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be estas unu interesa artikolo(titoliĝi Sudkoreio-Usono Libera Marketa Interkonsento, lingva suvereneco, kaj la loko de reala komuna lingvo), kio kritikas la lingvan imperialismon(en korea lingvo). Sed ŝi konfuzas la problemon de transduko (specife de literaturo) kun la problemo de komuna lingvo. Komuna lingvo estas ne necesa por transduki nacian lingvon. Unuavice komuna lingvo estas necesa por rekta komunikado. Kompreneble komuna lingvo alfrontas la problemo de transduko kiel nacia lingvo. Tamen rekta komunikado ne povas konfuzata kun transduko. Krome ŝia akra kritiko pri lingvo imperiismo subfosiĝas per naciisma kocepto pri ling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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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 언어주권 그리고 참된 공통어의 자리
김시내 / 자유기고가
spriverk@freechal.com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0961
After Babel : 바벨 이후(以後) 혹은 바벨의 언어를 쫓아서…
창세기에 따르면 “지상의 모든 인간이 하나의 언어를 가지고 있었던” 시대가 있었다. 인간들이 도시를 건설하여 천국에 이르는 탑을 쌓기 시작하자 그 교만함에 진노한 하나님은 지상에 내려와 인간들이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언어를 혼란시키더니 마침내 탑을 허물어버리셨다고 한다. 지구화가 일상이 된 오늘날, 나는 종종 다시 세워지고 있는 문명의 바벨탑 앞에 서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영어가 재림한 바벨의 언어처럼 모든 말들의 세계를 성공적으로 통합해가는 중인지는 잘 모르겠다. 허나 경험상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이 새로운 “바벨의 영어”가 소통과 협력의 힘이 아니라 그간 쌓아온 모든 문화적 축성물들을 허물어버리는 신의 불벼락처럼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영어 이외의 언어, 즉 국문 또는 외국어…”
연세대는 대학원학위논문에 관한 내규를 변경했다. 새로운 규정에 따르면, “2006년 2학기 박사과정 신입생부터는 학위논문을 반드시 영어로 작성해야 한다. 영어 이외의 언어, 즉 국문 또는 외국어로 써야 하는 특정한 주제의 경우, 지도교수의 승인을 얻어야만 한다.” 대학원 관계자에게 변경사유를 문의한 결과, 의외로 소박한 답변이 돌아왔다. ‘이미 이공계 박사논문은 대부분 영어로 쓰이고 있다. 인문사회계를 비롯한 다른 영역도 영어로 써야 해외저널에 발표할 수 있지 않은가. 아시다시피, 요즘은 어딜 가나 영어강의나 영어논문에 상당한 인센티브를 준다. 국제적 학자가 되려면 미리부터 준비하는 게 좋을 것이다.’ 요컨대, 세계화의 대세에 발맞춰!? 변경된 규정이 갖는 상징적 의미와 실제적 효과가 그런 소박한 현실주의를 훨씬 뛰어넘으리라는 점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박사는 공식 교육과정의 정점이며 학위논문은 이 과정의 총결산이다. 대입제도의 작은 변화가 고교교실의 풍경을 바꿔놓는 나라에서 고등교육의 1차 언어를 바꾸는 이런 큰 변화는 마치 도미노가 넘어가듯 초중등교육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예컨대, 자식을 학자나 박사급 전문가로 키우려는 부모들은 이제 모든 교육이 영어로 이뤄지도록 배려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사교육비로 충당하자니 너무 부담스럽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공교육의 변화다. 교과서는 물론 초중등 교육과정 전체가 영어로 이뤄지도록 하라고 교육부에 압력을 넣자. 부득이 영어 이외의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국어과목만 예외로 하고. 그럼 교사들은? 신임교원을 뽑을 때 영어로 교육시킬 수 있는지 심사해서 뽑으면 된다? 만약 공교육의 영어화가 실현되지 않고 사교육비도 감당할 수 없는 자들은? 박사학위의 꿈을 일찌감치 접는 편이 낫다.
원본과 번역본 사이에서
물론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박사학위는 소수의 사람들만 취득한다. 또 학위논문이 대학원생활의 전부인 것도 아니지 않는가. 사태를 너무 과장하지 말자.’ 과연 그럴까? 가령 이런 법률이 시행된다고 해보자. ‘이번 회기부터 모든 국회의원은 국정감사 시 반드시 영어를 사용해야 하며, 부득이 국어를 써야할 경우 의장의 승인을 받도록 한다.’ 이 법률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국회의원은 인구의 극소수다. 또 국정감사가 의정활동의 전부는 아니지 않는가. 침소봉대하지 말라’고 반박할 수 있을까. ‘요즘은 국내문제와 대외문제가 죄다 얽혀있어 사실상 구분이 불가능할 지경이다. 이런 세계화의 시대에 의정활동을 제대로 하려면 영어에 능통해야 한다. 그래야 나라 안팎에서 국민의 이해를 제대로 대변할 수 있지 않겠나.’라고 입법 사유를 대도 좋을까. 판단을 돕기 위해 실례를 하나 들어보겠다.
지난 9월 5일, 언론사들은 “한·미FTA 협상 타결 시 합의문을 영문본으로만 인정하겠으며 협정문의 국문본과 영문본이 불일치할 경우 영문본이 우선한다”는 미국 측의 입장을 보도했다. 물론 한국정부는 “양 협정문은 모두 정본으로 그 효력이 동등하며, 영문본이 우선한다는 내용은 절대 수용할 수 없다”며 반대했다. 보도가 나가자 국회에서는 이 문제를 놓고 웃지 못할 해프닝이 하나 벌어진다. 민주노동당의 심상정 의원이 “그 효력이 영문본과 동등하다”고 정부가 주장하고 있는 국문본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폭로했던 것이다. 심 의원의 주장에 따르면, 지금까지 FTA 한국 측 통상교섭본부는 관련문서를 한글로 만든 적이 없으며 협정문 초안을 비롯한 모든 문서가 해당부처에서부터 영문으로만 작성된다고 한다. 결국 한·미FTA 협상 타결 시, 우리 손에 들려있을 합의문 한글본은 “영문본의 번역”이란 얘기다. 협상이 영어로 이뤄지니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닐까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합의문 자구 하나 때문에 엄청난 경제적 손실이나 불평등이 초래될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렇게 대충 넘길 문제는 분명 아니다. “양쪽 모두가 정본”이라는 주장을 하려면 협상과정 내내 영어와 한국어가 병행되어야 하며 통역과 번역을 둘러싼 마찰과 조율은 협상의 주요 부분이 되었어야 한다. 모든 협상을 영어로 진행해 합의해 놓고 나중에 번역본을 들고 와 다른 소릴 한다면 누가 그런 말을 들어주겠는가. 원본과 번역본이 불일치할 경우 당연히 원본을 정본으로 삼아 우선권을 주는 것이 상식 아닌가.
보다시피, 협상대표단이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필요에 따른) 요청과 그들이 영어로 협상을 진행한다, 즉 1차 언어를 영어로 삼는다는 것은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물론 한국 측 협상대표단이 뛰어난 영어실력으로 국익을 잘 대변해 좋은 협상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협상언어로서의 ‘영어실력’과 협상결과로서의 ‘국익’만을 고려한다면, 그 자리에 꼭 한국 사람이 앉아있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한국 측 대표로 (협상결과에 따른 지분을 보장하고) 미국인 변호사들을 사서 앉혀도 아무 차이가 없지 않은가. 대표(representative)가 아니라 대행자(agency)로 족하지 않은가. 모든 협상과정이 영어를 1차 언어로 삼아서 이뤄진다면, 극단적으로 말해 한국은 협상과정에 참여하지도, 대표를 보내지도 않았던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에겐 협상과정은 없고, (협상의) 결과만이 통보될 뿐이다. 좋은 소식이든 나쁜 소식이든.
한·미FTA와 제3의 언어
이 해프닝은 한·미FTA 협상의 본질적 문제가 무엇인지 숙고하게끔 해준다. 영어로 이뤄지는 협상이 애초부터 불평등하고 종속적이라는 것은 단박에 드러나는 표면의 사실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렇다. 영어와 한국어가 서로 다른 것이어서 일치할 수 없다면, 영어의 한국어로의 번역이나 한국어의 영어로의 번역은 궁극적 불가능성 위에서 씨름하는 일이며 1차 언어인 원본과 비교할 때 번역본은 언제나 미완과 종속의 상태를 벗어날 길이 없다(쌍방에서 모두 다). 그렇지만, 두말할 것도 없이, 두 언어 사이의 이런 근본적 차이는 번역의 존재 가능성의 조건이기도 하다. 만약 이런 불일치를 불행한 사태로 간주해 차이를 종식시키고자 한다면, 그러면서도 양자 모두를 존속시키고자 한다면, 부득불 ‘제3의 언어’를 도입해야 한다(지금은 영어가 1차 언어이자 공통어로서 이 제3의 언어의 자리에 놓여있다).
한데 이 제3의 언어―영어와 한국어를 동등하고 공평하게 대우하는 중재자이자 둘 모두의 이상적 번역어―가 참된 공통어이고자 한다면 그것은 지상의 누구도 사용하지 않는 언어, 어떤 형태로도 현존하지 않는 언어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제3언어와 한국어·영어 사이에서 앞서 영어와 한국어 사이에서 일어난 것과 동일한 번역, 대조, 불일치 그리고 우선권 다툼이 반복 재연될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제3의 언어는 제3국의 언어도,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새 언어(가령 에스페란토)도 아니다. 벤야민은 <번역가의 과제>에서 이 제3의 (비)언어를 “모든 언어에 숨겨진 보다 높은 언어”, “총체성의 언어”라고 표현하는데, “아담의 언어”라 불러볼 수도 있을 이 바벨의 언어는 서로 다른 두 언어 바깥에 존재하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상이한 언어로 병기된 행간 사이의 번역형식(Interlinearversion)”으로 존재한다. 가라타니 고진이 <트랜스크리틱>에서 칸트와 마르크스를 연결시키며, 유물론이란 시차(parallax view) 사이에서 초월론적 형식을 띠고 나타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독립적인 두 언어, 동등한 두 원본-번역본, 나아가 자주적인 두 주권 사이의 참된 관계란 마치 시소처럼 오르락내리락 하는 상호 비대칭성의 관계이며, 참된 공통어인 제3의 (비)언어를 통한 소통이란 바로 이 관계의 운동, 차이의 율동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그 둘이 궁극적인 합의, 최종적인 일치점, 완전한 평행상태에 도달했다고 선언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운동의 정지란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집어삼킨 “통합” 아닐까를 의심해야 한다. 그것은 고정된 비대칭성, 고착된 위계질서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맥락에서 합의를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진행 중인 현재의 협상은 협상이 아니라 포성 없는 전쟁, 아니 차라리 전쟁 이후 승자와 패자 사이의 배상회담에 가까운 것이며 협상결과는 일방에 의한 타방의 ‘포섭’이 될 것 같다. FTA협상 타결이 곧장 강대국 미국의 승리와 한국의 패배를 뜻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 싸움에서 승리하여 주인의 지위에 올라서는 것은, 정확히 말해서 미국인이 아니라 협상의 공통어, 부재하는 제3언어를 대신했던 “바벨의 영어”이다. 왜 그런 소릴 하는가?
참여와 실천이 빠진 실용주의의 결과들
먼저 앞서의 가상법안에서처럼 의정활동이 영어로 이루어지는 국회나, 논문과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이 영어로 행해지는 대학원이 어떤 의미인지 따져보자. 국감을, 감사결과의 이익만 따져, 영어로 진행해야 한다면 우리에게는 대표가 필요치 않고 유능한 미국계 로펌이면 족하거나, 더 낫다. 모든 세미나가 영어로 진행되고 논문도 영어로만 나온다면, 그런 대학원은 운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대학원이 한국인을 위한 영어논문작성 연습교실이 아니라면, 도대체 거기 앉아있는 게 한국인이 아니라 전부 미국인이라 한들, 우리에게 어떤 차이가 있단 말인가. 내가 진학할 대학원이 서울에 있든 뉴욕에 있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차라리 후자가 더 나으면 나았지. 결과물의 효용성만을 계산한다면, 대학원을 없애고 차라리 해외 1급 학술저널 번역집단이나 꾸리는 게 훨씬 이득이다. 하여 두 경우가 현실화되었을 때, 우리에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다.
이제 한국에서는 정치과정이 사라지고 (정치활동의) 결과만이 존재한다! 학문활동은 사라지고 (연구)결과만이 존재한다! 그렇게 참여의 과정으로서의 정치와 실천의 과정으로서의 학문활동이 사라지면 남는 것은 불가해한 사실들의 더미뿐이다. 그처럼 접근할 수 없는 곳으로부터 뚝 떨어진 사실들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본질상 운명의 성격을 띠게 된다. 무조건 따라야하는 명령이거나 피할 길 없는 불벼락처럼. 그 결과란 이런 것이다. 정치적 토론이 있어야할 자리엔 일방적 비난과 선동과 음모론만 창궐하고 학문적 연구와 이성적 비판이 필요한 곳엔 망상에 사로잡힌 신비주의적 해석을 일삼는 번역집단들만 번창한다. 허, 그런데, 이거 어째 이미 익숙한 광경이 아닌가. 그렇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대표가 아니라 대행자들(그것도 표가 아니라 돈을 주는 자들에게 고용된)로 넘쳐나는 국회를 가져왔고, 비자격자에겐 접근이 봉쇄된 전문어들로 자기들끼리만 소통하고 싸워대는 학자들을 키워왔던 것이다. 문제가 꼭 영어에만 있지도 않고, 우리가 FTA협상을 저지함으로써 지키려는 소위 경제주권이 현재 우리의 수중에 있는 것도 아니다. 또 스스로 실천하고 행사하지 않을 때 정치적 주권이란 어디에서도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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