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lasta prelego de 'Evoluado de Marksismo'.
*Mezaklasa leciono de franca lingvo.
*denova konflikto inter .... pri ...
*Prefaro de artikolo pri komunismo.
제국에 대한 첫 번째 강의를 듣고 남아있는 기억은 '두 줄'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것은 사실상 그 날 밤 꾼 '특별한 꿈'으로 더욱 명료해지는데, 그것은 마치 '의식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무의식은 이해한다'는 의미로 여겨졌다.
오늘 두 번째 강의를 듣고나니 연결되지는 않지만 조각조각의 생각들이 남아있는 걸 보게 된다. 그것을 개인적인 의문들과 연결하여 두서없이 나열해 본다면 이런 것들이다.
첫 번째는 다중에 대한 의문이다.
제국의 권력과 다중의 저항은 어떻게 분리되는가?
지난 선거에 의해 국회의원이 된 단병호씨와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을 찍은 비정규직 노동자 중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은 누구이고 다중에 속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두 번째는 국가에 대한 개념이 내 안에서 파괴될 가능성을 보게 되는 것인데, 그것은 마치 오래 전에 존 개토의 '학교는 바보다'라는 책을 읽고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말아야겠다'고 결정하게 된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세 번째는 '삶권력'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느낀 건데, 제국에서는 국가의 명령 혹은 당위성이 아니라 '욕망'에 의해서 이끌린다고 했다. 정규직 노동자가 집회에서 비정규직 철폐를 외친다고 해도 그것은 당위적인 차원에서의 행위이고,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을 유지하려는 욕망에 이끌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욕망을 넘어서는 '길'은 무엇인가?
제국과 다중이란 어쩌면, 구체적인 존재들을 가르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순간순간의 현실적인 '결정'에 적용되는 개념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이 글을 올리고 싶은 욕망은 솔직히 별로 없는데, 올려야 할 것 같은 당위성에서 그냥 올립니다. ^^
오늘 강의를 들으면서 기억한 것 혹은 생각한 것.
1. 지식은 상황적이다.
2. 대상화하는 눈은 역사적 산물이다.
3. 과학과 인간주의는 쌍생아다. 과학의 인간적 눈은 주체와 대상을 분리시킨다.
4. 해러웨이는 생물학적 결정론과 사회구성주의를 동시에 극복하려 한다.
5. 가부장주의, 식민주의, 이성애주의, 자본주의라는 네 개의 적.
6. 기독교의 구원주의, 과학의 진보주의를 넘어서기.
7. 기술생명권력은 자신을 통과점, 관문으로 제시한다.
8. 빠른 것이 느린 것을 삼키는 시대, 신세계질서 주식회사.
9. 지동설은 인간과 하늘의 경계를, 다윈은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프로이트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해러웨이는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허물거나 유연하게 한다.
어제 강의 중에 내가 관심을 가장 크게 가진 것은 '과학=자연*사회'라는 공식에 대해서입니다.
나는 이 공식을 '과학=자연(관찰)*과학자공동체*사회적 삶'으로 고치고 싶습니다.
사회가 과학자공동체로 좁게 해석되지 않도록 아예 사회적 삶을 독립적 변수로 설정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사회적 삶도 그 현실적 양태와 잠재적 힘 모두에서 이해되어야 이 공식이 좀더 충분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뒤의 두 변수가 경험세계로 줄일 수 있다면 과학은 자연관찰*경험이라고 해도 좋겠네요.
어쨌건 과학사회학은 협의의 과학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어떤 공간을 열었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베르그송처럼 지성과 기억의 근본적 대비를 사고하는 것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과학의 정치성과 과학자의 정치적 실천은 어떤 관계에 있는지도 좀더 정밀하게 숙고되어야 한다는 느낌입니다. 어느 하나로 다른 것을 폄하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60년대의 비판적 과학사회학의 낭만주의는 어떤 차원을 새로이 연 것인가? 이성에서 정동으로, 현실적인 것에서 잠재적인 것에로, 권력에서 활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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