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을 거치면서 네그리의 사유는 '공통체'(commonwealth)로, 홀로웨이의 사유는 균열(crack)로 발전해 가고 있다. 한쪽은 가장 거시적인 것으로, 한쪽은 가장 미시적인 것으로, 다시 말해 대립적인 방향으로 발전해 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두 사람의 사유의 발전은 그 자체로 흥미롭고 또 생산적이다. 구성적 경향과 비판적 경향의 이 대립은 맑스 속에 공존했던 두 요소가 두 개의 노선으로 분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것은 맑스-레닌-그람시-네그리 노선과 맑스-평의회공산주의-비판이론(루카치, 벤야민, 아도르노)-홀로웨이(개방적 맑스주의) 선의 분화이다. 분화는 생산적이며 새로운 공통평면의 발명을 절실한 것으로 만든다. 이 문제를 위해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조정환 옮김, 갈무리, 2002)에 실려 있는 홀로웨이의 네그리 비판에 대해 네그리가 가한 반비판(이것은 네그리와 꼭꼬의 책, 『글로발』, 조정환 옮김, 갈무리, 근간에 포함되어 있다) 의 요소들을 정리해 둔다.

1.홀로웨이는 현실을 물신주의적 측면에서만 고려한다.  그래서 권력의 모든 형상들을 오직 물신적인 것으로만 간주한다. 이 때 행위의 원리는 거부, 부정으로만 축소되고 제헌권력도 부정된다. 오직 거부만이 혁명의 계기인 것으로 파악된다. 거부의 외부에서, 그리고 피압박자의 '비명' 외부에서는 현실은 완전히 물화된다. 변증법이 승리하고, 그것의 궁극적인 부정성이 주장된다. 이것은 데리다의 '주변', 아감벤의 '벌거벗은 삶', 물상화에 대한 루카치의 비판 등과 유사하다.

2. 홀로웨이가 엥겔스적 전통 속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는 소비에트 맑스주의 속에서, 변증법의 개념이 사실상 장황한 자연법칙으로 변형되었을 때 이루어진 변증법 개념의 타락을 완전히 파악했지만 그는 순수하게 부정적인 방법으로 이러한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효과적이지 않다.  오페라이스모에서 구성적 역능, 제헌권력은 노동의 가치들에뿐만 아니라 자유의 정치적 형상에까지 관계하는 제헌적 긍정성이다.  홀로웨이는 오페라이스모가 노동력에 귀속시키며 보다 일반적으로는 계급투쟁에 귀속시키는 그 구성적 역능까지 부정한다. 이러한 관점 안에서 착취라는 개념 자체를 생각하기 어렵다는 점은 분명하다.

3. 실제로 홀로웨이가 사용하는 바의 부정성으로 환원된 맑스주의 변증법은 변증법의 물신주의적 형태이며 그것은 변증법의 모든 요소들을 분쇄한다. 그것은 물신주의, 즉, 파악하기 불가능한 실재의 비극적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의 다른 면은 절대적 사건으로서의, 즉 대문자로서의 혁명(la Révolution)일 것이다.

4. 홀로웨이는 오뻬라이스모를 기능주의로 비판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기능주의는 자본주의의 모순들을 회피하고 그것들을 중성화하는 것이며 변증법을 모순들과 차이들의 지양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해소적 요소들을 찬미하면서 변증법을 선형적 방식으로 사용한다. 그런데 오페라이스모는 그 문제와 관련해서는 정반대의 작업방식을 생산했다. 오뻬라이스모에서는 변증법이 폐지되었기 때문에, 노동력의 적대적 압력은 그 모순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순을 심화시킨다. 모순들의 이러한 심화는 두 가지 효과를 낳는다. 첫 번째 효과는 주체(노동력, 프롤레타리아, 계급, 다중)의 일관성을 강조하고 그럼으로써 이 존재론적 변형의 배치, 계속된 변형 운동을 이 주체적 실재에게 새기는 것에 있다. 첫 번째 효과의 결과인 두 번째 효과는 주체들(노동력, 프롤레타리아트, 계급들, 다중들)을 자본의 외부로 더욱더 밀치는 것에 있다.탈주는 바로 이 과정의 결과이다.

5. 홀로웨이 에게 있어서 자본의 무기인 변증법은 노동력에 대해서는 저주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해결될 수 없는,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해 내부에서는 해결이 불가능한 이 총체성의 수인으로 남아있게 된다.것은 외부로부터가 아니면 해결불가능한 문제에 직면한다. 이럴때 혁명은 제헌권력이 아니라 신비한 사건으로 된다. '노동거부' 속에서 '제헌권력'의 요소들이나 배치들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노동 '해방'의 과정 속에서 '자유화의 요소들'을) 식별할 수 없다고 보면, 생산과정에서 매장자(거부자)가 생산되지 않는다고 보면 계급투쟁의 역동적인 관점 모두를 금지하게 된다.

6. 주목해야 할 것은 사회주의의 구체적인 역사이다. 다시 말해 제도적 형상 외부에서 계급투쟁을 상상할 수 없다는 점이다. 계급투쟁의 제헌적 과정이 결코 결론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그것으로부터 어떤 결론을 발견하는 것도 아니고, 자연스러운 형상들이나 그 자체의 반복들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오히려 계급관계를 프롤레타리아트적인 활력의 (혹은 다중의) 늘 새로운 공재면을 가로질러서, 다시 말해 계급투쟁의 상이한 극성화들을 가로질러서 발전시키고, 절합하고, 변형시키는 것이다.

7. 이와 연관하여 홀로웨이가 취한 추론의 정치적 퇴행은 혁명과 개혁 사이의 온갖 구조적이고 존재론적인 관계를 그가 발본적으로 거부한다는 점에 있다. 이것은 아주 위험하다. 주권이 통일된 권력을 행사할 수 없고 그것이 이중성을 (다시 말해 운동과 '통치'의 관계를) 제도들의 성격이자 동시에 근본적 지평으로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때에는 특히 그러하다. 톨리아티의 그람시가 아닌 레닌주의적 그람시는 이미 이 점을 통찰했었다. 

8. 홀로웨이의 입장은 코뮤니즘적 대안의 기본적인 유효성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반란의 직접성을 강조하는 점에서 장점이 있다. 그런데 그 '형식 문제'라고 부르는 것, 다시 말해 물신주의의 문제라고 부르는 것은 그에게서는 비판적인 정치적인 방법으로 작용하기 보다는 윤리-도덕적 범주로 환원된다. 물신주의가, 달리 말해 존재론적 부패와 그것의 실천적 결과가 계급 주체의 활력 그 자체를 건드리거나 변경시킨다는 것을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부패가 존재하면 할수록, 그 부패가 대규모적이고 물리적으로 결정되면 그럴수록 혁명적 과정은 구체적인 개혁들에 연결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할 때에는 공상적 꿈들이 지배하게 될 것이다.

9. 오뻬라이스모(노동자주의)가 존엄한 이유는 혁명 개념을 개혁 개념에 결코 해소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오페라이스모가 유효한 이유는 개혁의 개념을 혁명의 개념 속에 늘 해소시켰기 때문이다. 오페라이스모가 유효한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개혁과 혁명의 이 관계 내부에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속에서 그리고 자본주의적 관계 외부로의 탈주 속에서 형성된 프롤레타리아트적 주체의 자율성과 독립성이 주어져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해 착취를, 계급의 실존 그 자체를 동시에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이 함께 주어져 있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10. 우리는 홀로웨이의 정치학을, 삶권력과 삶정치적 활력 사이의 관계를 발전과 민족의 범주 아래에 밀어 넣으려는 라틴 아메리카의 몇몇 제도 좌파의 시도에 대한 최고의 반대를 나타내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선은 변증법적 부정성에 의해 제한되어 있다. 부정성은 단지 "절규"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행복, 평화, 그리고 코뮤니즘을 계속적으로 긍정하려는 다중의 욕망이자 필요이기도 하다.

나는 두 입장의 발전과정과 관련하여 크게는 네그리의 입장을 지지한다. 하지만 그것이 홀로웨이의 입장과 대립한다고는 결코 보지 않는다. 실제로는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에서 홀로웨이가 강조한 절규, 그리고 그의 새로운 책 『자본주의에 균열을 내자』에서 강조하는 크랙(crack)의 방법을, 다시 말해 비판과 부정의 방법을 강력하게 결합할 때 구성의 방법은 약화되기는커녕 훨씬 더 강력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통체』에서 네그리와 하트는 개혁, 사랑, 행복, 공통성의 혁명적 가능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많이 나아간다. 이것은 비관주의와 냉소주의가 지배하는 분위기 속에서 꼭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절규와 균열내기와 비판의 어조를 깊이 함축하지 못하게 되면, 다시 말해 비판과 부정의 계기가 충분히 강조되지 못할 때, 개혁주의에 동화될 위험에 직면하게 될 수 있다는 점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네그리는 제도주의를 한편에 놓고 그 다른 극단에 홀로웨이를 놓음으로써 이중전선에서의 싸움을 수행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정치주의와 탈정치주의의 양극과의 싸움에서 네그리와 홀로웨이, 구성의 입장과 비판의 입장은 상보적 협력자로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갖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홀로웨이의 새책 『자본주의에 균열을 내자』는 창조와 건설의 계기를 부정의 계기와 더불어 동시에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협력을 향해 한 발 가까이 다가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10/03/17 09:07 2010/03/17 09:07
발리바르는 혁명의 담론을 유지하면서 개혁(평등한 자로 간주될 권리나 물질적 이익들의 쟁취)을 목표로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혁명과 결합된 계급투쟁의 테마와 자유와 관련된 해방의 테마를 결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전자는 사회적 시민권을 후자는 정치적 시민권을 지칭한다. 이러한 두 테마의 결합은 네그리와 하트가 코뮤니즘을 주장하면서도 보편적 시민권, 무조권적 보장소득, 일반적 접근권 등 개혁적 요구를 제안할 때 가졌던 인식과 동일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발리바르에게서 혁명과 개혁은 생산능력의 전개양식들이 아니다. 그래서 사회적 시민권, 정치적 시민권, 다시 시민인륜이 켜켜이 덧붙여지게 되면서도 그것이 생산능력의 사회적 정치적 인륜적 표현이라고는 주장되지 않는다. 발리바르에게서도 생산능력은 다른 유럽 현대정치철학자들에게서처럼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타기시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 이것은 알뛰세르에게서 기원한 정치철학적 조류들의 공유된 문제가 아닌가? 생산관계에서 독립된 생산력을 강조했던 스탈린주의와는 반대로 생산력과 유리된 생산관계를 강조했던 마오주의 정치의 전통이 이들에게 계승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산관계는 생산능력들의 배치나 상호관계로 이해되지 않을 때에는 주의주의적 결과를 낳게 되고 그러한 정치학은 정치적 실용주의에 기울게 된다. 뜻밖에도 발리바르는 예술활동을 하나의 사건으로 인정하는데, 이 때 예술은 대상이자 생산물이며 제도 내의 실천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사회적 유대를 위한 인공보철물이라는 의미에서의 문화와는 구별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예술의 활용은 제도들과 사회세력들의 균형과 더불어 시민인륜(civility)의 구성요소로 이해된다.
2010/02/18 21:05 2010/02/18 21:05

생명운동에 관한 단상

Posted at 2010/02/08 07:58// Posted in 쓰기(skribi)/철학_F
1. 우리 시대에 생명은 매우 긴급한 문제로 제기되어 있다. 생명이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생명은 거시적인 차원과 미시적인 차원 모두에서 위험에 처해 있다. 무엇보다도 생태파괴와 기후온난화에 의해, 전염병에 의해, 일반화된 전쟁에 의해, 실업에 의해, 신용불량에 의해,

2. 생명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개인들 및 개체들의 삶이다. 그것들은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삶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적 역사는 생명 잠재력의 표현이다. 의식은 단지 현실적인 것이 두뇌에 반영되는 현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물리력만큼이나 중요한 잠재력의 하나의 형태이다. 현실적인 것이  연장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구성되듯이 잠재적인 것(잠재력)도 정신적 속성과 연장적 속성을 갖는다. 연장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모두는 물질적 힘, 물질적 활동들의 표현방식이다.

3. 생명평화가 종교의 방식으로 추구될 때 그것(종교로서의 생명평화)은 생명평화의 가장 강력한 추동력인 이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생명활동(노동)을 경시, 도외시하거나 심지어는 적대시하게 된다. 그 결과 생명평화운동은 노동운동과 , 또 삶정치와 분리된다.

4. 노동(운동) 및 삶정치적 생산과 분리된 생명평화(운동)은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 노동할 수 없는 사람들, 노동에서 추방된 사람들만의 운동으로 기울 위험성이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렇게 대개는 강제적으로 때로는 자의적으로 현존하는 물질적 비물질적 유형의 노동들에서 유리된 사람들이 농업에서 자신의 꿈과 대안을 찾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누워 잘 곳의 생산은 인간 생명에 필수적인 활동이다. 인간은 지폐를 먹고 살 수 없고 금덩어리를 먹고 살 수도 없다. 기계를 먹고 살 수도 없고 과학논문이나 예술작품을 먹고 살 수도 없다. 의식주라는 생명에 필수적인 물질의 생산과 재생산이 과거에 농업노동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미 의식주의 대부분은 이미 기계기술적 공업에 의해 매개되거나 직접적으로 공업의 산물이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이미 농민은 옷을 만들지 않으며 집을 짓지 않는다. 오늘날 인간이 먹는 것의 상당 부분은 토지에서 나오기보다 공장에서 나온다. 협의의 농민은 지성을 생산하기보다 더 많이 소비한다. 오늘날 농업은 의식주를 직접 공급하는 활동이라기보다 그것의 원료공급활동으로 축소되어있다. 농업노동으로의 귀환과 농업의 재생은 하나의 국지적 대안일 수 있지만 그것이 현재의 삶정치적 문제에 대한 근원적 대안일 수는 없다. 생명생태운동은 농업재생운동에 제한되어서는 안 되고 삶정치적 운동으로 발전해야 한다.

5. 의식주가 비농업적 산업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 오늘날 낳고 있는 문제를 그러한 생산방식 자체의 문제와 동일시해도 좋은 것일까? 자본주의하에서 비농업적 생산의 문제를 비농업적 생산 그 자체의 문제로 보아도 좋은 것일까?

6. 농업에 대한 도피적 숭배는 현재의 펼쳐진 생명으로서의 산업들에 대한 외면으로 이끈다. 농경은 그 자체가 이미 자연에 대한 지배의 시작이다. 도구를 사용하는 경작은 잦은 휴경을 요구할 만큼 지력을 고갈시킨다. 수렵과 채취의 생활이 아닌 한에서 '순수' 자연은 없다. 부정적 측면에서 보면 농경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자연을 지배하기 시작한 생산양식의 시작이지 순수하게 자연적이고 생태적인 활동이 아니다. 그 지배는 공업노동을 거쳐  이제 비물질노동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자연과 인간 관계의 특수한 역사적 형식으로서의 지배관계가 많은 문제들을 가져오고 있고 이 문제 앞에서의 공포가 농업으로의 회귀경향을 낳는다. 하지만 오늘날 비물질노동과 산업노동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농업노동은 인구를 먹여 살릴 능력을 가질 수 없으며 현존하는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수단으로 기능할 수 없다. 모든 역사적 산업들은 생명으로서의 인간의 펼쳐진 책이다. 인드라망은 산업들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들이 낳는 문제들을 인간 자신이 숙고하고 그때그때 타개해 나가는 것만이 가능한 생명 진화의 길이다. 즉 다양한 산업 형태들 모두를 인드라망화하는 것이 문제이지 산업 밖에 인드라망을 건설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7. 생명주의가 산업문명의 위기에 처해 농업노동과 자연섬김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금융위기에 처해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산업노동과 실물생산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것과 유사하다. 양자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의 시간 속에서 해법을 찾으며 희망이 아니라 공포에 근거하고 있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러나 역사에는 어떠한 복귀도 가능하지 않고 또 허용되지도 않는다. 생명은 오직 창조적 진화로서만 생명일 수 있다.


2010/02/08 07:58 2010/02/08 07:58

Reading of Deleuze Studies

Posted at 2010/01/19 00:07// Posted in 쓰기(skribi)/철학_F

Diagrammatic Actualism

This paper is on Deleuze's Diagrammatic Actualism, and discusses two versions of Deleuze that struggle for pre-eminence within Deleuzianism. One is that of the Virtual and the Concept - the other is of the Actual and The Diagram. Naturally, when it comes to Deleuze, such tendencies are always intertwined, but we still need to establish whether the Virtual and the Concept deserve the ontological priority they have hitherto received within Deleuzian scholarship. Perhaps the Actual can be retrieved from its currently derivative status when its ontology is understood diagrammatically. This paper is a first attempt at such a retrieval by looking at the way diagrams work both conceptually and phenomenologically in Deleuze's work as well as philosophy in general.

http://www.eri.mmu.ac.uk/deleuze/journaljanuary06_2.php

http://www.streaming.mmu.ac.uk/eri/del ··· rkey.wmv


In Difference and Repetition, the third synthesis of time is the privileged locus for an apocalyptic individuation whereby, in a striking inversion of Heidegger, the future 'ungrounds' the past and death become the subject of a time that splits the Self. For Deleuze, contra Heidegger, time, like death, is never 'mine': it is no-one's. The affirmation of eternal recurrence effects a mode of psychis individuation which transforms throught into sign of impersonal death.

http://www.streaming.mmu.ac.uk/eri/deleuze/brassier.wmv



This paper uses Gilles Deleuze’s philosophical approach to cinema to explore how certain contemporary films use unusual narrative time schemes to negotiate national identity at times of crisis or transformation. Deleuze’s categories of movement-image and time-image are often considered separate entities, illustrative of an epistemic shift that occurred after WWII. However, here the movement- and time-image are reconsidered as extreme poles of the same phenomenon. This reading of Deleuze’s work explains the existence of a number of recent films that contain aspects of both movement- and time-image, and use them to examine changes to national identity. Two contrasting examples of such films are discussed in depth, Sliding Doors (UK/US, 1997) and Peppermint Candy (South Korea, 2000), to illustrate the global applicability of this reading of Deleuze’s work.

http://www.streaming.mmu.ac.uk/eri/del ··· aper.wmv


The Production of the New

In this paper I introduce the collection of essays edited by Stephen Zepke and myself on Deleuze, Guattari and the Production of the New. I then go on to present a series of theses about the new – in relation to art and subjectivity – and, perhaps more importantly, offer up some questions, or doubts, in relation to these points and capitalism’s own intoxication with, and utilisation of, the new. My guiding problem here is the identification of that which constitutes a genuine event within art and life. This means that the paper is also involved in puzzling through some issues to do with time and temporality. I attempt to do all this through recourse to Deleuze’s precursors (especially Bergson and Spinoza) and, we might say, to his fellow travellers (especially the late Foucault and Negri), that is, specifically not through what Deleuze himself has to say on the matter.

Simon O'Sullivan, Goldsmiths College, University of London, U.K.

Simon O'Sullivan is lecturer in art history/visual culture in the department of Visual Cultures at Goldsmiths College, University of London. He has published widely on aesthetics and modern and contemporary art, with specific reference to Deleuze and Guattari, in journals such as Angelaki, Pli: Warwick Journal of Philosophy, Journal of the British Society of Phenomenology, Parallax and Afterall. He also writes catalogue essays, and is involved in collaborative art practice, with David Burrows, under the name Plastique Fantastique.

http://www.streaming.mmu.ac.uk/eri/del ··· ivan.wmv

2010/01/19 00:07 2010/01/19 00:07

la lecture majeure de Astérion

Posted at 2010/01/18 23:43// Posted in 쓰기(skribi)/철학_F
La figure socratique : du miasme au paradigme

Hayek lecteur des philosophes de l’ordre spontané : Mandeville, Hume, Ferguson

Industrialisation et mécanisation de la guerre, sources majeures du totalitarisme

Barbarisation moderne des guerres dans l’empire global : le paradigme de la guerre de banlieue [Texte intégral]
Alain Joxe

L’analyse des passions dans la dissolution du corps politique : Spinoza et Hobbes [Texte intégral]
Julie Saada-Gendron

Corps et esprit : l’identité humaine selon Spinoza [Texte intégral]
Lamine Hamlaoui

État et généalogie de la guerre : l’hypothèse de la « machine de guerre » de Gilles Deleuze et Félix Guattari [Texte intégral]
Guillaume Sibertin-Blanc

Théories de la connaissance en économie : théories rationnelles appliquées à l’économie et théorie intuitive selon Edgar Salin [Texte intégral]
Bertram Schefold et Gilles Campagnolo

« Contre-révolution », « guerre civile », « lutte entre deux classes»  : Montlosier (1755-1838) penseur du conflit politique moderne [Texte intégral]
Marie-France Piguet

2010/01/18 23:43 2010/01/18 23:43
이 책의 네 가지 논리 맥락에 대해 잊기 전에 메모해 두자.
1. 인지과학 내부에서 논쟁: 구성주의 인지과학은 컴퓨터와 인지를 유비하는 기계주의 인지과학과는 달리 단순한 행위들의 상황적 체화를 중시한다.
2. 서구근대문명에 대한 논쟁: 서구근대문명은 근대적 상황 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발할 능력을 잃고 윤리적 초보자의 위치에 떨어졌다. 동양의 유교, 불교, 도교는 2천5백년간 윤리적 숙련성/전문성을 키우기 위한 수행을 해오고 있다. 동서양을 아우르는 윤리적 참조틀을 마련하자.
3. 전통적 재현주의 철학에 대한 논쟁: 의식에서 독립된 객관적 실재가 의식 속으로 재현되는 것이 인지라는 관점은 잘못이다. 인지는 행동들의 교차 속에서 창발되어 나오는 새로운 세계의 상이다.
4. 서구 철학전통에서 구성적 인지과학의 전사와 후사: 로크, 흄 등의 경험주의 철학, 훗설과 메를로퐁띠의 현상학, 듀이의 교육철학, 비트겐쉬타인의 언어철학, 제인 오스틴의 화용론, 루만의 체계이론 등등.

이 책의 내용은 다음에 잘 요약되어 있다.

과학이 경험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이 책은 현대 신경생물학과 인지과학이 당면한 가장 도전적인 두 가지 문제를 다룬다. 첫째, 의식적인 판단의 공식적인 행동이 아니라 체계적인 자기조직화의 습관적인 맥락의 일부이자 신경학적이고 인지적인 과정의 결과로서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습관적 행위에 대한 이해와, 둘째, 초월적 자아, 안정된 주체 또는 영혼과 같은 것이 없다는 현재의 자각에 적합한 윤리학을 정립하는 것이다.

인지과학의 초창기에 인지는 지식표상과 추상적 추론의 모델에 따라 개념화되었다. 윤리학의 영역에서는, 윤리적인 것을 행하는 것은 곧 추상적인 규칙에 따르는 것과 같다는 철학적 교의에 해당된다. 이러한 계산주의와는 대조적으로 저자는 구성으로서의 인지를 강조한다. 구성은 우리 자신의 감각-운동 능력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체화되고, 일상화된 삶을 살아가는 능력으로서의 인지이다.

바렐라는 구성적 인지과학을 현상학, 그리고 그가 “지혜의 전통”이라고 부르는 두 가지 전형인 유교 윤리학과 불교 인식론이다. 바렐라는 윤리적 행위는 판단체계라기 보다는 존재의 투사라고 생각하는 맹자의 실천윤리를 가져온다. 또 불교로부터 그는 “공의 체화”와 “가상자아의 실천”을 가져온다. 단일한 자아나 주체를 가정하지 않는 이러한 신념체계가 “나”의 살아있음을 어떻게 아는가? 저자는 정신적 삶의 실제적인 행위 안에서 우리자신의 “가상적인” 속성을 끊임없이 인식하는 것에 기반한 변형의 실천을, "앎함"(savoir faire)의 윤리학을 제안한다.
이 요약문은 빼고 있지만 노자의 무위에 대한 바렐라의 설명은 매우 흥미롭다. 그에 따르면 무위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충만한 행위 자체이다. 마치 달밤의 달빛처럼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밝히는 행위말이다. 그것은 사적 이득 욕구나 외부로부터 강제된 규칙이나 과거적 습관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다. 바렐라는 교환도 선물도 아닌 충만한 행위 자체를 윤리적 노하우의 새로운 양식으로 제시한다.
2009/12/16 20:30 2009/12/16 20:30
pragmatic Look up pragmatic at Dictionary.com
1540s, from M.Fr. pragmatique, from L. pragmaticus "skilled in business or law," from Gk. pragmatikos "versed in business," from pragma (gen. pragmatos) "civil business, deed, act," from prassein "to do, act, perform."
2009/12/16 16:33 2009/12/16 16:33
Tag ,
우리가 form의 관점에서 시간을 파악할 때 conformation을 현행 질서의 정합적 고수라고 본다면 , reformation은 그것의 수정이고 deformation은 그것으로부터의 일탈이며 transformation은 그것의 변태이다. 정치적으로 conformation은 여당이고 reformation은 야당이다. deformation과 transformation은 반제도이거나 새로운 제도화 운동이다. 권력은 deformation과 transformation의 경향이나 흐름을 conformation과 reformation의 영구교대운동으로 흡수하려 한다. 그럼에도 생명은 deformation을 멈추지 않으며 deformation은 transformation에서 자율적 지속성과 상대적 안정성을 얻는다. 물론 그 어느 누구도 그 transformation을 끝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지만 말이다.
2009/11/30 14:19 2009/11/30 14:19

레비나스의 '얼굴'

Posted at 2009/11/22 16:48// Posted in 쓰기(skribi)/철학_F
쥬디스 버틀러의 [불확실한 삶](경성대 출판부)를 읽다가 레비나스의 얼굴의 성격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레비나스가 타자의 얼굴을 바라볼 때, 그 얼굴은 공포에 질린 얼굴이다. 그 얼굴은 그에게 어떤 명령을 전달한다. 윤리적으로 되라! 그는 그 얼굴의 명령에 반응해야 할 의무를 느낀다. 그 얼굴에 뭔가 불확실한 것이 있다. 이것은 그 자신의 삶의 불확실성에 대한 자각을 준다. 비폭력, 그것은 "평화로운 장소가 아니라 폭력을 겪을 것이라는 두려움과 폭력을 입힐 것이라는 두려움 사이에 존재하는 끝없는 긴장"에서 유래한다. 살인하고 싶다와 살인하지 말라 사이에 비폭력의 긴장이 있다. 여기에서 언어가 성립한다. 메시지가 전달되고 이름을 부여받는다. 그것은 말해질 수 없는 것, 보여질 수 없는 것의 경계에서 작동하기 시작하여 특수한 주체성들의 등장을 가능케 한다.

이 주체성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희생당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서구의 양심적 지식인의 시선이 아닐까? 왜 공포에 질린 그 얼굴은 주체로서 나타나지 못하는 것일까? 인간이 활력이 아니라 권력의 타자로서만 제시되는 것이 바로 성찰의 그 특수한 입장에서 유래하는 것이지 않을까?
2009/11/22 16:48 2009/11/22 16:48

지속과 운동

Posted at 2009/11/09 10:02// Posted in 쓰기(skribi)/철학_F

2005년에 내가 쓴 어떤 글(「들뢰즈의 시간론 연구서설」)의 한 구절에 지속과 운동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맑스는 노동시간의 변증법을 통해 삶시간의 도래 가능성을 추론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맑스에게서 삶시간은 항상 뒤로 밀려나 있고 억압당하고 있으며 비노동시간의 형태로 겨우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역사적 맑스주의들의 눈이 오직 노동시간에만 고정되고 매몰된 것은 그러므로 결코 우연이라고 볼 수 없다. 노동에 주어진 강조는 더욱 경직되었고 삶시간은 점점 더 깊이 망각되었다. 맑스 이후에 악화된 모습으로 지속된 이 문제적 상황을 역전시키는 것이 들뢰즈의 관심이다. 그것은 내가 보기에, 노동시간의 변증법을 통해 삶 시간이 도래할 것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측정가능한 노동시간을 노동의 부동의 단면으로 이해하면서 다시 노동을 삶의 동적인 단면들로 이해할 수 있는 사유의 지평을 여는 것이다.

순간이 운동의 부동적 단면인 것처럼, 운동은 지속 즉 전체 혹은 어떤 전체의 동적인 단면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운동이 훨씬 더 심오한 그 무엇, 즉 지속durée 혹은 전체Tout 혹은 어떤 전체un tout 안에서의 변화를 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속이 변화라는 사실은 지속에 대한 정의의 일부분이다: 지속은 변화하며 변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예컨대 물질은 운동하지만 변화하지 않는다. 이제 운동은 지속 혹은 전체 안에서의 변화를 표현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한편으로는 이 표현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체-지속'(tout-durée)의 동일화이다.

여기에 두 개의 정의가 있다. 그 첫째는 지속이 변화라는 사실 혹은 전체-지속의 실재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전체 지속은 들뢰즈에게서 특정한 삶이 아닌 불특정한 삶, 단수적이고 특이한 삶을 가리킨다. 그 삶은 특정한 삶에 의해 표현된다. 둘째 특정한 삶은 특이한 삶의 움직이는 단면으로 기능하고 그것은 전체-지속으로서의 삶 속에 변화를, 비결정성을, 자유를 도입한다. 이것은 맑스에게서와는 달리 노동시간을 둘러싼 투쟁을 경우하는 특정한 삶 세계의 모순을 통해서 도달되는 것이 아니라 특이한 삶의 직접적 운동, 폭발을 통해서 표현된다. 모순은 지성이 부여한 허구적 운동이며 실재하는 운동은 변화 자체로서의 실재하는 지속이다. 지속이 변화하며 변하기를 멈추지 않기 때문에 지속의 움직이는 단면으로서의 운동이 지속 안에서의 변화를 표현할 수 있다.

시간 개념의 이 베르그송적 전환은 실재적 지속의 변화를, 그리고 그 변화를 표현함으로써 지속 안으로 자유를 도입하는 (그 단면으로서의) 운동을 근본적인 문제로 드러낸다. 그리하여 노동시간들의 축적이 가져오는 모순을 통해 변화를 설명하려 하고 그래서 실재적 변화가 영구히 지연되도록 만드는 관점을 파열시킨다. 얼마나 많은 맑스주의들이 저 순간들의 상호관계와 그 모순을 통해 도래할 파국을 기다렸던가? 그러나 들뢰즈-베르그송에 따르면 부동의 순간들로부터 변화하는 시간이 구성되지는 않는다. 순간들은 죽은 시간일 뿐이며 그것들을 아무리 많이 합친다 할지라도 그것에서 실재하는 시간이 생성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부동의 순간들의 연쇄를 따라가면서 언젠가 생성할 실재적 시간을 기다리는 것은 불변을 정당화하는 논리에 불과하다. 실재적 시간을 미래로 돌리는 이 온갖 대기주의적 유혹을 뿌리치고 단번에 시간의 평면, 내재성의 평면에서 시작하자. ([21세기 자본주의와 대안세계화]에 실린 글에서 약간의 문구 수정)

 

지속이 운동으로 자신을 표현한다는 것은 익숙한 것이다. 하지만 운동이 지속에 변화와 자유를 도입한다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 지속의 실재성을 확인한 후에 다시 문제가 되는 것, 그리고 유일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운동이지 않은가? 운동이 없다면 지속은 변화할 수 없고, 차이를 생성할 수 없으며, 영원회귀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은가?

2009/11/09 10:02 2009/11/09 10:02

자본주의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가지다[가짐, haven, have]를 의미한다. 재산을 가진다, 친구를 가진다, 시간을 가진다.

이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투쟁은 많은 경우에 다시 이다[임, sein, be]로의 복귀시도로 나타난다. 이것은 존재를 실체화할 혹은 공간화할 위험을 갖는다.

이 둘 사이를 가로지르는 사선은 존재에 하다[함, taten, act]를 도입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존재는 활력이자 실천이자 시간으로 나타난다. 맑스의 Tatigkeit, 네그리의 pouvoir constituant 등은 이러한 사선화의 시도이다.

2009/11/07 17:35 2009/11/07 17:35

우정의 정치학, 사랑의 정치학, 관용의 정치학, 치료therapy의 정치학 등이 개념적으로 실험되고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오래 전부터 돌봄care을 주요한 삶정치적 술어로 사용해 왔다. 돌봄과 치유는 다중 시대의 중요한 정치학적 술어로 사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의 윤리정치학적 개념으로 돌봄과 치유를 고려해 보기 위해 어원적 조사를 해 본다.

 

care Look up care at Dictionary.com
O.E. caru, cearu "sorrow, anxiety, grief," also "serious mental attention," from P.Gmc. *karo, from PIE base *gar- "cry out, scream." Sense of "charge, oversight, protection" is c.1400. The verb is O.E. carian, cearian "to feel concern or interest," from P.Gmc. *karojanan. Phrase couldn't care less is from 1946; could care less in the same sense (with an understood negative) is 1966. Care figures in many "similies of indifference" in the form don't care a _____, with the blank filled by fig, pin, button, cent, straw, rush, point, farthing, snap, etc.[http://www.etymonline.com/index.php?search=CARE&searchmode=none]

 

cure Look up cure at Dictionary.com
c.1300, from L. cura "care, concern, trouble," from PIE base *kois- "be concerned." In reference to fish, pork, etc., first recorded 1743. Related: Curable (late 14c.). Cure-all in general sense is from 1870; as a name of various plants, it is attested from 1793.[http://www.etymonline.com/index.php?search=cure&searchmode=none]

 

검색하다 보니 기독교인이 쓴 것으로 보이는 다음과 같은 글귀도 발견된다.

 


치료는 ‘변화’를 의미한다.

 

의사, 법률가, 성직자, 사회사업가 ―

그들은 모두 전문 기술을 활용하여 사람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다주고자 한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 그들은 상당한 값을 치른다.

그러나 치료는, 바람직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돌봄’에서 나오지 않을 경우에,

폭력이나 조작이 되기 쉽고 심지어 파괴적일 수도 있다.

 

돌봄은 함께 있는 것, 함께 우는 것, 함께 아파하는 것, 함께 느끼는 것이다.

돌봄은 동정(同情, compassion)이다.

다른 사람이 내 형제자매요,

나와 똑같이 유한하고 나약한 사람이라는 진실을 확인하고 주장하는 것이다.

 

‘돌봄’이 우리의 첫 번째 관심사일 때

‘치료’가 하나의 선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때로 우리는 누구를 치료해줄 수 없지만 그러나 돌보는 일은 언제나 가능하다.

돌보는 것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그네를 위한 양식)

-http://blog.daum.net/ree610/13753937

 

2009/11/04 09:58 2009/11/04 09:58

벤야민의 시간론

Posted at 2009/10/24 20:05// Posted in 쓰기(skribi)/철학_F

시간론의 계보학 두 번째 시간, 벤야민의 시간론(한정헌)

 

현재의 과거(기억)로의 도약이 재인이다.

오성중심적 사유로부터 감성으로의 무게중심 이동이 나타나는 현상 개념들이 지각, 신체성, 몸 등이다.

기억에 대한 강조와 감성에 대한 강조 혹은 무의식에 대한 강조에 상통성이 있다.

 

[베를린의 유년시절]

벤야민은 비자발적 기억의 집단적 측면을 강조한다.

그는 집단기억을 구원의 요소로 바라보려 한다.

벤야민의 단편성은 지속의 시간, 진보주의의 시간에 대한 비판이다.

베를린을 어린아이의 시선을 통해 낯설게 하기, 즉 소격효과를 불러일으키기.

시간적 요소들의 불연속적 배치를 통한 자아구성론이 벤야민의 유년시절에 나타나는 시간 개념이다.

 

[미래의 역사]

역사의 과제는 소수적 역사를 구성하는 것이다.

 

[도시의 산책자]

베를린에서 파리로

어린아이에서 산책으로

구경꾼의 도시계획의 일부이며 산책자는 그것을 횡단하는 사람이다

보들레르는 산책을 통해 불연속의 시간에 주목한다.

억압된 무의식이 히스테리로 나타난다.

대도시는 잘못된 역사기입의 장소이다.

*대도시는 판타스마고리아이다. 촛불도 그러한가?

벤야민은 프루스트, 맑스, 프로이트, 보들레르, 니체, 베르그송, 하이데거를 전유. 들뢰즈 데리다와 유사하다.

도시는 텍스트이다.

역사유물론의 과업은 예기치 않게 나타나는 과거의 이미지를 붙드는 일, 즉 미래의 역사를 구성하는 일이다.

과거는 경험되지 못하고 억압되어 있기 때문이다.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예수는 신이자 인간으로 된다.

예외상태에 대해 진정한 예외상태(불연속, 산책, 억압된 과거로서의 미래 구성)를 구성하는 것이 역사유물론이다.

운동이 있으므로 외연이 있다.

*신화적 폭력을 종식시키는 신성한 폭력, 그것은 인정될 수 있는 폭력인가?

*파편, 특이, 폭력, 불연속, 호랑이의 도약의 이 메시아적 시간....이것이 공통, 사랑, 협력을 사유하는 것이 가능한가?

예술 정치는 새로운 시간=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를 창조할 수 있다.

벤야민에게 기원은 있지만 그것은 인지불가능한 신학적 형태로 존재한다.

2009/10/24 20:05 2009/10/24 20:05
구조적 재배치는 역량의 변화 없는 재배치이다. 이것은 개혁이다. 개혁으로 가능한 것은 그러한 방식으로 풀릴 수 있다. 하지만 개혁으로 불가능한 것은 구조의 파괴와 새로운 구조의 재건을 통해 풀어야 한다. 이것이 탈구조적 재배치이다. 새로운 평면의 창조를 통해서만 탈구조적 재배치가 가능하다. 탈구조적 재배치의 순간은 세계가 새롭게 열리는 순간이다.

새로운 평면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낡은 것에 구멍을 뚫어야 한다. 이 작업을 위해서는 더 강력한 에너지와 그에 걸맞는 수단(무기)이 필요하다. 더 강력한 에너지는 외부에서 수혈되는 것이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외부가 없기 때문이며, 현행의 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것는 더 강력한 에너지의 형성을 가능케 할 동력이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기 때문이다.

나는 중도의 선을 두 선의 중간이 아니라 사선으로 이해하며 그것을 도주선, 탈주선의 다른 이름으로 이해한다. 중간선으로서의 중도는 타협과 종합의 선이요 통일의 선이다. 사선, 탈주선, 경계를 넘는 극한선으로서의 중도는 파괴, 탈주, 재구성의 선이다. 그것은 투쟁과 창조 없이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불화를 견디기 어려워 한다. 왜 그럴까? 긴장되며 불편하고 힘이 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에너지의 소진을 가져온다. 이 상황을 푸는 방법론 중의 하나가 인화(人和)론이다. 인화론은 불화하는 개체들에게 상황적 압력을 가하여 그 갈등적 성격을 누그러뜨리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미봉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화주의의 입장에 서게 되면 불화를 낳는 문제가 무엇인지 그것이 왜 형성되었는지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는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등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된다. 문제에 대한 외면적 효용적 접근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화론적 해결책은 폭력에 해당한다. 

인화주의는 기업과 권력의  논리이다. 기업은 노동자간의 갈등을 낭비로 파악하며 이것은 기업에게 파괴적이다. 인화주의는 노동자간의 (가치) 생산적 협력을  강제하기 위해 도입되고, 사회 속의 적대를 은폐하기 위해 도입된다. 이명박에 의해, 아니 모든 권력자에 의해 제창되어 온 국민통합론은 인화주의의 국가적 수준에서의 재연이다.

우리는 인화주의 대신 공통되기를 선택한다. 공동이 정체성의 구축으로 이해되기 쉬운 것처럼 공통은 양적 평균으로 이해되기 쉬운 말이다.  이러한 이해방식에서, 즉 정체성과 평균의 관점에서 창조의 문제는 사라진다. 공통되기는 특이한 것들의 접속을 통한 새로운 평면의 창조이다. 공통되기는 늘 창조의 문제이며 창조를 통한 도주이다. 이 도주는 이론적일 뿐만 아니라 실천적이며, 개체적일 뿐만 아니라 집단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통화는 집단적 세계변형의 문제이다. 요컨대 그것은 다중에 의한 혁명의 문제이며 새로운 몸(공통체)의 창출의 문제이다.





2009/09/23 10:51 2009/09/23 10:51

집단지성과 집단반지성

Posted at 2009/09/12 22:31// Posted in 쓰기(skribi)/철학_F
집단이 반드시 지성적인 것은 아니다. 집단은 놀라운 능력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반면 엄청난 무지와 맹목으로 인도하기도 한다. 집단지성이 실재한다는 사실이 집단반지성, 집단무지, 집단적 어리석음 역시 실재한다는 사실을 가릴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집단은 항상 영리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집단무지성의 실재를 집단지성을 부정할 논거로 삼는 것, 즉 집단은 곧 우중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터무니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집단 자체가 아니라 그 집단이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고 조직된 집단이냐가 문제이다. 부패한 집단형식들(가족, 기업, 민족, 교회, 매스미디어 등등)은 종종 집단적 어리석음을 조성한다. 이 부패의 형식들을 깨고 나오면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집단화가 창조적 집단지성을 가능케 한다. 이것은 특이함에 의해 추동되고 대화에 의해 조직되며 공통체의 구축에 의해 안정화되며 이 과정의 반복이 진화를 규정한다. 물론 우리의 새로운 연결이나 조직화의 시도가 창조성과 사랑과 행복에 의해 이끌릴 수 있다는 어떠한 보장도 없다. 연결되는 힘들은 항상 낡은 것들을 함유한 상태로 새로운 시도 속으로 진입하며 그 시도가 낡은 것을 반복하는 데 머무르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연결을 시도하면서 낡은 패거리 문화, 가부장주의, 서열주의, 경쟁심성 등등이 곳곳에 침투하여 연결과 공통화의 가능성을 침식하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나 많이 경험하는가?

하지만 창조적 집단지성은 진화의 동력이다. 그것은 새로움, 안정성과 유지, 향상의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하는데, 이 요소들 중에서 어느 것(들)을 강조하고 연결시킬 것인가가 지성에 의해 결정된다.1

  1. 이에 대해서는 http://www.masternewmedia.org/news/2006/08/12/conversation_human_evolutionary_spin_engine.htm 참조 [Back]
2009/09/12 22:31 2009/09/12 22:31
"운동단체에 강의 가면 달랑 10만원 주면서 거기서 술값 내라고 해요. CEO 인문학 강의를 갔더니 100만원, 200만원씩 딱딱 입금되더라구요." 이제는 저명해진 어느-진보적-인문학- 교수인 후배가 약간은 농담을 섞어서 한 말이다. 그때는 "그러다 부르주아의 친구가 되는 거 아냐"라고 농담 한 마디를 했을 뿐인데, 서울대에 서울대 인문대에 CEO를 위한 Ad Fontes Program이 생겨났고 성공회대 인문학습원에까지 CEO를 위한 인문학 강좌가 개설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외에도 CEO를 위한 인문학 강좌나 CEO를 위한 인문학 책자가 홍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나니 그냥 스쳐지나갈 일이 아닌 것 같다.

나는 '제국 시대 인문학의 위상과 삶정치학'에서 인문학 부흥의 3대 조류를 요약한 바 있는데 그 세 가지 조류 중에서 CEO를 위한 인문학 조류가 가장 강력하고 주류적인 흐름으로 되고 있다고 여기서 덧붙여야 할 것 같다. 신영복 성공회대 인문학습원장은 "글로벌 경쟁, 아웃소싱, 복잡한 노동체계 등 기업 안팎의 문제 극복에 인문학 함양을 통한 유연한 사고체계 확립이 유력한 대안이 되고 있다"1고 말했다고 하는데, 위 글에서 이미 말했다시피 틀린 말이 아니다. 오늘날 경영은 무엇보다 인간의 지식, 정보, 소통, 정동에 대한 경영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이 최고경영자들에게 도움을 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진보-좌파 지식인들이 이들을 위해 인문학을 가르치는 행위는 이러한 사실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20세기 후반 한국에서도 대학의 인문학은 크게 인기를 끌지 못했다. 노동자를 위해 , 혁명을 위해 수행해야 할 역할을 그것이 충분히 다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은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인문학의 핵심적 흐름은 대학에서 탈주하여 공장과 거리로 갔다. 오늘날 다시 인문학은 대학에서 벗어난다. 동일한 현상이지만 내막은 다르다. 신자유주의의 세례를 받은 후 대학이 상업-기업공간으로 변하면서2 인문학이 수익을 가져다 줄 수 없다고 판단하고 대학이 인문학을 추방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추방된 인문학이 '찾아간 곳'이 바로 기업이고 그곳의 CEO들이다. 공장의 노동자들 대신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을 자신의 수요층으로 찾고 있는 것이 오늘날 인문학의 현실이다. 극단적인 우향우가 아닐 수 없다. CEO를 위한 인문학 강좌를 수강한 바 있는 어떤 사람은 그 강좌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오늘날 시중에서 떠도는 CEO를 위한 인문학 강좌는 대부분 기업 오너와 경영자들에게 종업원을 어떻게 하면 힘들이지 않고 더 열심히 일하도록 동기부여할 것인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울러 참석자들에게 사회지도층으로 올라서기까지 고생한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자부심도 불어넣어 줍니다. 현대 경영의 기술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것인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참석자의 비위를 슬쩍 맞춰주면서 온갖 경영의 단편적 기술을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기업세계의 비인간적 경쟁과 환경파괴적 행태에 대한 비판적 사유는 건드리지 못한 채, 그럴 듯한 미사여구로 경영자들의 사유세계의 천박함을 유식함으로 살짝 포장해 줍니다. 인문학 강좌를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강사의 해박함과 화려한 프리젠테이션 스킬에 탄복합니다. 그런 강좌를 들은 것 자체가 매우 유식해진 것처럼 느끼게 해 줍니다. 만약 중간관리자들이 이 강좌를 들었다면, 더 열심히 일해서 경영자의 자리에 올라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끔 합니다. 그리고는 명함을 나누면서 세상 사는 처세술을 교환합니다.3

착취자들을 자신의 소비자들이자 후원자들로 만든 인문학이 과연 인간을 위한 사유를 진행하는 것이 가능할까? 혁명을 위한 인문학에서 착취를 위한 인문학으로의 전향이야말로 인문학의 최종적 죽음을 알리는 징후이다. 새로운 인문학이 탄생할 수 있다면 인문학이 죽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한 자리에서일 것이다. 그것의 현장은 인문학적 소양을 쌓은 기업 CEO들과 생산적 다중 사이의 적대를 회피하지 않으면서 다시 한 번 다중을 향해 나아가는, 아니 다중 속에서 생성되는 다중의 과학일 것이다.

  1.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9/10/2009091001956.html?srchCol=news&srchUrl=news1 [Back]
  2. 연세대학은 학내 상행위를 금지하고 있다면서 출판사들이 대학행사에서 해온 특판조차 금지하고 있다. 마치 대학이 비영리공간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대학이 영리공간이기 때문에 영업행위를 독점하려는 것일 뿐이다. [Back]
  3. http://mindprogram.co.kr/253 [Back]
2009/09/11 12:20 2009/09/11 12:20

실재적 추상과 공통되기

Posted at 2009/09/06 10:46// Posted in 쓰기(skribi)/철학_F
생명공학은 개체-보편의 틀 속에서 몸을 지배하려 한다. 개체적인 것은 보편적인 것이므로 개체적 몸의 미시구성을 알 수 있다면 몸 전체를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일 것이다(생물권력의 전략으로서의 게놈-프로젝트). 이 시각 속에서 개체들은 보편적인 것의 개체적 현시로서 나타난다.

이 관점의 빈곳은 몸이 다중이며 다중적인 것은 창조적인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몰각이다. 다중으로부터 개체를 분리하고 그것을 독립적인 것으로, 그리고 보편적인 것의 현시로서 고찰할 때 다중으로서의 몸과 몸들의 다중은 고찰 대상에서 누락된다. 여기에는 이미 시각의 폭력이 작동하고 있다. 다중-몸과 몸들의 다중에서 분리된 개체적인 것은 이미 죽은 것이지 산 것이 아니다.

이론은 회색이고 예술은 산 시간을 담아낼 수 없다는 반복된 경험들은 이론이나 예술의 본래적 한계가 아니다. 기존의 이론형태와 예술형태가 다채색과 산 시간에 접근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것을 기존 이론형태와 예술형태의 실수라고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마치 결점으로 보이는 것, 즉 삶의 생생함으로부터의 추상을 통해서 예술과 이론은 자본의 요구에 가장 잘 부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본의 착취는 산 노동을 산 채로 포획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죽게 만들고 죽은 노동을 차곡차곡 축적하는 방식을 통해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죽은 것을 축적하는 방식은 기존의 이론과 예술의 작업방식이기도 했/하고 기존 교육의 작업방식이기도 했/하다. 통상적 교육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유효함(어디에?)이 입증된 것을 반복하는 법을 가르친다. 살아 있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을 가르치며 유동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경직된 것을 가르친다. 존 케이지와 보이스와 백남준이 자신들을 Fluxus(흐름)이라고 불렀을 때, 그것은 이미 삶에 대한 지향과 통찰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근대사회는 죽음의 생산을 자신의 고유한 논리로 삼는다. 죽일 수 없는 것은 가치도 없고 의미도 없다. 죽일 수 없는 것(존재), 죽지 않고 버티는 것(저항), 죽임의 경계를 벗어나는 것(탈주)은 쓰레기들이므로 지구밖으로 폐기해야 할 것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근대/자본 사회는 타나토스(죽음충동)가 지배하는 시공간이다.

오늘날의 생물권력, 생명권력, 삶권력이 몸을 지배하는 방식은 추상이다. 어떤 추상말인가? 산 것, 실재적인 것을 분리시켜서 그것을 죽은 것과 형식적인 것의 지배 아래의 연옥에 배치한다. 사용가치는 교환가치의 독재 아래에 종속된다. 형식적 추상 이것이 삶권력의 현미경이요 회칼이며 알바트로스 감옥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저항들은 반추상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루카치-아그네스 헬러-마이클 리보위츠로 이어지는 사용가치 학파들은 이론의 수준에서 이 작업을 수행한다. 오늘날 많은 생태주의자들도 근대가 배제한 사용가치 개념에 의해 이끌린다. 구체적인 것, 추상되지 않은 것, 날 것이 이러한 흐름의 지도원리가 된다. 지식, 정보, 이론, 소통 등에 대한 반감이 자연스럽게 고조된다. 하지만 추상에 대한 일반적 거부는 막힌 길이다. 그것은 추상 이전의 삶(예컨대 소농적 삶, 본래적-귀속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삶)에 대한 향수를 넘어서기 어렵다. 그리하여 반추상은 많은 경우에 근대추상세계의 보완물로 기능하곤 한다.

이 한계를 돌파하려면 추상이라는 무기를 전복적으로 이용해야 한다. 추상에 반추상을 대치시킬 것이 아니라 형식적 추상에 실재적 추상을 대치시켜야 한다. 추상적인 것은 관념적인 것이요 구체적인 것만이 실재적인 것이라는 생각은  추상이 거듭해서 형식화되어온 역사적 사실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로부터 추상이라는 무기를 뺏는다. 추상의 실재화, 즉 실재적 추상은 죽은 것으로부터 다시 삶을 끌어내는 방법이다. 죽음의 메커니즘의 동력이면서도 그것에서 배제되어 있는 외부성인 삶의 운동, 그것의 독자성, 그것의 원리를 추상해 내는 것이다.

삶권력이 개체-보편의 원리에 따라(이것이 형식적 추상논리이다) 몸을 지배할 때, 다중은 삶의 특이성의 실재적 추상을 통해, 추상된 것들의 접속을 통해 작동한다. 그것은 몸을 넘겨주고 뭔가 추상적인 것을 향해 떠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몸을 만드는 것이다. 행크 불은 nation과 culture에서의 multi-inter-trans(쓰고보니 MIT다, 독일어에 mit는 함께라는 뜻이었는데 재미있군)를 이야기했는데, MIT는 아미 WAB(within-against-beyond)처럼 확장해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여러 몸들이 서로 가로질러 만드는 추상이 실재적 추상일 텐데, 다른 이름으로는 공통되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것을 장르명으로 표현한다면 네트워크예술일 것이요, 그 질료는 물감도 주사선도 아닌 다중인 몸들, 몸들의 다중들, 물질=에너지들일 것이다. 이 예술에서 삶과 예술과 혁명은 그 어느 것을 이야기해도 이미 다른 것을 동시에 이야기한다는 의미에서 완전히 동어반복적인 것으로 될 것이다.
2009/09/06 10:46 2009/09/06 10:46
디지털 세계에서 우리는 여러가지 정보들을 오리고 붙이고 지우고 겹치고 비틀 수 있다.
그렇게 새로운 세계를 구성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렇게 오리고 붙여지고 지워지고 겹쳐지고 비틀린  세계에서 숨쉬고 나눈다.

그래도 우리는 원래 세계가 무엇인가? 사실이 무엇인가? 진리가 무엇인가? 라고 묻고 싶어진다. 그래서 그 비틀린 세계 이면의 어떤 본원적 세계에서 문제의 해답을 찾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것은 고고학적 취미일 수는 있어도 유효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원상의 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라 구성된 세계에 사는 것이며 원상을 묻는 그것조차도 복사, 붙이기, 겹치기, 비틀기의 과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극단적으로 우리는 사실들도 구성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디지털 세계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말과 글과 이미지로 교류하는 인간 사회가 디지털 세계 이전의 디지털 세계이다. 여기에서 오려붙이기 지우고 비틀기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좀더 프라그마틱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세계의 이 직조적 성격에 대한 인정에서 출발해야 한다. 거짓만들기가 가능하고 그것이 실재적이라는 것. 실제로 거짓만들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 거짓과 진실의 싸움이 아니라 거짓만들기들 사이에서의 싸움이 중요하다는 것. 어떤 거짓만들기인가? 해방과 자유의 거짓만들기인가 억압과 부패의 거짓만들기인가?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만약 당신이 해방과 자유의 거짓만들기를 선택하려고 한다면 그 길에 충실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거짓을 만들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은 쓸모없다. 왜냐하면 당신 자신도 사실들을 소재로 할 뿐 그것으로부터 거짓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도덕이 아니라 윤리가 필요하다고 한다면 무엇이 우리를 해방시키고 해방을 넘어 자유롭게 할 것인가, 무엇이 그 힘을 증대시킬 것인가에 대한 윤리학적 숙고가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리라.
2009/08/31 10:38 2009/08/31 10:38

추상기계와 혁명

Posted at 2009/08/27 19:55// Posted in 쓰기(skribi)/철학_F
자본은 추상기계다. 추상노동이 자본의 에너지이다. 20세기에 자본의 추상력은 비약하며 21세기에는 추상이 삶을 완전히 지배한다. 금융자본은 어떤 사실성도 갖지 않는 추상체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엇보다 실재적인 추상체이다.

사실주의의 시대는 19세기 말에 끝난다. 인상주의는 사실에서부터의 최초의 이탈이다. 20세기의 표현주의는 이 이탈을 가속화한다. 자본의 추상기계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추상기계이다. 실증주의나 경험주의로는 자본의 추상기계를 극복할 수 없다. 그래서 이른바 쉬운 글쓰기, 대중적 글쓰기,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자본 추상기계가 사용하는 탄압무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글쓰는 자와 읽은 사람을 클리셰의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러한 글쓰기는 대중의 추상능력을 고양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소모되도록 만든다. 매스미디어의 대량생산 메커니즘은 '추상보다 사실을!'  이라는 보수주의 슬로건을 아예 생리로 갖고 있다.

추상감각과 추상능력은 혁명적 다중이 갖추어야 할 제1의 요건이다. 자본 추상기계는 다중의 추상력을 빼앗으면서 그들에게 사실감각이라는 껍질만을 남겨둔다. 텔레비전은 피상화이다. 텔레비전이 바보상자인 것은 그것이 다중들로부터 추상능력을 박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텔레비전에 습관화된 사람들은 사유할 수 없게 된다. 다중의 대중화는 안방에서 일상적으로 전개된다. 대중은 끊임없이 추상될 뿐 스스로 추상하지는 않는다. 대중에게 추상은 공허로 나타난다. 오직 감각적인 것만이 실제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그러한 감각 자체는 자본 추상기계의 회전판 위에서 전개된다. 추상의 매트릭스, 추상의 큐브를 지각할 수 없는 존재로서의 대중이야말로, 추상을 통한 축적의 가장 좋은 질료이다. 감각의 제국은 자본의 제국의 이면이며 그 필요조건이다.

다중은 추상능력, 추상감각을 요구한다. 그러나 다중의 추상력은 자본의 추상기계를 복제하는 것을 통해 달성될 수 없다. 다중은 가장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 몸으로 만들어야 한다. 추상적 구체성이야말로 다중의 혁명, 다중의 예술, 다중의 과학이 지향해야 할 바이다. 공통체는 추상(공통)의 구체화(체)가 이루어질 정치형태이다. 동시에 그것은 다중의 과학이 지향할 바이고 다중의 에술이 지향할 바이다. 예술작품, 논문, 글은 추상적 구체여야 한다. 추상을 잃을 때 다중은 혁명(의 비전)을 잃으며 몸(네트워크)을 잃을 때 유령에 머문다.

2009/08/27 19:55 2009/08/27 19:55

대안후기근대성

Posted at 2009/08/27 00:35// Posted in 쓰기(skribi)/철학_F
모더니티(근대성)는 지배와 해방의 이중성을 갖는다. 20세기 후반에 적어도 지배 양식으로서의 근대성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난 것이 분명하고 해방의 조건도 따라서 바뀌었다. 우리가 모더니티 속에서 그 대안성, 즉 대안근대성을 찾을 수 있다면 포스트모더니티 속에서 그 대안성, 즉 대안후기근대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안후기근대성은 해방보다 자유를, 민족보다 위성을, 분리보다 혼성을, ... 추구하는 하나의 흐름이다. 그것은 포스트모더니티 속에 있고 그것을 규정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지배양식과는 대항한다.
2009/08/27 00:35 2009/08/27 0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