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을 거치면서 네그리의 사유는 '공통체'(commonwealth)로, 홀로웨이의 사유는 균열(crack)로 발전해 가고 있다. 한쪽은 가장 거시적인 것으로, 한쪽은 가장 미시적인 것으로, 다시 말해 대립적인 방향으로 발전해 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두 사람의 사유의 발전은 그 자체로 흥미롭고 또 생산적이다. 구성적 경향과 비판적 경향의 이 대립은 맑스 속에 공존했던 두 요소가 두 개의 노선으로 분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것은 맑스-레닌-그람시-네그리 노선과 맑스-평의회공산주의-비판이론(루카치, 벤야민, 아도르노)-홀로웨이(개방적 맑스주의) 선의 분화이다. 분화는 생산적이며 새로운 공통평면의 발명을 절실한 것으로 만든다. 이 문제를 위해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조정환 옮김, 갈무리, 2002)에 실려 있는 홀로웨이의 네그리 비판에 대해 네그리가 가한 반비판(이것은 네그리와 꼭꼬의 책, 『글로발』, 조정환 옮김, 갈무리, 근간에 포함되어 있다) 의 요소들을 정리해 둔다.

1.홀로웨이는 현실을 물신주의적 측면에서만 고려한다.  그래서 권력의 모든 형상들을 오직 물신적인 것으로만 간주한다. 이 때 행위의 원리는 거부, 부정으로만 축소되고 제헌권력도 부정된다. 오직 거부만이 혁명의 계기인 것으로 파악된다. 거부의 외부에서, 그리고 피압박자의 '비명' 외부에서는 현실은 완전히 물화된다. 변증법이 승리하고, 그것의 궁극적인 부정성이 주장된다. 이것은 데리다의 '주변', 아감벤의 '벌거벗은 삶', 물상화에 대한 루카치의 비판 등과 유사하다.

2. 홀로웨이가 엥겔스적 전통 속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는 소비에트 맑스주의 속에서, 변증법의 개념이 사실상 장황한 자연법칙으로 변형되었을 때 이루어진 변증법 개념의 타락을 완전히 파악했지만 그는 순수하게 부정적인 방법으로 이러한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효과적이지 않다.  오페라이스모에서 구성적 역능, 제헌권력은 노동의 가치들에뿐만 아니라 자유의 정치적 형상에까지 관계하는 제헌적 긍정성이다.  홀로웨이는 오페라이스모가 노동력에 귀속시키며 보다 일반적으로는 계급투쟁에 귀속시키는 그 구성적 역능까지 부정한다. 이러한 관점 안에서 착취라는 개념 자체를 생각하기 어렵다는 점은 분명하다.

3. 실제로 홀로웨이가 사용하는 바의 부정성으로 환원된 맑스주의 변증법은 변증법의 물신주의적 형태이며 그것은 변증법의 모든 요소들을 분쇄한다. 그것은 물신주의, 즉, 파악하기 불가능한 실재의 비극적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의 다른 면은 절대적 사건으로서의, 즉 대문자로서의 혁명(la Révolution)일 것이다.

4. 홀로웨이는 오뻬라이스모를 기능주의로 비판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기능주의는 자본주의의 모순들을 회피하고 그것들을 중성화하는 것이며 변증법을 모순들과 차이들의 지양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해소적 요소들을 찬미하면서 변증법을 선형적 방식으로 사용한다. 그런데 오페라이스모는 그 문제와 관련해서는 정반대의 작업방식을 생산했다. 오뻬라이스모에서는 변증법이 폐지되었기 때문에, 노동력의 적대적 압력은 그 모순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순을 심화시킨다. 모순들의 이러한 심화는 두 가지 효과를 낳는다. 첫 번째 효과는 주체(노동력, 프롤레타리아, 계급, 다중)의 일관성을 강조하고 그럼으로써 이 존재론적 변형의 배치, 계속된 변형 운동을 이 주체적 실재에게 새기는 것에 있다. 첫 번째 효과의 결과인 두 번째 효과는 주체들(노동력, 프롤레타리아트, 계급들, 다중들)을 자본의 외부로 더욱더 밀치는 것에 있다.탈주는 바로 이 과정의 결과이다.

5. 홀로웨이 에게 있어서 자본의 무기인 변증법은 노동력에 대해서는 저주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해결될 수 없는,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해 내부에서는 해결이 불가능한 이 총체성의 수인으로 남아있게 된다.것은 외부로부터가 아니면 해결불가능한 문제에 직면한다. 이럴때 혁명은 제헌권력이 아니라 신비한 사건으로 된다. '노동거부' 속에서 '제헌권력'의 요소들이나 배치들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노동 '해방'의 과정 속에서 '자유화의 요소들'을) 식별할 수 없다고 보면, 생산과정에서 매장자(거부자)가 생산되지 않는다고 보면 계급투쟁의 역동적인 관점 모두를 금지하게 된다.

6. 주목해야 할 것은 사회주의의 구체적인 역사이다. 다시 말해 제도적 형상 외부에서 계급투쟁을 상상할 수 없다는 점이다. 계급투쟁의 제헌적 과정이 결코 결론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그것으로부터 어떤 결론을 발견하는 것도 아니고, 자연스러운 형상들이나 그 자체의 반복들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오히려 계급관계를 프롤레타리아트적인 활력의 (혹은 다중의) 늘 새로운 공재면을 가로질러서, 다시 말해 계급투쟁의 상이한 극성화들을 가로질러서 발전시키고, 절합하고, 변형시키는 것이다.

7. 이와 연관하여 홀로웨이가 취한 추론의 정치적 퇴행은 혁명과 개혁 사이의 온갖 구조적이고 존재론적인 관계를 그가 발본적으로 거부한다는 점에 있다. 이것은 아주 위험하다. 주권이 통일된 권력을 행사할 수 없고 그것이 이중성을 (다시 말해 운동과 '통치'의 관계를) 제도들의 성격이자 동시에 근본적 지평으로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때에는 특히 그러하다. 톨리아티의 그람시가 아닌 레닌주의적 그람시는 이미 이 점을 통찰했었다. 

8. 홀로웨이의 입장은 코뮤니즘적 대안의 기본적인 유효성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반란의 직접성을 강조하는 점에서 장점이 있다. 그런데 그 '형식 문제'라고 부르는 것, 다시 말해 물신주의의 문제라고 부르는 것은 그에게서는 비판적인 정치적인 방법으로 작용하기 보다는 윤리-도덕적 범주로 환원된다. 물신주의가, 달리 말해 존재론적 부패와 그것의 실천적 결과가 계급 주체의 활력 그 자체를 건드리거나 변경시킨다는 것을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부패가 존재하면 할수록, 그 부패가 대규모적이고 물리적으로 결정되면 그럴수록 혁명적 과정은 구체적인 개혁들에 연결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할 때에는 공상적 꿈들이 지배하게 될 것이다.

9. 오뻬라이스모(노동자주의)가 존엄한 이유는 혁명 개념을 개혁 개념에 결코 해소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오페라이스모가 유효한 이유는 개혁의 개념을 혁명의 개념 속에 늘 해소시켰기 때문이다. 오페라이스모가 유효한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개혁과 혁명의 이 관계 내부에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속에서 그리고 자본주의적 관계 외부로의 탈주 속에서 형성된 프롤레타리아트적 주체의 자율성과 독립성이 주어져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해 착취를, 계급의 실존 그 자체를 동시에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이 함께 주어져 있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10. 우리는 홀로웨이의 정치학을, 삶권력과 삶정치적 활력 사이의 관계를 발전과 민족의 범주 아래에 밀어 넣으려는 라틴 아메리카의 몇몇 제도 좌파의 시도에 대한 최고의 반대를 나타내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선은 변증법적 부정성에 의해 제한되어 있다. 부정성은 단지 "절규"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행복, 평화, 그리고 코뮤니즘을 계속적으로 긍정하려는 다중의 욕망이자 필요이기도 하다.

나는 두 입장의 발전과정과 관련하여 크게는 네그리의 입장을 지지한다. 하지만 그것이 홀로웨이의 입장과 대립한다고는 결코 보지 않는다. 실제로는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에서 홀로웨이가 강조한 절규, 그리고 그의 새로운 책 『자본주의에 균열을 내자』에서 강조하는 크랙(crack)의 방법을, 다시 말해 비판과 부정의 방법을 강력하게 결합할 때 구성의 방법은 약화되기는커녕 훨씬 더 강력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통체』에서 네그리와 하트는 개혁, 사랑, 행복, 공통성의 혁명적 가능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많이 나아간다. 이것은 비관주의와 냉소주의가 지배하는 분위기 속에서 꼭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절규와 균열내기와 비판의 어조를 깊이 함축하지 못하게 되면, 다시 말해 비판과 부정의 계기가 충분히 강조되지 못할 때, 개혁주의에 동화될 위험에 직면하게 될 수 있다는 점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네그리는 제도주의를 한편에 놓고 그 다른 극단에 홀로웨이를 놓음으로써 이중전선에서의 싸움을 수행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정치주의와 탈정치주의의 양극과의 싸움에서 네그리와 홀로웨이, 구성의 입장과 비판의 입장은 상보적 협력자로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갖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홀로웨이의 새책 『자본주의에 균열을 내자』는 창조와 건설의 계기를 부정의 계기와 더불어 동시에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협력을 향해 한 발 가까이 다가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10/03/17 09:07 2010/03/17 09:07
오늘날의 financial rent를 '금융렌트'라고 번역하기보다 '금융지대'라고 번역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나는 땅 '地' 자의 구성으로 설명하곤 했다. 오늘날의 땅은 흙으로 구성된 것만이 아니라 언어로 구성되었다고 하면서.  땅의 언어학적 전환과 그것의 물리적 대지와의 연속성을 설명할 방법이 쉽지 않았다. 오늘 배달된 『수유 위클리』 7호에  실린 고병권  편집자의 글의 일절이 그래서 인상적이고 흥미롭게 다가온다.

이번호 제게 큰 감동과 가르침을 준 <전선인터뷰>의 주인공 성태숙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언젠가 아이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을 세우고 자기 이야기를 만들고 싶을 때 그때 아이들에게는 자기 낱말들이 필요해요.” 성선생님이 생각을 전하는 수단으로 ‘낱말들’을 말씀하신 건 아닌 것 같아요.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낱말’은 생각이 자라나는 ‘토양’이랄까 ‘바탕’ 같은 것이죠. 땅에 마디마디 심는 고구마순처럼, 우리 몸과 맘속에 던져진 낱말들에서 생각들이 자라나는 것 같아요. 살다가 어떤 일을 겪을 때 있죠, 그때의 외부 충격이 우리 내면의 낱말들로 하여금 생각의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고 덩굴을 이루게 하는 거겠죠.1


낱말들이 생각의 토양으로 간주되는 것 같기도 하고, 생각의 씨앗으로 간주되는 것 같기도 하다. '언어는 생각의 토양이고 낱말은 생각의 씨앗이다'라고 말한다면 혼란은 다소 정리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토지와 언어, 종자와 낱말을 연결짓는 이러한 생각은 금융의 이자나 수수료를 지대와 연결시키는 것을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같다. 오늘날 금융지대는 낱말과 언어에 대한 사적 소유의 독점(지적재산권을 생각해 보자)를 통해 언어적 공통체를 착취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의 독점을 통해 토지 위에서 이루어지는 노동활동을 착취했던 토지지대와 같은데,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지대 자체의 변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1. http://suyunomo.net/?p=1438 [Back]
2010/03/13 10:27 2010/03/13 10:27
※이 글은, 오는 3월 19일 오후 3시 광주 NGO 센터에서 있을 5.18 30주년행사위원회 주최 토론회에서 발표할 집필중인 글의 서문(초고)이며 각주는 제외했다. 이 글은 조정환, 「광주민중항쟁과 제헌권력」, 『5.18 민중항쟁에 대한 새로운 성찰적 시선』, 한울, 2009, 273~307쪽의 후속편에 해당되기도 한다.- 아멜라노


5월 담론의 제헌적 재구성을 위하여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경쟁적 협력을 넘는 다중의 글로벌 코뮤니즘-

조정환

1. 머리말

30년 전 5월 25일부터 27일 사이에 시민학생투쟁위원회의 제헌권력은 전두환 호헌파의 학살적 계엄통치에 무장으로 맞섰을 뿐만 아니라 계엄군의 ‘과잉진압’ 중단과 시민군의 무기반납을 교환하려 했던 수습위원회의 개헌정치도 거부했다. 시민학생투쟁위원회는 외무부와 내무부, 그리고 시민군을 갖춘 엄연한 자치권력으로서, 비록 미분화된 형태로지만 입법과 사법의 기능까지 통일적으로 수행했다. 개헌파가 대오에서 이탈한 가운데, 1980년 5월 27일 새벽, 시민학생투쟁위원회는 계엄군의 투항요구를 거부하면서 죽음으로 항쟁의 제헌적 생명력을 살려냈다. 고전적 비극은 단지 비참한 죽음을 보여주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통해, 그리고 죽음을 넘어 지속되는 삶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광주민중항쟁이야말로 역사 속에 등장한 비극이었다고 할 수 있다.

피의 결사항전 사흘 후인 5월 30일, 정부의 만행에 항의하여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뿌린 뒤 서강대학교 기독교 회관 옥상에서 투신한 김의기의 죽음, 「광주시민의 넋을 위로하며」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그해 6월 9일 이대 앞 네거리에서 “유신잔당 물러가라!”, “노동삼권 보장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를 외치면서 자신의 몸을 불사른 노동자 김종태의 죽음, 그리고 항쟁 당시 시민군으로 참여하여 총상을 당한 바 있으며 노동자로 생활하다가 1985년 8월 15일 전남 도청앞 금남로 1가에서 진상규명을 미루는 정권에 항의하여 전단「8.15를 맞이하는 뜨거움의 무등산이여!」를 뿌리면서 분신한 홍기일의 죽음 등은 제헌권력이 어떻게 그 비극적 생을 이어가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1980년 5월에 뚜렷이 현시되었던 제헌적 힘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가? 정확히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 물음 앞에서 주저하지 않을 수 없다. 1980년 5월 항쟁이 1987년 6~9월의 항쟁으로 부활했으면서도 광주보상법(1990)과 5.18특별법(1995)을 거치면서, 그리고 호헌파로부터 이른바 ‘광주내란주모자’로 지목되었던 김대중의 집권기를 경유하면서 그것이 개헌파의 권력제도 속으로 포섭되어간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광주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전두환 노태우가 처벌되었고 항쟁 참가자들은 보상을 받고 국가유공자로 인정되었으며 5.18은 기념일로 제정되었지만 이것이 항쟁의 희극적 반복이자 조작된 결산에 불과했다는 비판적 평가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폭넓은 공감을 얻어가고 있다.

우리가 이 과정을 문제로 느낀다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잠재력이 형성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필요한 것은 5.18을 국가발전의 에너지가 아니라 다중의 삶정치적 해방과 제헌적 자유자치의 동력으로 재정립하는 것이다. 제헌권력이 개헌파의 이 포섭을 뚫고나와 역사적 구성역능으로서 그것의 활력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먼저 지난 30여년의 역사에서 개헌파가 어떻게 집권할 수 있었는지, 무엇이 그것의 제정된 권력을 지금까지 재생산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분석해야 한다. 이것은 지난 30년 동안 경쟁적 협력관계를 맺어온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의 두 개의 바퀴로 확정하는 일이 될 것이다. 아울러 제헌권력이 그 활력을 실현하기 위해서 어떤 실제적 힘들의 결집이 필요한지, 어떠한 비전(이념적 전망)을 갖추어야 하는지, 어떤 정치적 배치가 필요한지를 살펴야 한다. 나는 이 글에서 다중의 글로벌 코뮤니즘이 광주항쟁에서의 제헌권력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 경향이자 진로임을 밝힐 것이다.


2010/03/12 07:06 2010/03/12 07:06

local과 global의 어원조사

Posted at 2010/03/08 12:31// Posted in 쓰기(skribi)/언어_L
local (adj.) Look up local at Dictionary.com
late 14c., "pertaining to position," from O.Fr. local, from L.L. localis "pertaining to a place," from L. locus "place" (see locus). The meaning "limited to a particular place" is from 1610s. The noun meaning "a local train" is from 1879; "local branch of a trade union" is from 1888; "neighborhood pub" is from 1934. Related: Locally. Local color is from 1721, originally a term in painting; meaning "anything picturesque" is from c.1900.

globe Look up globe at Dictionary.com
1550s, "sphere," from L. globus "round mass, sphere," related to gleba "clod, soil, land." Sense of "planet earth," or a three-dimensional map of it first attested 1550s.

이 어원에 따른다면 로컬은 장소성을 글로벌은 공간성을, 로컬은 수직성을 글로벌은 수평성을, 로컬은 특수성을 글로벌은 보편성을, 로컬은 일차원성을 글로벌은 삼차원성을 지시한다. 특정성 대 보편성, 지역성 대 범역성, 지역적 대 지구적.

2010/03/08 12:31 2010/03/08 12:31

문제를 단순화해야 한다

Posted at 2010/03/07 12:34// Posted in 쓰기(skribi)/정치_P
문제를 축소할 것이 아니라 단순화해야 한다. 다중의 삶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핵심적인 실천과제를 정식화하고 또 그것을 드러내려면 다양한 변태들로 나타나는 문제들을 절대 축소해서는 안 된다(가령 매판, 독점, 독재, 신자유주의, 파시즘 등등의 단일 이슈로의 축소와 다른 문제들의 그것에의 종속). 필요한 것은 문제를 단순하게 파악하는 것, 그 다양한 것을 관통하는 단순한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다.

1.
첫째로 말해야 할 것은, 자본주의의 본원적으로 자유주의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주의적인 성격이다. (신)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은 우리로 하여금 초점을 놓치게 만들고 끊임없이 자본의 과업을 다중이 대신하도록 만드는 거짓 문제이다. 자본주의는 자유주의적인 방식으로 그것의 사회주의적 목적을 달성한다. 경쟁이 자본주의의 자유주의적 근거라면 가치에서의 평균화(한 상품의 가치는 그것의 생산에 사회적으로/평균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다)와 이윤에서의 평균화(평균이윤)는 자본주의의 사회주의적 근거이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실현하는 두 가지 측면일 뿐 결코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사회주의가 위기에 처하면 자유주의가, 자유주의가 위기에 처하면 사회주의가 각각 구출자로 나섰음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운동이 자신의 정치학을 자유주의 대 사회주의의 대립 위에 세울 때, 그 의도와는 무관하게 실효에 있어서는 끊임 없이 자본의 필요를 대신 실행하는 대행자로 될 수밖에 없다.

자유주의의 은폐된 사회주의적 측면을, 사회주의의 은폐된 자유주의적 측면을 동시에 파악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것은 신자유주의가 사회주의를 은폐해 왔고 신자유주의 위기 속에서 사회주의를 끄집어 내어 사용하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두 얼굴인 한에서 자본주의와의 투쟁은 결코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이름으로 전개될 수 없다. 사회주의에 맞서는 자유주의 운동(동구)이나 자유주의에 맞서는 사회주의 운동(서구)은 운동이 거짓 문제의 회로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징후들이다. 이제부터의 운동은 이 틀을 깨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2.
둘째로 말해야 할 것은 자본주의의 본원적으로 민주주의적이면서 동시에 전체주의적인 성격이다. 전체주의와 민주주의, 전체와 개체의 대립은 우리로 하여금 초점을 놓치게 만들고 끊임없이 자본의 과업을 다중이 대신하도록 만드는 또 하나의 거짓 문제이다.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그것의 전체주의적 목적을 달성한다.  자본이 노동력을 소지한 개개인의 자유의지에 기초한다(적어도 노동력을 누구에게 팔 것인가에서 노동자는 자유롭다)는 사실은 자본주의의 민주주의적 근거이다. 그러나 그 자유의지는 반드시 자본에게 노동력을 팔아야만 살 수 있다는 사실(팔 것인가 말 것인가는 자유의지의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노동력의 판매와 노동은 잉여가치의 창출이라는 단일한 목적에 봉사한다는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전체주의적이다.  따라서 전체주의와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를 실현하는 두 가지 측면일 뿐 결코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전체주의가 위기에 처하면 민주주의가,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하면 전체주의가 각각 구출자로 나선다.

전체주의의 은폐된 민주주의적 측면을, 민주주의의 은폐된 전체주의적 측면을 동시에 파악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것은 전체주의의 대명사로 비난되는 파시즘이 대중운동에 의해 추동되었고 민주주의의 대명사로 지칭되는 서구 민주주의가 오늘날 강제수용소를 자신의 통치 무기로 애호하는 것(아감벤)에서 입증된다.  전체주의와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의 두 얼굴인 한에서 자본주의와의 투쟁은 결코 단순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전개될 수 없다. 전체주의에 맞서는 민주주의(서구)나 개인주의에 맞서는 집단주의(동구)는 운동이  자본의 거짓 문제회로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징후들이다. 이제부터의 운동은 이 틀을 깨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이 거짓 문제 회로들에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의 대립을 포함시킬 수도 있다. 자본은 민족국가들 사이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둘러싼 경쟁을 통해서 자신의 초국적의 목표인 잉여가치 축적을 달성하기 때문이다.

다중의 진로는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전체주의와 민주주의,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의 틀을 깨면서 출현하는 코뮤니즘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2010/03/07 12:34 2010/03/07 12:34

정치적인 것의 블랙홀

Posted at 2010/03/04 08:38// Posted in 쓰기(skribi)/정치_P
20세기 후반에 득세했던 '정치의 자율성' 명제가 국가의 자율성으로 수용되고 그 결과 정치적 개혁주의의 이론적 버팀목으로 기능한 것의 폐해는 크고 또 길었다. 그것에 대한 비판은 다양한 갈래에서 나타났다. 그 중 우리가 주의해야 할 하나는 반(反)정치의 경향, 즉 정치에 대한 비판을 정치적인 것에 대한 폐기로까지 밀고가는 경향이다. 철학적으로는 현실성에 대한 강조가 잠재성에 대한 강조로 구부려진 것이라 볼 수 있다. 두 범주의 관계에 대한 엄밀한 사유가 필요한 시점에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메뚜기 뛰기를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경향이 나타나는 방식은 다양하다. 몇 가지를 생각해 보자.

1. 낭만적 아이러니
경험적 자기(현실태)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초월론적 자기의식(잠재성). 이것은 상처를 입거나 패배하는 법이 없는 자기의식이다. 초월론적 자기가 경험적 자기를 경멸할 때 나타난다. (무라카미 하루키에게서 보이듯이) 낭만적 아이러니가 거둔 이 내면의 승리는 투쟁의 회피에 지나지 않는다(가라타니 고진, 『역사와 반복』,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145쪽). 이 회피는 경험적 자기를 패배 속에 지속적으로 머물게 한다.

2. 이론적 근본변혁주의와 정치적 냉소주의
모든 경험적 투쟁들(현실성)로부터 냉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것이  근본적 변혁(잠재성)을 직접적으로 실행하려 하지 않았다고 오직 이론적으로만 비판하면서 결코 실패하거나 패배하지 않을 이론적 자아를 유지하는 것. 사실상 이것은 모든 투쟁들을 허무한 것으로 묘사하는 정치적 냉소주의로 귀착된다. 촛불에 대한 일련의 사후적 이론적 평가에서 이러한 경향들이 노출되었다.(이에 대해서는 조정환, 『미네르바의 촛불』, 갈무리, 2009, 18~65 참조)

3. 이론적 신보수주의
다중지성의 아마츄어성을 비판하면서 고전주의적 인문학의 고수와 발전만이 이 지적 무정부상태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보는 엘리뜨주의. 이것은 구체적 상황 속에서 발전하고 있는 집단지성, 다중지성의 현실적 흐름을 그것 외부에 초월적으로 정립된 인문주의의 이상 속에서 평가한다. 이들은 지적 불평등과 지혜의 위계를 주장함으로써 권력관계를 재구축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이에 대해서는 1존 베벌리의 글 참조)

4. 원시주의
문명과 원시를 대비시키고 문명이 낳은 폐해, 그 실패적 측면을 부각시키면서 문명 대신에 원시, 공업 대신에 농업, 인간 대신에 자연, 능동 대신에 수동, 사회 대신에 공동체, 현재 대신에 과거, 세계 대신에 지역, 기술 대신에 마음, 정부 대신에 무정부 등등의 경직된 이분법과 양자택일을 제시한다. 다른 경향들과 마찬가지로 이 경향도 잠재성을 현실성과 연결짓는 데 실패하며 특이성(singularity)2을 공통되기의 실제적 과정 속에 개방하기보다 초월적 위치로 끌고간다. 특이함들의 공통되기보다 그것의 고고하게되기, 혹은 고대적으로되기가 선택되면서 현실적인 것에 정치적 접근은 방기된다. (이에 대해서는 http://amelano.net/1637)

대략적으로 생각해본 바, 잠재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급하게 이동한 이 조류들은 정치적인 것을 사유할 수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이 경향에서 아이러니,  근본성, 인문학, 원시성 등은 정치적인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로 기능한다. 그렇다고 이 경향들이 정치와 담을 쌓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정치와 관계 맺을 때, 이 경향들은 극단적으로 실용주의적인 태도를 취하곤 한다. 실제로 정치 그 자체가 커다란 의미를 갖지 않기 때문에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가 중요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실용주의가 그들의 행보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이들은 자신들의 사유가 초월적이면 초월적일수록 정치에서는 자신의 관심을 실현하기에 현실적으로 힘 있는 것, 실제로 유용한 것, 달성 가능한 것, 지속가능한 것 등을 추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직접적 유용성 관심이 이 경향을 지배한다.  그래서 정치적인 것에 대한 사유의 부재는 실제에서 '좌충우돌'의 정치적 태도를 산출하곤 한다.

이러한 사유와 감성의 정세 때문에 평등 명제에 입각한 정치적인 것의 재구축 시도(랑시에르), 해방이나 변형과 구분되는 시민인륜적 갈등에 입각하여 민주주의를 재구축하려는 시도(발리바르), 맑스의 혁명적 코뮤니즘(운동)을 마키아벨리적 계기(정치적인 것)를 통해 실현하려는 시도(네그리/하트) 들이 매우 의미심장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필요가 있다.



  1. http://jayul.net/view_article.php?a_no=1451&p_no=1 [Back]
  2. 원시성으로 이해되는 것은 실제로는 문명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특이성들이다. 특이성들은 문명의 바깥에서 찾아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문명 속에서 문명에 대항하고 있는 것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Back]
2010/03/04 08:38 2010/03/04 08:38
김종철의 강연요지를 읽어본다.

"자연의 순리에 자신들의 삶의 욕구적응시키는 근본적으로 겸허한 태도와 감수성이야말로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자질이다. 또, 그러한 감수성이야말로 모든 진정한 문학적 감수성의 본질일 것이다. 지금 보는 것처럼 오로지 기술의 힘에 의하여 위기를 해결하려고 한다든지, ‘안락을 위한 전체주의’를 유지하려고 한다든지 하는 것은 결국 인간성의 황폐화를 불가피한 귀결로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심각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대문명끊임없이 고치고 부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어 편리함과 효용성, 경제적 가치만이 현대문명이 섬기는 유일한 가치가 되었다. 이제 이러한 것에 대한 전면적·근원적 비판과 도전이 절실하다. 세계는 관리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가만히 귀를 기울여 할 존재다. 그것이 구원의 길이다. 모든 것을 일차원적인 유용성 속에서 평가하는 상황에서는 결국 자연도 황폐화되고, 인간도 타락할 수밖에 없다. 이제 ‘쓸모없는 것’을 기리고 찬미하는 정신적 공간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인간이 과연 어떤 상황에서 가장 행복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를 깊이 성찰하려는 노력과 결국 같은 것이다. 그동안 문명은 끊임없이 세계를 정복함으로써, 사회적 약자와 자연을 누르고 부려먹음으로써 행복의 크기를 증대시키려고 무작정 달려왔고, 그 결과는 지금과 같은 사회적·인간적·생태적 재앙으로 귀결되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근본적인 방향 전환이고, 그것을 위해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투적인 가정, 논리들을 철저히 뒤집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진보’가 아니라 개안(開眼) 혹은 회심(回心)이다. 그리고 이것이 불가능을 향한 문학의 도약대다."(강조는 인용자)

삶의 욕구와 분리된 자연의 순리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신일 것이다. 우리는 바로 지금 삶의 욕구와 분리된 하나의 순리, 자본이라고 불리는 법과 순리에 "적응"하는 "겸허한 태도와 감수성"에 젖어 있다. 축적하라, 축적하라, 축적하라는 명령 앞에서 우리들은 너무나 고분고분하고 겸손하다. 순종과 겸손의 덕목이라면 우리 시대의 인간들이 결코 뒤질 덕목이 아니다. 부자가 되라는 명령을 떠받들기 위해서라면 혀밑 근육을 자르고 장기를 잘라 팔고 온갖 위험을 무릅쓰며 신체를 성형하는 데 어떤 주저도 없다. 이것이 살아있는 자들의 죽은 삶을 규정한다. 김종철이 현대 문명이 경제적 가치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을 비판할 때, 그것을 '현대 문명은 경제적 가치만을 섬긴다'고 표현할 때, 그것은 바로 이 자본에 대한 섬김과 복종의 문화를 지칭한 것이리라.

그런데 경제적 가치에 대한 섬김은, 김종철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유용성에 대한 섬김이 결코 아니다. 유용성은 경제적 가치, 교환가치(가치)의 축적에 종속된다. 유용성은 가치창출과 가치축적의 수단이지 결코 목적이 아니다. 유용한 것들, 쓸모 있는 것들을 찬미하는 것과 현대 자본주의 문명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  또 축적은 "행복의 크기를" 증대시키는 것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가치는 사회적 개인들이 대화하는 방식이며 그들의 언어이다. 우리의 사회는 양적 가치로서의 교환가치를 가지고 조직되어 있다. 바로 이것이 사회의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려는 만인의 투쟁을 불러오고 축적의 메달따기에 전 삶을 바치도록 만든다. 아직 인간은 교환가치 외에 현대 사회를 조직할 다른 대안적 가치를 발명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 이것이 사회적 인간적 생태적 재앙이 지속되는 조건이다.

이 상황에서 김종철은 자본이 아니라 자연을 섬기자고 제안한다. 자본에 대한 충성과 섬김 대신 자연에 대한 충성과 섬김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게걸음을 치자는 것이다. 생명은 주어진 것에 순종하는 힘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초과/잉여의 힘이다. 특히 인간은 주어진 자연을 "끊임없이 고치고 부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진화한 류이다. 그것을 달성하는 수단이 기술이었다. 기술은 섬김을 거부하고 복종을 거부하면서 획득한 인간의 사회역사적 능력이다. 아니 기술은 생명이 스스로를 조직하는 방식이다. 유전자부터가 정보요 기술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자연존재임을 벗어났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인간은 새로운 자연이다. 김종철은 이 새로운 자연이 주어진 자연(엄밀한 의미에서 주어진 자연이란 없고 모든 자연은 만들어진 것이다) 앞에 머리숙이는 길만이 개안의 길이라고 제안한다. 이것은 인간을 무력하게 하고 산 것을 죽이는 다른 방식이 아닐까? 타나토스(죽음)의 충동이 이 논리를 휘감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태, 생명의 이름으로 죽음과 무기력을 제안하는 것이지 않을까? 기술의 자본주의적 전유와 기술 일반을 혼동할 때, 자본주의적 문명과 문명 일반을 혼동할 때, 우리가 인간적 생명을 송두리째 제물로 내놓아야 하는 위험에 노출되는 것은 아닐가?
2010/02/26 17:18 2010/02/26 17:18
랑시에르의 정치학의 초점은 정치적인 것을 생태적인 것, 사회적인 것으로부터 독립시키는 것에 있다. 그는 정치적인 것을 감각적인 것(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 아는 것 등) 위에 정초한다. 말하는 것의 평등, 보는 것의 평등, 아는 것의 평등을 그는 정치적인 것의 초역사적이고 보편적인 틀로서 제시한다.1 이것은, 치안(le politique)를 파열시킬 데모스demos 혹은 민중people의 힘이다. 치안은 감각적인 것의 임의적 나눔을 조직하고 그것을 지배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불평등 질서를 구조화한다. 반면 정치적인 것은 신체들의 이 나눔질서를 파열시키는 특이한 행동들이다. 그것은 무대에 오른 사건들의 사이공간에서 논쟁적 장면을 구축한다. 그것의 주제는 항상 "말하는 존재의 평등"이다. 이것을 실행하는 데모스는 인구의 합계도 질서 안에서 멸시당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오히려 질서를 넘어서는 것, 즉 초과/잉여로 이해되어야 한다.

랑시에르가 질서를 파열시킬 길을 찾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는 질서를 무엇보다도 평등한 것을 불평등하게 나누는 것으로 사고한다. 무엇이 평등한가? 그것은 감각적인 것(le sensible)이다. 감각적인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랑시에르에게서 보고, 듣고, 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등의 능력이다. 이 능력의 평등을 주장함으로써 기존의 나눔양식에 파열을 도입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이 랑시에르의 정치학이 갖고 있는 민주주의적 함의이다.2

그런데 감각적인 것이 보고, 듣고, 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에 국한될 때, 그래서 만들고, 비틀고, 부수고, 짤 수 있는 등의 능력들(아렌트가 행위action과 구분해서 노동labor과 작업work의 활동에 할당한 능력들)을 의식적으로 배제할 때, 다시 말해 정치적인 것을 생산적인 것으로부터 분리시킬 때, 랑시에르의 민주주의가 발본화된 사회민주주의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랑시에르의 정치학의 문제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확장해야 할 순간에, 생산적인 것 속에서 정치적인 것을 실행해야 하는 순간에 생산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의 바깥에 방치한다는 점이다.3 아니 생산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으로 기능하고 있는 현실을 외면한다는 것이다.

랑시에르가 정치적인 것을 생태적인 것, 사회적인 것, 기술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이 반대로부터 정치적인 것을 비생태적인 것, 비사회적인 것, 비기술적인 것으로, 한 마디로 비생산/반생산의 독자적 영역으로 설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정치적인 것의 능력을 축소하고 정작 정치적이어야 할 시간을 건너뛰게 만드는 것이다. 다중의 활력의 운동으로서의 정치적인 것은 무대에 오른 사건들의 사이공간에서 움직인다기보다 사건들이 전개되는 무대 그 자체이다.

다중은 무대의 사건들 사이에서 논쟁적 장면을 연출하는  또 다른 주체라기보다 아예 기존의 무대를 뒤엎고 자신의 무대를 세울 주체이다. 이런 의미에서 평등주장은 너무 소극적이다. 그것은 활력을 양적인 것으로 제시한다. 나눔partage이 정치의 전면에 부상함으로써 만듦produire이 후경으로 밀려난다. 생산관계의 문제가 생산력의 문제를 억제하면서 그것으로부터 분리된다. demos/people은 나눔의 주체이다. 하지만 multitude는 창조의 주체이다.

둘 다 excess로 설명될 수 있지만 demos의 excess는 분배질서의 변형이며 multitude의 excess는 분배의 문제를  지엽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생산의 excess이다.  다중의 excess는 능력의 평등에 따른 분배의 평등(능력에 따라 일하고 능력에 따라 분배한다로서의 socialism)의 excess가 아니라 능력의 평등을 넘쳐 흐르는 분배의 공통(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의 communism)의 excess이다. 평등은 양이며 공통되기는 질이자 관계이다. 평등은 나눔/분배이고 공통되기는 만듦/생산/창조이다. 그래서 평등은 풀려나기(emancipation)일 뿐이지만 공통은 자유롭기(liberation)이다. 평등 정치학은 공통되기를 가로막는 구조화된 불평등에 대한 저항을 개시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평등 정치학이 차이(다르게되기)를 사유하기 어렵게 만드는 한에서 공통되기 역시 사유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공통되기가 평등하게되기에서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공통되기가 반드시 평등하게되기에서만 시작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코뮤니즘이 사회주의에서 시작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듯이.

[참조: 랑시에르 정치학의 주요 논점-'생태적 정치학'에서, 강조는 아멜라노 ]
1. Jacques Ranciere emphasizes the extent to which the political is a distinctive realm of action, and thus a polity ought not to be considered an ecology. On Ranciere's account, the public is constituted by bodies with uniquely human capabilities, talents, and skills, and political action is something that only they can do.

2. Jacques Ranciere focuses on a potentially disruptive human force, which exists within (though is not recognized by) the public. He calls this the force of the people or the "demos." The democratic act par excellence is when the demos does something that exposes the arbitrariness of the dominant "partition of the sensible." This is the partition that had been rendering some people visible as political actors, while pushing others below the threshold of note. Politics, as Rancière frames it, consists not in acts that preserve a political order or respond to already articulated problems, but is "the name of a singular disruption of this order of distribution of bodies."

3. These singular disruptions are neither intentional acts nor aleatory eruptions; Rancière locates them in the between-space of the staged event. The demos more or less spontaneously constructs "a polemical scene"within which what was formerly heard as noise by powerful persons begins to sound to them like "argumentative utterances." Such scenes, however different in their cast of characters, always tell the same story: the story of "the equality of speaking beings." The "mise-en-scenes that reconfigure the relations of the visible and the sayable" expose "the ultimate secret of any social order" i.e., that "there is no natural principle of domination by one person over another."

4. The demos is, we read, "neither the sum of the population nor the disfavored element within" but an "excess" irreducible to the particular bodies involved. This idea of a force that traverses bodies without itself being one resonates with Spinoza's conatus and Deleuze's notion of (the motility of) intensities, respectively.

[일반지성에 대한 네그리와 랑시에르의 견해 비교]

Stultification plays out in historical narratives:

“The most elementary hierarchy is that of good and evil. The simplest logical relationship that can serve to explain this hierarchy is that of before and after. With these four terms, we have the matrix of all explications. Things were better before, say some (…) Let’s try then to preserve or revive that which, in our distinctions, still holds us to the principle of the good. Happiness will come tomorrow, respond the others: the human species was like a child left to the caprices and terrors of his imagination (…) Now, minds are enlightened, customs are civilized, and industry spreads its benefits. (…) Capacity must from now on decide social ranks, and it is education that will reveal and develop it.”


Digression on Negri:
This passage just quoted evokes and characterizes the concerns I’ve been coming to with regard to Negri’s work and the related work of others, for obvious reasons. The questions regarding Negri which arise are: does Negri’s historical narrative of the becoming-intelligent of people, the becoming-equaly, (one of increasing good after, to use Ranciere’s four point grid) stultify? If so, how, and with what results? Two other questions: the principle behind or implied in universal teaching, equality of intelligence, as well as the quote about words as larvae, parallels what Negri and others call general intellect or the common. Only, for Ranciere/Jacotot, this – I am tempted to call it ‘universal intellect’ – has always existed (and so, by extension, has always been in relation to capitalist production as long as it has existed), rather than the entry into production by general intellect or the becoming-common of labor narrated by Negri et al. How could Negri answer the challenge posed by this idea? As I see it, the options are to deny the supposition of equality, or to announce that equality has come about recently, or to say that there is a difference in production today such that immaterial labor, unlike prior labor, is emancipatory or allows a measure of emancipation, while prior labor was solely based on (solely produced) stultification. The second other question is regarding immaterial labor. If immaterial labor and the immaterialization of material labor are the bases for the political project and political possibilities, how does this avoid re-instantiating hierarchy? That is, if immaterial labor is labor with the capacity to emancipate itself, if it is intelligent labor, then presumably the level of immateriality should correspond to a level of potentiality or intelligence (Negri does not measure immateriality, but the idea is implied: if there is material labor, immaterial labor, and material labor that is undergoing a process of immaterialization, then this implies quantities of immaterialization/immateriality. The fact that measurements have not been invented for this does not matter, as the point is implied in Negri’s work), then this must mean an instantiation of inequality at the theoretical level. Finally, Negri’s historical narrative is, at a minimum, a narrative of inequality between before and after, that is, it is a story which attributes incapacity to times earlier than the present: only in the present is multitude possible, only from today onward can self-emancipation and communism happen.4
  1. '지성의 평등은 초역사적이지 역사적이지 않다, 즉 선과 후가 없다'는 랑시에르의 생각에 대해서는 아래에 덧붙인 인용문과 각주3을 참조하라. '다중지성'은 인간의 '보편지성'(랑시에르)의 잠재력이 역사적으로 실현되는 형태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다른 지성의 발현수준과 지성의 보편적 잠재력은 모순되지 않는다. 랑시에르는 전자와 후자를 불평등 명제와 평등 명제로 대립시킨다. [Back]
  2. 랑시에르, 라클라우의 정치학을 인민주의로 규정한 글로는 http://cardiff.academia.edu/PaulBowman/Papers/93611/This-Disagreement-is-not-one--Laclau--Ranciere--Arditi 참조. [Back]
  3. 생산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과 결부짓는 사고법에 대해 랑시에르는 '낡은 경제주의적 사고'라며 명시적으로 반대하며 자본주의는 그 매장자를 생산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TL: You are distinguishing between "being political" and "the police order" – in this regard, do you consider Hardt and Negri's book about the multitude as a "from-the-inside-and-up" kind of reaction? JR: From my point of view, Negri's multitude is still in keeping with what I would call the old economist view of political issues, the idea that the real political stage has to be found in the reality of the productive force, living force, of society. I think Negri is still working on this schema, according to which there will come a real movement from below, which will be the movement of work and transformation of work, and new forms of communication. There is this old Marxist idea that there will be a subversion coming from the system itself, the idea that productive forces engendered by the capitalist system itself will break the system. I don't think that capital creates its own gravediggers, according to the Marxist schema.(http://www.eurozine.com/articles/2006-08-11-lieranciere-en.html) [Back]
  4. http://whatinthehell.blogsome.com/2005/09/09/is-universal-teaching/ [Back]
2010/02/26 09:35 2010/02/26 09:35

《더 문》과 클론의 탈주

Posted at 2010/02/25 09:13// Posted in 쓰기(skribi)/시학_P
영화 《더 문》(감독: 던칸 존스)에 대해 어떤 블로거는 다음과 같은 소감을 쓰고 있다.

결국 영화들 속의 클론들처럼 우리들도 이 사회의 소모품으로 쓰여져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우리는 더욱 비싼 소모품이 되기 위해서 경쟁하고 스펙을 쌓으면 쌓을수록 혼자가 되고 고독해진다.1
영화  속 클론들과 현실의 개인들을 유비하고 있는 것이다. 스펙을 쌓기 위한 경쟁, 더 비싼  가격에 자신을 팔수록  쌓이는 고독. 이 유비를 밀고 나간다면 저 고독하고 삭막한 회색의 달은 자본에게 착취당해 황폐해지고 있는 지구와 유비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 동일한 기억을 가진 샘들이 살아간다. 클론의 기억은 생물학-전자적으로 주입된 기억일 것이다. 텔레비전, 비디오, 신문, 인터넷을 서핑하며 점점 더 많이 동일하게 프로그램된 정보들을 주입하고 있는 현실의 개인들의 기억이 클론 샘의 기억과 얼마나 다를까? 프로그래밍의 집중과 집적 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현실의 개인들은 더욱더 클론화될 것이다.

작은 정보들은 그저 정보일 뿐이지만 정보들이 집적되고 집중되면 그것은 삶을 조형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그것을 조직하여 사람들에게 삶의 방향과 형태와 원리를 부과할 수 있다. 사람들을 전쟁에 나서게 할 수 있고, 부를 유일최고 가치로 추구하도록 만들 수도 있고, 자연에 복종하면서 '순리'의 삶을 살도록 만들 수도 있다. 이럴 때 정보는 상부구조라기보다 삶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토대일 것이다. 샘의 삶은 프로그램되어 있다. 3년간 청정 에너지를 지구로 보내는 노동자로 일하다가 지구로, 가족들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물론 그가 돌아가는 가족들의 품과 지구는 차디찬 기계관이다.

그런데 클론이 이 프로그래밍된 세계의 외부를 지각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자신의 삶이 조작되어 있다고 느꼈을 때는 어떻게 되는가? 프로그램에 구멍이 나고, 예외가 발생하며, 자신의 삶-프로그램을 대상화하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그 프로그램에 주인이 있고 자신은 그가 부리는 자동인형에, 그가 사용하는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가?

《더 문》의 샘은 'SARANG-사랑'호를 탈출하여 지구로 돌아가 루나코퍼레이션의 비리를 폭로하여 주가를 32% 떨어뜨린다. 더 나은 대학, 더 나은 일자리, 더 높은 연봉, 더 많은 여가, 더 넓은 아파트, 더 먼 곳으로의 여행체험을 갖기 위해 매일매일을 더 강도높게, 더 오래, 더 열심히, 더 충성스럽게, 더 바쁘게, 더 비참하게, 더 우울하게, 더 허무하게, 더 아프게, 더 죽고 싶게 일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현실의 우리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혹은 그렇게 일하고 싶어도 주어지지 않는 일자리를 찾아 깨어있을 때는 물론이고 꿈 속에서조차 희비가 교차하는 중단없는 구직노동을 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1. http://strephonwook.tistory.com/368 [Back]
2010/02/25 09:13 2010/02/25 09:13

society와 association

Posted at 2010/02/24 11:09// Posted in 쓰기(skribi)/정치_P
"An die Stelle der alten bürgerlichen Gesellschaft mit ihren Klassen und Klassengegensätzen tritt eine Assoziation, worin die freie Entwicklung eines jeden die freie Entwicklung aller ist."(공산주의당 선언, 2절 끝)
이 구절에서 맑스는 "bürgerlichen Gesellschaft", 즉 시민사회를 계급들과 계급대립으로 점철된 사회로, 그리고 Assoziation, 즉 연합체를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으로 되는 사회로 묘사한다. civil society와 association의 대비로서는 follow/sequel를 뜻하는 "soci"의 공유로 인해 대비가 되지 않는다. 맑스가 여기서 Gesellschaft를 Gemeinschaft와 대비시키기보다 Assoziation과 대비시키고 있음을 유념하자. Gemeinschaft --Gesellschaft--Assoziation.

[참고: 어원조사]
social (adj.) Look up 
social at Dictionary.com
1505 (implied in socially), "characterized by friendliness or geniality," also "allied, associated," from M.Fr. social (14c.), from L. socialis "united, living with others," from socius "companion," probably originally "follower," and related to sequi "to follow" (cf. O.E. secg, O.N. seggr "companion," which seem to have been formed on the same notion; see sequel). Meaning "living or liking to live with others, disposed to friendly intercourse" is attested from 1729. Meaning "pertaining to society as a natural condition of human life" first attested 1695, in Locke. Social climber is from 1926; social work is 1890; social worker 1904. Social drink(ing) first attested 1976. Social studies as an inclusive term for history, geography, economics, etc., is attested from 1938. Social security "system of state support for needy citizens" is attested from 1908.

sequel Look up 
sequel at Dictionary.com
c.1420, "train of followers," from O.Fr. sequelle, from L.L. sequela "that which follows, result, consequence," from sequi "to follow," from PIE base *sekw- (cf. Skt. sacate "accompanies, follows," Avestan hacaiti, Gk. hepesthai "to follow," Lith. seku "to follow," L. secundus "second, the following," O.Ir. sechim "I follow"). Meaning "consequence" is attested from 1477. Meaning "story that follows and continues another" first recorded 1513.
society Look up 
society at Dictionary.com
1531, "friendly association with others," from O.Fr. societe, from L. societatem (nom. societas), from socius "companion" (see social). Meaning "group of people living together in an ordered community" is from 1639. Sense of "fashionable people and their doings" is first recorded 1823.

association Look up 
association at Dictionary.com
1530s, "action of coming together," from L. associationem, noun of action from associatus, pp. of associare (see associate). Meaning "a body of persons with a common purpose" is from 1650s. Meaning "mental connection" is from 1680s; that of "quality or thing called to mind by something else" is from 1810.
2010/02/24 11:09 2010/02/24 11:09
과학과 기술이 노동자들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자본의 무기가 되어온 오랜 시간은 반(反)기술주의, 반문명주의, 반공업주의, 반도시주의적 저항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오늘날 자연주의, 원시주의, 농본주의, 생태주의의 고조는 그러므로  반작용으로서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원시주의는 원시적 삶으로의 복귀를, 농본주의는 자영자급자족적 소농생활로의 복귀를 강조하며 생태주의는 인간의 생태에의 종속과 적응을 주장한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인간 진화 과정에 대한 성찰과 반성에 대한 요구를 포함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지금까지의 진화과정이 드러낸 본말전도, 사물화와 물신화에 대한 거부를 함축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 경향들은 대개의 경우 자본관계보다 기술 자체, 문명 자체, 공업 자체, 도시 자체를 문제 삼는다. 과학과 기술이야말로 파괴하고 타도해야 할 주요한 적으로 설정된다. 유나바머가 그랬다. 그는 자본관계보다 대규모 기술을 더 큰 적으로 삼았다. 그가 과학기술자들에게 우편물 폭탄을 보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자본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기술에 대한 반대를 중심에 놓을 때, 다시 본말은 전도된다.  기술은 인간 지성의 조직화이며 인간 능력의 펼쳐진 책이다. 기술을 적대한다는 것은 인간을 적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과학과 기술(수단, 도구, 기계에 이르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매개 장치들, 그리고 예술)을 통해, 그것을 노동과정에 적용하는 것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잠재력을 입증해 왔고 온갖 환상과 미신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기술의 악마적 효과는 바로 기술 자체의 효과가 아니라 기술의 자본주의적 사용의 결과이다. 축적을 위한 기술만을 중점적으로 개발하고 개발된 기술을 축적을 위해서 주로 사용한 결과 기술은 물구나무 선 진화를 계속해 왔다. 생명을 살리는 기술보다 죽이는 기술이 더 많이 발전해 왔다. 기술이 인간을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니라 자본을 위해 인간파괴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인간에게 있어서 인간은 생태중의 생태이기 때문에 자연 파괴 이전에 인간 파괴(가난, 전쟁, 질병, 감금, 등)가 먼저 그리고 깊숙이 진행되었다. 인간과 삶을 위한 기술은 부차적이고 지엽적인 문제로 되어 왔다.

 우리는 기술에 반대할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기술이 생태보호를 위해 이용되고 인간과 삶을 위해 이용될 것을 주장해야 한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생태는 인간 자신이다. 인간보다 빌딩을, 화폐를, 수익을 더 좋아하는 체제는 인간과 자연을 위해 기술을 개발하고 사용하는 데 인색하다. 그것이 축적이 도움이 될 때에만 그렇게 한다.

기술의 자본주의적 사용이 낳는 문제점들을 기술 일반의 문제로 오인할 때, 반기술주의가 자라나온다. 인간의 욕망은 맹목적인 그 무엇이 아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미 생태를 보호할 필요성을 느끼고 맑은 공기, 깨끗한 물, 유기질의 토양을 욕구한다. 이것은 앞서 말한 '자연으로의 복귀' 경향을 자극하는데 이것은 생태보호 기술의 한 유형으로 파악해야 한다. 생태운동의 발전으로 인해 자본도 그것에 적응하는 기술에 관심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기후 문제는 노동의 관심만이 아니라 자본의 관심으로도 되고 있다. 암치료에서도 화학요법에서 면역요법과 세포요법으로의 이행이 나타나고 있다. 자연과 생태에 대한 관심은 과거로의 단순한 복귀가 아니라 인간의 기술적 지성적 조직적 능력을 통한 자기정화의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생태보호를 위한 자연성의 회복과 탈근대적이고 지극히 문명적인 요소들의 결합을 올바르게 사고할 수 있다. 1

한 인격 속에 한 평이라도 넓고 조금이라도 좋은 아파트를 확보하고 싶다는 욕망과, 건강에 유익할 공기와 물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는 공존한다. 자본주의의 모순적 발전은 한 인격 내부에도 모순적인 욕망들을 불러일으킨다. 더 넓고 쾌적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이 곧 탐욕인 것은 아니다. 더 나은 삶, 다른 삶에 대한 욕망을 억제하고 통제하는 것을 통해 자유가 쟁취될 수는 없다. 협소한 자급자족적 공동체의 삶은 류로서의 인간의 가능성을 닫는다.  소규모 공동체들이 자급자족적이면  그럴 수록 타자들과의 교류와 소통은 부차적이고 우연적인 일로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반지성적이고 반문명적인 삶은 문명적이고 지성적인 삶보다 더 억압적일 수 있었음은 지난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다. 자본주의에서 교환으로 나타나는 교류는 인간 진화의 결정적 요소이며 인간의 사회적 역능을 실현하는 과정이었다. 오늘날 가능하고 유일한 공동체는 류로서의 인간의 공동체, 전 지구적 공동체이다. 물론 이것은 소규모 공동체를 배제하는 개념은 아니다. 전 지구적 공동체에서 이들 소규모공동체들 사이의 교류는 결코 우연적이고 예외적인 것일 수 없고 오히려 필연적인 성격을 띨 것이다. 기술과 문명은 위험요소로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활력으로 기능할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과거로 돌아갈 것인가에 있지 않고 어떻게 인류사에 지금껏 존재한 바 없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존재들(의 특이한 역능들) 사이의 공통관계를 확립할 것인가에 있다. 현대의 국가는 근대 이전의 작은 공동체를 대체한 환상적 공동체이다. 작은 공동체로의 복귀인가 국가보다 더 큰 공동체로의 전진인가? 공동체를 환상적 성격의 것으로 내버려 둘 것인가 그것을 실질적인 것으로 만들 것인가? 이것이 우리 시대에 공동체 문제를 둘러싸고 제기되는 주요한 두 가지 문제이다.
  1. 이와 관련해서는 자연적인 것과 기술적인 것을 결합하려 한 라다크 부흥계획이 참조될 수 있을 것이다. [Back]
2010/02/24 02:41 2010/02/24 02:41
68을 넘어서는 힘이 느껴지는 글 「가을(낙엽) 이후」[footnote]성명서의 겉표지에 낙엽이 한 장 그려져 있다.[/footnote]. 미국에서 2009년 11월에 있었던 버클리 대학 점거 운동에 대한 이 보고서를 읽으면서 기억해 두고 싶은 부분을 번안해 둔다.  1~5절은 발췌부분에 대한 번역이고 가장 중요한 6절은 요지를 비교적 충실하게 번역했다. 누군가에 의해 전문이 번역되어 나올 것을 기대하며. -아멜라노


우리가 위기다
캘리포니아 점거운동에 대한 보고서
http://zinelibrary.info/we-are-crisis-report-california-occupation-movement

점거는 소용돌이이지 항의가 아니다.
1. 천의 12월을 가진 겨울처럼
캘리포니아에서는 아이들이 벽에 "모든 것을 점거하라!"고 쓴다. 그들은 "아무 것도 요구하지 말라!"고 쓴다.

2. 9월, 10월, 11월
한 마디로: 2009년 11월 18-22일에 "운동"은 "점거운동"이 되었다. 버클리 대학 3일 파업의 마지막 날인 11월 20일에 학생들은 바깥에 모여서 휠러관(Wheeler Hall)을 점거했다.

3. 소용돌이: 휠러
"공교육을 구하기" 위한 운동은 사적 소유를 공유화하려는 전투적 욕망과 (무기한으로) 식별불가능하게 되었다.

4. 부수적 피해
경찰의 환상적 권력은 사실상은 갇힌 사람들(people inside; 안에 있는 사람들)의 권력이다. 해방된 사람들(people outside; 밖에 있는 사람들)의 권력(즉 사람권력 power of people)1은 소유의 지배를 정지시키는 것이다.

5. 공유화하기
가르치기(instruction)보다 건물짓기(constrcution)를 더 좋아한, 좀더 거칠게 말해, 사람보다 빌딩을 더 좋아한 버클리 대학2의 번영을 고려하면, 학생들이 빌딩을 저항의 장소로로 설정하려 한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점거들은 자본주의의 시공간 속으로의 물질적 개입으로 일어난다.

6. 우리가 위기다
진정한 변증법은 부정과 실험  사이에 있다. 저항과 거부의 행동이 새로운 사회관계를, 시공간에 대한 새로운 용법을 가능케 하는 것에 있다. 대치가 없으면 실험들은, 그것들의 배경을 형성하는 기존 사회관계 속으로 주저앉을 위험이 있다. 그것들은 단순한 생활스타일이나 문화로 될 위험이 있다. 어떤 실험이 진정으로 시공간과 사회관계를 통제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것은 반드시 권력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포함할 것이다. 3

낡은 것에 대한 부정이 없이는 새로운 것도 없다. 반면 새로운 것을 창발시키기 못하는 것은 낡은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
불화의 프로젝트, 거부의 대학, 연구하고 파괴하기(R&D), 반자본 프로젝트. 부정의  수사학은  바리케이드의 위상학과 합치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원한다. 이 부정은 표류로 되었다. 총체성에 대한 욕망은 전부가-아닌-것에 대한 부정으로 나아간다. 우리가 바로 그 위기이다. 이것은 "운동"을 긍정할 수 있는 유일한 감각이다. 우리가 권력이다Nous sommes le Pouvoir. 이것은 68의 슬로건이었다. 이 슬로건은 "우리"의 역량을, 연대의 긍정적 권력을 부각시킨다. 우리가 위기다We are the Crisis는, 우리의 존재를 파국에, 일정한 정도의 무기력에, 우리의 능력 밖에 있는 통제할 수 없는 조건들에 연동시키면서, 이 권력의 일부를 양도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우리가 위기다는 우리를 징후이자 동시에 처방으로 새긴다. 그것들의 얽힘을 피하려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 얽힘(우리의 조건)이 권력 자체의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가 권력이다는 집단적 역량으로부터 집단적 역량을 위해 쓴다. 우리가 위기다는 저항하며 자본의위기 속으로 객관적 조건 속으로 실험아는 집단이 쓴다. 어원적으로 위기crisis는 규정, 결정을 의미한다. 그 슬로건은 단지 경제의 "표현"일 뿐인 "우리"에 대한 어떤 목적론적 규정도 갖지 않는다. 우리we에 대해 결정하는 것, 자본의 객관적 조건 내부에 있으면서 그것에 대항하는 징후이자 처방으로서의 집단에 대해 결정하는 것, 이것이, 현재의 점거 운동이 저 객관적 조건들을 파열점으로 밀어붙이려고 시도하는 결정의 벡터이다.






http://howtheuniversityworks.com/wordpress/archives/231
  1. 나는 여기서 민중권력이라는 통상적 번역을 피했다. 사람권력, 산권력이야말로 삶정치의 지향일 것이기 때문이다. [Back]
  2. 버클리대학뿐만 아니라 한국의 대학들을 포함하여 세계 모든 대학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Back]
  3. 우리 시대의 공동체운동들이 귀에 담을 필요가 있는 경구로 느껴진다. [Back]
2010/02/23 06:15 2010/02/23 06:15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이른바 불법낙태 고발사건으로 비화된 낙태논쟁은 어떤 문제들을 함축하는가?

1. 개체적 생명체와 분리된 생명 일반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명 일반은 생명체들의 자기보존과 자기확장의 노력들에 의해서 생산되고 재생산되는 결과이지 결코 생명 개체들을 낳는 원인이 아니다. 요컨대 생명이 개체들의 생명적 활동들에 대한 추상의 결과이지 그 역이 아니다.

2. 생명을 생명개체(생명체)들의 원인으로 보는 전도된(물구나무선) 관점에서 생명숭배라는 생명에 대한 종교적 태도가 나온다. 이 종교적 태도가 생명은 무조건적으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관념 폭력으로 전화되는 데에는 어떤 장애물도 없다.

3. 생명에 대한 존중은 생명체에 대한 존중과 같은 것이 아니다. 생명체는 자기보존의 욕망과 힘을 갖고 있지만 생명 일반은 그 자체가 추상물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갖고 있지 않다. 추상물로서의 생명에 대한 무조건적 존중은 본질적으로는 종교적 태도이다. 

4. 추상물로서의 생명에 생명체와 다를 바 없는 실체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생명체를 생명 개념에 종속시키는 것은 생명체에 대해 크나큰 위험으로 작용한다. 생명이 생명체로부터 독립되어 생명체 위에 옹립될 때, 생명 개념(혹은 개념으로서의 생명)을 사적으로 소유하거나 독점함으로써 개별 생명체들을 지배할 수 있고 바로 그것으로서 생명체들의 생명활동을 지배하거나 박탈하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5. 이것은 가능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이고 미래에 올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있어온 것이다. 하나님(신)이라는 개념을 독점한 소수의 사람들(성직자들)이 오랜 시간 동안 개인들(그리고 동식물들)을 지배해 왔다. 이런 방식으로 생명이라는 개념을 독점함으로써 타자들의 생명활동을 지배하는 것이 가능한데, 오늘날은 종교가 아니라 과학의 이름으로 이러한 통치가 수행된다. 온코마우스는 그 종의 생명활동 전체가 특허권을 소유한 하버드 대학에 소유되어 있다. 온코마우스라는 생명종의 생사여탈권을 하버드대학이 갖고 있는 만큼 모든 온코마우스의 생명력은 하버드대학의  소유물이다.

6. 프로라이프는 '생명의 이름'으로 낙태를 불법화하고 형사처벌을 강화하자고 주장한다. 만약 자궁에 착상되어 탯줄을 통해 어머니로부터 영양을 제공받고 있는 태아를 생명개체라고 파악한다면 정자나 난자도 생명 개체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고 하나하나의 신체기관들, 심지어 세포들조차 생명개체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생명에 대한 침해가 처벌의 대상이라면 자기생명개체를 파괴하는 자살도 처벌되어야 하고, 정자를 임의로 방출하여 죽게만드는 자위행위도 처벌되어야 하며, 난자를 죽음의 위험에 처하게 하는 월경생리도 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생명의 이름으로 생명 침해 행위 일체를 처벌의 대상으로 파악한다면 모든 육식은 법적으로 엄하게 금지되어야 할 것이며 심지어 식물의 생명을 해치는 채식행위도 금지되어야 할 것이고 처벌되어야 할 것이다. 오직 순수 무기물의 섭취만이 용인되어야 할 것이다.  미생물의 생명을 해칠 수 있는 약물복용 행위도 처벌되어야 할 것이다. 도로를 걸으면서 미물들을 밟아죽이는 행위도 처벌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근본적인 프로라이프(pro-life)의 태도일 것이다.

7. '생명의 이름으로' 생명체를 처벌하자는 것은 처벌권을 갖고 있는 국가의 품에 생명을 갖다 바치는 것이며 생명을 국가의 소유물로, 생명을 국가생명으로 정의하자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 역사적 경험은 우리에게, 국가가 생사여탈권을 쥐게 되었을 때, 생명체가 보호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보호의 이면은 억압이었고 후자가 더 지배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가의 지배 하에서 생명체는 마루타로, 총알받이로, 신에게 바치는 봉납물로, 착취와 수탈의 대상으로 되어 왔고 그것의 생명력을 부단히 박탈당하고 침해당해 왔다.

8.프로라이프가 이름에 걸맞게 진정으로 생명체들의 생명력을 옹호하고자 한다면 매일매일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고 있는 전쟁국가 미국의 행동에 항의하고, 파병에 반대하고, 거리에서 죽어가는 노숙자들의 삶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강도높은 장시간 노동으로 병들고 죽어가는 노동자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본주의에 반대하고, 무엇보다도 형사처벌(그리고 물리력)이라는 수단으로 생명체에 반하는 온갖 억압과 착취와 수탈의 행위들을 방조하거나 조장하고 있는 국가 자체에 반대하는 데 나서야 할 것이다.

9. 태아는 개념으로서의 생명에 속하지만 아직 독립된 생명개체는 아니다. 생물학적 개체는 독자적 막(울타리)을 가짐으로써 성립하지만 태아의 생명은 모체에 열려 있기 때문이다. 태아는 준개체이다. 그것은 개체적이지만 여전히 모체의 일부이다. 낙태를 태아살해의 관점에서 볼 것인가 모체생명활동의 관점에서 볼 것인가는 결코 스콜라적 논리 문제가 아니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삶의 실제적 해방의 문제이다.

10. 낙태는 다양한 이유에서 실행된다. 하지만 그 핵심은 모체가 출산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왜 원치 않는가? 1)혼외나 미혼의 임신, 즉 사회가 그 임신을 용인하지 않을 때 2)보육과 양육의 어려움 3)자신이 원치 않는 성의 태아일 때 4)장애태아나 선척적 질병을 앓는 태아일 때 등등.

11. 출산을 원치 않을 때 낙태가 시행되지만 낙태에 따르는 고통과 희생을 원하는 사람도 없다. 낙태는 취미나 기호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불가피하게 선택되는 조치일 뿐이다. 낙태를 하게 되는 저 원치 않음의 원인들(정상가족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폭력, 미혼의 출산에 대한 차별, 가난을 가져오는 자본주의적 착취와 수탈, 성차별, 질병과 장애에 대한 책임의 개인화 등)을 제거하거나 축소함으로써만 이 불가피성은 줄어들고 불가피한 선택으로서의 낙태도 줄어들 것이다. 낙태의 불가피성을 온존한 상태에서 선행되는 형사처벌 요구는 인구감소를 막으려는 국가의 생명정치를 대행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12. 오늘날 낙태가 하나의 의료산업의 소재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비극적인 것이고 생명체로서의 모체와 준생명개체로서의 태아에게 지극히 위험한 사태이다. 프로라이프의 한국산부인과협회 산하 낙태시술의료업체에 대한 고발은 관점과 방법에서 중대한 문제를 안고 있고 실제로는 더 큰 위험을 생명체들에게 가져오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지만 그것이 제기하고 있는 낙태의 산업화 문제는 중요한 문제제기로 받아들여야 한다.  낙태의 산업화는 산업의 번창을 위해 불필요한 낙태가 자행될 수 있는 가능성(어쩌면 현실성)을 제고한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므로 이것을 문제로 받아들이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집단적 노력을 기울이는 것 역시 필요하다.

13. 하지만 낙태에 대한 권유(고출산의 1970년대)를 한 것도 국가이고 낙태에 대한 금지(저출산의 2010년대)를 추진하는 것도 국가이다. 태아는 이렇게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생명정치의 대상으로  놓여 있다. 이 상황을 타개하는 것이 생명체들의 살아 있는 운동의 과제여야 할 것이다. 프로라이프가 진정 생명체의 생명활동의 편에 서고자 한다면 생명을 통치의 대상이자 수단으로 삼는 국가의 생명권력적 움직임을 제어하는 데 힘을 합쳐야 할 것이다.



   
2010/02/21 10:27 2010/02/21 10:27
예술은 비물질노동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예술작품 중에서도 조형예술은 물질적 결과를 낳으며 음을 사용하는 음악, 몸을 사용하는 춤, 행위를 사용하는 퍼포먼스는 물질적 결과를 낳지 않는다. 언어예술의 경우에도 구전예술은 물질적 결과를 낳지 않고 문자예술은 그것을 낳는다. 들뢰즈가 예술작품을 감각의 기념비로 파악할 때, 그리고 루카치가 객관세계로부터 예술[미적 반영]의 거리두기와 독자적 세계로서의 자립화를 이야기할 때, 물질적 결과를 낳는 예술과 그렇지 않은 예술 사이의 구별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일까? 가령 자립적것은 물질적인 결과를 낳는 예술이고 과정 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자립화되지 못하는 것으로 보는 것일까?

논리적으로는 루카치의 논의나 들뢰즈의 논의 모두 물질적 결과 여부를 기념비화나 자립세계화의 지표로 삼고 있지 않다. 물질적 결과를 낳지 않는 예술활동들의 경우도 감각의 기념비화나 일상세계로부터 거리를 두는 자립세계화가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험적으로는 반드시 그런 것 같지 않다. 루카치가 조형예술과 춤 사이에 일정한 차이를 설정할 때, 즉 춤이 내면적 활홍경에의 함몰되어 있어 세계로부터의 거리두기에 성공하기 어렵다고 할 때 물질적 결과가 없는 예술에 대한 부정적 평가로 기우는 것 같다. 직업적 예술가 집단의 탄생과 그러한 노동분화의 긍정적 의미를 강조할 때도 그러하다. 들뢰즈의 경우도 문자예술과 회화, 그리고 영화를 주된 분석 대상으로 삼았음을 주목할 수 있다. 물질적 결과를 갖지 않는 예술형태에 대한 분석은 드물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 물질적 결과를 낳지 않는 예술활동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일상적 삶이 예술적 차원을 갖게 되면서 일상생활 그 자체에서 실현되는 예술행위들을 식별하는 것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술의 독자성을 무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예술화라는 역사적 경향을 식별하기 위한 것이다. 일상예술은 인간이 일상적 삶에 함몰되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살아나갈 초월론적 능력을 제공하는데, 여기에서 물질적 결과를 낳는가 아닌가는 유의미한 기준일 수 없다. 일상으로부터 분리된 공간에서, 일상시민으로부터 분리된 전문 예술가 집단이, 독자적 예술공간을 형성하는 것이 '거리두기-외화-자기귀환'을 거치는 예술활동의 목적으로 되었던 시대는 끝났다. 그것은 지금 예술을 수단으로 하는 이윤축적이라는 목적 하에서만 인위적으로 가동되고 있다. 삶예술은 그러한 메커니즘에 대항하면서 예술의 삶으로부터이 분리가 아니라 삶 자체를 어떻게 예술화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의식 하에서 성장해 나오고 있는 운동이다.


2010/02/20 14:06 2010/02/20 14:06
루카치는 예술이 외부세계를 전유하는 활동이라고 파악한다. 주관적 요소 이전에 객관적으로 외부세계가 실재한다. 미적 주체성은 노동을 통해 형성되는 객관적 외부세계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발전되어 나오는 반영형식이다. 미적 반영은 대상세계로부터의 일정한 거리두기를 포함하며 그 거리두기를 통해 예술작품은 독자적 세계, 자율적 현실로서 자신을 정립한다. 즉 "미적 형상을 통해 하나의 독자적 세계가 창조된다".(미학, 2권, 14쪽) 이것은 미적 내용이 심오한 형식으로 완성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미적 반영은 직접적으로 주어진 인간으로부터 분리되는 반영 속에서 자기객관화를 달성한다.

미적 반영은 주술로부터 독자화되어 나왔다. 이것은 열광적 황홀의 효과에 의지하는 춤보다 조형예술(그리고 언어예술)에서 더 두드러진다. 조형예술이야말로 확고한 외부세계의 재현이기 때문이다. 열광적인 황홀경은 점점 사라지는 데 이것은 거리취하기의 강도가 더 높아졌다는 의미이다(22). 거리두기가 강해지면 주술적 효용보다 모방적 요소가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이것이 이집트 예술이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와 갖는 차이이다.

이 과정은 직업적 예술가 집단의 형성과 궤를 같이 한다. 이때부터 장식예술의 무세계성(Weltlosigkeit)은 약화되고 리얼리즘적 세계성이 공고해진다. 다른 한편 물질문화가 낮을수록 개별 사물들을 감각적으로 관찰하고 고정하는 재능이 뛰어나다. 이런 의미에서 동굴벽화의 자연충실성은 열정적인 리얼리즘 예술질서의 한 부분을 이룬다. 장식예술의 무세계성(장식경향)과 개별화된 대상 모사(모사경향)라는 두 가지의 원시성을 통합하면서 직업적 예술가 집단이 탄생하면 현실을 시각적 감각적으로 수용하는 고도의 집중성이 출현하여 비상한 수준의 작품을 낳게 된다.

루카치는 인간이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자연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입장에 서 있다. 일상생활에서 노동을 통해 인간이 달성하는 사회는 비자연이 아니라 제2의 자연이다(42). 같은 논리에서, 예술세계는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독립되어나오는 제3의 자연일 것이다. 자신들의 환경을 지배하는 주인이 되었다는 체험은, 정상적인 인간적 삶이 확보되어 있다는 느낌은 역사적인 것이며 그것은 인간의 지각방식에 일대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직접성으로부터 거리를 취하는 예술행위는 노동을 통해 진정한 주체성이 확립된 것의 성과이다. 헤겔은 "도구를 통해 주체는 자아와 객체 사이에 일종의 표현매체를 만드는 셈이며 이 표현매체야말로 노동의 진정한 합리성이다."(48 재인용)라는 말로 이러한 인식을 표현했다. 루카치는 이것을 "작품 속에 삶의 새로운 성취들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직접성을 창출해 낸다"(51)고 달리 표현한다. 언어예술의 경우에도 진정한 시적 언어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자연반영적 언어의 단계를 거쳤다('검다' 이전에 '까마귀 같다').

질서의 원리는 세계지배의 산물이다. 원시농경 및 사육의 단계를 넘어서면서 예술은 추상적 질서로부터 구체적 질서로 원리의 이행을 겪는다. 무세계적 모사, 무세계적 장식, 그리고 세계창조적 예술로의 이행은 사회적 노동의 보편성을 통해 달성된다. 예컨대 리듬(대칭, 비례) 같은 것이 삶의 모든 산물들을 관류하는 힘을 얻게 되는 것도 이 과정에서다.

희곡, 회화 등 세계창조적 예술장르의 등장을 규명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이것은인간이 대상적 공간을 안정적 공간으로 체험하기 시작한 것의 산물이다. 이 장르들은 복합한 역사발전의 미적 반영이자 표현형식이다. 루카치는 "우리가 입증하고자 하는 어떤 변화도 기본적인 경제적 변화의 결과로 야기되는 상부구조 안에서의 운동들"(70)이라고 단언함으로써 이러한 발전을 경제적 발전의 효과로 돌려버린다. 실제로 루카치가 이야기해 온 것들은 인간이라는 대상적 존재와 대상 세계와의 부단한 섭동의 과정이었지 경제적 변화라는 통상적 술어로 축약할 수 있는 과정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주술에서 예술로의 이행은 미적 주체성이 경제적 주체성의 사후적 효과라기보다 노동 주체성(삶 주체성)의 두 측면이자 공정이었다고 해도 좋을 어떤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루카치의 미학사 서술은 그가 속해 있었던 맑스레닌주의적 교의로 계속 환원되곤 하지만 총체적으로는 그것을 넘어서는 요소를 갖는다. 미적 주체성이 자연적 사회적 제약 속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강조함과 더불어, 그것이 그 제약을 넘어서는 힘을 갖는다는 사실에 대한 강조가 더불어 필요하다. 루카치는 후자를 전자만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기계적 유물론의 경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은 사회적 요구는 예술의 활동공간이다(77)라는 명제로 표현된다. 예술이 사회적 요구의 활동공간일 수 있는 가능성은 배제된다. 후기자본주의 예술관을 관념론적 조류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그의 미학관(75)도 이 역진을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루카치는 노동 분화에 대한 낭만적 반자본주의적 성향의 비판에 대해 엄격하게 거리를 둔다. 이는 노동 분화가 인간에 내재하는 능력과 자질을 일깨워서 인간의 전체성 개념을 확장하고 풍부하게 해주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간다(86)는 믿음에 기초한 것이다. 노동분화가 어떤 문제를 현실적으로 가져오고 있다 하더라도 노동을 예술과 분리불가능한 인간발생 활동으로 보고 있는 점은 현대 예술의 자의적 경향에 대한 중요한 비판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아니 우리는 지금 예술과 노동의 중첩이라는 탈근대적 사태에 직면해 있다. 예술을 기술적인 것만 연결지으려는 태도는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을 생산적인 것으로부터 분리시켜 오직 정치적인 것과만 연결지으려는 널리 유행하고 있는 태도도 문제적이다.

루카치가 파악하는 미적 주체성은 객관성 안에서 가치지향적이고 가치창조적인 불가결의 역할을 하는 계기이다.(99) 이를 위해서는 자연발생적인 추상성을 의식적인 추상성으로 변형해야 하고 다시 추상성을 지양하여 구체성으로 전화해야 한다. 루카치는 맑스를 따라, 인간은 자연력과 생명력을 갖춘 활동하는 자연존재라고 본다. 그리고 노동은  대상성의 형식들을 그 형식에 내재하는 법칙의 적용과 목적의식적 인식을 통해 인간의 목적에 부합하게 변형하는 행위이다.(103) 인간은 이 대상적 세계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면서 능동적으로 작용한다. 인간은 현실에 몰입하면서 그것을 극복한다. 이상과 달리 욕구는 인간에게 합당한 객관성을 추구한다.(106) 이것이 노동을 통한 인간의 자기창조의 과정이다. "인간은 대상적 세계를 가공하는 가운데 비로소 진정으로 자신을 윶거 존재로 보존하게 된다"(맑스. 104 재인용).

유물론적 인식론에서는 객관 없는 주관 없다. 하지만 루카치는 미적 형상의 영역에서는 이것이 역전되어 주관 없는 객관 없다는 명제가 성립된다고 본다.(109) 이리하여 미학에서 주관성과 객관성은 분리불가능한 것으로 결합된다. 이것을 루카치는 외화와 자기회귀의 운동으로 설명한다. 여기로부터 두 가지 미학적 명제가 나온다. 첫째 모든 예술의 본성은 리얼리즘적이다. 둘째 모든 미적 대상성은 옹호 아니면 거부의 당파적 입장을 내포한다.(111-2)

루카치에게서 미적 주체성은 앞서 말한 노동에 근거하여 개별적 개체에서 유적 인가의 자기의식으로 성장한다. 이 생각은 "산업의 역사, 그리고 산업의 대상적 존재야말로 인간의 본질적인 힘을 펼쳐 놓은 책이요 감각적으로 생생하게 주어진 인간의 심리학이다"라는 맑스의 명제에 근거한다. 인류학자나 고고학자가 도구와 노동생산물을 가지고서 인류의 발전사를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맑스는 교환을 동물과는 다른 인간적 능력으로 파악하고 있음에 주목하자.(121) 동물에게는 교환의 능력이 없기 때문에 동물종의 상이한 특성은 동물에게 무의미하게 된다. 보편적 인간성 관념은 비역사적이고 관념적인 것이다. 이와 달리 맑스의 유는 사회역사적 변화의 생성물이다. 그에게서 개체적 삶과 유적 삶은 통일된다.

루카치는 예술작품 자체야 말로 온전하고 진정한 미적 주관성의 실현물, 주관성과 객관성의 통일체라고 말한다.(128) 그리고 미적 주체성의 형성과정은 인간의 유적 자기의식의 형성과정이다.(미완)

2010/02/19 10:54 2010/02/19 10:54

영화 《2012》단상

Posted at 2010/02/19 10:22// Posted in 쓰기(skribi)/문화_K
영화 《2012》는 헐리우드가 그래픽의 매혹에 흠뻑 빠져 있음을 보여준다. 기술의 매혹이 당분간 식지 않을 것임은  아바타의 3D 기술이 끈 인기가 증언한다. 스마트폰의 인기는 그것이 개체(소지자)를 세계상황 속에 직접 드러냄으로써 공간과 시간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제공한다는 데 있다. 자본주의가 아직도 전과는 다른 새로운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은 간단히 무시할 수 있는 측면이 아니다. 대중을 새로움의 매력으로 사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봉기로 나아가는 것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난 영화들은 위험의 크기와 절실성을 놓고 부단히 경쟁해 왔다. 바다에 빠진 비행기, 침몰한 배, 괴물의 침입 앞에선 인간, 일본이나 미국 등 한 나라 혹은 대륙을 덮친 해일이나 지진이나 화산 등등. 《2012》는 그 크기를 '글로벌라이즈'해서 지구 전체를 위험의 무대로 삼았다. 이 점에서 구난 영화는 또 다시 한 극점에 도달한다. 2008년 전 지구적 금융위기의 발발이 국지적 위기를 넘는 상상력을 요구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영화에서 그것은 배경의 확장으로 나타날 뿐이다. 위험의 무대를 지구 전체로 확장했지만 위기가 더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진지성은 약화되었고 실감은 오히려 감소된다. 그 스토리가 의존하고 있는 기독교적 종교적 패러다임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영화 《2012》의 메시지는 그것의 기술적 새로움에 비해 너무 진부하다. 살아남으려면 부자가 되거나 권력자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는 너무 뻔뻔스럽고 대중영합적이며 세속적이다. 노동자들은 부자(10억 유로늘 낼 수 있는 사람들)나 권력자들(G8의 권력자들과 그 가족들)의 관용에 의해서만 구원될 수 있다1는 메시지는 가소로울 뿐만 아니라 구역질을 불러일으킨다. 영화 2012는 첨단의 기술을 권력과 부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무기로 사용하는 반동적 정치영화의 일부이다.  오늘날 정치영화는 오락이라는 위장을 하고 나타나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1. 이러한 의미의 관용에 대한 비판으로는 웬디 브라운 지음, 『관용: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 이승철 옮김, 갈무리, 2010 참조. [Back]
2010/02/19 10:22 2010/02/19 10:22
발리바르는 혁명의 담론을 유지하면서 개혁(평등한 자로 간주될 권리나 물질적 이익들의 쟁취)을 목표로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혁명과 결합된 계급투쟁의 테마와 자유와 관련된 해방의 테마를 결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전자는 사회적 시민권을 후자는 정치적 시민권을 지칭한다. 이러한 두 테마의 결합은 네그리와 하트가 코뮤니즘을 주장하면서도 보편적 시민권, 무조권적 보장소득, 일반적 접근권 등 개혁적 요구를 제안할 때 가졌던 인식과 동일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발리바르에게서 혁명과 개혁은 생산능력의 전개양식들이 아니다. 그래서 사회적 시민권, 정치적 시민권, 다시 시민인륜이 켜켜이 덧붙여지게 되면서도 그것이 생산능력의 사회적 정치적 인륜적 표현이라고는 주장되지 않는다. 발리바르에게서도 생산능력은 다른 유럽 현대정치철학자들에게서처럼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타기시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 이것은 알뛰세르에게서 기원한 정치철학적 조류들의 공유된 문제가 아닌가? 생산관계에서 독립된 생산력을 강조했던 스탈린주의와는 반대로 생산력과 유리된 생산관계를 강조했던 마오주의 정치의 전통이 이들에게 계승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산관계는 생산능력들의 배치나 상호관계로 이해되지 않을 때에는 주의주의적 결과를 낳게 되고 그러한 정치학은 정치적 실용주의에 기울게 된다. 뜻밖에도 발리바르는 예술활동을 하나의 사건으로 인정하는데, 이 때 예술은 대상이자 생산물이며 제도 내의 실천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사회적 유대를 위한 인공보철물이라는 의미에서의 문화와는 구별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예술의 활용은 제도들과 사회세력들의 균형과 더불어 시민인륜(civility)의 구성요소로 이해된다.
2010/02/18 21:05 2010/02/18 21:05
자동차의 전자화. 기계화와 전기화를 넘는 전자화가 급발진이나 시동정지 등의 효과를 불러일으키고 있고 그것이 자동차 내부적인 전자파 장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로나 가로 등 주변에 위치한 전자장치들와의 관계(전자파 교란)에 의한 것이라면 자동차의 전자화가 가져오는 생명에의 위협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인가? 이제 자연이용 기술을 넘어 자연보호 기술이 중요해진 것처럼 개체화된 기술이 아닐 흐름의 기술, 관계의 기술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2010/02/18 20:55 2010/02/18 20:55

주목효과(attention effect)

Posted at 2010/02/15 13:27// Posted in 쓰기(skribi)/정치경제_PE
1. 명절날 이제 네 살인 아이는 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칭찬하고 만져주고 던져주고 돌려주고 당겨주고 안아주고 웃어준다. 그러다가 문득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짧은 순간에 그 아이는 쇳소리가 섞인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 주목을 끈다.

2. 이병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본인 팬의 사랑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강동원과 결혼하겠다며 핸드폰에 강동원의 사진만을 넣고 다니는 한 청소년으로부터 강동원의 팬클럽이 24만명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팬현상은 군중이 누군가를 주목하는 것이고 그 주목된 것에 의해 대리만족을 취하는 방식일 것이다.

3. 스펙을 쌓고 성형수술을 하는 것도 개인이 주목받기 위한 노력이다. 튀어야 하고 쌓아야 하고 다듬어야 한다. 주목받지 못하는 것은 벌지 못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죽음을, 즉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4. 인터넷 기업들의  수익창출 방식은 전적으로 주목효과에 의한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사이트를 주목하고 있는가가 광고비를 결정한다. 그래서 자동차를 비롯한 수많은 상품들에 주목받기 위해 많은 비용이 투자된다. 디자인과 홍보 모두에서.

5. 결국 광고, 홍보, 마켓팅이 지금의 우리 기업들, 연예인, 개인, 심지어 어린이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지배한다. 광고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노동가치에서 주목가치로의 이행이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이행을 규정하고 있다. 


2010/02/15 13:27 2010/02/15 13:27

관, 검, 음

Posted at 2010/02/14 05:37// Posted in 쓰기(skribi)/문화_K
김용의 『소오강호』에 세 가지 세계가 있다. 첫째는 관이다. 관(정치)은 그러나 그려지지 않고 그림자로만 남아 있다. 유정풍이 강호은퇴식을 하면서 관으로 가기 위해서라고 할 때 잠깐 등장할 뿐이다. 둘째는 검(경제)이다. 이른바 '강호'의 세계. 이곳은 파벌로 나뉘어 있고 경쟁으로 점철되며 복수의 피로 얼룩져 있다. 이곳에서  마치 산업처럼 다양한  유형의 무예들이 형성되고 발전된다. 셋째는 음(예술)이다. 음의 세계에서 경쟁은 작아지고 막혔던 것이 뚫리고 경계가 사라진다. 문파간의 경계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의 경계까지 사라진다. 검이 현실적이라면 관은 초월적transcendent이고 음은 초월론적transcental이다. 강호를 거만하게 비웃는다는 뜻으로 읽히는 '소오강호'는 이른바 명문정파의 일인인 유정풍과 마교 곡양이 함께 만든 음악의 악보이다. 김용은 이 두 사람이 함께 죽어가는 장면에서 자신의 유미주의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2010/02/14 05:37 2010/02/14 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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