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http://www.wolganmisool.com/199810/article_04.htm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감각의 논리》(하태환 옮김, 민음사, 1995) 원제는 《Francis
Bacon:Logique de la sensation》이다. 이 책은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가 해박한 철학·예술·문학적 지식과 풍부한 감수성으로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을 갖고 감각과 논리의 문제를 분석한 명저이다. 또한 이 책은 어떠한 운동이나 유파에도 속하지 않았으며, 유화 물감과 붓을
표현 언어로써 사용한 금세기 마지막 화가 베이컨에 대한 하나의 작가론이며 미술사의 명쾌한 종합이다.
풍부한 내용을 짧은 지면에 소개하기는 불가능하므로 핵심이 되는 내용 중 하나를 자유롭게 인용하고자 한다.
모든 예술 가운데 회화만이 ‘히스테리컬하게’ 자기 자신의 대재난을 통합한다. 화가는 직접 대재난을 통과하며 혼란을 껴안고 그로부터 빠져나오려고 한다. 화가들의 그것이 서로 다른 이유는 이 혼란을 껴안는 방식과, 질서와 혼돈의 관계를 평가하는 방식의 차이 때문이다. 현대 회화에는 세 개의 길이 있다. 기하학적 추상은 심연, 혹은 혼돈과 손의 존재를 최소한으로 축소시키는 길이다. 그것은 일종의 금욕주의와 정신적인 구원을 제안한다. 그것은 형태적인 대비들에 따라 상징적인 코드를 만들어 낸다. 코드란 두뇌적이어서 감각이나 추락의 본질적인 현실이 결여되어 있다.
두 번째 길은 흔히 추상표현주의 또는 앵포르멜이라고 하는 심연 혹은 혼돈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이다. 이 경우, 무한을 나타내는 것은 내적인 세계관이 아니라 화폭의 한 끝에서 다른 끝으로 전면을 덮는 확장된 손의 힘이다. 이 방법은 낭만적으로 대재난의 광경을 그려 보여주는 대신 회화 그 자체를 가지고 미증유의 대재난을 만들어 낸다.
베이컨은 기하학적 추상의 시각적인 길도 아니고, 액션 페인팅의 손의 극대화도 아닌 제3의 길을 따른다. 지적·개념적·추상적 코드와 혼란을 동시에 피한다. 베이컨은 ‘단순히 감각적인 것’, 즉 격렬한 감각을 유발시킨 일차적 형상을 제거하기를 원한다. 격렬한 수단들은 고삐가 풀리지 말아야 하며 필수적인 대재난은 전체를 다 삼키지 말아야 한다. 돌발 흔적은 사실의 가능성이지 사실 그 자체가 아니다. 형상은 돌발 흔적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하고 감각을 명확함과 엄밀함으로 데리고 가야 한다.
베이컨이 바라는 회화는 언뜻 보기와는 달리 ‘내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이미지로부터 탈피하는 것이다. 그가 여러 대담에서 항상 ‘감각의 범주들’, ‘감각의 층위들’, ‘감각의 영역들’ 또는 ‘움직이는 일련의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이러한 방향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감각은 일시적이고 혼동스럽다. 감각은 지속적이지 못하고 명쾌하지도 않다. 하지만 뼈대는 더욱더 불충분하다. 뼈대는 추상적이다. 기하학을 구체적으로 혹은 느껴지는 것으로 만들고 동시에 감각에 지속과 명확함을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회화는 자신의 심층에 머무르며 독자적인 방법으로 순수한 논리의 문제를 발견한다. 순수한 논리란 사실의 가능성으로부터 사실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림은 회화적 사실이라고 부를 아주 특이한 어떤 사실을 현재로 만들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감각이란 쉬운 것, 이미 되어진 것, 상투적인 것의 반대일 뿐 아니라 ‘피상적으로 감각적인 것’이나 자발적인 것과도 반대이다. 화가는 감각들의 원초적 통일성을 보여주고 복수(複數) 감각을 가진 형상을 시각적으로 나타내야 한다.
베이컨이 자신을 두뇌적으로는 비관주의자이지만 신경적으로는 낙관주의자라고 선언할 때, 다시 말해 생명만을 믿는 낙관주의자라고 선언할 때 합리적이거나 두뇌적이 아닌 세잔이 말했던 ‘감각의 논리’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강영주는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파리 1대학 조형미술학과에서 예술학 석사·박사 학위 취득. 박사 논문은 <폴 클레의 작품에서 기호의 문제>. 현재 서울대·단국대·경원대 강사.
http://brainew.com/e/ezboard.cgi/db=hierarchyTheory&action=read&dbf=200112200002
[계층구조론] 현상과 본질 16 - 감각의 본질과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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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http://kr.blog.yahoo.com/artnstudy/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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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기관 없는
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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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제 (철학자) |
“감각이란
어떤 강렬한 현실성만을 가지고 있는데, 이 현실성은 더 이상 그 속에서 재현적인 여건들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동소적(同素的)인 다양성을
규정한다. 감각은 진동이다. 우리는 알이 바로 유기적으로 재현되기 ‘이전에’ 이러한 상태에 있는 몸을 제시함을 안다. 알은 축들, 벡터들,
비율들, 지대들, 역학적인 움직임, 역동적인 경향들을 제시하는데, 이에 비하면 형태들이란 우발적이고 보조적일 따름이다. '입도 없고, 혀도 없고, 이도 없다. 후두도 식도도 없으며 위도 없다. 배도 없고 항문도 없다.'
생명이란 도대체 유기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유기체는 생명이 아니라 생명을 가두기 때문이다. 몸은 전적으로 살아있다. 그러나 유기적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감각이 유기체를 관통하여 몸에 이르면, 감각은 과도하고 발작적인 모습을 띤다. 그때 감각은 유기적 활동의 경계들을 잘라버린다. 살이 충만해지면서 감각은 직접 신경의 파장이나 생생한 흥분 위에 직접 실린다.”
『감각의 논리』(하태환 옮김, 민음사)를 통해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해석하면서 질 들뢰즈(Gille Deleuze, 1925-1995)가 감각에 대해 무서운 기세로 일갈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조그마한 바늘로 피부를 찌르면 따끔하면서 국소적으로 감각적인 흥분이 일지요. 만약 송곳을 푹 찌르면 어떻게 될까요? 온 몸이 놀라면서 감각적인 흥분이 전신으로 급하게 퍼질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칼이나 창으로 푹 찌르면 어떻게 될까요? 감각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감각적인 흥분이 너무나도 극심하게 그리고 너무나도 급격하게 온 몸을 송두리째 뒤틀리게 하면서 발작하게 만들 것입니다. 들뢰즈가 노리고 있는 감각이 바로 이런 극단적인 감각입니다. 그런 감각적인 흥분이 온몸을 가로지른다면, 아! 그때 감각과 몸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요? 구분이 될까요?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다. 몸과 감각, 감각과 몸이 하나로 덩이지면서 몸이 감각한다고도 말할 수 없고, 차라리 몸은 감각 덩어리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의 몸을 들뢰즈는 전혀 유기적이기 않은 ‘기관 없는 몸’(le corps sans organes)이라 합니다. 온통 뜨거운 감각의 파장으로 넘쳐흐르는 감각 덩어리로서의 몸입니다.
우리의 삶은 항상 어느 때고 이러한 강렬한 몸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곧 예술적인 본능이 우리의 몸 즉 우리의 삶에서 바탕을 이루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러한 몸을 느낄 때, 그러한 몸이 저기 우주에 넘쳐나는 모든 사물들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낄 때, 그래서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이 감각 덩어리인 한 몸이 되어 전 우주적인 감각의 떨림으로 바뀔 때, 그때야말로 근원적인 예술과 시가 태동하는 시점인 것입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들이 그러한 지경에서 열려나온다고 들뢰즈는 말합니다. 그렇다면, 아! 우리는?
3. http://www.foruma.co.kr/faFreeBoard/View.asp?fNum=978&page=115
진중권의 감각의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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