적인 것의 정치는 일반적으로 생산의 무한한 성격을 강조한다. 삶형식, 아이디어, 정서들, 등은 어떤 고정된 한계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보존과 한계에 대한 요구가 무한한 창조적 잠재력에 대한 찬양과 상충하는 것이다.

생태적 사유가 발전에 반대하고 사회경제적 공통적인 것의 사유는 발전지향적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다. 두 경우에 발전이란 근본적으로 상이하기 때문이다. 공통적인 것의 사회적 생산에 포함된 발전은 산업발전과는 아주 다르다. 삶정치적 맥락에서 생산과 재생산 사이의 전통적 구분은 부서진다. 한쪽에서 보존에 대한 요구가 다른 편에서의 창조에 대한 요구와 대립하기는커녕 상보적이다. 두 관점 모두가 근본적으로는 삶의 형식의 생산과 재생산을 지시한다.

공통적인 것을 위한 두 영역의 투쟁에서 두 번째의 갈등적 지점은 인간의 이해관계를 어느 정도로 준거틀로 받아들이느냐에 있다. 사회경제적 공통적인 것의 투쟁에서 인간의 문제는 중심에 놓여 있고 가장 중요한 과제는 위계의 극복, 계급과 소유, 젠더와 섹슈얼리티, 인종과 민족성의 제거에 놓여 있다. 생태적 투쟁은 자신들의 프레임을 인간 너머로 확장하곤 한다. 생태적 담론에서 인간의 삶은 다른 생명형식 및 생태계와의 상호작용 및 그것들에 대한 돌봄 속에서 조망된다. 일부의 심층생태적 담론에서는 비인간생명에게 동등한 관심이 두어지거나 인간보다 우선적인 관심이 두어진다. 이 차이는 중요한 차이지만 극복불가능하거나 파괴적인 차이는 아니다. 생태적 투쟁은 사회적 위계의 성격과 그것과 싸울 수단에 좀더 큰 관심을 기울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사회적 투쟁은 지구의 제한성과 다른 생명형식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공통적인 것을 위해 싸우고 그것을 관리할 대안수단들을 발명하기 위해 싸우는 것은 오늘날 사회를 재상상하는 기획에 근본적인 것이다. 투쟁들 사이의 분기는 절합되고 협상되어야 할 공통적인 것의 상이한 면모들을 향하고 있다. 그런데 이 차이는 건강한 것이며 그것들과 연루/교전하는 것이 우리를 전진시킬 수 있다. 환경운동과 반자본주의 운동 및 다른 사회운동을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는 모든 사람들이 실천적 이론적으로 노력을 함께 경주해야 할 화급한 문제이다.






2010/08/25 11:47 2010/08/25 11:47
『자본론』3권 5편 이자와 기업가 이득 세미나강좌 후기(4)

<제29장 은행자본의 구성>
은행업자의 경제학에서는 화폐자본이 이자낳는 자본과 혼동되고 있지만 사실상 화폐자본은 상품자본과 생산자본과 구별되는 자본의 통과형태에 불과하다.

은행자본은 1)금이나 은행권 형태의 현금 2)유가증권(환어음과 국채, 재무성증권, 주식 등 이자낳는 증권)으로 구성된다. 이것은 은행업자의 투하자본일 수도 있고 예금일 수도 있다.568

국채는 의제자본으로서 자기의 독특한 운동을 갖는다. 이자낳는 자본은 불합리한 형태의 모체이며 은행업자의 머리 속에서 채무가 상품으로 나타나듯이, (실제로는 사라지고 없는) 국채라는 자본에서는 마이너스의 숫자가 자본으로 나타난다.570 의제자본의 자본화는 규칙적인 수입을 평균이자율로 대출된 자본이 낳을 수입으로 간주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여기세서 자본의 현실적인 가치증식과정과의 관련은 최후의 흔적까지 사라지고 자본이 자기증식한다는 관념이 공고해진다.571

주식은 투하된 자본에 의해 실현될 잉여가치에 대한 소유권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소유권의 가치(즉 시장가격)가 독립적으로 운동하기 때문에 이 소유권이 자본이나 청구권 이외에 자본을 구성하고 있다는 환상이 강화된다.572

 증권의 시장가치가 미리 계산되는 예상수입에 의해 결정되는 점에서는 투기적이다. 증권의 가격은 수입의 자본화(수입을 현행의 이자율로 나눈 환상적 자본)에 불과하며 이자율과 반비례하여 등락한다. 모든 증권들은 미래 생산에 대한 누적된 청구권(법적 권리)를 대표할 뿐이다. 화폐자본의 축적은 이 청구권의 축적을 의미한다.574

채권(환어음), 국채(지출해 버린 자본을 대표), 주식(미래 수입에 대한 청구권)으로 구성되는 은행자본은 그것이 대표하는 현실적인 자본의 가치와는 다르게 결정되기 때문에 의제적(가공적)이며 이 자본의 대부분은 자기자본이 아니라 국민의 자본이다.575

신용제도의 발달에 따라 동일한 자본, 동일한 청구권이 상이한 형태로 여러사람들의 수중에서 나타나는 상이한 방식 때문에 두배, 세배로 되는 것처럼 보인다. (국민이 은행업자에게 행한 대부인578) 예금은 준비금 외에는 은행업자의 채무에 불과하며 결코 예탁현금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예금은 은행업자에 의해 대출된 뒤에 은행업자를 위한 자본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576

동일한 화폐조각이 유통속도에 따라 다수의 상이한 구매를 수행할 수 있으므로 동일한 화폐조각은 각종의 상이한 대부에도 사용될 수 있다. 동일한 화폐가 실제로 몇 개의 자본을 대표하는가는 그 화폐가 각종의 앙이한 상품자본의 가치형태로서 몇 번이나 기능하는가에 달려 있다.578

<제30장 화폐자본과 실물자본.1>

이 장에서 맑스가 제기하는 문제는 1)화폐자본의 축적이 어느 정도로 진정한 자본축적의 지표인가? 2)화폐의 부족이 어느 정조로 실물자본의 부족의 표현인가? 이다.

문제 1)에 대한 연구:
*국채형태의 자본축적은 채무의 축적조차 자본의 축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 즉 신용제도에 의한 왜곡의 최고형태를 보여준다.584 *주식은 실물자본에 대한 처분권이 아니라 그 자본이 끌어낼 잉여가치의 일부에 대한 법적 청구권일 뿐이다. 그것은 실물자본의 가치운동과는 무관하게 등락한다는 점에서 실물자본의 운동의 지표일 수 없다. 하지만 주식의 축적이 철도, 광산, 기선 등의 축적을 표현하는 한 그것은 현실적 재생산과정의 확대를 표현할 수 있다.585 *화폐자본의 축적은 은행업자의 수중에 부가 축적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신용제도의 거대한 팽창과 신용전체가 은행업자들에 의해서 그들의 사적 자본으로 이용되기 때문이다. 이 계급의 부의 축적은 현실적 축적과는 매우 상이하게 진행될 수 있지만, 그들은 현실적 축적의 상당부분을 집어삼킨다. *국채, 주식, 유가증권은 대부자본의 투자대상이지만 대부자본은 아니다. 맑스가 문제로 삼는 것은 대부자본의 축적, 특히 (가옥, 기계, 기타 고정자본의 대부나 산업가, 상인 사이의 선대가 아니라) 대부화폐자본의 축적이다.586

출발점은 환어음이 대표하는 상업신용이다. 상업신용에서 상호간 채권의 결제는 자본의 환류[C--M]에 달려 있다. 그리고 신용은 상호간에 주고받으므로 각자의 지불능력은 동시에 타인의 지불능력에 달려 있다. 상업신용은 현금지불의 필요성을 제거하지 않는다. 상업신용의 한계는 1)준비자본 2)자본의 환류이다.588

노동생산력과 대규모 생산이 발달함에 따라 1)시장은 확대되고 생산지로부터 멀어지며 2)신용이 장기화하지 않을 수 없고 3)투기적 요소가 거래를 더욱 지배하게 된다 신용은 필수적이며 생산과정의 발달은 신용을 확대하고 신용은 다시 산업활동과 상업활동을 확대한다.589 상업신용에서는 대부자본과 산업자본이 동일하다. 왜냐하면 대부자본은 상품자본이기 때문이다. 상업신용이 많다는 것은 유휴자본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재생산과정에서 자본이 크게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591 물론 환류의 지체나 시장의 포화, 가격의 하락에 의해 정체가 나타나면 산업자본의 과잉이 드러나고 상업신용은 수축된다. 위기에 대한 맑스의 서술: 언제나 모든 현실적 공황의 궁긍적 원인은 더 많은 생산의 충동과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제한되어 있는 대중의 소비능력 사이의 모순이다.593

낮은 이자율이 공황 후의 호전 및 신뢰회복과 함께 나타나는 회복기와 이자율이 평균적 수준에 도달하는 번영기에만 풍부한 대부자본과 산업자본의 대팽창이 공존한다. 불황기에는 낮은 이자율과 산업자본의 수축이 함께 나타나며 산업순환의 최종국면에서는 높은 이자율과 산업자본의 과잉이 함게 나타난다.599

공황기에는 지불수단의 부족이 나타난다. 그래서 첫눈에는 모든 공황은 신용-화폐공황인 것처럼 보인다. 공황에서는 어음을 화폐로 전환시키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공황에서는 모든 것이 왜곡되어 나타난다. 생산과정은 보이지 않고 지금, 금속주화, 은행권, 어음, 유가증권만이 보일 뿐이기 때문이다.

의제적인 화폐자본은 공황중에 크게 감축되며 이리하여 그것의 소유자가 그것을 담보로 시장에서 화폐를 차입하는 힘도 크게 감축된다. 증권들의 화폐가치가 하락하는 것은 그 증권들이 대표하는 실물자본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지만 그 소유자들의 지불능력에는 큰 영향을 미친다.604

<31장 화폐자본과 실물자본: 2>
문제 2)에 대한 연구:
화폐가 대부자본으로 전환되는 경우는 두 가지, 즉 1)화폐가 단순히 대부자본으로 전환되는 것 2)자본 또는 수입이 대부자본으로 전환되는 화폐로 전환되는 것인데, 2)의 경우만이 산업자본의 진정한 축적과 관련을 갖는다.605

<32장 화폐자본과 실물자본: 3>
대부자본의 축적은 화폐가 대부가능화폐로 침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은 실물자본으로의 전환과는 매우 상이하며 진정한 축적과는 상이한 계기들을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은 진정한 축적의 결과일 수도 있고 정체의 결과일 수도 있다. 화폐자본의 과잉과 더불어 생산과정을 자본주의적 한계를 넘어 확대시키는 필연성(과잉거래, 과잉생산, 과잉신용)이 전개될 수 밖에 없고 이것은 언제나 반작용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622

자본은 개인 자신의 노동과 저축의 산물이라는 최후의 환상이 깨어진다. 이윤이 타인노동의 취득일 뿐만 아니라 타인노동을 운동시켜 착취하는 자본도 타인의 재산이라는 점이다. 이 타인의 재산을 화폐자본가가 산업자본가의 처분에 맡기고 그 대신 전자가 후자를 수탈한다.623

대부자본은 대부분 가공적인 것으로 가치청구권일 뿐이다. 자본의 순환에서 기능하는 화폐자본은 생산자본의 요소들과 교환되거나 소득의 실현에서는 유통수단으로 지출되며 대부자본으로 전환될 수 없다. 화폐가 대부자본으로 전환되고 동일한 화폐가 반복해서 대부자본을 대표하는 한, 그 화폐는 하나의 지점에서만 금속화폐로 존재하고 다른 모든 지점들에서는 화폐청구권의 형태로 존재한다. 이러한 청구권의 축적은 진정한 축적(상품자본 등의 가치가 화폐로 전환된 것)으로부터 발생하지만, 이 청구권 또는 채권의 축적은 자신의 원천인 진정한 축적과 상이하고 화폐의 대부에 의해 매개되는 장래의 축적(새로운 생산과정)과도 상이하다.624

물질적 부의 증대에 따라 화폐자본가 계급이 성장한다. 한편에서는 은퇴한 자본가들(금리생활자들)의 수와 부가 증대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신용제도가 더욱 발달하여 은행업자 화폐대부자 금융업자 등의 수가 증가한다. 가용화폐자본의 증대와 함께 이자낳는 증권(예: 국채, 주식)의 양도 증가한다. 그러나 동시에 가용화폐자본에 대한 수요도 증가한다. 왜냐하면 이자낳는 증권에 투기하는 증권중개인들이 화폐시장에서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626

화폐핍박기에 대부자본에 대한 수요는 지불수단에 대한 수요인데, 이것은 실물자본의 화폐로의 전환에 대한 요구일 수도 있고 화폐자본에 대한 수요일 수도 있다.633

맑스는 태환정지의 의미에 대해서도 고려하고 있다: 화폐가 가치의 자립형태로서 상품과 대립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토대이다. 특정상품이 일반적 상품으로 되어 다른 상품들을 측정함으로써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때문이다. 신용조작이나 신용화폐에 의해 화폐를 대규모로 대제하고 있는 발달한 자본주의국에서 이 토대는 이렇게 드러난다. 1)신용이 수축하거나 고갈되는 핍박기에는 화폐가 갑자기 유일한 지불수단 및 가치의 진정한 존재형태로서 모든 상품과 절대적으로 대립한다. 상품의 일반적인 교환가치 감소가 일어나며 상품을 화폐로 전환시키는 것이 곤란해지거나 불가능해진다. 2)신용화폐가 화폐일 수 있는 것은 명목가치액만큼 진정한 화폐를 대표하는 한에서이다. 금유출과 더불어 신용화폐가 화폐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이 의문시된다. 이 때문에 태환조건을 확보하기 위하여 이자율의 인상 등 강제조치가 취해진다. 이것은 은행입법에 의해 다소 극단까지 추진될 수 있다. 이것의 바탕은 생산양식의 토대에 의해 제공된다. 신용화폐의 평가절하는 모든 기존의 관계를 동요시킬 것이다. 신용화폐가 화폐적 속성을 완전히 상실한다면 더욱 큰 문제일 것이다.[그런데 오늘날 바로 맑스가 가정한 이 문제가 일상적 현실로 되어 있다-아멜라노] 그리하여 상품들의 가치는 이 가치의 환상적 자립적 존재형태인 화폐를 보호하기 위해 희생된다. 상품의 화폐가치는 화폐가 보증되고 있을 때에만 보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몇천만원어치의 상품들이 몇백만원어치의 화폐를 위해 희생된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불가피하며 그것의 매력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전의 생산양식에서는 이러한 것은 발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생산양식들이 운동하는 좁은 토대 위에서는 신용이나 신용화폐가 발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의 사회적 성질이 상품의 화폐적 존재로서 그리하여 현실적 생산밖에 있는 하나의 물건으로서 나타나는 한, 화폐공황--진정한 공황과는 무관하거나 진정한 공황을 격화시키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은행에 대한 공신력이 동요되지 않는 동안[이제 그것은 국가에 대한, 심지어 제국에 대한 공신력의 문제로 되었다-아멜라노]은 이러한 경우에 자기의 신용화폐를 증가시킴으로써 화폐공황을 완화시킬 수 있고 신용화폐를 회수함으로써 화폐공황을 격화시킬 수 있다[이것은 이제 국가/제국의 정책으로 나타난다-아멜라노]. 만약 국내의 생산이 조직화되어 있다면 금속은 국제무역에 일시적 불균형이 발생할 때 그것의 결제를 위해서 필요할 뿐이다. 국내에서는 금속화폐가 필요 없다는 것은 국립은행들의 태환정지(극단적인 경우에 긴급대책으로 채택되긴 하지만)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1971년 이후에는 국제은행들의 태환정지가 현대경제의 일상적 현실이다. 이것은 세계적 생산의 조직화를 보여주며 제국에 대한 공신력(이것은 감정의 문제이지 않은가!)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메커니즘이다.-아멜라노].634

<33장 신용제도에서의 유통수단>
유통화폐의 절대량이 이자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오직 화폐핍박기뿐이낟. 기타의 경우에는 통화의 절대량은 이자율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첫째로 그 절대량은 상품가격과 거래량, 그리고 신용상태에 의해 결정되지 그 절대량이 신용상태를 결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상품가격과 이자는 어떤 필연적인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651

공황기의 국내 화폐공황을 제외하면 화폐량의 문제는 오직 금속화폐 즉 세계화폐에 관한 것이다. ... 진정한 화폐는 세계시장화폐이며 신용화폐는 항상 세계시장화폐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이다.660

공황시에는 어음유통은 완전히 중단된다. 모두가 현금지불만을 받으려하기 때문이다. 은행권만이 적어도 현재까지는 영국에서 유통능력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 나라의 부 전체가 영란은행을 뒷받침하기 때문이다.665[이 표현은 "오늘날 세계의 부 전체가 미국을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바꿀 수 있지 않을까?-아멜라노]

영란은행이 금속준비에 의해 보증되지 않는 은행권을 발행하면 이 은행은 발행한 은행권의 명목가치에 상응하는 금액만큼의 추가자본을 얻는다. 그리고 이 추가자본은 그 은행에게 추가이윤을 가져온다. 사입은행의 경우도 금속준비를 하지 않는 만큼의 발행화폐를 추가자본으로 만들며 추기이윤을 얻는다. 은행업자가 금속화폐의 국민적 절약으로부터 이윤을 얻고 있는 것이다. 국민적 절약이 사적 이윤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부르주아 경제학자를 놀라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윤일반이 국민적 노동의 취득이기 때문이다. 1797~1817년에 영란은행은, 은행권을 종이로부터 화폐로 전환시키며 그것을 국가에 대부하는 (국가가 부여한) 권한을 통해 국채이자라는 형태로 국가(즉 국민)로부터 보수를 받았는데 이것보다 더욱 괴상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667

은행이 신용과 자본을 창조하는 방법은 이처럼 1)자기자신의 은행권을 발행한다 외에 2)현금을 받고 21일짜리 런던 앞 어음을 발행한다. 3)이미 할인된 어음을 다시 사용한다 등이다.667

영란은행의 힘은 시장이자율을 규제한다는 점에서 나타난다.667

국립은행들과 대규모화폐대부업자들이나 고리대금업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신용제도는 하나의 거대한 집중이며 이 기생계급에게 놀랄만한 권력--산업자본가들을 주기적으로 죽일 뿐만 아니라 가장 위험한 방식으로 현실의 생산에 간섭하는 권력--을 주고 있다. 그런데 이 기생계급들은 생산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며 생산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670

<35장 귀금속과 환율>
금은은 어떻게 기타 형태의 부와 구별되는가? 금은은 부의 사회적 성격의 자립적인 화신이며 표현이라는 점에서 구별된다. 왜냐하면 화폐를 매개로 해서만 개인의 부가 사회적 부로 실현되기 때문이다. 부의 사회적 성격은 화폐라는 물건에 체현된다. 부의 사회적 존재는 저 세상의 것으로서, 사회적 부의 실물요소들과 나란히 그리고 그 외부에 존재하는 물건, 대상, 상품으로 나타난다.705

신용도 부의 사회적 형태인데 화폐를 축출하고 그 지위를 빼앗는다. 생산의 사회적 성격에 대한 신뢰가 생산물의 화폐형태를 일시적이고 관념적이며 단순한 표상으로 나타나게 만든다. 그러나 신뢰가 동요되자마자(그런데 이것은 근대산업의 순환에서는 필연적이다) 모든 실물적 부는 화폐로 전환되어야만 한다. 이 불가능한 요구가 체제 그 자체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엄청난 요구를 충족시켜야 할 금/은은 기껏해야 영란은행 금고에 있는 수백만 스털링 파운드에 불과하다.706

그러므로 금유출은 그 영향을 통해서, 생산이 사회적 생산이면서도 사회적 통제를 실제로 받고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부의 사회적 형태(화폐)가 부 그 자체와 나란히 하나의 물건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자본주의체제뿐만 아니라 (상품거래와 사적교환을 토대로 하고 있는 한에서의) 이전의 생산체제들에도 타당하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 불합리한 모순과 역설의 가장 명확하고 괴상한 형태가 나타난다. 왜냐하면 1)자본주의체제에서는 직접적인 사용가치를 위한 생산은 거의 완전히 폐지되고 있으며 부는 생산과 유통의 얽힘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과정으로서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2)신용제도의 발달에 따라, 자본주의적 생산은 끊임없이 이 금속에 의한 제한(이것은 부와 그 운동에 대한 물질적 제한일 뿐만 아니라  관념적인 제한이기도 하다)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지만 또 끊임없이 반복하여 이 제한과 부딪히기 때문이다. 공황에서는 모든 어음과 유가증권과 상품이 동시에 은행화폐로 전환될 수 있어야 하며 그리고 모든 은행화폐는 또 금으로 전환될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가 나타난다.706

결국 맑스는 화폐에 의한 사회적 부의 재현 방식은 화폐부족 공황을 필수적으로 가져온다는 것, 신용에 의한 이 한계의 극복시도는 거대해진 사회적 부와 화폐체제의 협소성 사이의 모순을 극단화한다는 것이다. 생산의 사회적 성격은 화폐와 같은 사회적 성격의 물건에 의해서도, 신용제도와 같은 사회적 성격의 기관에 의해서도 감당될 수 없고 진정한 사회적 통제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신용제도에 대한 국가의 보증, 세계적 수준에서는 달러에 의한 신용제도 보증은 귀금속이나 은행보다 더 발본적인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모순은 극복되지 않고 있다. 오늘날 세계화된 사회적 생산에 걸맞는 진정한 사회적 통제의 방법은 무엇일까? 가라타니 고진은 그것을 세계공화국이라는 개념으로 제시하고 있고 네그리와 하트는 공통체Commonwealth라는 개념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때 귀금속, 은행권, 유가증권, 세계화폐 등은 어떤 위치, 역할, 형태를 취하게 될까?-아멜라노.

환율은 다음과 같은 사정에 의해 변동될 수 있다: 1)당면의 국제수지에 의해서 2)한 나라의 화폐[금속화폐든 지폐든]의 가치감소에 의해서 3)은을 화폐로 사용하는 나라와 금을 화폐로 사용하는 나라사이의 환율은 이 두 금속의 상대적 가치변동에 따라서.728

화폐제도는 기본적으로 카톨릭제도이고 신용제도는 기본적으로 프로테스탄트제도이다. "스코틀랜드 사람은 금을 싫어한다". 지폐로서 상품의 화폐적 존재는 순전히 사회적 존재이다. 구원을 받는 것은 믿음에 달려 있다. 상품에 내재하는 영혼으로서의 화폐가치에 대한 믿음, 생산양식과 그것의 예정된 질서에 대한 믿음.[모든 사람이 자본주의를 믿으면 화폐소유자나 신용보유자는 구원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망할 것이다.-아멜라노] 자기증식적인 자본의 단순한 인격화로서의 개별생산담당자에 대한 믿음. 그러나 프로테스탄트교가 카톨릭교로부터 해방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용제도도 화폐제도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 [물론 화폐제도는 자본주의적 생산제도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아멜라노]

<36장 자본주의 이전의 관계>

고리대 자본을 위해서는 생산물의 일부가 상품으로 전환되고 화폐의 각종 기능들이 발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자본주의 이전에 고리대는 낭비적 귀족에 대한 고리대, 소생산에 대한 고리대로 존재했다. 이 두 신분을 파멸시킴으로써 고리대는 화폐자본의 거대한 집적을 초래한다. 고리대는 실로 생산자의 필요생존수단 이상의 모든 것을 이자의 형태로 집어삼켰다. 고리대 자본은 생산방식을 변경시키지 않으면서 직접적 생산자의 모든 잉여노동을 취득하므로 생산자에 의한 노동조건의 소유 또는 점유가 전제임에 반해 자본은 노동을 직접 종속시키지 않는다. 고리대는 생산양식을 궁핍하게 만들며 생산력을 발전시키지 않고 마비시키며 이 비참의 상태를 항구화한다.730~733

고리대는 소유형태를 파괴하고 분해하는 역할을 하지만 자본주의적 생산의 조건들이 존재하는 곳, 때에만 고리대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형성하는 수단의 하나로 등장한다.735 고리대는 생산과 생산의 틈새에서 살면서 생산자가 직면하는 사건, 재해, 지불의무의 집중 등을 계기로 생산자로부터 노동조건을 박탈한다. 평민들을 채무노예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737

신용제도는 고리대에 대한 반발로서 발전한다. 이것은 이자낳는 자본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조건과 요구에 종속된다는 의미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차입자가 이제 무일푼의 재능가일 수 있게 된다. 이자낳는 자본은 그가 자본가로 기능하면서 차입자본을 사용하여 부불노동을 취득하도록 만든다.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의 최우수인물을 흡수하는 능력이 크면 클수록 그 지배는 그만큼 강고해지며 그만큼 더 위험한 것으로 된다.740

고리대를 대체하는 신용제도의 역사적 실험들로는 공영전당포, 상인들의 신용조합,  생시몽의 크레디 모비리에와 같은 신용은행 등의 설립이 있다. 이것들의 일관된 지향은 이자낳는 자본을 산업자본과 상업자본의 요구에 종속시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근대적 은행제도들은 유휴화폐준비금을 수집하여 화폐시장에 투입함으로써 고리대자본의 독점력을 빼앗고 신용화폐를 창조함으로써 귀금속의 독점적 지위를 제한한다.745

신용제도가 발달하더라도 귀금속형태의 화폐가 여전히 토대이고 이 토대로부터 신용제도가 벗어날 수 없다는 점, 신용제도는 사회적 생산수단의 사적 개인에 의한 독점적 소유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신용제도는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내재적 형태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 생산양식을 그 가능한 한의 최고.최후의 형태로 발달시키는 추진력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747

은행제도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만들어낸 가장 인위적이고 정교한 산물이다. 은행은 사회적 규모에서 생산수단의 일반적 부기와 분배형태를 제공한다. 개별자본가가 총잉여노동으로부터 자신이 총자본에서 차지하는 비율에 따라 분배받는 것, 즉 자본의 사회적 성격은 신용, 은행제도의 충분한 발달에 의해 비로소 매개되고 완전히 실현된다.747 이 신용, 은행제도는 더 멀리 전진한다. 그 제도는 사회의 모든 이용간으한 자본, 그리고 아직 적극적으로 기능하지 않는 잠재적 자본가지도 산업자본가와 상업자본가의 처분에 맡기며 이 자본의 대부자도 사용자도 이 자본의 소유자 또는 생산자가 아니다. 그리하여 신용, 은행제도는 자본의 사적 성격을 폐기하며 따라서 자기자신 안에 자본 그것의 폐기를 잠재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은행제도는 자본의 분배를 사적 자본가와 고리대금업자의 수중으로부터 빼앗아 하나의 특수한 업무, 사회적 기능으로 만든다. 그러나 이렇기 때문에 은행과 신용은 또한 자본주의적 생산을 그 자신의 한계 이상으로 추진시키는 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되며 그리고 공황과 사기의 가장 유효한 매개물의 하나로 된다.747~8

은행제도는 화폐를 각종 형태의 유통하는 신용으로 대체함으로써 화폐는 사실상 노동과 노동생산물의 사회적 성격을 특수하게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748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부터 결합노동의 생산양식으로의 이행과정에서 신용제도가 강력한 지렛대로 역할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신용제도는 생산양식 그것의 대규모 조직적 변혁과 고나련하여 다만 하나의 요소로서 역할할 뿐이다. 사회주의적 의미에서의 신용 은행제도의 기적적 힘에 대한 환상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그 생산양식의 형태들의 하나로서의 신용제도에 대한 완전한 무지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생산수단이 자본으로 전환되기를 중단하자마자(여기에는 사적 토지소유의 폐지도 포함되어 있다) 시뇽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 신용은 소유가 조직되는 방식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신용은 소유의 이러한 조직과 운명을 같이 한다.749

상인자본은 어떤 매개적인 활동이 이루어지지만, 이자낳는 자본은 자본의 자기재생산적인 성격 즉 자기증식적인 성격, 잉여가치의 생산이 순전히 신비한 속성으로 나타난다.750

결국 맑스의 논지는 생산의 사회적 성격, 사회적 노동을 관리하고 발전시킬 사회적 통제의 형식, 사회적 권력형태를 어떻게 창출하는가에 모아진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위에서만 발전할 수 있는 화폐, 신용과는 다른 방식의 사회적 통제양식, 그러한 통제양식을 내적 계기로 삼는 생산양식은 어떻게 가능한가?-아멜라노.

2010/08/23 14:37 2010/08/23 14:37
『아케이드 프로젝트』4권(K~P) 세미나후기

벤야민은 지성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놓인 어떤 물질적 대상으로서의 과거(프루스트), 세계적인 사건들이 뇌와 교감신경의 구조 속에 침전된 것으로서의 집단적 무의식(융)을 사회의 근원적 힘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보인다. 융으로부터의 인용문에 나타나는 것, 즉 “집단적 무의식은 일종의 무시간적인 영원한 세계상을 구성한다”(4/31)는 것이 벤야민의 생각이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벤야민은 이 과거를 삶의 파괴불가능성, 항상 새로운 재탄생의 바탕으로 이해하면서 쇠망의 예언자들과 대치한다.(4/71) “쇠망의 시대 같은 것은 없다”가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기본 파토스이다.(4/68) 과거는 해저, 지하, 하수도, 무덤, 흔적과 같은 이미지로 남아 있다.

이런 시각에서 읽는다면 군중은 꿈 속의 과거이며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는 각성한 과거이다. 보들레르의 산책자는 이 사이에 있다.
 
벤야민은 이 과거의 현실화Aktualisierung를 역사유물론의 기본개념으로 보면서 역사를 진보이념에 따라 파악하는 부르주아적 사유습관과 구분한다.(4/73, N 2, 2)

과거를 현실화하는 것은 각성/깸Das Erwachen을 통한다. 벤야민은 잠Schlaf을 그 시초단계로 놓는다. 잠은 각성을 요구하지만 각성은 잠 때문에 발생하는 과제이다. 예컨대 “자본주의는 꿈을 수반한 새로운 잠이 유럽을 덮친 하나의 자연현상으로, 이러한 잠 속에서 신화적 힘들이 재활성화되었다”(4/15)는 구절을 유의하자. 꿈은 각성의 유년기적 단계이다.(4/9) 각성은 기재Gewesenden에 대한 아직 의식되지 않은 앎을 채굴하는 구조를 갖는다.(4/10) 예컨대 그는 Es gibe Noch-nicht-bewusstes-Wissen vom Gewesenen, dessen Foerderung dis Struktur des Erwachens hat.(Walter Benjamin Gesammelte Schriften, v-1, s. 491) 라고 서술한다. 그러므로 벤야민의 각성은 기재하는 것으로서의 과거의 채굴인 바 그것은 파괴적 성격의 상기Erinnerung(비의지적 기억), 회상Eingedenken, 보수적 성격의 기억Gedaechnisse(의지적 기억)과 같은 서로 다른 능력들을 요구한다. 회상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서의 각성의 계기는 꿈 속에 이미 존재한다. 그래서 벤야민은 임박한 각성은 그리스인들의 목마처럼 꿈이라는 트로이 안에 놓여 있다고 쓴다.(4/17)

꿈들은 궁전, 성당, 박물관, 박람회, 미술관, 아케이드, 공장, 실내, 극장, 증권거래소, 도박장, 매춘거리, 철도, 역, 백화점 등과 같은 도시의 꿈의 집들에 깃들어 있다. 상품이라고 다를까?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실로 이 꿈의 집들에 대한 미시적인 탐사이다.

이렇게 하여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역사유물론적인 각성의 현상학으로 된다. 그리고 그것은 꿈의 집합들의 현상형식들에 대한 탐사이다. 이 탐사에서 맑스의 토대/상부구조에 대한 관계는 반영의 관계가 아니라 표현으로 이해된다. 상부구조는 토대를 표현한다. 문화는 경제를 표현한다.(4/71)

벤야민은 생시몽의 계획을 중세로의 회귀라고 단정한다. 그것은 진보이념 속에서 더 깊은 잠을 가져오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리라. 어려운 것은 도박과 매춘을 파악하는 벤야민의 시각이다. 매춘은 에로스를 돈으로 환원시키는 제도로, 도박(그것의 극단은 증권거래소이다)은 Lesen수읽기에서 보이는 예언력을 돈과 연결시키는 형식으로 이해된다. 돈에의 예속을 뺀다면 에로스나 예언은 해방적 힘일 것이다. 그렇지만 벤야민은 도박사의 시간의 파편성과 단절성을 모든 단절 속에서 항상적인 것을 읽는 프롤레타리아의 시간과 대비시킨다.(4/165, 4, 178, 4/181). 이 점에 대해서는 더 살펴 봐야 한다.

벤야민은 과거의 현실화를 위해서는 쭉 벋어있는 일방향적인 도로Strasse의 환상을 깨고 헤맬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수반한 쾌락의 공간으로서의 거리/길Weg[역자는 거리와 길로 번역했지만 번역어를 바꾼다]을 되찾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4/189) ‘인식론에 관해, 진보이론’이라는 제목을 단 N은 상세히 분석되어야 한다.

2010/08/21 11:21 2010/08/21 11:21
비판사회학회의 <한국 사회학의 사회학> 토론 참관메모

사회학을 한다고 했을 때 그 함은 여러가지 차원을 포함한다.

첫째로 사회학은 직업이다. 사회학 연구기관이나 대학이나 기타 연관된 곳에서 사회학 지식을 사용하여 일하면서 소득을 얻을 수 있는 직업으로 간주될 수 있다. 토론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직업으로서의 사회학을 중심에 놓고 사고하고 있었는데 서울대의 정근식 교수가 대표적이었다. 한신대 윤상철 교수와의 쟁점은 이 수준에서 형성되고 있었다. 교수의 수, 학생의 수, 지원자의 수 등등에 대한 분석은 직업으로서의 사회학에 초점을 맞추는 시각이다.

둘째로 사회학은 학문이며 지식이다. 그것은 사회와 삶에 대한 앎, 이른바 '진리'의 문제를 다룬다. 이 때 사회학은 지식내적 문제로 된다. 사회학의 위기의 원인을 사회학의 학문적 영향력의 상실로 읽으면서 현대 사회를 읽을 수 있는 패러다임을 만들어내지 못한데서 찾은 일부 토론자의 시각은 학문/지식으로서의 사회학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셋째로 사회학은 그 자체가 지식인 한에서 권력/힘으로 기능한다. 사회학의 위기를 사회학 장의 낮은 자율성과 연결시키는 관점은 둘째의 관점을 전제로 하면서도 사회학의 권력이라는 다른 문제를 다룬다.

넷째로 사회학은 삶이며 수행이다. 사회학 연구자는 사회학이라는 수단을 통해 세계와 관계맺고 타인과 관계 맺는다. 이때 사회학은 자기성찰과 관계형성의 길이다. 이 수준은 토론에서 제기되지 않았다. 만약 수행으로서의 사회학이 사고되기 시작한다면 사회학이라는 것의 경계 그 자체가 성찰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고 실제로 토론은 매우 깊은 곳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대학 내에서 이루어지는 토론은 그것을 허용치 않는다. 자기고백은 심경고백과 유사한 것에 머물고 만다.

직업이 불안정해지거나 직업을 잃는 것은 위험하다. 지식이 불충분한 것은 안타깝다. 권력이 부족한 것은 손실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수행을 놓아버리는 것은 세계와 삶 전체를 잃는 것이다.


2010/08/18 10:08 2010/08/18 10:08
『자본론』3권 5편 이자와 기업가 이득 세미나강좌 후기(3)

1. 제3권 5편에서 맑스는 대부자본들 중에서 전형적 대부자본인 화폐자본을 대상으로 이자의 문제를 서술한다. 이때 그는 대부자본의 다양한 형태들로서 가옥, 선박, 기계 등도 언급하고 있다. 가옥까지 대부자본으로 사고하면서 이것들이 형태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화폐자본의 특수한 형태에 불과하다고 했는데 토지는 여기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맑스는 지대 이자와 동일시하려는 부르주아적 편견이나 이자를 지대와 동일시하려는 초기자본주의적 편견을 비판한다(3권 하, 768~771) 이때 그는 토지는 건물/가옥아니 기타 대부상품들과는 달리 노동생산물이 아니라는 사실, 즉 토지는 그 자체로는 가치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중요한 근거로 든다. 현행의 토지들은 그것에 고정자본들을 합체하고 있는데 이러한 토지의 임대에서 진정한 지대와 그 고정자본분에 대한 이자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2. 3권 4편에서는 상인자본이 평균이윤율 형성에 참가하여 이윤율을 저하시킨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런데 대부자본의 경우는 이와 반대이다. 대부자본은 평균이윤율 형성과정에 참가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윤율의 저하를 저지시키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이 사실은 대부자본이 평균이윤율의 한도 내에서 기능자본과 경쟁하여 자신의 평균이자율을 확보한다는 사실과 모순되지 않는다. 이자는 이윤으로부터의 분배이기 때문에 이자율이 높다고 해서 이윤율이 낮아지는 것도 아니고 이자율이 낮다고 해서 이윤율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3. 동일한 가치가 신용을 매개로 하는 운동과정 실제가치의 몇 배로 의제화되는 과정이 25장에서 서술된다. 하지만 이 사실로부터 신용에 의해 매개되는 모든 자본을, 심지어 금융자본 일반을 의제된 자본으로 사고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그리고 의제(가공)는 악으로 평가될 수 없고 그 나름의 고유한 기능을 갖는다는 사실도 고려되어야 한다. 의제는 유통시간을 단축시키고 준비금을 축소시킴으로써 자본변태 및 재생산과정을 가속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 우리가 자본관계를 벗어나서 사고해 보면 하나의 선물이 선물로서 돌고 돌면서 그 선물의 가치를 여러 배로 증폭시킬 수 있을 때 이것을 악으로서의 의제라고 할 것인가?

4. 맑스는 자본가의 노동에 대한 보수로서의 감독임금 개념에 대해 분석하면서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한다. 자본가의 이른바 노동은 1)노동의 사회화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지휘기능 2)계급적대에서 발생하는 억압기능을 함축하는데 1)은 생산적 노동으로 볼 수 있지만 2)는 그렇지 않다. 자본가가 이윤을 자신의 이러한 노동에 대한 임금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임금은 노동력의 사회적 재생산비일 뿐이고 만약 위의 노동을 수행하는 자본가를 노동자로 간주한다 하더라도 다른 노동자의 평균임금을 넘어서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자본가는 자신의 노동이 복잡노동이고 또 자신이 자신에게 지불하므로 더 높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리에 맞지 않는다.) 맑스는 1)을  2)로부터 구분함으로써 자본가가 (혹은 그를 대신하는 관리인이) 수행하는 노동 일체를 부정하는 위험성을 경계한다. 노동들 사이를 매개하고 연결시키는 조정자로서의 지휘노동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나키즘과의 쟁점을 구성한 바 있다. 우리는 맑스가 지휘노동이라고 불렀던 노동의 실재성을 공장에서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네트워크화된 메트로폴리스에서의 노동에서 그러한 일관지휘가 필요학고 또 가능한가? 만약 그것이 필요하고 또 가능하다면 어떤 형태, 어느 수준, 어떤 방식, 어떤 위치일까?



2010/08/18 09:39 2010/08/18 09:39
3권 5편 세미나강좌 후기(2)

<25장 신용과 가공자본>
이 장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특징지우는 데 필요한 한에서 상업신용과 은행신용만을 취급하여 이 신용의 발달과 국가신용 사이의 관련을 고찰하지 않는다. 신용제도이 그 수단들에 대한 분석도 포함되지 않는다.

단순상품유통에서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기능이 발전하며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가 형성된다. 상업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달에 따라 신용제도의 이 자연발생적 기초는 확대, 일반화, 완성된다. 이제 화폐는 대체로 지불수단으로서만 기능한다. 즉 상품이 화폐으로 교환으로 판매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기일의 지불약속서와 교환으로 판매된다. 이 모든 지불약속서를 단순화를 위해 환어음으로 부를 것이다. 환어음은 지불수단으로 유통하며 현실적 상업화폐를 이룬다. 생산자들과 상인들에 의한 이 상호대부가 신용의 실질적 기초를 이루는 만큼 상호대부의 유통수단인 환어음은 진정한 신용화폐(즉 은행권)의 기초를 이룬다. 후자들은 (금속화폐든 정부지폐든) 화폐유통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환어음유통에 바탕을 두고 있다.487

신용제도의 또 다른 측면은 화폐거래업의 발달이다. 사업가준비금의 보관, 화폐의 수납과 지불, 국제적 지불업무, 지금거래가 화폐거래업자의 수중에 집중된다. 이 화폐거래업과 나란히  이자낳는자본/화폐자본의 관리라는 신용제도의 다른 측면이 발달한다. 즉 화폐의 차입과 대부가 화폐거래업자의 특수임무가 된다. 그는 진정한 대부자와 차입자 사이의 매개자로 등장하며 대부가능한 화폐자본을 대량으로 자기의 수중에 집중시켜 은행업자로 된다. 은행업자는 화폐자본의 일반적 관리자로 된다. 한편에서 그는 산업전체를 위해 차입함으로써 모든 대부자에 대해 차입자를 집중시킨다. 은행은 한편에서는 화폐자본의 집중, 대부자의 집중을 상징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차입자의 집중을 상징한다.490

대부자본은 지불준비금, 각종 조각 예금들, 점차적으로 소비되는 소득들 등으로 구성된다. 대부는 어음의 할인과 각종의 대부(신용대부, 증권 국채 주식에 대한 담보대부, 특히 선하증권 창고보관증권 기타 상품소유증서에 대한 대부, 당좌대월)로 구성된다. 은행업자의 신용은 여러 형태를 취한다. 타은행앞 어음과 수표, 신용거래한도의 설정, 발권은행의 경우 은행권. 은행권은 은행업자가 개인어음을 대신하여 발행하는 일람불어음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은행권을 발행하는 주요은행들은 국립은행과 사립은행의 기묘한 혼합물로서 사실상 국가신용을 그 배후에 가지고 있어서 그들의 은행권은 대개 법화이며 은행권은 유통하는 신용상징에 불과하므로 은행업자가 취급하는 것은 신용 그것이라는 것이 명백하다.(491)

환어음을 발행하는 것은 상품을 신용화폐로 전환시키는 것이며 어음을 할인받는 것은 이 신용화폐를 다른 신용화폐(은행권)로 전환시키는 것이다(525). 화폐에 대한 수요는 가치를 상품이나 채권의 형태로부터 화폐의 형태로 전환시키려는 소원에 불과하다(525)

<26장 신용자본의 퇴적>

<27장 자본주의적 생산에서의 신용의 역할>
신용제도에 관하여 우리가 이제까지 행해온 일반적 관찰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자본주의적 생산 전체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이윤율균등화 (또는 이 균등화의 운동)를 매개하기 위하여 신용제도가 필연적으로 형성된다는 것.
2.유통비용을 절감시킨다는 것.
1) 주요한 유통비용의 하나는, 화폐가 그 자체 가치인 한, 화폐 그것이다. 화폐는 신용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3가지 방식으로 절약된다.
A.거래의 큰 부분에서 화폐가 전혀 사용되지 않는 것에 의해서.
B.유통수단의 유통이 가속화되는 것에 의해서. 이것은 부분적으로 아래 2)에서 말할 것과 같다. 한편에서는 이 가속화는 기술적인 것이다. 즉 소비를 매개하는 현실의 상품거래의 양과 수가 불변인 조건 하에서 보다 소량의 화폐 또는 화폐상징이 동일한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은행업의 기술에 관련된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신용은 상품변태속도를 가속화시키며 이에 따라 화폐유통속도를 가속화시킨다.
C.금화를 지폐에 의해 대체시키는 것에 의해서.
2)신용은 유통 (또는 상품변태)의 개개의 국면을 가속화시키며 그리고 자본변태 및 재생산과정 일반을 가속화시킨다.(다른 한편으로 신용은 또한 구매행위와 판매행위를 오랫동안 서로 분리시킬 수 있으며 이리하여 투기의 바탕으로서 역할한다. 준비금을 축소시키는 데 이것은 두 가지 각도에서, 즉 한편에서는 유통수단의 감축으로서,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 중 항상 화폐형태로 존재해야만 하는 부분의 감축으로서 고찰될 수 있다.

3. 주식회사의 형성. 이것에 의하여
1) 생산규모와 기업이 거대하게 팽창하였는데 이것은 개인자본으로서 불가능한 일이었다. 동시에 종전의 정부기업들이 회사기업으로 된다.
2) 자본 ─이것은 내재적으로 사회적 생산방식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사회적 집중을 전제하고 있다─ 은 이제 개인자본에 대립하는 사회자본(직접적으로 결합한 개인들의 자본)의 형태를 직접적으로 취하며 이러한 자본의 기업은 개인기업에 대립하는 사회기업으로서 등장한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그것의 한계 안에서 사적 소유로서의 자본을 철폐하는 것이다.
3) 현실의 기능자본가가 타인의 자본을 관리하는 단순한 관리인으로 전환하며 자본소유자는 단순한 소유자 ─단순한 화폐자본가─ 로 전환한다. 배당이 이자와 기업가이득 ─즉 총이윤 ─ 을 포함하고 있다 할지라도(왜냐하면 관리인의 봉급은 일종의 기능노동에 대한 임금에 불과하거나 또는 불과할 수 밖에 없으며, 이 노동력의 가격은 기타의 모든 노동력의 가격과 마찬가지로 노동시장에서 규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총이윤은 오직 이자의 형태로서만, 즉 자본소유에 대한 단순한 보상으로서만 취득된다. 이 자본소유는 이제는 현실의 재생산과정에서의 기능과는 완전히 분리되고 있는데, 이것은 관리인의 일신에 속하는 이 기능이 자본소유와 분리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리하여 이윤 ─차입자의 이윤에 의해 정당화되고 있는 이자 뿐만 아니라 모든 이윤─ 은 오로지 타인의 잉여노동을 취득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잉여노동은 생산수단이 자본으로 전환되는 것 ─즉 생산수단이 현실의 생산자로부터 분리되어 타인의 소유로서 (관리인으로부터 최하의 일용노동자에 이르기까지) 현실적으로 생산에서 활동하는 모든 개인에 대하여 대립하는 것─ 에 의하여 발생한다. 주식회사에서는 기능은 자본소유와 분리되어 있고 그리하여 노동도 생산수단과 잉여노동의 소유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최고의 발전이 낳는 이러한 결과는 자본을 생산자들의 소유 ─그러나 이제는 개별생산자들의 사적 소유로서가 아니라 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 또는 직접적인 사회소유─ 로 재전환시키기 위한 필연적인 통과점이다. 더욱이 이러한 결과는 재생산과정에서 아직도 자본소유와 결부되어 있는 모든 기능들을 결합된 생산자들의 단순한 기능으로, 사회적 기능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통과점이다.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다음과 같은 경제학적으로 중요한 사실을 지적하여 두고 싶다. 이윤이 여기에서는 오직 이자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므로, 이자만을 낳는 기업들도 존속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일반적 이윤율의 저하를 저지하는 원인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불변자본이 가변자본에 비하여 거대한 비율을 이루고 있는 이러한 주식회사들은 반드시 일반적 이윤율의 균등화에 참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용문)

주식회사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그것 안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철폐하는 것이며 따라서 자기를 철폐하는 모순인데, 주식회사는 명백히 새로운 생산형태로의 단순한 통과점으로서 나타난다. 주식회사는 현상에서도 그러한 모순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주식회사는 한편에서는 일정한 분야에서 독점을 낳고 이리하여 국가의 간섭을 불러 일으킨다. 다른 한편에서는 주식회사는 새로운 금융귀족을 재생산하고 발기인이나 투기가나 명목만의 임원의 형태로 새로운 종류의 기생층을 재생산하며 회사창립이나 주식발행이나 주식거래와 관련된 투기와 사기의 제도전체를 재생산한다. 결국 주식회사는 사적 소유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사적생산이다.

4. 주식회사제도 ─이것은 자본주의체제 그것의 바탕 위에서 자본주의적 사적 산업을 철폐하는 것이며, 이것은 확산되어 새로운 생산분야를 장악함에 따라 그만큼 더 사적 산업을 파괴하게 된다─ 와는 별도로, 신용은 개별자본가 ─또는 자본가로 될 수 있는 사람─ 에게 일정한 한계 안에서 타인의 자본과 소유, 그리하여 타인의 노동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제공한다. 자기자본이 아니라 사회자본에 대한 지배력은 자본가에게 사회적 노동에 대한 지배력을 준다. 어떤 사람이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자본 ─또는 세상사람들이 그가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본─ 은 신용이라는 상부구조를 위한 토대로 될 뿐이다. 이것은 특히 도매업 ─사회적 생산물의 대부분이 이것을 통과하고 있다─ 에서 그러하다. 모든 척도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안에서 다소간 시인되고 있었던 모든 변명이유들─ 이 지금은 사라져 버린다. 투기상인이 도박에 걸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사회적 소유이다. 자본의 기원이 저축이라는 이야기도 역시 불합리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투기꾼든 바로 타인들이 자기를 위하여 저축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용문)

또하나 절욕이라는 문구도 자본가의 사치 ─이것이 이제는 신용을 얻는 수단으로 되고 있다─ 에 의하여 완전히 반박되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보다 덜 발달된 상태에서는 아직도 일정한 의미를 지녔던 관념들이 이제는 전혀 무의미한 것으로 된다. 성공이나 실패 모두가 자본의 집중을 야기하며 이리하여 최대의 규모에서의 수탈을 야기한다. 수탈이 이제는 직접적 생산자들로부터 중소자본가들 자신에까지도 미치고 있다. 수탈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출발점이며,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목표는 수탈을 완성단계에까지 진행시켜 결국에는 모든 개인들로부터 생산수단을 수탈하는 것이다. 즉, 생산수단은 사회적 생산의 발달에 따라 사적 생산의 수단이나 생산물이기를 멈추며 결합된 생산자들의 사회적 생산물임과 동시에 그들의 수중에 있는 생산수단, 이리하여 그들의 사회적 소유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 그것 안에서는 이러한 수탈은 소수인에 의한 사회적 소유의 취득이라는 반대의 형태를 취하여 나타난다. 그리고 신용은 이 소수인에게 순수한 사기꾼의 성격을 점점 더 부여하고 있다. 소유권은 이제 주식의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소유권의 동향과 이전은 증권거래소의 투기의 결과일 따름인데, 증권거래소에서는 작은 고기들이 상어의 밥이 되고 양은 거래소이리들의 밥이 된다. 주식회사제도에서는 낡은 형태 ─즉 사회적 생산수단들이 개인적 소유로서 나타나는 낡은 형태─ 와의 대립이 이미 존재한다. 그러나 주식이라는 형태로의 전환은 아직도 자본주의적 한계 안에 붙들려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전환은 사회적 부로서의 부의 성격과 사적 부로서의 부의 성격 사이의 대립을 극복하기는커녕 이 대립을 새로운 형태로 전개시키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 자신에 의해 운영되는 협동조합공장은, 비록 모든 경우에 그 현재적 조직에서는 기존제도의 모든 결함을 재생산하며 또 재생산하지 않을 수 없지만, 낡은 형태 내부에서 새로운 형태가 출현하는 최초의 실례이다. 여기에서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대립이 철폐되고 있다. 비록 우선은 다만 조합의 노동자들이 자기자신의 자본가라는 형태 ─즉 그들이 자기자신의 노동을 가치증식시키기 위하여 생산수단을 사용한다는 형태─ 로서이긴 하지만. 이러한 공장들은 물질적 생산력과 그것에 대응하는 사회적 생산형태의 일정한 발전단계에서 어떻게 새로운 생산양식이 낡은 생산양식으로부터 자연적으로 발전하고 형성되는가를 보여준다. 협동조합공장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부터 발생하는 공장제도 없이는 발달할 수 없었을 것이며, 또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부터 발생하는 신용제도 없이는 발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신용제도는 자본주의적 개인기업을 자본주의적 주식회사로 점차적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주요한 바탕을 이루는 것과 마찬가지로 협동조합기업을 다소간 국민적 규모로 점차로 확장시키기 위한 수단을 제공한다. 자본주의적 주식회사는 협동조합공장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부터 결합된 생산양식으로의 이행형태로 간주되어야 하는데, 다만 전자에서는 그 대립<자본과 노동 사이의 대립>이 소극적으로 철폐되고 후자에서는 적극적으로 철폐되고 있을 뿐이다.

신용제도가 과잉생산과 상업에서의 과도투기의 주요한 지렛대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다만 그 성질상 탄력적인 재생산과정이 이 경우에 그 극한까지 강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강행되는 것은 사회적 자본의 큰 부분이 그것의 소유자가 아닌 사람들에 의하여 사용되기 때문이다. 즉 자본의 소유자는 자기의 사적 자본을 사용할 때 그것의 한계를 소심하게 타산하는 데 반하여 이 비소유자들은 소유자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처리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이 명백하게 된다. 즉 자본주의적 생산의 대립적 성격에 바탕을 둔 자본의 가치증식은 생산의 현실적인 자유로운 발전을 오직 일정한 한계까지만 허용하며 따라서 사실상 생산에 대한 내재적인 질곡과 장애를 구성하고 있는데, 이 질곡과 장애가 신용제도에 의하여 끊임없이 파괴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용제도는 생산력의 물질적 발전과 세계시장의 형성을 촉진하는데, 이러한 것들을 새로운 생산형태의 물질적 기초로서 일정한 수준에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역사적 임무이다. 동시에 신용은 이 모순의 격렬한 폭발 ─즉 공황─을 촉진하고 이리하여 낡은 생산양식을 해체하는 요소들을 강화한다.
신용제도에 내재하는 이중적 성격 ─즉, 한편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동기(즉 타인노동의 착취에 의한 치부)를 가장 순수하고 가장 거대한 도박과 사기의 제도로까지 발전시키고 사회적 부를 수탈하는 소수인의 수를 점점 더 제한한다는 성격,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생산양식으로의 이행형태를 구성한나는 성격─ 은 로(Law)로부터 페레루(Pereire)에 이르기까지의 주요한 신용주창자들에게 사기꾼과 예언자를 잘 혼합시킨 성격을 주고 있다.

<28장 유통수단과 자본>
소득의 지출을 통화로, 자본의 이전 매개를 자본으로 구별하려는 투크나 윌슨의 시도가 있지만, 그것은 사실상 소득의 화폐형태와 자본의 화폐형태를 잘못 구별하는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상인과 소비자 사이뿐만 아니라 상인 상호간의 거래에서도 화폐는 통화로 사용되기 때문이다.(545) 통화와 자본 사이의 투크의 구별은 그가 은행업자의 입장에서 화폐를 이해하기 때문이다(547).

두개의 유통분야는 내적 관련을 가지고 있다. 소유통은 소비규모를, 대유통은 재생산과정의 규모와 속도를 표현한다.(549)

빠르고 확실한 환류라는 외관은 그러한 환류가 사실상 끝이난 이후에도 이미 주어진 신용에 의하여 얼마동안 지속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신용의 환류가 현실적인 환류를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551)

번영기에는 소비자와 상인에서의 유통수단에 대한 수요가 우세하며 불황기에는 자본가들 사이에서의 유통수단에 대한 수요가 우세하다. 불황기에는 전자에 대한 수유는 감소하고 후자의 수요는 증가한다(553)

2010/08/17 16:46 2010/08/17 16:46
3권 5편 세미나강좌 후기(1)

<21장 이자낳는 자본>
평균이윤율은 이제 산업자본과 상업자본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래서 자본으로 전환되는 모든 화폐는 자신의 크기에 따라 일정하게 자기자신을 증식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화폐가 이윤을 생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화폐가 얻게 되는 새로운 사용가치이다.(407~8)

이자낳는 자본의 독특한 유통공식: M-M-C-M'-M'

자본은 생산과정이 끝나고 나면 생산자본의 형태를 벗어버리고 상품자본과 화폐자본으로 존재한다. 이 때 상품자본은 상품으로 기능할 뿐 '자본으로서의 상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단순한 상품과 구별되는 상품자본인 이유는 1)이미 잉여가치를 잉태하고 있고 그것의 가치실현이 이 잉여가치 실현이기 때문이고 2)상품으로서의 상품자본의 기능은 자본으로서의 상품자본의 재생산과정의 계기이기 때문이다.(413)

생산과정에서 자본이 자본으로 등장하는 것은 노동자의 자본가에 대한 종속과 잉여가치의 생산에 의한 것인데, 유통과정에서 자본이 자본으로 등장하는 것은 전체과정의 맥락 중에서이며 출발점이 복귀점으로 나타나는 맥락 즉 M-M' 또는 C-C'에서이다. 그런데 이 복귀점에서는 중간의 매개과정은 사라져 버린다.(413)

유통과정에서 자본은 타인에게는 자본으로 나타나지 않고 상품 또는 화폐로 나타날 뿐이며 자본가 자신에게는 상품 및 화폐가 가지는 관념적 관계 때문에 혹은 상품 또는 화폐가 재생산과정의 계기이기 때문에 자본이다. 자본이 현실적으로 운동하는 자본으로 존재하는 곳은 유통과정이 아니라 오직 생산과정(노동력의 착취과정)일 뿐이다.(414)

그런데 이자낳는 자본은 특수하다. 이자낳는 자본으로서의 화폐는 일정한 기간 뒤에는 출발점으로 복귀하되 실현된 자본으로 복귀한다는 조건 하에서 양도되는데, 이때 이 화폐는 양도하는 사람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잉여가치 또는 이윤을 창조하는 사용가치를 가진 가치로서 양도되기 때문이다.(415)

모든 대부자본은 그것의 형태가 어떻든, 그것의 상환이 그 사용가치의 성질에 의해 어떻게 변경되는 화폐자본의 특수한 형태에 불과하다. 화폐가 화폐자본으로 양도되는 경우 화폐는 어떤 중간매개항도 없는 화폐를 낳는 화폐로서 양도된다. 이로써 전체로서의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은 자기자신에 대한 관계로서, 즉 화폐의 성질이나 능력에 의한 화폐증식으로 나타난다.(416)

판매에서는 상품은 인도되지만 가치는 반환되며 구매에서는 화폐가 인도되지만 그 가치는 상품으로 반환된다.(417) 즉 교환에서는 물품들은 인도되지만 가치에서는 아무런 변동이 없다. 대부화폐자본가의 이자가 근거하는 것은 교환이 아니라 M-C-M'라는 총순환 중에서 창출된 잉여가치이다.(417)

자본을 대부자로부터 차입자에게 이전시키는 첫번째 행위는 법률상 거래일 뿐 자본의 현실적 재생산과정과는 관계가 없고 단지 그것을 준비할 따름이다. 여기서는 구매도, 판매도, 교환도 없고 등가의 이전도 소유권의 양도도 없다. 상환은 다시 차입자로부터 대부자에게 자본을 이전시키는 두 번째의 보충적 법률상거래이다. 이자낳는 자본에서 화폐의 자본가에게로의 복귀라는 자본일반의 특징적 운동은 피상적 형태를 취한다. 대부된 화폐가 자본으로서 현실적으로 운동하는 것은 대부자와 차입자 사이의 법률상 거래 외부에 있는 활동이다. 화폐의 자본가에게로의 복귀는 그래서 자본의 현실적 운동의 결과가 아니라 특수한 법률상 계약의 결과로 나타난다. 환류의 기간도 현실의 재생산의 기간이 아니라 법률상 계약에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다.이것은 인도와 상환만이 보일 뿐 자본의 현실적 재생산이 보이지 않는 현실적 자본의 불합리한 형태이다.(419-22)

인도-상환은 자본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제 자리에 갖다 놓으면서(반복) 그 크기를 불린다(차이). 이 과정의 반복에서 화폐의 대부는 화폐가 자본으로 사용되어 그 출발점으로 환류한다는 것을 전제로 형성한다.  즉 자본의 현실적 운동은 인도-상환이라는 법률상 거래의 전제로 된다.
 
화폐자본가가 대부기간중에 차입자인 생산자본가에게 양도하는 사용가치는 자본으로 기능할 수 있는(평균이윤을 낳을 수 있는) 화폐의 잠재력이다. 자본이라는 상품은, 사용가치가 소비되면 실체도 사라지고 가치도 사라지는 다른 상품과는 달리, 사용가치가 소비됨으로써 그것의 가치와 사용가치가 유지될 뿐만 아니라 증가된다는 특성을 갖고 있다(425).

대부자와 차입자 모두 동일한 화폐액을 자본으로 지출하지만 그것이 자본으로 기능하는 것은 차입자에서 뿐이다. 이 동일한 화폐액이 두 사람 모두에 대해 자본으로 기능하는 것은 이윤의 분할에 의해서만 가능한데 이 때 대부자에게 귀속하는 부분을 이자라고 한다.(427)

화폐 또는 상품이 그 자체로 잠재적 자본인 것은 노동력이 잠재적 자본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는 1)화폐가 생산요소로 전환될 수 있으며 화폐는 이 요소들의 추상적 표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노동력이 자본주의에서 상품으로 현존하는 한에서 부의 소재적 요소들이 잠재적 자본으로서의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430) 잠재적 자본인 한에서 화폐와 상품은 타인노동에 대한 지휘권이고 타인의 노동을 취득하는 청구권이며 자기를 증식시키는 가치를 대표한다(430).

이윤이 이자와 진정한 이윤으로 분할되는 것이 수요와 공급에 의해, 즉 경쟁에 의해 규제되는 한 자본은 상품인 것처럼 보이지만 일반 상품의 생산가격이 (그리고 임금도) 내재적 가치법칙에 따라 규제되고 경쟁은 괴리와 변동만을 규정할 뿐인 것과는 달리 이자율에는 경쟁에 의해 강제되는 분할법칙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자율에는 어떤 자연적 한계도 없고 본질적으로 자의적이고 무원칙적이다.(431)

<22장 이윤의 분할. 이자율. "자연적" 이자율>
평균이윤율은 이자의 최대한도를 규정한다. 이윤율의 수준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달에 반비례하기 때문에 이자율도 그러할 개연성이 있다. 이윤율의 변동 없이 이자율이 저하하는 것은 1)금리생활자계급의 증대 2)은행업의 발달로 사회모든 계급의 화폐적 저축이 화폐자본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고 이것을 산업가와 상인이 장악하게 되는 것.(438)

노동력과 자본의 질적 차이에서 임금과 잉여가치의 양적 분할이 발생한다. 잉여가치에서 지대와 이윤으로의 분할도 질적 차이(두 부문의 유기적 구성의 차이-아멜라노)에서 양적 분할의 차이가 나타난다. 하지만 이자의 경우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양적 분할로부터 질적 차이가 나타난다.(441)

일반이윤율이 자본의 투입과 철수에 의해 규정되는 균등화의 운동과 경향으로 나타남에 반해 시장이자율은 주어진 순간에는 고정적인 크기이다. 화폐시장에서 대부가능한 자본이 항상 총량으로서 기능자본과 대립하기 때문이다.443

일반적 이윤율은 총자본이 생산하는 잉여가치, 총자본의 가치에 대한 이 잉여가치의 비율, 경쟁에 의해 결정된다. 일반적 이윤율은 시장이자율과는 상이한 방식으로 결정되며 이자율처럼 쉽사리 알 수 있는 주어진 사실이 아니다.(444)

이자낳는 자본이 역사적으로 먼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승된 일반적 이자율이 존재하며 세계시장이 한 나라의 생산조건과는 독립적으로 이자율의 확정에 미치는 영향은 세계시장이 이윤율에 미치는 영향에 비해 훨씬 더 강력하다.(445)

화폐시장에서는 대부자와 차입자가 서로 상대할 분이다. 여기에서는 자본의 특수한 형태들이 소멸하고 독립된 가치인 화폐라는 무차별적 동질형태로 존재한다. 특수분야의 경쟁은 여기에 존재하지 않고 모든 분야들은 화폐의 차입자로 일관되어 있으며 자본은 모든 분야들에 대해 그 사용의 특수한 방식과는 관계없는 형태로 상대한다. 자본은 수요와 공급 모두에서 현실적으로 계급의 공동자산으로 등장한다. 산업자본은 특수한 분야들 사이의 운동과 경쟁에서 계급의 공동자산으로 등장하는데 화폐시장의 화폐자본은 현실적으로 공동적인 요소로서 사용방식과는 무관하게 상이한 분야의 자본가계급 사이에 분배된다는 형태를 취한다. 대공업이 발달하면 화폐자본은 개별자본가에 의해 대표되는 것이 아니라 집중되고 조직된 대량으로 등장하며 이 대량은 사회적 자본을 대표하는 은행업자의 통제하에 놓인다. 그리하여 수요의 형태에서는 한 계급 전체가 대부자본과 상대하고 있으며 공급에서는 총량으로서의 대부자본으로 나타난다. [오늘날 수요에서는 자본가계급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까지 대부자본과 상대하고 있다-아멜라노]

산업.상업자본가와 화폐부자본가의 분할, 기능자본가와 대부자본가의 분할로 인해 이제 이자는 자본소유자의 단순한 과실로 나타나고 기업가이득은 기업가가 자본을 가지고 수행하는 기능의 배타적인 과실로 나타난다. 이렇게 총이윤의 두 부분들이 상이한 원천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처럼 자립화하여 화석화되면 이것은 자본가계급 전체와 자본 전체에도 확산되어 고정관념으로 된다. 그래서 자기자본으로 사업을 하는 자본가도 자기의 총이윤을 이자와 기업가이득으로 나누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양적 분할이 질적 분할로 전화하는 방식이다. 소유하고 있는 자본과 생산과정 안에 있는 자본의 분열.(454~5)

질적으로 이자는 재생산과정 외부에서 낳는 잉여가치로 나타나고 양적으로 이자율은 이윤율에 의존함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으로 결정되고 주어진 크기로서 나타난다. 총자본은 화폐로서 존재하는 상대적으로 작은 부분을 제외하면 생산수단의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생산수단을 구매하여 가치증식시키는 사람들이 없이 총자본이 화폐자본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생각은 불합리하다. 이것은 잉여가치 없이 이자가 생길 수 있다거나 자본주의적 생산 없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진행될 수 있다는 식의 불합리이다. [금융화된 현대자본주의에서 거대한 이자의 창출은 생산수단을 구매하여 가치증식을 시키는 사람들의 거대한 수가 없다면 고려하기 어렵다. 이에는 1)전통적 가치생산 과정의 양적 확산 2)전통적 생산과정이 거대한 부불노동을 간접적으로 동원하는 것(여성, 노인, 아이, 그리고 다양한 유형의 외부효과) 3)자연자원의 사유화 4)소규모 자영노동, 즉 노동자 기업들의 증가...아멜라노](458)

이자와 기업가이득은 대립물로 존재한다. 이자는 현실의 생산과정에서 생산수단의 형태를 취하는 가치일반이 살아있는 노동력과 대립하여 부불노동을 취득하는 수단이 된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그런데 이자낳는 자본은 임금노동과 대립하지는 않으며 기능하는 자본가와 대립한다.[오늘날 이자낳는 자본은 노동계급과도 대립하고 있다. 노동계급은 1)지대수령노동자의 경우 잉여가치로부터 분유받은 부분 2)임금생활노동자의 경우 임금소득의 일부 3)비임금노동자의 경우 타인의 잉여가치나 임금 등의 일부를 이자로 주어야 한다. 1)의 경우 이자는 노동계급의 비임금소득과 대립하며 2)의 경우는 그러한 대립은 없다 3)의 경우는 양자가 뒤섞인다-아멜라노] 기능자본가는 한가롭지 않고 착취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기업가이득은 마치 비소유자로서의 즉 노동자로서의 자기의 기능의 결과처럼 나타난다.461

생산과정은 자본과 분리되면 노동과정 일반이 된다. 자본소유자와 구별되는 기능자본가는 기능하는 자본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본과는 관계 없는 기능자, 노동자로서 더욱이  임금노동자로서 나타난다(464) 착취하는 노동이 착취되는 노동과 동일한 노동으로 나타나게 되면(감독임금) 자본의 사회적 형태는 이자에서 나타나고 자본의 경제적 기능은 기업가이득으로 나타나며 전자에서는 자본의 사회적 형태가 중심적이고 무차별적으로 표현되는 반면 후자에서는 자본의 경제적 기능이 특수한 자본주의적 성격을 상실한다(465).

감독과 관리 노동은 직접적 생산과정이 사회적 으로 결합된 과정의 형태를 취하는 곳에서는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이 노동은 이중적이다. 1)다수의 개인들이 협력하는 모든 노동에서는 과정의 관련과 통일은 하나의 지휘의지에 맡겨지며 부분노동들이 전체활동을 담당하는 기능들에 맡겨진다. 2)또 감독노동은 노동자와 소유자 사이의 대립에 바탕을 둔 모든 생산양식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자본과 노동 사이의 적대를 관리하는 것이 그것이다.467

협동조합공장은 자본가가 생산에서 기능자로서 불필요하게 된 것을 증명하고 있는데 이는 자본가 자신이 대토지소유자를 불필요한 존재로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470). 자본가가 수행하고 있는 노동은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로 또 자본의 소멸과 더불어 소멸하지도 않는다. 자본가의 노동은 1)적대의 관리 2)생산의 공통화라는 두 기능을 수행하는 바 전자는 자본관계의 소멸과 더불어 사라지더라도 후자는 남는다. 그것은 사회적 노동이라는 노동형태에서 발생하며 공동의 결과를 달성하기 위한 다수인의 결합과 협업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이 역할과 자본가의 소득은 동일시될 수 없다. 실제로 이것은 훨씬 낮은 수준으로 관리인에게 전가될 수 있는 것이다.471 관리인의 임금은 기타 노동자의 임금과 마찬가지로 투하된 가변자본의 일부를 형성한다.472 주식회사에서 현실적인 관리인의 상부에 등장하는 이사진과 감사진은 주주들을 약탈하여 치부하는 역할만을 한다.473

이자낳는 자본의 형태인 M-M'에서는 사회적 관계가 하나의 물건-즉 화폐-의 자기자신에 대한 관계로 완성된다. 여기서 자본의 물신적 형태와 자본물신의 관념이 완성된다. 여기서 우리는 화폐나 상품이 재생산과 상관없이 자기자신을 가치증식하는 능력을 갖는 것을 본다.자본의 재생산과정에서 화폐는 통과국면이지만 화폐시장에서 자본은 독립적인 교환가치인 이 화폐형태로 존재한다. 이자낳는 자본은 생산될 수 있는 모든 부의 소유를 요구한다. 자본은 몰로크이다.(483)

1)기존자본의 대부분은 재생산과정의 진행중에서 부단히 감가한다. 왜냐하면 상품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것의 생산에 시초로 든 노동시간이 아니라 그것의 재생산에 드는 노동시간이며 이 후자는 사회적 노동생산력의 발달에 따라 끊임없이 감소하기 때문이다. 2)또 이윤율은 자본축적의 증대와 사회적 노동생산력의 증대에 따라 저하한다. 이리하여 얼마 안가서는 노동시간 전체가 자본에 의해 취득된다하더라도 동일한 이윤율의 유지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3)또 자본축적은 총노동일, 생산력과 인구의 그때그때의 발전수준에 따라 질적으로 한계지워진다. 그런데 잉여가치가 이자라는 무개념적 형태로 파악되면 그 한계는 다만 양적인 것이며 모든 공상이 가능하게 된다(484-5)

자본관계 안에서만 과거노동의 생산물이 살아있는 노동을 지배할 수 있다. 그런데 이자 관념에서는 과거노동의 생산물은 그 자체로 현재 또는 미래의 잉여노동의 일부를 잉태하는 것으로 간주된다.(485)









2010/08/17 08:02 2010/08/17 08:02
서강대 다산관에서 2010년 8월 16일 금요일 오전 11에 열린 '대항지식의 구성' 토론회에 바친 토론문(원문)이다. 촛불과 대항지식의 문제에 대해 유익한 토론과 배움을 나누었던 발표자를 비롯한 참가자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아멜라노


다중지성 시대의 대항지식의 문제
-「미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운동에서의 전문가들의 혼성적 연대와 대항논리의 전개」(김종영) 토론문

필자의 이 논문은 촛불운동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국가 편에 선 이른바 '왕립' 지식인들과 관료주의적 전문가독재에 맞서 다중(이 글에서는 시민으로 표현되어 있다)의 입장을 옹호하려는 대항지식인과 대항지식이 어떻게 발생되고 구축되고 전개되었는지를 촛불참가 전문가들에 대한 심층면접 방법으로 탐구하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광우병에 대한 과학지식이 촛불운동의 구성적 힘이었을 뿐만 아니라 촛불운동의 중심에 지식투쟁이 놓여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촛불운동은 전문지식의 대항정치화대안전문지식의 탄생을 보여주며 이 운동을 통해 권력과 (중립의 외관을 지닌) 전문지식이 결합된 전문가체계[정부-전문가 집단]의 권위를 침식하며 대안지식인 집단으로서의 전문가-운동가 그룹의 등장을 가져왔다고 평가한다. 또 필자는 촛불운동에서의 다양한 전문가 집단들의 활동상과 광우병을 둘러싼 과학적 정치적 법률적 통상적 논쟁에서 그들 사이의 혼성적 연대의 형성 과정을 세밀하게 추적하여 대항지식의 구축에 실재하는 탈경계 현상을 밝힌다. 끝으로 필자는 촛불운동이 전문가와 시민의 혼성을 가져왔고 전문가로 하여금 전문지식에서의 시민지향성을 강화할 필요성을 각성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분석한다.

이 논문은 지금까지 촛불운동 평가에서 상대적으로 등한시되었던[초기 촛불운동의 전개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2008년 5월~6월 사이에 대항적 전문지식인은 촛불운동의 권위적 요소로 기능했다] 촛불운동 속에서 대항적 전문지식인의 형성과 혼성 및 연대(집단화)라는 요소를 규명한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촛불운동 속에서 지식투쟁의 중요한 역할을 강조하고 대항적 전문지식인 사이 및 대항지식(인)과 다중 사이의 혼성화를 규명한 이 작업은 촛불을 광기/괴담의 집단화로 읽은 우익보수주의적 평가나 촛불을 판타스마고리아(환상)에 사로잡힌 산보자 운동으로 평가한 진보일각의 냉소주의적 평가, 그리고 촛불을 쁘띠부르주아에 기반한 파시즘적 애국주의 대중운동으로 읽은 좌파 일각의 시각 등의 문제점을 밝히고 교정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미네르바의 촛불』(갈무리, 2009)에서 촛불운동을 다중의 새로운 유형의 혁명운동으로 규정하고 촛불과 지성(즉 미네르바)의 혼종의 문제를 강조한 바 있는데, 문제의식의 수준에서 필자의 작업이 나의 작업과 일맥상통하고 또 서로를 보완하는 점이 있다고 느낀다. 나의 관점에서 촛불은 다중지성 시대의 도래를 돌이킬 수 없이 선언한 역사적 사건이다. 그래서 이하에서 나는 다중지성의 관점에서 '전문지식인의 대항지식인화와 대항지식집단의 형성과 구축'이라는 필자의 문제설정을 어떻게 사유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맥락에서 두 가지 토론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1. 다중지성 형성에서 대항지식의 위치
2008년 촛불봉기는 고등학생 안단테에 의해 제안된 이명박탄핵 인터넷 서명에서 발화되었고 청소년들이 광범위하게 참가한 청계천 집회(5월 2일)를 통해 기폭되었다는 점, 다중이 1500여개 단체로 뒤늦게 구성된 (5월 6일)광우병 대책회의의 지도를 흘러넘쳐 광범한 와일드캣 시위를 조직했다는 점, 이 흘러넘침 현상이 아고라로 집결되었던 무수한 인터넷 커뮤니티들 및 블로그들의 지적 정치적 연결망에 의해 이끌렸다는 점에서 주목되었다. 전통적 관점에서 지성적이라고 평가되기 어려우며 조직적으로 통제되지 않고 분명한 정치적 목적의식성을 보여주지 않는 촛불봉기의 이러한 특성들에 관해 대립적인 해석이 출현했다. 나는 이것이 노동계급이나 민중 혹은 시민이나 대중과는 다른 새로운 사회적 주체성인 다중 및 다중지성에 의한 삶정치적 운동의 등장이라고 읽었고( 『미네르바의 촛불』 참조) 이것은 촛불 과정에서 전개된 지식인 사회 일각 및 일부 언론(한겨레와 경향신문)의 집단지성론과 부분적으로 공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처음부터 거센 역풍에 직면했는데 그것은 촛불다중을 지성이 아니라 광기에 이끌리는 괴담집단으로 몰아붙이는 정부와 조중동(특히 조선일보)에 의해 이루어졌다. 또 이 해석은 좌파 전위의 목적의식적 지도를 강조하는 일부 정파와 지식인들에 의해 위험한 성격의 소시민적 애국주의 운동이자 파시즘적 대중운동으로 평가절하되었다. 이후에 이것은 촛불대중은 환상을 쫓는 산보자 운동이었고 아무 것도 달성하지 못한 유령운동이었다는 냉소주의적 해석으로 이어졌다. 나는 이것이 좌우파의 전통적 제도지식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촛불에 대한 평가방식이었다고 이해하며 오늘날 인문학 위기론과 고전부흥론과 연결되는 지적 흐름이라고 이해한다. 그런데 김종영 교수의 글은 다중지성론에 입각한 해석(의 한계)을 비판하고자 하는 유사한 목적을 갖고 있으면서도 지금까지의 흐름과는 달리 전문지식인의 대항지식 구축을 주목하면서 광우병에 대한 전문지식인의 과학지식이 촛불운동의 구성적 힘이었다는 사실을 규명하는 전혀 다른 방법론을 취한다. 대학과 연구기관의 기업논리에의 철저한 종속, 정당과 노조와 같은 기존 조직들의 부패라는 조건 속에서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지성공간의 창출과 과학기술로 무장한 비제도적 지성주체들의 대두를 광기와 환상에 사로잡힌 우중의 출현으로 평가하는 데에서 기존의 좌파와 우파가 동맹하는 이 신보수주의적 평가흐름의 반동성을 고려할 때, 필자의 방법은 전진적이다. 왜냐하면 필자는 전문지식인의 대항지식인화의 실체성을 규명함으로써 필자가 (송기호 변호사의 말을 빌어) 전문가독재라고 묘사한 전문가체제 내부의 균열을 드러내고 이 균열의 심화와 전문가독재에 대항하는 새로운 전문지식인 집단의 형성을 촛불운동의 효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필자가 대항지식인으로 묘사한 과학, 통상, 법률, 인권 전문가들이 촛불운동에 미친 구성적 힘을 인정한다. 실제로 초기 촛불운동에서 과학자들과 통상전문가들은 촛불운동에 커다란 정당성을 부여했고 권력논리에 대한 반박력을 제공했다. 치안의 반격이 본격화된 5월 말 이후 오랫동안 (아니 지금까지) 인권 및 법률 전문가들은 방어의 논리와 실제를 제공함으로써 공포심을 극복하고 좀더 적극적으로 투쟁에 나설 수 있도록 운동을 도왔다. 그러나 이 힘이 촛불운동을 발생시키거나 추동하거나 이끈 주도적 힘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전문지식인의 대항지식인화를, 촛불사건에서 나타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특이화 및 변신 현상들의 하나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촛불봉기에서 전문지식인의 대항지식인화만이 아니라 학생들의 탈학교화, 주부들의 투사화, 시장포섭 집단의 탈시장화[쌍코, 화장빨 등], 예비군의 탈국가화, 지식의 탈제도화[미네르바], 정치의 탈정당화[아고라, 안티MB 등등], 거리와 도로와 광장의 교실화, 예술의 탈제도화와 집체극화와 같은 무수한 사건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발표문이 세밀한 터치로 그리고 있는 전문지식의 대항논리화는 권력과 결탁한 지식의 무기력을 극복하고 지식이 다중의 삶, 다중의 지성, 다중의 운동과의 연대를 통해 그 잠재력과 생명력을 회복하는 과정에 대한 예민한 서술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필자와의 면접에서 송기호 변호사가 한 다음 말은 지극히 인상적인 것으로 된다.

전문가가 시민을 압도하는 게 아니라 시민이 결정을 하고, 시민이 선택을 하되, 시민이 정말 필요해서 물어보는 하나의 어떤 조언이나 자문 정도 해주는, 그런 전문가들이 있는 그런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런 게 더 나은거다 라고 생각해요...(중략)... 촛불사태는 그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먹느냐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문제들이 전문가들이 그냥 자기 책상, 자기 실험실에서 이걸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그런 영역이 아니에요. 많은 사람들의 기본적인 삶조차, 제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전문가 독재에 의해서 좌우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건이겠지요.(27~8쪽)

2. 탈경계를 넘어 공통되기로

다중지성은 광의의 집단지성이지만 그것이 협의의 지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집단지성은 지성들의 집합화에 강조점을 둔 개념화이지만 다중지성은 다중이라는 몸을 중심에 놓고 지성의 문제를 개념화한 것이며 여기에는 지식이나 정보뿐만 아니라 정서들, 소통들 역시 중요한 요소로 취급된다. 다시 말해 정서와 소통이 지성적 현상으로 취급된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으로부터의 불안을 통한 연대는 집단지성인가 집단감성인가?'(3쪽)라는 문제는 다중지성 개념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이 글의 또 하나의 주요 논점은 정체성과 경계에 관한 것이다. 필자는 촛불운동을 전문가/시민, 운동/비운동, 온라인/오프라인, 로칼/내셔널/글로벌, 자연과학/사회과학/정책의 경계를 뛰어 넘는 탈경계운동으로 해석하면서 지식생산의 탈경계성을 그것의 일부로 파악했다. 이 탈경계화는 전문지식인 사이, 대항정치화하는 전문지식인과 시민 사이의 혼성적 연대를 주요한 특징으로 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탈경계성이 촛불운동의 주요한 특징이었다는 필자의 생각에 나는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촛불운동은 어디까지가 운동이고 어디부터가 놀이인지 식별하기 어려웠고(닭장투어) 누가 주체이고 누가 구경꾼인지 구별되지 않았으며(조사와 재판에서 많은 연행자들은 '나는 구경하다 잡혀왔기 때문에 억울하다'고 진술했다), 누구의 말이 참이고 누구의 말이 거짓인지 식별하기 어려웠고(알바), 누가 애국자이고 누가 매국노인지(촛불은 국익을 해진다와 이명박은 친일 매국노다 사이), 어떤 커뮤니티가 진정성을 갖는 운동집단이지도 식별하기 어려웠다(쌍코와 사노련 사이).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전문대 출신의 이른바 '백수'인 젊은이를 국민의 경제학 스승으로 칭송하는 사건도 이 탈경계화의 한 사례일 것이다. 노동자와 민중의 정치적 선진부대를 자임했던 진보정당은 촛불운동에서 캠코더와 컴퓨터와 마이크를 들고 집회와 가투를 취재하고 중계하는 역할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시간이 있다면 얼마든지 더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탈경계화는 기존 정체성의 해체를 수반하지 않을 수 없다. 탈경계화는 정체성에서 출발하지만 정체성으로 귀착되지 않는 것일 때 실제적 유효성을, 새로운 세계의 열림을 가져올 수 있다. 만약 탈경계화가 정체성의 해체를 겪지만 다시 정체성으로 귀환한다면 그것의 실효성은 반감되며 세계는 다시 닫힌다. 녹았던 얼음이 다시 얼어붙는 것과 같은 재영토화 현상이 그것이다. 분명히 필자의 이성적 전망은 탈경계화에 가 있다. 하지만 논문의 실제 전개에서 전문지식인의 탈정체화와 탈경계화는 대항지식인화라는 재정체화의 수준에 머무른다.  지식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집단적 차원에서 공고히 유지된다. 전문지식인 집단만을 염두에 둔다면 이것은 필자의 한계라기보다 현실 그 자체의 사실적 한계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시야의 이러한 제한은 이른바 '지식계' 외부에서의 지성활동을 유의미하게 취급할 수 있는 여지를 그만큼 삭감한다. 주로 아고라에 집결되었고 매일 수만회의 조회수를 보였던 제도화되지 않은 혹은 제도를 넘은 지식인들의 지적 활동(그것은 과학, 정치학, 전술론, 조직론, 역사학 등에 걸쳐 실로 광범한 것이었다)은 필자의 대항지식 개념에서 배제된다. 나는 앞에서 전문지식인의 대항지식인화를 다중지성화의 한 현상, 하나의 지적 탈주선으로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여기서는 촛불봉기 과정에서 나타난 광범위한 비제도적 대항지성이 다중지성화의 또 다른 하나의 선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이 다중의 지성화는 물론 제도적 지성, 전문지식인과는 전혀 무관한 곳에서 생성된 것이아니다. 다중에 의한 제도지식 및 전문지식의 비판적 흡수는 다중지성 형성의 중요한 원천이다. 하지만 오늘날 지식제도 외부에서 사람들은 매일매일 지적으로 단련되고 있다. 지식, 정보, 소통, 정서의 생산이 노동으로 매일매일 강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다중들은 일상적으로 지성인이기를 강요받는다. 기존 제도 속의 지식인은 신분적 안정이 주어지는 시기에 지적활동을 완화하거나 심지어 중단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다중들은 오히려 모든 분야의 지식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창의적인 지성주체로 되도록 기업에서 공장에서 가정에서 훈련받는 경향이 있다. 만약 우리가 촛불운동에서의 지성 문제를 이념형적으로 서술한다면 전문지성과 대중지성의 다중지성으로의 정치적 합류 혹은 그것들 사이의 공통평면의 발견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경계화라는 부정의 현상 속에서 공통되기라는 긍정의 현상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탈경계화로서의 대항지식화는 다중지성으로의 합류와 공통되기 속에서 재정체화의 위험을 벗어날 수 있다. 그것이 대항지식인 집단이라는 재정체화에 머무를 때, 그래서 공통되기보다 재정체화로 귀착될 때 문제는 제기되지는 해법은 찾아지지 않는다. 정체성에서의 벗어남은 공통되기의 영구운동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없는가라는 도전에 직면하며 이것을 실현하지 못할 때 그것은 네거티브의 일시성을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촛불의 전개과정에서 전문지식인의 대항지식이 다중지성으로 합류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면서 실제로 촛불운동 발전의 장애물로 전환되는 한 순간을 본다. 촛불운동은 미국산 수입소의 광우병 위험 문제에서 시작되었지만 그것에 문제의 본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생명권력과 민주주의, 신자유주의적 일방주의, 교육과 물, 건강의 사유화 등 현대 사회의 모든 문제들이 '광우병' 사태 속에 응결되어 있었고 그 문제들이 터져나오면서 확대되는것은 필연적이었다. 이른바 의제확장과 투쟁수위고조가 긴급해지고 있던 시기에 광우병 전문 과학자들과 통상전문가들은 쟁점을 광우병/굴욕외교 등의 협소한 쟁점에 계속 묶는 힘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청계천과 시청에서 다중들이 전문가들을 내세운 집회/시위의 교실화-토론장화에 반기를 들고 가두로 나가려고 했던 것은 이 긴장이 폭발해 나오는 모습이었다. 6월의 슬로건이 고시철회와 독재타도로 양분되기 시작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2010/08/15 13:14 2010/08/15 13:14
<프레시안>은 최근 남북의 긴장 강화에 대한 <르몽드>의 관점( http://www.lemonde.fr/cgi-bin/ACHATS/acheter.cgi?offre=ARCHIVES&type_item=ART_ARCH_30J&objet_id=1132051 )을 보도했다. 그것은, 최근의 남북간 긴장 고조가 미중 간의 경쟁의 국지적 표현이며 한미일 대 중국의 적대감이 군사적 정치적으로 표현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며칠 전에 나는 트위터를 통해 "남태평양 지역과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미국과 중국의 패권 투쟁이 향후 어떻게 발전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 모두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사안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말했고, 또 천안함 사태 직후에 역시 트위터를 통해 "전쟁을 원하는 것이 김정일인지 이명박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그러나 중국보다는 미국이 더 전쟁을 원한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런데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다중들 누구도 미중의 대리전이 될 남북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 기사는 나의 생각과 공명하는 것이다. 여기에 그 전문을 인용한다.

프랑스 일간 르몽드는 11일 최근 고조되고 있는 남-북한간 긴장의 배경에는 미국과 중국간 경쟁이 자리잡고 있다고 보도했다. 르몽드는 이날짜 5면 머리기사에서 지난 5일부터 10일까지 서해에서 실시된 한국의 잠수함-어뢰 탐지 및 NLL 침범 대비 대함사격 훈련 내용과 대승호 나포사건, 천안함 사건 등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이같이 전했다. 이 신문은 한국의 기동훈련에 미국이 합류하면서 규모가 확대되자 중국이 자국 해안 인근에서 벌어지는 군사훈련에 맹렬히 반발, 결국 훈련의 대부분은 동해에서 실시됐다고 말했다. 대신 한국은 천안함 침몰 해역에서 전군 합동으로 해상 기동훈련을 실시함으로써 북한에 "경고"가 되기를 희망했다고 이 신문은 분석했다. 르몽드는 이러한 남북한간 적대 관계는 서해와 남중국해의 패권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미국 및 그 동맹인 일본.한국 등 3개 동맹국과 중국간의 적대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말하고 그래서 중국은 이들 2개 해역이 중대 안보이익이라는 점을 재확인하기 위해 해역내 방어훈련을 발표했었다고 전했다. 중국인들에게 있어 남중국해와 서해는 지중해가 고대 그리스.로마인들의 '마레 노스트룸(mare nostrum, 우리 바다)'였던 것처럼 자신들의 바다로 인식되고 있으며 따라서 미국의 '개입'을 눈살을 찌푸리며 바라보는 것이라고 이 신문은 덧붙였다. 르몽드는 이 기사에서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면서 괄호 속에 동해를 병기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100812110415&section=05)

참고자료
http://www.lemonde.fr/asie-pacifique/article/2010/05/20/l-enquete-sur-le-naufrage-d-un-navire-sud-coreen-ravive-les-tensions-entre-les-deux-corees_1360222_3216.html
http://www.diploweb.com/forum/uechine06095.htm
http://www.wsws.org/francais/News/2010/mar2010/usch-m23.shtml

2010/08/15 11:41 2010/08/15 11:41

권력의 정치, 삶정치

Posted at 2010/08/12 07:49// Posted in 쓰기(skribi)/단문_F
최장집은 '권력의 정치'를 '현실의 정치'라 부르고 '삶의 정치'를 '이상의 정치'라 부르는 개념조작을 통해 맑스를 그가 상상한 실패세계로 추방한다. 그는 맑스가 충분히 읽혔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정말로 그가 맑스를 얼마나 읽었을까? 그가 과연 『자본론』을 읽으면서 그것을 진지하게 검토한 적이 있을까? 그가 프랑스 3부작을 진지하게 읽은 적이 있을까? 만약 그런 이후에도 위와 같은 결론을 이끌어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떤 사회적 입장과 정치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일까? 최장집은 이론이 권력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면서 실제로는 이론을 권력의 시녀로 만든다. 삶의 친구가 되기보다 권력의 시녀가 되는데 성공하는 이론이야말로 완벽하게 실패하는 이론, 존재가치를 상실하는 이론이 아닐까?. 참조기사: http://is.gd/edBib
2010/08/12 07:49 2010/08/12 07:49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과 위기론까지 서술한 이후에 맑스는 자본 내부의 분업 문제를 다룬다. 상인자본(상품거래자본과 화폐거래자본), 은행자본, 토지자본 이 앞으로 차례로 논의될 것이다. 그리고 이 분업으로 인한 평균이윤율의 수정에 대해 다룰 것이다.

1. 노동의 분업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본간에도 분업이 있다. 생산자본과 유통자본간의 분업이 그것이다. 유통자본 중에서 오직 유통영역에만 머무르는 자본을 상품거래자본(상업자본)이라고 부르며 화폐거래를 담당하는 자본을 화폐거래자본이라고 부른다. 상품거래자본과 화폐거래자본을 합쳐 상인자본으로 부른다. 순수한 상업자본은은 상품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필요한 자본으로 유통과정 중에서도 계속될 수 있는 생산과정(발송, 운수, 보관 등)은 제외된다.

2. 상업자본은 산업자본의 순환의 마지막 국면인 C'-M'를 M-C-M' 과정을 통해 매개한다.(3/325) 이 매개역할의 분업화는 1)유통영역에 머무르는 자본규모를 줄일 수 있게 하고 2)상품의 화폐로의 변태를 빠르게 만들며 3)하나의 자본이 아닌 다수자본의 회전을 대표할 수 있게 한다.(3/331)

3. 상인에 의해 투하된 화폐자본의 유통속도는 1)생산과정이 갱신되는 속도와 상이한 생산과정들이 결합되는 속도 그리고 2)소비의 속도에 의존한다(3/333) 유통에 머무는 자본의 규모는 재생산과정이 빠를수록,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기능이 발달할수록(신용제도가 발달될수록) 더 작아진다.(3/335)

4. 상업자본은 직접적으로 가치나 잉여가치를 결코 생산하지 않지만 그것과 무관하지는 않다. "상업자본이 유통기간의 단축에 기여하는 한, 상업자본은 산업자본가가 생산하는 잉여가치의 증대간접적으로 공헌한다. 상업자본이 시장의 확대에 기여하고 자본들 사이의 분업을 촉직하며 이리하여 자본으로 하여금 보다 큰 규모로 활동할 수 있게 하는 한, 상업자본의 기능은 산업자본의 생산력과 축적을 촉진한다. 상업자본이 유통기간을 단축시키는 한, 상업자본은 투하자본에 대한 잉여가치 비율-즉 이윤율-을 상승시킨다. 그리고 상업자본이 자본의 보다 작은 부분을 화폐자본으로서 유통영역에 처박아 두는 한, 상업자본은 자본 중 생산에 직접적으로 사용되는 부분을 증대시킨다."(3/336~7) 상업자본은 자본간 분업을 통해 잉여가치를 증대시키고, 산업자본의 생산력과 축적을 촉진하여, 이윤율을 상승시키고 생산적 자본의 규모를 증대시키는 것이다. 요컨대 상업자본 형태의 존재는 총자본이 직면하는 유통이라는 한계를 돌파하고 축적을 촉진하며 이윤율의 저하를 억제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자본의 사회주의는 자본간 분업을 필수적인 요소로 요청한다.

5. 상업자본은 가치도 잉여가치도 창조하지 않고 다만 그것들의 실현을 매개하며 상품들의 현실적 교환,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의 상품의 이전, 사회의 신진대사를 매개한다. 그래서 상업이윤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6.산업자본가의 두뇌에 이윤은 생산가격과 비용가격의 차이에서 나오는 것처럼 인식되듯이 상인의 두뇌에서 상업이윤은 판매가격과 구매가격의 차이로 나타난다. 그래서 가치 이상의 판매가 상업이윤처럼 인식되는 것이다.

7.상업이윤은 잉여가치 창조에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평균이윤율의 형성과 이윤의 분배에는 참가한다는 사실에서 나온다.(3/342) 상업자본이 평균이윤을 분배받는 방식은 상품을 산업자본가로부터 생산가격 이하로 구매하여 생산가격(혹은 시장가격)으로 판매하는 것이다. 즉 총상품자본의 진정한 생산가격은 k+p+m(상업이윤)이고 산업자본의 생산가격은 k+p이며 이 양자의 차이가 상업이윤이 된다. 상업자본의 평균이윤율 형성 및 이윤 분배에의 참여로 인해 총자본의 이윤율은 하락한다. 유통과정에서 상인의 판매가격이 구매가격보다 높게 될 수 있는 것은 판매가격이 총가치를 초과하기 때문이 아니라 구매가격이 총가치 이하이기 때문이다.(3/343~4)

8. 상업자본이 투하하는 가변자본 혹은 상업자본가가 고용하는 상업노동자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상업노동자는 임금노동자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상인의 가변자본에 의해 그 노동력이 구매되며 소득으로 지출되는 화폐에 의해 구매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둘째로 그의 노동력의 가치가 노동생산물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노동력의 재생산비에 의해 규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상업노동자는 잉여가치를 창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산업노동자와 다르다. 상업자본가도 산업노동자의 부불노동으로부터 이윤을 취하는데 산업자본처럼 직접 부불노동을 취득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자본으로부터 이 부불노동의 일부를 자기에게로 이전시킨다(구매시에 부불노동의 전부를 산업자본에게 지불하지 않고 판매시에 부불노동의 전부에 대해 지불받는 방식으로).(3/352)

9.상업노동자는 직접 잉여가치 창출에 참여하지 않지만 그의 부불노동은 매매에 참가할 수 있는 자본규모를 크게 만듦으로써 상업자본으로 하여금 더 많은 이윤을 분배받을 수 있게 하는데 이 점에서만 이윤의 원천이다.

10. 잘 조직된 상업은 노동시간을 크게 절약하며 도매업에 고용되는 노동자의 수는 영업규모에 비례하지 않는다. 상업에서 일찍 집적이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상업에 고용되는 노동자의 임금(가변자본)은 산업자본이 유통까지 직접 담당할 때보다 더 적은 자본으로, 더 빠른 회전을, 더 많은 개별자본에 대해 수행함으로써 발생하는 이윤율 하락폭의 축소에서 발생하는 이윤몫의 증대에 기초한다. 상업노동자가 자본가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직접적으로 창조한 잉여가치가 아니라 그의 노동(일부는 부불노동)에 의해 잉여가치의 실현비용을 경감시키는 것이다.(3/361) 상업노동의 숙련노동에서 단순노동으로 전화하는 경향이 있고 점점 공급이 과잉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잉여가치 증가의 결과이지 그 원인 아니다.(3/361)

<회전>
11. 상업자본은 생산자본의 유통기간을 단축시킴으로써 생산자본의 회전을 촉진한다.(3/365) 상업자본은 내적으로는 산업자본의 운동이며서 일정한 범위에서는 재생산과정의 한계들과 독립하여 운동하고 이 재생산과정을 그 한계 너머로까지 추진시킨다. 내적 의존성과 외적 독립성으로 인하여 도매업과 은행이 공황의 폭발장소가 된다.(3/366)

12. 상업에서의 경쟁, 생산가격의 하락으로 판매가격이 하락하고 이것이 수요를 공급보다 빠르게 증대시켜 시장가격을 상승시킴으로써 평균이윤 이상의 이윤을 올릴 수 있는 가능성, 빠른 회전(상업자본의 회전기간 단축은 이윤율 상승[=실제로는 하락 축소]을 가져온다)을 위해 상인이 판매가격을 인하할 수 있는 가능성 등이 상업이윤에 대한 그릇된 상을 제공한다(3/369). 상인이나 주식거래인이나 은행가의 관념은 필연적으로 완전히 전도되어 있다(3/375). 눈에 보이는 현상적인 운동을 진정한 내적 운동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과학의 임무의 하나이다(3/375).

13. 경쟁은 기껏해야 일반적 이윤율을 하나의 수준으로 귀착시킬 수 있을 뿐이다. 이 수준을 결정할 수 있는 요소는 경쟁 속에는 없다.(3/376). 회전수가 펴균보다 많은 상업자본은 초과이윤을 획득할 수 있다. 만약 빠른 회전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이 구매될 수 있는 것(상점의 위치)이라면 임대료의 형태(지대)로 그 일부를 주어야 할 것이다.(377)

14.[화폐거래자본] 유통과정에서 화폐가 수행하는 순수 기술적 운동이 어떤 특수한 자본의 기능으로 자립화한 것이 화폐거래자본이다. 산업자본의 일부 혹은 상업자본의 일부는 끊임없이 화폐형태로 존재하면서 산업자본가와 상업자본가 전체계급을 위해 전체 자본의 재생산을 위한 화폐의 지불과 수납, 차액의 결제, 당좌계정의 기장, 화폐의 보관 등등.(380~1)의 화폐관련 기술적 업무를 담당한다.

15. 화폐가 공동체 사이의 교환에서 발달하듯이 화폐거래업도 국제무역에서 발달한다. 화폐거래업은 퇴장화폐를 최소한도로 축소할 수 있는 기술적 수단을 제공한다. M-M'의 변태를 밟는 화폐거래업의 이윤은 잉여가치로부터의 공제이다.

16.[상인자본의 역사적 고찰] 상업자본의 발달은 하나의 생산양식에서 다른 생산양식으로의 이행을 설명할 수 있는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낡은 생산양식 대신 어떤 새로운 생산양식이 나타날 것인가는상업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생산양식 그것의 성격에 의해 결정된다(3/308). 상업자본의 발전이 봉건제에서 자본제로의 이행을 촉진한 계기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새로운 생산양식의 1세대인 매뉴팩처는 이것을 위한 조건들이 중세어 창조되었던 곳에서만 발달했다. 이행은 1)상인이 산업가로 되거나 2)상인이 소장인들을 고용하거나 3)산업가가 상인으로 되어 직접 상업을 위해 대규모 생산을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2010/08/10 06:05 2010/08/10 06:05

행위와 노동

Posted at 2010/08/09 11:04// Posted in 쓰기(skribi)/철학_F
1. 초기 맑스는 사적 소유에 의해 조성되는 삶활동성의 노동으로의 변형이 소외의 원천이라고 보았다. 중기 이후 맑스는 이 문제의식을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노동력의 상품화에 기초한 자본관계의 발전, 그리고 화폐의 발전에 의한 물신주의의 문제로 발전시킨다.
2. 한나 아렌트는 생명유지적 활동인 노동, 사물세계를 창조하는 활동인 작업, 관계세계를 창출하는 활동인 행위를 활동적 삶의 세 유형으로 분류했고 행위의 노동으로의 환원을 자기시대의 중요한 문제로 설정했다.
3. 존 홀로웨이1행위의 노동으로의 환원을 자본주의의 근본문제로 설정함으로써 아렌트와 유사한 관점을 보이지만 아렌트와 같은 유형론은 없다. 홀러웨이는 모든 것은 행위이며 행위가 어떻게 역사적으로 구속되는가를 분석하는 입장을 취한다.
4. 안또니오 네그리와 빠올로 비르노2는 근대 자본주의에서 행위로부터 분리되었던 노동이 비물질화를 계기로 다시 행위로 되고 있는 현실에 주목한다. 그래서 노동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행위, 즉 삶정치에 주목한다. [물론 네그리와 비르노에게서는 아렌트가 활동적 삶으로 분류하지 않은 성찰적 삶의 세 가지 유형(사유, 의지, 판단)까지 노동으로 되었고 역으로는 노동이 활동적 삶일 뿐만 아니라 성찰적 삶으로 되었다는 사실을 덧붙여야 한다.]
5. 아렌트와 홀로웨이에게서는 행위가 가능성으로서 제시된다. 네그리와 비르노에게서는 행위가 잠재성으로 제시된다. 가능성은 실재적인 것이 아니지만 잠재성은 실재적인 것이다.
6. 그래서 홀로웨이에서는 절규와 부정이, 네그리와 비르노에게서는 긍정이 정치적 핵심문제로 부상한다.
  1. 존 홀로웨이,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조정환 외 옮김, 갈무리, 2002 [Back]
  2. 빠올로 비르노, 「다중」, 김상운 옮김, 갈무리, 2005 참조. [Back]
2010/08/09 11:04 2010/08/09 11:04
오늘 [두리반 단전 18일째 집중행동]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메일을 받았다. 결코 사신이 아니기 때문에 웹에 올린다. 주민 동의 없는 무차별 재개발은 우리 시대의 중요한 사회적 쟁점 중의 하나로 되어 있다. 용산 남일당 참사는 이 쟁점이 극적으로 폭발한 사건의 하나였다. 작은 용산 사건으로 불리는 두리반 역시 주민 동의 없는 강제 철거와 재개발 추진으로 벌써 여러 개월째 싸움이 전개되고 있는 곳이다. 18일전부터 한전이 강제 단전을 하면서 이곳의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촛불로 지내오고 있으며 혹서가 몰아치면서 더위와 싸워야 하는 악조건을 강제당하고 있다. 갖은 변명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공기업의 관료주의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이 메일은 잘 보여준다. 게다가 이 메일에 나타나고 있는 바, 협력을 약속했던 마포구청이 약속을 중도에 이행하지 않고 있는 것, 특히 마포의 변화를 바라는 열망에 힘입어 당선된 박홍섭 구청창이 구민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분노를 금치 못하게 한다. 두리반에 전기가 들어가게 만드는 것은 기관에 속한 사람들의 법적 사회적 책임일 뿐만 아니라 인간적 책임이기도 하다.-아멜라노


[두리반 단전 18일째 집중행동1] 마포구청과 한전에 항의전화 걸기

지난 7월 21일 수요일 오전 10시 두리반에 전기가 나갔습니다.
그리고 8월 7일 토요일 오늘 현재까지 두리반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두리반은 단전 18일째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마포구청에서 임시로 경유발전기를 제공해서 이틀 정도 하루에 세시간씩 전기를 사용하기도 했고, 자전거 발전기와 태양광 발전기를 동원해 하루에 몇 시간씩 선풍기를 돌리고 알전구를 한 두 개 켜보기도 했지만, 삼복더위에 연일 폭염주의보가 발효되는 요즘 두리반은 여전히 전기가 없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밤에는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선풍기조차 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다깨다 자다깨다 반복하면서 모기에 물어 뜯기고, 미지근한 수도물로 하루에 다섯번씩 샤워를 해도 연신 흐르는 땀 때문에 도저히 무엇을 할 의지가 생기지 않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견뎌야 합니까?
전기없이 폭염 속에서 생활해야 하는 인권유린을 우리는 언제까지 당해야 합니까?
헌법 7조에 보장되어 있는 행복추구권을 왜 두리반은 박탈되어야 합니까?
에너지 기본법 4조 5항에 나온 전기 공급의 의무를 국가와 지자체인 마포구청 그리고 에너지 공급업자인 한국전력은 왜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까?

두리반은 전기공급을 요구하며 마포구청에서 7월 26일부터 일주일간 항의농성을 했고, 마포구청장이 직접 두리반 대책위원들과 만나 악수를 하며 "두리반 문제 해결을 위해 마포구청이 노력을 다하겠다.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마포구청이 두리반에 전기를 공급하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포구청은 발전기만 주고, 기름은 주지 않고 있습니다. 전기를 주겠다는 이와 같은 약속을 돌연 저버리고, 지금까지 전기를 줄 수 없다면서 핑계를 대고 책임 회피를 하며 거짓말을 일삼고 있습니다.

한국전력이 두리반에 전기를 공급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두리반에 전기를 공급할 수 있습니다.
한국전력 서부지점 책임자들이 마음만 고쳐 먹는다면 지금 바로 두리반에 전기가 들어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께 두리반 단전 20일이 다 되어가는 오늘 다시한번 충심을 모아 호소드립니다.

다음 한전 서부지점 담당자들에게, 그리고 전기를 공급하겠다고 해놓고서는 전기를 줄 수 없다며 거짓말로 일관하고 있는 마포구청에 지금 당장 두리반에 전기를 넣어달라고 항의전화를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한 통이 아니라 하루에 열 통씩 아니 그 이상이어도 좋습니다.

두리반에 당장 전기를 넣어달라고, 법률 검토니 무슨 핑계니 대지 말고, 당장 사람이 죽어가는 두리반에 인간의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에너지인 전기를 넣으라고 호통을 쳐주시기 바랍니다.

화를 내주시기 바랍니다.
정의로운 행동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두리반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시는 분, 다음 전화로 항의전화를 걸어서 두리반에 당장 전기를 연결하라고 소리쳐주세요.
두리반에 다시 전기가 연결되는 날까지 매일매일 항의전화를 걸어주세요.

 

한국전력 서부지점 고객지원팀 조재승 부장 02-710-2221  011-9704-4829

한국전력 서부지점 수요개발파트 최기영 차장 02-710-2226  010-6324-8259

마포구청장 비서실 02-3153-8000

마포구청 도시관리국 02-3153-8005

* 한국전력 서부지점에 항의전화 걸 때 답변 요령

1. "두리반은 강제집행이 이뤄진 곳이라 전기를 줄 수 없다" - 한전은 법원이 아닙니다. 한전은 전기 실수요자가 있는 곳에 전기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지 법 집행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두리반은 잘못되고 억울한 명도집행을 거부하고 지금까지 220일 넘게 항의농성을 하면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입니다. 한전은 국가기관도 아니고, 법 집행기관도 아니므로 행정집행 여부와는 관계없이 전기를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전기를 공급해야 합니다. 이것은 에너지 기본법 4조 5항에 나오는 내용이며, 한전의 의무입니다.

2. "한전 서부지점은 권한이 없다. 본사에 문의하라" - 한전 서부지점에서 두리반에 전기를 공급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으면 전기 공급이 가능합니다. 한전 본사에서의 법적 검토 등은 이미 끝났고, 한전 본사에서는 서부지점에서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책임을 넘긴 상태입니다. 이런 사항은 두리반 단전 20일이 되어 가는 오늘까지 두리반 대책위원들이 얻은 정보를 모두 모아 알게 된 확인된 사항입니다. 한전 서부지점에 권한이 없다는 것은 책임 회피이자 거짓말입니다. 본사로 갈 필요도 없이 지금 폭염에 삼복더위가 지속되는 날씨에도 전기 없이 사는 두리반에 당장 서부지점에서 전기를 연결해야 합니다.

3. "지금 당장은 어려우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 우리도 노력중이다." -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두리반은 전기 없이 20일을 기다렸습니다. 더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더이상 기다리라는 것은 죽으라는 소리입니다. 절대로 하루도 한 시간도 더는 기다릴 수 없습니다. 서부지점에서 마음만 먹으면 연결할 수 있다는 것 잘 압니다. 어서 전기를 연결하세요.

4. "두리반과 관계없는 제3자는 빠져라." - 두리반에는 현재 시민, 예술가, 활동가 등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즉 이곳에서 24시간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곳에서 살면서 사람들은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들의 생존권이 전기가 끊어진 뒤 벼랑 끝에 몰려 있습니다. 나는 두리반에 상주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두리반에서 작업하는 예술가입니다. 나는 두리반에 매일 가는 시민입니다. 나는 두리반 문제가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현주소를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두리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단전 20일 동안 한국전력이 책임회피만을 하면서 전기를 줄 수 없다고 버팅기는 모습에 크게 분노하는 양심적인 시민입니다. 당장 두리반에 전기를 연결하시기 바랍니다.

5. "한전이 아니라 시행사에 문의하라. 시행사가 전기공급에 합의를 해야 전기를 줄 수 있다." - 그렇게 이야기하면 한전이 저지른 불법 단전에 대해 반박하겠습니다. 두리반에 전기가 끊긴 것은 2009년 12월 26일이고, GS 건설의 유령시행사인 남전디앤씨의 최동균이 한전에 이야기하지 않고 불법적으로 두리반에 전기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한전은 전기 실사용자인 두리반에 아무런 상의도 없이 이와 같은 남전디앤씨의 불법 단전을 용인하고 해지신청을 12월 28일에 받아들였습니다. 이와 같은 불법을 저질러놓고도 지금까지 한전은 두리반에 단 한 마디도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GS 건설과 남전디앤씨의 협박 때문에 두리반에 전기를 줄 수 없다고 참으로 비겁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 전기를 가지고 두리반을 고문하고 있는 것입니까? 두리반의 목숨을 전기를 무기로 쥐락펴락하는 한전은 대체 대기업 건설사의 눈치만 보면서 에너지 기본법을 무시하는 오만방자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양심을 가진 시민으로서 도저히 한전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한전이 두리반에 전기공급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한전 보이콧 운동을 전개할 것입니다. 범국민적으로 한전 불매운동을 벌여나갈 것입니다. 한전의 이미지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서 우리는 집회에도 참여할 것입니다. 당장 한전이 정신을 차리지 않고 대기업의 말만 따르며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전기고문을 계속 한다면 국민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 마포구청에 항의전화 걸 때 답변 요령

6. "마포구청은 책임이 없다. 한전에 문의하라" - 2006년 제정된 에너지기본법 제4조 5항에 따르면 “국가, 지방자치단체 및 에너지공급자는 빈곤층 등 모든 국민에 대한 에너지의 보편적 공급에 기여하여야 한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서울시 마포구 동교동 두리반에 상주하고 있는 사람들이 한여름 삼복더위에 전기 없이 지내야 하는 모멸적이고 비인간적인 상황에서 하루속히 벗어날 수 있도록 마포구청이 즉각적으로 경유 공급을 재개할 것을 강력히 촉구합니다. 이것은 마포구청에게 시혜를 달라고 사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민으로서, 마포구민으로서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하도록 규정된 헌법 제7조와 에너지기본법 제4조 5항에 따른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또한 지방자치단체로서 마포구청의 의무를 다하라는 준엄한 시민의 명령입니다. 마포구청은 더이상의 책임회피를 하지 말고 법률에 나온 것처럼 두리반에 전기를 공급해야 합니다.

7. "마포구청도 두리반에 전기를 주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전기를 지급할 예산 규정이 없다. 공무원은 예산에 근거한 돈을 집행할 수 있지, 없는 돈을 쓸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 그렇다면 마포구청장이 7월 31일 저녁 7시 30분 경 두리반 대책위원들 앞에서 일일이 악수를 하면서 "두리반 문제 해결을 위해 마포구청이 노력할 것이며, 그 때까지 전기를 주겠다"고 약속한 것은 무슨 근거에서 나온 말입니까? 마포구청장이 거짓말을 한 것입니까? 마포구청장이 마포구민을 우롱하는 것입니까? 마포구청이 경유발전기를 지급했는데, 경유는 지급할 수 없다는 것은 완전히 두리반 사람들을 갖고노는 장난을 치는 것 아닙니까? 쓸모없는 보도블럭 교체와 쓸데 업는 일에는 몇 억원씩 예산을 낭비하면서 삼복더위와 폭염주의보에 사람이 죽어가는 두리반에 당장 전기를 줄 수 없다고 버팅기는 것은 주민을 위해 일해야 할 마포구청의 존재이유 자체를 부정하는 일 아닙니까? 구청 공무원이라면 주민을 위해 일해야지 예산 타령이나 하면서 지금 긴급하고 위급한 재난상태에 놓여! 있는 마포구 주민을 무시하면 되겠습니까?

홍수 피해가 나서 사람이 떠내려가고, 당장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예산 규정이 없다면서 책임을 회피하는 지자체가 있다면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두리반은 지금 홍수만큼이나 커다란 재난 상황입니다. 전기가 없이 선풍기 하나 제대로 틀지 못하고 있는 위급상황입니다.

마포구청장이 거짓말쟁이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손가락질 받는 것을 원하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당장 두리반에 경유를 지급하여 임시방편으로나마 전기가 들어올 수 있도록 하고, 이후 한전과 GS 건설과 연락해 두리반에 전기가 들어올 수 있도록 행정조치를 취하는 것이 제대로된 구청의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8. "사인간의 문제이므로 마포구청은 개입할 수 없다." - 사람이 죽어가는데 사인간의 문제라고 방관만 하실 것입니까? 당장 두리반에 나와서 상황을 보십시오. 두리반에는 전기로 불을 밝힐 수가 없어서 촛불을 여기저기 밝혀 놓았는데, 두리반이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화재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또한 이 무더운 여름에 두리반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건강도 무척 염려가 됩니다. 제대로된 위생 상태를 유지하지 못해서 전염병마저 생길 위험이 있습니다. 벼랑 끝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입장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것이 국민으로부터 세금을 받아 유지되는 국가기관의 의무입니다. 애초에 사인간의 문제라면 마포구청이 경유발전기를 지급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인도적 차원의 조치 아니었나요? 그런데 인도적 차원의 조치가 발전기만 뎅그러니 놔두고 도망치듯 가버리고, 이후에는 나몰라라 하는 것입니까?

지금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마포구청의 전기 공급 거부에 대해 긴급구제 신청이 접수되어 조사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시 한번 마포구청에 촉구합니다. 마포구청의 거짓말이 만천하에 공개되어 망신거리가 되지 않으려면 두리반에 즉각적으로 경유를 공급해서 다시 전기가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9. "두리반 단전에 왜 마포구청이 나서야 하느냐? 난 그런 것 모른다." - 서울특별시 마포구 저소득주민의 복지증진에 관한 조례 시행규칙 2조에는 마포구청장이 지원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시설 및 대상을 지원대상자로 정해 지원이 가능하다고 나와있습니다.

 지금 두리반 문제는 홍익재단에 의한 성미산 생태숲 마구잡이 파괴와 함께 마포구 최대의 현안이며, 신임 박홍섭 마포구청장이 지난 6월 2일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마포구청장 후보로 출마할 때, 그리고 구청장에 당선되어 취임식 하기 전날 두리반을 찾는 등 총 3번 두리반을 찾아 이 문제의 해결을 약속한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마포구의 최대 현안이며, 마포구청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을 찾아야 하고, 그동안 최소한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해 전기를 공급해야 합니다. 이것도 모른다면 공무원의 자질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올해 잡혀있는 마포구의 서민 긴급구호 자금만 3억원이랍니다. 그런데 마포구청 총무과장은 예산이 없으니 의회승인을 받아오라는 식으로 말을 돌리고, 기타 실국장급 실무진 역시 계속 핑계를 대고 말을 돌리고, 자기 소관이 아니라고 하면서 경유 지급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마포구 조례 제3조제1항제5호에 따른 긴급구호비 지원은 마포구청장이 지원실시 여부와 지원내용을 결정하여 지원하고, 사후 마포구긴급복지심의위원회에서 적정성 심사를 실시할 수 있다고 나옵니다. 그렇다면 두리반에도 긴급구호비를 지급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도대체 경유발전기는 무슨 예산에서 나온 것입니까? 경유발전기를 빌리고 설치하는데 백만원 정도가 들었다고 들었는데, 그 예산이 있다면 하루에 오만원 들어가는 경유를 충분히 지원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왜 계속 책임을 회피합니까? 마포구민이 죽어갑니다!!!!!!!!!!!!!!!!!!!!!

사막의 우물, 두리반
http://cafe.daum.net/duriban


2010/08/08 19:56 2010/08/08 19:56
1 2 3 4 5 ... 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