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성적 정상성은 물론 노동력을 풍부하게 공급할 생식을 촉진하는 일과 연관되었다.(Federici 2004, 85ff.) 그러나 그것도 노동자의 창출과정의 일부였고 추상노동의 불구적 인격화의 일부였다. 노동자의 창출은 쾌락원칙의 현실원칙에의 필수적인 종속을 의미했다. 나아가 그것은, 어떤 사회적 맥락에서도 삶의 일부인 현실원칙에의 종속뿐만 아니라 노동에 기초한 사회와 불가분한 (마르쿠제가 명명했던) 강화된 현실원칙 혹은 “수행원칙”에의 종속을 의미했다. “쾌락원칙은, 그것이 [단순히] 문명의 진보를 방해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지배와 노고를 영속화하는 문명의 진보를 방해하기 때문에 폐위된다.”(Marcuse 1956/1998, 40)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성적 도착 [담론]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그 행동들의 특수한 내용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쾌락을 섹스의 종말이라고, 또 이것이 노동자의 창출과 양립불가능하다고 선언한다는 것이다. “섹슈얼리티를 유용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채택하는 사회에 반하여, 도착들은 섹슈얼리티를 그 자체 목적으로 삼는다. 그것들은 그들 자신을 수행원칙의 지배 외부에 놓으며 그 원칙의 기반에 도전한다.”(Marcuse 1956/1998, 50)
성의 생식으로의 정상화[표준화]는 필연적으로 섹슈얼리티의 성기화를 의미한다. 섹스는 잠재적으로 생식에 이르는 성기접촉으로 정의된다. 섹슈얼리티는, 원래 다형적이고 신체 전체에 확산되어 있었는데 이제 성기들에 집중된다. “신체의 탈성화”가 있다. “리비도는 신체의 일부에 집중되고 신체의 나머지 부분은 노동 도구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해방된다.”(Marcuse 1956/1998, 48)
섹슈얼리티의 성기화는 성적 동질이형론(dimorphism, 同種二形論)으로, 즉 두 개의 성이, 오직 두 개의 성만이 있다는 생각으로 이끈다. 만약 섹슈얼리티가 다형적 쾌감으로, 예컨대 피부 대 피부의 접촉으로 사유되고 (또 향유된다면), 사람들이 두 개의 성으로 나누어지는 것으로 생각할 아무런 이유도 없을 것이다.인간의 신체를 정확히 두 개의 범주로, 더도 덜도 아닌 두 개로 해석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보면 신체의 성적 영역들에 대한 지각을 재생산 활동에 기능적인 영역으로 환원하는 것의 효과이다. 재생산과 무관한 신체 영역들의 성적 반응성은 부정되고 또 금기시된다. 이 ‘탈성화된’ 신체 영역들도 또한 신체의 성적 구분과는 무관한 것으로 된다. ‘두 개의 성’이라는 개념, 하나의 성이 있고 그와 다른 성이 있다는 개념은 그러므로 사회적 규범으로서의 이성애의 효과이다. 근대 이전의 유럽 사회에서 섹슈얼리티는 이성애와 동성애로 명확히 양분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모든 사람은 이성애와 더불어 동성애를 행하는 것으로 가정되었다(아니 오히려 의심되었다). 동성애는 다소간 엄혹하게 박해받거나 처벌되었다. 그렇지만 19세기 이래로 동성애 행위들은 자동적으로, 더 이상 유죄의 동성애 (아니 오히려 ‘남색’) 행위를 범하는 인간은 아니지만, ‘한 사람의 동성애자’, 즉 특수한 인종의 구성원인 어떤 행위자의 동성애적 성질을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담론은 동성애 행위가 처벌될 필요가 있는가 없는가 어떻게 처벌되어야 하는가라는 것에서부터 다른 종으로서의 동성애 그 자체가 박해되어야 하는가 아닌가, 정신과 치료에 맡겨져야 하는가 아닌가, 관용되어야 하는가 아닌가로 이동한다.(Stoetzler 2009, 165-166)이것은, 여성과 남성이 초역사적 범주로서가 아니라 가치, 화폐 혹은 국가와 같은 사회관계의 특유하게 자본주의적인 형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성과 여성(그리고 실제로 동성애와 이성애)는 동일화[정체화]이고 동일성 사회의 측면들이며 추상노동의 수행자인 노동자의 창출 속에 포함되는 불구화의 일부이다. 그것은 맞서 싸워야할 구획이다.
노동은 행위 및 삶-활동의 세계로부터 노동의 추상, 분리이다. 우리의 삶-활동의 이러한 파편화는 우리의 삶의 모든 측면에서의 파편화이다. 섹슈얼리티의 전체로서의 신체로부터의 분리와 그것의 성기로의 집중은 또 역사적으로 노동의 추상으로 부과되었고 노동을 위한 기계로서의 신체의 창출에 근본적으로 기여했다. 그것은 추상 혹은 분리라는 일반적 과정의, 제한, 구획, 동일화의 과정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특수한 지배유형들은 우리에게 우연히 발생하는 무엇도, 그들(남자들, 자본가들 혹은 그 누구든)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무엇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우리의 활동을 통해 그리고 그것이 조직되는 방식을 통해 우리가 창출하는 지배의 유형들이다. 이것이 대인적ad hominem(혹은 여성적인ad mulierem, or 인간적인ad humanum) 비판의 중요성이다. 우리가 ‘우리가 어떻게 다르게 행할 것인가’의 문제를 열어제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을 우리 자신의 행위에로, 우리 자신의 창조력으로 되돌림으로써만이다. 우리가 여성이거나 남성이거나, 동성애자이거나 이성애자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개인적 선택으로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으로서, 여성을 행하고 남성을 행하며 남성성과 여성성을 행하고 동성애와 이성애를 행한다. 이 사회적 실천은 실천의 복잡한 엮어짜임, 추상의 거미줄의 일부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핵심은 우리가 행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살해하고 있는 세계를 창조한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것을 창조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창조하기를 멈출 수도 있을 것이고 그 대신에 다른 무엇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판적으로 읽으면 매우 유익한 책이다. 금융위기 1년, 위기에 이르는 10년, 신자유주의 30년을 카메라가 뒤로 물러나면서 차례로 찍는 방식으로 서술한 책이다. 책의 내용은 읽기를 권유하는 의미에서 생략하고 생각을 전진시키기 위한 한두 가지 비판적 코멘트를, 특히 원인진단과 대안이라는 결정적인 두 지점과 관련하여 달아 두기로 하자. 앞의 게시물에서 내가 그렸던 그림을 한 번 더 이용할 필요가 있다.
첫째 폴은 권력 엘리뜨들의 금융자유화 정책으로 C가 B보다 과도하게 팽창한 것이 버블 폭발의 원인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것은 금융팽창 자체가 D를 B로 끌어들이는 가치화의 노력이었고 이 과정에서 D를 산출하는 바의 삶정치적 생산력을 팽창시키고 이 팽창된 생산력이 A의 통화관계나, B의 가치관계, 그리고 C의 신용관계 등 기존의 생산관계에 포괄, 관리될 수 없게 된 것이 붕괴로 이르는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도외시한다. 잉여가치관계 속에서 신용을 확장하는 것의 한계가 문제가 아닐까? 신용은 잉여가치관계 속에서는 위기와 폭발을 피할 수 없고 오직 공통되기의 관계 속에서만 선순환의 조건을 창출할 수 있는 것이지 않을까? 보편적 무조건적 신용사회로의 이행만이 삶정치적 생산의 팽창된 생산력에 조응할 수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공통도시, 다중의 로두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